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자료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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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혁교회에서 의 영성훈련이란 무엇인가? 운영자 2019-03-082022-07-13 10:24
작성자 Level 10

개혁교회에서 의 영성훈련이란 무엇인가? 

영과 육으로 구성된 존재를 인간이라고 했다. 이를 다른말로 일컬어 \'영성적인 존재\'라고 했다. 그렇기에 인간은 물질적인 세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간과 공간 선상에서 살고 있음에도 그 안에 자신의 삶을 제한 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또 다른 세계와 실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을 한다. 이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하다. 여기서 갖가지 종교행위와 문화행위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몸짓을 폭넓게 정의하여 영성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능적인 이러한 욕구를 제대로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느냐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종교개혁자 존 갈빈은 이러한 욕구로 말미암아 자연적인 인간은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종교적인 욕구에 대한 불완전성과 타락상을 역설한 말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영성생활은 결코 인간의 영성적인 속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믿음과 은총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등이 함께 어우러질 때 기독교 영성생활이 성립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에서 성육신적인 삶을 역사의 현장에서 실현해 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계속적인 영적 여행을 기독교 영성생활이라고 한다.

이러한 영성생활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곧 영성훈련이다. 그런데 \'영성훈련\'이란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그 말은 마치 하나님의 은총을 배제한 인간의 능동적인 행위를 우선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 영성의 특징에 비추어 보면 더욱이 용납하기가 어렵다. 개혁교회의 전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을 선행 조건으로 한다. 은총이란 우리가 무슨 조치를 취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란 말 자체가 처음부터 우리의 행위의 정당성을 배제한 것이다. 그저 기다려서 얻을 수 있는 것밖에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영성훈련이란 말을 아예 사용하기를 꺼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사이 끊임없이 \'영성훈련\'이란 말은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인기있는 유행어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이란 말을 부정적인 측면으로 밀어내기 보다는 그 위치를 제대로 찾아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혁교회에서의 영성훈련이란 두가지 측면을 만족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첫번째의 것은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으로 얻는다\'라는 문제를 영성훈련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요. 두번째는 성화(聖化)의 문제이다. 이신칭의와 성화를 영성훈련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 개인으로 하여금 이신칭의에 이르도록 하는 영성훈련을 \'영성적 계발(啓發)\'이라고 한다면, 성화에 관한 영성훈련을 \'영성적 개발(開發)\'이라는 말로 그의미를 세분화할 수 있다.

첫째 영성적 \'계발(illumination)\'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라는 교리야말로 개혁자들이 성서에서 재발견해낸 가장 위대한 깨달음중의 하나이다. 이 교리는 인간이 부여받은 영성적 심성에 대한 무기력함을 고발한 것이며, 동시에 깊은 모순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인간에게 확고한 평화를 안겨준 사건이기도 하다. 개혁교회에서는 이것이 영성형성의 근본적인 토대(the foundation of spiritual formation)가 된다. 둘째는 영성적 \'개발development)\'인데, 이것은 첫번째를 토대로 하여 점진적인 과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실제적으로 우리의 현실속에서 재현해감으로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려는 노력을 말한다.

이제까지의 한국교회의 현실은 적극적인 의미의 영성훈련이라기 보다는 \'이신칭의\'라는 자각적인 의미에서의 영성계발(啓發)에 주안점을 두어왔다. 말하자면 구원받은 백성을 만드는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지만,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의 형성에 대해서 다소 서툴렀던 것이 사실이다. 본훼퍼는 \'값싼은혜\'라는 신학적인 용어를 빌어서 당시 독일 루터 교회의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즉 적극적인 영성 훈련을 하나의 \'공적사상\'으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개혁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한 모호한 태도를 취한 당시의 신학적인 입장이 빚어낸 \'값싼 은혜\'에 대한 반성의 소리를 촉구한 말이다.

사실 루터는 \'믿음에 의한 의인화\'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은 성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루터의 입장에서 보면 성서에서 빠져주었으면 하는 성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종교개혁자 칼빈은 야고보서를 믿음으로 인한 의인화와 대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은 믿음을 강조한 바울과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를 대립적인 인물이 대한 것이 아니라, 대화와 조화의 인물로 다루고 있다. 야고보가 이 글을 쓰게 된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서 이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즉 믿는 자가 마땅히 행할 일을 전연 소홀히 하면서도 거짓으로 믿는다고 자랑함으로써 그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을 지적한 것이 바로 야고보서라고 한다. 내용없는 믿음의 모양만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방탕한 생활에 자신들을 내맡기고도 태연한 그 어리석음을 폭로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믿음은 결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진정한 이신칭의란 성화와 나란히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개혁영성에 비추어서 영성훈련이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고 실현해 가기 위한 능동적인 영성활동을 말한다.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무 표징도 볼 수 없는 내용없는 교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미 사용한대로 영성적 啓發(illumination)과 영성적 開發(development)라는 표현을 채택해 보았다. 영성계발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경험적으로 양심의 평화와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정서적인 개발을 도와주어야 한다. 정서적인 확신이 없는 지적인 인지란 아무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말뿐이다.

