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강의실 4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학부강의실 4학기

제목 조직신학 운영자 2019-03-072022-07-13 17:08
작성자 Level 10

조직신학

 

어거스틴 

 

1. 어거스틴의 생애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신자이다. 그는 서방교회의 아버지이다. 그의 사상은 중세 시대를 지배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캐톨릭의 반동종교개혁 둘 다가 어거스틴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TONY LANE, 기독교 사상사, 삼판 (서울: 나침반사, 1987), p. 87.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은 354년 오늘날 알제리인 타가스테에서 이교도인 부친과 정통 그리스도인인 어머니(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371년 그는 교육을 받기 위해서 카르타고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완전히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키케로(Cicero)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철학(진리)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뒷날에 그는 당시의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자신이 기독교를 향하여 내디딘 첫 걸음으로 인정하였다. Bengt Hägglund, 신학사, 4판2쇄 (서울: 성광문화사, 1995), p. 155.

 

373년부터 382년까지 어거스틴은 진리와 구원과 만족을 찾아서 9년 동안이나 마니교(Manichaesm)에 귀의하였다. 당시 마니교의 대가인 파우스터스(Faustus)를 만나 마니교의 깊은 진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정신적 혼란과 회의가 더할 뿐이었다. 마침내 마니교가 취하는 입장이 속임수라는 사실이 점차 확실해지자 그는 9년간에 걸친 그들과의 생활을 청산해 버렸다. 

383년에 어거스틴은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384년 밀란(Milan)에 서 제국의 수사학자로 임명받았고 그곳의 신학자이자 감독이던 암브로즈(Ambrose)의 영향과 신플라톤주의 사상 아래 있게 되었다. 암브로즈로부터는 구약성경의 어려운 부분들이 풍유로서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신플라톤주의자들로 부터는 하나님의 영적 완전성과 내적 명상을 통한 통찰력을 배웠다. 신플라톤주의자 빅토리누스(Victorinus)와 수도사 안토니(Antony)의 개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상으로부터의 회심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라이온사 편, 교회사 핸드북, 재판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1), p. 198.

 

386년에 어거스틴은 밀란의 정원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딱 두 번의 회심 기념일-하나는 사도 바울의 회심 기념일(1월 25일)이고 다른 하나는 성 어거스틴의 회심기념일(5월 5일)이다-을 봉축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전적으로 새롭고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 다음해 부활절에 어거스틴은 밀란의 노바 교회당에서 암브로즈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Michael Marshall, 어거스틴의 생애, 2판 (서울 나침반사, 1989), pp. 134-151.

 

388년에 어거스틴은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감독이 없는 마을은 조심스럽게 피했다. 왜냐하면 그는 직책을 맡게 될 위험을 깨달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91년에 어거스틴이 히포(Hippo)를 방문하고 있을 동안 그를 알아보고는 강제로 장로로 임명하였다. 

396년에 감독이 사망하여 어거스틴은 그를 계승하였다. 그는 430년 사망할 때까지 히포의 감독으로 있었다. TONY LANE, op. cit., p. 90.

 

 

2. 대표저서

어거스틴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어거스틴의 대표저작 3가지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 자신의 생의 체험을 담은 고백록(Confessions)으로 400년경에 쓰여졌다. 이 책은 가장 감화력이 큰 자서전 중의 하나로 읽는 자에게 깊은 종교적인 감명을 주는 고전이라 할 수 있다. 김의환, 기독교회사, 1판5쇄 (서울: 성광문화사, 1988), pp. 152-156.

“당신이 창조한 것을 싫어할 때 내 마음이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당신이 창조한 어떤 것이라도 싫어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의 마음도 온전치 못합니다” 어거스틴 저/선한용 역,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5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p. 219.

어거스틴은 고백록 속에서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의심과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내셔서 진리와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SIDNEY M. HOUGHTON, 기독교교회사, 3판 (서울: 나침반사, 1990), p. 45.

 

두번째로, 어거스틴의 필생의 대작으로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한 신의 도성(City of God)이다. 이 책은 당시의 지적 도전에 답하는 하나의 역사철학이다. 김의환, loc. cit. 

“이 두 나라는 두 종류의 애정의 차이로 인해 만들어 졌다. 지상나라는 하나님을 경멸하면서 자아를 사랑함으로, 천상의 나라는 자아를 경멸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생겨났다” 어거스틴 저/심이석 역, 신국론 요약, 초판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1990), p. 79.

 

끝으로,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이다. 그의 이 교리는 서방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터툴리안, 오리겐, 아다나시우스 등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종속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일체성을 매우 강조한 나머지 “인격” 사이에 완전한 동등성이 있음을 가르쳤다. 그는 여러 가지 비유로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그 실례로서, 기억(memory), 이해(understanding), 의지(will) 등이라든지, 아니면 좀더 잘 알려진 사랑하는 자(lover), 사랑 받는 자(loved), 사랑(love) 등을 들 수 있다. 윌리스턴 워커, 세계기독교회사, 16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p. 129.

 

 

3. 어거스틴의 기독교관

어거스틴은 회심 이후에 교회의 권위에 순복 하였고,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회심 이후로 철학적 사색에 대한 어거스틴의 근본적 태도는 변화되었다. 전에는 철학이 이성적 수단인 사색의 활용을 통하여 진리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회심한 후로는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를 기독교의 신조와 일치되는 선에서 이해하였다.

어거스틴은, 믿음에 기초한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복종과도 일치되는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와 신 플라톤주의를 종합시킨 형태를 취한다고 인식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신 플라톤주의나 철학의 전반 분야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기독교만이 정확한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양자가 일정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뿐이었다.

