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강의실 7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학부강의실 7학기

제목 종교개혁사 운영자 2019-03-072022-07-14 10:19
작성자 Level 10

종교개혁사

 

종교 개혁 원인

ㄱ.지리적 배경

고대 문명 하천적 그러나 중세 내해적

신대륙 발견-프로테스탄트 주도

ㄴ. 정치상의 변화

세계국가->민족국가 지방분권 중앙집권

교황으로부터 정치적 독립& 각 국가간 세력균형

ㄷ.경제상의 변화

봉건적 농업 시민상업(중산계급)

ㄹ.사회적 변화

중세 수직적 사회 수평적 유동적 사회(신흥 둥산계급)

농촌-자유농민 도시-상인계급

ㅁ.지적변화

문예부흥 이태리--휴머니즘과 이교의 선

북구라파-원어성서연구

ㅂ.종교적 변화

로마교회의 권위->성서적 권의

루터 윗텐부르그의 교회문에 95개조 계시1517

 

종교개혁의 관점

로마 카톨릭..보편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측에 반항

개혁자..종교 생활의 개혁

역사가.. 혁명적 운동

ㄱ.프로테스탄트 측의 역사가..초대 기독교의 순결을 찾으려는 종교적 운동

그러나 종교 개혁의 배경무시(경제 정치 지식)

ㄴ.로마 카돌릭측 역사가..로마교회의 시각적 교회적 일치를 파괴한 이단

..그 원인을 결혼을 위한 루터의 비천한 행위 그러나 그 시대의 로마교회의 타락상은 무시

ㄷ.비 종교 역사가

합리주의자--볼테르..종교개혁.. 삭센주의 수도사의 싸움,

영국..헨리 8세의 연애 사건의 결과

마르크스 주의자..교황의 대 독일 경제적 착취가 낳은 결과

정치적 역사가..민족국가가 보편적 교회에 대항

* 그러나 부차적인 정치 경제 도덕 지적 배경만 주장하나

그러한 사건이 인과관계에 의하여 통합적으로 발생한 것은 외면

종교개혁의 원인

* 교회는 각 나라에 관할권(재판권)을 행사하며,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며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특히 독일의 삭센에서는 면죄부를 통하여 경제적 수탈을 감행 중상층의 반발을 샀다. 또한 민족국가의식의 중앙집권적 왕들도 반발하였다.

* 문예부흥으로 자유로운 비종교적인 우수한 과거 희랍정신에 도달 권위적 교회의 주장에 회의,특히 원어성경의 공부로 신학적 주장에도 회의

* 특히 교회의 성직을 돈으로 매매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있었으므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까지 도전

* 결정적으로 사센의 탯쨀의 면죄부가 주요 원인

르네상스 튜튼 알프스 북쪽..성서적 고전 연구

라틴 알프스 남쪽 일반고전 연구

종교개혁 튜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1517~1563 중산계급

라틴 반종교개혁1545~1563귀족계급

루터........ 중세교회 관습을 거의 인정

특징 개혁교회.... 성서에 근거

제 세례파... 근본적 단절

독일

문예부흥 후 로마교회의 잘못을 비판하는 책이 유포,독일은 자기를 보호해줄 주권자가 있었음

교황은 독일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부를 축척하였으며 각종 경제적 수탈을 자행..따라서 반 로마 분위기가 확산..이때 루터가 반기

ㄱ.~1517수양기 &면죄부에 비판

ㄴ.1518~1521 교회와 단절

ㄷ.1522~1530 조직시기

ㄹ.1531~1555 아우구스부르그 강화

 

ㄱ. ~1517 루터 수양기

~1505 엘프르트 대학에서 문학사 및 문학석사 하고 아우구스티누스회에 들어감

1508 윗텐베르그에서 강의 시작. 칭의 사상확립

1517 10 31 95개 반박문 씀

 

ㄴ.로마와 단절1518~1521

텟쨀의 도미니크회와 루터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립

1520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글.....로마교회의신앙의 허실

바빌론 포로.....로마의 성례와 제도의 허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로마교회 신학 허실

1520 6월 레오 10세 추방문 발표 ,루터는 이를 불태움

와르데부르그 성으로 피난

 

ㄷ.분리의 해 1522~1530

멜란히톤..신학총론

루터..독일어 신약 성서

1525 에라스무스(휴머니스트)와 단절&농민폭동에 반대

1529 쯔빙글리히와 단적 성만찬-공재설 주장

1535 제세례파와 단절

 

ㄹ.독일 종교전쟁1531~1555

1531 슈말갈텐 동맹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1546 루터사망 멜란히톤 이 이음

1555 아우그스부르그 강화

 

 

****루터의 주장 .........성경의 권위 칭의 만인 제사장

 

스칸디나비아, 덴마아크

프리드리히 1세 때 한스 타우젠..신약성서 덴마아크판 1523

크리스찬 3세 ..루터주의가 국교 1536

 

노르웨이

프리드리히 1세때 소개

크리스찬 3 세때 국교

 

아이스란드

데이날손 ..아이슬란드 신약성서 1554 국교가 됨

 

스웨덴

쿠스타프 바이샤때 올라브스패토리 ...신약성서 스웨덴판 1526

1560 개혁완성

 

핀란드

미카엘 아그리콜라..에의하여 1528 개혁완성

 

스위스..쯔빙글리

~1502..문학사 문학석사 주임사제

휴머니즘 원어성경 연구 &스위스 용병반대

1519 십일조 반박 67개 항목 ..신앙에의한 구원,성서의 권위 ,쮜리히 개혁

1528 베른 1529 바젤 & 종교전쟁 후 캇펠에서 강화

1531 전쟁 종군목사로 전사

 

성찬기념설

원죄..도덕적 질환 그러나 죄는 아님

소아..세례없이도 구원

 

제세례파

ㄱ.스위스

클라드 그레비르..창시자

1525 페릭만쯔의 성서 연구회가 모임 정지명령을 받음 그들이 유아세례 거부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므로 1526 익살됨

1535 완전히 소멸

 

ㄴ. 독일의 제세례

1533년에 슈트라스부르그 에 천년왕국이 된다고 주장 처형됨

 

ㄷ. 화란

멘노시몬즈...형제회 1676 인정됨

 

성서권위 인정

순수한 교회

유아세례반대

정교분리

 

캘빈

 

루터 캘빈

농부아들 서기의 아들

신학&철학 휴머니즘&법률

개혁교회의 예언자 조직자

가정과 고향을 사랑 고독한 연구가

귀족과 군주의 지지를 받음 교회 내 대의제 발달에 관심

칭의 하나님의 지상권인정

공재설 영적임재설

 

파리대학에서 수학

오르레안 대학....프로테스탄트사상소개

1533..회심

1536 기독교강요 지음

1537 파렐과 협력

1538 추방..슈트라스부르그

1541 제네바로 귀환

1564 사망

 

캘빈 신학..tulip..하나님의 완전한 지상권

total depwavity 전적 타락

unconditional election 절대적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속죄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pre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인내

 

교육을 장려

대의제 체용...민주주의 발전에 공헌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인정...자본주의 근거

 

I.종교 개혁 시대 (1517-1648)

 

1. 서 론

1) 개혁의 필요성

(1) 교회의 부패...교직 매매,고급 성직자의 부도덕한 생활,음행.

(2) 교황의 세속화...교회의 권위 추락.

 

2) 개혁의 원인

(1) 교회의 타락...교직의 타락으로 휴머니즘의 발생.

(2) 개혁 전 개혁자의 위클리프,후스 등의 개혁론의 영향.

(3) 교황 레오 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대한 루터의 봉기.

 

3) 개혁의 형태

(1) 루터파...독일과 동북 유럽.

(2) 쯔빙글리파...쮜리히를 중심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

(3) 칼빈파...제네바를 중심으로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

(4) 영국 개혁파...영어를 사용하는 민족.

(5) 제세례파...서부 유럽의 대부분.

(6) 예수회...구교 운동으로 반종교 개혁 운동

 

4) 개혁이 성공한 지역.

(1) 튜톤족이 자리잡은 북유럽과 로마 이외의 지역.

(2) 로마교화된 라틴족이 거주하는 남유럽 실패.

 

5) 정치 형태

(1) 루터파...확정된 양식이 없음.

(2) 칼빈파...장로 정치.

(3) 영국교...구교 정치.

(4) 재세례파...침례교가 회중 정치.

 

6) 신학 사조

(1) 구교와 일치점...하나님,그리스도,성령,

(2) 다른점...교회,성경,구원,내세관 등.

a. 전설,가경을 배격. b. 교회내 구원,예전 반대.

c. 연옥설,속죄표,미사.화체설 반대

d. 루터,쯔빙글리는 개척,칼빈과 멜랑히톤은 조직.

 

7) 예배 의식.

(1) 지방어로 설교,교육 부흥,미사 분향 제도 폐지.

(2) 성일,성자,유물,성상 숭배,사자 위한 기도,성지 순례 등 폐지.

 

<요 약>

*종교 개혁의 공과

1) 공

(1) 성경의 근본 사상으로 환원.

(2) 우상화와 의식화한 예배를 중심으로 환원.

(3) 전체주의에서 신앙의 자유 얻음(성경 해석의 길 제시, 하나님과의 직접

교제).

(4) 로마 교회내의 자체 혁신 운동 전개.

 

2) 과

(1) 신교 안에 여러 교파가 생김.

