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강의실 1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학부 강의실 1학기

제목 영성목회학 운영자 2019-03-072022-06-20 19:00
작성자 Level 10

영성 목회 학

 

21세기 새천년의 목회는 영성 목회여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가 다 일치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기계, 기술, 정보의 시대가 될 것이고 물질과 쾌락과 여가를 구가하는 생활방식은 필연적으로 영적, 정신적 고갈을 가져오고야 말기 때문에 우리가 새 천 년에 추구해야 할 관심과 분야는 영성 쪽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성령님의 물 붓듯 한 역사와 기름 부으심이 마지막 때일수록 강력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목회가 여기에 맞춰져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먼저 영성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느 정신적 삶을 의미합니다. 어느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내면화시켜서 그 정신을 본 받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Socrates의 정신으로 살면 Stoa주의 영성이고, 부처의 정신으로 살면 불교의 영성입니다. 그 외 도교의 영성, 실존주의의 영성, 해방신학의 영성도 말하고 있습니다. 영성이란 자기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 정신으로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겁니다. 그런 것을 위해 훈련 수양하는 것이 영성 훈련입니다. 그 어떤 정신을 이상적 정신으로 설정한 그 정신을 나의 정신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의지, 그래서 내 속에서 두 정신의 oneing 즉 하나되는 엄격한 자기 훈련입니다.기독교 영성과 일반 다른 종류의 영성은 구별됩니다. 일반 영성이 시대나 주의의 정신을 본받아 살아가려는 것이라면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품성을 내 속에 이루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려는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과 훈련보다 성령의 역사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외부세계만큼 큰 소리로 외치지 않기 때문에 도외시되고 무시됩니다. 이 내적 세계는 함몰 웅덩이가 무너져 내릴 때까지 쉽게 무시되는 경향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격렬한 전쟁터 중의 하나는 각 사람의 내면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습니다. 무거운 책임을 지고 수고하고 억압받고 있습니다. 내면 세계를 너무 무시하고 외면세계에만 치중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함몰직전에 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되어온 내면세계가 더 이상 과중한 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됩니다. 외면세계의 활동과 노력 때문에 영적 열정이 식어져 갑니다. 그것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의 피곤은 곧 회복되지만, 영적 황폐는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골짜기의 샘물 (Springs in the Valley)의 저자 Charles Littie Cowman 여사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Africa의 깊은 정글에서 한 여행자가 길고 힘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짐을 옮기기 위해 그는 한 굴속에서 노동자들을 고용했습니다. 첫날 그들은 빨리 움직여서 멀리까지 갔습니다. 그 여행자는 이제 빠른 여행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날 아침 그 원주민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어떠했든 그들은 그저 앉아서 쉬었습니다. 이 이상한 행동에 대해 질문을 해 본 결과 그 여행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첫날 너무도 빨리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이 육체를 따라 잡을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혼란스럽고 성급한 인생을 그 정글의 원주민들은 첫날의 행군에서 겪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그들은 생활의 균형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활동이 통계에 나타나기 때문에 활동을 위한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는 동안 내적으로 유지할 힘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시간은 증가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감소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행하고 비극입니다. 옛 예언자의 소리가 우리에게 실감 있게 들려옵니다. 산이 진동하고 요동합니다. 이 혼돈 공허하고, 하늘은 제 빛을 잃었고, 공중의 새들도 다 날아갔고,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러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리라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도다"(렘 4:23-26) 이제 "대지의 기초가 흔들린다"는 소리는 우리 다수가 경험하고 멀지 않은 장래 인류가 경험할 끔직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땅이 깨어지고..."는 단순한 하나의 시적 형용이 아닙니다. 엄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층이 견디지 못하고 환경오염으로 새는 떠나가고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진동의 사실을 잊어왔습니다. 우상숭배, 과학, 지식, 학문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했습니다. "진보! 무한한 진보가 가능하다. 평화! 온 세계의 평화가 올 수 있다. 행복! 만인의 행복이 여기 있다"고 부르짖는 거짓된 선지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참 예언자 예레미야는 "산은 옮겨가고 언덕도 움직인다. 대지는 꺼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니"라고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요동하고 끊어지고 무너져 내리는 오늘의 물리적 현상은 우리시대 내면의 무질서, 내면의 부실에서 오는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의 함몰이 이 세상의 진동의 원인입니다. 붕괴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영성의 회복이 시급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외적 현상과 외적 변화는 인간내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세계가 무섭게 외부의 세상을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면의 안정, 충만, 유지,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상적인 교회, 교회원형을 제시하는 교회, 표준적인 교회, 정상적인 교회는 초대 Jerusalem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정상적으로 성장했습니다. Jerusalem교회는 모든 교회의 이상적 모델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가 표본을 삼을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그 교회의 교회사역을 알아보는 일이야말로 우선적인 일이요, 기본적 과제입니다. 아마 그대로 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자랄 것이고 성공적 사역이 될 것입니다. 어떤 대장장이가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장장이는 조수를 불러 자기가 하던 일을 맡겼습니다. 말굽모형을 하나 주고서 똑같은 모양으로 100개로 만들어 놓으라고 명령을 하고 떠났습니다.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조수는 주인의 명령대로 100개의 말굽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만들라는 크기보다 엉뚱하게 크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고 간 말굽과 똑같이 만들라고 했는데 어찌된 것이냐는 주인의 추궁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수는 주인이 남겨 놓고 간 말굽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내용이 이렇습니다. 조수는 주인이 남겨 놓고 간 모형을 보고서 처음엔 그대로 말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것을 만들 때는 주인이 남겨 놓고 간 원 모형을 보고서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전에 만든 말굽으로 모형을 삼아 만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또 그전에 만든 말굽을 모형 삼아 만들고... 이런 일이 반복되고 100개째의 말굽은 엄청나게 큰 것이 되었습니다. 100개 만들 때까지 계속 주인이 준 원형을 표본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만든 것이 내 본이 아닙니다. 주인이 준 것이 원본입니다. 우리는 큰 교회, 도시교회, 100년 전의 교회, 세계 우수한 교회를 나의 본으로 삼습니다. 사역의 본은 초대 Jerusalem교회입니다. 항상 우리의 표준은 초대 Jerusalem교회입니다. 그때 그 교회의 목회사역이 오늘 우리 사역의 이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월이 2000년은 지나고 새로운 천 년을 맞는 시점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성장하는 이상적 Jeruaslem교회사역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오늘의 교회에 적용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영성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평신도와 집사들도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의 사역은 영성 목회 결과였습니다. 사도행전 6:1-7의 초대교회는 영성 목회의 좋은 실례입니다.

 

1. 평신도사역의 강화입니다.

 

Jeruaslem교회에는 사도들과 평신도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평신도의 일까지 다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명치 못하다는 것이 곧 발견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로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그래서 분담했습니다. 공궤, 구제, 사회선교 같은 일은 평신도의 몫으로 넘겨주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평신도를 잘 활용했습니다. 일곱 명의 집사를 임명해 그들로 구제, 공궤 등 대외구제 선교사역에 힘쓰게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 열두 사도의 일과 택함 받은 일곱 사람의 일이 꼭 같이 diakonia(사목, 섬김)으로 되어 있습니다. 1절과 4절은 같은 사역입니다. 목회사역과 사회사역은 다 같은 교회의 사역입니다. 어떤 사역도 다른 것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둘 다 기독교사역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을 섬기는 이 두 사역은 다 꼭 같은 목회사역입니다. 목회사역만 귀하고 평신도사역은 천한 것이다 그게 아닙니다. 목사 하는 일만 가치 있고 평신도의 봉사는 낮은 것이다 그게 아닙니다. 똑같은 사역입니다. 그러기에 평신도의 많은 사역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사장된 재원입니다. 그들의 헌신, 믿음, 재능과 은사가 묻혀 활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큰 손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자원들이 방치되어 이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의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사역자의 죄입니다. 게으름입니다. 평신도는 목회자와는 달리 적절한 훈련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교회의 잠재적 자원입니다. 지금까지의 성직자 중심의 편중된 교회구조는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교회구조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Carl George는 미래형 교회인 메타교회(Meta church)는 소 그룹을 통한 교회행동을 강조하고 목회자는 평신도 훈련을 위한 사역에 나서도록 해야 합니다. Jerusalem교회의 목회사역의 구조는 교역자인 사도와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평신도 사역에 나서도록 해야 합니다. Jeruaslem교회의 목회사역의 구조는 교역자인 사도와 평신도인 일곱 집사의 분담과 조화의 사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평신도 사역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시도는 21세기를 위해 우리의 교회들은 이제 평신도 사역자들을 깨우고 키워내고 성장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미래사역, 평신도에게 달려있습니다.

출애굽기 4:12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렘 1:7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로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로 말할지어다". 평신도들이 내가 어떻게 사역을 할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사역자로서 나는 너무나 부족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건 평신도를 영성  훈련, 제자 삼는 교육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으로 파송 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라 하지 말고 가라"고 하십니다. 성숙한 사역자를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 Jerusalem교회처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사람을 교육하여 사역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 평신도들의 사역이 무엇입니까? 평신도는 구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오늘날 소위 사회봉사, 사회선교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보았겠지만 이번 달 기독교 사상지에 황석환이란 사람의 "나는 왜 개신교를 떠났는가"한 요지의 글이 실렸습니다. (99. 11호 기독교사상) 한마디로 사회선교와 봉사가 없고 말만 있는 교회에 환멸을 느꼈다는 요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많은 교인을 빼앗기고 잃고 있습니다.

