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5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5학기

제목웨슬리안 부흥운동과 찬송(시) 2022-07-13 16:58
작성자 Level 10

웨슬리안 부흥운동과 찬송(시)
Wesleyan Revival Movement and Hymns

박창훈 (서울신학대학교)

I. 글을 시작하며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에 앞장섰던 두 형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그들의 열정적인 설교(Sermons)를 통해서 부흥운동의 신학과 사상을 전했다. 특히 그들이 사역을 담당하면서 마주한 인물들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편지(Letters), 일지(Journals), 일기(Diaries)를 통해 남겼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적인 자료는 여러 차례 편집된 저서(Works)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기도, 말씀과 함께, 부흥운동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찬송이었는데,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그토록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찬송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부흥운동에서 찬송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떻게 발전했는지? 어떤 곡조와 함께 불렸는지?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까지의 부흥운동 연구에서는 어떤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그 경과와 결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부흥운동의 정서와 감성과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운문의 형태를 가지고, 때로 곡조와 함께 불렸던 찬송에 대하여 연구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존 웨슬리와 함께 부흥운동을 했으면서도 메소디스트(Methodist) 운동의 주변부 인물로 치부되었던 찰스 웨슬리에 대한 삶과 그의 찬송에 대한 견해를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보다 폭넓은 영국 부흥운동의 정서와 배경을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찬송을 통해 현대 교회의 영적인 침체의 돌파구를 발견하려는 이들에게 좋은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논리와 합리성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그리고 이를 반영하는데 찬송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힘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II. 가정에서

