신대원 3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3학기

제목초대교회사2022-07-13 16:23
작성자 Level 10

초대교회사

차례

1.서론

2.본론 

1) 에비온파 

2) 영지주의  

 (1)이원론  

 (2)구원론  

 (3)창조주 

 (4)가현설  

 (5)인간관 

 (6)부활과 최후심판의 부정 

 (7)비밀전통  

3)마르시온주의 

4)몬타누스주의  

3.결론  

참고도서 

 

1. 서론

복음이 이 땅 위에 전파되어진 이래로 기독교는 각종의 수많은 이단과의 사도들은 ‘카톨릭’ 교회(혹은 ‘보편적’ 교회 - The Old Catholic Church)로부터 이탈한 종파를 이단이라 불렀다(벧후 2:1, 갈 5:20, 고전 11:19 등 참조). 라틴 교부들도 heresies 라고 하였으며, 이레니우스의 저작표제도 그렇게 되어 있다. 

싸움 속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 초기의 유대교적 이단 사상에서부터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떠들고 있는 사이비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거짓 논리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오해 혹은 변질시키려는 적대 행위가 끊이질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이렇게 많은 각종 이단들의 방해와 적대 행위가 끊이질 않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볼 때 크게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력과 권위를 가지고 이 땅의 모든 족속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마 28 : 18 - 20 참조.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 무지, 불순종 등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변질시킨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속에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벧전 5 : 8 - 9 참조.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오늘날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 이단 사상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뿌리가 고대 교회 시대의 이단 사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갖가지 이단에 대응하는 교회의 대책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 뿌리로 돌아가 고대 교회는 어떻게 정통성을 지켜 왔는가를 알아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고대 교회에 나타난 反기독교적 (유대적 기독교인 에비온주의,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움직임과 공격으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속사도 교부들 시기에는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폴리캅등은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많은 서신들을 통해 바른 대응책을 일러주었고 그 시대의 변증가들은 철학적, 사색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했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은 反이단 신학으로서 이단 사상에 대응하며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키프리안의 교회론은 제도적 정통성 수호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삼위일체 논쟁을 통하여 기본적인 신학의 완성과 어거스틴의 도나투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수많은 도전 속에서 결국 흔들림 없는 교회의 형태를 갖추고 신앙을 지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의 교회의 이단에 대한 대응을 통해 오늘의 다양한 문제 속에서 어떤 기본적 기준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아는 게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단들에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단들의 사상을 먼저 아는 게 순서일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쓰고자 하는 이 글의 논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2. 본론 

고대교회의 이단 사상들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는 신앙의 핵심이 되는 결정적인 부분들을 다양하게 해석 함으로서 신앙 그 자체까지도 위험스럽게 만드는 이단적인 요소들과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대 교회 이방 개종자들은 수없이 많은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따라서 다양한 사상을 가진 신앙인이 생겼으며 이들 가운데는 상당히 많은 수가 모순을 가진 이론을 펼침으로 정통 기독교 신앙을 혼란스럽게 했다. 잘못된 교리상의 다양성은 이미 신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 것을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요한서신들과 베드로 전서등에서 기독교인들인 이러한 잘못된 교리들과 어떻게 투쟁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무리들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그후 저스틴이 거짓 교사라고 간주했던 사람들을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2세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변증신학자들이 이단들을 대적하여 글을 썼다. 특히 2세기 후반부터는 이단 교리들이 너무나도 널리 퍼졌기 때문에 교회로 하여금 광범위하게 대응책을 펴게 했는 데 여기서 교회의 대응들을 알아보기에 앞서 이들이 공격하며 싸웠던 이단사상에 대해 알아보자. 고대교회의 이단적 종파운동을 살펴봄에 있어서 그들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주된 근원으로부터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남동/역 기독교 교리사. J . L Neve), (서을: 대한 기독교서회, 1991) P. 94.

즉 첫째는 기독교밖에 있던 것으로서 유대교와 이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것이였으며, 둘째는 기독교 자체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종파로 구분할 수 있다. 즉 (1)본질적으로 유대교에 근원을 둔 유대주의적 기독교, (2)이교 계통에서 유래한 노스틱주의, (3)이교와 기독교에 반반씩 근원을 둔 마르시온, (4)주로 기독교에 근원을 둔 몬타누스주의 등이 있다. 

 

1) 에비온파

원시 기독교가 직면했던 최초의 교리적 문제는 유대교와의 관계였다. 이단적, 유대주의적인 에비온파가 기독교와 상반되는 원리는 민족주의와 율법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횐네케 (Hoennke) 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의 특징을 다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1) 바울의 세계적 전도, 율법을 초월한 복음과는 반대되는 것, (2) 오직 유대교의 중개를 통해서만 온전히 구원이 확보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더불어 유대주적, 민족주의의 결합이 유지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 속에서 에비온파는 이단적 기독론을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단순히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처녀 탄생을 부인하였으며 기묘하게도 여성으로 생각되었던 성령이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에 처음으로 그에게 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명은 예언자나 가르치는 자의 사명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러한 사명에 의해서 예수는 기적을 행했다고 보다 더 엄격한 교훈으로 율법을 더 부연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에비온 주의자들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있다. 후자는 현 세상을 다스리지만 전자는 장차 올 세상을 통치한다. 한편 선의 원리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차례 성육신이다. 그러나 아담 이후 계속해서 선의 선지자가 성육신 할 때마다 악의 원리도 또한 상대역으로 따라 다녔다. 가인, 이스라엘, 세례요한 등은 악의 원리의 현현으로 또한 여성 원리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상 체계에서 볼 때 예수는 남성 원리의 선지자이며 무엇보다도 뛰어난 선의 원리이다. 이것을 떠나서 보면 예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기 위해서 선택한 인간에 불과하다. Justo. L. Gonzales A History of Christain Thought.. 이형기, 차종순/역 ‘기독교 사상사 I’ (서울; 대한 예수교 총회 출판국. 1989) P. 156.

이러한 사상의 유대교적 기독교인 에비온파는 엣세네파 유태교의 한 변형이라고 보며 다만 예수를 그 신학적 체계 내에 인정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에비온주의는 널리 퍼지지는 못했고 교회의 구성원 중 이방인들이 많아지고 유대인이 줄어들면서 자연히 소멸된 듯 했다. 그러나 이 사상이 고대 교회에게 큰 도전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2) 영지주의 

특히 2세기와 3세기에 있어서 교회 주변에서 활동하던 가장 영향력 있던 세력중의 하나가 영지주의였다. 이것은 같은 사상을 가졌으면서도 조직이 없던 소종파 혹은 학파를 총괄하여 지칭하는 이름이다. 영지주의는 건전한 사도적 가르침을 이교 철학과 뒤섞은 것이거나 심지어는 점성술과 희랍의 밀의 종교까지 뒤섞어 놓은 결과로 생긴 탈선적 이단이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8장에 언급된 시몬(Simon Magnus)이 그 이단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J. N. D. Kelly, ‘고대 기독교 교리사’ 김광식/역 (서울:대한 기독교 문학 연구소 출판사 1980) P. 33.

이 사상이 최대의 영향력을 가진 기간은 A.D 160년 사이였으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는 역사적 그리스도 신앙을 뒤엎을 만큼 위협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회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바울의 투쟁이 있은 후로 가장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강근환 외 3인/역 ‘세계 기독 교회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0) P.49.

이 사상이 기독교회에 위협적이고 심지어 기독교에 혼합되고 나가서 뿌리를 흔들 정도로 된 것은 초대교회의 상황이 기독교 정통을 교리적으로 확립시키지 못하였고 조직 면에서도 허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 위기를 극복하였고 더 나아가 치밀한 조직과 기독교 정통의 확립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영지주의의 일반적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원론(二元論) J . L Neve. op cit P. 99.

: 노스틱주의의 이원론은 조로아스터 종교의 영향하에서 형성된 시리아 사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페르시아의 이원론은 신화적인 것이었으며 두 가지의 상반되는 원리 즉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스틱주의에 있어서는 이러한 빛과 어두움의 신화적 이원론이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발전되었다. 즉 악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물질의 세계는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는 정신의 세계와는 태초부터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에서 정신적 원리 가운데 일부가 물질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계와 인간이 시작되었으며 죄와 고통이 생기게 된 것이다.

2) 구원론(救援論) 김황중 ‘초대 교회에 있어서 기독교 정통 확립 과정에 대한 연구’ (석사논문 : 연세대 1991).P. 7-8.

: 기독교는 ‘신앙’ 이 구원을 얻는 방도이나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지식이 구원을 얻는 방편이었다. 그들의 지식은 정신적 활동의 이성적 지식이 아니라 신비한 영혼의 광명에 의해서 주어진 ‘초자연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신적인 일에 대해서 일반 신도들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였다. 이러한 신비사상은 대중적 신조를 가지고 있는 당시의 기독교보다 더 심오한 것처럼 보였다.

3) 창조주(創造主) J . L Neve. op cit P.100.