 

2. 기도사역의 강화입니다.

 

교회는 전임 사역자와 평신도 사역자가 조화를 이루어야 건전하게 발전해 갑니다. 평신도를 훈련시켜 대외사역, 사회선교에 투입하고 교역자의 좋은 협력자로 삼아 동역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나 사회 속에서 목회자의 사역과 책임이 너무나 많습니다. 초대 Jerusalem교회 12사도들은 구제, 공궤, 전도, 사회선교에 힘과 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게 그들의 최상의 사역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의 일들을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도들이 힘쓴 일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기도하기를 전무했습니다. 기도가 사역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사도들이 해야 할 주임무가 되었습니다. 교역자의 사역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정년이 되어 은퇴하신 목사님이 내가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다면 자기는 이런 일에 힘쓰겠다는 작은 책을 한 권 써 놓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항목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더 많은 시간을 내어 기도하겠다".

"기도는 목회의 힘쓸 한 분야다. 목회의 방편이요 수단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보면 기도하는 일 자체가 사도들의 사역이었습니다. 목회의 한 분야가 아닙니다. 목회의 수단도 아닙니다. 목회 그 자체였습니다. 기도하는 일이 목회입니다. 기도는 불멸입니다. 기도하는 입술은 죽어 닫혀질지 모르며 기도를 토로하던 가슴의 맥박은 끊겨질지 모르나 기도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 역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마음이 설레이시고 계시며 기도는 기도하는 자보다 오래 살아 남아 있습니다. 가장 귀한 좋은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가장 오래도록 붙어 계시며 기도는 기도하는 자보다 오래 살아 남아 있습니다. 가장 귀한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가장 오래도록 불면할 것입니다. 기도가 더 많이 드려지고 효과 있게 되어지면 세상은 변화되고 혁명되어지고 천사들은 더욱 능력 있게 움직이고 더욱 신속히 날며 하나님의 계획은 더욱 구체화 되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교회에 하나님은 영화로운 능력으로 나타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언제나 가능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특별한 은총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하늘의 능력과 부와 지혜를 땅으로 끌어내려 유한한 인간을 도와줍니다.

Alexander Hytte 교장은 "세상의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크고 좋은 재능을 주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의 재능이다"고 말했습니다. 목회자가 모든 면에서 부족한 약점이 많아도 기도하는 최상의 무기와 재능이 있습니다. 요는 그것을 얼마나 활용하느냐에 있습니다. Martin Luther의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에게 내일 계획이 무엇이냐의 물음을 받고 "일찍부터 늦게까지 일하고 일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사실 나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첫 세시간을 기도에 사용한다"라고 했습니다. 더 많은, 더 좋은 기도가 목회성공의 비결입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아들은 항상 구하고 아버지는 항상 주십니다. 오늘 목회사역에서 기도를 대신할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위대한 일이며 그 지체는 위대한 사역입니다. Henry Martin의 고백적 기도가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불타게 하옵소서. 결국,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일 중에 기도는 최상의 일이다. 아! 나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면!" 뿐만 아니라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의 기도의 전무도 필요하지만, 교역의 극대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기도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보기도의 강화입니다. Maxwell의 '기도 동역자'이란 책에 보면 기도 동역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John Maxwell이 사무하던 샌디에고의 Skyline 교회에서 맥스 루카도가 한주간 설교했을 때 기도로 목욕했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예배실 입구로 걸어갈 때도 날 위해 기도하는 기도 동역자들을 볼 수 있었고 내가 강대상에서 내려 올 때도 그러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내가 강연을 하는 동안에도, 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기도 동역자들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내가 이 기도 동역자의 중요성에 관해 너무나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된 나머지 내게도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할 것을 다짐하고 또한 나와 함께 열정적으로 기도할 120명의 성도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본교회로 돌아온 루카도는 성도들에게 그의 꿈을 알렸고 정확하게 한 달 후 자원하는 120명의 성도로 기도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4그룹으로 나누어 각 그들은 한 달에 한번 정해진 주일 날 아침 예배시작 훨씬 전에 교회와 교인을 위해 기도하게 했습니다. 6개월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 우리는 지난 6개월 동안 예배 출석 최대인원 기록을 두 번이나 갱신했다.

• 최고의 주일 출석 율을 유지하면서 지난해를 보았다. 

• 지난해에 세운 예산을 훨씬 넘는 지출이 있었다.

• 세 명의 새로운 스탭과 6명의 장로를 세웠다.

• 중한 병들이 치유되는 것은 여러 번 목격했다.

• 나는 은혜가운데 새로운 책의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

• 교회 안의 적대감이 사라지고 단결력이 증대되었다.

 

3. 말씀사역의 강화입니다.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말씀사역은 초대 사역자의 목회전반이었습니다. 그것만 전무했습니다. 역점을 거기에 두었고 그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Jerusalem교회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에 복종 하니라" 교회가 크게 부흥 했을 때 말씀이 왕성했습니다. 설교 잘한다고 다 큰 교회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큰 교회 목사님치고 설교 잘 못하는 목사님은 한 분도 없습니다. 말씀 사역을 최우선으로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결과입니다. 말씀사역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에너지 창조성을 총 동원해서 투자 해야 합니다. 말씀사역의 강화를 위해 우선 설교가의 말씀이 좋아야 합니다. 저는 올 여름 휴가 중 어느 시골교회에 가서 주일 낮 예배를 드렸습니다. 몇 명의 나이든 교인들 앞에서도 그 목사님의 설교가 훌륭한 내용과 짜임새였습니다. 저런 설교를 늘 들을 수 있는 교인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교에 우리는 사활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설교를 대치 할만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교회는 설교 아래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설교하는 소감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중 최상의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설교자 나를 통해서 회중에게 좋은 설교를 하도록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설교자는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왕성해지는 교회 바로 그것이 교회다운 교회의 요소입니다. 교인의 숫자가 불어나고 시설이 좋아지고 헌금이 많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본질 그 자체인 말씀이 왕성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끝에 가서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셋집에 두 해를 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흔히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바울의 장엄한 순교장면을 그리거나 복음이 로마를 점령하는 것을 기록했을 법한데 아주 시시하게 끝난 것 같이 여겨집니다. 왜 그렇게 끝났을까요? 무언가 세계로 향해 뻗어나가는 것을 그려보지 못하고... 여기서 사도행전의 기자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나 목회사역의 실상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셋집에 유하며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말씀을 가르쳤다는 구절을 통해 우리의 교회 환경이 어떠하든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목회사역이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 그래서 제자 삼는 사역이 영원한 과제로 주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노사도가 만년의 초라한 모습으로 자기에게 방문해온 사람들에게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예수님에 관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초라하고 별 볼일 없으나 우리의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새 사도행전을 전개해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국제연합의 사무총장이었던 다크함마슐드가 세계의 도시 뉴욕의 가장 변화한 거리에 위치한 UN건물 안에, 그리고 각 나라의 복잡한 문제와 세계적 이슈를 다루는 UN건물 안에 1957년 「정적의 방」(A Room of Quiet)이라는 명상실을 마련한 것을 보면 그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활동적인 UN 건물, 그 안에 가장 UN하고는 성격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정적의 방」을 설정하고 그 방에서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했다면, 명상과 기도의 시간은 활동의 결실과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마슐드는 정말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보기 드문 기도와 명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침대 곁에는 언제나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 유명한 명상록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가 놓여 있었고, 비행기 추락사고로 끝장낸 그의 마지막 여행의 가방 속에 있던 유일한 책도 바로 이 책이었다고 합니다. 1956년 4월 24일 중동문제로 안보이사회에서 파견되어 베이루트에 체류하면서 아랍제국과 이스라엘의 긴장 사이를 여기 저기 정신 없이 뛰어 다닌 중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해한다 - 마음의 고요함을 통해서

행동한다 - 마음의 고요함으로부터

성취한다 - 마음의 고요함 중에서

그의 행동, 그의 전진, 그의 성취는 바로 마음의 고요에서 얻어진다는 고백입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후에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현대에 있어서 거룩에의 길은 필연적으로 세계를 통과해 간다」 그는 천박한 행동가는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행동의 생활(vita activa)과 명상의 생활(vita contemplativa)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결합되어 일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분주하고 활동적인 생활일수록 고요한 시간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료받고 행동의 기준을 정하고 하나님과 만나 능력을 부여받는 계기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가장 기독교적인 사회정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했던 유명한 성직자 한 분을 압니다. 본회퍼는 그의 명저「공동생활」(Gemein sames Leben)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루 중에 홀로 있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명상의 시간은 혼자서 성서를 읽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남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영적인 실험 같은 것은 일고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세가지를 위해서 시간을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까닭인즉 하나님이 친히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명상이란 오랫동안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한 봉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것일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가 고백교회의 목사 연수소에서 경건을 중요시하면서 연수생들에게 아침식사 후 30분간의 명상의 시간을 엄수케 했고 지나치게 수도적이었는데 그것은 생명력으로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경건한 사람이었고 따라서 가장 행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함마슐드와 마찬가지로 본회퍼의 경우도 경건과 명상과 영성 생활이 바로 그의 다채로운 여러 활동과 행위를 가능케 했고 그 활동에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습니다. 과제가 중대합니다. 나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많은 기도와 하나님 앞에 앉아 말씀을 대하는 깊은 영적 침잠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Ⅰ. 서문 

 

목회에 있어서 「영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고찰을 오성춘교수가 지은 「영성과 목회」책을 읽고 개론적인 면, 신학적인 면, 그리고 실천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현대 목회에서 신학적 인식의 부족으로 오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검증하고 오늘날의 목회현장에 적용해 보았다. 특히 Donald G. Bloesch교수가 쓴 「목회와 신학」을 읽고서 그 안에서 논하고 있는 14개의 주제 가운데서 「성경적 설교의 필요성, 예전의 갱신, 세례의 위기, 교회의 권징, 성령의 은사」등 다섯가지의 주제를 선정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주제들을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하는 명제를 가지고 이해하고 생각해 보았다. 

