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강의실 7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학부강의실 7학기

제목 말세론 운영자 2019-03-072022-07-14 10:18
작성자 Level 10

말세론

 

종말론(신약) 終末論(新約) Eschatology of the New Testament (IDBS) 

 

'종말론'은 문자적으로 세계의 종말이나 '마지막 사물들'에 관한 교리 (敎理)를 뜻한다. 이 용어는 19세기의 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개인의 신체적 죽음 ․ 영혼의 중간상태, 그리고 이 세계의 종말에 약속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교리를 다루는 신학의 분야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조직신학적 (組織神學約)인 개념이다. 신약본문들의 일차적 관심은 개인주의적 종말론의 문제에 있지 않다. 즉 한 개인의 죽음 죽음후의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세계와 역사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종말론적 (헬라어로

는 에스카토스(ffEffOf))'이라는 형용사를 분석 (分析)하면 다음과 같은 면이 밝혀진다. 즉 기독교인들은 다가올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날은 최후의 나팔소리와 함께 알려질 것이다(고전 15. 52). 최후의날이 오기 이전에 종말론적인 재앙이 올 것이다(계15: 1, 21 : 9). 그 다음에 최후의 적(敵)인 죽음이 극복될 것이며 (고전 15 : 26), 죽은 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요6 : 39~40, 44, 54, 11 :黜,12 : 48; 벧전 1 : 5). 신약에 의하면 이 마지 막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히1 : 2; 벧전 1 : 20).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의 시간은 최후의 시간이다. 그들은 성령의 종말론적 선물을 받았으며 (행 2 : 17,1성령(Holy Spirit), 종말론적인 시련을 경험하고 있다(딤후3 1 ; 약5 : 3: 요일 2 : 18;유1 : 18; 벧후3 : 3). 그러므로 신약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사건들은, 어떤 면에서 현재적 (現在的)인 동시에 미래적(未來的)이라는 점에 있어서 학자들은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왔음과 '아직' 오지 않았음의 긴장관계 (緊張關係)를 인정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학자들의 견해는 상당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현재와 미래의 긴장관계가 매우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종말론'이란 개념은 철저적 (微底的) ․ 내재적(內在的) 묵시적 (黙示的) ․ 미래적 (未來的) ․ 선취적(先取的) ․실현과정 속에 있는 현재적 (現在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형용사로서 정의되어 왔다. 이러한 표현들은 종말론이 란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1 本項 3.) .19세기 말엽부터 성서주석학자들은 다음의 사실을 점차 더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즉 성서의 종말론적 언어는 신약 밖에 있는 한 지엽적 (枝葉的)인 요소가 아니라,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초대 기독교공동체의 신학적 견해를 이해하기 위한 중심적요소라는 것이다. 종교사학(宗敎史學)는 유대교 묵시사상이 초대 기독교의 신학에 미친 영향을 지적해 냈다. 신약의 종말론은 묵시문학의 우주론적 개념과

표상(表象)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재난 ․주(主)의 위대한 최후의 날 ․재림 ․최후의 심판 ․축은 자의 부활 ․ 미래의 기쁨과 행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묵시사상에 있어서와 같이, 개인의 종말론적 구원은 그 조건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와 낙원을 가지고 있다. 묵시문학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약의 종말은 기모하고 환상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별이 하늘로부터 떨어진다든가, 불이 땅을 파괴하며, 인자(人子)가 구름을 타고 오시며, 의로운 자의 행위가 기록된 하늘의 책이 발견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시바이쩌 (Schweitzer)는 예수와 그 당시의 표상들을 결합시키는 묵시사상과, 이러한 묵시론적 표상의 참 의미를 표현하고 예수의 사신(使信)을 모든 시대에 걸쳐 타당하게 만드는 종말론, 이 양자를 구분했다. 묵시사상과 종말론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대부분의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 규범적 (規範的)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묵시론적'이 라는 표현은, 흔히 비난의 뜻을 더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종말론'은 영원한 사물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종말론의 실제 의미는 묵시사상의 여러 가지 표상과 관념으로부터 엄격하게 분리된다. 이와 같이 비 시간화 된 종말론의 개념은 실존론적 (實存論的)인 개념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불트만의 견해에 의하면 예수의 종말론적 사신의 의미는 개인들이 '이제' 결단을 해야만 할 필요성 하에 있음을 뜻한다. 인간의 실존과 종말론의 참된 이해는 매시간이 최후(最後)의 시간'임 을 뜻한다. 최근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묵시문학의 언어와 종말론의 내용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 종말론의 언어에 대해 성행하던 환원주의적 연구(遷元主義的硏究)를 반대하는 도티 (Doty)는 종말론의 상상적인 언어는 환상적 (幻想的)인 전체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과 앞으로 기대하는 미래를 결합하며 역사와 세계의 목적에 대해서는 물론, 개인의 실존의 목적에 대한 이해와 기대를 밝혀준다. 신약 종말론의 관심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被造物) 전체와 인류의 역사 전체에 있다. 신약의 종말론적 언어 안에는 묵시문학적 언어가 들어 있다. 따라서 신약의 종말론적 언어는 우주론적(宇宙論的)이고 세계적 (世界的)이며, 정치적 (政治的)