(2) 전쟁 유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파탄)

* 종교 개혁이 경제계에 미친 영향.

(1) 봉건주의의 몰락으로 중산 계급의 부흥.

(2) 일반적 지식을 발달로 문화의 향상.

(3) 개인주의 부흥으로 자본주의 형성,

(4) 각종 공업 발달의 계기.

 

2.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와 개혁

1) 생애

(1) 1483.11.10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2) 19세에 에르푸르트(Erfurt)대학에서 스콜라 철학과 라틴 문학 전공.

(3) 법학을 전공하려다가 아우그수티누스 교단 수도원에 들어감.

(4) 베텐베르크 대학의 논리학,물리학 교수를 거쳐 신학 교수가됨.

(5) 1511년 수도사 회의 사명을 띠고 로마 여행,교회의 여러가지 부조리를 알게 됨. 1512년 신학 박사 됨.

(6) 1525년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수녀와 결혼

(7) 1546.2.18 죽음.

 

2) 개혁 사업

(1) 발단...교황 레오 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반대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 논제로 공격.

(2) 추방장...에크(John Eck)의 재빠른 고발에 따라

 a. 저서를 불태우라

 b. 60일내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일당까지 체포한다. 루터는 1520.12.10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모아놓고 추방장을 불태워 버렸다.

(3) 95개조 항의문

a. 대의

①.속죄 표는 하나님의 징벌을 없이 할 수 없고, 교회의 정죄만 없이 할 뿐이다.

②.속죄 표는 죄를 사할 수 없다.

③.속죄 표는 죄인이 하나님께 의당히 받아야 할 형벌을 없이 할 수 없다.

④.연옥에 있는 영혼에게는 속죄 표가 쓸 데 없다.

⑤.죄를 참회한 신자는 하나님께 사죄함을 이미 받은 고로 속죄 표는 쓸 데 없다.

⑥. 선행,공로,보화가 무엇인지 평민이 깨달을 수 없고 그 보화 창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르친 복음 뿐이다.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나 성도들의 공로를 팔 권한이 없고 정죄만 없앨 권한이 있다.

 

b. 내 용

①.서론 1-7 뱏.연옥에 있는 자 사면 문제 8-29

②.살아있는 자 사면 문제30-80. 뱔.평신도로서 반대 81-91

③.판매 동기의 잘못 지적 92-95.

 

3) 사상과 저서

(1) 사상

a. 경험적,실제적 종교 탐구. 

b. 성찬은 공재설 주장.

c. 삼대 주장

d..以信得義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e..信者皆祭司長 (믿는 자는 모두 제사장 이다)

f.성경의 권위.

 

(2) 저서

a. 1520.5.선행론 (선행은 오직 신앙에서)

b. 1520.8.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고함 (교황청의 부패를 공격)

①.교황의 속권 지배 반대.

②.교황만의 성경 해석 반대.

③.교황만의 회집권 주장 반대.

c. 1520.10 교회 바벨론 포로 (성도는 다 제사장,성찬,세례,참회만 예전)

d. 1520.11 크리스챤의 자유 (로마서를 토대로 한 이신득의 교리).

 

4) 루터의 바름스 (Warms) 국회

(1) 1521년 1월 21일 카알(Karl) 5세가 바름스(Warms) 에서 국회를 소집.

(2) 의제 - 루터 처리 문제.

(3) 교황 특사 - 알렉산도 (Alexander)

(4) 루터의 국회 출두

a. 카알 5세가 신변 안전 보증서를 주어서 소환.

b. 죽음을 각오하고 3월 26일 출발.

c. 도중에서 군중들의 환송을 받음.

d. 작사,작곡의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름.

(5) 국회의 심문 (4월 17일)

a. 25권의 저서가 루터의 것인가? (그렇다)

b. 이를 취소할 수 없는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기 전에는

취소할 수 없다).

(6) 황제의 명령.

a. 루터는 죄인.그와 만나는 자도 처벌하다.

b. 루터는 저술을 금한다.

(7) 4월 26일 구기 도중 친구의 성으로 납치되어 신약 번역에 착수했다. 1521

년 3월에 탈고, 1543년에 14회 정정 출판.

 

3. 독일의 개혁 운동.

1) 멜랑히톤(Philipp Melancthon 1497-1560)

(1) 21세기부터 대학의 어학 교수 (히브리어,그리이스어)

(2) 성격이 온유 겸손하고 강직하므로 혁명적인 루터의 유일한 동지였다.

(3) 저서 <신학 통론>

a. 권위는 성경에 있다.

b. 신앙...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을 확신하는 것.

c. 예전...세례와 성찬.

2) 과격파와 온건파

(1) 온건파...에라스무스 (루터의 개혁이 과격하다고 비판)

(2) 과격파

a. 카알시타트(KarlstadtP...독신주의,성상 숭배,성찬식.제사 부분 등 반대.

b. 토마스 뭔쩌 (Thomas Munzer) 등 3인

①. 유아 세례 부인 뱏.성경과 교직을 경히 여김.

②. 사회 조직의 개혁을 강조 뱔.세상 종말이 가까웠다고 혼란.

(3) 루터의 방문...1522년 3월 바르트부르크(Warburg)에

a. 8일간의 설교로 혼란과 질서를 완전히 회복 (과격주의 배격)

b. 많은 수도사와 일반 귀족들의 지지를 얻음.

 

3) 분열

(1) 농민의 난...1524년 농민의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사망.자 15만명에

달함. 루터는 귀족편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킴.

(2) 에라스무스의 분열...자유 의지를 강조하여 루터와 반대의견 발표.

(3) 루터의 결혼...1525년 귀족 출신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 (이는 많은 사람에게 조소 거리가 됨).

 

4) 황제의 박해와 항의

(1) 1526년 스파이어(Speier)국회...제후는 교황이나 황제 앞에서 답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신앙을 정하는 권리가 있다.

(2) 1529년 국회 재소집.

a. 가톨릭 제후국주의 개혁주의 선전을 금지함.

b. 개혁주의 제후국에서 가톨릭 활동은 자유.

c. 옛날부터의 권위와 세입은 그대로 가진다.

(3) 개혁파의 항의

a. 1529년 4월 19일 항의문 제출.

b. 서명자...5제후국,14자유시

 

5) 신교 발전

(1) 1530년 6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문 작성 (멜랑히톤이 기초)

(2) 1532년 뉘른베르크에서 신구교 화친 조약 체결.

(3) 1539년 덴마아크,스웨덴,노르웨이 등이 신교권에 가담.

 

 

4. 쯔빙글리 (Zwingli)의 개혁 운동.

1) 생애

(1) 1484년 1월 1일 스위스 빌트하우스 (Wildhaus)에서 출생.

(2) 15세때 뵐플린 (Wolflin)의 문하생이 되고, 2년 후에 비엔나에서 유학,철학 연구

(3) 1506년 글라루스(Glarus)에서,1516년 아인지이델른에서, 1519년 쮜리히에서 목회.

(4) 1531년 10월 갑펠에서 가톨릭 연맹과의 싸움에서 전사.

 

2) 개혁 사업

(1) 주요 활동 무대...쮜리히 쮜리히는 인구 7천명의 소도시.1519년에 쮜리히 목사가 됨.

(2) 67개조 논재 (루터의 95개조 논제와 비슷)를 걸고 토론하여 시의회에서 통과 됨.

(민주국가이므로 다수의 지지로 통과.시행).

a. 예배 의식의 근본적 개혁.

b. 교회 정치의 주권은 교회에 있음.

c. 대회 조직-목자,각 교회 대표 2명,정부 대표8명.

 

3) 스위스의 각지의 개혁 운동

(1) 베른(Bern)

a. 1528년 1월 26일 개혁 단행.

b. 베르트홀로 할러 (Berthold Haller).세바스티안 마이어 (Sebastian Mayer)등이 지지함.

(2) 바알 (Bazel)

a. 1525년 2월에 개혁

b. 요한 외콜람파디우스 (Johann Oecolampadius,1482-1531)가 개혁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목사요, 대학 교수로서 쯔빙글리 다음가는 개혁자였다.

 

4) 신구 양파의 투쟁

(1) 원인

a. 산림 지역 5개조는 개혁을 거절하고 연맹을 맺음.

b. 시비쯔주에서 목사 1명을 이단이라고 화형 시킴.

(2) 캅펠 (Kappel)의 제1일 조약

a. 산림 지역 주는 군비를 지출한다.

b. 각주의 신앙은 다수로 결정한다.

c. 종교상 문제로 분쟁하지 말것.

(3) 캅펠 제 2 조약

a. 1531년 산림 지역 주들이 조약을 어기고 군사 8천명으로 쮜리히 급습.

b. 개혁 도시들도 대항했으나 대패 쯔빙글리의 전사.

c. 조약 체결.

d. 개혁 도시 주는 군비를 지출할 것.

e. 5개 산림 지역 주는 로마교를 지킨다.

 

5) 루터와의 만남.

 

(1) 시기 : 제 1 갑펠 조약과 제 2조약.

(2) 때와 목적 : 1529년 10월 1일 마르부르크에서

(3) 차이점

a. 정치 문제...루터는 작센의 동의만 얻으려함. 쯔빙글리는 독일과 스위스 개혁자의 합동으로 프랑스 왕과 협력하여 카알 5세로 하여금 신교를 공인하게 하려함.

b. 성찬 문제...쯔빙글리(상징설) 루터(공재설)

(4) 결과 ... 15개조의 신조중 14개조는 합의했으나, 성찬 문제로 성립되지 못함.