 

Ⅱ. 본문 

 

1. 기독교 영성 

 

1. 기독교 영성의 필요성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개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성경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 : 7 ~ 8)"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영적인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 한국교회는 개인의 구원을 중시하는 교회와 사회의 구조악을 개혁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교회와의 사이에 복음이해가 서로 다르고 그리스도인의 사명 해석도 서로 다른 '분리주의적 복음이해'로 시련을 겪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더욱 영적인 훈련이 필요함을 실감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지금 진실로 예수님이 명하는 제자들을 시급하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성장을 방해하는 세 가지의 요소들 -죄와 세상 그리고 사탄- 이 있기 때문에, 또한 이 3자는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서 온갖 권세를 다 사용하기에 우리는 유독 자기훈련 뿐만 아니라 영성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에 바울 사도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라고 선언한다. 그럼,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되는가 ? 하는 의문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놀랍게도 갈라디아서 6장 8절은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으려면 영성 훈련이라는 통로를 거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필요성에 대한 요약이자 핵심이다. 

 

2. 기독교 영성의 의미. 

 

「영성」이라는 용어는 유독 우리 기독교뿐만 아니라 스토아 주의, 불교, 도교, 해방신학 등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한자로의 영성(靈性)은 단지 글자 그대로 신령한 성품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 훈련의 이론과 실제들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영성(Spirituality)이란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인 과정이다. 

 

1. 일반적인 이해 

영성은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든지, 또는 누구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성이라는 말은 자기가 판단할 때 가장 이상적이요 최고의 덕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분명한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 주는 하나의 정신을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살고 죽는 것을 의미한다. 

 

2. 기독교적 이해 

일반적인 영성과 기독교 영성은 비교해서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인 예수의 삶과 인격과 정신을 본받아 살며 그의 성품을 그리스도인 속에 형성하려고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어 살고자 힘쓴다. 그러기에 훈련을 강조한다. 또한 기독교 영성은 일반 영성을 뛰어넘는 독특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대체로 일반 영성이 역사적 인격의 정신과 사상과 삶을 본받으려는 인본적인 영성인데 반하여,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과 삶을 계승하려는 인본적인 요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우리와 직접적으로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추구하는 수직적이요 하나님 중심의 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의 의미는 다음 네 가지의 정의로 결론지어지게 한다. 

 

(1)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삶의 구현이다. 

(2)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다. 

(3) 기독교 영성은 주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의 삶이다. 

(4)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3. 기독교 영성의 요소. 

 

많은 학자들이 각기 기독교 영성의 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포괄적으로 기독교 영성의 요소들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어반 T. 홈즈 (Urban T. Holmes)는 5개의 영성의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관계형성 능력이며, 그 관계의 대상은 감각현상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이 관계는 우리의 노력과 별개의 것으로, 감각세계를 초월하는 확장된 의식을 우리에게 부여하며, 그 관계의 경험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본질을 받으며, 세계 속에서 창조적인 행위를 결단하여, 초월과의 관계의 경험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실제로 세 가지로 압축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요소는 기독교 영성은 본질이 아니라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동양적인 영성의 주류가 인간의 성품의 수양과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기독교 영성은 인격적인 초월적 존재와 관계를 맺고 사는 삶을 강조한다. 두 번째 요소는 그 관계가 감각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간은 초월 자와의 관계에서 체험되고 확장된 우리의 인식은 구체적인 역사현장에서 그 본질을 받으며, 그 현장에서 행동을 통하여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4. 성령과 기독교 영성 그리고 교역. 

 

1. 성령 

그리스도인은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적,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사탄과 정욕과 세상이라는 세 가지의 커다란 적으로부터 늘 시험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적들을 물리치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계는 그것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도 진정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친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성령」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령 안에서만 진정한 인격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요, 인격적인 삶이라고 이야기할 때에도 예수님과 갊은 인격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고칠 때에라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리스도인 속에 성령의 열매로 열리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과 성령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듯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영성, 그러니까 기독교 영성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이 되는 핵심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령과 영성은 성령의 은사와 영성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는 오늘날 성령운동가들이 말하는 초 자연적인 몇 가지의 은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칭의 의 은사,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은사, 말씀과 섬김의 은사들을 말한다. 

 

 

2. 교역 

 

헨리 나우엔 (Henri J.M. Nouwen)은 영성과 교역의 관계를 "교역은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교역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갇힌 자에게 자유를, 소경에게 다시 보게 함을, …… 영성은 우리를 광야 사막과 산 위로 보내어 기도하게 하는 것이요.……" 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교역과 영성이 본래부터 분리된 두개의 영역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 양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의 삶의 양면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교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고 싶어하는가'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에 지나치게 소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가페를 가지고 교역현장에서 하나님의 교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영성 훈련의 실제 

 

1. 영성 훈련의 요소. 

영성 훈련의 요소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19장 1 ~ 10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의 사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성의 4단계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준비단계' 이다. 진정한 의미의 영성은 예수님과 인간이 만나는 순간에서부터 이야기할 수 있으나, 인간을 사랑하고 그를 구하고자 하는 열망을 마음에 품고 인간을 찾아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이니시아티브와 하나님을 갈망하여 그분을 찾으려고 자기 집을 나서는 인간의 준비가 없이는 만남의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영성 훈련에는 '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배우고 구체적으로 훈련하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만남의 단계' 이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한 개인 개인을 인격적으로 부르시며,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함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세 번째는 '교제와 사귐의 단계' 이다. 기독교 영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의 삶에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와 영광이 바로 이 교제의 삶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쳐 들어오기 때문이다. 즉 주 예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회개와 변화의 단계' 이다. 영성 훈련의 끝이 바로 우리의 회개의 삶이다 여기에까지 이르지 않는 기독교 영성 훈련은 사실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영성 훈련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는 '사랑으로 기도 드리는 것과 자기의 삶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 자기의 경험의 의미를 명료화시키는 것과 자기의 삶 속에 현존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자기만의 시간을 지속하는 고독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을 파악하여 지도하여야 할 것이다. 

 

 

2. 영성 훈련의 기본구조. 

영성 훈련의 기본구조는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갖는 「골방훈련」,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인 「Q.T훈련」, 하나님이 나의 삶의 변두리로 취급되지 않고 세상도 외면되고 도외시되지 않는 「Q.T와 하나님과 나와 세상」이 있고, 말씀, 삶, 기도, 찬양, 음식, 물질, 죄의 고백과 용서, 인도 사역의 나눔 훈련인 「성도의 교제」, 「예배•찬미•성찬」, 「참여와 봉사」가 있다. 

 

3. 말씀훈련•기도훈련•기도훈련의 실제. 

 

1. 말씀훈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는 대체로 세가지 의미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신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설교를 가리키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이러한 성경에 우리는 지식훈련과 생명훈련의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 지식훈련은 양적인 훈련에 치중하나 인격변화에 중점을 두는 생명훈련의 방법은 양적 판단을 삼가고 질적인 훈련에 초점을 맞춘다. 이 양자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다 필요한 접근 방법이다. 성경공부의 유형들로는 강의 식 성경공부 방법, 모자이크식 성경공부 방법, 조감도식 성경공부, 귀납법적 성경연구 방법이 있다. 말씀훈련의 네 가지 유형들로는 신 구약 통독훈련, 성경공부 훈련, 말씀묵상 훈련, 성구암송 훈련이 있다. 