: 신들의 계보에서 가장 마지막이 되는 것은 창조의 신 혹은 데미우르지(Demiurge) 였다. 그는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의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되었으며 일반적으로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 되었다. 그는 비록 전적으로 악하고 적대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그러나 비교적 열등하고 적대적인 존재 - 즉 맹목적 지성이었으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의식 중에 세계와 인간을 있게 만든 존재였다. 그러한 창조신은 악의를 완전히 초월하지 못했으며 일종의 천사와 같은 존재라고 간주 되었다. 

4) 가현설(Docetism) 탁명환. ‘기독교 이단 연구’ (서울:국제 종교 문제 연구소 1986) P.22.

: 영지주의는 성육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서 물질은 불결하기 때문에 신성이 물질에 속하는 육을 취할 수 없고 그리고 또 취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타락이라고 주장한다. 절대적인 존재는 유한한 상대적인 존재와 결합할 수 없으며 또 타락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불리어진 심오한 영적인 인간에게 일시적으로 깃들었다가 떠난 것이라 주장하며 예수가 탄생할 때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잠시 깃들었다가 십자가 처형 직전에 분리되고 떠나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5) 인간관(人間觀) W. Walker op cit P.51

: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이 가능한 ‘영적’ 인간과 사상의 전수가 불가능한 ‘물질적’ 인간으로 인간을 구분하였다. 후기 영지주의 발렌티누스(Valentinus) 학파는 이에 한 부류를 첨가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부류인 ‘영적’ 인간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구원이 가능한 ‘정신적’(Psychical) 인간, 구원의 가망이 없는 ‘물질적’ 인간등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 

6) 부활과 최후 심판의 부정 J. L. Neve op. cit . P. 102.

: 노스틱 사상에 있어서는 물질을 본래부터 악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부활이 용납될 여지가 없었으며 또 최후의 어떠한 심판도 있을 수 없었다. 노스틱주의는 가르치기를 해탈한 영혼은 단순히 그것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모든 신비적 의식을 다시 행하게 되며 결국에는 충만한 신적 존재 속으로 다시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노스틱주의는 개체의 인격적 불멸에 대한 소망을 주장하지 않았다.

7) 비밀전통 :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조물주(Demure)에 얽매인 인간의 육적본질의 구원을 위해 Pleroma 세계에서 오셔서 구원의 지식을 권했고 그 구원의 지식이란 조물주의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신비스런 지식이며 보이지 않는 위대한 최고신에 관한 지식이라고 했다. 이 지식이 완전한 구원이라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이 완전한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제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비밀을 말씀 하셨으며 이 비밀의 계시는 베드로와 바울과 도마 등을 거쳐 자기들에게 전해 졌다고 하며 이 비밀 전통은 일반적인 육적인 신자들에게는 감춰진 것이라고 했다. 

 

3) 마르시온주의

마르시온(Marcion) 은 소아시아 북쪽 지방인 시노페(Sinope)에서 출생하여 AD 140년경 쉬프스리더(Schiffsreeder) 의 초청을 받고 로마로 건너갔다. 거기서 로마 교회에 막대한 헌금을 하고 정착하여 세력을 부식하러 했으나 AD 144년경에 이단신앙으로 파문 당했다. 탁명환 op cit. P.28.

로마에서 그는 크레도(Credo)라는 사람의 영지주의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이레니우스(Irenaeus)에 따르면 크레도의 으뜸되는 가르침은 다음의 교리였다.

“ 율법과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선포된 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전자의 하나님은 알려졌으며 후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분이 의로우신 반면 다른 한 분은 자비로우시다.”

마르시온의 신학은 영지주의와 동일한 파생적 의미의 이론이다. 이 물질적 세상에서는 율법과 공의가 통치한다. 이러한 힘들에 대항해서 은총을 기독교 복음이란 ‘전혀 다른 분’ 혹은 ‘아주 생소한 하나님’을 수식하는 말이며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뜻한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유태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며 피의 제사를 요구하며, 그 백성을 전쟁터로 내 보내며 전 주민을 학살하라고 명령하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보복적인 하나님 위에 전혀 다른 ‘알지 못하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다. J. L Gonzales op cit P.173.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하나님과 다르며 외계로부터 이 땅에 오신 분임에 틀림이 없으시다. 따라서 율법적이며 무자비한 진노의 하나님이 기록되어 있는 구약 성경은 성경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제외시키고 신약 성경 가운데서도 바울의 서신 10개와 누가 복음서를 개편해서 전혀 새로운 성경의 묶음을 만들어 냈는 데 이것을 가리켜서 마르시온의 정경(Marcionite Canon) 라고 부른다. 차종순 ‘교회사’. ‘신학연구도서 시리즈5‘. (서울;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교육국 1992) P.65.

그는 율법을 혐오하는 입장에서 기성 교회를 배격하였다고 볼 때에 그의 주장에는 율법적인 요소가 없고 자비의 하나님의 복음만 있으므로 인하여 무 율법의 복음주의에 치우쳐 버림으로 공의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마르시온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기독론에 있다. 그는 예수에 대하여 몸이 물질이 아니었고 물질을 입은 것 같이 보였고, 그는 직접 하늘로부터 오셨으며 인간 역사나, 인간 부모를 두지 않았다고 생각함으로 그리스도가 ‘참 인간’ 이었음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주장한다. 그리고 물질 세계는 모두가 악하다고 봄으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 肉食이나 性交는 창조신의 손에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4) 몬타누스주의

 

몬타니즘(Montanism) 이라고 하는 운동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상 기독교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교회의 신앙 그대로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 접에서 몬타니즘은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몬타누스의 잘못된 이해 때문이었다. 몬타누스는 그를 통하여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선지자 몬타누스 자신과 그를 돕는 두 여인을 통하여 성령은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페푸자(Pepuza) 라는 도시 근처에 서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일에서 떠나 페푸자로 가서 종말을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Paul. Tillich ‘그리스도교 사상사’ 송기득/역 (서울;한국 신학연구소 1983) P.71.

새롭게 폭발한 예언자적 열정과 결합되어 형성된 성령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사상과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 등이 몬타니즘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 운동은 그리스도교를 규칙과 같은 것에 고정화 시킨 데 대한 영(the spirit) 의 반동이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아시아 감독들은 AD160년 직후에 일차 또는 그 이상의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공회(Symod) 였다. 이 공회에서 몬타누스는 정죄 되었다. 

이상과 같이 네 부류의 이단 사상들을 살펴 보았으나 이 외에도 많은 유사한 이단 사상들이 끊임없이 일어남으로 교회는 이에 대처하여 다방면으로 대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결론

 

지금까지 고대 교회에 나타난 기독교 정통 수호의 방법으로서 먼저 이단 사상들을 알아 보았다. 물론 기독교를 지키고 끝까지 인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섭리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달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 신앙의 뿌리를 더듬어 볼 때 거기에는 수많은 인간의 오류와 시행착오 속에서 진리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지켜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어렵게 얻은 신앙의 방법을 우리는 더 깊이 연구하고 다듬어서 오늘의 우리 신학이 갈 길의 지표로 삼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고대 교회에 있어서 신앙의 선구자들이 이단에 대응하여 기독교 정통을 지켜 온 방법을 열거하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마귀의 세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성경이다. 비록 속사도 교부시대에는 성경보다 오히려 사도적 전통에 더 의지한 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성경의 권위를 격하시킨 때문이 아니요, 아직 완전한 정경의 기준이 없었으므로 성경의 권위를 앞장 세우지 못했을 뿐 사실은 이단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성경으로 돌아가는 노력이었다. 교회는 이단들의 ‘비밀전통’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성경에만 권위를 두며 기독교의 정통을 수호해 왔던 것이다.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정통성 수호의 근본이다. 

둘째는 사도적 전승이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통로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계시를 받는 데서 들리는 신비주의적 가르침이 아니요 교회를 통하여 감독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내려오는 사도적 계승인 것이다. 이것은 이레니우스에게서 보듯이 율법주의나 제도주의적 전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를 통한 예수의 바른 가르침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난 독단적 선민의식이나 기도원 중심의 신비사상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감독중심의 교회 체제를 통하여 이단에 대응했다. 고대 교회에 있어서 감독은 이단에 대한 방패요 유용한 무기였다. 또한 감독을 중심으로 한 군주적 직제로서 이단이 세력을 얻을 때마다 그들의 결속은 더욱 강하고 교회직제가 확립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깊이 뉘우쳐야 할 부분에 대한 교훈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바로 많은 개 교회 내부의 분열의 문제인 것이다. 이단이 난무할수록 교회는 더욱 결속을 다져야 한다. 