 

5. 칼빈의 개혁 운동

1) 생애

(1) 1509년 7월 10일 파리 동북방에 소재한 느와이용(Noyon)에서 5형제 중 둘째로 출생함.

(2) 부친 제라드(Jhon Gerad)는 법률가로 감독.서기로 근무 했고,모친은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3) 1523년 8월에 파리 대학에 입학.라틴어,철학,인문 과학을 공부함. 졸업 때에 법과를 전과함.

(4) 1533년 11월 1일에 친구 니콜라스 코프(Nicholas Cop)가 파리 대학 학장으로 취임 할 때 취임 연설의 기초자로 복음주의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코프는 바젤로 피난하고 칼빈은 앙궐렘(Anguleme)의 뒤틸레(Du Tillet)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 집은 은퇴 교역자의 집으로 윤곽을 잡았다.

(5) 1535년 바젤에서 역사적 명저인 <기독교 강요> (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를 발행하였다.

(6)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도중 제네바에서 파렐 (W.Farel)를 만나 제네바에영원히 머물며, 개혁 사업에 종사하였다.

(7) 1540년 8월 네덜란드에서 피신해 온 과부와 결혼하였다.

(8) 1564년 5월 24일 55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분주한 개혁 사업 속에서 과로로 신체가 허약 하였는데, 수년간 1일 1식을 하였고 매일 설교하며, 주 3회 신학강의를 하고 저술에 종사하는 한편 외국의 신앙 동지들과 연락하는 등 과로 속에서 지냈다.

 

2) 제네바의 개혁 운동

(1) 개혁전의 정치 조직

a. 제네바시는 자치권이 있었다.

b. 시정을 세 종류의 의회 (평의회,200인 의회, 시민 총회)에 의해 지배됨.

(2) 제네바의 개혁 운동

a. 1521년경에 루터의 저서가 제네바에 전달되어 개혁 운동의 기운이 가득하였고, 1532년에는 일반인의 동요가 있었다.

b. 파렐(Farel)의 베른 개혁 운동이 성공하여 제네바가 개혁당에게 힘과 자극을 주었다.

①.200인 의회는 미사를 금했다. 

②.풍속 개량과 규율을 엄히 지켰다.

c. 팔렐과 칼빈의 개혁 운동

①.칼빈은 3인의 목사 중 1인

②.시민들의 반항으로 의회는 파렐과 칼빈의 추방을 결의

③.스트라스부르에서 3년간 성경 주석 집필

④.1541년 신파의 집권으로 다시 초청되어 23년간 머무르며 개혁 운동에 전력하였다. 처음 13년을 고전하였으나 후기 10년은 성공적인 개혁 사업을전개하였다.

 

3) 칼빈의 개혁 사업

칼빈의 이상은 정교 일치로 신정 건설에 있었다.

(1) 교회법 제정

a. 교회 정치...감독없이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b. 교회 직원

목사 (목사회가 선정하고 시의회에 회부,교회의 동의로 확정)

장로 (교회 정치 담담), 집사 (회계와 구제사업 담당)

c. 교인...전 시민이 교인으로 신앙 고백을 하여야 했다.

(2) 평의회 조직

a. 목사 5인,장로 12인으로 조직된 풍속.도덕 취체 기관으로 매주 1회 회집하였다.

b. 칼빈은 목사 회원이었으나 성경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c. 교회 추방권이 있었고 1542-46년 사이에 58명 사형,76명 추방의 결정이 있었다.

(3) 사업 부흥을 위하여 견직 공업을 장려하였다.

(4) 시민 교육을 위해 대학을 설립함.

 

4) 저술 활동

(1) 기독교 강요 

(2) 신구약 주석

(3) 문답서 

(4) 설교, 서신

(5) 세네카의 주해 등.

 

5) 칼빈의 신학 사상

(1) 사상

a. 신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 주장, 그리고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에 두었다.

b. 성찬론은 기념설을 주장하였다.

(2) 신앙 5개 신조

a. 인간의 전적 타락 b. 무조건적 예정.

c. 제한된 선택. d. 불가항력적 은총.

e. 성도의 견인.

 

6) 칼빈이 유럽에 끼친 사상적 영향

 

(1) 영국

a. 청교도들에 의하여 가톨릭식의 의식과 미신적 예식 일소.

b. 청교도 신앙을 배양

c. 후우퍼,(Hooper), 험프리 (Humphrey) 밀톤 (Milton)번연 (Bunyan)등을 배출.

(2) 스코틀랜드

a. 패트릭 해밀턴 (Patrick Hamilton)과 조오지 위셔트 (G.Wishart) 에 의하여 개혁의 봉화가 일어났다.

b. 존 녹스 (John Knox)에 의하여 1506년 개혁 교회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3) 프랑스

a. 위구노 (Huguenots) 가 활동, 그 중심 인물은 페르베였다.

b. 1572년 성 바돌로매 (St,Bartholomew) 전야제에 위구노 대량 학살이 있었다. 1598년 앙리 4세의 난트(Nantes) 칙령에 의하여 신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7) 칼빈 사상이 발전한 원인.

(1) 신학이 통일적이다.

(2) 교회의 기치가 선명하다. 교회 정치는 세계 각국에서 적용하여도 편리한 점이 많다.

(3) 기독교 생활 훈련에 치중하여 실효를 거두었다.

(4) 재세례파, 루터파, 쯔빙글리파들을 넓게 포용하였다.

(5) 훌륭한 테오도르 베자 (Theldore Beza)와 같은 후계자가 있었다.

 

6. 개혁자의 신학.

개혁자들의 신학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으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 구분 * 루터, 쯔빙글리, 칼빈.

* 신학중심, 그리스도중심, 신의지 중심, 신의 절대 중심.

* 근본원칙, 이신득의, 이신득의, 신의 절대주권.

* 성찬론, 공재설, 기념설, 영적 임재설.

* 국가와의 관계, 교회는 국가에, 민주헌법, 교권, 국가와 교회 분리.

* 복종, 배격 

 

 

7. 제세례 파 (Anabaptist)

1) 기원

(1) 종교개혁 이전부터 독일,화란,이태리 등지에 흩어져 있던 개혁 신앙을 소유한 적은 무리들.

(2) 동기는 초대 교회 형태로 교회를 회복시키자는 의도였다.

(3) <재세례파>란 명칭의 유래는 유아 세례를 부인하고 장년 세례만을 주장하는 데서 나옴.

(4) 중세 교회의 조직,의식, 예전을 반대하고 예배하는 자국어로 하고 기도에 힘씀.

(5) 교회는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집단체라고 주장.

 

2) 주장

(1) 1527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총회가 회집되어 재세례파 교회를 조직.

(2) 교회 정치는 목사, 장로, 집사직을 두었다.

(3) 대표자는 발다자르 휘브마이어 (Balthasar Hubmaier)와 한스 뎅크(Hans Denk)이다.

 

3) 신앙

(1) 초대 교회의 신앙 생활을 모방.

(2) 신앙적 의식을 가지고 신앙 고백을 할 때라야 세례의 의의가 있다고 주장(유아 세례 반대)

(3) 무저항 주의

(4) 국가 지배 반대,세금 납부 반대.

(5) 예정론을 배격하고 자력 구원설 주장.

(6) 그리스도의 산상 설교나 말씀을 문자대로 복종하려고 노력함.

(7) 예배는 단순하고 신앙은 의식적이어야 한다고 주장.

 

4) 결과

(1) 로마교, 루터파, 칼빈파의 반대로 박해를 받음.

(2) 오늘의 침례파 형성은 재 세례파의 발전에서 온 것임.

 

 

종교개혁사 (인물중심 )

 

제1장 구원을 찾는 한 수도사

교회를 개혁해야 했던 운동이 출발한 곳은, 16세기 초, 인구 2천명에 프리드리히가 최근 세운 대학을 가진 작은 촌락에 불과했다. 루터는 이 종교개혁 운동의 창시자로 이 운동의 지배적 인물이었다.

