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2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2학기

제목신 론2022-07-13 16:21
작성자 Level 10

신 론

 

칼빈주의 신관

 

Ⅰ. 서 론

 

본 장에서는 칼빈주의의 신의 인식문제와 삼위일체론을 논하게 된다. 인식문제에 있어서는 크게 이성적 방법의 가능성과 계시적 방법이 논의된다. 그리고 삼위일체에 있어서는 아리우스주의, 역동력적 군주신론, 양태론적 군주신론, 터툴리안의 삼위일체설등을 논의하면서 칼빈주의의 삼위일체설을 살펴본다.

 

Ⅱ. 본 론

 

1.인식론에 대한 철학자들의 견해

 

철학자들 중에는 신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전혀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가지론자 흄은 신의 존재자체는 인정하지만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상통할 수 있는 속성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 없이 이성만으로는 신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조건부에 속하며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와 정반대 되는 절대자는 알 수 없다.”

스코틀렌드의 철학자 윌리암 하밀톤(Sr William Hamilton)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적 불가지론을 주장하였으며 프랑스의 어거스틴 콩트(Auguste Comte)는 신 인식에 대한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세 단계로 나누어 종교적 시대, 형이상학적 시대, 과학적 실증시대를 주장하며 인간의 종교는 “이성”이라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신 인식에 대한 가능성과 타당성을 주장하는 철학자도 있다. 

시세로는, “신이 없다고 할 만큼 미개한 이 나라에 있는 것이 저 나라에 없고 저 나라에 있는 것이 저 나라에 없는 것이 있었으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종교였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는 후천적으로 배워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2.인식론에 대한 구교의 견해

 

중세 이후 구교의 신학사상은 자연신학의 가능성과 권리를 주장해 왔다.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신에 대한 인식을 시도하는 것이다.(그렇다고 자연신학과 일반 계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자연신학에서는 신에 대한 인식이 특별 계시 외에도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한데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구교에서는 이성의 권위를 인정하기 전부터 신 인식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두드러지는데, 하나는 전설주의(traditiondism)로 그들은 신 인식이란 전적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에 의존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이성만으로도 인식할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 논쟁은 1870년 종교회의에서, “하나님은 이성의 자연적 빛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로 결정하였다.(여기서 “자연적 빛”이란 특별 계시를 통한 초자연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지식을 말한다.)

구교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신 인식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한계를 긋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구교와 칼빈주의의 차이점은 구교에서는 특별 계시를 말하는 것은 신 인식에 불가결의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고 자연 계시만 가지고 많은 애로점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910년에 구교의 지도자들이 모여 서약할 때, “이성만으로도 만물의 근원을 알 수 있으며 입증할 수 있다.”고 바티칸 결정에 부가한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구교에서는 이성의 힘만으로도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가? 그 밑바닥을 파고들면 인간론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신관은 인간론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자연인(중생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맹인이나 아니냐 할 때 구교에서는 맹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맹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 인간을 소경이라고 한 곳은 얼마든지 있다. 이것아 사실이라면 어떻게 맹인이 자신의 힘만으로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신을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구교의 인간론은 인간의 죄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나 그것이 경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범죄한 결과 영적 능력은 상실하였으나 육체적 능력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만으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3.인식론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지만 완전한 인식은 신의 사역을 관찰하는 데서 얻어진다고 했으며 터툴리안은 신에 대한 자연적 인식을 강조하였다.

“인간은 참된 신을 믿지 아니하는 우상 숭배자들이라도 위기를 당하면 신을 찾는 본성이 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기독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어거스틴은 감각적 지식보다는 이성을 더 중요시하여 감각적 지식은 신빙할 수 없으며 무상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인간은 태양 빛의 힘으로 물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 같이 신의 빛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지상에서 인간이 가지는 지식은 어두운 그늘이 따르는 지식이며 참된 지식은 하늘로부터 오는 빛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틴 루터는 자연신학이나 본능적 지식을 도외시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신령한 일을 전혀 알 수 없다고 했다. 죄가 인간을 어둡게 만들었기 때문에 특별 계시 없이는 인간구제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4. 인식론에 대한 칼빈주의 견해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 아무 소득이 없을 정도로 무효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 자신보다 열등한 대상을 향할 때는 그러하다. 아니 우위의 대상을 향할 때는 연구에 부주의하기는 하지만 다소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현세의 범위를 초월하게 되는 경우 현저하게 인간의 무능을 알게 된다” 이것은 신 인식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지식을 인정하는 말이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을 말하면서도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과 달라 종교의 씨가 잔존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또한 인간이 타락함으로 초자연적 은총을 박탈 했으나 아직 자연적 은총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특별 계시 없이도 완전한 신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표현으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인간은 어떤 범위 내에 자기를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한도가 있으며 또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존엄에 대해서 말하며 증거 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성에까지 적응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성에까지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인식하기를 원하는 자는 정기를 상실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은혜의 선물인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칼빈주의 인식론의 골자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없이는 참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3:10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달은 자도 없고(인식론)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고(방법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윤리론)” 라고 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요14:6 마11:27참조). 여기에 에밀 부르너의 인식론과 칼빈주의 인식론의 차이점이 있다. 부르너는 자연신학 만으로서의 신 인식을 인정하나 칼빈주의에서는 부정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할 때 성령의 내적 조명을 생각해야 한다. 고후 4:6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리라”고 했다. 파스칼은 팡세에 말하기를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사색의 결과가 아니고 계시로 알려진 하나님을 믿었으며, 칼빈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다.