이 고 신 화적 (神話的)이다. 과거에는 학자들이 초대 기독교의 역사를 종교사학적범주(宗敎史學的範疇)에서 기술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종말론을 종교사학적 범주에서 분석한다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 못 된다. 방법론적 (方法論的)으로 고려할 때 신약의 종말론을 역사적 예수'의 관점에서, 혹은 초대교회의 여러 가지 다른 문화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 문헌 자체의 종말론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연구방식은 두 가지 종류의 종말론적 이해와 희망을 제시해 준다. 일면에 있어서 종말론적 구원이 지닌 '미래'의 차원을 흔히 묵시문학적 언어와 표상으로서 강조하는 문헌들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문헌들 속에는 예수의 생애 (生涯)와 그의 재림 사이에 개재 (介在)하는 중간시기에 대해서 반영하는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일면에 있어서 종말론적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의 '현재'가되었다는 경험과 확신을 강조하는 문헌들이 있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신약 속에 있는 어느 문헌도 하나의 종말론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다른 부분을 완전히 배제 (排除)하는 문헌은 없다는 사실이다. 초대 기독교의 종말론의 두 가지 형태는, 서로 독립하여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서로 변증법적 (辨證法的)인 긴장관계에 있다. 

 

1. 미래 (未來)의 사건(事件)으로서의 종말론적 구원(終末論的救援)

(1) 바울

(2) 공관복음서 전승(共觀福音書傳承)

① 로기아 자료(The Logia source)

② 마가복음

③ 누가복음

④ 마태 복음

(3) 요한계시록

2. 현재 사건(現在事泮)으로서의 종말론적 구원(終末論的救援)

(1) 열광적 종말론(熱狂的終末論)

(2)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3) 제 4 복음서 (雰催9福音書)

3. '역사적 (歷史的) 예수'의 종말론적 기대(終未論的期待)

(1) 철저적 종말론(微底的終末論)'

(2) 묵시문학적 종말론(黙示文學的終末論)'

(3) 실현(實現)된 종말론(終末論)'

(4) 시작(始作)된 종말론(緯末論)'

 

1. 미래(未來)의 사건(事件)으로서의 종말론적 구원(終末論約救援)

(1) 바울 .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의 전환점을 형성한다. 때가 찼으며' (갈4 :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고후5 : 17; 고전 10 : 11). 다른 일면에 있어서는 구원이 가진 '아직 아니'라는 면도 강조한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롬8: 24) 구원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세 례를 받은 기독교인들은 오직 미래에 올 부활에 참여하고자 한다(6 : 1이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후사(後嗣)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며 (8 : 17),장차 올 진노에서 구원될 것이 다(5 : 9~1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임(고: 31)을 상기 (想起)시키고, 피조물 자신이 썩어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라고 로마의 교인들에게 약속한다(롬8 : 21).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가 이미 작한 우주적 구속(宇宙的救讀)을 완성할 것이다. 바울은 신앙과 통찰(洞察)의 차이를 주장하기 위해 묵시문학적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날' (빌6, 10, 2 . 16, 참조 :고전 4 : 5; 고후5: 10; 롬14과, 장래의 구원이 매우 가까웠음 을 바울은 확신하고 있다(롬 13 : 11 이하, 2:3 이하, 14 : 12).고 이것이 그가 죽기 전에 일어 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살전 4 : 13~1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이 오기 전에 죽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데살로니카 교인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약속한다. 주의 날 주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때에, 먼저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날 것이며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 가서 주를 만나게 될' 것(17절). 고전 15장에 기술된 내용은 좀 다르다. '그 날'에 모든 사람이 다 죽지는 않으리라고 바울은 확실히 확신하고 있다(51절). 천상(天上)의 이미 잠든 사람들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모두, 영적 (靈的)인 상태로 변화됨으로써만이 부활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바울은 개인주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 라 우주적인 의미에 있어서 부활과 새로운 생명을 이해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종말이 올 것이며 최후의 종말을 포함(包含)한 모든 권위와 권세를 파괴한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 그 나라를 바칠 것이다(24-26절). 빌23-24 에 서 (그리고 고후 5:1 이하에서도)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그 자신의 죽음과 결부(結付)시킨다. 이 본문은 바울이 그의 묵시론은 종말론의 기대를 바꾸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라고 수 없다. 왜냐하면 고후4 :에서는 물론 빌 3 : 에서도 바울은 미래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4바울[1the Apostles). 하나님의 능력 (能力)은 모든 백성들이 하고 있는 현재의 악한 세력들을 정복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한다(참조 :롬5~7장). 의로운 자들에게 최후의 날은 구원과(롬 13 : 11~12) 영광의 날3 : 21 ; 롬8 : 18,21 ; 고후4'17)이 될 것이다.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권세자와 세력들에 대하여 그날은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대를 초월하며 그 보다 더 큰 힘을 가진 하나님의 능력은 기독교인들의 崙

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며, 새로운 시대의 대변자(代辯者)들로서 희망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롬8 : 11). 기독교인들은 장차 올 시대를 지향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를 향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이 세계 안에 있으므로 권세의 희생물이 될 수 있는 위험 속에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의 실존(實存)은 묵시문학적 문맥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종말론적 사고와 묵시문학적 사고가 서로 뒤얽혀 있다. 