넷째는 교회의 일치로서 기독교 정통의 수호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리보다는 사랑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단들의 세력 앞에서 우리는 수많은 종파로 갈라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켜나갈 의무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는 신앙규범의 확립으로 정통성을 지켜 왔다. 이단이 난무할 때 신비한 사상으로 유혹받기 쉬운 교인들은 많은 신앙사상의 가르침 보다는 진리의 핵심을 요약해서 가르침 받음으로 이단을 물리쳤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에 부딪힐 때도 교회는 신조를 제정하여 신앙을 요약한 것을 볼 수 있다. 

여섯째는 좀 특수한 대응으로서 신학의 발전을 말 할 수 있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이단 사상의 전개로 인하여 교회/역시 논리적인 방법으로 제반 이단 사상을 물리쳤다. 그러나 여기서 오리겐처럼 비약적인 사상의 전개로 문제점을 드러내지 않은바 아니지만 그러나 신앙규범의 테두리로서 핵심 신앙의 담장의/역할로서 정통수호에 이바지 했다.

이상으로 고대 교회의 이단 사상들을 알아 봄으로서 고대교회의 정통성 수호에 대한 하나의 방편임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단사상들을 하나의 지식으로 치부해 버린다거나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 이단사상들을 연구한다는 것은 퇴색해가는 낙엽과 같은 하나의 학문으로 끝나버리기 쉽다.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라면 이런 역사적 고찰들이 현실에 바로 적용되도록 실제적 접근에 대한 연구가 더더욱 필요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참고도서 ※

* 주재용, 역사와 신학적 증언 (서울;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1)

* Gonzales, Justo. L,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이 형기 차 종순/역 ‘기독교 사상 사 I‘ (서울; 대한 예수교 총회 출판국,1989)

* Walker, Williston,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ruch, 김 근환외 3인역 ‘세계 기독교회 사‘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0)

* 김황중,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독교 정통확립 과정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 논문; 연세대, 1991) 

* 탁명환, ‘기독교 이단연구’ (서울; 국제종교 문제연구소 1986)

* 차종순, ‘교회사’ 신학 연구도서 시리즈5, (서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국, 1992)

* Paul Tillich, ‘그리스도교 사상사’ 송기득/역, (서울; 한국신학 연구소,1983)

* 박석동, ‘어거스틴의 교회론’ (석사학위 논문; 감신대, 1985)

* J. N. D. Kelly. '고대 기독교 교리사‘. 김광식/역. (서울; 대한 기독교 문화 연구소 

출판사, 1980)

* J. L. Neve. ‘기독교 교리사’ 서남동/역.(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1)

* 박성덕, ‘교회의 사도적 본질과 평신도 사명’(석사학위 논문;고신대학, 1985)

 

 

초대교회 부흥역사

 

2. 신약시대의 부흥운동

 

가. 신약시대 부흥운동의 특징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흥시킨다는 말은 없다. 그때까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 복음 시대에서는 성자 예수님이 직접 활동하시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만나는 곳에서 부흥운동은 일어난 것이다. 또한 성령의 역사로 사도행전적 신앙부흥운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경이적인 부흥운동이다. 이로써 볼 때에 신약시대에 부흥운동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말씀 속에서 새로워지고 성령의 역사로 변화를 받아 실패자가 성공자가 되고 저주아래 있던 자가 축복을 받게 되고 비굴한 자가 담대해지고 가난한

자가 부유해지며 지옥 갈 자가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

 

나. 신약시대 부흥운동의 유형

 

(1) 세례요한의 광야에서의 부흥운동

 

말라기 선지자의 외침 이후로 오랜 침묵의 세월이 흘러 교회사적으로 예언자들의 아무 활동도 없었던 중간시대라고 하는 암흑기를 지난 이러한 때에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라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다. 그는 부친 대제시장의 스가랴의 후광을 입을 수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살면서 형식으로 부패 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니 많은 사람이 나아와서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지고 불의를 책망하는 자 직언자의 일을 하였다. 당시에 세력 있는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가식화되어 위선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회개를 촉구하였다.

 

또한 정치인들의 부정도 그냥 묵과할 수 없어 총독 [헤롯,안디스바]의 불의를 감하게 되어 옥에 갇혀있던 중 헤로디아의 딸의 간청으로 참형을 당했다. 세례요한이 일으킨 부흥운동은 뭐라해도 주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다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에 그의 인기가 있음에도 예수님 앞에 겸손하여 예수님만 높였던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촉구하였고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였으며 이것이 자신의 사명인줄을 잘 알고

있었고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예수님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의 부흥운동

 

복음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부흥을 시킨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여러 가지 교훈의 내용을 성실하게 검토해 볼 때에 새로운 자세정립에 필요성을 말씀하셨으며 전통적인 유대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의해 왜곡된 진리를 책망하여 바르게 증거하심은 신앙의 부흥운동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각종 설교하심이나 갖가지 병든 자를 고쳐 깨끗하게 하심이나 풍랑이나 바다를 잔잔케 하심으로 자연계를 향하여도 기적을 나타내시어 따르던 심령에게 확신을 주신일, 빈들에서 따르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하신 일로 소망을 주셨으며 성전에서 각종 장사와 돈 바꾸는 자를 향해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하시고 책망하시며 청결하게 하신 일 뿐만

아니라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 공생애의 사역으로서 세가지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에 두루 다시사 저희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고통 받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하였는 데 이 말속에서 예수께서 그의 공생에에 세가지 사건 즉,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니라'였다. 그 중에 [전파하겠다]는 말은 (케롯쏘)라는 말을 쓰는 데 이 말은 왕이 올 것을 큰소리로 선포하는 왕의 선발대 또는 희랍의 경기를 다 맡아서 고시하는 경기의 예고에서 온 형용적인 말이다. 후일 성경에서는 중대한 소식을 전하는 엄격한 직분의 수행을 맡아서 전할

때에 쓰게 되었다. 결국 중대한 소식을 말한다면 마4:17의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회

개운동의 선포인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그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다.

"고 했으니 복음의 확산 운동이요 전도 운동이다. 그래서 "허다한 무리가 좇았다"고 했으니 그 열매가 아닌 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직접적으로 예수의 말씀에는 신앙을 부흥시킨다는 말은 없지만 그의 모든 사역으로 볼 때 신 국민에게 대한 새로운 자세를 정립시켜주는 영적 부흥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여러 부흥과 이적 기사는 무엇으로 평가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부흥운동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예수의 인생은 신앙 부흥운동으로 일관된 삶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로 오직 죄와 악으로 멸망을 받게 된 인류를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려는 진정한 영적 부흥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사도행전교회 부흥운동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거의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십자가와 예수 죽음의 충격으로 놀라고 좌절한 가슴이 진정되고 이제 새로운 제2의 도약을 향해 전진하려는 일련의 사건이 잉태되는 데 그것이 바로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120여 명 남짓한 성도가 모여 기도하게 되는 일이다. 이리하여 저들은 오순절 날을 맡게 되고 드디어 성령이 폭발하는 Dynarmic한 전도의 권능을 받게 되며 그 후 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 부흥운동에 몸을 투신하게 된다. 이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사도행전 교회의 부흥운동의 모델이며 부흥운동 역사의 초점이요,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러므로 부흥운동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교회를 빼놓고는 그 말미를 잡기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까지 생각해 본다. 사도행전과 교회는 이처럼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발생하였다. 사도행전 교회의 최초에 나타난 모임의 숫자는 120명(행1:15)이다. 그러나 2:41에는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2:47에는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축복이 있다. 4;4에는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더라" 5:14에는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러"6:7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9:3에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 지니라" 21:20에는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이와 같이 사도행전 교회 부흥운동의 양상은 우선 수적인 증가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오순절의 부흥운동은 성령의 강림으로 놀라운 확산과/역동적인 힘을 발휘하였다. 성령강림으로 어떤 결과가 생겼는가? 간단히 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조상적부터 믿어온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그 첫째요, 둘째는 그들이 성령의 지배아래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행4:32) 는 점, 셋째는 소유욕에서 벗어났다는 점, 그래서 사랑의 실천운동으로 유무상통하였다는 점, 넷째는 언어의 장벽까지도 철폐되었다는 점, 다섯째는 전도 열이 고조되어 교권자들이 함구령에도 아랑곳없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는 점이다(행2:42-47,행4:1-12,행5:29). 오순절 이후 설립된 교회는 사도들의 모 교회였으며 이 교회는 급성장하였다. 갈릴리와 유대 지방의 원주민들과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심지어 히브리 제사장들 중 몇몇이 이 교회의 회원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적인 교회를 탈피하지 못했다. 스테판(Stephen)의 순교로 인한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는 기독교를 팔레스타인의 지경 밖으로 이식하는 결과가 되었고, 흩어진 주의 증인들에 의해서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에서 국제적 교회로 설립하였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들의 모 교회였으며 외지 선교의 본부였다.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이 안디옥교회를 통해 목회하면서 외지 선교의 원대한 활동계획을 수립하고 (행13:1-3), A.D.45년 사이에 네 차례의 외지 선교를 성공리에 실시했던 결과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에베소, 소아시아 빌립보,데살로니가, 고린도,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에 설립되고 멀리는 아프리카,이탈리아, 영국,인도, 프랑스 등지로 전파되었으니 이 놀라운 부흥운동의 역사는 조직적인 사제 훈련과 복음 전파를 통한 교회 설립이 부흥운동의 요소였던 것이다.