 

5. 삼위일체의 역사적 발전

 

교부시대에 있어서 에비오니스트나 도케티즘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변호하기 위하여 노력은 했으나 심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지는 못하였다. 교부시대의 변증가들은 그리스도가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한 존재인 것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했고 ‘만물의 창조자시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이라고 했으며 ‘거룩한 로고스로서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제 2세기에 들어와서 노스틱주의에서는 로고스를 우주의 이성적 원리라고 말한다. 

노스틱주의가 일어남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논쟁하게 되었다. 쩌스틴 마터는 당시의 대표적인 변증가였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하였고 정관사를 붙여서 「호•데오스」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재로 가르쳤고 힘으로만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서 만물보다 먼저 계신다고 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의 상호 관계를 명백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삼위일체란 말은 터툴리안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을 구별한다. 그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로고스가 있다는 것 본체의 통일에서 한 하나님이 계시지만 성령의 신비가 배정되어 있다는 것 이것은 권능의 차이가 아니고 질서와 사역에서 되어 진 것이다”라고 했다. 

 

6.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단

 

아리우스는 성자의 신성을 부인한다. 그는 성부만이 영원자존하신 분이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맨 처음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성자가 지음 받고 난 후에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지은 바 되었다고 했다. 일위신론자들은 예수는 단순한 인간뿐인데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난 후 성령이 내재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사벨류스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기 위해 성자나 성령은 별개 인격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나타났고 신약시대에는 변모하여 성자로 나타났고 지금은 성령으로 나타나는 것 뿐이라고 했다. 16세기에는 소치니주의가, 17세기에는 유니테리안주의가 나타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아리우스주의에 대해 도전한 아다나시우스는 성경에 근거해서 성자는 영원 전부터 자존하시는 참 하나님이요 본질적으로 성부와 동일하다고 논박했다. 마침 콘스탄틴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후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소집하고 오랜 논쟁 끝에 아리우스 이단을 정죄하고 “성자는 참 하나님이오 본체론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고백을 채택하게 되었다.

 

7. 삼위일체론의 증거

 

(1) 구약에 나타난 증거

구약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형으로 사용되었고 히브리어는 단수로 “엘”을 하나님으로 표시한 때도 있지만 복수 “엘로힘”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복수를 사용했고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에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라고 했다. 창 11:7에 보면 인간이 바벨탑을 쌓을 때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라고 했으며 사6:8에는 이사야 선지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했다. 이상의 사용된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은 구약시대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이다. 

또한 이사야 48:16 「주 여호와께서(성부) 나와 (성자) 그 신을(성령) 보내셨느니라」라는 구절 등에서도 삼위일체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2) 신약의 증거

눅 1:26-35를 보면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할 때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대답한다. 천사가 “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놓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될 때 성부, 성자, 성령이 다 함께 역사하셨다. 마 3:16-17에서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마 11:27에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아버지를 알려면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마 28:19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하셨다. 사도들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견해를 고전 12:4-6에 찾아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했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에 역사하실 때, 성령은 카리스마타 χαρισματα , 은사를 주시는데 역사하시고 성자는 디아코니온 διακονιων, 봉사 , 섬김, 직무를 주시는데 역사하시고 성부는 에넬게마톤 ενεργηματων, 활동,동작,작용을 주시는데 역사하신다. 엡 1:3-14를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시는데 성부 하나님이 예정하시고(3-5), 성자 하나님이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7), 성령 하나님이 인치셨다(13)고 했다.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를 벧전 1:2에도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라고 말씀하신다.

 

Ⅲ. 결 론 

 

인식론에 있어서 칼빈주의에서는 특별 계시를 통한 인식을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자연 계시를 부정하지 않으며, 상호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설에 있어서 칼빈주의자들은 본질에 있어 유일하신 하나님을, 각 위에 있어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형상

序 論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에 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의 완전하신 덕을 반영하는 거울 이지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요 가장 높고 부요한 신적 계시이다. 창세기 첫 장에서 우리는 인간 창조의 유독성(惟獨性)을 발견 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동물들을 창조 하실 때는 ‘각기 그 종류 대로’ 만드 셨으나(21,24,25절),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 하셨다. 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pp.30-31.

 

창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26절의 주동사는 복수 이다. 많은 학자 들이 이 복수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을 시도 보편적으로 삼위 일체를 함의(含意) 하는 것으로 석의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26절은 또한 인간 창조에 앞서 신적 협의(協議)가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 하기도 하는데 이점은 인간 창조의 유독성을 다시금 드러낸다. 왜냐 하면 다른 아무 피조물에게서도 인간 창조 시 나타난 것과 같은 표현을 결코 발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에 관해 잠시 고찰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목표로 하는 우리의 삶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

 

 

本 論

 

1.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의 성경적 용어 고찰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 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

 

위의 본문 에서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이라는 말이 교대로 사용 되어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 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그것은 공허한 일이다. 하문호, 「기초 교의신학 Ⅲ, 인간론」 (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1991). p.63.

 