 

1바울(Paul the Apostle)

(2) 공관복음서 전승(共觀福音書傳承) 

①로기아 자료(The Logia source) : Q자료에 의하면 예수는 종말론적인 사자(使者)요 구원의 달자이다. 종말론적 예언자로서 그는 악한 영을 추방한다(눅11 : 14~22, 17 :20; 마12 : 22~29; 막3 : 22~27), 그리고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를 선포(宣布)하며,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한다(눅7 : 19~23; 마 11 2~6), 예수는 종말론적 사자이므로 각 사람의 운명은 그에 대한 각자의 응답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종말론적 성격의 것이다. 종말론적인 제자직 (崙子職)에 대한 요구는 절대적 용어로 나타나 있다. 즉 예수의 위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집을 버리고 자기의 가족을 미워함을 뜻한다(눅9 : 57, 14 : 25이하). 그리고 환난과 박해 (逈害)를 당하는 것을 뜻한다(12 : 2-12). 골까지 충성을 다하는 자는 종말의 날에 심판을 면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짧으며 (13'25~28), 하나님의 심판은 임박(朧迫)해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시련에 빠져 살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다(11 : 1~4). 종말론적 비유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인자가 언제 올지 예고(豫告)할 수 없다. 각자는 그의 오심을 위해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종말론적인 날은 갑자기, 그러나 확실히 온다(13 : 20-21). 0자료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구원은 현재 상태의 역전(逆轉)을 뜻한파. 즉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을 것이다(6 : 20~21), 박해를 받은 예수의 제자들은 후에 이러할 것이며 (6 . 22~23), 심판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그들의 정당한 자리를 얻을 것이다(22 :29~30) .요약하면 Q자료는 종말이 임박 하다는 기대를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예수의 사역과 함께 종말론적인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확신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확신은 종말론적인 파라이네시스(Parenesis)에 대한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종말론적 경고와 약속은 묵시문학적 언어와 표상(表象)으로 표현되어 있다. 

 

② 마가복음 :이 복음서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활동과 왔 속에 가까이 와 있다(1 14~15). 하나님 나라는 현재 와 黙지만 숨겨져 있으며 (4 26~32), 곧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그의 능력과 영광 가운데에서 자신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그 신비 (神秘)를 믿는 사람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마가의 편집은 13 : 1~4, 28~37에서 식별된다고 하는 견해가 점차 학자들간에 일치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이 복음서 기자는 묵시문학의 전통을 해석하며 그리하여 고 자신의 종말론적 견해를 가장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 전승 자체는 종말이 오기 전까지의 중간시간에 일어날 환난을 기술한다(5-23절). 그리고 '인자'의 재림을 선포한다(24~27절). 전쟁 ․지진 ․기근 ․ 박해, 이러한 것들은 앞

으로 올 시대의 '출산(出産)의 고통'의 시작에 불과하다. 마지막 환난이 지 난 다음에야 종말이 올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파멸 (破滅)과 선택 받은 자의 구원을 뜻한다. 마가복음은 그 마지막 부분에서 그 자신의 종말론적 생각을 피력한다. 28~31절은 제자들이 4절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다. 즉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하였다는 데에 대한 표징이며, 이것은 이 세대 중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을 마가는 강조한다(29~30절). 그러나 아무도, 예수 자신도 정화한 날짜나 시간을 알지 못한다. 33~37절은 제자들이 취하는 태도에 대한 결과를 말한다. 즉 비유에 나타난 청지기와 같이 제자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갑자기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33, 35, 37절). 마가는 중간시기에 처한 기독교인들의 시간과 운명을 예수의 그것과 비유하여 이해한다. 복음의 선포를 위한 시간은(4 : 14, 13. 10) 공동체의 박해와 고난을 불가피하게 초래(招來)한다. 사실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향하고 있는 예수의 뒤를 따라야 한다(8 : 34~38). 진실하지 못하고 부패한 세대 속에서 누구든 예수와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리라 한다(8 : 38) 이 공동체의 신앙과 인내를 더욱 굳게 하기 위해서 마가는 다음의 두 가지를 강조한다. 즉 종말의 시간은 매우 가까웠으며 각자는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갑자기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말의 임박함에 대한 강조는, 권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마가복음(Gospel of Mark)

 

③ 누가복음 :누가복음 종말론에 대한 콘젤만(con-gelmann)의 해석은 넓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누가복음의 종말론은 전통적 종말론을 역사화(歷史化)시키는 것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구원사(救援史)를 여러 기간으로 나누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구원사를 세 시기로 구분함으로써 전통적인 묵시문학의 형태를 이 시대의 임박한 종말로 대치시키신 하나님의 섭리계획 (攝理計劃)에 있어서 교회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지적 (指摘)한다. 이 복음서 기자는 재림의 지연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의 시간을 교회의 세계선교 기간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콘젤만의 주장에 의하면 눅21장의 소 묵시록(小黙示錄)은 역사적 사건과 종말의 우주적이며 초자연적 사건을 구분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역사적 사건들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원사를 여러 기간으로 나누는 반면 이와 동시에 묵시론적 사건들의 형태를 강력히 제시함으로써 이 사건들을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사와 종말론에 대한 콘젤만의 견해는 비판을 받아 왔다. 비 판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누가복음은 그의 자료들과 동일한 종말론적인 긴급성 (緊急性)을 보여주며, 종말론적인 일들을 먼 미래로 지연시키지 않는다. 누가복음은 초대 기독교의 종말론을 비 시간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긴박한 종말론적 긴장관계를 유지(維持)하고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예수의 과거사역과 초대교회의 선교활동과 미래에 올 하나님의 나라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이 복음서 기자도 마가

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이 '마지막 날' (행 2 : 17이하)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종말의 긴박함을 확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종말이 금방 오리 라는 것은 거부한다(참조 :눅19 : 11, 10 : 9, 11, 21 : 31~32). 누가복음은 재림이 지연되리라는 가정을 분명히 거부한다. 즉 나님께서는 지체 없이 그의 선택 받은 자를 '속히' 구원하실 것이 다(18 : 1~8), 그러므로 제자들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12 : 40, 참조

41-46절).  누가복음(Gospel of Luke)