두 형제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가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로 돌아선 후,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가난했기에 부유한 학생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옥스퍼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무엘은 이미 1685년 ????공상: 이전에 다룬 적이 없는 주제에 대한 시???? (Maggots: or Poems on several Subjects never before Handled)를 출판했다.
이후 사무엘은 국교회 목사가 되어 목회와 함께 병행했던 평생의 공부가 있었는데, 바로 시가서인 “욥기에 대한 연구”였다. 사무엘은 욥기를 연구하면서, 특히 형식에 있어 희랍의 호메로스의 시와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물론 시 연구 외에도 욥기에 언급된 식물, 광물, 전쟁학, 법학 등의 지식을 쌓는 기회가 되었고, 후에 욥기에 나타난 고난의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시로 표현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당시 시는 무신론이나 경박함, 또는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이용되었으나, 사무엘의 시는 단순히 시골교회 목사의 교구 경계를 넘어서 여러 목회자들에게 읽혔고 그만큼 사무엘의 시는 영국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존 웨슬리 자신도 아버지의 욥기 연구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학문적인 연구의 넓이에 대하여 인정하였으며, 결국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욥기 연구를 당시 캐롤라인 여왕(Queen Caroline)에게 헌정하였다. 여왕은 사무엘 평생의 저작인 욥기 연구에 찬사를 남겼다.
사무엘과 수잔나(Susanna)의 18번째 아이요, 어른까지 성장한 아들 가운데 가장 어렸던 찰스(Charles)는 임신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미숙아로 태어났다. 막 태어났을 때, “살았다기 보다는 죽은 것과 같았다.” 신생아 찰스는 울지도 않았고, 눈도 뜨지 못해서 정상적으로 태어났어야 할 기간 때까지 강보에 쌓여 있었으니, 일정기간이 지난 후 겨우 눈을 뜨고 울 수 있었다. 그의 세상에서의 첫 소리는 이렇듯 불쌍하고 안쓰러웠으나, 이후 80세(1707-1788)를 넘어 살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찬송과 말씀을 전했다.
찰스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아버지처럼 형 존보다 더 국교회의 전통을 고수하는 쪽에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와 찬송을 좋아하는 그 기질과 함께 정서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기감정에 충실하였다. “찰스는 감수성과 불과 같은 열정으로 충만했고, 그의 참을성과 겸손은 기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정을 꽃피울 때는 쾌활함과 생동감으로 친구들의 마음을 새롭게 끌어올렸고, 매우 사려 깊어 최선을 다해 친구들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니,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함이 있어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때로 개인적인 동정이 강한 열정과 만나면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형은 상대적으로 어머니를 닮아 냉정할 정도로 이지적이며, 깔끔함과 질서에 대한 개념이 강했는데, 가끔 형이 동생을 설득할 때는 “바람을 마주하는 것”같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찰스는 자기감정에 복받쳐 정서적 침체를 경험하기도 했다.
두 형제의 이러한 기질 상의 차이는 물론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성장하면서, 그 환경과 조건에 따라 더욱 구체화 되었으며, 웨슬리 집안의 가정교육을 담당했던 어머니 수잔나의 교육 프로그램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수잔나는 엄격하고 규칙적인 교육을 통하여,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여자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전 9시에서 정오, 또 오후 2시에서 5시까지의 시간에 아이들은 할당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리를 뜰 수 없었는데, 매 공부는 시편의 노래와 성서를 읽는 것으로 시작했고, 시편의 노래와 성서를 읽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버지로부터도 고전과 언어 그리고 신학을 배웠는데, 아버지는 대개 시로 표현을 했다. 다시 말해 웨슬리 가족은 시인의 가족이었다. 아버지, 세 아들 그리고 적어도 한 명의 딸은 시를 써서 출판했다.
찰스가 9살 되던 해 1716년, 아버지의 목사관을 떠나 큰 형 사무엘이 있었던 런던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School)로 옮기게 되었고, 그 곳에서 큰 형에게서 배웠으니, 두 세대에 걸친 두 명의 사무엘(Samuels)에게 국교회의 이상과 시를 익혔다. 1727년에 찰스는 옥스퍼드로 옮겨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재정적으로 몹시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옥스퍼드에서 찰스는 당시 학생들이 대개 그렇듯이 카드, 극장, 음악, 그리고 무도회 등의 오락에 빠져들었다.
찰스의 방탕은 결국 아버지의 걱정을 얻었고, 아버지는 목회를 돕고 있던 작은 형 존을 옥스퍼드로 보내어 상황을 조사하도록 일렀다. 존은 찰스가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신앙적인 면에서는 부정적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찰스는 “형은 단번에 나를 성자로 만들려는 거요?”라며 형의 충고를 거절하여 두 형제 사이에는 격한 논쟁이 있었다. 이후 극적인 화해가 있었고, 찰스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찰스는 스스로 신앙에 대한 의지를 생활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 성찬에 참여하고, 두어 명의 친구들과 신앙서적을 읽는 모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임에 누군가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별명을 붙였으니, 존이 참여하기 전에 이미 옥스퍼드의 크라이스 처지(Christ Church)에는 메소디스트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메소디스트는 찰스 웨슬리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1729년 11월에 존이 이 모임에 참여하여, 성서 연구, 예배, 병자와 수감자 방문, 거룩한 교제를 갖게 되면서, 메소디스트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후에 찰스의 소개로 메소디스트 운동에 참여한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당시의 생활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제 나는 아침과 저녁 외에도, 두 차례씩 기도를 하며, 시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III. 모라비안과의 만남

1733년 석사학위를 마친 찰스가 옥스퍼드에서의 생활을 계속하여 연구와 가르침의 사역을 담당하기 원했으나, 1735년 아버지의 죽음은 웨슬리 형제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변화시켰다. 아버지의 사역을 누가 대신할 것인가? 어머니 수잔나는 어떻게 모시는가? 아버지가 남긴 빚은 어떻게 처리하는가? 등 이러한 집안의 책임을 떠맡은 이는 존 웨슬리였다. 큰 형은 학교에 직장이 있었고, 찰스는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재산을 빚을 갚는데 처분하고, 어머니는 누나 에밀리(Emily)와 함께 지내기로 하면서 존과 찰스는 옥스퍼드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6개월이 채 안되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따라 존과 찰스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존이 조지아 식민지에서 이민자 목회를 맡기로 하면서, 동생 찰스에게 강권하여 같이 갈 것을 종용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남아서 목사안수를 준비해야 할 찰스였으나, 형의 권면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일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키지 않는 여행 때문이었을까? 대서양의 폭풍우 속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선실은 찰스를 혼돈과 고통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철저한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찰스는 다음과 같은 찬송시를 썼다:

내가 기꺼이 이 땅을 떠나,
고통과 죄의 검은 집으로 간다면;
기쁨엔 그림자가 드리우고 비통함은 커져만 가면서
유혹하여, 내 하나님으로부터 나를 분리하는 곳;
행복은 의심스럽고 불완전하니,
죽음만이 내가 그분의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네.