어거스틴은 두가닥의 사상을 하나의 종합 형태로 결합시켰다. 그 중의 하나로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사역과, 그의 선행적 은혜와, 그리고 그가 친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써 결과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상은 「카리타스-큐피디타스 변증법」적인 특징을 가진 것으로서 모든 인간 속에 감춰져 있는 지고의 선에 대한 열망과 관계된 사상이다. 즉, 이 열망으로 인한 노력은 세상을 향한 잘못된 사랑과 인간 자신에 의해서 타락했기 때문에, 반드시 그 방향이 지고의 선을 지향하도록 재 수정시켜 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소유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만족을 얻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거스틴은 인간의 가장 심오한 질문들에 대하여 답하는 동시에,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요약해 보려는 의도에서, 신 플라톤주의의 기본적 개념(에로스 교리)을 기독교의 구원교리와 결합시켰던 것이다. Bengt Hägglund, op. cit., pp. 159-169.

 

 

 

4. 교회관

어거스틴의 교회개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그는 카톨릭 교회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출발점을 삼았다. 이 교회는 가시적 존재이다. 사도들의 신앙과 성례와 성직을 소유하고 있는 이 교회만이 전 세계에 퍼져서 그 신도들을 구원하고 정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이 카톨릭 교회의 밖에는 진리도 없고 구원도 없다. 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둘째로, 어거스틴은 외적 조직으로서의 현실적 교회와 성도들의 사귐으로서의 교회를 구별하였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들은 모두 이러한 불가시적 연합에 속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외면적으로만 교회에 속해 있는 자들과 진정한 의미로 교회에 속된 자들을 구별하였다. 

셋째로, 어거스틴은 예정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였다. 불가시적인 사랑의 연합은 예정된 성도의 단체와 일치되지 않는다. 결국에 가서는 궁극적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고 인내의 은사를 받은 전자(前者)만이 참된 교회의 일원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카톨릭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자들도 다소간 있을 것이다. J. L. 니이브 저/서남동 역, 기독교교리사, 16판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7), pp. 168-169.

 

 

 

5. 죄와 은총관

1. 죄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죄란 정신의 죄로서 시작한다. 아담은 스스로 존재하기를 원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했고, 또 자기 자신의 힘으로 서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외면하고 타락하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모든 죄의 시작은 자만이다. 그리고 자만의 시작은 사람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에 의해 멸망 당할 자의 무리에 속해 있다. 어린 유아로서 죽었던 사람이라도 멸망을 받는다. 신의 특별한 은총의 행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다. I. C. 헤넬 편/송기득 역,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12판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5), pp. 172-175

 

2. 은총관

어거스틴의 죄 개념에 대응한 것이 그의 은총개념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신이 우리를 선택한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거룩하게 되게 하기 위해서다. 신이 어떤 인간을 선택하고 어떤 인간을 멸하느냐 하는 그 까닭은 인간에게는 없다. 일하고 있는 분이 단지 신뿐이다. 신이 결단하고, 신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더 나아가서 용서를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 나타난 최고선에의 현실적인 참여로 본 것이다. 영은 우리들의 그릇된 욕구 대신에 착한 욕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곧 우리 마음 속에 아가페를 퍼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돕는다고 그는 말한다. Ibid., pp. 175-178.

 

 

6.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

어거스틴이 약 20년(400-419)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초대교회가 약 4백년에 걸쳐 논쟁을 거듭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종합하여 가장 성서적이고 복음적이며 정통적 삼위일체 신앙을 체계화한 불후의 역작이다. 그는 그 이전에 있었던 삼위일체론을 집약했을 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정립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삼위일체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는 유일하시고 하나이신 참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인 동시에 동일한 본체에서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바로 말하며, 믿으며,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먼저 교회가 가르치는 전통적 내용을 종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현 세계와의 관계를 정신과학적(심리학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3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pp. 263-264.

 

지금부터 어거스틴의 “De Trinitate”에 대한 고찰을 1부, 2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그 다음에 특징을 드러내고자 한다.

 

어거스틴의 위대한 저작 “De Trinitate”은 Book 1-Book 15로 구성되어 있고 다시 2부로 나뉜다. 1부는 1권에서 7권(더 구체적으로 하자면 8권 2장 2절이다)까지이며, 2부는 8권부터 15권(마지막 15권에는 어거스틴 자신의 전체 요약이 담겨져 있다)까지이다. 먼저 1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일체의 통일과 동등은 성경에 나타났다. 보냄을 입은 성자나 성령은 보낸 성부와 동등하고, 삼위일체 자체는 본성에서 불가견하고 불가분리하게 일한다(1권-4권).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다르다는 것, 곧 낳으신 분과 나오신 분은 서로 그 본질이 다르지 않겠느냐는 사람들이 있으나 성경에 본질적으로 언급된 곳이 있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언급된 곳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서로 구분해야 하고, 하나님과 신과 관련된 본질은 항상 불변하다(5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고전 1:24)고 해서 아들이 성부를 지혜롭게 하거나 능력 있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 자신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 지혜와 능력이 아니고 하나의 하나님과 본질인 것 같이 하나의 능력, 지혜이다. 참된 본질에 있어서 아들보다 성부가 크지 않고 둘이 합해도 성령보다 크지 않고 셋이 합해도 하나보다 크지 않다(6권-7권). 박홍무,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석사 학위 논문,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1984), pp. 32-33.

 

이것으로 그의 전반부 교리 진술이 끝난다. 여기에서 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사상을 검토하고 이 교리를 논증하려는 것보다 성서에서 기정 사실로 되어 있으며 정통교회가 이 교리를 전승하여 온 것임을 확인한다. 

이제 전반부에 한해서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삼위의 동일본질

삼위는 나누어질 수 없는 동등한 한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성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2판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1994), p. 35.

이 본질 자체는 한 하나님으로서 불멸, 불가견적이라, Ibid., p. 103.