히브리 원문을 보면 ‘형상’과 ‘모양’이란 두 표현 사이에 아무런 접속사가 없다. 그러나 칠십인경과 라틴 벌게이트 역(Vulgata)에서는 και와 et라는 접속사가 첨가 되어 있다. 그래서 ‘형상’과 ‘모양’이 전혀 다른 별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 나타난 데로는 ‘형상’과 ‘모양’이란 두 표현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점은 본문과 더불어 다른 곳에 나타난 관련 귀절들의 용례(用例)를 살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창1:26에서는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이란 용어가 둘 다 사용 되었으나, 27절 에서는 단지 「形象」(셀렘,םלצ )이란 단어만 사용 되었고 반면 창5:1에서는 「貌樣」(데무드, תגמד )」이란 용어만 사용 되었다. 그리고 창5:3에서는 두 용어가 다시금 사용 되었으나 1:26과는 역순(逆順)으로 표현 되었다. 그리고 9:6에서는 다시금 ’형상‘이란 말만 사용 되었다. 만일에 인간 존재의 상이한 국면들을 묘사 하기 위하여 이 두 용어들이 사용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이 두 용어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용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그와 같은 용법은 히브리 인들의 관습 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히브리 인들의 어법에는 반복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한가지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종종 두 낱말을 쓸 때 가 있는데 이를 연구법(parallelism, 聯句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용어가 비록 일반적인 의미에서 유사어로 사용 되었다고 할지라도 양자 사이에 개념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形象」(셀렘,םלצ )은 “새기다”(to carve)혹은 “탁마(琢磨)하다”(to cut)라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부터 유래 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동물이나 인간을 조각한 모양을 묘사 하기 위하여 사용 되었다고 할 수 있고 ‘모양’에 해당되는 「貌樣」(데무드, תגמד )라는 말은 “비슷하다”(to be lik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부터 파생 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모양’이란 말은 형상이 닮았다는 사실을 강조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형상’이란 말이 강조 하는 바는 하나님은 원형이시고(dearchetype)인간은 그 모형(de ectype)이라는 사실이요 ‘모양’ 이란 말은 그 상(象)이 모든 면에 있어서 원형과 일치 한다는 것을 강조 한다. 따라서 두 용어의 연구법(parallelism, 聯句法)적 용례로부터 추론 할 수 있는 사실은 것은 그와 같은 표현 양식을 통해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관념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2. 성경 신학적 관점(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나타난)을 통해서 본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의 의미 

 

26절과 27절은 인간 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이 두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계획과 목적을 세우신 사실(26절)과 사람을 만드신 사실(27절)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26절을 원어를 직역해서 살펴 본다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

우리가 만들자 

사람을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처럼

그리고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그 바다의 고기를, 그리고

그 하늘의 새를, 그리고

그 육축을, 그리고

그 땅 모두를, 그리고

그 땅위에서 기는 모두를(26절)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으려는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 목적은 26절 후반 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후반 절은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로 시작 된다. 즉 「다스리게」 하는 것이 사람을 지은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다섯 개의 목적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이제껏 엿새 동안 지음 받은 모든 동식물을 총 망라한 표현이다. 이러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 하셨다. 이 사실은 27절이 잘 말해 주고 있는데 이를 직역 하여 보면

 

a.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 그 사람을

b. 그의 형상대로

b.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a. 그분께서 창조 하셨다 그를 (상반 절)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께서 창조 하셨다 그들을 (하반 절) 

 

26-2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과정에 대해서 알만한 단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런 단서는 창세기2:7에 가서야 발견할 수 있는데 반면 창2:7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려는 계획과 목적 등 여기서 알 수 있는 내용이 생략 되어 있다. 이렇듯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 내용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기록자가 말하려는 의도 또는 초점이나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7절에서 강조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누가 사람을 창조 하셨으며, 둘째: 지음 받은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는 언급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함으로써 사람을 창조한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크게 강조 하고 있다. 그 다음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 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의 존재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문맥에 가장 알맞은 것을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표현은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지을 수 있는 독특한 차이점을 찾은 다음 그것을 이 표현과 연관 시켜 본다면 차이점은 단 한가지 인데 그것은 인간은 “다스리는”존재로 지어 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다스리는 역할”과 연관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6절에서도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지으시려는 목적은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러한 문맥적 이해가 타당 하다는 것을 입증해 줄만한 성경 안팎의 증거들이 있다.

고대 근동 에서는 ‘신(神)의 형상’이라는 표현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였다. 왕이 가진 권위와 그의 통치는 신의 권위와 통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왕은 신의 권력을 그대로 소유 하고 있는 이른바 신의 복사본(copy)인 것이다. 그리고 복사본(複寫本)이란 원형을 본뜬 것이므로 ‘형상’(image)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었다. 따라서 ‘신의 형상’ 이라는 표현은 다름아닌 ‘왕’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차 독자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는 신은 하나님 이시다. 그렇다면 일차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표현은 ‘왕’이라는 개념으로 이해 되기에 충분하다. 온 세상에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다스림을 나타낼 형상으로서 사람을 창조 하셔서 그로 하여금 세상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다스림을 나타내시려고 인간(남자와 여자)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뜻 데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데로 다스림으로써 그분의 다스림을 피조물 세계에 반영 하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술을 몇 가지의 성경적인 증거를 통하여 입증한다면 첫째 증거는: ‘다스리다’는 동사 “라다”(radah)의 쓰임을 통해서 이다. 이 동사는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다스리다’라는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특이 하게도 왕의 다스리는 행위를 묘사 하고 있다(왕상4:24; 사14:6; 겔34:4; 시72:8; 110:2). 따라서 이 동사가 창세기 1:26, 28에서 선택된 것은 아담의 다스리는 행위가 통치의 행위 임을 시사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증거는: 성경 전체에 비추어 볼 때 아담은 분명히 왕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가지 직임(職任)은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이다. 이것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 갖는 직임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 직임을 행하시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그런 직임을 행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류의 대표로서 그 직임을 맡아 행하셨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둘째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김영철, 「주님의 주님 되심」 (서울:여수룬, 1992), pp.68-88.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을 살펴 점을 살펴 보았으나 어떤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는지 창조 기사 가운데 정확히 나타나 있다고 확언(確言) 할 수는 없지만 그럼 에도 불구 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유사성(類似性)을 어느 정도 발견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창1:26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피조물에 대한 통치(dominium)를 인간 속에 나타나는 신(神)형상 발현(發顯)의 한 국면으로 추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p.35.