찰스의 이 절망의 시는 1739년 찬송가에 포함시킬 때, 존은 찰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려고 동생의 수기를 교정할 때, 위의 연 다음에 강한 어조로 “아니다!”라는 단어를 써넣었고, 결국 재판을 낼 때는 “죽음만이”를 “믿음만이”로 바꾸어 출판하였다.
폭풍우가 영국 목회자가 있는 선실에서는 절망과 공포를 몰고 온 반면, 독일인 모라비안(the Moravians)이 있었던 곳에는 믿음 있는 찬송이 울려 퍼졌다. 독일인 부녀자들과 아이들의 평안한 찬송에 깊은 은혜를 받은 존과 찰스는 모라비안들의 찬송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의 시는 폭풍우 속에서 모라비안들이 불렀던 찬송가였다:

당신의 두려움을 바람에 날려버리시오;
소망하시오 그러면 낙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한숨을 들으시고, 당신의 눈물을 세신다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머리를 들게 하신다오.

파도와 구름과 폭풍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부드럽게 닦아 여시니;
당신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면, 이 밤은
곧 끝나 기쁨의 날이 될 것이오.

여기서 모라비안의 찬송이 단순히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인 신학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찰스는 바로 이 심정과 마음에 작용하는 믿음의 힘에 대하여 경의와 존경과 부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모라비안들의 찬송으로부터 받은 감동이 너무도 컸기에, 웨슬리 형제는 아메리카에 도착하자 찬송가집의 출판을 준비했다. 최초의 메소디스트 찬송가는 이런 연유로 두 형제가 비교적 짧은 기간 머물렀던 아메리카에서 출판되었으며, ????시편과 찬송가, 찰스타운 모음집????(A Collection of Psalms and Hymns, Charlestown Collection, 1737)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는 예배용으로 사바나(Savannah)에서 해안을 따라 프레데리카(Frederica) 지역에 걸친 교구를 위해서 마련된 것이며, 이 중에 위의 “당신의 두려움을 바람에 날려버리시오(Give to the Winds thy fears)”라는 찬송은 당연히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 ????모음집????은 70편의 시편과 찬송가로 구성되었으며, 특별히 목회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새로운 예배의 변화를 추구한 증거이기도 하였다. 후에 존 웨슬리가 목회를 못할 정도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고소 항목 중에는 바로 이 ????모음집????과 그 사용에 대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몇몇 교인들이 의아할 정도의 내용과 형식이었던 것이 분명하다.(고소 내용 중에는 “시편에서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구절을 변형시켜 교회에서 찬송하도록 공인했다” “교회와 제단 앞의 예배에 어떤 적절한 사법기관에 의해서도 검증되거나 인정된 바 없는 시편과 찬송가의 작곡을 도입했다”) 다시 말해, 영국인들에게는 새로운 독일 모라비안들의 애찬식에서 배워온 찬송이었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에 있어 경건주의적인 것이 영국의 교인들에게는 그리 효과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찬송에 있어 내용과 형식의 차용만으로 부족한 것을 깨닫는데 또 다른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6개월 정도만 머물렀을 뿐, 건강에 어려움을 느꼈던 찰스는 뉴잉글랜드를 거쳐 형보다 앞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738년 어간 찰스의 영적인 상태는 형과 유사했다. 찰스는 심한 불안정과 좌절과 절망을 경험했으며, 그 후 희미한 희망을 보았다. 이러한 찰스의 상태는 1738년 성령강림절 주간이었던 5월 21일에 절정에 달했다. 찰스 웨슬리는 형 존처럼 당시 모라비안 지도자였던 피터 뵐러(Peter Bӧhler)로부터 영적인 보호와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 때 찰스는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기 시작했고, “게으르고 죽어있는 믿음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작용하여 모든 선한 일과 성결을 열매로 맺는 믿음”을 원했다. 찰스가 아파 침대에 누워있었을 때,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내가 믿습니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겁에 질려 말했다. 찰스 웨슬리의 인생에 있어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경험해서 이를 “오순절 날”과 같았다고 밝히고 있다. 찰스는 이제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마음과 감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찰스는 회심 때, 찬송을 한 편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최초의 복음적 찬송시”라 불리는 “내 의아해하는 영혼 어디서 시작할까?(Where shall my wondering soul begin?)”이다:

오, 내가 어찌 선하심을 말하리요?
아버지여, 당신께서 보이신 그 선하심을 말입니다.
분노와 지옥의 아들인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다니요!
내 죄가 용서 받았음을 알고 느끼게 되니,
미리 맛보는 하늘의 축복이여!

위에서 보듯 분명히 “죄 용서”에 대한 앎 그리고 느낌이야말로 웨슬리안 회심, 부흥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이 용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가능했다는 복음의 신학은 지식의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가슴을 울리는 진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시는 계속된다:

버림받은 자들이여, 내 그대들을 부르노니
창기들과 서기관들과 도둑들이여!
주께서 팔을 펴시고 그대들을 안으시리니
죄인만이 그의 은혜를 받도다.
의인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나니
주님은 잃어버린 자 찾아 구하러 오셨네.

새로운 존재로서의 기쁨이 다른 이들에 대한 초대로 이어진다. 죄인이라 스스로 느끼는 이들에 대한 초대는 분명히 부흥운동의 요소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찬송은 이제서야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바로 성령강림절에 성령이 일으키는 느낌과 그 느낌의 전이를 일으키는 초대였다.
이 후 두 형제에 의해 출판된 찬송은 실로 엄청나다. 1780년 ????메소디스트를 위한 찬송집????(A Collection of Hymns for the Use of the People Called Methodists)이 나오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번역과 편집과 출판을 거듭했다. 특히 찰스에 의한 찬송과 찬송시는 6,000편을 넘는다. 많은 찬송은 위의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제외하고도, 크게 몇 가지의 기존 자료를 쓴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바로 국교회의 ????공동기도문????(the Book of Common Prayer)이다. 특별히 ????공동기도문????의 시편집(the Psalter)의 구절과 성찬시이다. 그 외에도 탄원시(the Litany), 모음집(the Collects), 세례, 혼례, 장례, 감사 등의 주제와 형식은 국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온 것이다. 웨슬리는 만약 국교회 전통이 아니면, 성서에서 온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둘째, 이미 웨슬리 형제보다 먼저 복음찬송을 시작한 아이작 왓츠(Issac Watts, 1674-1748)의 찬송이다. 칼튼 영(Carlton R. Young)은 왓츠의 찬송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하였다. 우선, 회중이 한 번 들으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형식이었다. 둘째 내용은 단순히 성서로부터 왔고 “우리”보다는 “나”를 썼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인 체험과 생각, 느낌과 갈망에 기초한 찬송이었다. 셋째, 왓츠의 찬송은 강단의 설교를 설명, 강조, 고조시키는 기능이 강했는데, 설교는 잊혀지지만 찬송은 오랫동안 남아 신자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결국 종교적, 공동체적, 서정적, 규칙적이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웨슬리안 찬송의 특징은 무엇인가? 왓츠는 성서 한 구절의 말씀을 통해, 찬송에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 90:1의 찬송 “예부터 도움 되시고”(O God our help in ages past)와 같이 한 절의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부터, 넓게는 “주 달려 죽은 십자가”(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에서처럼, 성서의 한 이야기에 대한 묵상을 통한 찬송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찰스의 찬송가에서는 보다 복합적이고, 우아하며 독특한 형식이 보인다. 다시 말해 운율을 규칙적으로 사용하여 리듬을 일관되게 살리고 있으며, 각 연(stanza)이 논리적으로 점점 발전을 이루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성서와 시적인 은유가 서로 잘 조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2:24-32을 주제로 한, “오 당신의 이름 모를 여행자여 오시오”(Come, O thou Traveller unknown)에서처럼;

오 당신의 이름 모를 여행자여 오시오,
내가 꽉 붙잡고 있으나, 볼 수는 없나니!
이전의 내 친구들은 떠났고,
이제 당신과 홀로 남았으니;
당신과 밤새도록 남아서
날이 새도록 나는 씨름을 하리라.