항상 계시는 자는 불멸의 본질을 소유하므로 이것을 “우시아”라고 부를 수 있다. Ibid., p. 17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성부와 성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본질이 동일하므로 동등할 수밖에 없다. Ibid., p. 193.

그는 성자의 완전한 “나심”과 곧 신성의 중간이 없는 발생(generatio)을 말하면서 낳으신 성부와 나신 성자의 완전한 동등을 강조하므로 유출설과 다르다. Ibid., p. 136.

성령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보냄을 입었으므로 이에 못지 않다. Ibid., p. 168.

더욱이 어거스틴은 삼위가 다 가견적 피조물을 통해서 특별한 계시 곧 신현(theophanie)의 가능성 및 그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서로 동등임을 주장한다. 이것이 획기적인 사상이다. 이로써 그는 plotinus의 유출설, 노스틱주의의 이원론, 아리우스주의의 종속설 등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2. 삼위의 구별

“사벨리안”의 양태론은 삼위의 구별을 무시했으나 어거스틴은 이에 대항하여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며,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다. 이들은 확실히 셋이다. Ibid., p. 180.

본질은 같으나 관계는 다르다. “성부는 성자를 갖지 않고는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은 성부를 갖지 않고는 아들이 아니다” Ibid., p. 173.

삼위는 신성 안에서 신성이 일으키고 있는 낳음, 태어남 및 발현함(혹은 부여됨) 이라는 요인들과 똑같이 실질적이고 영원한 관계이다.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개 품격이 무엇이든지 간에 각기 한 분이나 혹은 나머지 두 분에 대해 관계되어 있다는 뜻에서 관계들이다. Ibid., Book 5-7.

 

 

3. 삼위에 대한 성서적 논거

성부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신명기 6장 4절을 인용하면서 아들이나 성령이 제외되지 않는 한, 역시 성부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85.

어거스틴은 부란 말은 삼위일체 안에 있어서 신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양식에 적용된 관계개념이라고 한다. 즉 신은 본래부터 부와 자와 영이라는 3者가 상호간에 가지는 불가분리의 관계 안에서 존립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서울: 양서각, 1983), p. 28.

성부만 불가견이 아니고 삼위가 다 불멸이며 불가견이라 한 것은 종래의 사상 곧 성부만이 불멸, 불가견이라는 것을 부인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85.

 

성자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골로새서 2장 9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본성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는 거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 자체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본성을 자기 안에 소유하시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아들은 아버지의 지혜요 능력인 것처럼, 성부의 신성이다. Ibid., p. 207.

특히 어거스틴의 그리스도론의 한가지 특징은 그의 Forma Dei 사상이다. 그는 성자의 二성을 비추어 두 가지 형상을 인정하고 성자의 형이상학적 면을 Forma Dei라 부르고 그의 인간적 존재 양식을 Forma Serv(종의 현상)라 부른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즉 그분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존재하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가장 깊은 본질은 신적인 것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와 동등이며, 신에게 있어서 나온 신이요, 본질 중의 본질이며, 성부와 동등이면서도 성부가 아니다. 그는 성부로부터 전적으로 나셨고,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진다.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op. cit., p. 29

 

성령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성자가 성부와 모든 면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도 그의 본체(substantia)에 있어서나 기능에 있어서나 성부와 완전히 동일하다. Ibid., p. 30.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보내신 고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못지 않게 동등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185.

어거스틴은 성서가 한번도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 곳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요한 1서 4장 13절과 4장 16절에 근거하여 신자 안에서 신의 사랑을 북돋우어 주는 자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Ibid., p. 441.

 

 

4. 신앙과 지성

삼위일체론에 대한 어거스틴의 독창적인 공헌은 인간 영혼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유비를 사용한 것을 다루는데 있다. 이 유비(Analogies)의 기능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절대적인 유일성과 삼위의 진정한 구별에 대한 신비를 우리가 보다 낫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심화시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어디에나 삼위일체의 흔적(Vestiges)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관념 속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박홍무, op. cit., p. 57.

형언할 수 없고 비물질적이고 변함이 없는 최고의 존재를 이해력으로 식별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신앙 규범의 지도하에서 단련해야 하며, 그 단련을 위해서는 사람의 본성에 있는 그 마음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마음은 동물에는 없는 것이며, 사람 자신의 영혼에서도 가장 우수한 부분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능력을 받았으며, 더 높고 더 내면적인 곳에서 주관하듯이 신체 감각들의 모든 보고를 얻어 판단을 내리며, 하나님 이외에는 마음보다 높거나 지배하는 것이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463.

 

 

5. 외적 사람에 있어서의 삼위일체론의 흔적 박홍무, op. cit., p. 60. 어거스틴은 Analogia와 Vestigium과 Lmago라는 말을 각각 달리 적용한다. 즉, Analogia는 자연계에, Vestigium은 외적 사람에게 그리고 Lmago는 내적 사람에게 적용해서 쓴다.

 

어거스틴은 논하기를 삼위일체의 지식이 참으로 도달하는 길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세가지 것을 암시하는데 실은 사랑 그 자체 안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 사랑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사랑으로 어떤 것이 사랑을 받는다. 그리하여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과 그리고 사랑 이 세가지가 있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것, 즉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을 받는 객체와 그 양자를 연합시키거나 혹은 연합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랑으로 분석함으로써 드러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248.

사랑하는 성부, 사랑을 받는 성자,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랑의 성령의 흔적이 사람의 구조 안에도 남아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흔적을 외부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원리는 첫째 것이 둘째 것을 낳고 셋째 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박홍무, op. cit., p. 61.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신의 형상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피조적 형상 속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헛되이 찾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초월하여 계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406.

우리가 아무리 나무, 둥치, 가지들을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도 이것들 속에 있는 본질은 지식도 없고 감각도 없고 생명도 없다. 짐승들의 경우는 그 본질 속에 생명은 있으나 지식이 없다. Ibid., p. 411.