 

2. 기도훈련과 실제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을 함께 바라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게 하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운명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중보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기도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예수님이 경계 하신 잘못된 기도이다. 기도의 유형은 부르짖음의 기도, 음성기도, 침묵기도, 묵상기도, 영상기도 등이 있다. 기도훈련의 실제에 있어서는 대표적으로 말씀기도와 찬송기도가 있는데 말씀기도는 옛 수도원에서 했던 것처럼 말씀을 한 절씩 읽어 나가면서 그 뜻을 생각해 기도하는 것이고 찬송기도 역시 찬송가의 가사를 생각하며 기도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3.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이상에서 우리는 기독교 영성의 필요성과 의미, 요소를 간략하게 알아 보았고, 교역에서 의 위치를 살펴 보았다. 또한 영성훈련의 요소와 기본구조, 그리고 훈련의 실제를 간략하나마 알아보았다. 이러한 영성의 개념을 오늘의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실현하고 적용해야 하는가 ? 하는 문제는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영성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성령에 의해 도움받기도 하며 교역의 현장에서 절대적으로 교역을 도와주는 주부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같이 거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끊임 없는 연습과 훈련을 쌓아 경건에 이르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이었던 말씀과 기도, 찬송의 모습이 이러한 규칙적이고 끊임없는 훈련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참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영성훈련의 목적이다. 

 

4. 목회의 제요소에 대한 신학적 검증 

 

1. 성경적 설교의 필요성 

[검증] 

아모스의 시대처럼 하나님 말씀의 기갈이라는 말을 우리는 점점 더 흔하게 듣고 있는 때에 우리는 성경적 복음적 설교의 퇴보를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설교는 교인을 가득 메운 교회들에서 여전히 전달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은 풍성히 갖고 있지만, 꼭 필요한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은 부족한 영적 기갈시대에 살고 있다. 포사이드 (Forsyth) 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설교가 이 복음을 죽이고 있다." 라고 주장했으며, 신부 머피 오커너는 오늘날 사회가 점진적으로 비기독교화 되는 것은 설교실패의 탓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으로 설교자들의 기술적 무능성과 영적 평범성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 덧붙였다. 

오늘날 성경적 설교의 부재의 이유는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기 위해 연구를 하고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개신교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중산층을 목회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목회자는 귀족층의 가치와 편견을 초월하기 어렵다. 

 

[적용]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어지고 있는 설교내용이 성경적 설교가 되기 위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첫째,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나 내용이 아니고, 설교자의 자질 문제이기에 설교자는 바른 신학으로 기반을 갖춘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설교의 위기는 복음적 메시지의 변질에 있다. 이것은 한국교화가 당면한 거대한 위기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설교가 물량주의와 기복주의에 많이 편승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교인들의 교육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말씀은 말씀이기를 원한다. 

셋째, 설교는 예언자적 선포가 수반되어야 한다. 설교는 크게 네가지 즉 순수한 전도 설교, 교훈적인 설교, 위로의 설교 혹은 목양설교, 마지막으로 예언적인 설교이다. 특히 예언적 설교는 회개를 촉구하고 이 사회의 부도덕을 지적하고 정치의 부조리를 지적한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법도 즉 명령을 청중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열심히 선포하나 간음에 대한 명령이나 신성모독에 대한 명령은 설교하지 않는다. 

 

넷째, 성경적 설교의 대표적인 강해설교와 케리그마적 설교가 되어야 한다. 

이상으로 한국교회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 이러한 명제들을 거듭 인식하고 더 나은 선포와 성경적인 설교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서 21C의 한국교회가 성경과 말씀위에 굳건히 서도록 모든 신학도와 설교자들을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예전의 갱신 

 

[검증] 

교회의 머리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요, 교회의 역사는 영적으로 임재하신 성령 하나님의 일이시다. 이러하신 하나님께서 예배를 요구하시기에 예배는 교회의 심장부에 위치하며, 교회의 생명은 예배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예배의 갱신이야 말로 교회 갱신의 최우선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주일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그리스도 인의 삶 자체가 예배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현장에서 교역하는 목회자들은 수 많은 예배의 문제점들 중 "예배의 신학의 빈곤"을 제 1순위로 지적한다. 예배가 순수하게 하나님께 대한 구속과 감사와 은혜에 대한 경배라기 보다는 복 받기 위한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예배 신학이 바로 정립되지 않은 데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본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너무 중히 여긴다. 그래서 다른 순서는 상대적으로 무가치 내지는 부수적 순서로 지나쳐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몸소 제정하신 성만찬에 있어서는 그러한 경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독교의 예배는 말씀 예배와 성례전 예배가 올바른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완전해 진다는 사실을 한국교회는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감정에 호소하는 부흥회 성격의 예배는 질서가 혼란케 되고 무절제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내용 없는 감정"으로 일관되어 그 예배를 드린 사람의 생활은 절제와 균형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이요, 교회 성장의 지나친 욕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적용] 

위에서 논한 문제점들을 갱신할 수 있는 방법과 원리는 무엇인가 ? 여기에서는 이 문제점들을 토대로 한국교회의 예배의 새로운 갱신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예배에 대한 본질적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교제 또는 만남이다." 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공적인, 혹은 사적인 예배에 있어서 예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인식을 철저히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예배 중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이런 윤리적 측면으로부터 예배의 갱신은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는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항상 예배의 처음과 나중이다. 어디까지나 기독교는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강복하심에 대하여 예배자가 믿음 으로 감사에 응답하는 행동이 있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측면에서 갱신되어야 한다. 교회 예배가 꼭 이교도들이 드리는 예배와 같은 행위와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기복적인 자세를 극복할 때 교회의 갱신은 이루어질 수 있다. 

 

의식은 하나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하나님께 접근하고 나아가는데 있어서 질서 있게 하는데 한 가지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은 "하나님의 식탁에서의 예의"라는 말이 있다. 예배 의식의 주의할 사항을 알아보면 첫째, 의식이 예배자의 자발성을 억제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의식을 외관적, 외부적으로만 지키고 마음의 진정한 느낌을 표현하지 않는 의식은 위식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셋째, 의식이 인간의 명의로나 또는 인간에 의해 행하여지는 가증스런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의 의식화, 형식화 현상은 이제 갱신되어야 한다. 

 

3. 세례의 위기 

 

[검증] 

성례로서 세례는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여진다. 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현시대의 세례는 예수를 믿는 생명의 신앙과 분리되곤 한다고 한다. 폴 틸리히는 '자연과 성례전' 이라는 논문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성례전이 죽어간다" 고 경고했다. 물론 근래에 이르러 성례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러 신학자와 교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빈곤성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이 세례의 위기는 성례전의 신학에 대한 빈곤과 성례전에 대한 교역적, 실천적 중요성의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세례에 대한 성서적이고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이해가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관습적인 세례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고 또 정확한 이해에 서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목회현장에서 강력하게 실천되지 못 한다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할 것이다. 

 

[적용]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물로 머리에 흘리는, 삶에서 그저 흘러가는 형식으로서의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묻고 있다. 목회사역에 있어서 세례는 과연 무엇인가 ? 세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하나님의 예식이다. 성 어거스틴은 성례를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징표라고 정의 했다. 분명 세례는 그런 징표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하나의 수단이다. 단순한 구원의 확신의 의식이 아니라 구원을 주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현대의 세례의 위기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정체성에서 위기가 왔고 목회적 측면에서 그 실천적 의미를 상실했다는 데 있다. 세례가 처음 성례로 주어졌을 때의 감격과 신앙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교인들의 삶과 신앙에 어떤 매개도 촉매도 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른 것이다. 교회와 교역자는 나름대로의 세례준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피상적이고 관계적인 절차로 나아간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당사자만의 의식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축제와 정결한 의식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리고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개인적인 신앙확립과 더불어 기독자로서의 자의식을 갖추고 선교적 책임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세례 이후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때 까지 교회공동체가 제도적으로 공식적으로 교육적 배려를 해야 한다고 본다. 교육의 대상에 있어서도 유아세례인 경우 그 부모에 대한 신앙적 교육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특히 유아를 신앙 속에서 양육함에 대한 의미와 방법 등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유아세례를 주고 방치한다면 그 아이의 입교는 무의미해 진다고 볼 수 있다. 세례를 현시대에 맞게 의미를 주고 살리려면 성령의 임재가 느껴질 수 있는 목회적인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4. 교회의 권징 

 

[검증] 

선교 2세기를 맞는 한국교회는 '참 교회' '참 교인'의 자성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고, 그러한 교회의 질서가 혼탁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 더욱 더 필요로 느끼며 인식하는 것이 '교회의 치리와 권징의 필요와 목적'이다. 한 가정이나 사회가 살아가는데도 치리가 반드시 필요한데 교회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치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교회의 영혼이라면 교회의 치리는 인대와 같아서 몸의 각 지체들을 연결시킨다" 고 하였다. 이 치리 제도란 '말의 굴레'와 같아서 그리스도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어거하고 길들이며, '아버지의 회초리' 같아서 마음을 일깨우고 타락한 사람들을 부드러운 그리스도의 영으로 벌을 준다. 따라서 이 치리의 필요성을 거부하고 설교 이외에 "개인적인 충고와 교정" 등을 배격하는 사람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은 이 치리를 강조한다. 그 이유는 루터가 이신칭의에 머무르는 경향에 반하여 개혁교회는 성화, 그리스도인의 생활, 율법의 제3사용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터의 경우는 이 치리의 측면이 너무 약하고 죄가 카톨릭의 경우는 너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치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지렵혀지지 않기 위함인데, "합당치 않은 사람"에게 떡과 즙을 주는 것은 주님의 몸을 개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과 같아서, 이들에게 수찬 정지를 해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몸이 더렵혀 짐으로 이 치리가 필요하다. 셋째로 결국 최종의 목표는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는데 있다. 현재의 치리의 의도와 목적은 일반법 이해나 사회유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과 칼빈의 신학 사상을 기초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자의 올바른 행위를 위한 계명을 등한시, 무시, 불순종,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주권적인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그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명령을 그대로 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교회로서,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 또는 무시하면서 참 교회가 될 수 있을 까? 죄와 타협하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된 사명은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권징의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제자화 교육이 잘 되었다는 서울의 '사랑의 교회'에서도 물의를 일으키는 순장이 있을 경우 다음해에 임명하지 않는 정도의 치리아닌 치리를 행하며 대부분의 교회들도 권징에 대한 사례가 거의 없다. 참된 교회의 보기로서 권징은 시행되어야 한다. 장로교회, 개혁교회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 말씀대로의 성례전 집행과 말씀대로의 권징의 시행을 말하고 있다. 

