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3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3학기

제목선교학2022-07-13 16:23
작성자 Level 10

선교학

 

 

 

선교와 신학교

 

 

 

여는 글 : 신학교육의 중요성과 그 문제점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는 신학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 오늘과 내일의 교회사역과 선교는 오늘의 신학교가 어떤 교역자와 선교사를 배출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의 한국 신학교육이 그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이 점에 있어 오늘의 신학교육은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 신학교가 난립하여 있으며 그 교육 수준이 낮다-교육의 수준문제, 

 

(2) 신학교의 교육 이념이 불확실하다-신학교육의 목적문제, 

 

(3) 신학교가 오늘의 교회 목회에 적합한 사역자나 선교사를 배출하고 있지 못하다- 교수의 자질과 커리큐럼의 문제. 

 

(4) 시설 및 학교 재정의 빈곤-재정문제. 

 

(5) 교회와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교회와의 협력 문제. 

 

오늘 우리들이 모여서 토의함으로 이런 모든 문제가 다루어지리라고 기대한다. 토론을 돕기 위하여 원칙적인 몇 가지를 제외하고자 한다. 

 

 

 

I. 교역자 양성을 위한 교육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1. 신학교와 신학생은 많을수록 좋다.

 

어떤 이들은 오늘의 한국 신학교육에 있어서 문제는 신학교와 신학교에서 배출하는 신학생(전도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교회가 배출되는 신학생 모두를 수용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총신대 박 학장의 발표에 의하면, 지금 한국에는 문교부로부터 인가받은 학교가 50개교요,무인가 신학교가 270개가 된다. 해마다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신학생의 수는 무려 6.500명이나 되며 그 중 학력 인정교에서 배출되는 졸업생은 불과 1,500명 가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신학교나 신학생의 숫자가 많다는 그 자체가 문제라고는 보고 싶지 않다. 선교학적으로 생각할 때에 우리는 신학생 배출을 현재 교회의 수요공급의 원칙에서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교회는 일꾼이 나가 사역함으로 설립되고 확장되어 나가기 마련이다. 신학생의 증가는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더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교육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신학적으로 훈련시켜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여 모든 족속을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신학자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그가 최근에 쓴 글2)에서 지적하기를 앞으로는 더욱더 교역자와 평신도가 더불어 지도층을 형성하고 함께 일하는 시대가 온다고 예견했다. 교회가 세계선교라는 그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는 평신도, 곧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훈련하고 동원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러므로 평신도 교육을 포함하는 신학교육은 여전히 각 계층에 요망된다고 본다. 이에 어찌 신학교가 많다고 걱정하며 그 수를 줄여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문제는 신학교육은 모두 교역자(Fulltime Minister or Pastor) 만을 위한 것이라는 개념이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수준 등 기타 모든 면에서 단일화하라는 소리도 무리라고 생각한다. 

 

 

 

2. 목사나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은 대학원 수준이라야 한다.

 

공통적인 요청이 있다면 신학교육의 수준을 높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특별히 목사나 선교사(Full Time Minister)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은 대학원 수준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대학 학부(Undergraduate)수준에서의 실시하여 오던 교역자 양성 프로그램은 대학원(Graduate)수준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일반 사회의 교육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이는 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현재 우리나라 대학 재학생이 74만 명 정도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인구는 매년 20만 명 이상 누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아가면 2000년대에는 고등학력 인구가 1,100만을 상회할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전국민의 20%을 넘는 숫자로써 도시 지역에는 적어도 60-70%이상이 될 것이다. 

 

 

 

2) 이런 추세로 나가면 2000년대에는 교회에서 일하는 평신도 임직원이 대부분이 대학 졸업자가 될 것이다. 이에 그들의 지도자가 될 목회자는 모름지기 그들의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타 문화권에서의 사역할 선교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타 문화권에 사역하는 선교사는 그 지역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게 될 경우가 많을 것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3) 그보다도 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자체에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신학교육은 대학원 수준의 교육이 바람직하다. 일찍이 미국에서 신학교육의 기초를 대학졸업 후 3년 과정의 신학석사(Master Divinity)과정에 두고 있으며,유럽 여러 나라의 신학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얻은 자 중에서 교역에 종사코자 하는 자를 2년 정도의 특별교육을 받은 후 교역에 임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도 신학대학원을 지원하는 대학 졸업자의 수가 많은 점을 감안할 때, 교역자 양성의 중심을 대학에서 대학원 수준으로 올릴 때가 이미 도래했다고 생각된다. 이미 상당 수의 교회(교단) 가 목사 안수의 기초교육을 신학대학원 졸업으로 하고 있는 실정은 이의타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II. 신학교육의 목적이 확실하여야 한다.

 

1. 오늘의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긴장

 

오늘의 신학교육에 있어 크게 거론되는 문제는 오늘의 신학교가 교회가 바라는 목회자나 선교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선 신학교육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신학교육을 시행하고 있느냐 하는 기본적인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신학교들 간에 상반되는 긴장이 있어 왔음을 우리는 안다 루엘하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에 있어서 신학교가 하나의 신학을 배우는 센터가 되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교역자를 훈련시키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냐의 논란이 극심해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 같다. 우리 가 신학교를 신학을 배우는 전당(center)으로 생각할 적에는 교회를 위한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라고 할 때, 그 신학교는 학문을 닦음으로 그 신앙을 지켜 나가게 해야 하는 책임을 약화시켜 나간다는 것을 염려하게 된다. 그렇다고 신학교가 이 두 가지를 다 하고자 할 때에는 신학교의 책임이 너무 과중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면에서 양면, 곧 교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것과 배움의 전당으로 한다는 두 가지 주장을 상호 연결시킨다는 것은 어렵고도 괴로운 작업 입니다.3) 

 

 

 

과거 오랫동안 신학교들이 이 문제 때문에 홍역을 겪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학교육에 있어서 이론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신학교육을 말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늘 학적인 추구(academic pursuit)에 머물러 가져오곤 했다. 그리하여 신학교육이 그 시대의 문제에 상관치 않고 문제들에게 완전히 고립된 교육을 해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시대의 문제들을 미숙한 대로 다루어 버리면서 존속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오늘에 있어서 생활의 여러 가지 면들이 신학에서는 등한시되어 왔다. 

 

 

 

어떤 때에는 학문적인 관심만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에 대한 관심도 때로는 초월하고 따라서 교회와 신학자, 특히 교회 평신도와 신학자들 간의 대화에 있어서 깊은 간격(gap)을 조성했다. 더 나아가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신학적인 혼돈과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상실함으로 인하여 당황하고 실패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린젤(Lindsell)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학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신학적인 방랑아(vagabondage)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들이 애당초 시작할 때 다짐했던 그 교리적 입장에 충실히 머물러 있는 학교가 거의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신학교들이 서로 부정하는 모순된 신학적 견해가 혼합된 추태를 보임으로 인해 학생들로 하여금 혼돈과 고민에 빠지게 하고 있다.4) 

 

 

 

다른 한편, 어떤 신학교들은 실제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또 하나의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의 관심과 생각은 오늘의 세상사에 있다. 즉 오늘의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관여하고 또 관심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사회복지 문제, 정치적 개혁,더 나아가서 사회혁명 등의 세계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걱정하고 있다 이들은 종종 기독교를 "교회 없는 기독교"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편 이에 대한 반발로써 어떤 사람들은 신학교육이란 단지 어떤 교회에서나 한 교파에서의 사역을 준비시키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의 진리와 신학교육을 제한하고 마침내 선교의 한계도 제약(restrict)한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신학교들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2. 복음주의 신학교의 사명과 역할

 