 

 

3. 조직신학 관점(성경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서 나타난)을 통해서 본 「形象」(셀렘,םלצ )과 「貌樣」(데무드, תגמד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의 의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각 교파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로마교회와, 루터파의 견해를 간략하게 고찰한 후 개혁파 교회의 견해는 여러 신학자들(죤칼빈, 칼바르트, 에밀 부룬너, 벌 카워)의 의견을 검토해본 후 박형룡 박사의 교의 신학에 있는 내용을 빌어서 조직신학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논술 하고자 한다. 하지만 본인이 신학적 지식의 짧음으로 인하여 여러 신학자들의 깊은 사상을 올바른 관점(저자의 의도와 논술 목적)에서 제대로 이해 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시인한다. 

 

1) 로마교회의 견해 하문호, 「기초 교의 신학 Ⅲ」 (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 1991), pp.65-66.

로마교회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초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구분한다. 

①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육체의 불사성(不死性)같은 어떤 자연적인 은사들을 인간에게 주셨는데 이것들이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한다. 

②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인간은 위에서 말한 자연적 은사를 통해서 자연적 의(義)를 소유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식욕, 정욕 등 열등한 성향이 있으며 이것들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니나 죄를 위한 기회 또는 연료가 되기 쉬우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방지 하기 위하여 초 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여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은사 곧 초자연적인 은사로 말미암아 「原義」가 주어 졌으니 이것이 곧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한다. 로마교회는 이와 같은 주장으로 말미암아 범죄후의 인간 상태를 본래 창조된 대로의 인간은 원의(原義)가 없었으나 또한 죄도 없었고 다만 죄의 결과를 낳기 쉬운 경향을 가진것 뿐이었는데 범죄 후 인간은 다만 원의가 상실 되었을 뿐이어서 범죄한 인간은 창조된 때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 후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견해는 타락의 원인 설명이 곤란하며 범죄 후 인간 상태의 심각성을 간과(看過)할 위험이 있다. 

2) 루터파의 견해 박형룡, 「朴亨龍 博士 著作 全集 Ⅲ. 人罪論」 (서울: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1), pp.101-102. 

 

루터파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좁은 의미에서 제한 하여 이것을 사람의 「原始的 義」와 동일시「同一視」하며 이것이 타락을 통하여 전적으로 잃어 졌다고 결론한다. 즉 루터파는 「靈的 特質」(Spiritual qualities)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말한다. 이때 「靈的 特質」이란 참 지식(知識)과 의(義)와 성(聖)을 가리키며 이것은 또한 「原始的 義」라고 불리어 진다. 결국 루터파의 「原始的 義」는 로마교회의 그것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서 틀림 없다. 이렇게 볼 때 루터파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로마교회가 범죄 후에 잃어 버렸다고 말하는바 「原始的 義」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잃어 버린 후에도 범죄한 인간이 동물과 똑같은 상태로 전락 되지 아니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되다. 

3) 개혁파 교회의 견해 안토니 A.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1), pp.76-117.

 

① 죤 칼빈(John Calvin)의 견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죤 칼빈(1506-1564)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에 대한 이해를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데 인간 안에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발견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자리 잡고 있는 좌소는 인간의 영혼 속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심지어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에도 없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오는 세상에서 온전히 회복 될 때에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온전히 회복 될 것이라고 했다. Comm. on Ⅰ Cor. 15:49. : 「개혁주의 종말론」, p.76. 에 나타난 관주를 인용.

 

또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원래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아담이 부여 받은 순결성은 이 단어로(하나님의 형상(Imago Dei))표현 된다. 라고 하면서 골로새서3:10과 에베소서4:24에 근거하여 칼빈은 결론 짓기를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원래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타락 하기 전에는 인간은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소유 하고 있었으나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엄청난 파괴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한 인류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그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도말되었다(utterly defaced), 파괴 되었다(destrroyed)고 종종 말하므로 타락 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연구 해보면 타락한 인간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미워하는 자들마저도 사랑하라고 권하면서 그 이유를 “그 사람의 악한 의도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쳐다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끼친 영향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사라져 버리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 하더라도 죄로 인한 오염이 너무나도 심하여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끔찍하게 기형적이 된 형상일 뿐이다”고 했다.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Philadepha: Westminster, 1960), Ⅰ.15. 4. : 「개혁주의 종말론」,p.

81.에 나타난 관주를 인용함

 

이렇게 부패하고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롭게 되어 질 수 있으며,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완전히 회복되어 지는 때는 장차 오는 삶이 도래 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② 칼 바르트(Karl Barth)의 견해

이제 우리는 최근의 신 신학자 이며 신 정통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어 지는 칼 바르트(1886-1968)의 견해를 살펴 보려고 한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이성과 지성 속에서 발견 되지 않는다. 그는 창 1:27을 주해 하면서 “위의 본문이 너무도 명백하게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은 인간 존재가 대면(confrontation)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 한다. 인간과 인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결은 대면의 관계를 말한다.” Karl Barth, Church Dogmatics, Ⅲ/1. p.195. 「개혁주의 종말론」에 있는 관주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임.