 

1. 개혁적 발견

마틴 루터(1483-1546)는 아이즈레벤에서 본래 농부출신으로 열심히 일해 비교적 유복하게 된 한 광부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막데부르크와 아이제나흐에서 예비 수업과정을 마친 후, 1501년에는 에르프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인문과학을 공부하였고, 1505년 1월 7일에 그는 석사 학위 시험에 합격했다. 여기에서 유명론자들의 전통에 따라 아리스텔레스의 철학을 배웠다. 석사 시험을 치르고 나서, 그는 법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인문과학부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루터에게는 그의 생애에서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1505년 여름에 천둥과 폭우 속에서 St.Anne에게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다음, 그는 사제에 임명되었으며, 계속해서 수도원의 연구과정에 따라 신학을 공부했다. 일년 동안 비텐베르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대한 강의를 마친 1509년에, 그는 이른바 [조직신학의 교

사]가 되어, 피터 폼바르드의 조직신학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1510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 안에서의 논쟁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다가, 당시 로마를 순례하고 온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곳의 타락상을 보고 충격을 받지만 신앙은 흔들리지 않은 채, 에르푸르트로 돌아와 얼마 동안 있다가 1511년 비테베르크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계속해서 슈타우피츠의 후원과 지도로 학문연구와 설교에 헌신하게 되는데, 그 다음해인 1512년에 그는 신학 박사의 학위취득과 함께, 대학에서 성경학을 강의하는 정식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강의를 통해서 시편(1513-1515), 로마서(1515-1516), 갈라디아서(1516-1517), 히브리서(1517-1518), 그리고 다시 시편을 주석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로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투쟁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의 규율과 전통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자신이 바랐던 평화를 얻지 못했다. 그는 선행을 행하되 그리스도께서 그 선행을 보고 호의를 베풀 때까지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금욕적인 행위에 복종하면 할수록 자신의 공로가 불완전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충분한 공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죄의 용서를 부여해 주었어야 할 회오(悔悟)와 완전한 회개가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고 나서 스스로가 무능하다고 여겼다. 결국 자신의 구원을 의심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하지 않는 한, 버림 받은 자가 아닌지를 스스로 물어야 했다. 여러 가지 치료를 시도했다. 어거스틴, 베르나르, 제르송 등은 그에게  "비교적 위안"을 주었다. 슈타우피츠도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그

의 비극적인 죄의 개념과 하나님에 대한 지고한 개념에 상응하는 해결책이 필요했다. 루터는 오랜 과정을 거쳐 그 해결책을 찾아야 했고 그것은 결국 로마서 1장 17절에서 나타났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죄에 매여 있는 인간을 그의 사랑으로 감싸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 안에 수납된 신자는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다. 그가 의인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전가하시길 거부하시고 믿음을 통해 그를 의의 자리에 두시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인 것은 악을 원함이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개혁적인 발견의 시기를 대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1518년 봄, 혹은 여름으로 많은 연구가들은 본다. 그는 루터의 발견이 "말씀의 신학"의 발견이라고 여긴다. 베텐베르크의 수도사가 로마서 1:17을 통해 배운 것은 "의가 복음 안에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이 "복음 안에서"라는 말이 그때까지 풀리지

않다가 그 의미를 갖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쨌든 많은 의견이 있지만 모든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확실히 판단을 내리는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루터의 발견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발견은 루터가 자신의 문제의 열쇠를 보았다간 놓치고 하는 수많은 접근적 시도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2. 면죄부 논쟁

1516년 10월 31일, 루터는 공개적으로 처음 한 설교에서 면죄부 문제를 취급 했다. 그는 면죄부 문제가 양 무리 들에게 야기한 끔찍한 결과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피상적 경건을 조장했고, 기독교인들을 구원의 참된 근원에서 멀어지게 했다. 교회는 면죄부라는 수단을 통해서 죄인을 징벌과 허물에서부터 건져낸다고 주장을 했다. 그 결과 단순한 사람들에게 교황청의 면죄부는 완전 용서와 동의어가 되었다. 혼동은 심각했다. 식스투스4세 교황(1476)이후 면죄부가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서도 팔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면죄부에 대한 첫 설교를 한지 일년 후, 루터는 만성절(萬聖節)에 이 문제를 다시 취급했다. 당시에 레오 10세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증축을 위해 면죄부 판매령을 1515년에 재가하고 면죄부의 판촉 설교가 독일 북부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는 신학자들을 일깨워 이 문제를 숙고하게 할 필요를 느끼고,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효능"을 묻는 95개 조항을 작성한 것이다. 루터는 95개 명제에서 다만 교회가 이제까지 가르쳐 왔던 것을 상기해보자는 제안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는 어긋나게 로마의 재정을 위해 신앙을 이용 착취했던 방법에 분개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 95개 명제들은 일종의 해방 선언문과도 같이 등장했다. 이내 종교재판의 책임을 부여 받고 있던 마인즈의 대주교와 도미니크 파는 루터를 로마에 고발했으며, 독일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1518년 초 테첼이 반박하였고 엑크가 비난했다. 이에 루터도 응수했다. 한편 레오10세는 어거스틴 수도회의 임시 총회장이었던 가브리엘 델라 볼타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슈타우피츠로 하여금 그 밑에 있는 부하를 회개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이 진리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철회를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참사회 앞에 불려 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두가지 논제들을 제출했다. 면죄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다만 칭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 뒤 스콜라 철학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 했다. 그러나 그는 심문자들을 설복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젊은 수도사들 가운데서 열렬한 제자들을 얻었는데 그중에마틴 부쳐와 요한 브렌즈가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참사회는 95개 명제가 터뜨린 논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교황청 재무국에서 행한 조사에서 루터는 1518년 7월 초 두 달 안으로 로마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는다.

 

3. 로마와의 결별

교황청의 신학자들이 루터가 그들 앞에 출두하기도 전에 벌써 적대감을 보였기때문에, 루터는 현자 프리드리히에게 로마에 중재하여 독일에서 재판을 받게 해 라고 부탁하였다. 결국 레오 10세는 현자 프리드리히의 요구를 받아들여 카제탕 추기경으로 하여금 국회가 열리고 있던 아우그스부르크에서 루터의 말을 들어보고 그 견해를 취소케 하되 그렇지 않을 경우 정죄된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다. 518년 10월 12일 루터는 카제탕 앞에 출두했다. 교회와 성례들의 문제에 대해 문을 받고 루터는 성경의 증거에 의지하는 한 교황에게 그의 오류를 입증할 수 있다고 여겼고, 또한 성례들의 효과는 받는 자의 신앙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하며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현자 프리드리히의 보좌관들은 그로 하여금 몰래 아우그스부르크를 빠져 나가도록 해 주었다. 카제탕의 임무가 실패하자 교황청은 재부 담당 샤를르 드 밀티즈를 시켜 군주로부터 루터를 인도받아 오게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계속되는 논쟁으로 인하여 실패하게 되었다. 엑크가 1518년 말에 12개의 명제를 출간하여 루터를 공격하였다. 따라서 루터는 교황의 권한에 대한 해설서를 삽입한 13개 논제를 출판하였다.

이 논쟁이 1519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열렸다. 가장 큰 쟁점은 루터가 13번째 논제에서 문제시한 교황의 최고권이었다. 루터는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이시기 때문에 지상의 우두머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 교회는 교황제의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반석 위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곧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합법적 권위인 성경의 권위 밖엔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조사를 재개했다. 이 조사가 진행되는 중 루터는 [로마 교황제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을 내놓았고, 한방 먹은 교황청은 1520년 6월 15일 엑수르게 도미네라는 교서를 공포했는데 이 교서에 따르면 루터는 60일 내로 잘못을 인정치 않으면 파문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루터는 폭 넓은 논쟁을 벌릴 결심을 했다. 인문주의에 가담한 수많은 인사들은 루터가 로마의 독재로부터 독일을 건지는 데 앞장서기를 바랐다. 루터는 1520년 8월, 이들에게 [기독교 국가 치료에 대한 독일 기독교 귀족에의 호소]문을 보냈다. 이어서 그는 특별히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1520년 10월에 간행된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썼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가 그 자유를 상실했고 성례들을 사제들의 손에서 노예화의 수단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성례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루터는 엑수르게 도미네 교서를 읽고 분노 섞인 고통을 느꼈으며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동기의 진지함을 로마에 증명해 보이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써서 1520년 10월에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인은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인 그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인은 매사에 있어서 종들 가운데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자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종속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게 가해진 위협을 없애지 못했다. 칼5세와 협력하여 로마는 루터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오히려 공의회의 소집을 다시 요청하고 엑수르게 도미네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로마는 1521년 1월 3일, 새 교서를 내려 루터와 그 일당의 파문을 선포했다. 결별은 이뤄졌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절반이 출애굽"하는 결과를 야기하고 말았다.

 

 

제 2 장 루터의 종교개혁

 

사실 루터는 분리할 생각도 없었고 또 분파의 창시자적 기질도 없었다. 보편교회의 통일성을 누구보다 귀중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가 원한 것은 이 보편 교회에 대한 개혁이었다. 그가 자기의 이상에 동조한 공동체들에게 하나의 조직을 부여할 생각을 한 것은 수년이 지나고 난 뒤였다.

 

1. 비텐베르크 운동

 

수년의 전투기간 동안,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복음주의 교리의 보루로 삼았다. 여기에서 그는 칼슈타트, 니콜라, 요나스, 부겐하겐, 스팔라틴, 멜랑히톤을 자신의 입장에 가담시키거나 그들의 존경과 우정을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새 황제 칼5세가 주재한 보름스 국회에 루터가 불려 갔을 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세속당국은 민중봉기가 두려워 로마의 종교재판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철회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험의 경고를 듣고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갔다. 1521년 4월 17,18일 양일에 루터는 국회 앞에 소환되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성경의 증거에 의해 자신의 오류라고 확신케 되지 않는 한, 자신의 작품들을 철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칼5세는 분노하였다. 하지만 군주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루터를 굴복시킬 목적에서 계속적인 대화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루터는 4월 26일 황제가 발급해준 통행증을 휴대하여 보름스를 떠났다. 현자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닥친 위험을 이미 예상했다. 그는 도중에 루터를 빼돌려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이곳에서 루터는 10개월간의 은둔기간 중에 그는 [시편 연구]를 계속했고, [성모 마리아 송가 주석]을 완성했다. 또한 [교회 설교집]을 작성하는 한편, [신앙고백에 대하여]를 써서 의무적 고백을 반대하고 자발적인 고백을 권장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자기 제자들의 관심사에 대답하는 [수도원 서약에 대하여]와 [개인 미사의 폐지에 대하여]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번역에 전념하였다. 한편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개혁운동의 흐름이 젊고 수줍은 멜란히톤의 태도에서 벗어나 급진적인 칼슈타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1521년

10월, 빵과 포도주 두가지로 성찬을 거행했다. 그리고 성탄일에는 독일어로 미사를 드렸다. 1522년 1월, 교회의 성상들을 없애고 나서 "비텐베르크시의 규칙"을 포고했다. 결국 2월에 그는 기독교 백성이 스스로 통치할 권리가 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다는 두 명의 방적공들의 영향을 받아 조명주의 경향을 기울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권위보다 성령의 내적 운동들을 더 좋아하게 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시작해 놓은 이 운동의 전개를 불안하게 보다가 은신처를 떠나 비텐베르크의 의회와 대학 호소에 응하러 갔다. 그 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칼슈타트가 너무 빨리 해놓은 혁신들이 다시 거부되었다. 문제들이 어느정도 해결되자, 루터는 로마의 신학자들에 맞서서, 그리고 예언자들에 맞서 새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여기 저기 다니며 설교를 하였다. 또한 밀도 있는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교회 사역을 세움에 대하여]와 [기독교 회중이 교리 문제를 판단하고, 설교자들을 청빙, 위임, 면직할 권리와 권세를 가짐에 대하여]라는 논문들을 출판하였다.