삼위일체의 교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Ibid., p. 420.

우리가 지금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장차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삼위일체를 보다 환하게 알고 볼 날이 올 것이다. Ibid., p. 406.

 

 

6. 내적 사람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론의 형상(Lmago)

그가 특히 인간의 내적 활동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람의 중심 자리가 내적 사람의 최저 심부라고 할 수 있는 영혼(soul, Anima)이며 만약 사람이 신과 상봉한다면 이 영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op. cit., p. 32.

그래서 그는 내적 사람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분석 검토한다.

1) 존재(esse), 지득(nosse), 의욕(velle)

나는 알고 또 의지하는 자로서 존재하고, 자기가 존재하고 또 의지하는 것을 알고, 또 존재하고 아는 것을 의지한다. 즉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존재가 반드시 무엇을 알며 또한 알려고 의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속아서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 당시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아카데미학파를 논박하면서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나의 존재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는 사실이므로 존재하는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상에서 말한 esse, nosse, velle는 그것이 그대로 곧 삼위일체론적 존재 양식에 직결되는 형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흔적임에 틀림없다. Ibid., p. 34.

 

2) 마음(mens), 지식(notitia), 사랑(amor)

사람의 마음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즉 마음과 그 마음자체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사랑하며 또 그 자체의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 이 세가지는 하나이며 다 같으며 나눠질 수 없고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이 세가지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든가 경한 것이 아니라 다같이 중요성을 갖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op. cit., p. 257.

그가 삼위일체의 흔적을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서 찾는 이유는 사람이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실에 두었고 또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인식하며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알려 진다는 사실에 두었다. 곧 마음, 지식, 사랑은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Ibid., p. 253.

 

3) 기억(memaria), 이해(intelligentia), 의지(voluntas)

신앙으로 시작하며 이성의 힘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봄’(visio dei)에 이른다는 어거스틴의 확신은 그의 일생 동안 변함이 없다. 삼위일체 신에 대한 지식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 영혼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연구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열심히 공부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과 이로써 바라던 지식을 소유하게 되고 안 후에는 이것을 이용코자 한다. 여기서 능력, 지식, 이용은 셋이나 한 마음의 작용으로 일체를 이루므로 삼위일체의 흔적이 엿보인다. Ibid., p. 291.

끝으로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유비와 흔적과 형상을 자연과 인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후에 고백하기를 이와 같은 유사성이 피조물의 세계에서 발견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op. cit., p. 35.

 

 

7. 특징

1. 절대 단일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어거스틴의 신관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절대자, 단일자, 분할될 수 없는 자,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일적이고 분할할 수 없는 한 행동과 의지를 가진다. 그의 사역은 분할될 수가 없다. 우연적 질서(현상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세 위격은 한 원칙으로서 사역한다. 분리되거나 구분이 되지 않는 행동으로서 사역한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op. cit., pp. 268-270.

 

 

2. 관계개념 도입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본래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삼자 관계 하에 있다고 하는 관계개념을 도입했다. 셋이라는 것은 관계를 의미한다. 생산하는 자, 생산된 자, 출원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신성은 영원 전부터 그러한 관계를 가지고 존재했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언제든지 다른 두 위와의 관계하에 존재한다. Ibid., p.271.

 

 

3. 성령에 대한 결합적 기능 이해

성령에 관하여 어거스틴은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사랑으로 이해하면서, 하나의 기능체로 변경시켰다. 이것은 성령의 ‘페르소나’의 고유성을 부인하거나 흐리게 하거나 약화 시켜서는 안되는데 범함을 의미한다. Ibid., p. 272.

 

 

4. 성령의 이중출원(Filioque) 강조

아버지와 아들이 영을 출원케 할 때 같이했다. 마치 삼위가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사역에 동참한 것과 같다. 그러나 아버지가 최초의 근원이요, 그 근원에서 아들이 능력을 받아 영에게 주었다고 한다. Ibid., pp. 272-273.

 

5. 삼위일체의 흔적론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자연에서 삼위일체의 비유를 발견하고, 외적 사람에게서 흔적을 발견하며, 내적 사람(영혼)에게서 형상을 발견했다. Ibid., p. 273.

 

 

6. 플로티누스의 동일성 논리 원용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교리를 하나님을 단지 신앙적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플로티누스의 동일성 논리를 원용한 것 같다. 즉 플로티누스는 영적 존재만을 참 존재로 인정하고, 그 영적 존재는 세 가지 범주에 따라 존재한다고 했다. Ibid., p. 274.

즉 ‘일자’(一者)와 ‘누스’(이성) 어거스틴 저/선한용 역, op. cit., pp. 221-222.

와 ‘프쉬케’(영혼)다. 그 세 가지 종류의 존재는 그것의 존재를 규정하는 존재론적 논리에 따라서 존재한다. ‘일자’는 ‘토 엔’(το ἕν)에 의하여, ‘누스’는 ‘엔 폴라’(ἔν πóλλα)에 의하여, 그리고 ‘프쉬케’는 ‘엔 캐 폴라’(ἕν καὶ πóλλα)의 범주에 따라서 존재한다. 이중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는 ‘엔 폴라’ 논리다. ‘토 엔’의 논리를 받아들이면 유일신론이나 군주신론에 빠지게 되며, ‘엔 캐 폴라’의 논리를 받아들이면 다신론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엔 폴라’는 일(1)이 다(多)라는 논리이기 때문에, 어거스틴이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10권, 7판 (서울: 기독교문사, 1993), pp. 469-479.

 

 

8. 결론

지금까지 어거스틴의 생애와 신학,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해와 흔적론, 특징을 논의해 왔다. 여기서는 전체적인 요약으로 막음 하고자 한다.