 

바르트는 이러한 대면적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일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존재 하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도록 규정 지어 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피조적 존재는 만남의 존재라는 사실 - “나”와 “너”, “남자”와 “여자”사이의 - 속에 분명한 상응 점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러한 대면 속에 인간됨이 있으며 이러한 인간됨 속에 인간의 창조주를 닮은 모습이 있다” ?) Church Dogmatics, Ⅲ/,p.203. :「개혁주의 종말론」,p.91.에서 각주 인용

그러면서도 그는 인류역사 속에서 인간이 실제로 정결한 상태에서 부패된 상태로 전락하게 된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타락”후에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상실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순전히 관계성으로만 이해하려는 바르트의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미친 타락의 엄청난 영향력과 그 형상의 갱신의 절실한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은 성경적 인간론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③ 에밀 부른너(Emil Brunner)의 견해

바르트와 동시대 인물이며소위 변증법적 신학을 대표하는 에밀 부룬너(1889-1966)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을 고찰 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본다. 바르트 처럼 부룬너도 아담의 역사적 실존성과 인간 타락의 역사성을 배격한다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역 (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1991)

p.94.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성의 모든 영역,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능성속에서 발견 되어 진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자신을 스스로 영화 롭게 하기를 원하시고 자신을 나누워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대하여 감사와 반응적 사랑으로 반응하는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랑은 부룬너의 인간이해와 인간 존재 목적 이해의 중심부에 놓여있는개념이다. 또한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는 뜻은 인간은 결코 상실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도 인간은 그것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경의 두귀절(고전11:7; 약3:9)에서도 가르친다고 말했다 Man in Reuolt, p. 500 : 「개혁주의 종말론」, p.98.의 각주를 인용함

그래서 타락한 인간도 실제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는 점을 강조 한다. 그러나 부룬너의 이러한 견해에는 몇 가지 심각한 의문이 제기 되는데 첫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부룬너는 결국 첫 아담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배격하는 것이며 따라서 제2아담이신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제기 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의 입장은 결국 그가 주장하고 있는 창조와 죄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도록 한다. 셋째: 인간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형식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고 주장하는 등의 몇 가지 문제점을 갖는다. 

④ 박형룡(朴亨龍)박사의 견해 박형룡, 「朴亨龍 博士 著作 全集 Ⅲ. 人罪論」 (서울: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1), pp.95-106. 

 

개혁파 여러 교회는 칼빈의 발자취에 따라 다른 교파들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관념을 가진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독점적으로 사람의 이성적 성질(理性的 性質)로 구성된다는 견해와 이것이 전혀 그의 창조주의 도덕적 일치(道德的 一致)로 구성된다는 견해 사이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여 둘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위의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고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개혁파 입장에서 본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요약 할 수 있는데

a. 인격 혹은 영혼에서

즉 그의 단순성, 영성, 불현성, 불사성 등의 품질들과 지(知), 정(情), 의(義)등의 심력(心力)들과 자의식및 자결성의 권능에서 자연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b. 원의(原義)에서

사람이 창조 되었을 때 참된 지식, 의, 거룩을 나타낸 그 본성(本性)과 지성적 도덕적 완의(完義)혹은 원의에서(엡4:24; 골3;10)도덕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c. 신체에서

그 물질적 실체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영생에 참여 하는 적당한 기관과 하등 피조물계에 주권을 행사하는 기구로서의 신체에서 외면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d. 지상 주권에서

사람의 지상 주권에서(시8:5-6;계5:10) 권위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⑤ 하문호 교수의 견해 하문호 「기초 교의신학 Ⅲ 人間論」 (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1991),pp67-74.

 

하문호 교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말하기를 

a.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한마디로 말해서 범죄 후에 잃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참 지식, 義, 聖)(엡4:24; 골3:10)등을 말한다.

b.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범죄 후에도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다른 동물들에게서 발견 할 수 없는 理性,과 知識과 良心, 그리고 만물 통치권 등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통하여 영적 생명을 가진 결과로 인간은 다음과 같은 동물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소유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간은 영생의 가능성을 가진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만물을 주관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4.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pp.36-41.

 

 

어떤 이들은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 했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상실하였고 더 이상 신(神)형상의 소유자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5:1은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본문은 타락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임에도 불구 하고 아담에 대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만일 그 당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전적으로 상실되어버린 상태라고 한다면 본문은 아마도 그와 같이 기술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더럽혀 졌다(Cf. 창6:5; 롬7:18)고는 생각 할 수 있으나 타락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전적으로 상실해 버렸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 본문이 말하지 아니하는 것을 주장하는 격이 되고 만다. 창5:3에서는 1:26의 용례와 같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으나 어순은 역(逆)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담의 아들인 셋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지 아니하고 단지 아담이 그의 모양을 따라 그의 형상대로 출생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 후에 비록 죄로 말미암아 부패(腐敗)되고 오염(汚染) 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아담의 아들인 셋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추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들은 타락 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전적으로 잃어 버렸다는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사실은 창세기 9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다시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할 것이라는 사실이 계시 되어지고(2절), 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 되었다(3절). 그러나 피 채로 먹는 행위는 금지 되어 지고(4절) 또한 사람을 죽인 동물이나 사람을 살해한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의 피를 요구 하신다(5절).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우리가 다룰 주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 6절이 나타나게 된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사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즉 살인이 죽음으로써 처벌 되어 질만큼 가중한 죄로 지목되는 이유는 살해된 자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사람을 죽였다고 할 때 그 행위는 단순히 한 사람의 생명을 손상 시키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도전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파멸시키는 행위는 바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 하신 창조주에 대한 범죄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귀절들은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의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神)형상과 관련된 신약의 중요한 귀절 가운데 하나는 야고보3:9절 말씀이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죄의 문제를 취급 하는 중 동일한 문맥에서 혀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또한 사람을 저주 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죄악 된 자기 모순 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왜 이와 같은 일들이 상호 모순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즉 우리가 저주하는 바로 그 대상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 이기 때문에 사람을 저주 한다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 그들을 자신의 모양 대로 창조 하신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구 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 해야 할 점은 “지음 받음” 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시상이다. 이 동사는 “ ---이 되다.” 혹은 “만들어 지다”는 의미를 가진 γινομαι의 완료형 분사 γεγονοται로서 헬라어의 완료시제는 “결과가 계속되어지는 과거행위”를 묘사 하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인간은 과거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은바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모양 속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야고보 3:9은 우리가 저주하는 인간이 비록 죄로 인하여 오염(汚染) 되었다 해도 - 전적 부패로 표현 될수 있을 만큼 - 신(神)형상이 전적으로 제거되어지지는 아니하였고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 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의 하고 있다. 