복음주의 신학교(Confessional School of Theology)란 역사적 기독교 시상에 굳건히 서서 그것을 지키려는 학교로서 늘 그 영적인 유산을 살려나가려고 애쓰는 교육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주의 신학교는 그 영적인 유산을 오늘의 시대를 위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하며 세상과의 대화에서 이런 생생한 영적 요소들의 의의를 증거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은 학생들이나 교회가 신학적 불확실의 바다에 빠져 신앙생활의 다이나믹을 상실하고 마침내는 신앙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복음주의적 신학교는 교회를 중요시 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향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유일한 도구(the instrument)이다. 이런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학교란 교회의 일부이지 결코 신학교가 교회와 완전히 격리되어있는 기관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신학교육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 믿음 안에서 훈련시키는 책임을 담당하고 있는 기관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신학교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육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예배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community)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교는 교수나 학생이 다 마찬가지로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원숙하게 성장해 가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복음주의 신학교에서의 도전과 반성

 

최근에 이르러서는 애초 복음주의 신학교로 출발한 학교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우리가 이해하기는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교는 교역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교회가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를 시작할 때에 그 나름대로의 신학적 정체성(its own theological identity)이 있었다. 그러나 교육 기관이 근대(비판적이요 과학적인) 시대에 돌입하면서 이런 신학교들은 자유주의에 의한 도전을 받아 적지 않은 신학교들이 자유주의 신학교로 변질된 것을 본다. 그리고 이들은 신학 함에 있어서 개방적이라고 자처하며 마치 자기들이 발전한 것처럼 말한다.(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개방적 자세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보다 폐쇄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운 신학사상에 대해서는 아주 개방적이지만 보수적 입장에 대해서는 아주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자유주의적 근본주의 사고(Liberal oriented fundamentalist mentality)라고 부르고 싶다. 이리하여 이들은 학문의 자유(Liberalism)라는 명분을 내세워 지금까지의 전통적 교리를 재해석한다 하며 역사적 교리를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거나 도는 파괴하고 있다. 

 

 

 

그들의 학문추구는 학문을 추구로 전락한다면 이리하여 교회에 절충주의 또는 신학적 다윈주의(Theological Pluralism)를 자랑스럽게 도입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것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신학교육으로서는 실패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교역자가 목회에는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5) 이점에 있어 한국의 신학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아니,보수신학교라고 하는 곳에도 보이지 않게 이런 경향에서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에 필자는 최근에 오덴이 쓴 책6)과 그의 말을 소개하고 싶다. 이 책에서 오덴 박사는 근래의 신학에서 비판적인 근대주의적 접근 방법이 어떻게 신앙의 손실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또 교회에 생산적인 결과보다는 좌절(frustration)을 가져오게 했는지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비판적인 접근이라는 것이 우선 전통적인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교리와 전통을 현대인의 사고에 맞도록 재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에서 결국 신학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런 방법은 초대 교회의 신학자들, 즉 호교가들(Apologists)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호하고 교회에서 그 주어진 진리를 고수하려고 노력한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오덴 박사는 강조한다. "텍스트에 머물라! 원 텍스트에 귀를 기울이라...성경을 상고하라. 그리고 초대교회의 전통,종교개혁자들의 텍스트 위에서 신학을 개진하라. 그리고 이 신학 테스트들은 성경을 거룩한 경전으로 믿으며 전통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에서 읽도록 하여야 한다."이런 권고는 오덴 자신이 오랫동안 불트만 학파, 심층심리학,행동주의 등등에 심취되어 학문하며 방황하다가 전통적인 신학의 캠프로 홈커밍(home coming)하면서 한 말이다. 

 

 

 

이런 오덴의 말은 그냥 흘러보내서는 안될 것이다. 오덴박사의 비판과 제언은 오늘의 복음의 사학 캠퍼스에서도 한번 깊이 새김질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요즈음 복음주의 신학교 캠퍼스에서도 가끔 돌아다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 1학년에 들어 올 때는 "목사"인데 2학년이 되면 '장로가'되고 3학년이 되면 '집사'가 되고 4학년이 되면 '평신도'의 신앙이 되고 만다. "그러면 졸업할 때의 그 신앙은 어떤 것일까? 

 

 

 

오덴 박사는 이어 말한다. "신학은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방법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옛 방법,우리가 잘 아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되어져야 한다. 근대 비판적 신학교육은 이미 시대적 폐물(already way out of date)이 되었고 그들의 과격한 신학의 주장(약속)이 가져오는 것은 권태증과 근대주의 온갖 아이디어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하면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기회에 모든 신학자가 자신들의 신학 하는 자세와 방법에 있어 과감히 반성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신학 하는 분위기(Contexts)가 초대교회의 공동체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바꿔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다의 물고기는 바다 물에서만 생기는 것과 같다. 이럴 때만이 오늘의 복음주의 신학교육이 교회에 도움을 주며 애초에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신교육은 커리큐럼이나 학생회 훈련 모든 면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특히 세가지 분야,곧 영적인 훈련, 학적인 훈련, 그리고 실천적인 훈련을 적절하게 시행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III. 복음주의 신학교의 교육목표

 

1. 신학교육에서의 통합적 훈련의 필요

 

하나의 효율적인 신학교육은 학문적인,실천적인 그리고 영적인 교육에 철저를 기하는 것뿐 아니라, 이 세 분야가 피차간 건전한 조화를 잃지 않고 온전한 수준에 이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면 이 조화 있는 성취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것이 오늘의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큰 문제로 대두된다. 왜냐하면 신학 훈련을 위한 신학교의 수학기간이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요구는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위적인 비유를 든다면 과거에는 신학의 파이(pie) 가 세가지로, 즉 성서적인 연구(성서신학),이론적인 연구(이론신학),그리고 역사적인 연구(역사신학)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세가지가 신학교의 교과과정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것이 보다 적응성을 갖기 위해서는 신학교육이 그 외에 많은 분야의 프로그램들을 추가해야만 하게 되어졌다. 곧 인격을 성숙케 하기 위한 영성 훈련과 실제 교역에 능숙하게 하기 위한 실천적 훈련 등,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된다. 이렇게 된다면 과거 학문적인 추구에 집중되어 있던 수학기간이 굉장히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요구되는 그 많은 과목들을 어떻게 조화 있게 배정하고 제한된 기간에 적절하게 교육할 것인가? 여기에 우리는 하나의 큰 어려움을 안게 된다. 신학교가 실천적 훈련에 주력하면 결국은 성서신학, 이론신학 같은 학문적인 교육을 위한 시간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 문제는 신학교의 학제,곧 신학교육의 수학 년 한 문제,그리고 커리큐럼의 구성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들이 다음 시간에 따로 심도 있게 다루어질 것이지만)여기에서 필자는 이 어려움을 경감하며 신학교육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말한 세 분야를 통합하여 교육할 필요를 주장하면서 다음의 몇 가지를 제의하고자 한다. 