 

[적용] 

교회는 성도가 성장해가는 일에 가르침과 권면과 시정하기 위한 징계로 양육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게" 해야 하고, 주님의 모든 분부하신 대로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는 지도의 책임이 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구원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생활로 계명과 율례를 지켜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생활로 계명과 유례를 지켜야 하고, 성도다운 의와 거룩한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규율대로 지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삶에 있어서 우리 각자는 진실로 약한 자이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자들을 통하여 믿음에 강화를 위하여 독려하게 하셨다. 아직도 신앙이 어리고 성장과정에 있는 자를 말씀으로 교육시키고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를 권면하여 행하도록 격려해주고 짐짓 악을 범하는 자를 충고, 경계, 처벌해서 고쳐가도록 회개시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가 되어서 교회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 교회법 질서가 확실히 세워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한국교회는 권징의 효율적인 모습을 갖기 위해 권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인으로의 양육이 우선이며 교인들에 따르는 교적부의 활용을 증대시키고 권징을 시행하는 교회의 책임 있는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 앞에 공정하게 행하여 사적 감정이나 이해문제를 완전히 떠나서 사랑과 영적인 권위로써 교인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새워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 지도와 권면과 징계는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는 신자가 거듭난 사람,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런 믿음과 순종은 신자로 하여금 성숙한 자가 되게 하여 나아가서 사회에서 빛 된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 봉사를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우선과제는 헌법에 있는 권징이 아니라 교육으로서의 권징이 시급하다 하겠다. 

 

5. 성령의 은사 

 

[검증]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우리가 권능을 받아 온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주의 증인이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인 성령의 힘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일어난 A.D 30년,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기도에 힘써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 함으로서 교회가 이 땅 위에 시작되었다. 사도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할 때, 이 모습을 술 취한 것으로 보았던 성령의 충만한 상태는 분명 이성적인 모습과 육의 눈으로 볼 때는 해괴한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재 인식이 필요한 지금은 어쩌면 그 당시의 강력한 성령의 은사의 재창조가 필요하다고 보고 특히, 은사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장로교는 제 교회가 물질과 양적으로만 팽배해져 상당히 존립의 위기라고 하는 현 시대에 다시 한번 성령의 은사와 그 능력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하며 그 어마 어마한 능력을 사모해야 할 때라고 본다. 

 

[적용]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 역사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는 적절한 성령의 은사를 발휘할 장을 교회 안에서 발견해야 된다. 우선 교회 안에 성도들이 보일 때 서로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갖도록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먼저 그들이 마음 속에 안도감을 갖게 하고 두려움이 없도록 분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교회에 모일 때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느낌과 기대를 가지고 나온다. 교회에 나올 때 하나님이 무언가를 말씀해 주시고 행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믿음과 기대감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나온 사람에게 이 앞에 있는 강단에서만 하나님이 말씀 하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역사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교회 안에서 회중들이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임할 때 그 안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 다음은 성령의 은사가 교회 안에서 진행되기 위해서 바른 조직을 두어야 한다. 모든 조직 속에서 하나님의 그 깊으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분위기와 여유가 만들어져야 한다. 둘째, 성령의 은사가 교회 안에서 바르게 역사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 마음이 불편해지고 거북스러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낮은 물이 되기 보다는 깊이 흐르는 강이 되어야 한다. 셋째, 성령의 은사가 교회 안에서 올바로 역사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교회 안에 함께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의 분위기 가운데 관계를 맺어야 한다. 넷째, 성경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성경적인 지도자가 예배를 인도해 줄 때 예배에 참여한 모든 회중이 마음에 참된 안도감과 평안을 느낄 것이다. 다섯째, 우리가 기대치 않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은사가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섯째, 교재권 속에 있거나 그들에게 알려진 사람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끝으로 일곱째, 성령의 은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따라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우리가 골고루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그 확신에 근거해서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우리의 삶의 부분 부분마다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Ⅲ. 결론 

 

이상의 고찰에서 두 가지의 큰 맥을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는 목회에 있어서의 영성의 위치와 의미, 중요성, 그러하므로 영성 훈련의 필요성과 실제이고, 다른 하나는 목회에 있어서 신학적 기초와 배경의 중요성, 그리고 바른 신학적 적용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다. 21세기를 맞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명실공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축복을 풍성히 받은 자들로서, 그리고 복음의 빚을 진 자들로서 그 사랑과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깨어 노력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을 돌이켜 제반 부정적 증상들을 찾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야 한다. 앞으로도 우리는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지금까지 제시한 여러 가지 훈련과 적용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올바른 교회가 되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 영성

 

Ⅰ. 서론

 

A. 문제제기 및 연구의 목적

지난 한 세기를 통해 한국 교회는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특유의 성격을 형성하며 발전해 왔다. 한편으로는 놀라운 교회 성장을 가져 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체질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을 노출 시켰다. 교회의 양적 급성장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질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성숙과 방향의 모색이 선교 2세기의 과제라 하겠다.

최근에 이르러 한국 개신교 내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영성 훈련, 영성 신학, 영성 목회 등의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성 신학의 정립의 부재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하고 많은 부정적 문제들이 나타났다. 

아이리스 컬리는 현대인의 절망을 애기하면서 이 시대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영적 성장을 위한 교육을 제창하고 있다.1)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신앙의 본질을 되찾으며, 성인들의 질적인 삶을 향상시키고 교회가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새로운 영성 운동의 방향정립이 요청된다. 따라서 본 소 논문 연구의 목적은 영성의 개념을 정립하며 성인들에게 어떻게 영성 훈련을 적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중점을 둘 것이다.

 

B. 연구방법 및 내용구성

본 소 논문은 먼저 영성의 개념정립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기독교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또한 현대에 있어서 영성의 필요성과, 성인교육으로서의 영성 훈련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Ⅱ. 기독교 영성이란?

 

A.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는 많은 혼란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한자로 쓰면 "靈性"은 글자 그대로 신령한 성품을 의미하는 말로 드린다. 영어의 'spirituality'는 정신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해석할 수 있다. 영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기독교 영성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학자들의 견해를 통하여 영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브랜들리 한센은 영성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그는, "영성이란 인간의 삶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확신에 따라서 사는 한 개인이나 한 공동체의 삶의 스타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정의는 영성에 있어서의 두 가지 면을 분명히 제시해 주고 있는데 첫째로, 영성은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믿음의 체계 즉 이해의 체계라는 것이다. 둘째로, 영성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체계로 끝나지 않고, 그에 따라 사는 삶의 구체적 표현의 체계 즉 실천적 체계가 그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영성은 나름대로의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해에 따른 삶의 구체적 표현, 즉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브랜들리 한센의 영성에 대한 정의는 삶에 대한 이해와 이에 따른 구체적 표현의 두 부분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데, 영성은 단순한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요 삶의 본질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에 따라서 사는 삶의 형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여 통합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을 분석해 보면, 지적인 차원, 정서적 차원, 의지적 차원 등 세 가지의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차원적 요소들이 인간 속에서 통합되어지는 것을 가리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성이란 맹목적 행동주의도, 단순한 감정주의도 아니며, 또한 단순한 지식이나 도그마의 체계도 아닌 인간의 세가지 차원 즉 지적 차원, 정서적 차원, 평가적 차원이 연속성 속에서 통합 되어 진 구체적 실제를 말한다. 홈즈는 영성의 범위를 전통적 범위로 한정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는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의 관계성 형성 능력이며, 그 관계의 대상은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이 관계는 주체의 노력과는 별개의 것으로 확장된 또는 고양된 의식으로써 주체에 의해 인식되며, 역사적 상황 속에서 본질을 받고 세계 속에서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낸다."