 

제 1 장 생애에서는 연대기 순으로 어거스틴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요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특히, 밀란 정원에서의 회심 사건은 어거스틴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은혜 측면에서 해석 되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의 저술 중에 고백록, 하나님의 도성, 삼위일체론등 3대저작을 소개했었다.

 

제 2 장 신학에서는 어거스틴이 기독교를 보는 입장과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으로 정립된 교회관과 펠라기우스를 반박하면서 체계화된 죄관 그리고 그의 특별한 은총 개념에 대해서 논했었다.

 

제 3 장은 본 보고서의 본론으로 다루었으며 그의 관계 삼위일체론에 역점을 두었었다. 특히 그의 인간 정신 생활에 유비하여 해석한 것들 즉 삼위일체의 흔적을 그의 큰 공헌으로 지적한 바 있다. 하인리히 오트 저/김광식 역, 신학해제, 9판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p. 111.

 

 

이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대략적 윤곽을 재 언급하며 결론을 맺겠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에 있어서 개체의 다양성보다도 통일성을 강조한 점, 성령의 발출이론, 삼위일체의 흔적사상, 특히 인간 심리학적 면에서 분석 추구한 노력들은 서방 삼위일체 신학이 따르게 된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종한, 삼위일체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석사학위논문,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91), p. 60.

 

 

참고문헌

 

1) TONY LANE 저/김응국 역, 기독교사상사, 나침반사, 1987.

2) Bengt Hägglund 저/박희석 역, 신학사, 성광문화사, 1995.

3) 라이온사 편/송광택 역, 교회사 핸드북, 생명의 말씀사, 1991.

4) Michael Marshall 저/김원주 역, 어거스틴의 생애, 나침반사, 1989.

5) 김의환, 기독교회사, 성광문화사, 1988.

6) 어거스틴 저/선한용 역,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대한기독교서회, 1993.

7) SIDNEY M. HOUGHTON 저/정중은 역, 기독교교회사, 나침반사, 1990.

8) 어거스틴 저/심이석 역, 신국론 요약,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1990.

9) 윌리스턴 워커 저/이영헌 외 3인 편역, 세계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1988.

10) J. L. 니이브 저/서남동 역, 기독교교리사, 대한기독교서회, 1987.

11) I. C. 헤넬 편/송기득 역, 폴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한국신학연구소, 1995.

12) 이종성, 삼위일체론, 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13)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 양서각, 1983.

14) 박홍무,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석사 학위 논문,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1984.

15)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김종흡 역, 성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1994.

16)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10권, 기독교문사, 1993.

17) 하인리히 오트 저/ 김광식 역, 신학해제, 한국신학연구소, 1987.

18) 이종한, 삼위일체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석사 학위 논문, 장로히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91.

 

칼빈에 대해서

 

목 차

서론

1. 칼빈의 생애

1)칼빈초기 생애와 교육

2)프로테스탄트로 회심

2. 신학 사상

 

1)보편섭리와 특별섭리

2)예정론

3)성경관

 

4)칼빈의 대속교리

5)칼빈의 주권사상

3. 시대의 길잡이로서의 칼빈

1)사회

2)교회

3)정치

 

4. 칼빈주의

1)정의

2)칼빈주의의 틍징(5대 교리

결론

서 론

 

칼빈주의는 근대세계를 특정 지어주는 여러 요소들, 예를 들자면 자본주의,근대과학,복잡한 서구 사회의 규율과 합리화 혁명적 정신과 민주주의, 세속화와 사회적 행동주의,개인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경험주의에 기여했다고 널리 인정되어져 왔거나 혹은 그렇다고 비난 받아왔다.. Perry Miller, The New England Mind: The seventeeth Century, (New York,1939).

그러나 이러한 자타가 인정을 받을 만한 그의 업적과 공헌은 거의 최근까지도 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거의 근래에 들어와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나 세계의 많은 이들의 막연히 진정 아닌 존경을 받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해 가치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W.J.부스마는 몇 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칼빈은 신학자들과 칼빈 전문가들의 손에 내맡겨 놓았는데, 역사적 칼빈에 대한 이들의 관심이란 기껏해야 주변적인 것이다.또 하나는 칼빈의 추종자들에 의해 세워지고 제네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대학뒤편에 개혁자들의 벽에 서 있는 거대한 칼빈의 조상에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W.J. 부스마, [칼빈] 이양호.박종숙역, 서울:도서출판 나단,1991.p.11.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 단순히 칼빈의 명성만 듣고 대충 흘려버리는, 또 그들의 말에 비판과 수용 없이 맹종하는 독자들과 오늘날 수 많은 그의 사상을 접한 바로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또 이제까지 다루어져 왔던 칼빈에 대한 사상연구는 비역사적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고 혼란이나 논리적 비적합성, 모순 그리고 인간의 부족함을 나타내 주는 여타의 다른 요소들을 갖지 않는 것으로 가정되어 왔다. . Ibid.

 

칼빈에 대해 이해하기란 어렵다, 루터나 그 밖의 인물들보다 그는 더 복잡하고 난해해 보인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칼빈의 생애와 인물 전반적 이해를 그 연구 범위로 두되, 특히 칼빈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주제에 걸친 그의 사상을 수렴하고자 한다. 

 

 

 

본 론

1. 칼빈의 생애

1) . 칼빈의 초기 생애와 교육

중세기 기독교회의 권위아래 있던 유럽에서는 이태리를 중심으로 하여 문예부흥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사실상 이러한 운동을 성경을 보는 안목을 변화시켰고 인간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때, 즉 15세기 후반에 걸쳐서 전 인류와 교회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 루터라든가. 멜랑히톤, 에라스무스 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을 따라 한 위대한 인물이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칼빈이었다. 칼빈은 본래 프랑스 북쪽 피카르디 지방에 있는 노용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제랄코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하진, [주제별 칼빈주의] 서울:한국문서 선교회, 1989. p.12.