 

[근대정신과 신](The Modern Mind and God)을 쓴 헤밀턴은 교회 부흥에 있어서 초대교회는 무력에 의해 전파하지도 않았으며 정치적 권력과 위신은 옹호를 받지 않았으며 외식주의에 의하지도 않고 타협에 의지하지도 않고 인간의 저급한 성질에 호소하지도 아니하고 부도덕이 미덕으로 칭찬받지도 않으면서 발전했다고 했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을 쓴 기본(Edward Gibon)은 그의 책 1권에서 다섯 가지 원인을:

(1)교인의 열심 

(2) 영생 소망 

(3) 기적 

(4) 교인들의 덕

(5) 교회조직의 치밀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자체의 대답은 오직 하나,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사도행전 1:8의 주님의 약속의 실현이 바로 교회부흥의 원동력인 것이다. 성령이 역사할 때 회심자가 많아지고 성령이 역사할 때 전부를 드리며 성령이 역사할 때 복음은 널리 전파되며 성령이 역사할 때 주님께 대한 사랑은 불 붙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때는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도행전 8:14-17에 사마리아 교회에 드로와 요한 두 사도들의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성령이 임하였고, 10:44-46에 고넬료와 가정에 베드로의 설교에 의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였고 19:8-12에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바울 서신이나 기타의 서신에는 예수께 대한 신앙의 재 확인과 그에 대한 충성과 매일매일 생활이 예배(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고전10:31)와 증거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의 생활의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신앙 생활이 미지근해서는 안되며 (계3:15-라오디게아교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엡6:11),믿음의 경기장을 열심히 달음질 해야 한다(고전9:24)고 강조한다.

 

제3절 기독교에서 본 부흥운동사

 

부흥운동은 기독교사 2천년 동안 계속되어왔다. 이 운동으로 교회가 생기를 띠게 되고 부흥 발전해왔다. 교회가 타락하거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마다 새로운 신앙운동의 견지에서 볼 때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요, 타락과 갱신의 반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타락의 원인은 외부에서 오기도 했으나 대체로 내부에서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1. 초대교회사의 부흥운동

 

가. 콘스탄틴의 개종과 부흥운동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등 사도들을 통하여 부흥의 불꽃은 열화처럼 피어 올랐다.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특별한 경륜 즉 주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하루에 삼천명의 사람들이 중생을 경험하는 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은 계속하여 확장되어 나갔다.

주후 61년경 네로에 의해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 당한 후 기독교는 로마에 의하여 혹독한 핍박과 박해의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 데 로마제국의 1-차에 걸친 가혹한 박해로 무수한 순교자와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로마 정부는 박해를 통해서 기독교를 박멸하려 하였지만 결국 내란에 빠진 로마제국을 다시 평정한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Licinius)는 313년에 밀란에서 만나 전제국에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기로 합의하고 칙령을 발함으로 드디어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공인된 종교가 된 것이며, 오랜 기간에 걸쳐 단속적으로 일어났던 로마제국에 의한 가혹한 기독교 박해는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이렇게 4세기 초 콘스탄틴 황제를 개종시킨 기독교는 드디어 로마제국을 기독교화함으로 현대 문명의 주류를 이룬 서양문명을 형성함에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콘스탄틴 이후 교회는 평화기를 맞이하여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마냥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릴 수 만은 없었다. 기독교가 외부적인 핍박보다 더 무서운 내부적인 이단으로 인하여 시련을 겪게 되었다. 즉 아리우스에 의하여 제창된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도 아니며 양자 사이의 제3의 존재(Tertiuid)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설은 니케아 종교회의 때에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배격되고 교회는 니케아 신조(The Nicaea Creed)를 작정 발표 하였다.

 

나 , 어거스틴의 회심과 부흥운동

 

어거스틴은 어린 시절에는 기독교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자라나면서 종교적인 불만에 빠지게 되고 절충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마니교에 깊이 빠지게 되나 그 후 그는 밀란의 수사학 교사로 일하던 중암브로스의 능력있는 설교에 감화를 받게 된 어느 날 로마서 성경을 읽는 중 깨닫고 드디어 387년 4월25일 암브로스(Ambrose)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완전 전향, 그 마음을 개혁시킨 후에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울 이후 어거스틴 만큼 기독교에 심오한 영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없을 만큼 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의 신학적인 기초를 놓게 되었다. 마니교에 반박문을 씀으로 교회의 성격과 권위를 높이게 되었던 A.D.400년경에 쓰여진 그의[참회록]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명 잇는 관계로 본 그의 경해는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영원하다. 또한 그의 명작 삼위일체론에서는 교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사도시대 이래 최고수준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중세교회의 특색을 나타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에 있어서도 여러 면으로 정신적인 바탕이 되게 된다. 그는 히포(hippo)에서 아프리카 최초의 수도원을 사제 훈련 장소로 만들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 대논쟁(The great pelagian controversy)를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권위에 깊이 있는 사상을 정립하고 [죄와 은총]에 관한 독특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특히 그의 사상 배후에는 신비주의적인 경건이 베일처럼 깔려있는 것이 그 사상의 특징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으로 삼위의 동등을 강조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을 강조한 성육신론을 폈고 저는 최대의 저작[신의 성] (The city of god)을 남겼다. 이로써 어거스틴 만큼 기독교에 심오한 영적 영향을 끼친 사람이 없을 만큼 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2. 종교개혁과 부흥운동

 

기독교 역사는 발전되어 중세시대로 넘어오면서 영적 깊이를 더하며 자기절제 그리고 참다운 기독자의 삶을 강조하는 수도원 운동을 통한 영적 개혁운동으로 교회는 성장하는 듯 하더니 그것도 한 순간에 지나고 동방교회는 영영히 결별을 선언하게 되고 교권 싸움에 눈이 어두워져 물고 물리는 암흑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다. 후기 중세시대에 접어들면서 십자군 운동이 결국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다 주면서 실패로 끝이 나고 사회는 불안의 먹구름이 짙게 깔려감으로 불평과 불만이 쌓이게 된 즈음, 교회는 더욱 악화되어 구원과 물질이 결합하게 되는 세속화의 극을 달리게 되었다. 다만 중세기에도 미약하나마 위클리프와 후스의 부흥운동을 찾아볼 수 있다.그들은 교황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를 높여 성경만이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하여 성경을 일반 성도가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 [가난한 사제들(poor 66priests)을 둘씩 전국에 파송하여 헐렁한 옷에 지팡이를 들고 맨발로 복음을 전하는 롤라드 운동(Lollard movement)을 일으켜 큰 부흥을 일으켰고 심한 핍박으로 순교 당했으나 영국과 보헤미야에 끼친 신앙적 감화는 국민 사이에 영구히 남아있는 것으로 신앙부흥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타락과 세속적인 일들이 일어남에 따라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여러 개혁자들이 신앙혁신 운동을 일으키고 드디어 교회를 개혁시킴으로 여기에서 개신교가 탄생되었다. 

개혁자들은 오직 은총만으로(sola gratia), 오직 믿음만으로 (Sola fide), 오직 성령만으로 (Sola scirptura)라는 구호아래 일대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종교개혁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대 신앙운동이며 일종의 성경적 신앙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신앙부흥운동이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순수한 기독교의 재발견 운동이었다.

둘째, 잃었던 성경을 재발견하였고 성경을 다시 열어놓게 되어 구원에 필요한 진리를 바로 깨닫고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유일한 규범이요 권위로서의 성경을 되찾는 운동이다.

셋째,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총에 관하여 다시금 강조한다. 이 은총에 의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 진다고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여진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재 인식케 하여 준다.

넷째, 종교개혁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죄악으로 자포자기한 절망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희망을 안겨줌으로 진정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3. 근대교회의 부흥운동

 

M.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전 유럽에 프로테스탄트의 뿌리가 서서히 내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과학과 철학의 발전으로 신앙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이신론의 합리주의 사상이 만연하게 되므로 기독교 신앙에 의심을 불러일으켜 신앙의 냉각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때에 신앙의 경성을 가져오고 영적인 각성을 일으킨 것이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요, 영국에서는 웨슬레이의 부흥운동이 일어나 이신론(Deism)을 약화 시키고 새로운 영적 각성과 사회변혁까지 이루게 되었다. 미국의 건너간 청교도들은 저들의 신앙경건을 고수하면서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 미국의 대 부흥운동이며 세기의 유명한 부흥사인 D.무디가 일어나 더욱 강렬한 부흥운동의 파도를 일으키게 된다. 이 무디 부흥운동에 은혜를 받은 많은 헌신 자들이 동양의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데 이 부흥운동의 물결이 우리나라에 까지

파급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부흥운동은 근대교회 종교적 신앙부흥과 각성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기독교 선교의 장을 열어준다.