 

結 論 

 

신약의 여러 귀절들은 타락 이후의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로의 회복이 요청 되는 존재로 묘사 하고 있으며(엡4:22-24, 골3:9-10), 또한 그와 같은 귀절들은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갱신(更新)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이루어져 가는 점진적 과정임을 시사 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신약이 가리키는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목적은 우리가 더욱 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요 혹은 더욱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롬8:29; 고후3:18; 골3:9-10; 엡4:22-24).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우리 안에 회복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신 형상이 우리 속에 왜곡 되어 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한 인간 일지라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가운데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또 다른 국면은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정적인(statisch)성질의 것이 아니라 동적인(dynamisch) 것이며 우리가 향해 나가야 할 종말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마땅히 되어 져야 할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에 의하여 점점 하나님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도록 변화되고 있는 중이며 미래에 언젠가는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갱신은 우선적으로 구속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노력을 함의하는 것으로 신약에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새롭게 되는 일은 직설적(indicative)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골3:10), 동시에 명령적(imperative)인 요구로 나타난다(엡4:24; 5:1).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회복은 은사일 뿐 아니라 중요한 성도의 과제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성화의 최종목적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데 -물론 신인합일(神人 合一)의 의미는 아니지만-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된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히 될 것이라는 표현인데 이를 종말론적 언어로서 묘사 하고 있다(고전15:49; 요일3:2).

 

參 考 文 獻

박형룡, 「교의 신학Ⅲ 人罪論」 서울: 한국 기독교 교육연구원, 1981.

안토니 A. 후크마, 「개혁 주의 인간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1.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上」 권수경,이상원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하문호, 「기초 교의신학 Ⅲ 人間論」 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 1991.

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김영철, 「주님의 주님되심 구약 Ⅰ」 서울: 여수룬, 1992.

카일 델리취, 「구약 주석 Ⅰ 창세기」 서울: 기독교 문화사, 1992.

알버트 반즈, 「성경 주석 창세기 上」 서울: 크리스챤 서적, 1987.

 

제 1 강 삼위일체란 무엇을 말하는가?(마 28:19-20)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세 분이시다”라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 숫자적 개념으로 강조되어서 실제적으로 설명하려는 많은 부분들을 놓쳐 버렸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했을 때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늘에는 누가 계셨는가?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삼일 간 죽음아래 계셨다. 그러면 그 삼일 간은 누가 천하 만물을 다스렸는가? 이렇게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했을 때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성경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만이 唯一하신 신이라는 말이다. 다른 신은 없고 하나님만이 唯一하신 신이라는 뜻이지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唯一神이지 單一神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한 분이시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과 성령의 신성, 즉 예수님과 성령이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게 된다. 이것은 단일신론이라하여 역사이래 계속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다. 성경은 우상을 섬기는 것은 이단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것을 똑같이 이단으로 취급한다.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여러 가지 성경적 증거가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지금 구한 이가 있고, 그것에 응답하신 이가 있고, 그리고 응답하시는 이가 보내시는 이가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여기에서도 권세를 주시는 이와 받는 이가 각각 다른 존재로 묘사되고 있고, 세례를 줄 때에도 아버지, 아들, 성령을 구분하여 언급하고 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6-7)”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고 예수님에게서도 보내심을 받는다. 결코 동일인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근접된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은 ‘3인격체’ 즉 ‘구별된 3위’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함께 호칭할 때에 “세 하나님”이나 “삼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삼위라 함이 적절하다. 그것은 또한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숫자적 신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A.D 35년 니케아 회의에서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 아니라 ‘3 인격체’라는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공식적인 신조가 채택되었다. 이것이 3위일체에 대한 최초의 정통적 신조이다. 또한 이 신조를 기초로 만들어진 찬송이 9장 “거룩 거룩 거룩”이다. 

이제 ‘하나’라는 개념이 어떻게 쓰였는가를 살펴보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요 10:30)”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만약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의미로 하셨다면 너희가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이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셔야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셨다. 그러면 ‘하나’라는 말의 개념은 무엇인가?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모든 신의 속성이 똑같다는 의미이다. 즉 본질에 있어서 하나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로 ‘하나’라는 표현이 사용된 증거가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우리가 왜 자꾸 ‘숫자적으로 하나이다’라고 고집하는가 하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신성과 그 사역에 대한 보호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는 이론이 우리에게 단일신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단일신론이라는 것은 숫자적으로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단이다. 단일신론은 역사적으로 양자론과 양태론으로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양자론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성령을 보내셨으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셨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인간 중에서 독특하게 불러내셔서 아들을 삼으신 자로서 인간이로되 인간을 초월한 자”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신이 아니었고 인간이었는데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그의 영을 받아 우리가 앞으로 완성될 모습으로 변한 신 같은 인간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사람으로 오신 것, 이 둘 중 하나라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고 말한다. 

또 단일신론은 양태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양태론이란 한 분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신약시대에는 성자 예수님, 현 교회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오해가 있다. 이것 역시 또 다른 양태론에 대한 설명이다. 태양은 하나이지만 빛이 있고, 열이 있고, 태양 그 자체가 있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오해를 야기시킨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각 1/3이 되어 3분이 모두 모여야 하나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3위 하나님은 각각 홀로 완전하시며 부족함이 없으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등하게 권위가 있으시며, 전능하시며, 사랑이시고, 거룩하시다. 이것이 왜 이해가 안 되는가 하면 인간의 이해와 깊이를 넘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3위 하나님이 각각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3위의 하나님은각기 구별된 존재이시며, 3위 하나님이 각각 동일한 경배의 대상이시며, 동일한 찬송의 대상이시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명령이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의미로 3위일체란 3인격체이신데 그 본질에 있어서 우열의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부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은 없으되 가정을 남편이 대표하는 것처럼 질서상 1위, 2위, 3위가 있을 뿐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다.