 

 

12세 때 아버지의 영향력에 의해 노용 대성당에서 성직을 얻었다. 

1523년에 드양제 집안의 소년들과 함께 파리에 가서 라마르쉬대학과 몽테귀대학에서 인문과학을 공부했다. 칼빈이 여기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그의 아버지는 그를 오를래앙대학교에 보내어 저명한 법학자인 피에르 드 레스토알 아래서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으며, 칼빈은 잠시 부르지 대학교에 가서 유명한 이탈리아인 법학자인 알차티의 강의를 들었다. 그 후 1531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칼빈은 파리로 돌아갔다. . 박조용, 「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문사,1994.

 

칼빈이 이 두 번째로 파리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학구적인 주석을 썼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저서로서 의미 깊은 저작이었다. 칼빈의 이 저작은 1532년에 나타났다. 이 저작은 칼빈이 에라스무스와 뷔데의 모범을 따른 조예가 깊은 유머니스트임을 드러냈으며 그가 희랍어를 읽고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고대 문헌과 역사를 폭넓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후에 종교개혁자로서 활동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프로테스탄트 휴머니스트 활동가들과 우정을 나누는 데 있어서 확고한 근거가 된다.Ibid. op.cit.,p.1104.

 

칼빈은 18세 때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 칼빈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파문에 이르게 되었고 그것은 아들의 장래를 재고하게 했다.그리하여 칼빈은 올레앙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공부는 1532년 1월 14일 전에 끝이 났다.. 손병호, 「장로교회의 역사」 서울:도서출판 그리인.1993.pp.105-107.

 

 

2). 프로테스탄트로 회심

칼빈이 언제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했는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1534년이었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갑작스런 회심”이었다고 한다. 그는 라틴,헬라,히브리 문학을 배웠기에 이러한 말로써 성경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문학 연구가 인연이 되어서 “문예부흥”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가까운 교재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사람도 있었다.. 월터 링글, 「세계 장로교회의 신앙과 역사 이야기」 이정전역,서울:도서출판 예루살렘 1992,pp.29-30.

1534년 5월 4일 칼빈은 노용에서 성직록(聖職祿)을 포기하였다. 어떤 언어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이 행동의 선언이 그의 “전향”을 이룩한 것이라 본다. 교황청의 루터에 관한 문서들의 비타협적인 폐기처분, 성서적인 신앙으로 순교를 당하는 용감한 고난, 반 개화사상, 성인숭배, 행렬기도, 유골,면죄부 판매, 의식주의 등을 봄으로써 칼빈은 오히려 성서로 진입하였으며 교부들에 대하여 열렬한 연구로 들어갔다.. 손병호, Ibid. op.cit.,p.110.

이후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여 대 호평을 받았고 1537년 8월에 그는 여행을 계속하는 도중에서 쥬네브에서 머물렀는데 여기서 그의 종교개혁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2. 신학 사상

1). 보편섭리와 특별섭리

칼빈은 철학자들처럼 보편섭리를 인정하나 그의 주 관심은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대한 칼빈의 기본적 통찰력은 그의 섭리론과 예정론에 잘 나타나 있다.. 도날드 K.맥킴,「칼빈에 관한 신학논문」한국칼빈주의 연구원편역, 서울:기독교문화사,1986.

그는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에 대하여”라는 주제하에 쓰기를, “섭리란 땅 위에서 진행되는 것을 하늘에서 하나님이 게으른 모습으로 관찰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W.J.부스마, op.cit., pp.162-164.

 

그러므로 섭리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1)일반은총 (2)특별섭리(particular),일반은총 (3)특별섭리(special) 혹은 구원하는 은총으로 되어 있다.. 도날드 k. 맥킴, op.cit.

 

그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늘에 가만히 있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과 보편적 섭리의 교리를 이해하는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특별섭리에 관한 토의에서 칼빈은 또한 일반은총과 보편적 섭리는 다르다. 칼빈이 생각하길, 어떤 것도 우연에 의하여 생기지 않고 모든 것이 그의 계획으로부터 나와서 모든 것을 그의 목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섭리의 교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을 위한 여지를 남겨놓을 수 없다. . 기독교 강요, 1.16.4.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각 개인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주실 때만이 온전히 설명되어 진다고 주장한다. 이 신앙의 확실성은 인간 정신의 주도 면밀성에서 예정은 인간의 능력으로 시험 받을 수 없다. 성령의 은총으로만이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을 얻어지는 것이다.. 롬11:34 주석 (CO 49.231.

 

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섭리와 예정교리에 기초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칼빈의 신학에서 섭리론과 예정론의 관계성이다. 예정은 개신교 신학의 특징이다.. W.J.부스마, op.cit.,104-109.

 

2). 예정론

종교개혁 이후 예정론은 주로 칼빈과 그의 사상적 전통에 서 있는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 특징적으로 지지되고 주장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예정론’하면 주로 칼빈이나 또는 칼빈주의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이오갑,「목회와 신학」, 1994.9.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론은 전능하신 섭리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관심에 대한 그의 기본적 확신이 섭리론과 예정론 모두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칼빈이 보편적 섭리와 특별섭리, 그리고 총체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을 다루지만, 그의 입장은 철학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돌보심과 특수성에 있다. 칼빈의 예정이란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개인에게 이루어지도록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두 종착점 가운데 어느 쪽으로 창조되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은 살도록 예정되었다든가 아니면 죽기로 예정되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제 1편에서는. 예정 혹은 선택이 교회론과 연관되어 다루어졌다.. 도버트 K.맥킴, op.cit.,106-108.

 

기독교 강요의 예정론, 성경주석의 예정론, 신조에 나타난 예정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된 결론에 이를 줄 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구원할 자와 유기할 자를 자의에 의하여 예정 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예정한 것도 아니며, 타락전 즉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으며, 예정한 자는 끝까지 보전하셔서 확실히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정탁정, 「칼빈의 에정론 고찰」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p.44.