 

 

 

2.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에서의 교육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신학교육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분위기와 공동체에 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신학교육이란 전인간 (whole man)을 위한 교육이기에 그가 생각이나 행위나 느낌에 있어서 늘 성령의 영감에 호응하는 사람이 되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청지기가 되도록 훈련하는데 있다. 일반세상 교육에서도 사회 공동체(community)의 요구를 중요시하고 있듯이 신학교육에 있어서도 영적인 훈련과 아울러 공동체를 위한 교육도 매우 중요하다고 느낀다. 어떤 신학 교육자는 말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사람 형성에 있어서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community)이다... 곧,함께 살며, 생활하며, 먹으며, 그리고 함께 기도하면서 신학생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선교의 열심과 형제우애를 가지고 어떻게 함께 생활할 수 있는가를 실제로 배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의 채플, 교직원 기도회 학생 수양회같은 프로그램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신학교는 일주일에 2회에 채플을 갖고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참여케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채플에는 교직원도 모두 참여케 하여야 한다. 신학생에게는 한 학년,적어도 한 학기만이라도 생활관에 입사하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영성훈련을 받게 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곳에서 그들은 함께 먹고, 자며, 매일 새벽기도회를 하며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또한 교목실을 설치하고 학생들의 그룹별 성경공부,기도모임 등을 통하여 제자화 운동을 전개하여 모든 학생을 제자화하는 작업과 함께 2E-O전도도 시행하여야 한다고 본다. 건축가가 집을 세워나가다가 기초가 허술한 것을 발견하면 그 기초 수리를 먼저하고 집을 세워나가야 하는 것 같이,신학생 가운데 아직도 신학 공부할 "기초"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기초를 갖게 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여기에 신학교 교수는 실제로는 이중적 사명,곧 전도자와 가르치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신학대학의 캠퍼스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는 우선 모든 신학생이 거듭난 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견지에서 신학교는 일년에 춘추 2회에 걸쳐 심령 부흥회를 갖기를 권한다. 이는 모든 학생이 거듭나는 체험을 갖게 하며 아울러 성결한 생활로 나가도록 인도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영적인 공동체-교육이란 외형적인 방법이나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에 참여하는 교수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서 학생들을 지도할 줄 알 때에만,이 일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교수들의 자질문제가 아주 중요하다. 오늘날 대학의 교수라면 의례히 박사라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학적인 성취가 늘 신앙적 성숙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교수와 직원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을 돌보고 일년에 두 차례 매 학기마다 교직원을 위한 교수회를 가지며 교직원의 친목 도모 뿐 아니라 심령부흥과 사명감을 새롭게 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3.세계선교를 지표로 하는 현장 사역에서의 교육

 

론데스(Lowndes)는 이 모든 것을 종합시키는 장으로써 현장실습(Field work)을 제안한다.8) 현장실습이 그들이 신학교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로 배운 것을 한번 종합하면서 봉사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런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교수와 목회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생들이 목회실습 프로그램을 할 수 있다면 학생들은 교실에서 배운 내용이나 거기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세상의 생활 속에 있는 문제들과 접촉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배운 이론과 지식으로 현실과 부딪쳐 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교실과 교수와 동료 학생들에게 돌아와서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승리와 실패를 나누게 된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적으로 추궁하던 모든 것을 이제는 땅을 딛고 함께 걸어가는 교육으로 향상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6-8학점의 목회실습을 이수하도록 하여야 한다.일주일에 한번씩 그룹별로 학생들이 교수와 만나 사역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을 함께 토의한다. 이런 목회실습을 통하여 보다 종합된 신학교육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하여는 보다 적극적인 현지 목회자의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장 사역이라는 것은 교회 목회와의 연관만이 아니다.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는 캠퍼스가 바로 사역현장이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신학교육은 사역(전도)하는 큰 텍스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신학을 가르치실 때에 상황이요,바울 사도가 신학을 개진할 때의 상황이 아니었던가?여기에 신학교에서는 전도를 가르칠 뿐 아니라 캠퍼스에서 실제로 전도를 하는 일을 힘쓰게 하여야 한다. 모든 학생들에게 필수과목으로 "전도의 이론과 실제"라는 과목을 이수케 하며, 실제로 학생들이 전도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이는 전도폭발,전도요원 양성과 같은 프로그램을 병행함으로써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실제 참여와 더불어,신학교육의 교과과정은 "세계복음화"라는 예수님의 대부분에 그 지표(Lodestar)를 두고 편성되고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학교에서는 선교과목이 필수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의 해외선교여행 등, 선교활동을 권장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위하여 신학교육이 설립되었다면 교회의 본질적 사명완수가 그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모든 족속을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대 분부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교육기관이 개교회의 개척과 그 교단의 교역자양성9)에 그 목적을 두었다면 이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세계선교라는 맥락에서보다는 개교단 확장에 급급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신학교육은 교회가 세계선교의 주요한 기관(Agent)임을 인식하는 가운데 우선적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세계선교 대 분부가 신학교육의 지표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앞으로의 세계선교의 한국교회 주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세계교회의 중심과 지도력은 한국교회와 같은 제3세계로 옮겨지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한 신학교육에서는 주님의 세계선교의 대 분부가 신학교육의 지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개교회의 개척,성장도 세계선교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Kaiser 박사가 말했듯이 신학교육에서 "세계선교라는 지표(lodestar)를 잃는다면 그 신학교육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10) 

 

 

 

4. 신학교육이 세계선교를 그 지표로 세운다면 이에 뒤따라야 할 과제가 있게 마련이다.

 

a) 첫째로, 신학교육 과정에 "선교학"에 관련된 과목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신학교육에서는 교회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순 학문적 방법(Academic Approach)이 그 우위를 차지한 실정인 것 같다. 때문에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을 신학교육의 중심으로 회복하기 위하여는 최소한도 "선교학"과목이 필수과목으로 설정되어 선교의 본질,역사,사명 등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한국의 신학대학 가운데 '선교학'을 필수로 하는 학교는 한 둘에 불과하다).이 과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과목들은 중진교수들에 의하여 강의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b) 더 나아가 "선교학부"를 독립시켜 선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거나 선교대학원 (School of Mission)을 세우는 일을 권장할 만하다. 

 

 

 

c) 신학교육은 교과과정에 의한 교실에서의 강의로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신학교육은 교회와 신학교육이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보완되어야 한다.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 신학교육을 학생들의 공동체의 생활과 과외 학생 활동으로써 선교운동에 접하고 참여하는 훈련을 따라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1. 선교사들을 통한 선교 상황에서의 접촉 

 

2.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회 

 

3. 단기선교활동 참여(국내외) 등 

 

 

 

5. 교회와 함께하는 신학교육

 

위의 프로그램을 성취함에 있어서 그 외 여러 가지 제안이 있겠으나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학교육은 교회 목회자들과 협력하여 이행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학교 측에서의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아니 그에 앞서 교회의 이해와 협력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 백성을 신학적으로 교육시키는 신학교육 자체가 교회가 시행해야 할 과제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신학생 후보를 가르는 것은 개교회가 아닌가? 그런 신자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에도 그들을 개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양육을 계속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교회가 "신학생"을 교육한다고 인식하고 지도하게 되면 오늘의 신학교육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또한,신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교단이 인정하는 교역자가 되기까지는 지방회 또는 노회에 소속되어 목사 후보생의 훈련을 받게 되어 있는데, 이 기간이 명실공히 교역자 양성 기간으로 연장, 활용되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신학교는 이런 것들을 활용하여 교회와 보다 밀접하게 신학생을 교육시켜야 한다.이렇게 할 때에 신학교육이 단순한 아카데미즘에 빠지지 않고 "교역자"를 교육시키는 과업을 효율적으로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교회의 신학교육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되어질 때에는 교회는 신학교육에 대한 재정지원도 성의껏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오늘의 신학교가 당면하고 있는 재정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맺는 말

 

위에서 말씀 드린 것은 교역자(특히 목사와 선교사)양성을 위하여 보다 적절한 신학교육을 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일 뿐임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바라는 이상적 목표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요원하다. 신학교육의 문제와 딜레마는 아직도 미해결인 채로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다. 이것이 곧 신학교육의 출발점인 것을 상기할 때 우리는 이 과업을 위하여 감히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신학교의 졸업 때 쯤이면 우리가 종종 느끼게 되는 실망감에도 불구하고 이들 졸업생들이 2,3학년 후에는 개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음을 때때로 발견하고는 격려를 받게 된다. 우리의 가르친 바 교육이 완전히 성취되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하나님의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그리고 오늘의 신학교육을 통하여서 하나님 자신이 역사하고 계신다. 이것이 곧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우리의 희망인 것이다.  