3위일체는 신비 중의 신비요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는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한 근접된 설명을 시도하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의 신성과 인격이 모호한 것이 그 동안 성령운동에 나타난 시행착오들의 근본적 이유였기 때문이다. 결국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모아야 할 신비는 숫자적으로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냐?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독립된 개체인데 본질이 동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숫자적으로 하나인 본질을 삼위가 공유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별된 삼위의 본질이 어떻게 차이가 없이 동일하냐의 신비인 것이다. 

 

2강. 불로써의 세례(롬 6:3-8)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12)”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말씀하시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자신을 말씀하고 있다.

세례란 과연 무엇인가? 세례란 동일화, 동질화(idenfication)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세례 받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 영광을 잠시 보류하시고 죄인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죄는 없으신데 죄인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과 등등시 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원래 우리 인간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케 하는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물세례 아래 친히 들어가심으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인간들과 동등한 위치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표하여 그 죄를 한 몸에 지고 돌아가셔야 우리 인류의 죄가 속죄되는 것이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시고 인간과 동등시 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의미로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바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물어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7,38)”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물 세례에 동참하심으로 죄인과 동일시 되었듯이,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길에 ‘동참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분과 동일시 됨으로써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역시 부활할 것이다. 이 시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세례란 우리를 누구와 연합시켜 어떤 자리로 통과시키는가의 방법이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21)” 

물은 모든 육체를 그 아래 삼켜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배만은 유일하게 물이 없으면 뜨지 못한다. 이와 같이 물은 어떤 것에는 사망을 초래하고 어떤 것에는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 자체로서는 물로 인해서는 그 아래 삼켜져서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배 안에 있자 물 위로 뜨게 된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배 때문에 뜨게 되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는 홍해가 있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여기에서 모세는 유일하게 홍해를 건널 수 있는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스라엘 족속이 모세와 합하여 건너면 무사히 홍해를 건널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이란 물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이다. 불은 우리 모두를 심판 아래, 사망과 멸망아래 가두게 하는 역할을 한다. 불은 태우는 것, 즉 가치 없는 것을 태우고 생명 아닌 것을 소멸시키는 심판을 말한다. 불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물이 물 위에 뜰 수 없는 것을 그 아래 삼켜 가두는 것과 같은 부분을 설명한다. 물은 뜰 수 없는 것을 가두는 것 외에 다른 한편 배를 띄운다. 물이 가두면서 또 배를 띄우듯이 동일한 역할을 성령이 감당하신다. 세례를 줌으로써 우리가 나 자신은 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을 자, 심판을 받을 자들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물로 말미암아 그것 위에 뜰 것을,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분리된 자들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주시는 ‘성령과 불’ 세례는 불에 타버릴 것들로 불로 태워 없이 하고 성령 안에 들어가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로서의 그 일이 신앙고백적으로 동참하는 자임을 하나님께서 인치시며 또 우리에게 신앙고백으로 요구하시는 세례인 것이다.

그러면 성령은 물이 방주를 띄운 것과 같은 그런 역할을 어떻게 요구하는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9-10)”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성령이 계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둘이 연합이 되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과 우리가 연합하면 나는 혹시 죄, 저주, 사망 아래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성령은 절대로 그러실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저주로부터 꺼내실 보증으로 와 계신 것이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이 밖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내가 예수를 믿으며 주라 시인하여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밖에 확인이 안 되는 이런 의미의 성령의 내주가 바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성령세례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성령을 죄와 사망으로 묶을 수 없다.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시면 그와 동일시 된 우리 역시 죄와 사망으로 묶을 방법이 없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러 오셨고 또 그 일을 이루셔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으므로 가능케 되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가 죄 범한 연약한 존재, 죽을 육체로되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우리도 또한 살리실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일차적인 성령세례라 한다. 

 

 

 

제 3 강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행 2:1-4)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위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아직 저희에게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고 했고,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신다. 그러나 실제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순절에 이르러서이다.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며 신자들에게 임하신 것이 하필 이면 오순절이었을까? 오늘은 오순절의 의미와 그날에 성령강림의 의미를 살펴보자. 오순절은 성경에 의하면 ‘칠칠절’ 또는 ‘맥추절’이라고 한다. 칠칠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유월절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나기 때문이다. 맥추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가 보리 추수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달력에 의하면 정월이 우리의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이다. 이달을 아빕월이라고 한다. 유월절은 4월 첫주쯤이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5월 말이 된다. 오순절이라는 것은 안식일에서 그 개념이 나온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출 34:22)”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하여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레 23:15,16)”

우리나라에서 “순”은 열흘의 개념이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실 성경은 오십일 보다는 칠칠절, 일곱 안식일. 안식일 자체가 7일이므로 그것을 일곱 번 합하여 칠칠절, 이것에 훨씬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안식일을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날 수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쉰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레 되는 날 쉼으로써 앞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서 온 천하만물을 만들었다는 신앙고백을 형식화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부부 중에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고, 아내는 신자의 상징이 된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이다. 구약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그 다음에 여자를 지으셨다는 순서상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성경의 질서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만든 창조주라는 신앙의 고백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럼으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여기 안식일의 개념 속에는 우리를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 첨가되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너와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2-13)”

 