 

ⓒ 마태복음 : 마태는 종말의 긴박함과 그의 날의 묵시문학적 언어를 받아들이고 이를 더 강화시킨 그는 예수를 교회의 역사 안에 위치시키고 종말의 교회론을 명백하게 연결시킨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들의 나라와 아버지의 나라를 구분한다. 마I

예수의 비천함을 강조하고, 그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날 것을 희망(滯望)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고 말하면서도(Q자료에서 유래하는 말과 함께, 12 28) 심판의 미래적 성격을 유지하며 (12 :36~37), 현재는 결단의 시기라고 규정한다(12 : 31). 그리고 그 자신의 시대와 미래의 시대를 명백하게 구분한다(12 : 32).마태는 종말론적인 기대와 윤리적 교훈(倫理的敎訓)을 연결시킨다. 마태만이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한다(25 : 31 이하, 13 : 36 이하, 7 21 이하) 그리고 이 최후의 심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서 결정된다(16 : 27). '곡식 사이에서는 가라지' 비유의 해석은(13 : 24~30, 36이하) 다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교회는 선택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할 혼합(混合)된 단체라는 것이다. 인자는 모든 사람들을 단 하나의 기준에 따라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는지 행하지 않았는지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22 : 11-14, 16 : 27). 재림과 최후심판은 갑자기 올 것이기 때문에 (24 : 43) 기독교인들은 깨어서 기다려야 한다(24 : 42, 44, 25 13), 그러나 마태는 그의 묵시문학적 이야기를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의 비유(24 : 45~51) ․ 지혜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25 : 1~13)․ 달란트의 비유(25 : 14~)와 함께 끝낸다. 이 모든 비유들은 충성과 열심과 준비되어 있음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면으로 마태는 그의 독자들이 주의 종말론적 재림지연(遲延)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하여 그 게으른 종이 하는 말, 즉 '주인이 더디 오리라(헬어로는 크로니제이 무 호 퀴리오스[Aroneiuc Eyrior])'는 말을 하나의 환상이라고 규정한다(248), 다른 일면으로 그는 신랑이 금방 오리라는 여인들의 기대가 어리석은 것이 라 비판하고, 그들의 여인이 오랜 동안 길을 떠나 있다고 생각하는 지혜있는여인들을 칭찬한다. 마태는 세계의 심판이 어떠한 것인가 서술하면서 모든 이야기를 끝낸다. 모든 사람들은

궁핍 (窮乏)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느냐 베풀지 않았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이와 같이 종말론과 교훈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마태복음(Gospel Matthew)

 

(3)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늘에서 그리스도는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 계시록의 이 확신은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어서 통치권을 곧 나타내실 것이라는 기대와 연결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환상들은, 임박한 기다림의 징조를 보이고 있다. 종말론적인 최후는 반신적 (反神的)인 세력들의 파괴 ․죽은 자의 부활 ․기독교인들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적 자료들을 사용하며 전통적인 종말론적 도해를 적용한다. 그러면서 요한계시록은 현재를 종말이 오기 이전의 '짧은 시간'이 라고 기술한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은 임박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흘러야 한다. 마가에 있어서 이 중간시기의 과제(課題)는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있다. 이에 비해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짧은 시간의 지속은 기독교인들의 순교에 달려 있다(6 : 9~11),이 중간시기에 있어서 기독교안들의 임무는 체포되거나 죽는 일이다(13 . 10), 어린양은 죽임을 당함으로써 승리했고, 이 승리는 그의 천상의 나라에 대한 전제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들의 죽음을 통한 승리는, 지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왕권(王權)을 수립하기 위한 전제이다. 최후의 구원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전제한다. 

죽음 이후에 하데스와 모든 반신적인 세력들은 파괴된다.  요한계시록(Book of Revelation)