 

 

 

 

 

방송선교전략

 

 

 

I.AD 2000 Movement

 

이 운동은 주후 2000년까지 이 지구상의 모든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믿고 안 믿고의 결신은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맡기고 먼저 믿은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겸손하게 이에 임하자는 것이다. 토마스 왕 박사가 이 운동의 총재로 있고 1994년에 이 운동을 위한 대회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다. AD 2000년 Movement의 구체적인 전략은, 

 

(1) Adopt-A-People Movement(한 종족 양자 삼기 운동) 

 

지구상에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종족이 1,200이나 되는데 이들 한 종족씩을 양자로 삼자는 것이다. 

 

(2) One-Fifty Movement(오십 명에 한 선교사 파송 운동) 

 

교인 50명이 한 명씩의 해외선교사를 파송 하자는 것이다. (3) The World Literature Crusade(세계 전도문서 배포계획) 

 

2000년까지 지구상의 모든 가정에 그들의 언어로 된 구원과 성장에 관한 두 권의 책을 배포하자는 것이다. 

 

(4) New Life 2000(새 생명 2000운동) 

 

CCC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전도영화 [예수]상영과 NLTC(New Life Training Center)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5) Bold Mission Thrust 

 

남 침례교단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설립하는 복음전도를 중심으로 제자화와 복음화를 추진해 나가고 있다. 

 

(6) Charismatic Initiatives 

 

각 교단은 은사운동지도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7) Discipline A Whole Nation Movement (DAWN 은 모든 민족 제자화 운동) 

 

각 민족은 존 낙스('조국을 달라,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기도한 개혁자) 를 찾아내 그 민족을 복음화하는 운동,현재 과테말라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8) Mission 2000 

 

U.S. Center for World Mission 중심으로 세계 모든 종족들 속에 교회를 개척하는 운동. 여러 운동 가운데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세계의 방송선교기구들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The World by the year 2000이다. 

 

 

 

II. The World by the year 2000(약칭 WB 2000)

 

현재 지구상에는 5,445개의 종족언어(Heard Language)가 있는데 그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중요언어(Trade Language)는 276개로써 세계 인구의 97%가 이를 사용하고 있다. WB 2000은 주후 2000까지 이 276개 언어로 선교프로그램을 송출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 운동에는 세계의 다음 4대 선교방송 기구가 참여하고 있다. 

 

 

 

1. HCJB World Radio 

 

1931년 12월 25일에 방송을 시작한 세계 최 고참 선교방송기구이다. 에콰도르에 본부를 두고 중남미 일원 23개국에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두고 17개 중요 언어와 22개 종족언어로 선교프로그램을 송출하고 있다. 

 

 

 

2. FEBC(Far East Broadcasting Co.) 

 

1948년 마닐라에서 방송을 시작했다(1947년에 중국 상해에서 방송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국가 내전으로 철수함). 세계 32개국에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두고 북방 사회주의 국가들을 비롯하여 전세계의 2/3을 가청권으로 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선교방송이다(가정인구 15억,방송시간 1일 300시간, 방송언어 122개 총 종사자 979명 총출력 214kw)."방송으로 그리스도를 전세계에!"한국의 아세아방송과 극동방송의 FEBC의 자매기구들이다. 

 

 

 

3.TWR(Trans World Radio) 

 

1954년 모로코에서 출발해 현재 8개국 중파,15개 단파 채널로 세계 인구의 80%를 가청권으로 하고 있다. 세계 전역에 7개의 송신소와 24개국에 사무실과 스튜디오를 두고 80개가 넘는 언어로 1000시간의 방송을 하고 있다. 

 

 

 

4.ELWA(Eternal Living Wenning Africa) 

 

아프리카를 주요 대상지역으로 45개 언어로 1개 250시간씩 방송하고 있다. 1954년 방송을 시작했으며 Sudan Interio Mission 이 운영을 맡고 있다. 

 

1985년 가을 HCJB대표를 론 클라인,FEBC대표 로버트 보우번, TWR 대표 폴 프리드는 모임을 갖고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에게 라디오를 켜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교회의 책임 있는 일꾼이 되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헌신한다. 우리는 2000년까지 이 사명을 완수하기로 한다." 

 

 

 

이 성명이 WB 2000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들 4개 방송사는 1988년 11월 파나마 시에 공동사무실을 개설하고 방송대상지역 부족들의 생활과 언어 연구,불필요한 중복을 피하기 위한 역할 분담 등을 진행하고 있다. 1989년 2월 워싱턴에서 열린 종교방송인 대회(NRB)에서 그 동안의 사역을 점검하고 발전을 위한 결속을 다짐했다. 현재 복음방송은 170개의 언어로 송출하고 있는데 앞으로 106개의 새로운 언어로 복음프로그램을 개척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1) 새로운 송신소와 송신탑 건립 

 

(2) 새로운 스튜디오 건립 

 

(3) 각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방송 전문가 확보 

 

(4) 후원기지 설치 

 

등 여러 가지 해결되어야 한다. 

 

 

 

III. WB 2000과 한국교회

 

WB 2000에서 한국에 있는 극동방송.아세아방송은 15억의 북방지역 주민들에게 방송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극동방송.아세아방송은 이미 이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오고 있다. 중국과 소련의 교회를 부흥시키는데 극동방송.아세아방송이 얼마나 크게 기여 했는가 하는 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북한에 대한 집중적인 선교 방송 실시가 요청된다. 하나님께서는 버려지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위대한 도구인 라디오 방송을 준비하셨다. 이제 라디오를 통해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영혼들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이며 이것은 최대의 신앙부흥으로 연결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시야를 넓혀 AD 2000 Movement 나 World by 2000같은 세계적인 선교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이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 이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귀한 방송기관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에 동참하고 후원하는 일을 폭넓게 전개해야 할 것이다. * 방송을 통한 세계복음화 운동의 안목을 넓히기 위해 FEBC의 방송망을 여기 소개한다.  

 

 

 

 

 

특수선교(외항선교분야)

 

 

 

I. 선원선교의 역사적 배경

 

선원을 향한 전도활동의 효시는 예수께서 갈릴리 어부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시는 것에서 찾을 수 있으며, 사도행전에서 여러 번 언급한바 사도바울도 '배를 타고(행13:4,13, 16:11, 17:14, 18:18 20:13 21:1,2,6,7, 27:2)"지중해 연안도시들을 다니며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의 사역을 수행하였고 그의 사역 말기에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파선 위기의 선상에서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기록(행27:21-26)등을 볼 때에 바울도 충분히 선원선교의 개척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Dr.Roald Kverndal의 학위 논문"Seamen's Mission Their Origin and Early Growth"에 나타난 자료에 보면 1553년에 영국의 Merchants Adventurer 선박회사의 총재인 Sebastian Cabot 씨가 처음으로 선장들에게 영국의 법으로 제정된 공식 예배가 선상에서 매일 목사에 의해 인도되어져야 한다고 지시하였으며, 그 후에도 선원들에 대한 영적 책임을 중요시하는 선장들은 선상에서 신앙적인 모임을 가졌었고 항만에 정박해 있을 땐 종종 육상의 기독교인들을 초청하여 선상예배를 드리곤 했었다고 한다. 