 

2. 결정적인 거절들

 

라이프지히 논쟁 직후, 후텐을 선두로한 소 귀족 대표들은 루터를 로마의 보호에서 해방되어 쇄신된 독일의 선구자로 존경했었다. 이러한 오해는 기사들의 반란이 터지자 잘 드러났다. 그들은 이내 패퇴하였다. 이들이 루터에게 그들의 운동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루터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그들의 것과 일치시키기를 거부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가 수호하려 했던 기독교인의 자유는 국민(국가)의 자유와 혼동될 수 없었던 것이다. 2년 후, 루터는 농민들이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지지해달라는 요구를 또 다시 거부했고 이 결과는 심각했다. 반란이 지나가는 곳은 어디나 폐허가 되었다. 군주들의 진압도 또한 끔찍했다. 농민들의 개혁안에 의견을 제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루터는 [슈바벤 농민의 12조항에 대한 평화의 촉구]라는 글을 써서 대답하면서 그는 기독교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연결시키기를 거부했다. 이런 태도는 자기들의 사회적 조건의 변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을 깊이 실망시켰다. 루터는 목숨을 걸고 튀링겐의 반도들과 접촉을 시도한 뒤, [범죄적이고 약탈적인 농민집단을 반대함]이라는 맹렬한 비방문을 작성하였다. 이 비방문은 시골 주민들 가운데 그를 지지했던 수많은 민중들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주들 편에서 그에 대한 신망이 커져갔다. 농민 봉기 그에게 가져온 염려에서 해방되자, 루터는 환속한 수녀 카드린 폰

보라와 결혼한 후, 1525년 말, 에라스무스 쪽을 향하여 그와 그의 찬미자들 모두

를 거부한다고 통고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카톨릭의 압력에 의해 1524년 [자유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라는 글을 출간하여 루터를 공박했다. 이에 루터는 [노예 의지론]에서 응전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과 [오직 은혜로만]의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인

간의 죄의 심각성을 들춰냈다. 처럼 1522년에서 1525년까지 "자신의" 복음에 충실하였던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국가(민족)적 자유, 정치적 자유, 그리고 자유의지와 혼동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 세 번에 걸친 거부를 통해 기사들의 민족주의, 농민들의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 인문주의와 결별을 한 것이다.

 

3. 복음의 파급과 변호

농민 전쟁이 끝나자 게오르그 폰 작센은 농민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고 국가들의 힘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부와 북부 독일의 여러 군주들을 데쏘동맹에 집합시켰다.

1526년에 이 데쏘 동맹에 토르고 또는 고타 동맹이 맞섰다. 토르고 동맹의 회원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수호하는데 심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또한 그들은 그때까지 불규칙적이었던 복음 신앙 전파에 질서를 세워야 할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조직을 위한 노력을 루터는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군주들의 보호하에서 복음주의 교회들의 창설 문제에 망설이며 신중을 기하긴 했지만 결국 농민 폭동 때 교훈을 받아 자기의 힘있는 보호자들의 간청에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복음 메시지의 설교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세속 당국에 의뢰했던 이 결정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1525년 이전에는 자체의 힘으로 전개되던 "자생적 민중 운동"이었던 종교개혁이 농민 전쟁을 치르면서부터 군주들의 일거리가 되었고, 남부와 서남부에서는 도시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복음주의 교회 조직의 첫 시도는 1526년 10월 홈베르크 대회 이후, 수도사였던 아비뇽의 랑베르의 도움으로 필립 폰 헤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조직은 루터가 시기 상조요 신중치 못한 것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헤세 지방에선 적용되지 못했다. 종교개혁에 가담한 군주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루터의 제안을 고려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 국가들에서 복음의 이상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감찰에 의지한 것이다. 첫 감찰이 실시되자 많은 교회 성직자들의 영적 비참함이 드러났고, 따라서 그들의 양 무리 들의 종교적 비탄이 들춰졌다. 멜란히톤은 그들을 위해 교육서 들을 작성했고 루터도 이들을 염두에 두고 1529년 [대.소 교리문답]을 작성했다. 1526년 프랑소아 1세는 칼 5세와 싸우기 위해서 교황 클레멘트 7세와 제휴했다. 그러자 황제는 토르고 동맹의 구성을 허용해야 했고, 슈파이어 국회에서 (1526년 6월) 보름스 칙령의 적용 요구를 거부하고 새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교의 모든 자유를 군주들에게 허용할 것을 채택해야 했다. 이렇게 일시적 휴전이 체결됨으로 개신교 군주들은 "새" 복음 확산에 상당히 봉사를 했으나 이 휴전은 1529년 4월 슈파이어 2차 국회시, 매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칼 5세는 보름스 칙령의 적용 뿐만 아니라, 차기 공의회까지 종교개혁의 확장을 중지할 것과 복음에 가담한 영토내의 카톨릭 예배 허용을 요구하였다. 국회의 참여자들은 대다수가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황제의 결정에 박수를 보

냈다. 소수의 복음주의자들은 3년 전 슈파이어 국회에서 부여 받은 자유를 위반하는 이 결정에 대해 항의했다(이 항의라는 말에서 종교개혁의 가담한 이들에게 <프로테스탄트>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 개신교 소수 가운데 군주들과 독일 고지대의 대표들이 있었지만 황제와 카

톨릭 국가들의 세력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필립 폰 헤세의 선동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은 비텐베르크와 독일 고지대 사이에 존재하는 교리적 차이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는 츠빙글리 및 스위스 프로테스탄트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년 전부터 성찬에 대한 견해로 츠빙글리와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립 폰 헤세가 교리적 상호이해를 통해 카톨릭 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개신교 동맹을 준비하려는 열망에서 1529년에 독일과 스위스 신학자들을 마르부르크에 소집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양측은 논쟁 대결을 벌렸다. 그러나 3일간의 힘든 대화 끝에, 두 파는 서로 용납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헤어졌다. 마르부르크 회담의 실패는 필립 폰 헤세의 계획을 돕지 못했다. 오히려 더 상황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칼 5세는 1530년 여름 내내 아우그르부르크에 국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스위스인들은 국회에 참석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높이 평가되는 교리 설명서를 [황제에게 드리는 신앙의 지침]

이라는 표제를 붙여 황제에게 보냈다. 한편 독일 고지데 도시들에서는 고유의 신앙고서인 [4도시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작센이나 헤센같은 독일 지방국가들은 루터 대신에 멜란히톤을 그들의 해설자로 삼았다. 멜란히톤은 슈바바흐 헌장에서 영감을 받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이처럼 평화적이고 능숙한 기교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국회에 참석했던 가톨릭 국가들의 대표자들의 눈에 호의롭게 보이지 못했다. 그들은 엑크를 시켜 멜란히톤에게 응전을 하여 [카톨릭 논박]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을 칼 5세가 수정하여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옹호했고 칼 5세는 거부함으로 끝났다. 황제는 1530년 11월 19일 국회를 끝내면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1531년 4월 15일 이전에 로마에 굴복하라고 경고했다. 위험에 직면한 복음주의 군주들과 종교개혁에 가담한 독일 고지대 도시들은 필립 폰 헤센과 작센의 요한의 지휘하에 서로의 동맹을 꾀화여 1531년에 슈말칼덴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황제는 개신교와 타협하여 1532년 7월23일에 누렘베르크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4. 루터주의의 투쟁과 확립

 

누렘베르크 휴전 조약이 체결되던 때, 이미 독일 내부에 깊이 심어진 종교개혁은 유럽의 북부와 동부에 뻗어나가 있었다. 종교개혁이 전진을 계속하는 동안 조명주의가 다시 이번엔 화란과 독일 저지대에 모습을 보였다. 멜키오르 호프만이라는 수아브 모피상인이 앞장섰는데, 사람들은 자주 재세례파라는 칭호를 주었다. 호프만은 자신이 받았다는 계시에 항상 빠져 복음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 그는 세상의 종말을 1533년으로 예언하고 스트라스부르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스트라스부르 당국에 의해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멜기오르파는 호프만이 투옥되자, 요한 마티스를 새 영적 지도자로 삼아 뮌스터가 예언들이 실현될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몰려 들었고 이들은 지배 계급에 불만을 품고 있던 직공들의 협력으로 권력을 탈취했다. 그러나 뮌스터의 주교가 도시를 공격했을 때, 열광적으로 저항했다. 1534년 부활절에 마티스가 탈출하다 살해당하였고, 1535년 6월 24일 밤중에 한 배신자가 도시의 문을 포위군에게 열어주어 주교와 군주의 연합군이 들어와 조명파들의 "공산주의 신정정치"를 종식시켰다. 뮌스터의 참변은 카톨릭이 보기에 비테베르크 운동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로 보였으며, 또한 로마에 충실한 제국가들에게 "새" 신앙에 대한 적대감을 야기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들과 뮌스터의 예언자들과는 전혀 공통된 점이 없음을 지적하였고, 루터는 1536년에 [세속 당국이 재세례파 들을 육체적 형벌로 맞서야 할 의무]라는 논문을 쓰고, 칼뱅도 [왕께 드리는 서한]을 작성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복음의 가담자들이 폭도도 혁신자 들도 아님을 보이려 했다.