여기에서는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 말한다. ‘거룩’하다는 성경의 원뜻은 ‘구별한다’는 것이다. 이 구별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에서의 구별이다.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의 안식일의 개념이 여기서 나오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치 않아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안식에 관한 것은 사람이 조건을 갖추어 들어오는 것이기 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려고 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말하여 주는 말이다. 안식이 언제 이루어졌는가 하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이다. 바로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태초에 이미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안식일을 지킴으로 일상의 규칙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거룩케 하는 하나님,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해낸 하나님인 것을 즐거워 하는 절기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의 결과를 감사하며, 즐기며 돌아보는 절기로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얻는 절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8-9)”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꺼내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즉 가나안 땅을 안식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설명하셨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쟁이었다. 즉 이런 일들은 다 장래 일의 그림자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 지금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 안식에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그 구원을 얻고 완성된 안식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안식을 누리기보다는 전쟁이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자 전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과 결별하여 늘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우리도 늘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간 것에 있어서, 만약 지리적으로, 사건적으로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었다면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안식일을 계속 지킨 것을 보면 그곳이 목적한 땅이거나, 목적된 장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상징일 뿐이다. 애굽이 아닌 곳, 종 되었던 곳이 아니라 자유민이 되는 것으로의 어떤 상징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가 있는 정도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가 내 안에 와 계신 정도이며, 약속된 나라를 소유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침을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이야기는 없고 늘 싸우는 이야기 밖에 없다. 

안식일을 지키라 명령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우리에게 준 약속을 절기화 하며, 의식화 규칙화 하신다.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죄와 악과 더러움과 부패함에서 꺼내어 안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 즉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이 더욱 강조된 것이 희년이다. 

희년과 오순절의 개념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안식일을 확대한 것이 안식년이다. 안식년을 더 확대한 절기가 희년이다. 희년은 안식년을 일곱번 반복한 49년 다음 해인 50년째를 말한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되돌아 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레 25:8-12)”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사고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제비를 뽑아 전부 땅을 나누어 주었다. 설혹 땅을 팔았다 하더라도 희년에는 반드시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다. 땅이 있다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기업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외인이 되고 타락해서 이방인이 되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 기업이 없고 소망 없는 자인데 영원한 처소를 다시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땅을 판자가 다시 돌려 받는데 있어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희년에는 무조건 아무런 대가 없이 돌려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규례와 절기로 반드시 지키도록 하셨다. 규례를 지킴은 이미 있었던 것을 추억하게 하는 의식이지 그 규례를 지킴으로 약속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도 규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앞에서 한 것들이 아직 상징이었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적으로 실제로 죄와 사망의 종 되었던 곳에서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 삼을 일이 상징화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다. 

노예로 부렸어도 희년에는 놓아주어야 한다. 만일 그가 속하여 돈을 내려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희년까지를 계산하여야 한다. 희년은 종이 풀리는 때이고 기업을 회복하는 때이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배반하고 죄 가운데 빠진 모두를 회복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 표현을 ‘종 되었던 것’과 ‘종에서 자유를 얻는 것’ 으로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성령님이 오순절에 오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어떻게 친히 죄와 사망의 종에서 꺼내셨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종 노릇 하던 곳에서부터 꺼냄을 받았다는 것이 어떻게 증명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던 우리에게 성령님이 오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제 4 강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세지(요엘 2:28-32)

 

신약시대의 여러 특징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을 부어 주신다고 하는 점이다. 신약시대와 구약시대는 약속된 것이 이루어진 것,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분기점으로 나뉘어 진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 맥추절, 칠칠절 등 절기로써도 요구하시고 강조하신 것과 같이, 그가 이루시려는 구원사역은 이제 오순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일로 완성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이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창 6:1-3)”

우리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영적으로 사망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내 신을 부어 주겠다’는 말씀은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신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존재들로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이 높아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를 뵐 거룩과 순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를 볼 수 있고 함께 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성령님이 오순절에 강림하셨다. 오순절이라는 절기를 주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성령님이 그날에 임하게 하시므로, 오순절이 갖는 의미와 동일한 성령의 임하심, 즉 구원의 사역이 하나님 쪽에서 전적으로 하신 일이요 우리 쪽의 일과 결과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신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유이다. 

이번에는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 그 자체가 갖는 효과 즉 성령의 객관적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보지 못함이요(요 16:7-1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사오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그가 오신 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증거가 된다. 요 14:16의 표현의 초점은 성령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는 증거가 되는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며(요 1:10-11)”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세상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예수의 부활하심, 성령이 오심 그 자체가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이 잘못임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8-10)”

신성모독 죄로 못박아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은 세상이 잘못했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무슨 말인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이름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면 돌을 버린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종교적인 죄목으로 그것도 신성모독죄를 걸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면 결국 세상이 틀렸다는 말이 된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가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그 존귀와 영광의 보좌에 가셔서 성령을 보내셨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 세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오셨으며, 실제로 그가 계신 것,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분이 그의 약속에 따라 일을 하셨으며, 또 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기뻐해야 한다. 성령강림은 개인적 신자가 갖는 주관적 체험의 문제로써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성령이 오신 그 일, 그 자체의 객관적 증거로도 우리에게 이미 커다란 경계가 되며, 힘이 되며 각성해야 되는 표인 것이다. 

 

 

제 5 강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고전 12:12-13)

 

신약시대와 구약시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에 의하여 구분된다. 요한복음 1:33을 보면 세례 요한까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시대이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는 신약시대로 구분됨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에게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세례 요한에 의해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특징은 성령의 세례를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여기서 ‘성령 세례’라고 할 때에 그것은 우리를 성령이 붙잡아서 어떤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또 성령세례가 우리가 성령에게로 가는 세례라면 다른 분에 의해서 다른 장소에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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