 

 

 

해상교통 수단 밖에는 대륙에서 대륙으로 이동할 길이 없을 그 당시엔 선교사들도 선박을 이용하여 선교지로 떠났는데,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에 선원들은 종종 그들의 선교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선교사들이 선교지 에서 인내하고 수고한 사역의 결과로 원주민 개종자를 얻게 되면 소위 기독교 국가에서 오는 선원들의 부도덕한 행동에 의해서 선교결과에 타격을 받게 되었는데 선교사들에겐 이 선원들을 전도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의 크나큰 도전이기도 했던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국내 선교부(Home Mission는 항만도시의 슬럼가에서 희생되는 선원들을 발견하면서 선원선교의 자극을 받았고,1779년 해군을 위한 성서보급사역이 시작되면서 1800년대에 들어와 선원선교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1818년 런던에서 헌당된 "방주"라고 불리었던 "물에 뜬 교회(Floating Chapel 1822년에 인도 캘커타에서 설립된 "Bethel 협회" 1858년 영국 국교회에 의해서 창설된 "Mission to Seamen"에 이어 1840년대엔 감리교회도 자체교단 선원선교를 설립하였고, 미국대륙에서도 각 교파별로 서로 경쟁하듯이 선원을 위한 선교회가 창설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도 항구마다 Seamen's Mission을 설립하여 복음전파와 선원들의 영적 관리를 해왔다. 

 

 

 

II. 한국외항선교의 시작과 발전 그리고 결실

 

우리나라 선원선교역사는 그다지 길지 못하지만 그 설립 의미와 활동은 세계적으로 괄목할 만하다고 본다. 1973년 인천항이 현대적 갑문 시설이 완성되면서 국제항으로써 교역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당시 통계에 의하면 인천항을 찾는 외항선과 선원들의 수는 28개국에서 약 21.000명이나 드나들게 되었다. 선원들은 일반적으로 오랜 항해 끝에 지쳐있고, 가족과 고국을 떠나 고독함으로 방황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찾는 곳이 유흥가와 환락의 장소이다. 한국이 유흥의 나라, 부도덕한 나라로 세계에 알려진다는 것은 크나큰 수치요,기독교회가 이들을 방치하는 무책임한 자세로 있는다면 한국교회의 존재의 의미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직무유기의 죄가 되는지라 뜻있는 교계지도자들이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김의민 장로(예비역 장군)의 주선으로 시온감리교회 김 용련 목사와 김 학수 장로 등이 기도하는 중에 가칭 외항선 선교회설립 준비위원회를 갖기로 하고 그 해 1월 초에 인천에 내려와 당시 성산감리교회 담임인 최준옥 목사와 인천제일교회 원로목사인 이기혁 목사, 인천송도장로교회 이낙주 목사,당시 인천 기독교연합회 회장 김광식 목사들과 협의하여 인천지역목사들로 창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74년 7월 4일,인천성산감리교회에서 경인지역 목사,장로, 평신도들이 모여 창립총회를 열고 이사장에 이기혁목사,회장에 최준옥 목사,총무엔 김의민 장로, 협동총무엔 최기만 선교사를 임명하여 정식으로 외항선교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항만에 기항하는 국내의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기독교정신으로 봉사와 친교활동을 하며, 민간외교사절로써 국위를 선양하는 것을 선교회의 목적으로 삼아 선교 활동하는 중, 선교를 통한 교회 일치에 뜻을 둔 한국교계의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대거 동참하면서 외항선교사역은 국내외로 확산되어 갔다. 1976년 11월에 부산에,1981년 군상에 또는 동해,여수,여천에 국내 지부가 개설되었으며 해외엔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싱가포르, 자카르타,그리스의 아덴,터키의 이스탄불, 요코하마,북미주에 그 지부를 개설하고 선원들을 향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1991년 9월 현재까지 외항선교회의 선교팀이 방문 전도한 외국선박의 수는 13,868척이며,접촉한 선원수는 총 299,464명,그리고 결신한 선원은 23,356명이다. 결신한 선원들은 동 선교회의 7단계 선상성경공부교재와 양육서신에 의해서 제자화 되고 있으며, 양육프로그램은 서계 각 항구에서 사역하고 있는 복음주의 선원선교회와 서신 및 양육 네트워크(New-work)을 통해서 추적관리가 되고 있다. 특히 미국 타코마 선원선교기관에서는 세계 각처의 사역팀 들로부터 최근 접촉한 선원들의 신앙,인적 사항에 과난 정보를 입수하여 컴퓨터 처리 후에 다시 선박의 다음 행선지의 사역자 들에게 양육을 위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기독교인 선원이 승선해 있는 선박명과 선원의 이름과 그의 신앙상태,그리고 선상에서의 기도회나 성경공부모임의 여부 등을 기록하여 통제사무실로 보내면 그곳에서 이를 분류하여 정기적으로 배의 이동상항에 따른 선원들의 이동사항을 알려주는 것이다. 외항선교사역을 "물위에 씨를 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고,마치 인간 망 그물을 치듯이 전 세계적으로 치밀하게 연락망이 조직되어 있어 구원받은 영혼들이 유실되지 않도록 기독교인들이 선상에서의 영성 훈련을 지속하며 '물위의 교회' 성장하도록 그 양육관리에 각 항구의 선교사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III. 해외선교전략적인 면에서 본 외항선교사역

 

사도행전의 선교활동 진행과정을 세심하게 살펴보면 "항구에서부터 내륙으로" 옮겨가는 형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세계 기독교 선교역사도 항구 중심의 선교사역에 뒤이어 내지선교회(Inland Mission)들이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시대의 교통 수단에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겠지만,항구는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써 항구도시는 여러 종류의 국적,인종,직업 등에서 다양한 색채를 띠고 있는 복합적인 문화(Multi-Culture)를 형성한다.상업이 발달하면서 이해타산적인 사회로 성격화되고,안정된 농경사회와는 달리 역동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사회구조를 만든다.또한 변화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성(Receptivity)이 상대적으로 크다.도덕적으로는 타락과 환락의 요소들이 많아서 범죄도 많이 발생하는 곳이며, 미신과 우상숭배가 발달된 곳이 항구이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영적인 필요도가 큰 지역이다. 항구는 영적 전투도 치열한 반면,교회의 부흥도 크게 경험되는 곳이므로 선교활동이 역동적(Dynamic)이다. 

 

 

 

특히 한국은 지난 1988년 올림픽 이후로 국제적인 위상이 고조되고 교역이 활발해져서 국내의 국제항구는 물동량이 급증하게 되었으며 공산권국가들의 선박들도 빈번히 왕래하게 되었다. 최근에 소련,중국,유고슬라비아의 선원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북방선교의 전략적 위치로써의 중요성을 느끼며 사역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열도 80년대 후반부터 무척 뜨거워졌고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위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 경험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 우리나라 교회들이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선교기관의 경험에 의존해야만 했었다. 무한한 인적,물적,영적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 있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경험의 부족이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외항선교사역은 처음부터 해외선교를 하고자 하는 뜻있는 교회나 개인들에게 언제나 열려있는 사역의 장이었으며 한국교회의 선교 발전을 위한 한국교회의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해왔다. 

 

 

 

인천,부산,군산,동해,여수 등의 각 지부 사역을 지역교회들에게 항상 열어 놓고 교역자들,신학생,대학 청년부원들,교단연합기관,교회 각 기관들이 선교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면 언제나 외항선교 사역팀들과 함께 전도활동을 할 수 있도록 협력을 해오고 있다. 또한 좀더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젊은이들은 자원봉사자들(Volunteers)로 헌신하여 영어회화 및 전도 훈련을 통해 훈련 받으면서 사역을 지속해왔으며 그들 중의 대다수가 선교사로 훈련되어 해외 선교현장으로 파송되어 갔는데, 외항선교사역을 통해서 현재까지 파송 된 해외 선교사들의 총 수는 240명에 이르고 있다. 