2. 현재 사건 (現在事件)으로서의 종말톤적 구원(終末鱗約救) 시간적-미래적 종말에 대한 기다림 외에 신약에서는 일련의 실현된' 종말론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화신으로부터 유래한다. 즉 미래에 일어날 구원의 어떤 내용이, 현재의 역사적이고 세속적인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에 의하여 이미 경험된다는 것이다. '실현된 종말론'이란 표현은 종말론적 구원의 완전한 실현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모든 종말론들, 영지주의의 종말론까지도 현재와 미래의 두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적 종말론은 구원이 이미 일어났음을 인간학적 (人間學的)인 의미로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기독론적 (基督論的)인 의미로 이해한다. 이에 비하여 실현된 종말론은 참된 기독교인들이 현재 경험한 것으로서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1) 열광적 종말론(熱狂的終末論) :미래적 종말론을 묵시사상에 귀속시키고, 실현된 종말론을 영지주의에 귀속시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종말론의 이 두 가지 면이 쿰란 문서에는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 쿤(Kuhn)에 의하면 감사시 (感謝詩)는 종말론적 구원을 현재적 실재로 나타내기 위하여 낙원전승(樂園傳承)의 요소들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所有)하고 종말론적 앎과 기쁨을 체험하며 죄를 용서 (容怒)하고 슬픔이 중지되는 가운데에서 나타난다. 특별한 다섯 가지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쿰란 공동체에 의하여 현재적 실재로 경험되었다. 즉 부활 ․ 천사들과의 교통․죽음의 최후 권세로부터의 구원 ․새로운 공동체 ․ 미리 일어나는 하늘에로의 종말론적 옮김이다. 이 실현된 종말론은 쿰란 공동체가 고 자신을, 종말론적 성전이며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곳으로 이해한 자기 이해에서 유래 한다. 초대 기독교의 자기 이해가 종말론적 구원의 현재적 체험에 거한다는 흔적 (痕迹)이 대부분의 신약문헌에서 발견된다. 바울의 '반대자들'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 마태 복음 ․ 목회 서 신 ․ 요한계시록에 관한 연구는 초대 기독교의 열광주의의 잔재 (殘滓)들을 발견했다. 딤후2 . 17~18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바울이 살던 그 당시에 이와 동일한 확신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으며, 이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고들이 이미 부요하며 왕이라고 믿었다(고전 4 : 8). 그들이 희망하는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은 자가 미래에 부활해야 할 필요성을 부인했다(15' 12). 예수가 부활했다면 성령의 종말론적 은사를 받았고,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는 예수의 추 종자들이 있을것이다(참조 : 13 : 1), 이와 동일한 종말론적 열광주의가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빌립보서에서 언급되는 반대자들에게 시사되어 왔다. 이리하여 바울은 물론, 신약의 다른 기자들도(다시 말해서 누가 ․마태 ․마가 ․목회서신 기자들 ․요한일서와 요한계시록의 기자) 그들의 미래적 종말론을 실현된 종말론과 대화하고 대조시키면서 발전시켰다는 것이 점차 더 분명해진다. 실현된 종말론이 가진 열광주의적 형식의 신학적 귀결(神學的歸結)은 종말론적 희 망을 비 시간화 시키거나 정신화 시키며, 개인주의화 시키고 현재적 실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현된 종말론은 제 2바울의 전승과 제 4복음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2)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 제 2바울의 문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울의 미래적인 시제가 과거의 시제로 변화하는 데에 있다. 폭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으나, 신앙으로 인하여 그와 함께 다시 일어났다(골2 : 12). 엡2 : 5~6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시간적인 차원의 요소에도 불구하고(예 :골1 : 21~23, 3 : 3; 엡 2 : 7) 공간적인 생각들이 지배하고 있다. 골로새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주의 주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의 세력들을 극복했고 이 세계와 화해 (和解)했기 때문이다(1 :15~20, 2 9~15). 신앙인 들은 세례를 통하여 이 사건에 동참하며 (2'12, 참조:2:20, 3 : 3) 우주의 권세들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졌다(1 : 13), 이 구속(救讀)은 죄의 용서를 뜻한다(1 . 14, 2 . 13). 구원은 복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복음은 하나님의 숨은

신비를 계시했다(1 26, 4'3). 신비의 내용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불과하다(1 : 25 지하). 복음은 이 신비를 계시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선포했다(1 : 5). 구원은 교회 속에, 즉 그리스도의 몸 안에 현재적 (現在的)이다. 그러나 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굳게 만듦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 라는 것을 아직도 보여주어야 한다(1 : 24). 그리고 서로 가르치고(3 : 16), 감사하고 찬송을 드리며 (1 : 12, 2 : 7, 4 : 2), 사랑의 봉사를 함으로써 (3 14) 이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골로새서 안에는 '이미 현재적인' 면과 '아직 미래적인' 면이 교훈을 목적으로 함께 유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진술은 위에 것을 찾으라' (3 :1~4)는 명령과 결부되어 있다. 나아가서 에베소서는 종말론적 생각을 발전시킨다. 시제 (時制)의 변화에 덧붙여 (2 : 4~7), 구원은 교회 속에 이미 현재적이 라는 견해가 나타난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라는 신비스러운 개념을 '구속 받은 구속자'라는 개념과 결합시킨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머리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서로 하나가 된 교회의 머리이다. 어쨌든 윤리적 훈계를 위해 에베소서에서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두 면의 긴장관계 (緊張關係)를 유지한다. 신앙인들은 비록 그리스도와 함께 섰고 하늘의 자리에 있게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4'22). 는 것은 우주론적 세력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6 : 10 이하). 골로새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警告)되고 있다. 이 교훈은 주장하기를, 기독교인들은 '하늘의 존재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이미 된 바의 그것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3) 제 4복음서 (第四福音書) : 이 복음서 기자는 종말론적 구원이 현재 속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신앙인들은 이미 영원한 삶을 소유하고 있으며 더 이상 심판 아래 있지 않다(5 : 24). 소위 말하는 미래적 ․묵시문학적 진술들이 (5 : 28, 6 : 27, 12 : 25,: 2~3, 17 24) 요한복음 신학의 순수한 요소인가 아니면 교회의 편집자에 의하여 첨가(添加)된 것인가 하는 것은 논쟁이 된다. 이 진술들이 본래 요 한 복음의 본문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부차적 (副次的)인 것이며, 이 복음서의 기본 음조(基本音調)는 실현된 종말론을 보여주고 있다. 이 복음서 기자의

신앙에 의하면, 구원의 역사는 '세상의 구주'이며 (4 :42) 그의 심판자이신 (3 : 1~21, 5 : 22~2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환성되었다. 심판은 드라마틱한 우주적 사건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이에 대한 신앙의 응답 속에서 일어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지라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17 : 11, 14, 16). 그들은 이미 심판을 거쳤으며 죽음으로부터 벗어났고(8 : 51, 11 : 25),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다(3 36), 제 4복음서에 의하면, 종말론적 구원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삶에 있어서 현재

적 실재이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요한도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이 세계의 극단적 (極端的)인 반항을 규정하기 위해, '이 세상(헬라어로는 호 코스모스 후토스)'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복음서 기자는 씨 세상'을 '미래의 세대', 즉 앞으로 올 세계와 대립 (對立)시키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시간의 요소는 약화되어 있다. '이 세상'의 본질은 어둠 ․ 어리석음,죽음 ․속박이다. '이 세상의 지배자'는 악하다(12 31,14 : 30, 16 : 11). 그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것은 모두 죽음에 예속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세상'과 구분되고 이것과 반대되는 예수는, 빛이요 진리이며 자유이고 삶이며 부활이다. 