 

칼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 안에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는 그 가르침을 마땅한 겸손을 가지고 설명한다. 어떤 사상을 다루듯 예정은 연구할 수 없다. 인간은 예정에 관한 호기심에 가득 찬 질문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선택에 관하여 사색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도와 주며, 인간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겸손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결심한 자들을 선택하시고, 멸망시키기로 결심한 자들도 거절하신다고 성경을 가르친다.. 찰스 B.파티, 「칼빈의 보편섭리와 특별섭리」 한국칼빈주의 연구원, 서울:기독문화 사,1986,p.115.

 

3). 성경관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침범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지지 하기 위해서 성경이 신적으로 연관된 것을 선언한다. 칼빈은 부언하고 있다. “성경의 조명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게 되나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초월하여서만 성경이 하나님 자신의 입으로부터 직접 받아 인간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음을 완전히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죤머레이, 「칼빈의 성경관과 주권 사상」 나용화역, 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1985, pp.26-29.

또 성화와 율법과의 관계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롭게 된다는 것이 성화의 열매인 선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제시하고자 했다. 여기서 율법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 없다는 ‘무율법주의’적 사고를 배격하고, 율법으로 의를 획득한다는 ‘율법주의’도 배격한다고 했다. 다만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생활의 규범’ 으로서 제시했다. 칼빈에 있어서의 구원과 성화에서는 복음의 핵심이 회개와 죄사함으로서 이들이 신앙으로부터 나오고, 칭의와 성화의 근거와 이유라고 했다.. 죤머레이, 「칼빈의 성경관과 주권 사상」나용화역, 서울:기독교 문서회,1985, pp.16-19.

 

4). 칼빈의 대속교리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서부터 그의 대속 교리를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노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셨다. 칼빈의 사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묶여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계시이다. 죄인들을 위한 그의 죽음 속에서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을 성취하셨다. .로버트 A. 피터슨, 「칼빈의 구원의 도리」황영근역, 서울:도서출판풍만, 1989, p.284.

 

5). 칼빈의 주권 사상

그에 의하면 “주권사상”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을 “영원, 영원부터 그 자신의 지혜로 그가 하시고자 하는 바로 실행하시는 만물의 중재자이시요 통치자이시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선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악한자들에게도 적용되며, 인간과 천사들의 거룩한 행동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죄악된 행동들에게까지도 적용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훈적으로 명한 것을 작정적으로 결의 하시고 그가 교훈적으로 명한 것을 작정적으로 금하시는 것을 우리는 반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우리의 신앙과 경외를 요구하면서 가장 예리하게 바로 문제에 초점을 모은다.. 죤머레이, op.cit.,pp.83-110.

 

 

3. 시대의 길잡이로서의 칼빈

1).사회

다른 르네상스 인문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자신의 시대가 영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위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매우 치열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대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칼빈의 계획은 우주의 “입법자요 왕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그의 통치 아래 살도록 전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셨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종교 개혁을 또 세속적 영역의 개혁을 지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칼빈은 가끔 세상의 무질서를 비난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질서의 회복을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시 했다. 이러한 동일한 원리는 또한 칼빈의 사회윤리에 항상 칼빈주의와 연계되지만은 않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부여해 주었다. 칼빈은 비록 세상의 지혜를 불신한다고 자주 고백하긴 했지만, 기독인의 어리석음을 결코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융통성이, 자신의 생각에 의하면 성서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일종의 부르조아적 현실주의로 그를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그는 악한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한 갖가지의 신중한 전략들을 권면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신은 그에게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칼빈은 기독인들이 정상적으로는 금지된 수단들을 취해야 할 이러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수단들을 취하는 것을 주저 없이 장려했다.. 칼빈, op.cit.,pp.447453.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있어서의 칼빈의 이중적이고 모순된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자주 다른 경우에도 그러한 것처럼,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결과였다. 그는 중간의 부와 지위의 양 극단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선언하기를 “적당한 재산이란 얼마나 더 유용하고 바람직한 것인가! 이것은 최소한 평화로운 것이고. 맹렬한 시기 속에 노출되거나 음험한 혐의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중산층적 태도가 또한 그로 하여금 노동을 존중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소명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들을 일차적으로 우리들의 일에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동도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칼빈은 중용의 입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소명론은 노동의 효율성에 기여했다. 특별히 소명론은 노동의 분업화를 촉진시켰다. 또 노동에 대한 칼빈의 존중은 검약에 대한 권면을 수반하고 있다. 그는 가끔 되풀이 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검약과 절제를 권장하시고 풍부함 속에서 무절제와 사치하는 것을 금하셨다. 검약에 대한 그의 존중은 그리스도를 검소하고 검약한 생활의 유일한 본보기로 본 그의 입장을 형성했다.그러나 칼빈의 사회사상에 있어서 항상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공동체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그는 노동과, 부나 시간의 유용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이러한 것들을 공동체의 필요에 부합하는 드문 자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 Ibid. pp.455-467.

 

 

2). 교회

그는 교회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기독교 강요」의 마지작 제 4권은 교회론 보다는 교회조직적 면을 주로 다룬다. “교회의 참된 위엄은 내적이다.”. W.J.부스마, p.504.