 

 

 

국내 외항선교의 사역지는 회교,힌두교,불교,공산권 등의 이교도들에게 직접전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곳이며, 동시에 교회의 선교사후보생들이 실질적인 언어,문화적응,전도 등의 훈련을 받아 해외선교의 현장에서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선교훈련장이기도 하다. 해외선교사훈련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1987년에 설치한 한국외항선교회 부설기관인 "타 문화권 선교사훈련원"에서는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을 시키기 위해 커리큐럼을 만들고, 선교사 출신의 스탭진으로써 1년에 3학기 훈련을 실시하여 해외지부와 여타 사역지로 파송하고 있다. 

 

 

 

특히 1989년부터 실시해 오고 있는 유럽,중앙아시아,인도,필리핀 등지의 하계,동계 단기선교프로그램은 외항선교 해외지부설립에 대한 기초탐사,선교사후보생들의 헌신 재확인,타 문화권 전도 및 적응훈련 등의 다양한 목적을 갖고 3년째 진행되고 있는데, 이로 인한 결실로서는 다수의 결신자 들과 성경배포,양질의 선교사 발굴,선교현지의 선교기관 및 교회와의 사역우호관계증진 등의 유익을 얻고 있다. 특히 필리핀 외항선교회와는 1차 방문의 결과로 서로 사역교류가 이루어져 전도문서와 양육관리도 긴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외항선교회는 1974년 로잔대회와 1989년 마닐라 제2차 로잔대회가 견지하고 있는 복음주의 선교노선에 입각하여 순수한 복음전파와 사회적 관심을 조화한 전인구원사역(Holistic Ministry)을 선교의 정신으로 삼고, 1981년부터 World Concern, Africa Inland Mission, Indian Evangelical Mission, People International 등의 복음주의적 국제 선교기관과 협력하여 의사,간호사,사회사업가 등의 전문인 선교사들을 제3세계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파송하여 인술을 통한 복음전파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우간다의 김 정윤,박숙경 선교사,수단의 신영숙 선교사,케냐의 김옥실선교사,방글라데시의 박수일 선교사 가족 등을 병원사역, 간호원양성, 사회사업,고아원 운영 등을 통해 현지인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면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내륙선교의 실례가 되고 있다. 항구에서 시작된 외항선교는 이제 항구로부터 내륙까지 심지어는 몽골,소련,동구권의 여러 지역으로 그 선교사역의 범위를 확장시켜가고 있다. 

 

 

 

IV. 넘어야 할 장애물들

 

한국의 경제 사정이 날로 향상되고 있는 것과는 반비례적으로 선원들의 노동조건,임금 등이 타 직종에 비해 우월하지 못하게 되어짐으로써 한국선원들이 외항선을 타는 일은 현저하게 감소되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고급선원(선장,일등항해사 등)을 제회하고는 대우개선이 되지 않는 한,외항선에 승선하는 한국선원들의 수는 계속 감소될 것 같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선원들에 대한 관심도 다소 격감될 것 같고, 외항선 선원이라는 한정된 분야의 사람들에게 선교한다는 것에 대해서 지역교회들이 중요성을 부여할 것이겠는가 하는 것이 일종의 우려이기도 하다. 또한 항구에서 떨어진 내륙의 도시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겐 감각적으로 와 닿지 않는 사역이라 동참의 기회가 적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 한가지의 어려운 점은 항만 출입과 승선허가를 하는 일에서는 타국에 비해 일반적으로 통제가 심하여 지금까지는 매일 선박회사, 항만청,세관 등을 거쳐 허가를 얻어서 출입해 왔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갑자기 밤이나 아침 일찍이라도 배를 방문하고 선원들의 영적 관리를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때 전화 통화로만 안타깝게 상황을 맞이해야 할 경우가 있다. 상시 출입에 대한 허가를 내고자 하여도 선교기관에 대한 상시 출입발급 허가조항은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현재까지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아무런 사고와 사건 없이 선교사역을 수행해 왔다는 것이 외항선교의 또 하나의 간증이 되고 있으나 항만출입과 상시 승선에 대한 행정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보다 효과적인 사역이 될 것 같다. 

 

 

 

한가지 더 아쉬운 것이 있다면, 외국의 항구엔 입항하는 선원들이 교향 집처럼 찾아 드는 선원선교센타가 별개 건물로 되어 있어, 시설을 잘 갖춘 선교센터는 호텔방 같은 숙박시설,식당,휴게실,게임 룸,수영장,예배실 등을 갖춘 자체 건물이 있는가 하면 적어도 예배실,휴게실,상담실,국제전화,일상용품 매점 등의 간편한 시설은 갖추고 있는데, 이러한 시설을 갖춘 선교센타가 없다. 선교회 사무실로 지역교회 건물의 일부분을 사용허가를 받아 사용하거나 개인회사건물의 작은 방하나,때로는 선교동문의 아파트 방까지도 선교회 사무실로 사용하며 사역을 할 정도여서 선교회 사무실을 방문한 외국선원들에게 만족할 만한 시설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수준과 교회규모에 걸맞은 선원센타가 적어도 국내의 국제항에는 하나씩 건립되어져서 복음의 역수출 센타와 민간외교의 현장으로써 손색없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국선원의 수는 줄고 있다해도 반면에 동남아,동구권,소련,중국 등지에서는 선원들의 증가하고 있는데 저들을 향한 선교의 장으로써와 선교사훈련의 장으로써 외항선교는 충분히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무한한 사역지와 일군의 필요성 

 

 

 

International Christian Maritime Association(국제기독교선원선교협회)의 주소록에 명시된 세계 각처에서 선원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항구의 수는 900개로써 인천,부산,군산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외항선교회는 Korea International Seamen's Mission 이란 이름으로 1986년 ICMA에 정식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어 900여 개 어느 항구에 가던지 현지 선원선교기관과 협력하여 사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넓게 열려 있는 것이다. 항구를 중심으로 선원전도를 하는 사역형태이던지,또는 항구를 기점으로 내륙 선교 팀을 구성하여 현지인을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는 사역형태를 갖던지 무한한 선교의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전세계 2/3의 면적이 바다로 덮여 있고, 바다에 접해 있는 모든 도시는 외항선교의 사역기점이 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각 교단이나 각 선교기관들이 공히 느끼는 사실이지만 많은 일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넘치고 있으며, 헌금 액수가 놀랍도록 증가하며,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기도회가 많고 열정도 대단한데,일군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아이러니일 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 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태9:37-38)고 하신 그 명령의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고독하고, 상처입고,늘 위기의식을 경험하면서 육체적으로도 고된 생활을 살아가고 있는 선원들,이들이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목자 없는 양같이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어찌 선원들 뿐이랴.피곤하고 심신에 병들어 외롭게 버려진 영혼들이 이 땅과 전 세계에 흩어진 나락처럼 널려있는데 주님의 찾으시는 추숫군은 어디에 있는데,폭풍과 파도에 시달리다가 소원의 항구(Desired Harbor)를 찾아 드는 돛대 부러진 배같이 되어버린 인생들에게(5시편107:24-30)구원과 위로의 복음을 전해주는 사역을 주님 오실 때까지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주께서 보내주실 추숫군을 기다린다.  

 

 

 

선교의 성경적 근거

 

 

 

I.구약에서의 선교의 기초

 

선교 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흔히들 신약에서만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약의 주인공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때 우리는 쉽게 구약에서도 선교의 근거를 찾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독생자를 보낸 뒤에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엡1:4) 사랑하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을 통한 온 세계의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이다. Diaspora의 역사도 하나님의 선교 역사이다. 바울의 아덴 설교(행17)는 천지 창조의 하나님이 역사의 하나님이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 바로 구원과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이렇게 알지 못하신 신"을 섬기는 헬라인에게 신구약의 하나님을 알려줌으로써 바울은 선교의 접촉 점을 찾기를 시도하였다. 