스트라스부쳐의 개혁자인 마틴 부쳐의 성찬의 문제를 위한 수고는 비텐베르크 협약으로 까지 나아갔고, 루터주의의 영향력을 독일 고지대에 더욱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1539년 종교개혁에 가담한 두개의 또다른 국가들이 합류하였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로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사실 로마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갈망에 진정으로 응답해 주거나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폴 3세는 1537년 만토바에 공의회를 소집함으로서 보다 호의롭게 보였지만 개신교 제국가들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개신교 제국가들이 슈말칼덴에서 보여준 강경태도는 가톨릭 제국가들로 하여금

1538년 "방어동맹"인 누렘베르크 동맹을 결성케 했다. 그러나 황제는 1539년 프랑크푸르트 휴전 조약 체결을 하여 신학적 대화를 통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을 장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540년과 1541년 사이에 아그노,보름스, 라티스본 회담들이 열렸다. 그러나 어떤 일치된 협약에 도달하지 못한채 회담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인해 독일은 두파로 계속 분열되어 긴장된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540년 개신교의 참피온인 필립 폰 헤세가 중혼을 함으로서 이 균형은 깨어지고 만다. 그는 황제 앞에서 1541년 6월 13일 슈말칼덴 동맹에 더이상 새 회원을 받지 않고, 또 외국 세력과 협정을 체결치 않겠다고 약속 함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속죄하였다. 1543년 칼 5세는 영토를 확장을 하였고, 이때 프로테스탄트제 국가들이 보여준 머뭇거림은 결과적으로 라인강 유역 지방에 종교 개혁을 확립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칼 5세는 여기에 만족치 못하고 개신교파를 분열시키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국가들을 끝내기 위하여 교황 폴 3세로부터 트렌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 받아 1545년 3월 15일로 개회 날자를 정하고 소집을 하였다. 개신교의 참여를 바라지 않는 황제의 계산대로 개신교도들은 트렌트 회의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였다. 이에 칼 5세는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을 터뜨려 슈말칼덴 동맹에 가담한 국가들을 처벌하고자 하였다. 전투는 결국 슈말칼덴 동맹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모리츠 폰 작센이 황제에게 패해 무력해진 개신교 군주들의 선두에 선 독일 개신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아우그스부르크를 점령하고 칼 5세를 인스브룩크에서 쳐부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이 승리로 인해 독일 개신교는 파사우조약(1553년)을 통해 개신교들에게 다음 국회소집 때까지 관용을 베풀겠다는 약정을 얻어냈다. 다음 국회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일어났고, 이 국회는 종교개혁에 대해 그동안 계속해온 투쟁들을 끝맺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새로운 세력에 의해서 위협을 받았는데 그것은 칼빈주의와 반동 종교개혁이었다. 이 두 세력의 등장으로 독일 내부에서 고유의미에서의 종교개혁 시기는 끝을 맺는다.

 

 

제 3 장 츠빙글리 및 부쳐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출발시 비텐베르크를 전파의 요람으로 가졌으나, 츄리히와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곳도 중심지가 되었다. 이 두 곳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 이유들로 인해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트라스부르와 취리히가 종교개혁의 세기에 무게있 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틴 부쳐와 울리히 츠빙글리의 덕택이었다.

 

1. 츠빙글리와 츄리히 종교개혁

 

츄리히의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울리히 츠빙글리의 작품이었다. 그는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의 작은 산골마을인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으며 재산이 좀 있고 많은 자녀가 있으며 교회와는 인연이 깊고 사회적 책임에 민감한 가정에 속해있었다. 어린 시절 5년 동안 사제였던 삼촌에게 맡겨졌었다. 1498년 비엔나 대학에 등록하고 수년을 머물렀으며 1502년 바젤대학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문학사와 문학석사(1506)를 취득했다. 22살의 나이로 그는 대학을 떠나 글라루스의 신부자격으로 교회 봉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공부를 계속하였고, 1513년부터는 공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노바라 전투와 마리그나노 전토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소아 1세에게 스위스 군대가 패배한 뒤, 용병제도를 반대하고 중립을 권장했는데 이것이 교구신도들과의 마찰을 일으키게 되어 그는 글

라루스를 보좌신부에게 맡기고 떠나 1516년 아인지델른에 설교자가 되었다. 많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한 츠빙글리의 설교는 이내 아인지델른 밖에까지 명성을 높에게 했다. 그리하여 1518년 말 그는 추리히의 "성직자 교회의 설교자 겸 신부"로 임명되었고 1519년 1월 1일부터 그 직분을 수행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적 의미에서 개혁 작업을 끌고 갈 결심을 하고, "연속 강해"원칙에 따라 강해설교를 견지했다. 또한 문학써클을 형성하여 신학과 헬라어를 연마했다. 그러나 얼마 있지않아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 형태의 쇄신에서 결연한 개혁적 태도로 나아갔다. 1519년 페스트가 창궐했던 츄리히에 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이 전염병에 걸리고 나서 인간의 연약성과 은총의 전능성을 느꼈다. 그리고 1521년 그가 글라루스의 신부로 있던 시절부터 로마에게서 받아오던 연금을 거절했다. 이렇게 그는 개인적 탐구 끝에 에라스무스적 "기독교의 재생"에 회의를 품고 개혁자가 되었다. 비록 루터의 책에서 섭취한 것이 있다 해도, 역시 그는 자신의 독창성을 끊임없이 간직했다.

이러한 인문주의에서 개혁자 진영으로 츠빙글리를 인도한 발전의 열매들은 1522년 명백히 나타났다. 그 해 초, 그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쏘세지를 먹은 인쇄업자 프로샤우어를 변호하여 금식과 관련된 교회법의 불법적 성격을 확신하였다. 또한 교회의 독신제도가 성경적 기초를 갖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1522년에 애국자의 과부와 결혼하고 콘스탄스 주교에게 결혼 자유권을 요구했다. 결국 그 해 여름에 아폴로게티쿠스 아르케텔레스를 출판하여 여기에서 오직 유일한 권위인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다. 츠빙글리의 설교와 행동이 야기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츄리히 당국은 신학논쟁을 위하여 각 도시의 사제들과 대표자들을 소환했다. 이 논쟁에 대비하여 츠빙글리는 67개 논제를 작성하였고, 이 교리는 신앙은 말씀의 중재없이 성령의 직접적 주입으로 인간에게 생겨난다고 가르친 일종의 영성주의적 색체를 가진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성격을 띄었다. 츄리히의 첫 신학 논쟁이 1523년 1월 29일 열려서 신속한 토론을 거친 후, 당국은 67개 조항에서 나온 개혁안을 채택했다. 논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독일어로 출판된 최초의 복음주의 교의학 논문인 [67개 논제 해설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설교에서 사회문제를 비판했다. 예배의식의 개혁에도 전념하여 예배에서 라틴어를 없애 버리고, 성찬에 모든 제사적 성격을 부인했다. 이렇게 하면서도 개혁의 기초를 놓되 이것이 위정자의 보호하에 질서있게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이러한 의도는 몇몇 성상파괴자들이 1523년 9월 성전에 성화들과 성상들을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실패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국은 1523년 10월 제2차 츄리히 논쟁을 소집했다. 이 회담에서 우선 신자들 마음에 팽배해 있는 우상숭배 사상을 타파할 것을 결정했고, 또한 이 예배의 유물들을 제거할 날짜를 시의회에 위임해서 결정하도록 승인했다. 성상철폐는 1524년 6월에 가서야 비로소 실시되었다. 츠빙글리만이 교회 갱신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츄리히 사람으로 츠빙글리를 지지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그로스만과알자스인 레오 주트, 그리고 루체른 사람인 오스발트 미코니우스 등이 있었다. 이런 인물들이 팀을 이루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은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24년 수도원들이 세속화되었고 그들의 재산이 빈민구제를 위해 분배되었다. 같은 해, 츠빙글리의 선동으로 교회 참사회의 재산과 수익금들이 1525년에 문을 연 성경주해학교 창설을 위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주도적 행동이 물론 중대하기는 했어도 츄리히를 온전히 개혁된 도시로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1525

년에야 미사를 페지 하였고, 대신 극도로 간소화된 예배의식으로 대체되었고 미사와 전혀 다른 성찬은 일년에 4번만 거행하도록 되었다. 종교개혁이 이처럼 츄리히에 심어져 혼인 재판소 설립으로 미풍양속에까지 확산되는 동안, 그리고 츠빙글리가 [참종교와 거짓 종교의 해설]을 1525년 출판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하는 동안, "새"신앙에 가담한 이들 가운데 반대세력이

생겨났다. 재세례파로 알려진 참을성이 없고 급진적인 기독교인들은 콘라드 그레벧과 펠릭스 만츠였다. 이들은 1523년부터 츠빙글리가 교회 개혁들을 세속권의 결정에 연결시켰다고 비난하면서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위정자의 권위를 문제삼고, 모든 선서를 거부하며, 군대의 힘에 의뢰하는 것도 거부하고, 자기들의 목사들을 스스로 임명할 권리를 요구하며, 유아세례를 거절하면서, 그들은 성도의 교제를 보이는 방법으로 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츠빙글리는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시키려고 펜을 들고 혹은 특별대담과 세 번의 공개 토론을 가졌지만 그들이 "오류들"에서 돌이키도록 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결국 시의회가 직접 우두머리를 감옥에 쳐 넣었지만 이들을 잠잠케 할 수는 없었다. 끝내 시의회는 1527년 만츠를 "물로 범죄했기 때문에 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호수에 익사시켰다. 이 비극적인 처형이 있은 뒤로, 세

례파 운동은 츄리히에서 멀리 떠났다.