교회란 기존의 카돌릭 교회가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 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교회들이 바로 하나의 보편적 교회라는 시각이다.. 이오갑, op.cit.,p.286.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만 형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모형을 암시한 것이다. 칼빈에게는 그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재세레파에 가까운 면도 있었다. 그는 성찰이 공동체의 의식인 동시에 그것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미리 알려 주어야 했기 때문에 성찬을 높이 평가했다. 또 그는 교회를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 낸 최종적인 방안은 파문이었으며, 파문의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성찬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목사의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인정하나 목사의 성도들에게의 권위와 위엄을 인정하나 칼빈이 세속정치 형태를 논할 때 그의 권위주의가 그의 종화 주의에 의해 수정되었던 것과 마찬 가지로 평신도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그의 성직자주의와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것이 목사들은 적어도 원리상 교회의 전체교인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는 이유였다.. W.J.부스마, op.cit.,pp.520-526

 

칼빈에게 있어 교회는 “하나님의 학교”로서 신학교보다는 인문주의적 학원에 더 가까왔으며,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을 그의 학생들의 어깨 위에 살펴보고 “그들의 제스쳐와 걸음걸이,말, 그리고 그의 ”모든것“을 지켜보는 분으로 생각했다.. Ibid. pp.526-527.

 

그는 또 때때로 하나님만이 궁극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켰다. 이런 생각들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을 때 교회에 대한 그의 이해는 더 이상 배타적이 아니라 포괄적이 되었다.. Ibid. p.530.

 

 

3).정치

영국의 청교도, 스코틀란드의 장로교도, 프랑스의 위그노, 네델란드의 베거, 그리고 미국의 필그림 파더, 이들 모두는 자기들의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이들 모두가 칼빈의 정신적 후예들인 칼빈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칼빈이 근대 민주주의의 주창자라는 가정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다.. 이양호, 「신학사상」서울:한국신학연구소, p.408.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법치적 신정정치’를 실현시킴으로써 서구 사회에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계기를 형성 하였다. 그는 특히 그의 기독교 사상을 체계화한 기독교 강요를 통해 자유, 평등, 인권의 존중, 법에 의한 지배와 같은 근대적인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뒷받침할만한 정치신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정치신학의 민주적 요소들은 두 왕국사상에 입각한 이중의 정부론 및 자연법사상을 포함하는 시민정부론에 잘 나타나 있다.그는 고전적인 서구 민주주의 형태와 거의 동일한 귀족정치와 민주주의 형태와 거의 동일한 귀족정치와 민주주의 정치의 혼합체제를 이미 제창했었고 독재와 악을 저지르는 통치자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공직자를 통해 저항할 수 있다는 입헌적 저항권을 이미 제창함으로써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성립기초가 되는 주권재민의 사상도 제시한 셈이 됐다.. 노재성, 「칼빈 사상과 근대자유 민주주의 발전과제의 관계」 (장로회 신대 대학원 신학과 기독교 논리학 전공),pp.219-220.

 

칼빈이 시민 정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정부형태에 대해서는 차선책으로 폭군정이 아닌 군주정도 인정했지만 최선의 정부형태는 민주정과 귀족정의 혼합 정부임을 주장했으며, 선거에 의해 통치자를 뽑아 통치자가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최선의 길로 인정했다..「대신대 논문집」 오성상사, p.234-235.

 

칼빈에게서 자연법은 하나님의 인간창조 시에 내려준 것이었으나 인간의 타락의 영향으로 그 자체로서는 알 수 없고 타락으로 인하여 희미해진 것을 하나님이 성문법인 십계명을 통하여 명백하게 하여주신 것으로 십계명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법과 십계명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하나의 법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와 같이 은혜가 자연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은 은혜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칼빈의 자연법사상은 중세의 전통에서 벗어나 자연법 사상을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과 동일시한 점에서 변화되었고, 그러면서도 인간성과 인간사회에 대한 공동적인 이해의 근거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 Ibid. p.236.

 

 

4. 칼빈주의 

여기서 칼빈주의란 말은 존 칼빈의 이름과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연고로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1).정의 

칼빈주의란 루터파와는 구별되는 「개혁파」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파의 신앙고백들과 교리문답들에 본질적으로 나타나 있는 신학적 신념의 체계를 가리킨다. 또한 칼빈주의라는 말은 칼빈이 개략적으로 제시한 교회정치 체제(장로제)를 내포하는 말일 수도 있으며, 그리고 매우 일반적으로 이 체제를 채택한 교회들 안에 있는 칼빈적인 교리 유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교리와 정치의 이 연결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가 교리적 원칙들에서 자연적으로 파생한 것이 분명한 경우에 한해서만 정치를 고려해도 족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칼빈주의는 여려가지 형태의 교회정치 및 제도와 관련되어 왔음이 드러날 것이다. 칼빈의 교리들은 청교도 신학을 형성했으며, 그 교리들은 대체로 회중주의에 흡수되어 근래에까지 회중교회를 지배해 왔다. 칼빈주의의 독특성은 정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교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조용, 「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문사,1994,p.1109.

 

2). 칼빈주의의 특징 (5대교리)

칼빈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인간의 전적타락( Total Pepravity)

(2)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거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able Grace)

(5)궁극 구원(Perpetual Salvation)

 

 

결 론

앞에서 우리는 프랑스 신학자이자 교회정치가이고 또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서양의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공헌 했으며 사상가였던 칼빈의 생애, 그리고 사상, 신학, 정치, 사회면에 걸쳐 고찰해 보았다.

칼빈의 사상의 복합적이고 정치적인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 결국 그 자신의 시대에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 그 운동이 성공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 있던 후의 세기들에 그 운동이 지속된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후의 칼빈주의자들은 그에게서 이 불안정한 혼합을 상속했다. 대립적이고 변화하는 충돌들 사이의 불확실한 균형인 칼빈주의는 중세 후기 교회와 동일한 방식으로 철저하게 와해되게 되었다.. W.J.부스마, op.cit., pp.542-545.

 

그러나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이 흔들림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생활 규범으로 제시하여 권면하고 교훈한다. 또 신학적 측면에 있어서 칼빈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역사의식을 보여 주었다. 그는 교부들의 기독론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니케아 회의와 칼케톤 회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오늘날의 신학도들은 역사적 계류가 결핍되어있다. 칼빈은 기독교 교리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얻을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