 

 

 

1. 원시복음

 

"Mother Promise"로 알려진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신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난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Johannes Blauw가 지적한 대로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창세기의 1장에서의 11장"에 있으며 그 중에서 원시복음으로 알려진 창3:15절이야 말로 열쇠중의 열쇠이다. 이 약속 안에 역사의 신학이 있고 선교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2. 아브라함과 약속(창12:)

 

원시복음의 실마리는 아브라함과 약속에서 풀어지기 시작한다.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적 축복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확연하게 계시된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12:3)하신 약속은 원시 복음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하리라는 약속에 의해 인간을 심판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구원 약속이 아브라함과 계약에서 더 구체적으로 계시된다. 창세기 4장에서 11장까지의 기록에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멀어져 가는 타락상이 묘사되고 있다. 이런 인간타락의 배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하시며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 약속의 내용은 첫째로 땅의 약속이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고 하셨다. 둘째로 큰 민족의 약속이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약속하셨다(12:2)번성할 것을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솔로몬 때에 "수효가 많아서   없는 큰 백성"(왕상3:8)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큰 백성은 약속한 가나안 땅에 살 이스라엘 백성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장차 이스라엘을 통해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겨질 영적 이스라엘을 총괄하여 예언하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장차 받을 축복의 본질에 대하여 그 영적 성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과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 받을 자"(갈3:6)가 된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축복은 영적 구원의 축복을 의미한다. 

 

이 축복이 만민에게 적용되기 위하여 선교적 과제가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이러한 선교적 암시가 창12장에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3. 출애굽 사건

 

출애굽 사건이 비교적 의미를 부여한 점은 두 가지에 인식할 수 있다. 

 

첫째는 출애굽으로 말미암아 한 민족이 탄생하여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실상을 애굽에서부터 가나안 땅에 이르는 어간에 산재한 모든 민족에게 보여준 일이다. 

 

 

 

둘째는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를 소개한 사실이다. 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계시되었으며 그 계시 속에서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이 밝히 나타나게 되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한 민족을 이룩하시고 그들에게 계시를 주심은 하나님의 이름과 뜻이 온 땅에 퍼지고 선포되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알게 한다. 

 

 

 

4. 디아스포라

 

이스라엘 민족의 이방국가에로의 이동은 처음에는 상업적인 목적에서보다 전쟁에 의한 포로로서 이끌려간 일이 더 많았다.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를 그 대표적인 Diaspora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Diaspora현상에서 선교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먼 외국에서 성전제사 대신 회당을 사용하여 예배한 사실이다. 회당을 사용한 유대인들이 제사형식의 예배에서 말씀중심의 예배로 회중 예배의 형식이 바꾸어짐에 따라 복음의 말씀을 통한 선교의 가능성이 크게 증대 되었다. 종교적 혁명으로써의 회당 예배는 결국 신약시대를 준비한 셈이다. 둘째는 회당의 사용을 통하여 유대인 선교의 접촉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바울의 경우 회당은 유대인 전도의 최적지가 되곤 하였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울의 선교전략은 회당 사용의 기득권을 최대한도 활용하여 유대인들에게로 복음을 전한 후 거기에서 믿기로 결심한 개심 그룹을 핵으로 교회를 시작한 일이다. 실로 회당전도야말로 바울 선교의 요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II. 신약에서의 선교의 기초

 

1. 왕국과 선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나라" 였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메시지의 주제는 "하나님나라" 였다(행1:3) 전도자 빌립도 "하나님 나라"(행8:12)를 설파하였다. 바울도 "하나님 나라" 를 주제로 하여 선교하였다(행28:31)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심령에 관한 복음이기 때문에 심령의 변화를 항상 전제하여 전파되었다. 심령변화의 복음 곧 회개의 복음이었다. 이 회개의 관문을 통과할 때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이 천국복음의 진수이다. 신약의 천국개념은 동시에 역사의 종말개념과 함께 연결되어 선교적 사명과 함께 강조되었다. 주의 재림에서 완성되는 천국의 궁극적 실현은 회개로 시작되는 천국의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어야 하는 선행 조건이 따른다(마24:14). 유대인들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이런 왕국의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 데서 기인하였다. 제자들도 그들의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가시적 왕국을 회복하실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였다(행1:6)제자들도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이스라엘 중심적으로만 해석하고 왕국의 영적 개념과 선교적 사명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이들의 이러한 확인을 시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시기적 관심과 수동적인 왕국도래의 기대자세에서 벗어나 권능 받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 선교할 것을 지적하셨다. 

 

 

 

2. 예수님과 이방인

 

우리는 복음의 기록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중요시하지 않는 듯한 인상이 풍기는 구절들을 대한다. 제자들에게 전도하려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마10:5)고 하신 말씀이다.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하셨고 가나안 여인에게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미15:24)고 하셨다. 이러한 말씀들은 얼핏 우리들을 당혹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Johannes H.Bavinck는 그 당시에는 아직 복음 전파가 전세계적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을 알리시는 것 뿐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방선교에 대하여 단순히 시기상조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메시아 대망 사상으로 무장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먼저 집중적으로 전한 후에 이방인 선교의 차례를 택하라는 선교전략적 차원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때가 이르지 못했다기 보다는 유대인 전도의 긴급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것뿐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 속했다"(요4:22)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도 예수님이 유대지파를 통하여 오신 예언 성취의 메시아 임을 증거하신 것 뿐이요 사마리아인들에게 구원이 없다는 선교부정적 언급으로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 전도하신 사실이 예수님의 본의를 행동으로 증명하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만났을 때 구약의 예언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마8:11). 베다니의 마리아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되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13)고 칭찬하셨다.또 "이 천국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마24:14)라고 말씀하셨다. 

 

 

 

3. 선교대령(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이 선교대령은 신약 속에서 발견하는 가장 대표적인 선교의 명령이다. 이 명령은 네 가지의 동사를 분사형으로 되어있는 보조동사이다. 가는 일(전도운동)과 세례 주는 일(교회설립)과 가르치는 일(교회교육)을 거쳐 철저하게 제자를 삼아 그들로 다시 전도하는 일군으로 삼으라는 사실이다. 곧 제자화 운동을 통한 선교 운동을 의미한다. 

 

 

 

4. 사도행전과 선교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선교 기록이다. 사도행전의 교훈은 비록 사도들의 선교행전이긴 하지만 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행전이기도 하다. 선교의 주역은 사도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강조되어 있다. 비록 선교운동의 효시로 알려진 안디옥 교회 선교도 바나바와 바울이 주역이 아니요 성령이 그들을 따로 세워 파송한 사실을 누가는 밝히고 있다. 바울이 3차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할 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가운데서 하신 일"(행21:19)곧 선교주역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다. 안디옥교회에서 제기한 문제로 예루살렘 총회가 회의를 할 때도 성령께서 총회를 주관하시고 결의케 하신 사실을 "성경과 우리는"(행15:28)이라는 표현으로 밝히고 있다. 곧 예루살렘 총회도 성령의 인도로 진행된 사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방선교의 그릇으로 택하신(행9:15)사실이나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도(행10) 성령의 독려적 사건이시다. 하나님은 바울 선교의 코스도 결정하셨다(행6:6-7).유럽선교의 시작을 환상으로 지시하셨다(행16:9-10). 바울 선교의 주도권은 바울 자신보다 그를 도구로 쓰시는 성령이심을 사도행전은 거듭 강조한다(행18:9-10). 