 

가. 독일의 경건주의 부흥운동

 

스콜라적 루터교의 고립된 엄격한 교리적 해석과 강단의 설교에 청종하며 성례에만 참석하면 되는 수동적으로 흐르는 신자들의 신앙 경향성은 종교생활의 형식화, 경직화, 교회화로 소위(사멸된 정통)의 종교 현상들을 낳게 되었다. 경건주의(Pietism)는 바로 이런 스콜라적 경향에서 결별하여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와 닿는 종교적 체험과 경건생활의 미덕을 강조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독일경건주의의 중심인물은 쉐페너 (philipp Sakob Spener,1635-1705)이다.

저는 [화란경건주의자] (Dutch Pieitist) 인 텔링크 (Willem Teelinck,1579-1629) 나 포트 (Gisbent Voet,1589-1677)의 영향을 받았고 영국 청교도인 베일리(Lewis Bayly)와 벡스트(ichard Baxter0의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저의 영적 운동은 당시의 교권의 압력으로 여의치 못해 소집단을 형성, 영적 부흥운동을 전개 하였는 데 이 이 그룹을 [Collegia Pietatis]라고 불렀다. 개신교 부흥운동은 독일의 쉬페너가 경건운동을 일으키고 영국에서는 웨슬레의 부흥운동,미국의 대 각성운동이 독자적으로 일어났으나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며 17세기말 18세기 초에 확대되어갔다.

 

나. 모라비아 교도의 부흥운동

 

경건주의 각성운동의 열매로 진젠도르프(Nicolaus.Ludwing von zinzendorf) 백작 지도하에 결성된 모라비아 형제단(Moravian Brethern)이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선친의 친구인 경건주의자 쉬페너와 조모 케트린의 감화를 받았다. 그때 보야에서 박해를 받아 망명 온 히스파를 자기 영토에 안주시켜 헤론후토(Hernhut)라고 했다. 수도원생활로 엄격한 경건 생활과 근면생활을 하며 이들은 어디든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가겠노라고 하는 고귀한 선교정신은 교회외적 전도 운동으로 확산되어 교회의 많은 영적인 수확과 성장을 가져오게 했다. 이 운동은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자인 슐라이 마헤르와 영국의 웨슬리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다. 웨슬레의 부흥운동

 

당시 영국 사회는 극단의 향락주의자가 세기말적인 경향으로 흘렀으며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구가 팽창하고 경제가 발전하는 반면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범죄가 증가하고 부도덕한 생활은 가속도로 증가되어 갔다. 상공업의 발달로 도시화 현상이 나타나고 이와 아울러 음주, 방탕, 사치, 음란 등의 죄악이 성행하였다. 파산자와 실직자가 속출, 걸인과 빈민의 수가 날로 증가 하였다.

당시에는 합리주의가 모든 종교가들을 좌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교는 도덕적 미덕의 산문으로 흘렀고 뜨거움과 열정이 결여된 차갑고 메마른 도덕선생의 노릇을 할뿐이었다. 이때 영국의 부흥운동의 기수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웨슬리(John Wasley)이다.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올드 스케이트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그 후 동생 찰스와 화일필드(Whitefieled)와 함께 영국에서 강력하고도 뜨거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웨슬리 부흥운동은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영국을 변혁 시켰다. 이 운동은 영국을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에로 방향과 길을 열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뜨거움이 자연신교(Deism)의 얼음을 녹여 버렸다. 영국에서 종교생활의 결빙상태가 풀리고 다시금 자유로이 은혜의 맥박이 뛰기 시작하였다.

 

라. 미국의 대 각성 운동

 

미국 교회생활에서 영속적 영향을 준 운동이 바로 이 대 각성운동(Great A Wakening)이다.

이 운동이 시작된 진원지는 뉴저지의 다리탄 계곡(Raritan Vally)이라는 개혁운동 써클이었다.

이곳에서 프렐링 후이센(Theodore,J.Frelinghuyesen) 이 보다 깊고 생생한 신앙을 가지도록 교인들을 일깨우기 위해 6년 동안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이 마침내 미국전역을 휩쓴 부흥의 격류를 일으켰다. 이러한 1차 각성운동의 발전시기에 18세기 미국신학계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Jonathan Edwards)가 있다. 그는 프린스톤의 총장이요 미국최대의 신학자로서 절대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예정론으로 신학의 굳건한 골격을 세워 주었고 함께 한 화일필드의 대각성운동이 신앙부흥운동의 정신을 힘있게 일으켜 철저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교회는 불붙기 시작했다. 18세기말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제2의 대각성운동이 진행된다. 이 운동은 동부에서 서부로 파급되면서 교회 일치 운동을 동반하게 된다. 이때 이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이 바로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y.1792-1875)였다. 그는 부흥회에 [새로운 방법]을 적용 반복적 언어구사, 거칠고 때로는 강력한 언어를 구사하며 갑자기 예배의 패턴을 바꿈으로 훨씬 강력한 부흥의 격류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뚜렷한 한 국면으로 미국대학생들 사이에 선교 열이 고조된 일이라 하겠다. 이른바 [신앙동우회](Socity of Bnethren)등 많은 신앙단체가 조직되고 형성되어졌다.

 

4. 19세기말의 부흥운동

 

19세기말 가장 두드러진 부흥운동의 무디(Dwight L.Moody 1837-1899)에 의해 이룩되었다. 이는 안수 받은 일도 없었다. 17세에 농장을 떠나 양화제조공으로 크게 성공하나 여생을 주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870년대에 무디가 전국적으로 부흥집회를 개최할 즈음 생키(Ina,d.Sankey)는 감명 깊은 찬송으로 무디를 많이 조력하기도 했다. 무디는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언어는 단순하였고, 그의 정신은 따뜻하며 성실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전향시켰다. 이때에 가정을 호별 방문하는 축호전도가 시작되었으며 당시의 뉴욕 타임지에는 무디 부흥운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신자의 사회전반에 걸친 대 각성 운동이요 사회개혁운동이며 인간회복 운동이라고 까지 칭찬하였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외국의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고 외국선교 자원학생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무디성서학원 설립 역시 선교를 위한 목적이었다. 선교정신을 고취, 선교를 지향하는 것은 무디 부흥운동 전체에 나타난 특색이었다.

또한 19세기에는 영국의 감리교 부흥운동이 있었다. 심한 교리의 잘못으로 19세기 침례교도는 쇠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감리교에서는 교인의 수적면에서 급격히 하강하던 것이 다시 일어

나고 부흥이 일어났다. 이 감리교 밖의 다른 종파, 회중교회, 침례교회에도 영향을 주어 새로운

영적 영양을 공급 큰 이익을 주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개척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19세기 부흥운동에 이어서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국내선교와 외국선교에 잠을 깨웠다는 것이며 또

주일학교(Sunday School work)와 성경의 유포, 종교문화(Religi-ous Literature)과 여러 가지 자선사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흥운동이 동남아 세계로 퍼져가는 선교 열로 불타오를 즈음 한국에도 쇄국정책의 조선 문호가 개방되어지고 영미계통의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제 3장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운동

 

1885년 부활의 아침에 이 나라에 복음의 해가 돋은 이래 짧은 선교역사 속에서 오늘과 같이 세계 기독교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도록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한국교회의 현상은 그 나름대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으나 선교 초기부터 부흥운동과 더불어 시작된 한국기독교에 있어 그 성장요인은 부흥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1절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역사와 배경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여러 형태의 부흥운동들은 그 당시의 사회, 정치 등의 문화적 환경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성경 속의 여러 부흥운동도 그러했고,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 웨슬리의 신앙부흥운동 등이 그러했으며, 18-19세기 미국의 대 각성운동 또한 그러했다. 그러므로 한국의 초기 교회 형성과 교회부흥도 그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여

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일정한 문화 속에 세워지고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고 발전된다고 볼 수 있기에 한국교회의 부흥운동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배경연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1.한국교호 부흥운동의 역사

 

한국교회 역사를 교회사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말하고 있다. 조동진 목사는 다음과 같이 6기로 나누어서,

(1) 1860년 - 1885년 한국교회 태동기.

(2) 1885년 - 1910년 한국교회 형성기

(3) 1910년 - 1935년 한국교회 성장기

(4) 1935년 - 1945년 한국교회 수난기

(5) 1945년 - 1955년 한국교회 혼란기

(6) 1955년 - 1975년 한국교회 성숙기

 

또 이은봉 교수는 2기로 나누었는데

(1) 1885년 - 1950년

(2) 1950년 - 현재까지

 

그리고 이월선 교수는 4기로 구분 하였는데

(1) 1884년 - 1910년 유년기

(2) 1910년 - 1945년까지는 소년기

(3) 1945년 - 현재까지는 청년기

(4) 현재 - 미래까지를 성년기로 구분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학자들의 거의 공통된 특징은 대기 한국교회의 역사를 1885년을 초기로 잡았다는 것과 1945년을 기점으로 해서 전후기로 나눈 것을 볼 수 있다.