 

 

2. 스위스에서의 개혁의 확산과 중단

 

츄리히가 종교개혁에 가담한 사실은 스위스 연방에 깊은 동요를 일으키게 했다. 어떤 주들에서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하였고 혹은 진압되기도 하였다. 반대로 바젤에서는 1529년에, 베른에서는 1528년에 공식적으로 도입이 되었다. 그리고 잔크트 갈렌에서는 1528년에 승인되었다. 이런 "이단"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톨릭 주들은 1524년에 베켄리이드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위험을 느낀 츠빙글리는 [경건한 연방주들에게 보내는 신실하고 진지한 권면]을 통하여 스위스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말 것을 권면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공동관할 구역들에서는 양 신앙고백의 참여자들 사이에 긴장이 커져갔다. 가톨릭 주들은 종교개혁을 "뿌리 채 뽑고, 금지하고 처벌하고 제거하기로" 결심하고는, 1526년 종교문제를 끝내도록 결정했던 국회를 대비하여 바덴에서의 회담을 소집하였다. 1526년 5월 21일에 열린 이 회담에 로마 교회는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대표단을 파송했다. 이에 종교개혁 측에서는 변호를 위해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와 베른의 할러를 보냈다. 엑크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찬론 견해를 대립시키는 능숙함을 보였고, 결국 개신교 진영에 불화의 씨를 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바덴 논쟁은 가톨릭의 승리로 끝났다. 츠빙글리는 파문되었고, 국회는 츄리히로 하여금 츠빙글리를 포기하되 그렇지 않으면 연방에서 제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츄리히는 츠빙글리 편에 있었고, 또한 베른과 바젤, 및 샤프하우젠 등이 반대했다. 바덴 논쟁이 있은 다음, 츄리히만이 복음적 교리에 전적으로 가담했다. 바젤과 베른에서는 "새"신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정치적 사건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1527년 한 해 동안에 여러 번의 선거에서 종교개혁의 가담자들이 베른 시 대의회의 다수를 점령한 것이다. 시의 대 의회는 종교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회를 최하도록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1528년 1월 베른 논쟁이 열렸고, 로마 교회는 2류급 인사들을 파견했다. 반대로 종교개혁측은 일단의 탁워란 신학자들이 대변했다. 토론은 복음주의 교리의 옹호자들이 승리함으로서 끝났고, 그 결과 베른에서는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이로인해 종교개혁이 쥬네브에 발을 붙일 수 있었고 프랑스 개신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베른 논쟁 이후, 1524년 베켄리이드 동맹을 체결한 바 있는 가톨릭 주들에 응전하기 위해 조직을 강화했다. 그러자 가톨릭 주들은 국가적으로 스위스인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와 결탁하면서까지 반발하였다. 전쟁의 선전포고까지 다다른 때에, 글라루스의 책임자가 화해를 성공시킴으로 인해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카펠 평화 조약에 뒤따르는 몇 달을 이용하여 츠빙글리는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에 가서 성찬문제로 루터와 토론했고, 1530년 부쳐의 주도하에 막[4도시 신앙고백]문서를 작성한 독일 고지대 도시들의 신학자들과 대화를 개시했다. 1531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요점]을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츠빙글리의 노력은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츄리히에서 그는 "교회적 구속력" 문제로 시의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시의회는 사임을 거부하였다. 1531년 10월, 가톨릭 주들은 츄리히를 공격하여 카펠에 모인 츄리히 군대를 패주시켰다. 츄리히의 원정군에 속했던 츠빙글리는 전투 도중 살해되고 말았다. 이 참패 이후, 개신교 주들은 패배를 만회할 방법을 도모하지 않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인해 비록 츄리히에서는 새 신앙의 독립과 그 예배를 보장해주었으나, 그 조약은 종교개혁의 확장을 분명 중지시키고 말았다. 츠빙글리의 죽음 이후, 알자스 사람 레오 쥬드와 브렘가르텐 출신의 젊은 성직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츠빙글리를 승계하였다. 특히 불링거는 카펠에서 패배한

뒤 츄리히에 나타난 가톨릭의 반동을 제지할 줄 알았다. 그는 세례파의 재출몰이 종교개혁에 다시 퍼지게 될 위험을 미리 예방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의 권리를 옹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그의 공로는 성찬 문제로 나뉘어진 개혁파를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한데 있다. 사실 그는 1536년 스위스 제1신앙고백서에 츄리히 등의 도시들이 서명케 했다. 1540년부터 성찬 문제에 해결책을 찾을 목적으로 칼벳과 담판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쥬네브 개혁자와 더불어 "츄리히

협정"을 체결하였다(1549). 이렇게 그는 개신교사에 상당한 영향을 행사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츄리히와 쥬네브를 연합시킴으로 츠빙글리의 조교개혁과 칼벳의 종교개혁을 지속적으로 접근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영국 성공회에 대해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었다. 나아가 종교 개혁의

교회들에게 그들의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하나인 제2스위스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는데, 이 문서는 1566년 팔츠 선거 후에 의회 신앙고백으로 채택된 뒤, 같은 해 쥬네브 교회와 대부분 스위스 개혁파 교회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수용되었고, 스코틀랜드,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에서도 채택되었다.

 

3. 부쳐와 스트라스부스 종교개혁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출두했을 무렵(1521년), 루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은 스트라스부르 성당 신부인 마태우스 젤은 통속적인 어조와 복음적 영감으로 로마서를 강해했다. 그는 주교에게 이단으로 고소되었고, 1523년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의 첫 성명서로 여겨질 수 있는 "기독교인의 책임"이란 글을 간행했다. 이렇게 투쟁에 뛰어들면서 젤은 카피토와 특히 마틴 부쳐라는 동역자를 얻게 된다. 카피토와 반대로 1523년 당시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부쳐는 하이델베르크 논쟁 당시(1518년), 루터에게 사로잡혀 수도원 서약을 스스로 풀어 버렸다. 그리고 결혼하여 슈파이어 주교가 자신을 쫓아냈던 비셈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설교했다. 젤의 제안으로 부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위해 성경을 강의했다. 그리고는 1523년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야 할 것]과 [비셈부르크에서의 설교 요약]을 펴냈다. 이 두 작품의 영향을 커서 대성당의 참사회가 개혁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부른 명성 있는 설교가 헤디오 역시 "새" 신앙에 가담하게 된다.

당국은 부쳐와 카피토를 청빙하여 성경의 여러 곳들을 공적으로 강해하게 하였다. 이 말씀의 사역자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자 예배의 개혁이 뒤따랐다. 1524년 초 니그리가 "독일어 미사"를 시작했고, 동년 말, 부쳐는 츠빙글리의 관점을 가지고 스트라스부르 예배의식에 도입된 변화들을 옹호하는 [쇄신의 기초와 명분]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일원들이 기획한 교회의 재조직은 대성당과 교회 참사회 회원들을 불안케 했다. 그러나 당국의 능숙한 타협 끝에 그들은 중립을 지키자 쇄신운동은 승리의 발걸음을 계속했다. 교구개혁과 병행하여 수도원과 학교 개혁도 수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스트라스부르는 황제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스트라스부르는 제2차 슈파이어 국회 때(1529년), 보름스 칙령을 적용해서 종교개혁의 확장을 금한다는 황제의 결정에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스트라스부르 시는 신학적 방어를 준비해야 했다. 이때 부쳐와 카피토가 콘스탄츠, 린다우, 메밍겐 등의 동의를 얻어 [4도시 신앙고백서]라는 이름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럼으로 인해 스트라스부르는 제국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었다. 더욱이 종교적 영역에서 독일 여러 지방 국가들과 스위스 사람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개신교 세력들 가운데 탁월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카펠의 참사 이후, 스트라스부르는 비텐베르크와 그 위성 지역 쪽으로 가까이 하게 되었다.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은 도시 내부에서도 난관이 있었다. 비록 가톨릭은 이 곳에서 신속히 사라졌지만, "열광파들"은 심각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칼 슈타트가 이곳에 정착하러 찾아왔지만 그는 이내 그의 분리적 행동 때문에 당국에 의해 쫓겨났다. 더 위험했던 것은 재세례파와 온갖 종류의 영성주의자 들로서, 이들은 자유스런 분위기를 틈타 도시에 만연했고 심지어 카피토의 동정을 얻기까지