두 번째 의인화란 개혁가들의 이신칭의(以信稱義)교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능동적으로 단계적인 성장을 꾀하는 의미에서 영성적 개발(開發)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이신칭의의 경험을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실현가는 방법에 대해서 서툴 수 있다. 행위가 없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경험을 행위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마치 부부간의 사랑을 한다고 할지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적합한 표현을 배울 때만이 내면의 사랑이 바르게 표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영성훈련의 이론적인 배경은 \'믿음에 의한 의인화\'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자각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실제적인 삶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모든 조치를 말한다. 특히 개혁 교회적인 영성훈련이란 이신칭의를 통해서 적극적인 성화를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며, 또한 역으로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거듭 이신칭의에 대한 확신에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영성훈련의 일차적이고도 기본적인 관심은 어떤 특정한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한 기능적인 훈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웅적으로 사회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며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또 성공적으로 현지에 잘 적응하면서 선교사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도 본다. 훌륭한 설교와 상담기술과 열심있는 목회활동을 통해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한계성과 내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은 기능적인 면에서나 기술의 부족에서 오는 실패라기 보다는 영적인 내면화에 대한 위기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말하자면 그 사역에 필요한 기능적인 훈련보다는 그 기능적인 활동을 정상적으로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존재 형성에 문제가 일어났다는 말이다.

존재 변환(transformation)은 특정한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기능적인 훈련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훌륭한 기능적인 활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나 주변환경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더욱 고갈증을 몰아가는 것은 근본적인 존재 형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은 알고 있지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존재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이 에너지의 정상적인 공급을 기대할 수 없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목회적인 사역을 적어도 외적으로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목회자들 중에 알콜중독이나 성적인 문제 혹은 정신적인 이상 증세를 보이는 일들이 적지않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분명히 기능적인 훈련의 부족내지 지적인 훈련의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모순과 역경속에서도 평정과 조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근본적인 존재 형성\'에 문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간다. 교인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불신의 골이 깊어가고 있다. 심지어는 증오의 눈길을 던지기도 한다. 또한 성직자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도 적지않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행해야 할 형식이나 방법이 서툴러서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답게 할동할 수 있는 기능적인 훈련은 그 어느 때보다 잘 되어있다. 그러나 내면적인 성향을 말하는 존재가 바르게 형성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인과 집사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성직자와 목사와 목사라는 말은 반드시 일치되는 말이 아니다. 전자는 존재의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기능의 문제이다. \'이신칭의로 인해서 근본적인 성향이 바뀌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는 기능적인 교인이란 자기 영역을 벗어나면 아무일도 수행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된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훈련된 영성이 전혀 다른 분위기인 생활 공동체로 넘어갈 때 효과적인 작용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훈련은 무슨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외적인 기능적인 훈련이라기 보다는 존재 형성을 인도하는 내면적인 훈련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영성의 문제는 기능적인 수행훈련의 부족이라기 보다는 내면의 존재형성에 대한 미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영성운동을 대중운동에 의존하고 있다. 마치 동일한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제조업체 처럼 대량으로 영성적인 인간을 찍어 내려한다. 말하자면 신학교육이나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이 일방통행이다. 한 쪽은 강압적이고 다른 한 쪽은 반추의 여지없이 수동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 이런 주입식 훈련방식으로 각각 다른 인격적인 주체에 효과적인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신비적이고 독특하고 개별적인 존재다. 인격대 인격의 만남으로서 만이 존재의 변화가 가능하다. 즉 기성복식 영성훈련은 대강의 영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존재형성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며 따라서 상황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할 수도 없다.

두 번째 문제는 한국교회의 70년대 후반으로부터 시작되어 온 성경공부 운동의 한계성이다. 그것 역시 한 시대를 담당한 영성훈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히 현실적인 생활공동체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인 결단을 차치하고라도 성경공부가 지나친 지적인 훈련에 머물러 있다는데에 있다. 인간은 지성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두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제대로된 가치판단과 더불어 가치에 따른 행동이 일어날 수 있다. 스코틀란드 철학자 맥머레이(Macmurray)는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지적으로 개화되어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원시적이다. 이러한 지적 발달이 우리를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식은 힘이다. 그러나 감정은 우리에게 힘의 근거가 되는 가치와 용도를 조정하는 주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손아귀 안에 지적인 산물인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한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것이 현대인의 딜레마이다.\"

감성적인 훈련이 없는 지적인 훈련은 무모함 내지 무능력이다. 지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어 훈련되어질 때 그 사람은 情意的 혹은 감성적 (affective)인 영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곧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세 번째 영적성장에 대한 개별적인 영성식별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대중적인 영성운동이 주는 가장 큰 약점중의 하나다. 뿌리기는 하나 그것이 적합하게 자라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각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성품에 따라 각각 다른 영적성장의 패턴을 취하게 되어있다.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영적성장의 패턴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각각 자기의 존재형성을 위한 효과적인 선택과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외부적인 선물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인도이다. 내적인 인도를 식별하고 그것에 적절하게 반응하게 될 때 건전한 영적성장을 꾀하게 된다. 훈련된 영적지도자와 영적인 담화를 통하여 식별을 도움받고 개인에게 적합한 영성의 길을 취해야 한다.

한국교회 영성운동은 대중적이고 지적훈련적인 방향에서 선회하여 개인적인 특성을 인정하고 감성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방 통행적이고 주입식적인 영성훈련에서 확인하고 식별할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장치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문적인 목회 상담가가 있는 것처럼 영성식별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영성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주지하고 싶은 것은 영성훈련의 일차적인 주안점은 특수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형성에 두어야 한다. 개혁교회 영성적인 의미로는 \'살아있는 의인화\'에 대한 확신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이 바로 영성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