 

김외식 교수는 홈즈의 정의를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영성이란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실재를 존재의 심층 수준에서 관계맺고자 하는 인간의 능력 혹은 수용성이며, 이 관계성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자각, 혹은 자기 지식을 얻게 하여 역사 안에서 창조적인 행위로 투신하게 하는 의식과 에너지 일체를 말한다" 홈즈의 영성에 대한 정의를 보면 첫째, 영성을 관계성으로 파악함으로써 감각 현상을 초월하는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성을 영성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 규명하고 있다. 두 번째, 이러한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가져오게 하며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고 따라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 삶을 향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세 번째, 자신이 새롭게 맺은 대상들인 초월적 존재, 자기 자신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표현을 말한다. 위의 정의를 참고하여 영성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자 한다. 영성은 삶의 궁극적 실체와의 만남을 통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의 만남으로 이 만남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목적의식을 갖게 하며, 또한 삶에 대한 새로운 정서의 수용을 체험케 한다. 또한 영성은 새로운 이해와 내면의 수용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궁극적 실체, 자기 자신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관계적 이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 삼자들에게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B.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 있어서 영성이란 단어에 대한 구약적 뿌리는 영(靈)에 해당하는 단어인 '루아흐'이다. '루아흐'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바람, 숨, 생명의 원리, 하나님의 능력 등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는 구약에 약 389회 사용 되어져 왔다. 구약에 있어서 영에 대한 이해를 몇 마디로 요약해 보면, 영은 인간이나 생물에게 있어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인간에게 임하는 분으로서 소개되며, 하나님의 영은 인간세계에 임하여 생명을 소생시키고, 공의와 자비를 베풀며,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만들며, 또한 능력을 제공하는 본체로서 소개되어지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 영성에 대한 학자들의 이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노만 샤우첰의 영성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만 샤우첰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영적인 교제에 강조점을 두면서 "기독교 영성은 주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 가운데서 경험하는 삶의 변화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샤우첰은 세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로 기독교 영성이 주 예수님과의 영적인 교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두 번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는 삶의 변화를 가져 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 번째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샤우척은 기독교 영성은 주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요, 주님과의 인격적 교제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죤 매쿼리의 기독교 영성 이해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매쿼리는 인간을 하나님께 영을 분배 받은 영적인 존재로 이해함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했으며, 인간의 영의 역동적 성격을 "exience" 곧 자기를 초월하여 밖으로 나가는 능력으로 보았다. 메쿼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그리스도론 적으로 이해하여 기독교 영성을 "인간의 자기초월의 영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성령)과의 만남을 통해서 인간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그러나 매쿼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성령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으로 이해하여 모든 창조의 영역을 성령의 영역으로 보고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회복만 아니라 피조 된 전 우주의 회복에까지 확장시키고 있으며,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가 개방되어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노력하는 exience 의 공동체가 될 때에 진정한 영성을 함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이리스 컬리의 기독교 영성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컬리는 기독교 영성을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관계"라고 하는 점에서 샤우첰 목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컬리는 

① 먼저 기독교 영성을 교회력에 비추어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②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인간관계, 생태계와의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③ 기독교 영성의 개발 즉 교육과 양육을 통해서만 진정한 영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샤우첰목사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이리스 컬리는 영성을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관계의 측면에서 보고 있으나, 

①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②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하여 어떻게 인간과의 관계의 삶을 정의, 사랑, 평화의 관계로 회복할 것인가 하는 점에 중점을 두며, 

③ 영성은 성령의 역사임이 분명하나 인간의 응답을 개발하는 교육과 육성을 통해서만 진정한 영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영성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서 컬리의 독특한 영성 이해의 장점이 있다고 하겠다. 결국 컬리의 영성이란 기도와 묵상과 예식과 성서연구와 영적 자료를 통해 조직적으로 깊이 있게 삶을 개발하는 것이요, 그 영성을 표현하여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공동체 속으로 전달하는 삶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기독교 영성 이해를 살펴보자. 머튼은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본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관상과 행동의 조화와 일치의 가능성을 관상기도의 삶을 통해 오늘 우리시대에 중요한 영성 모델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머튼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이 보는 세상을 함께 볼 수밖에 없으며, 그분과 함께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에 행동으로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12)

 

C. 영성의 의미

지금까지 나는 기독교 영성의 의미가 무엇이며, 여러 학자들은 기독교 영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잇는 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다시금 기독교 영성을 4가지로 정의하여 보고자 한다.

첫째로,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삶의 구현이다. 기독교 영성은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삶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필생의 삶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두 번째로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다. 기독교 영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구현되는 그리스도 자신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정욕과 세상이라는 세가지 거대한 적에 둘러 쌓여 공격과 시험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적들을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세 번째로 기독교 영성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의 삶이다. 기독교 영성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교제에 초점을 맞춘다. 즉 기독교 영성 훈련은 "나" 개인을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분과 만날 때 우리가 변화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영성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의 삶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이란, 크리스천이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사는 삶을 말하고 있다.16)

 

D. 영성훈련의 방향

그리스도인의 영성 훈련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목표이다. 이것은 곧 전인적인 지, 정, 의의 균형적인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여 수평적인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나타낼 때 온전한 영성이라 할 수 있다. 머튼(Thomas Merton)은 인간의 영성적 삶은 행위의 문제이기 전에 존재의 문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가 행위보다 존재론적으로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존재와 행위는 같이 나타나야 하지만 먼저 존재론적인 정립이 되어 있을 때 그 행위는 가치를 발하게 되고 생명력을 찾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존재론적인 상태에서 머물게 됨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머튼의 "인간이 자신의 심령 속을 겸허하게 비우고 정화하여 자신의 깊은 중심을 통과하여 하나님에게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나와서 사심 없는 깨끗한 마음 가운데서 동료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에게 자신을 개방하여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은 영성의 나아갈 방향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2:26),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고 말한다. 행함은 곧 관계성에서 나타나고 그 관계성은 자기를 떠난 모든 관계이다. 이것은 혈연, 국가, 민족을 초월한 곳까지 나아가야 하며, 아울러 자연과의 관계에까지 그 범위가 넓혀져야 한다. "성령의 9가지 열매(갈5:22-23)를 살펴보면 이러한 열매는 다른 사람들과 사귐의 관계를 통해서만 들어날 수 있는 자지??이다."라고 지적한 아이리스 컬리의 말에 우리들은 깊이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이루어진 감격과 기쁨이 자기 속에 내재된 상태에 머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죽은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이웃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로 나타나야 하고 역사적인 책임으로 응답되어져야 한다. 그럴 때 영성은 꽃을 피우게 되고 열매를 맺고 모든 사람을 윤택하게 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곳까지 전진함을 의미 한다.

 

E. 영성 생활의 진보 단계

⑴ 회계의 단계

㉮ 여러 가지 유혹과 싸워 이김

㉯ 죄를 거슬러 싸움

㉰ 회계와 고백

 

⑵ 정화의 단계

① 외적 감각의 정화 : 감각의 지나친 사용과 오관의 요구를 영성적 필요가 있을 때 억제하여, 믿음으로 조명된 이성의 법칙에 그 감각을 예속 시킴을 말한다.

② 내적 감각의 정화 : 상상과 기억, 상식, 평가력 등의 정화를 말하는데, 특히 상상력과 기억의 정화가 중요하다. 상상력은 긍정적으로 발휘되면 하나님 나라의 신비, 말씀의 오묘한 뜻과 위대한 능력을 깨닫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기억력은 좋고 나쁜 지식이나 체험 내용을 축적하고 있다. 따라서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억은 잘 간수 하되 저해가 되는 기억들은 정화할 필요가 잇다. 기억력을 정화하기 위해서 지난날의 죄와 상처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③ 정욕의 정화 : 정욕은 그 자체로서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으나, 선을 위해서나 악을 위해서나 사용될 수 있는 에너지이다. 정욕이 선을 위해 사용될 때에는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만, 악을 위해 쓰일 때에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니게 됨으로 정화가 필요하다.

④ 지성의 정화 : 지성의 능동적 정화는 우선 이해, 판단, 추론 등의 기능을 유익하게 쓰지 못하게 가로막는 요인을 제거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헛되고 무익하고 죄와 연루된 모든 생각을 거부함을 뜻한다.

⑤ 수동적인 정화 : 이제까지 자신의 결점을 정화하기 위해서 은총을 받으며 스스로 노력하던 능동적 정화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친히 정화시켜 주는 것을 수동적 정화라 한다.

 

⑶ 조명의 단계

수동적 정화의 단계를 지나 성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의 빛 가운데서 사는 삶을 말한다. 이 은총의 비추심 안에 사는 크리스천은 다음과 같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① 복음의 권고대로 선을 행하며 사는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② 깊은 기도생활을 하게 된다.

③ 능동적으로 예배를 참여하며, 기쁨과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예배 드리게 된다.

④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⑤ 자신의 생애를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내어 맡기게 된다.

 

⑷ 일치의 단계

하나님 안에 연합되는 하나됨의 단계이다. 일치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상에 머물 수 있으며,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간다.

 

⑴, ⑵단계는 능동적 기도이며, ⑶은 계시 진리의 핵심에 단순히 머무는 수동적 단순기도이다. ⑶에 열거한 항목들은 이 단계에 머무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삶의 변화를 열거한 것뿐이지, 그렇게 노력한다는 뜻과는 구별되며 신비기도로 넘어가는 단계이다. 

⑷는 진리 안에 머무는 것과 예수님 안에 머무는 단계로 신비기도라고 볼 수도 있다.

 

F. 영성 훈련의 목적

⑴ 기독교 영성 수련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그의 형상을 본받으려는 삶의 과정이다.

⑵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 이루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성령의 역사이다. 따라서 영성 수련은 하나님과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가는 삶의 양식이다.