요한에 있어서 우주론적 이원론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요(1 : 3), 그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3 : 16).묵시사상의 우주론적 이원론은 극단의 이원론' (Built-man)으로 되었다. 빛이 세상에 오기 전에, 세상 전제는 어둠과 죽음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사람들이 빛을 택하고 어둠과 대적 (對敵)하라고 요구하셨다. 어떤 사람이 빛에 속하는가 아니면 어둠에 속하는가 하는 것은, 운명이나 본성에 과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택하고 '이 세상'을 대적하려고 하는 결단에 달려 있다. 이러한 결단은 종말론적 실존으로 옮겨짐을 뜻한다. 예수의 삶 속에서 한번 일어난 구원은 계속하여 위로부터 새롭게 일어난다. 신앙인은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바를 미래로부터 기대할 뿐이다. 즉 생명과 영광과 평화와 사랑과 친교이다. 기독교의 '아직 아니'는 고별설교에 (13~17장) 견지 (堅持)되어 있다.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 안에 있으며, 이 세상과 직면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주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슬픔과 환난과 박해와 거부를 당한다. 예수의 작별은 그가 먼저 가서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처소를 마련함을 뜻한다. 예수의 작별과 그의 재림 사이의 시기에는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그를 나타낼 것이다. 제 4복음서는 종말론적 구원이 현재적 실재임을 선언하기 위해서 묵시문학적-종말론적 언어를 사용한다

(예 :심판 ․ 主의 오심 ․ 영원한 생명). 이리하여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 (個人的)인 것으로 되었으며 비 시간화 되었다. -1 요한복음(Gospel of John)

 

9. '역사적(驩史約) 예수'의 종말론적 기대(終末論的期待)

가장 오래된 공관복음서 전승들은 두 가지의 다른 종말론적 차원을 예수에게 돌린다. 어떤 본문은 예수가 유대교의 묵시사상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의 종말을 기대했다고 암시한다. 즉 하늘의 구름을 타고 인자가 온다는 것, 즉 가까운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예 : 막9 : 1, 13 : 30; 마 10 23) 그 반면 다른 본문들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 속에 구원의 시간이 이미 왔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하나의 현실이 되었음을 암시한다(예 : 눅 11 : 20, 17 . 20~21; 마11 : 12). 주석가(註釋家)들은 이 두 가지 반대되는 예수의 종말론적 전승을 네 가지 다른 방법으로 다루었다. 

(1) '철저적 종말론(徹蘿的終末論)'.임박한 종말의기대와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말하는 본문들은 역사적 예수가 말한 신빙성 있는 말씀으로 인정 (認定)되어 왔다. 그 반면 실현된 종말론을 말하는 본문들은 오순절 이후의 교회의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 입장은 두 가지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만일 예수가 세계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생시에 일어 날 것이 라고 기대했다면 역사는 예수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주요 신학적 문제는 '재림의 지연'이었다. 클레멘스 제 1 서신의 저자는 이 문제를 말하고 있으며 (23: 3~5), 베드로 후서의 기자도 이 문제를 말한다. 그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다'(3 : 3-9)고 말한다. 그러므로 주석 가들은 말하기를,여러 가지 교리적 합리화와 종말론적 기대의 표현은 '종말의 지연'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 들이었다고 한다(Werner, Grfisser).

둘째 만일 예수가 세상의 임박(臨迫)한 종말을 기대했다면, 그는 실수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우리에 대해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 바이스(Weiss)는 묵시문학적 예수와 오늘 우리의 상황의 상호관계 (相互關係)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학적 이해에 기초를 두어야지, 역사적 예수의 신학적 이해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부활한 주께서 이제 그의 공동체를 인도하시기 때문이 다. 예수의 설교가 그의 임박한 기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서, 불트만은 바이스와 일치한다. 예수께서 그 당시의 사람들과 같이 무시무시

한 종말론적인 격변(激變)이 불원간에 일어 나리 라고 기대했음은 사실일 수 있다. 예수의 기대는 종말론적 시간이 '바로 지금 여기에'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박성을 대하게 되었으며, 결단을 내려야 하게 되었다. 즉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인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를 우리가 선택하도록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종말론적 기대의 정확성이 아니라, 삶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그의 이해의 타당성 (妥當性)이 다. 

(2) '묵시문학적 종말론(黙示文學的終末論)': 주석학의 다른 견해는 공관복음서의 가장 오래된 전승 속에 묵시문학적-종말론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기독교의 묵시문학적 신학은 예수로부터 유래(由來)하는 것이 아니 라, 오순절 후에 초대교회의 열광주의로부터 유래한다. 예수는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뜨거운 종말론적 기대와 함께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는 요한과

그 당시 유대교와 다른 입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하여 말했다. 예수의 설교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과 멀리 계신 하나님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용서하고 도와주며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라고 설교한다. 그리하여 회개는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고의 은혜와 관계된 것이다. 예수의 종말론에 의하면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사신(使信)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문맥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케리그마이다. 묵시사상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어머니'이다(Kfsemann). 초대교회는 예수에게 '인자'라는 칭호(稱號)를 적용한다. 그리고 그는 승천하신 분이며, 최후의 날과 최후의 심판을 시작시키고자 하는 장차 올 심판자이다. 