 

1) 여명기의 부흥운동(1885-1920)

 

1900년대의 한국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히 혼란하고 위태로운 시기였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1895년의 민비 시해사건, 1904년에 한일 의정서가 조인되었다. 또 군사기지를 내어주며 고문정치를 규정짓는 3조문의 제1차 한일협약이 이루어지고, 1905년 11월에 보호정치를 결정한 한일협약이, 1910년에는 한일합방조약이 성립되어졌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국민을 위기의식에 사로잡혔고 국가는 풍전등화격으로 위태로운 민족적 불안기였다.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상실해 가는 형편 속에서 국민들은 마음의 상처를 위로받기 위해서 교회로 모여들었으며 망국의 울분과 함께 의지할 곳 없는 국제정세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민족적 삶의 새 방편을 국가의 물리적 힘이 아닌 종교의 신앙에서 찾게 되었다. 1895년부터 1907년 사이 교인의 수는 급속한 증세 추세를 보여 1907년 평양에서는 인구의 약 3분의 1의 수(약 14,000명)가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 또한 이때 교인 전체와 세례교인 비율이 3:1이었다고 하니 교회에 들어오는 수도 많았지만 세례 받는 수도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간의 숫자를 민경배 교수는 C.A. 클레크쎄에 근러하여 570명에서 26,057명이었다고 한다.

서명원씨는 1896년 교인수가 그 전해의 3배가 되었고 2년 후에는 4배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또 1895년을 기점으로 한국교회의 세례교인수가 급증하여 1905년에는 1만 명에 육박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 민족의 비운은 한국 크리스천을 애국적인 신앙운동과 함께 구국적 정치성향이 농후한 신앙운동을 야기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한국인의 민족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정.교 분리 원칙에 입각한 선교사들의 교회의 비 정치화 운동은 이러한 정치적 한국교인의 신앙생활 형태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내향적 신앙의 길로 유도했다. 즉 정치적 성분을 띤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의 정치관여를 반대하는 선교사들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과 대립이 야기되었고 이로 인하여 선교사들은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1907년에 그 절정에 달했던 한국의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했던 한 흐름은 이러한 난관을 뚫기 위한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염원했다고 할 수 있다. 1903년 8월 감리교 선교사들이 원상에 모여 당시 중국에 주제하던 남 감리교 선교사 화이트 (M.C. White)양의 인도로 성경연구와 기도회의 기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하디(R.A. Harcie)선교사가 자기의 부족과 실패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데서 감동을 받아 선교사들 사이에 회개하는 부흥이 일어났다. 1904년 원산의 집회는 장로교 선교사였던 로브(A.F.Robb)가 특별한 감화에 젖어 한국인으로서/역시 은혜를 체험한 전계은과 함께 원산의 거리에서 통회전도를 했으며, 감리교의 정춘수/역시 부근을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그러자 그 소문은 전국에 퍼져, 선교사들은 원산에서와 같은 성령은사의 체험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6년 8월 평양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연합집회를 인도케 하였는데 이 집회에서는 요한일서가 강해되었고 성령 은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시련의 때에 선교사 자신들의 선교태도에 대한 불명료와 주저의 기색

이 있었음을 스스로 자책하였다. 이 집회에서는 공교롭게도 웨일즈와 인도지방의 놀라운 부흥의 소식을 때 마침 재한선교부를 방문하고 있던 죤슨에 의해 전해 듣게 되자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갈망이 점점 평양에 교회들에게 짙어져 갔다.

 

제1절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역사와 배경

 

드디어 부흥의 불길은 1907년 1월에 평양에서 열렸던 합동 사경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저녁집회 때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감격과 눈물로 확산되었고 이후에도 이와 같은 집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의 모든 지방에 계속되었다.

평양에 부흥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도록 지방도시와 개척교회를 순회하면서 평양에서와 비슷한 부흥집회를 시도하였다. 가는 곳마다 죄가 고백되어지고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 결국 전국이 뜨거운 성령의 세영 체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신앙수준은 더 높아졌고, 사경회를 통한 성경교육이 있었으므로 광신은 거의 없었다.

수천명의 신도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배우려고 했으며 다수인에게 성직의 소명을 받게 되었다.

즉,초창기의 부흥운동은 죄의 회개와 사경회를 중심으로 한 지극히 정상적인 부흥운동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비 기독교인을 신자화하려는 운동이라고 보다는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의 영적 생활을 소생시키려는 부흥운동이었다. 그러나 회개가 구국으로 연결되어 일어났고 더 나아가 신자로서의 자기 책임을 깨달으면서 자기가 새로 발견한 신앙경험을 타인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새로운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길선주 목사와 한석진 목사, 그리고 김익두 목사가 주도 했으며 마음의 슬픔 속에 있는 한국민족과 교회에 큰 위로와 치유와 복음으로 은혜를 끼쳤다. 이들은 민심이 동요되고 정신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백성들에게 계시록 중심의 말씀과 이적의 권능으로 위로와 희망을 주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 운동의 결과로서 몇 가지를 지적한다면,

 

(1) 이 운동으로 한국교회는 공동체적인 신앙 형태로 발전되어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금후 겪어야 했던 가혹한 시련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2) 선교사와 한국 교인 사이에 이해가 증진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이 운동으로 한국에서 틀을 잡게 되었으며 기독교가 한국인의 정신적 욕구에 응할 수 있는 종교임을 보여주었다.

(3) 한국교회를 비 정치적인 피안의 신앙형태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대 선교 신학적인 말로 표현하면 사회정의 보다 각자의 개인구원이 더 강조 되었다.

(4) 사경 즉 성경 공부 열이 대단했다. 원래 평양 부흥운동이 장로교 남자들의 성경 공부에만 시작되었고 또 이때 모든 신자들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을 신앙 생활의 없지 못할 요소로 생각했다.

(5) 새벽의 기도회이다. 길선주목사의 부흥 사경회 때 부터 시작된 매일 새벽기도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조선 예수장로회사의 기록을 보면 주일새벽, 주일 낮, 주일 밤 예배와 삼일 밤 기도회는 계속되어 한국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1907년 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 사상 너무나 뚜렷하고 위대한 사건으로서 한국 교회가 여기서 얻은 영적인 힘을 가지고 거듭 일어나는 일제하에서의 환란과 핍박을 용감하게 이겨가는 예재와 담력을 기르게 되었다.

 

2) 일제치하의 부흥운동 (1921-1945)

 

이 시기는 일제가 일선 융화의 표어 아래 동화정책을 계속하는 '형식적 문화정치의 시기'였다.

동양을 재패 하려는 일본의 야망은 마침내 1931년에 만주 사변을,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서 장기간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조선 통치의 암적 존재로 여겨온 교회에 대하여 온갖 박해를 가했다. 이때에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황국신민화를 강요했으며 또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므로 한민족에게는 굴욕과 고난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교회는 목을 조이는 일제의 압박 가운데 신앙의 내면화와 도피적 피안화를 일으켰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백성들은 실의와 낙담 가운데서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 때 민족적으로 새 삶의 용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1020년 교세 확장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이 전개 되었는데 이 운동을 감리교에서는 "백년전진(The oentenary Advance)"운동이라 했고

장로교에서는 "전진운동 (The foward Movement)" 이라 불렀다. 장로교에서는 1919년 9월 장로회 제8회 총회에서 전국 12개 노회중 각 노회를 대표하는 3인씩의 위원을 선정하여 전진운동위원회를 조직하고 방위량 목사가 의장이 되었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영적 섭리가 분명히 작용하였다. 1919년은 준비와 개인전도의 해로, 1920년은 부흥회나 단체전도의 해로 정하고 4천 여 군데 한국 장로교회들은 거의 모두다 이 전진운동을 위한 특별한 부흥 사경회가 열렸으며 1920년 한 해 동안에 5,603명의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1923년에는 미국에서 버터울트 부흥전도단이 내한하여 전국 12개 대도시를 순회하며 집회를 갖는 도중 매일 밤 수백 명씩의 결신자가 생겼고

동년 9월에 조선 예수교 연합 대 전도단이 조직되었고 1930년에는 교회 진흥 연구위원회가 발족되었고 1932년에는 다시금 대 부흥의 해로 정하여 1935년까지 계속되었다. 3.1운동의 여파로 일제의 본격적인 탄압과 세계적 경제 공황이 국내에 내습하여 경향각지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자연히 교회 안에서도 그 영향이 미쳐 신사참배 문제로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고 2천여 신자들이 옥에 갇혔고 50여명의 순교자를 냈다. 드디어 1942년에는 각 교파를 통합하여 조선 기독교단을 만들고 1943년에는 성결교, 안식교, 동아그리스도교가 폐쇄당했으며 1945.8.1에는 한국의 모든 교회들을 일본 기독교단에 예속시켰고 이어서 많은 지도자들이 구속되었다.