⑶ 임재하신 하나님께 기도, 묵상, 성경말씀, 예배 등으로 응답하며 계속적인 훈련을 쌓아가면서 우리 속에 창조의 역사를 행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놓는 연습이다.

⑷ 영성 훈련은 임재하신 그분을 응답하는 자로서 새로운 성품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가난한 자, 눌린 자, 고통 당하는 자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고쳐 나가는 성령의 활동에 능동적으로 협조하는 의도적이고도 계획적인 수련과정이다.

 

G. 영성 훈련의 기본구조

⑴ 침묵 훈련 

⑵ 고독훈련

⑶ 기도훈련

⑷ 묵상훈련

⑸ 금식훈련

⑹ 청빈훈련

⑺ 순종훈련

⑻ 섬김훈련

⑼ 극기와 절제 훈련

⑽ 회개와 고백훈련

⑾ 예배훈련

⑿ 경축훈련

 

H. 영성 훈련과 교회교육(성인교육)

 

영성 수련은 시대적 흐름으로 보나, 깊이 있는 영성 생활을 목말라 하는 이들의 간구를 채워 줄 수 있는 점으로 보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회교육의 한 분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 신학이나 영성 수련에 대한 각 교회나 교인들의 반응은 두 가지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각 교단 별 신학대학원에서 큰 기대와 관심 속에 80년대 초부터 실시되어 온 영성 신학 강좌와 1980년대 이후에 쏟아져 나온 수 많은 영성 신학에 관한 문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대변해 주고 있다. 또한 보수 측과 진보 측을 막론하고, 여기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증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부정적 반응이 나타나기도 한다. 보수적 경향을 띤 일부 지도자들은 영성 수련을 구원의 하나님의 주도권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수련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인 심신운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영성 수련에 대한 또 다른 부정적 반응은 이른바 진보 측의 일각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영성 수련의 강조는 크리스천의 삶을 개인구원에 대한 관심과 노력에 치우치게 하여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사회의 구조 악과 싸워 공동체적 구원을 성취하려는 사회참여에 소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은 모두 영성 수련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결여로부터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영성 수련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하려는 것이 아니며, 개인 구원만을 위해서 안일한 신앙생활에 안주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성 수련은 세례를 통해 원죄를 씻음 받은 크리스천의 한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동안 보다 더 하나님의 현존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전폭적인 위탁 행위인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손에 자기 삶의 주도권을 내맡긴 사람은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라 형제와 이웃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 전체의 구원을 위해 연대적인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 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균형을 잘 이룬다. 그러므로, 영성 수련은 교회교육의 중요한 분야로 받아들여져 진지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각급 교회학교의 수준에 알맞은 프로그램 개발과 아울러 청, 장년부, 나아가서는 신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목회자들의 영성 생활 강화 프로그램이 밀도 있게 짜여져야 한다.

 

Ⅲ. 구체적인 방법/실천과 대안

 

A. 절제와 나눔의 삶을 향한 실천적 제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성의 이원성(二元性)의 극복이라고 생각된다. 이제까지 우리의 교회는 타성에 젖은 구태 의연한 종교로 안주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적 영성이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내 속에 구체화 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영성은 성령의 역사를 믿고 성령께 자신을 헌신하는 삶의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영성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만나는 길이며, 수직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수평적인 이웃에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이원론이든 영지주의든 우리 모두는 이것을 솔직이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영을 지닌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접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듯 영성은 인간의 노력의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기초를 둔다. 이 관계성이란 초월 자와의 인격적인 삶의 관계를 통하여 초월의 체험을 하는 것이며, 이러한 초월의 체험은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을 통해서만 구체화22) 된다고 훔즈는 말한다. 이런 구체화 되는 영성을 우리는 결론적으로 "고난(苦難)과 수덕(修德)"23)이라는 측면에 두고 싶다. 고(苦)는 하나의 사변이 아니라 삶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경험과 연결 되는 삶인 것이다. 고라는 것은 자기 좌절과자기 버림에서 시작된다. 고를 아는 자만이 영성의 참 의미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란 것이 그저 하나의 상태로써 끝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는 바로 희망(希望)이란 것과 연결될 때에만 그 의미를 드러낸다. 희망, 바로 고통에 의미를 주는 것은 희망이다. 인간의 모든 정서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에는 명시적으로든 함축적으로든 반드시 이 믿음이 깔려 있다. 희망은 고통의 부정성을 생명의 긍정적으로 바꿀 줄 아는 정신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의 힘을 이야기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 때 보다 현대(現代)에 더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가 믿고 신봉했던 그 동안의 과학기술의 발달과 공업기술의 개발은 이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좌절감으로 인간 생활에 압력감을 가중 시키고 있다. 그뿐이 아니라 우리는 인간고의 새로운 차원의 인식으로 인간이 과연 이러한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희망의 힘에서 고(苦)라는 영성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본다. 우리 시대의 문명의 위기는 절재능력을 상실한 인간의 지나친 탐욕과 소유지향적, 성취지향적 사고와 삶에서 비롯되고, 또한 획득 한 물질적 또는 정신적 재화에 대하여 다수의 공유가 아니라 소수가 독점하려는 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먼저 나눔의 실천과 체험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물질적인 재화뿐만 아니라 고통과 아픔 역시도 해당된다. 사랑은 표현되는 모습들로만 알 수 있다. 표현되지 않고 실천이 없는 사랑은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자기만족일 뿐이다. 나눔은 사랑의 표현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고난을 통한 관계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것은 인위적인 고난의 형성과 체험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오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즉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관계에 대한 조화의 필요성에 대한 요청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고난을 통한 사랑의 나눔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절제"와 "나눔"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철저한 자기의 부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의지가 있을 때에 신앙과 신학, 신앙과 삶의 二元性은 극복되리라고 본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가?

 

B. 영성 수련의 실제

 

1) 침묵 훈련

침묵은 하나님의 현존을 찾기 위해 우리의 모든 언어를 비워 둔 여배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다 쉽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고 순화시킨다. 침묵은 영성 수련의 가장 기본적이고 탁월한 방법이며 하나님의 신비를 가르쳐 주는 위대한 스승이다. 완전한 침묵은 우리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자기의 무능성을 깨닫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침묵수련에는 말로부터의 자유수련, 비움수련, 귀 기울임 수련, 일상 속에서의 침묵 이 있다 여기서 다 살펴 볼 수 없으므로 말로부터의 자유수련에 대하여서만 알아보고자 한다.

 

☞ 목적 : 이 수련은 침묵의 기초 단계로서 말을 하지 않고 고요히 머무는 연습을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말을 안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을 하는 것이고 자기 이외의 존재나 상황 등에 대해 관심을 덜 갖게 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말을 중단하고 가만히 않자 있으면서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리와 자기 바깥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 성서본문 : 전도 4:1-2, 마태14:23

 ☞ 대상 : 영성 수련에 참가하는 모든 성인

 ☞ 소요시간 : 1시간 정도

 ☞ 준비물 : 성서, 필기도구.

 ☞ 장소 : 조용한 곳

 ☞ 기대되는 효과

 

 1. 침묵의 풍요로움을 깨닫는다.

 2. 자기 안팎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3. 모든 사물의 말없는 말을 민감하게 들을 수 있다.

 4. 성령을 통해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다.

 

▣ 진 행

 

 1. 찬송가 171장을 함께 부른다.

 2. 각자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어깨를 바르게 펴고, 양손은 무릎 위에 살며시 놓는다.

  이때 손바닥을 살며시 펴서 하늘을 향하게 한다.

  눈은 살며시 감을 수도 있고 반쯤 뜰 수도 있다.

  눈을 뜰 경우는 특별한 곳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편이 좋다.

 3.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츰 고요 속에 들어 간다.(약 10분 정도)

 4.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자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음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

 5. 말없이 앉아 있을 때의 어색함에 주의를 기울인다.

 6. 10분이 지나면 진행자는 종 등을 이용해서 정해진 10분이 흘러 갔음을 알려 준다.

 7. 4-5명씩 1조가 되어 10분 동안의 느낌과 어려운 점등을 이야기 한다.(5분 정도)

 8. 각 조의 대표 한 사람이 조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하여 돌아가며 발표한다.(10분 정도)

 9. 같은 방법으로 다시 15분 동안 고요히 앉아 있는다.

 10. 15분 후에 진행자가 종소리로 침묵을 풀고 다시 7-8단계를 반복해 보며,

  처음 침묵수련을 할 때와 어떤 점이 다른지를 이야기해 본다.

 11. 진행자는 전체 의견을 수렴하고, 영성 수련에서의 침묵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해 준다.

 12. 찬송가 380장을 함께 부른 후 참가자 중 한 사람의 기도로 마무리 짓는다.