(3) '실현(實現)된 종말론(終末論)':이 견해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적 구원이 그 자신의 사역 속에서 실현되었다고 가르쳤으며,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한 사건(事件)이나 한 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지간과 공간을 초월한' 질서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도드(Dodd)는 이 견해의 대표자(代表者)인 그는 예수의 종말론적인 생각을 '도덕적 우주'나 영원한 실재'를 단지 상징화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 예수의 사신을 비 종말론화 시킨다. 이와 유사하게 윌더(Wilder)는 종말론적 왕국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당시의 사신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서, 표현할 수 없는 실재에 대한 '상징'이 라고 말한다. 페린(Perrin)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구속된 상징이 아니라 탄력성 있는 상징이며, 이 상징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시간에 동일화될 수 있는 한 특징된 사건에 관한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 속에서 경험하는 어떤 사건으로 해소될 수 없는 상징인 것이다.  

(4) '시작(始作)된 종말론(終未論)''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 속에서 시작되어

미리 앞당겨져 있지만, 그 완성 (完成)은 미래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삶 속에서 또 이 삶을 통해서 시간이이 종말론적 구원(終末論的救援)은, 우주적으로,세계적으로 나타나고자 한다. 예수의 사역 속에서 정적인 싸움은 이미 끝났지만, 싸움은 마지막 승리를 얻을 때까지, 그리고 예수가 이 세계의 심판자로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불트만의 어떤 제자들은 이들의 종말론적 가르침에 있어서 현재적 요소와 미래적 요소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하여 말한다(현재완료,미래,

굶주림,배부름, 잃어버림,발견) 그러나 그들은 긴장관계를 실존론적 (實存論的)으로 이해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이해한다. 어쨌든 '양자 모두'를 주장하는 모든 학자들은 '이미'와 '아직 아니'라고 하는 신학적 핵심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야 할'과제를 가지고 있다(Moltmann) .

위에 기술한 네 가지 견해 모두는 가장 오래된 종말론이다

 

복음서 전승에 있어서, 미래적인 면과 현재적인 면을 화해시키고자 한다. 네 가지 견해 모두 묵시문학적 요소를 덜 강조하고 예수의 종말론적인 사신을 실존론적 개념이 나 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 결과 묵시문학적 세계관의 우주적-보편적 차원과 사회적-정치적 차원이, 예수의 사신과 초대 기독교 신학으로부터 제거되었다. 나아가서 주석학적인 결과는 성서의 본문

을 주석하는 학자의 조직신학적 전제와 관심에 크게 의존(依存)한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예수의 종말론적 견해에 대한 연구는, 무익한 것으로 판정 (判定)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옛 질문'과 '새 질문'을결정한 동일한 방법론적인 어려움에 봉착(逢着)한다. 역사적 피수의 종말론을 신약의 해석으로부터 '증류(蒸溜)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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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종말론

-

계시록의 가르침

 

제 1 부(1 - 11장)

 

I . 일곱 교회 (1 - 3장)

 

1:1 그 종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이 계시록의 말씀은 똑같이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1: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계셨고' 라고 고쳐야 합니다.) 장차  오실 이]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참고, 계1:8, 4:8). 또 [일곱 영]은 성령님으로, 일곱은 일곱 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1:4 - 5 성부 성령 성자의 이름으로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4절을 성자 예수님으로 해석한다면 성자 성령 성자의 이름으로 문안인사 하는 것이 됩니다. 이로 볼 때 4절은 성부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1:7 예수님을가리킵니다.

1:11 이 일곱 교회는 실제로 소아시아 터키지방에 있었던 그 당시의 교회들이고, 또 동시에 지금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대표(상징)하고 있는 교회들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 일곱 교회가 편지를 받았으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편지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1:13 인자는 왕권을 가지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14 - 16절의 예수님을 묘사하는 부분은 모두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1:16 일곱 별은 교회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계1:20), 16절은 교회 지도자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1절의 일곱 교회 사이를 다니신다는 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 사이를 왕래하면서 자기의 교회를 보살피신다는 뜻입니다. 1장 16절의 날 선 검이 나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2 - 3 장 : 일곱 교회에 준 교훈

장점과 단점이 함께 주어져 있는데, 요한 계시록 자체가 평범한 편지가 아니고 종말과 관련된 편지이므로 그 장점과 단점보다는 다음의 사항에 주의해야 합니다. 

(1) 미혹하는 자들, 즉 적그리스도들이 나올 것을 경고하는 내용들이 2- 3장의 가장 두드러진 교훈 중 하나입니다(2:2,6,9,13-15,20-21,24, 3:9-10). 일곱 교회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의 교회에서 미혹 하는 가짜 무리들이 있을 것을 경고하셨는데 실제로 1세기 교회에서 이런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예수님의 교훈이 1세기 때부터 실현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박해가 있을 것을 여러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2:10,13, 3:8-10)

(3) 도적같이 오실 것이니까 깨어 있으라는 교훈이 나옵니다(2:5,16, 3:3,20). 이미 1세기 때부터 적그리스도도 있고, 미혹하는 일도 있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임박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벌써 2000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4) 이러한 박해와 미혹이 있는 중에서도 미혹을 받지 않고 믿음을 지킨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이 나옵니다(2:7,10,17,25 28, 3:5,12,21).이 모든 약속들이 4 - 22장을 통해 계속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II. 일곱 인(인)(4 - 7장)

 

이부분은 요한 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이부분의 내용이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 네 장(장)만 잘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4:4 이십 사 장로는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사도, 즉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의 대표자들입니다. 먼저 간 성도들의 대표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의 신분을 누리고있다는 뜻입니다.