일제는 철저하게 민족정신을 찬탈했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겉으로는 종교적 자유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교회의 교권을 외국선교사로부터 탈취하려 했다. 그 방법으로 어용 종교단체인 '조합교회'를 이용하여 교회의 불평분자를 포섭 교회의 분열과 약화를 시도했다. 일본의 교회 박해는 강압과 위협, 회유와 유혹 등 온갖 수단이 동원 되었는데 이러한 교회 강압과 사회 불안은 처음과는 달리 한국교회의 성경교육과 신학부재를 부채질하고 말았다. 신학적 기반이 없는 나약한 신앙이 현실부정의 혹독한 고난에 직면할 때 피할 곳은 내세의 천국과 신비주의 밖에 없다.

 

일본의 극심한 교회탄압의 비극은 한국인의 종교감정 속에 인간상실, 민족의식 상실의 위기를 가져왔고 따라서 기독교회는 서구의 경우와는 달리 신앙의 철저한 내면화와 경건화를 가져왔다.이 시대 속에 기댈 소망의 근거는 없었으며 한국교회 신앙의 형태는 신비주의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이용도목사의 사랑의 신부주의 부흥운동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은 교회의 형식화와 이것은 교회의 형식화와 교권의 창설에 매서운 비판을 가했던 당시의 전형적 경건의 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 운동 시도는 교회제도만 개조하려는 정치적 시도가 아닌 당시의 신앙형태에 활력을 불어 넣으려는 갱신의 의지를 깊이 표명했던 운동이었다. 이용도목사는 철저한 피세적 신앙과 만인을 감복시키는 예언자적 외침으로 성도들 심령에 순교적 신앙의 뜨거움을 일으키어 후일에 닥쳐올 때 환란의

날에 순교의 준비를 든든히 하게 했다. 지식보다는 신앙의 삶을 강조했던 이용도목사는 회개와 사랑의 실천운동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부흥회를 주도해 갔고 기도의 붐을 조성시켰다.

 

1923년부터 내리막길에 있었던 전국의 교세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 다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이용도목사의 개혁운동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약교회의 운동사 

 

1. 비 교파주의를 향한 초기의 환원운동

 

비교파주의 운동은 모든 시대에 있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어 왔다. 

환원(Restoration) 은 원래 있었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이탈된 상태에서 본래의 상태로 회복하자는 복귀운동(Restitution)이다. 환원은 개혁 (Reformation)과는 다르다. 개혁은 현존하는 상태에서 어느 부분만을 바꾸자는 것이지만 환원은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뿌리운동이다.

기독교 사상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하여 그의 수육과 부활의 사건을 통한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인간 삶의 의미를 안겨주게 되었다.

성서를 이탈한 신학은 진리의 어느 부분만을 확대시키어 체계화 하게 됨으로 사상의 폐쇄성을 가져오고 그 결과는 교파라는 분열의 문제로 나타난다. 환원운동의 중심은 바로 이러한 모든 것, 즉 인간의 신조와 교리를 떠나 "성서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는 원색적인 사상운동이다.

 

2. 미국의 초기 환원운동가

 

1) 제임스 오켈리

미국내에서 최초로 신약교회에로 환원을 들고 나옴

"성서 그 자체는 자신들의 유일한 신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

그리스도인 교회의 다섯 가지 기본원칙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다.

그리스도인 이름은 성서에서 가장 합당한 이름이다.

성서는 유일한 신앙의 규범이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은 교회친교의 유일한 시금석이다.

개인의 판단권리는 모든 사람의 특권이다.

그리스도인의 최초교회가 1794년 노드 캐롤라이드의 차펠 힐에 세워짐

 

2) 아브너 존스

1801년에 그리스도인의 교회라고 하는 조합교회를 린돈에 세움

이들은 오직 성서만을 신조로 삼았고 그리스도인으로써 무교파주의를 향하여 중대한 한걸음을 내디뎠다.

 

3) 발톤 W. 스톤

환원운동의 선구자로서 문필가이며 설교가이며 시인이며 복음전도인이었다.

 

사상

세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침례를 받아야 하며 개교회는 독립성을 가지고 두 명 이상의 선출장로에 의해 치리되며 교회와 국가의 분리, 매주일의 주의 만찬, 예배시의 무 악기, 교회의 명칭, 인간의 신조와 교리 등을 배격하고 레버란드(Reverend)란 칭호를 버리고 성직자의 까운문제와 발씻김과 거룩하게 입맞춤 등의 겸손과 사랑의 표시등을 강조

 

4)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최후의지와 증언

토마스 캠블의 "선언문과 제언"과 알렉산더 캠블의 "율법에 대한 설교"와 더불어 3대환원문서 중의 하나이다. 레버란드의 칭호를 버리고 성서만을 따르며 스프링필드 장로회를 따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만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분파주의를 배격하며 교리문제로 교인들을 묶지 말고 복음의 자유 안에서 자기의 길을 가도록 인도할 것을 유언

 

5) 토마스 캠블

환원운동의 가장 명석한 사상가로서 환원운동의 건축가로 불림

"성서가 말하는 곳에는 우리가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곳에는 우리가 침묵하자"

"본질에는 일치를, 비 본질에는 자유를, 매사에는 사랑으로"

환원운동의 대헌장인 {선언과 제언}문을 발표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조직적으로, 의도적으로, 하나임을 선언하며 모든 교회가 신약교회로 환원할 것을 강하게 호소

 

6) 알렉산더 캠블

 

1816년 유명한 "율법에 대항 설교"를 발표하여 침례교의 비 성서적인 교리들을 신랄하게 지적 성서의 절대 영감성과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신앙의 표준이며 신약성서에 예시된 교회의 모형만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표준임을 믿고 모든 교회가 성서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호소

 

7) 월터 스코트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의 5단계

 

믿음은 마음을 변화시키며

회개는 인간 삶을 변화시키며

세례는 영혼의 상태를 변화시키며

사죄의 역사는 죄로부터 깨끗케 하며

성령의 선물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하는 것이다.

 

8) 죤 라이트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의 유일한 기초로 삼았다.

1810년 인간의 신조들을 탈피한 침례교회를 인디아나에 설립

그는 침례교가 교회의 이름으로써 성서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성서를 주석이나 설명 없는 그들의 유일한 인도자로 삼을 것을 결심하여 이것을 깨닫고 협회를 해체시켰다.

 

 

3. 19세기 미국의 사상과 환원 사상

 

1) 신앙의 자유와 대 각성운동은 신교도들에게 새로운 교회관과 성서관을 정립시킨 반면 신앙의 자유가 오용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많은 교파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많은 신도들이 교회의 연합을 갈망하게 되었고 특히 헌법으로 교회와 국가를 분리한 후 진화론과 같은 비기독교적인 사상들이 공립학교 교과과정 속에 삽입되어도 교회가 어떤 영향을 줄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교회와 사회의 양상 속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부각된 것이 토마스 캠블, 알렉산더 캠블, 발톤 스톤, 월터 스코트 등에 의한 신약성서를 바탕으로한 교회일치 운동이다. 이들은 분파주의를 배격하고 인간의 교리와 신조를 떠나 신약교회로 환원하자는 성서운동이 전개되었다.

 

2) 재세례파의 복귀운동

원래의 교회형태로 돌아가자는 신앙회복운동

 

교리

유아세례를 거부하며, 믿는 자의 침수세례만을 믿으며 교회의 영적 지배자는 개 교회에 의하여만 이루어 지며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지 그의 몸이 성화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며 개 교회는 스스로 목회자와 장로, 집사 등을 뽑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에 대한 순종보다 교회에 대한 순종이 우선이며 성도간의 교제를 강조했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분열(유 무악기)

 

분열의 원인

 

선교회 문제

말씀을 전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의 문제

남북전쟁으로 인한 분열

남북전재에 참전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

악기문제로 인한 분열

L.L. 핑커톤의 멜러디언 사용이 최초

알렉산더 캠블 : "영적으로 완전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배 때 악기는 역효과를 가져다 줄 뿐이다.

 

4. 그리스도의 교회의 가시적인 면과 불가시적인 면

1) 그리스도의 교회의 가시적인 면

세례

세례는 모든 권위를 가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 수여되었다. 복음전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을 선포해야 하고 세례는 이 사건들과는 상징적으로 뒤섞여 있다.

곧 세례는 그리스도의 권위, 복음전파, 신앙, 회개, 고백, 죄의 용서, 성서,새 피조물, 영적 출생, 구원,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와 부활, 그리스도의 옷 입음, 새 생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즉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

 

주의 만찬 3가지 의미

기념

선포(katangelleus) - 상실된 인간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조용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자기살핌

기념과 소망, 회고함과 기다림으로 우리의 영적 생활을 깊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각성시키는 것이다.

 

개 교회 주의

목회자 독단의 세습적인 교회는 개 교회가 아니라 개인교회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 교회 주의를 표방한 것을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큰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개 교회주의는 종속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지 횡적인 유대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2) 그리스도의 교회의 불가시적인 면

사랑

신약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랑이었다. 즉 사랑이 용솟음치는 교회를 의미한다.