  

2) 기도훈련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해 본적이 없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너희는 기쁨에 넘칠 것이다."(요16:23-24)

 

기도훈련은 영성 훈련의 가장 핵심적인 훈련이다. 기도는 크리스천이 세례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성령과 함께 하나님을 '압바'라 부르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부름으로 시작된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이며 영적인 호흡이다. 성서는 기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힘이라고 가르쳐 준다.(렘33:3, 왕하 20:5) 기도의 유형으로는 음성기도, 묵상, 정감의 기도, 단순함의 기도, 주부적 기도, 정적의 기도, 일치의 기도, 순응 일치의 기도, 변형 일치의 기도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는 음성기도에 대하여서 살펴보고자 한다. 음성기도는 주로 공적 기도나 예전적 기도로 많이 쓰이는 형식이지만 개인기도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기도 양식은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의기도를 비롯하여 많은 기도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 음성기도는 하나님을 부르는 '아버지', '하나님', '주 예수여'등의 부름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로 마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기도의 내용은 찬양, 감사, 회개, 중보, 청원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음성 기도를 드릴 때는 주의와 확고한 헌신을 가지고 드려야 한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닫고, 그 기도를 누구에게 드리는지를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음성기도를 할 때, 어떤 형식이나 규칙을 세우고 그 속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자신의 필요와 마음의 흐름에 따라서 편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다. 

 

☞ 목적 : 외적 내적 침묵에 잠긴 상태에서 성서 말씀을 통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사랑과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그분 안에 머문다.

  ☞ 성서 본문 : 시편 139:1-18, 시편 23, 이사야 43:1-5중 택일한다.

  ☞ 대상 : 영성 훈련을 하는 모든 사람

  ☞ 인원 : 15-30명

  ☞ 소요시간 : 40 - 50분

  ☞ 준비물 : 성서, 찬송가, 필기도구

  ☞ 장소 : 예배당이나 기도실

 ☞ 기대되는 효과 

 

1. 성서 말씀을 읽고 느껴지는 감사와 사랑을 기도로 표현할 수 있다.

2. 성서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읽음으로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기도 하는 이에게 직접 주시는 개별적인 말씀으로 느낄 수 있다.

3. 보다 잘 기도하려는 긴장에서 벗어나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4.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친구가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 진 행

1. 조용히 앉아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외적 내적 침묵에 잠긴다.

2. 찬송가 453장, 550장, 423장 중 한 장을 택해서 함께 부른 후 성령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3. 참가자들이 두 사람씩 짝지어 앉아서 성서 내용에 인칭대명사 '나'나 '내' 또는 고유명사 '이스라엘' '야곱' 등의 말에 자기 짝의 이름을 써 넣으면서 성서를 옮겨 적는다.

4. 성서를 다 적고 나면 두 사람씩 조용한 곳을 찾아가서 말씀을 받기 위한 기도를 드린 후 서로에게 천천히 읽어 준다.

 

예) 하나님은 나의 목사시니,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누워 놀게 하시고

나를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내 몸에 생기가 넘친다.

 

5. 성서 읽어 주기를 마친 후 손을 잡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 기도하기 전에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서로 이야기하면 더욱 실제적인 기도를 들릴 수 있다.

6. 이번에는 성서 말씀에 각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자기 자신에게 읽어 준다.

7. 읽기를 마친 후 성서본문을 넣어 기도한 후 기도문을 글로 써서 간직한다.

8. 찬송가 404장을 함께 부른 후 기도로 마친다.

 

3) 금식훈련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 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허기 시셨다."(눅4:1-2) 금식은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연스럽고도 중요하게 실시해 온 기도의 한 방법이며 수련방법이다. 금식의 방법에는 부분적인 금식, 보통금식, 절대금식, 개인적인 금식, 정기적이고 공동체적인 금식 등이 있다. 금식의 올바른 자세로서는 금식의 동기와 목적이 영적이고 순수해야 하며, 금식의 방법이 개인의 영성 생활의 진보과정과 건강에 알맞은 것이어야 한다. 도한 자기의 죄를 바로 보고 회개를 하기 위한 금식이어야 하며, 잘못된 습관이나 습관적으로 빠지는 죄에서의 해방을 위한 금식이어야 한다. 금식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열매 맺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 그러면 실제적인 면을 살펴보자.

 

☞ 목적 : 금식 기도를 통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한없는 안락을 원하는 몸의 요구들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결의를 다진다. 또한 금식으로 인해 모아진 음식을 굶주린 이웃과 나눔으로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그들과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임을 깨닫고 확인하여 공동체 의식을 높인다.

☞ 성서본문 : 마대 6:16-18, 이사야 58:6-7, 마태 25:40, 고전 9:27.

☞ 대상 :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 인원 : 20 - 30명 또는 인원 제한없이 교회 단위로 할 수 있다.

☞ 소요시간 : 사순절 기간과 나눔과 섬김을 위해 하루의 시간을 미리 정한다.

☞ 장소 : 각자 자기 집이나 삶의 자리에서

☞ 기대되는 효과

1. 사순절 동안, 특히 성주간의 금욕과 금식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

2. 금식하는 동안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림으로 기도를 생활화 한다.

3. 몸의 요구를 스스로 제어하는 힘을 기른다.

4. 습관적인 악행을 끊을 수 있다.

5. 금식으로 모은 음식비로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6. 어려운 이웃 안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찾아 섬길 수 있다.

 

■ 진 행

1.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예배 후에 담당 목회자가 사순절의 뜻을 설명하고 사순절 동안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의를 설명한다.

2.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우리 죄를 구체적으로 참회하기 위해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금욕과 금식할 것을 권면한다.

3. 금욕과 금식의 기준을 교회의 현실에 맞게 정해서 알려 준다(예:사순절 동안 매 수요일과 금요일에 한 끼씩 금욕, 금식하고 성금요일에는 하루 온종일 금식한다). 이때 노약자나 병자, 어린이들에 대한 금식 기준은 보통 어른들과 다르게 해야 한다.

4.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이나 부활절 전야예배 혹은 부활예배 때, 그 동안 금식으로 모은 음식비를 함께 모아 어려운 이웃과 나눌 것이라는 사실을 광고한다. 이때 도울 대상을 분명히 밝히면 참여도가 높아질 수 있고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금식의 열매를 나누는 봉사의 날을 미리 알려 준다.

5. 금욕이나 금식이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거나 타인의 신앙을 재는 자가 되지 않게 해야 됨을 일깨워 준다.

6. 사순절 동안의 공중집회에서 금식의 뜻과 성실한 실천을 고무시킬 수 있는 권면의 말을 들여 줄 필요가 있다.

7. 정해진 날 금식의 열매를 함께 모아 어려운 이웃을 찾아 나눈다.

8. 교회 단위로 할 때는 대표나 원하는 참가자들이 음식을 실제로 만들어서 주거나, 그들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쌀 등을 직접 사서 주는 것도 좋다.

9. 조별로 할 때는 회원들이 모여 어려운 사람을 직접 찾아 가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다.

 

Ⅳ. 結 論

 

본 소 논문을 통하여 영성이란 삶의 궁극적 실체와의 만남을 통한 자신과의 만남이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의 만남으로 이 만남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목적의식을 갖게 하며, 삶에 대한 새로운 정서의 수용을 체험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기독교 영성이란 그리스도의 삶의 구현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임을 밝히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바로 이 영성이 성인교육으로서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실천적 제안으로써 침묵훈련 기도훈련 금식훈련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외에도 많은 방법들이 있다. 이러한 방법들로 통하여 성인들이 예수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Ⅴ. 參考文獻

 

1) 영적 성장을 위한 교육

2) 영성과 목회

3) 목회와 신학 1993년 10월 호

4) 목회와 영성

5) 오늘의 영성 신학

6) 목회와 신학 1995년 4월호

7) 영성 수련의 실제

8) 그리스도인의 영성 훈련

9) 영성 신학 논증

10)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

11) 종교다원 시대의 기독교 영성

1) 컬리지음, 오성춘, 이기문 공역, 임재 하신 “영적 성장을 위한 교육”, (예장총회교육부), P.12.

2) 오성춘, “영성과 목회”,(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p.40.

3) 안영권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목회와 신학 1993년 10호), p38-39.

4) U.T.Homes,”목회와 영성”, 김외식 옮김,(대한기독교서회), p28-47.

5) 김외식, "실천신학에서 본 영성", “오늘의 영성신학”, p.175-176.

6) 안영권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목회와 신학 1993년 10호), p41.

7) 오성춘, “영성과 목회”,(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p.49-50.

8) Ibid, p.53-58.

9) Ibid, p.59-60.

10) Ibid. p.63-65.

11) 최일도•김연수 지음, “영성수련의 실제”, (나눔사), p.18.

12) 오성춘, “영성과 목회”,(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p.67-68.

13) Ibid, p.69.

14) Ibid, p.71.

15) Ibid, p.73-74.

16) 최일도•김연수 지음, “영성 수련의 실제”, (나눔사), p.17.

17) 이대희 지음, “그리스도인의 영성 훈련”,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20-21.

18) Ibid, p.21-22.

19) 최일도•김연수 지음, “영성수련의 실제”, (나눔사), p.19.

20) Ibid, p.20.

21) Ibid, p.22.

22) U.T.홈즈 “목회와 영성”, (대한기독교서회), p.225-232.

23) 칼 라너, “영성 신학 논총”, 카톨릭 출판사

24) 안영성, “아시안인의 심성과 신학”, p.215.

25) 김경재, “종교다원 시대의 기독교 영성”, (다산글방), p.35.

26) 오성춘, “영성과 목회”, (장신대 출판부), p.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