 

4:6 네 생물은 구약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옮겨 둔 것입니다(에스겔 1:5).

이 네 생물은 하나님을 호위하고 시종 드는 천사들입니다.

 

4:8 재림을 누가 합니까 ?

재림하실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배운 것은 주제별 성경공부 하면서 잘못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계 1:17에서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성부 하나님도 재림하시고, 성자 예수님도 재림하십니다. 성령님이 재림한다는 구절은 구체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지만, 틀림없이 성령님도 함께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오해는 '오신다'는 말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서 그렇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므로 이 우주가 하나님 보다 수십억 배 크다고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이 온 우주를 처소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아 다니듯이 왔다 갔다 한다고 간단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재림(파루시아)'은 온다, 간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갑자기 등장한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즉 마지막 날에 심판의 주로 등장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보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4장에 보면 성부 하나님의 보좌 하나만 설명되어 있을 뿐, 성자 예수님이 앉아 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5장에 보면 오히려 예수님이 서 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5:6). 한편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앉아 계실까요, 서 계실까요? 이는 항상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계시록 3장 21절에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아 계시고, 우리 역시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됩니다. 따라서 한 보좌에 아버지, 예수님,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다 앉는다는 것을 보면 보좌는 의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보좌는 하나님의 왕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왕권을 예수님도 누리시고, 우리도 누린다는 뜻입니다.

 

4:10 - 11 면류관은 하나님의 상급, 왕권 같은 상급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면서 이 온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5:1 이 책은 하나님이 앞으로 이 세상에서 집행할 경륜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5:8 성도들의 기도(향)를 예수님에게 전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책을 받으셔서 이 우주의 모든 역사를 펴나가실 텐데, 그때 우리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참고 하시면서 집행해나가신다는 뜻입니다. 

 

6:2 흰말 --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하지만, 저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는 적그리스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미혹을 첫 번째 징조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교훈과 계시록의 내용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표 1 참조 ).

 

6:5 - 6 한 데나리온(그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 약 2 - 3만원)에 밀 한되라고 물가가 제시된 것으로 볼 때 검은 말은 흉년이 들어 식료품값이 매우 비쌀 것을 말합니다.

 

6:9 - 10 죽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박해를 의미합니다. 순교한 백성들이 부르짖는데, 하나님은 환란이 더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선 이러한 박해 다음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계시록에선 이것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교자 들에게 말씀하시기를 11절에서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것은 복음이 더 널리 전해져서 순교자가 늘어나야 한다고 하시기 때문에 환란과 함께 복음전파를 동시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6:12 - 14 앞만 보면 지진 같아 보이지만 우주계에 대변혁이 일어 날 것을 말합니다. 13절의 무화과나무 역시 실제 무화과나무를 가리킵니다.

 

7:1 - 3 하나님은 구원하실 백성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어 다 챙길 때까지 심판을 보류하라고 천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7:4 이 인(인)맞은 자가 12지파 x 12 x 1,000= 144,000 명인데, 이는 완전수로서 구원받을 총 수를 144,000이라는 상징적인 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 144,000 명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4절을 이스라엘 백성 중 구원받을 수라고도 해석하지만 그 보다는 모든 인류 중에서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뒤에 나오는 내용(7:9)과 일치합니다. 또 5절에 만약 르우벤지파가 먼저 나오면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이 될 수 있지만, 유다 지파가 먼저 나오므로 영적 이스라엘이 분명한 것 같아 보입니다. 

 

7:14 환란을 받고(통과하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환란을 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대주의는 우리들이 들려 올라가서 환란을 면한다고 설명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환란을 겪는다고 적고 있고, 초대교회 때부터 실제로 환란을 받았습니다.

 

7:15 구원이 완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하시는 행동, 즉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다는,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7:16 - 17 이는 마지막 때의 이야기입니다.

4 . 5장 두 장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성도들과 천사들의 장면이 나오고 6장에 와서 일곱 인을 떼시는 중에 여섯 인을 떼시면서 지상에 일어날 여러 징조들,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들이 마태복음 4장과 똑같은 배열로 나오고 7장에는 구원받을 백성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인을 찍어서 보호(구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구원 받아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 하시고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영생을 주시고 목마르지 도, 배고프지도 않게 하시는 끝장 난 마지막 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7장까지 해서 이미 계시록의 이야기가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8장은 다시 되돌아가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헨드릭슨은 계시록이 같은 내용을 일곱 번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많은 학자들이 이를 지지합니다. 계시록은 1 - 22장까지 하나의 줄거리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반복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3년 반이 두 번 나오므로 7년 환란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해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3년 반은 지금의 신약시대 전체를 의미합니다. 144,000이나 3년 반은 모두 상징적인 숫자 이므로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표 1 >

[마태복음 24:3-31 ]

 [계시록 6:1-7:(일곱 인)] 

 

1.미혹(4-5절)   1.흰 말(미혹의 적그리스도)(1-2절)

2.전쟁(6-7절)   2.붉은 말(전쟁) (3-4절)

3.기근(7절)     3.검은 말(기근) (5-6절)

4.지진(7절)     4.청황색 말(사망) (7-8절)

5.박해(9-12절) 5.박해 (9-11절)

 복음전파(14절) 복음전파 (6:11, 7:1-8절)

 예루살렘 멸망(15-22절) 

 미혹(23-28절) 

6.하늘의 권능이 흔들림(29절) 6. 천체 (6:12-17절)

7.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심(30 3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