했다. 조명주의가 종교개혁에 퍼뜨린 위험을 막을 목적에서, 부쳐는 시 책임자에게 "열광파들"을 추방하라고 부추겼다. 그는 교회에 치리를 보다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1531년 각 목사에게 "감독회"를 딸려 붙여주었으며, 교회에 법적 기능을 부여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조처들은 분파적 운동들을 약화시키고 총회의 주래를 맡은 부쳐의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상당히 공헌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들과 필요한 인물들을 키울 수 있는 기관을 1538년 고등교육학교를 창설함으로 해결하였다. 이 학교의 총장은 요한 슈트름이었으며, 부쳐, 카피토, 헤디오, 베르미글리, 그리고 칼벳도 한때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가 속해있던 슈말칼덴 동맹이 패배는 이곳의 종교개혁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에 종지부를 찍었다. 1547년 "최고 책임자" 야곱 슈트름은 황제에게 도시를 대표하여 공개적인 사죄를 해야 했다. 그리고 부쳐는 황제와 주교의 연합 압력에 항거한 시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549년 4월 스트라스부르를 떠나야 했다. 그는 영국에 가서 매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도착한 지 채 2년이 못된 1551년 사망했는데, "기도서" 개작에 수고하였고 [그리스도의 통치론]을 에드워드 6세에게 헌정함으로 영국교회의 개혁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은 슈말팔덴 전쟁으로 매우 축소되었다. 부쳐 대신 교회총회를 주재했던 헤디오는 상황을 바로 잡을 시간이 없이 1522년 페스트로 사망했다. 그 후 스트라스부르의 개신교의 입장을 재확립시킨 이는 헤디오의 후계자 요한 마르바흐였다. 그가 가져온 이 공로는 부쳐의 종교개혁의 목숨을 잃게 하는 값 비싼 지불이었다. 마르바흐는 루터주의에 양보하여 교회에 권위 체계를 강요했다. 나아가 1555년부터 4도시 신앙고백에 모든 규범적 가치를 부인하기를 모색했고 결국 1563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비텐베르크 협정을 신앙 규칙으로 인정케 함으로서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1560년이 지나면서, 개신교 예배를 추방한 대성당과 여러교회들에 그 예배를 회복시켜 놓게 하였다. 가톨릭에 대한 이런 승리는 우리가 볼 때 성공이라고 여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잘 드러내는데 곧 교리적으로 뻣뻣해지는 시대요, 고백적 정통들의 시대이다.

 

제 4 장 칼벳의 종교개혁

 

1. 종교개혁에 가담한 인문주의자

 

1509년 피카르디 지방 노아용 시에서 태어난 쟝 칼벳은 지방 성직자를 위해 일하는 사업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14살 때 교회 성직록의 혜택을 받게 되자 파리로 가서 부친의 계획에 따라 사제직을 가는데 필요한 공부를 계속했다. 몽테커 학교에 들어가서 1528년 초에 문학석사를 받았다. 철학 수업이 끝나자, 칼벳은 파리를 떠나 당시 법과대학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에 갔다. 왜냐하면 노아용 참사회와 사이가 틀어진 그의 부친이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친이 죽자, 자기가 가장 원하던 기호에 부응하는 생애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게 된 그는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1533년에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 법학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은채 파리에 세운 왕실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준비해 1532년에 출판함으로 일약 인문주의자들 가운데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법학공부를 끝내러 오를레앙으로 갔다가 1533년에 돌아온 칼벳은 파리에서 상황이 성경파들에게 호의롭게 된 것을 보았다. 칼벳의 친구로서 대학의 새 총장이 된 인문주의자 니콜라콥은 1533년 만성절, 개학식에 총장 훈시 시간에 8복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에라스부스와 루터에게서 열감을 받아, 종교개혁의 귀중한 테마들 특히 믿음으로 얻는 칭의 테마에 접근했다. 의회는 대학 총장을 기소하자 콥은 외국으로 도망했고, 칼벳도 위협을 느끼고 친구이며 신부인 루이뒤티에가 사는 앙굴렘으로 피신했다. 1533년 적어도 에라스무스적 쇄신주의의 일원이었던 그가 종교개혁에 가담하게 된 시기를 그가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해 1534년 봄에 노아용을 방문하기 전 몇 달

기간으로 위치한다고 본다. 노아용에서 돌아와, 이미 복음주의사상에 사로잡힌 칼벳은 여러 곳에서 머물렀는데 특히 오를레앙에서 자신의 최초의 신학 작품인 [영혼의 수면]을 써서 재세례파들에 대항하였다. 그러다 1534년 가을 사건 하나가 그로 하여금 프랑스를 떠나게 했다. 이 위험을 피하여 칼벳은 바젤로 도망했다. 그곳에서 그는 1년도 채 안돼서 [기독교 강요]를 썼고, 1536년 앞에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변증적 서간문을 달아 출판했다. [강요]의 인쇄 교정을 끝낸 칼벳은 이탈리아로 갔다가 잠시 머문뒤, 바젤로 돌아와서 이내 프랑스로 출발하여 재산을 다 정리하고 결정적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의 계획은 스트라스부르에 자리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파리를 떠나 쥬네브를 거쳐 우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1536년 7월 쥬네브에 도착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기옴 파렐은 이곳에 남아 자기를 도와 종교개혁을 공고히 하자고 그를 독촉했던 것이다.

 

2. 칼벳과 쥬네브 종교 개혁

 

제네바인들이 그들의 독립을 보존하고 확립하기 위해 싸우고 있을 무렵, 복음주의 사상은 그들 가운데 점차 퍼져 나갔다. 칼벳은 파렐에 의해 쥬네브에 붙들려 그로부터 "성경 강사"의 직무를 맡았다. 칼벳은 대성당에서 바울 서신들을 강해하였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쥬네브 교회를 서둘러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렐과 협력하여 4개 [조항]을 작성한 뒤 시의회에 맡겼다. 그리고 [쥬네브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육서와 신앙고백]을 작성했고, 파렐과 함께 21개 조항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모든 쥬네브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 서명하게 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강한 저항을 야기시켰다. 1538년 시 당국과 개혁자들 사이에 잠재해 있던 갈등은 첨예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칼벳과 그의 동료들이 신앙고백에 반대하는 자들을 성찬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의회는 성찬이 누구에게도 거절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속권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게 했다. 또한 시의회가 그 권한을 넘어서서 베른의 의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을 때, 개혁자들은 맹렬히 반대하면서 1538년 부활절에 강단에 올라 설교

는 하되, 성찬 거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국은 칼벳과 파렐과 코로를 면직시키고, 3일 안으로 쥬네브를 떠나라고 처분을 내렸다. 칼벳은 바젤에 정착할 생각을 했지만 부쳐의 절박한 부름에 계획을 바꾸었다. 1538년 9월, 그는 종교의 이유로 스트라스부르에 피난해 온 프랑스인들의 공동체를 책임졌다. 이곳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프랑스 교회 목사의 직책 외에도, 교수로서 그리고 문학방면 등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는 [로마서 주석]을 내놓았고, [사돌레에게 주는 편지]를 작성했고 [성만찬 소고]를 썼다. 칼벳이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는 동안, 쥬네브 교회는 심각한 분쟁으로 시련을 당했다. 추방된 개혁자들의 지지세력인 기에르멩들에게 호의적인 선거가 치뤄지고, 그에따라 쥬네브 당국은 칼벳을 다시 부르기로 결정했다. 칼벳은 쥬네브인들의 간청이 점점 더 절박해지자, 그는 결국 1541년 9월 교회의 다소간 질서를 회복하기에 필요한 시간만 머물 의도로 쥬네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23년의 사역을 마치고 생애를 끝내야 했다. 쥬네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칼벳은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1541년11월에 [교회법]이란 이름으로 시당국이 채택한 치리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교회 안에 44가지 직분을 구분했다. 1542년에는 문답형식으로 된 [신앙교육서]를 작성하였고, 많은 요소를 스트라스부르에서 빌어온 예배 모범서인 [교회의 기도와 찬송의 형식]을 만들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기초가 놓여지자, 칼벳은 "도시-교회"로 만들기 위해 험난한 전투에 들어갔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수많은 반동을 야기시켰고 더 나아가 1546년부터 기에르멩파의 우두머리인 페랭과 등을 지게 되었다. 급기야 1548년 선거에서 페래의 지지자들이 승리하여 7년 동안 이들은 시의회 의석의 대다수를 점유하여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칼벳이 교회 치리에 대해 가졌던 매우 엄격한 개념이 많은 원한을 사게 했다. 면, 복음 진리를 옹호하려는 그의 의지 역시 적지 않은 수의 적을 만들었다. 1543년 애가서의 정경성을 부인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문제시한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용을 나무랐다. 8년 뒤, 예정론 교리를 부인하고 자기를 향해 하나님을 죄

의 조성자라고 비난한 제롬 볼섹의 공격과 맞서야 했다. 1533년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 세르베투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처럼 그는 "잘못된" 교리들을 쥬네브에서 제거한 뒤, 외부의 적과도 논쟁을 하였다. 쥬네브는 개혁파의 피난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럽에 광채를 던지는 영적인 모국이었다. 칼벳은 종교개혁에서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