여기서 시인은 야곱이 되었고, 이제 씨름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갈등의 과정이 되고 있다.

당신에게 나의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으리
내가 겪은 어려움이나 죄조차도.
당신이 바로 내 이름을 붙였으니
당신의 손을 보고, 읽기만 하소서
그러나 당신에게 묻나니, 당신은 누구시오?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시오. 지금 나에게 말이오.

그런데 이미 이 두 번째 연에서, 이사야 43:1과 요한복음 20:27의 내용의 은유로 중첩되어 신학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성서의 이야기들을 넘나들면서 신학적인 집중과 고양을 경험하게 된다.

놓여나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요,
나는 잡은 것을 결코 놓지 않으리니
당신은 나를 위해 죽으신 인자가 아니신가요?
당신의 사랑의 비밀이 드러나
씨름하며, 당신을 놓지 않으리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본성을 알기까지는

위의 3연에서 야곱과 씨름한 여행자의 이야기는 구약의 신관을 넘어서서, 신약의 구속자와 연결되어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위의 시는 6행으로 구성된 12연의 찬송시로, 후에 존 웨슬리는 동생의 장례식에 붙여 이 시야 말로 최고의 찬송시라는 헌사를 남겼다.
마지막으로, 웨슬리의 찬송시에 반영된 자료들은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큰 형 사무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헨리 모어(Henry More), 존 바이럼(John Byrom) 등의 저자를 확인할 수 있다.

IV. 부흥의 기로에서

웨슬리 형제로부터 비롯된 메소디스트 부흥운동의 신학적 특징은 설교와 신약주석을 통해 알려졌지만, 이제 찬송에도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 형제의 찬송은 내용 상에서 분명한 발전의 모습이 있으나, 이제 그 형식적인 특징을 알아보자.
이전까지는 국교회의 교회와 교구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나, 부흥운동은 교구제도를 허무는 대중집회와 순회전도를 통해 교회의 권력과 특권에 싸여있던 기존 질서를 깨트리는 기능을 했다. 메소디스트를 따르는 이들은 옥스퍼드의 귀족 학생들로부터 도시(빈민)촌, 탄광촌, 공장 등 가난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형식은 전통적이고 차갑고 형식적인 종교의 틀이 아니라, 이른바 대중적인 정서와 영적 필요를 채울 수 있어야 했다.
메소디스트들은 집단적으로 남성들과 여성들이 번갈아 가며 노래하는 공연식 예배를 드렸으며, 때로 대화식 찬송을 하기도 했다. 여성들이 예배당에 별도의 자리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파트는 남성과 중복되지 않았다. 곡조에 있어서도 헨델의 오라토리오와 세속적인 오라토리오 등 당시의 대중음악으로부터 차용하여 썼기에, “왜 모든 좋은 곡들은 악마가 가져야 하는가?”라는 말처럼, 다양한 음악을 사용했다.
대중음악을 메소디스트의 찬송으로 사용한 것은 작곡가 존 람페(John F. Lampe)의 ????대축일을 위한 찬송가????(Hymns on the Great Festivals and Other Occasions)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독일태생의 음악가였던 람페는 1740년대 영국으로 가서 헨델과 교류를 가졌고, 이 때 웨슬리 형제를 통해 회심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찰스의 부탁으로 메소디스트 찬송에 곡조를 붙였던 것이다.
특이한 것은 찰스 웨슬리가 플리머스(Plymouth)에서 행한 옥외설교를 방해하던, 술취한 선원들이 있었다. 선원들은 대개 그렇듯, 큰 소리로 “낸시 도슨”(Nancy Dawson)이라는 술집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를 크게 불렀다. 이 곡조는 후에 “뽕나무숲을 돌자” (Here we go round the mulberry bush)라는 곡으로 알려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동요와 유사하다. 찰스는 다음 집회에서 바로 이 “낸시 도슨”의 곡조에 찬송을 실어 부르게 만들었고, 술취한 이들 조차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찬송이 되었다.
찰스는 목소리도 특별했다. 좋은 목소리로 브리스톨(Bristol)에서 옥외설교할 때는 계곡과 언덕에 모인 청중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고, 스스로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트럼펫과 같은 목소리를 주셨다고 증언했다. 특히 찬송할 때는 더욱 좋은 목소리였는데, 설교하는 중간에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찬송을 부르곤 했다. 설교를 단순화하고, 강조하여 찬송으로 표현하면 그 감동은 배가 되었고, 찰스는 그런 면에서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1760년경 부흥운동에 참여한 조지 벨(George Bell)과 토마스 맥스필드(Thomas Maxfield)가 인도하던 런던 메소디스트 모임에서 집회 시작부분에 모두가 서서 오랫동안 찬송을 하며, 소리를 지르던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결국 이 은사주의자들의 모임은 큰 비난을 받게 되었고, 후에 메소디스트 내부에서나, 칼빈주의자들로부터나, 찰스 웨슬리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메소디스트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징계가 내려졌다.
이에 1761년 웨슬리 형제는 ????찬송가 선집????(Select Hymns)에서 널리 알려진 운율로 된 핵심적인 몇 개의 곡조로 여러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배당하면서, “찬송을 하는 방법”을 7가지로 나열하였다. 첫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의 내용은 1. 이 곡들을 배워라. 2. 그 곡들을 정확히 부르라. 3. 모든 절을 다 부르라. 4. 열정적으로 부르라. 5. 겸손하게 부르라. 6. 속도에 맞춰 부르라 이다. 여기까지는 대개의 찬송가나 합창에 대한 일반적인 권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일곱 번째 지침은 다음과 같다:

VII.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찬양하라. 여러분이 찬양하는 한 마디, 한 마디 속에서 하나님을 주시하라.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피조물들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데 목적을 두라. 그러기 위해 여러분이 찬양하는 내용의 의미에 주목하고, 여러분의 ‘마음’이 노랫소리와 함께 날아가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하라. 그러면 여러분의 찬양을 ‘주님’께서 만족해 하실 것이고 주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상을 주실 것이다.

웨슬리 형제가 가사만이 아니라 곡조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정확히 익히고, 분명한 영성으로 부를 것을 왜 강조했을까? 그것은 바로 가사만이 아니라, 곡조와 결합된 가사의 힘이 부흥운동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전도와 선교의 과제를 분명히 알리고 기억시키는데 분명한 방법이라고 알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찬송은 메소디스트 부흥운동의 “신학적 기억”이 되었던 것이다. 찬양이 부정확하고 싸늘해진다면 교회의 생명력도 식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V. 전문성 또는 대중성

찰스 웨슬리는 평신도 설교자들에 대한 부분에 있어 형 존과 심한 갈등을 빚었다. 자격이 부족한 설교자들이 오히려 부흥운동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은사주의자들의 열광주의 모임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찬송에 대한 찰스 웨슬리의 태도도 이러한 염려와 기대가 함께 있었다. 즉 한편으로 찬송은 새롭게 등장하는 대중들에 대한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 되었고, 대중들의 신앙과 정서를 부흥운동의 전면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음악은 전문가들을 통해 훈련과 연구가 계속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과제였다.
찰스가 전문적인 음악가로서 가까이 한 대표적인 이는 “메시야”(Messiah)의 작곡자 헨델(George F. Handel)이었다. 찰스와 헨델의 만남은 존 리치(John Rich)라는 사람의 집에서 식사하며 이루어졌다. 리치 부부는 메소디스트 최초의 작곡자이며 헨델의 조력자였던 람페를 웨슬리 형제에게 소개한 사람들이었다. 찰스와 헨델은 좋은 우정을 과시했고, 1749년과 1752년 사이 헨델은 찰스의 시에 직접 곡을 붙여 3개의 곡을 작곡했다. “초대-죄인들은 복음의 말씀에 복종하네”(The Invitation-Sinners Obey the Gospel Word), “사랑의 갈망-오 사랑의 하나님, 얼마나 감사한지요”(Desiring to love-O Love Divine, How Sweet Thou Art), “부활절에-기뻐하라, 주는 왕이시다” (On the Resurrection-Rejoice, the Lord is King) 등이다.
찰스가 전문적인 음악가들과 교제하며, 초대하고, 음악적인 유대를 갖게 된 것은 특히 두 아들 찰스 웨슬리 2세(Charles Wesley, Jr.)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의 음악교육에 관해서였다. 두 아들의 음악적인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찰스는 브리스톨의 집에서 공개적인 연주회를 개최하곤 했다. 특히 찰스 2세에 대하여는 보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시켰다.
찰스가 자녀들에 대해 정성스런 음악교육을 쏟고, 음악가들과 극장에 가깝게 되자 메소디스트 내에서도 비난의 여론이 일었다. 특히 존 플렛처는 이렇게 경고했다:

당신 형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들이 있다는 것도 명심하시오. 그들은 당신의 음악, 교우, 부유한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불평하고, 이전의 열정과 검소함이 없어진 것을 지적한다오. 죄악된 모습들을 없애기 위해 당신에게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1769년 찰스는 아들의 음악교육에 대한 비난에 직면해서, “아들을 음악가로 키우는 마당에, 어찌 음악가들을 지옥의 연주가들이라 부를 수 있겠소? 나는 지옥의 연주가들도 있지만, 천상의 연주가들도 있다고 대답하는 바요.” 그 후 찰스와 부인 샐리(Sally)는 아들의 연주회를 개인적인 초대로 바꾸어 계속 진행했다. 그러나 1777년에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의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찬 바하(Johann Christian Bach)가 런던에서 지휘할 때, 찰스의 아들 사무엘이 즉흥 오르간 연주를 하도록 주선했다. 찰스는 계속해서, 음악과 그 전문성에 대하여 빗발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연주회는 하나님의 뜻이요, 절대적인 기쁨이며, 음악은 거부할 것이 아니라 양육되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했다.
때로 존 웨슬리도 동생 찰스의 자녀에 대한 음악 교육과 음악적인 전문성을 강조하는 자세를 비판했다. 하지만, 존 웨슬리는 아리아, 오라토리오, 발라드 등의 연주회를 통해 상류계급의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VI. 결론

웨슬리 형제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시와 찬송의 교육적인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특히 찰스 웨슬리는 기질적으로 운율과 시, 찬송과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설교와 신학으로 또 한 사람은 찬송과 감성으로 부흥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커플이었다. 웨슬리 형제를 통해서 부흥운동은 이제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영역, 특히 찬송의 연구가 계속되어야함이 분명하다.
웨슬리 형제를 통해 새롭게 시작된 부흥운동의 찬송은 분명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대중음악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는 전문가들이 아닌 대중이라도 쉽게 따라 부르고, 쉽게 가르쳐줄 수 있는 전파력을 가진 것이었다. 교육받지 않은 이들도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일반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진 곡들이었기에, 부흥운동의 메시지는 찬송과 함께 전파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안 부흥운동은 단순히 신학적인 운동이 아니었으며, 일상적인 삶에서 꼭 필요한 실용적이며, 미학적인 문화 운동이었다.
찰스 웨슬리가 경험한 것과도 같이 찬송의 영역을 점점 넓혀 갈수록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들의 음악교육에서처럼 전문적인 이들을 위한 교육과 투자 그리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중의 문화 정서와 멀어지는 아픔을 스스로 경험했다. 웨슬리 사후, 메소디스트 운동에서 설교자들은 설교의 시간을 위해 찬송의 영역을 줄이고자 했고, 음악을 강조한 이들은 전문적인 찬양대야 말로 예배자의 주의를 끌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웨슬리 형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대중과 음악의 동반적 조화는 깨져서 대중은 수동적인 자리로 찬양대와 오르간의 아래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에서도 회중과 대중의 자발적인 찬송이 극대화 되었던 시기는 부흥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유럽과 영국의 예전적인 음악이 강조됨과 함께 대중의 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찬송은 전문가의 영역으로만 남게 되었다. 정작 음악의 전문성이 강조됨과 함께 대중이 찬송을 부를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결국 대중의 음악적 기대와 역량과 취향은 높아만 지는데 회중은 찬송으로부터 분리되는 안타까움이 있다. 부흥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올바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대중성과 전문성이 함께 추구되는 어렵지만, 반드시 가야 할 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웨슬리안 부흥운동에서 많은 성도들이 찬송을 통해 누렸던 은혜요 능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