 

전도

예수의 죽음을 겪은 지 30년도 채 안되어 로마에 그리스도교를 전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진지하고 한데 뭉친 의지가 이었기 때문이다. 깊은 전도정신, 전도에 열심인 마음 이 두 가지가 하나님께서 당시 교회에 바라셨던 것이며, 이는/역시 오늘 그리스도의 교회가 받은 과제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신약교회의 공동체는 남을 돕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코이노니아의 최고점으로 승화되었다. 또한 그들은 기도의 힘을 믿었으며 성령은 분명히 살아 역사하며, 그들의 공동체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5. 환원운동의 재 이해

 

1) 한국과 미국의 환원운동

한국의 신약교회 운동은 성서적 확신이나 사상적 이념이 없는 생활의 방편으로서 시작된 종교적 구걸운동이었다. 즉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형태의 종교운동이었다. 말씀과 사랑이 결여된 이 운동은 결국 꿈도 비젼도 없는 하나의 교파운동으로 전락하였다.

 

교파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소외된 종교적 사생아가 되어 버렸다. 신약교회운동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해석자들의 편리대로 해석한 성서 교리적 독선이 문제였고 교파주의라는 미명아래 환원동지 들을 자기들의 색안경에 비추어 교리단두데로 보낸데서 오는 불신적 거부반응이 문제였다.

 

그들이 창조해낸 어떤 형태의 틀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단자의 취급과 소외 당할 수 밖에 없는 종교적 군주시대였다. 결국 이러한 물결은 엄청난 분열의 교회사를 장식하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환원운동은 도전에 대한 적절한 응전이었으며 운동의 시작은 전혀 새로운 종교적 배경에서라기 보다는 기존교회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2) 미국의 대 각성 운동

 

운동의 원인

경제적 문제로 오는 사회 생활과 그로 인한 타락한 생활과 무질서한 상태의 지속

종교적으로 타락

미국인들의 인디안과 흑인노예들에 대한 대우

 

제 1차 대각성운동 (1720-1740)

프렐링호이젠, 길버트 테넨트, 요나단 에드워드, 죠지 화이트필드가 주동

종교적인 관심을 자극하여 인도주의자에게 용기와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 줌

 

제 2차 대 각성운동(1797-1850)

독립전쟁을 전후로 미국인의 도덕생활과 종교생활이 땅에 떨어지고 정신적인 암흑시대가 전개

성령의 사역이 각성운동의 원동력 이었으며 각성운동의 반작용으로 캐리지 사건과 피니의 교회분열 사건이 일어남

 

3) 저널리스트의 영향

벤자민 프랭크린과 의식에 있어서의 환원원칙

 

크리스천 리뷰지

"리뷰지는 일반대중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고, 일반대중에 맞게 제작된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복음잡지이며, 예수와 사도들의 모습을 닮는 것과, 모든 것에 있어서 그들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나타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삭 에레트와 크리스천 스텐다드

 

정부가 반역으로 위협당할 때 무력을 수행할 의로운 사명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아주 불의하게 공격받는 정부를 유지하고 보호할 신성한 의무아래 있다고 주장

 

맥카비와 모세즈 라드

"Lard Quarteriy"를 발간, 이 종교잡지는 환원운동사에 있어서 종교 신문잡지업계에서 가장 훌륭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4) 환원의 원칙

환원을 통한 일치

토마스 캠블은 땅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리고 구도적으로 하나이다. 본질적이란 참 교회는 바로 그 본질 혹은 특성에 있어서 통일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의도적이란 이러한 일치 혹은 통일성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의미하며 구조적이란 교회의 헌법(신약성서)의 이러한 통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원에 대한 캠블의 호소신약성서는 교회의 신성한 규약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규약에서 분명히 인정되지 않은 어떤 것도 행할 권리가 없다. 신약성서의 신앙과 의식으로 복귀한다면 교파간의 차이가 사라질 것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적인 일치를 되찾을 것이다.

 

의식에 있어서의 환원원칙

알렉산더 캠블은 "나는 교회의 규약과 법이 신약성서에 선포된 것이 명백히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또한 요구되는 것은 일에 대한 고대규칙의 환원(ARestoration of the Ancient)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를 신약성서의 표준까지 끌어 올림으로써 성취될 것이다라고 함

 

교회의 회원자격

믿음과 침례가 필수적인 조건이며 또한 환원된 교회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

 

예배

기독교의 예배에는 혼란도 잘못도 쇄신도 범죄도 없고 다만 있을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이며, 불가피하게 그렇게 주장해야만 한다고 했다. 즉 매 주일마다 주의 만찬, 찬미, 기도 그리고 가르침에 대한 의식(관례)이 그것이다.

 

교회의 체제

신약성서의 모범이 각 지역교회는 장로들(감독들)의 감독하에 있으며, 집사들에 의해 봉사될

것을 요구한다고 믿었다.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일반적 구별은 성경에 근거가 없다고 믿

었다.

 

교회의 형태

역사적 발전에서 발견되는 세 가지 형태의 교회

회중 또는 조합교회제도

자치권이 있는 각 교회의 연합으로 된 형태

 

장로회 제도

장로들의 지휘 감독하는 형태로 칼빈으로 부터 유래되었고 개혁파라고 알려진 일반적인 모든

교회의 특색이다.

 

감독 제도

감독들로 하여금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유도하는 성직자단과 조화하여 감독들이 지휘하는

형태로서 종교개혁 이후에 영국교회와 또는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감독교회와 같이 영국교회

로부터 파생한 교회들 안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6. 나의 견해

 

신약교회 운동사를 정리 하면서 많은 새로움을 접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대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었다. 특히 환원사상이 기존의 질서 체계를 무너뜨리는 듯한 인상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나 이 신약교회 운동사를 정리하면서 환원사상은 기존의 교회가 부패하고 썩어질 때에 암흑 속의 하나의 촛불같이 역사의 시간 속에서 빛을 비춘듯한 인상을 받았다.

 

역사 속의 그들은 당시에는 모두 이단자요 배척자들이었지만 오로지 예수님만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선각자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환원사상은 바로 오직 성서가 말하는 것만 하겠다고 하는 순결하고 때묻지 않은 운동으로서 바로 이 시대에서도 다시 한번 타오를  때인 것 같다.

 

엄청난 교파의 난립 속에서 질서의 파괴가 아닌 "질서의 부여" 바로 그것인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들이 세워가야 할 진정한 그리스도교, 현재의 여러 부정적인 모습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보다 순수하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들이 해결해야 될 그리스도의 교회의 문제점들과 모순점들은 너무나 많은 과제를 나에게 안겨준다.

 

 

II. 로마 교회의 성장 시대 (800-1073)

 

1. 샤를마뉴 (Charlemagne)대제

 

1) 왕위 계승

 

(1) 모하메드 군대를 격파한 샤를 마르텔의 손자로서 아버지 페팽 (Pepin)에게서 왕위를 계승함.

(2) 768년 즉위하여 46년간 재위하면서 영토 확장에 주력함.

 a. 징벌 전쟁 50회

  서 - 스페인 사라센인

  남 - 이탈리아 롬바르드인.

  동 - 색슨인.

(3) 대관식

 a. 800년 크리스마스에 거행

 b. 교황이 금관을 씌우며 로마 황제 칭호를 수여.

 

2) 업적

 

(1) 영토 확장, 교회 옹호 확장 (아우구스티누스의<하나님의 도성>에 감화 받고 건국 정신으로 삼음).

(2) 교육 정책 확장 (어린이에게 시편, 음악, 문법교육)

(3) 기독교 발전...각처에 수도원 설치, 주일 엄수, 11조, 전도강조, 화상 예배금지.

(4) 궁정 학교를 개설하고 사방에서 고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강연.

(5) 영국 학자 앨퀸 (Alcuin 735-804) 초청.

 a. 궁정학교 교수로 초빙. (782년)

 b. 투르 (Tour) 수도원장이 됨.

 c. 저서가 많음.

 d. 제자 라바누스 마우루스 (Hrabanus Maurus, 776-856)는 풀다 (Fulda) 수도원장이 됨.

 

2. 신성 로마제국

 

1) 대제국 분할

 

(1) 샤를마뉴 대제 사후 그의 아들 루이 (Louis the Pious..경건한 루이)가 즉위했으나 그는 호인이며 대국을 통치할 능력이 없어 교황 세력이 다시 일어남.

(2) 루이가 죽으매 아들 3형제가 분쟁하다가 베르덩 조약 (treaty of Verdun에 의하여 영토를 분할함 (840년).

a. 장남 로타아르 1세 (Louis)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 프랑크,로마 황제가 됨.

b. 

 

이전중세교회사 Level 102022-07-13
-초대교회사 Level 102022-07-13
다음전 도 학 Level 102022-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