 

 

 

III. 결론

 

선교는 구원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런 선교관에 비추어 볼 때 지금까지의 선교운동에 두 가지 면에 충분한 주의와 관심이 집중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선교의 주역성에 대한 인식문제이다. 선교의 당위성과 방법론은 선교학의 관심 대상이 되어 왔으나 선교의 주역인 그리스도의 주권성이 충분히 강조되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선교대령에서 네 가지의 동사는 분석하고 그 의미는 강조하긴 하면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권세와 그의 주권에 대한 순종으로써의 선교의 의미가 도외시된 점이다. 지금까지의 이점이 보다 더 강조되었던들 선교의 결과로 파생되는 교파의 난립현상이나 선교사들의 피선교지에서의 부조리가 극소화되었을 것이다. 개신교회의 교회관은 지나치게 로마 카톨릭의 교회관에 반대하는 것에 너무 집착한 감이 있다. 기독교 개혁자들이 강조한 교회의 3대 표식인 말씀,성례,권징은 선교가 배제되는 수동적인 교회관이다. C.W.Williams가 지적한 대로 오늘날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인 수동적이고 고정적인 교회관에서 역동적이고 진취적이면서도 선교를 강조하는 교회로 변환되어야 한다.  

 

 

 

교회와 선교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한 선교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파간 선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차이로 인한 문제점이 심각하게 노출되고 있다. 이 문제점으로 교회는 분열 되고 서로 반목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의 원칙은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체성과 활동을 강조하는 올바른 출발점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선교구조의 해체를 요청하며, 선교사들을 소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선교의 주된 활동 무대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교회의 선교라고 세계교회협의회 선교신학은 말한다. 그러나 이 신학은 하나님의 활동을 보다 정의로운 사회건설이라는 세속적 활동으로 주로 해석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며 그가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선교사를 파송하는 인간화에 역점을 두며 복음화를 선교의 과제로 삼는 복음주의적 입장과 많은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야기된 교회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반면에, 교파나 교회적 구조가 아니라 친교적 종파적 구조를 가진 선교회는 교파적 교회가 제도화를 통하여 교회 본래의 특성을 상실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선교회에 의하면 교회는 양적인 팽창과 교권 수립에만 집착하고 있으며 제자훈련과 선교에 등한시 하고 있다. 교회구조로는 더 이상 효과적인 복음전도와 제자훈련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선교회는 독자적으로 전도훈련과 양육을 담당하고 있다.또한 교회는 선교회의 종파적인 요소가 일부 교회에 대하여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비판적인 단체라고 보고 선교회에 대한 의심의 시각을 표출하고 있다. 교회의 선교활동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난관,즉 선교의 신학적 이해의 차이로 인한 분열과 제도화된 교회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선교 활동에 종사하는 선교회와의 마찰은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써 등장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분열은 결국 교회의 힘을 약화 시킬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하여 효과적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난관에 대처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이 논문에서 다루어 봄으로서 앞으로의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참조가 되는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I. 교회연합의 과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른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교회연합의 필요성은 단순히 효과적인 선교의 전략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며,성경의 증언이며, 교회의 요청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분열된 한국교회의 연합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회개와 노력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1. 교회연합의 성서적 근거

 

교회연합은 삼위일체에 하나님과의 연합에 본질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아주 중요한 예언을 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을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교회의 연합은 가능하다는 것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성도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12:13).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는 연합이 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참된 연합이다. 조직체의 통합이나 교리의 일치는 근본적인 교회연합의 전제가 아니라 나타난 외적 결과일 뿐이다.따라서 교회의 일치를 말할 때 무엇보다도 신학의 일치를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라,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평가

 

세계교회협의회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운동 즉 교회일치운동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분열이 악이라는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깨우쳐 주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열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교회가 분열되었다는 것은 비록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성서적 이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악이며 잘못 된 것이다. 분열을 합리화시킬 수는 있다. 분열의 원인을 자기교파에 유리하게 따져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었다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따라서 교회의 분열에 대한 책임을 모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에큐메니칼운동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보는 한에 있어서 정당하다. 선교와 인간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의존해 있다는 고백은 성서적이며, 복음적이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연합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만 가능하게 된다는 성서의 언명과 에큐메니칼운동의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점은 서로 일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자각하고, 선교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보는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칼운동과 복음주의의 교회연합운동에는 이질적인 상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즉 에큐메니칼운동은 이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모든 활동 특히 불의한 사회구조의 개혁과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활동에 선교의 강조점을 두고 있는데 반하여,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충성을 바치고 있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문화권을 초월해 전하는 것이며 그들을 고무하여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와 주로서 받아들이게 하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인 교회의 책임적인 구성원들이 되게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전도와 정의의 실천에 함께 사역하며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처럼 이 땅에서도 그를 이루도록 하는 것"(글라서,맥가브란,p.50)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즉 복음주의는 복음화를 선교의 본질적인 목표로 삼고 있고, 반면에 에큐메니칼운동은 인간화를 선교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복음주의와 교회협의회 간의 선교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실제로 두 진영의 연합은 어려운 것 같이 보인다. 교회협의회는 복음주의자들 보다 불교인이나 무신론자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복음주의자들도 협의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복음주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우선권을 협의회가 받아들이기를 요구하고 있고, 협의회는 복음주의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정치,경제,타 종교, 문화, 환경 등 이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서 비인간화된 요소를 제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죄의 사회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교회협의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고, 협의회는 복음,성서,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까지 상대화 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복음주의로부터 받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분열된 체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인가? 

 

 

 

3. 교회연합의 가능성

 

서로 상반된 선교신학적 갈등을 해소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연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연합이 조직체만이 연합이나,프로그램만이 연합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신학적인 연합으로만 이루어져도 충분하지 않다. 교회의 연합은 성서가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성령으로 일치됨을 경험하는 기초 위에서 교회연합은 출발해야 한다.이러한 일치운동은 본래의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함을 요청하는 것이다. 

 

 

 

교회협의회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한다면 복음주의와의 일치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활동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을 의롭다고 하시는 활동이며, 성령으로 인간을 성화시키시고 정의로운 사회건설에도 앞장서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님의 활동이며, 성령으로 인간을 성화시키시고 정의로운 사회건설에도 앞장서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고 재해석 한다면 복음주의가 에큐메니칼운동과의 연합을 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되는 셈이다. 1952년 윌링겐대회에 이르기까지 교회협의회의 주도적 사상은 복음주의도 연합할 수 있는 복음적 기초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복음주의는 교회협의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겸허히 스스로를 반성하며,또한 협의회가 복음에서 이탈한 것을 깨우쳐 줌으로써 진정한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죄의 개인적인 측면을 복음주의가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할지라도 죄의 사회성에 대한 관심을 교회협의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서구 교회의 주도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팽배해가고, 제도적 교회의 지나친 교권주의와 개교회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운동,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교회가 연결되어 봉사하여야 할 과제는 교회협의회의 교회들과 더불어 복음주의 교회들의 공통된 과제가 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복음주의 교회는 1966년 횟톤(Wheaton)선언, 1974년 로잔느 언약을 통하여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한 것은 교회 연합을 위한 복음주의의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연합을 위한 복음주의 자체 내의 과제를 몇 가지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에큐메니칼운동이 복음적이고 성서적인 기초를 갖도록 조언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복음전도의 사역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협의회의 비판과 피선교지의 의식적인 전환으로 서구중심적이고 교파 중심적인 기존의 복음전도가 위축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이러한 변화로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겸손한 자기 반성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로, 복음주의 내부의 분열된 선교정책과 교파의 분열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있어야 하며,특히 한국교회는 교파의 분열로 인하여 경쟁적인 복음전도의 역동성을 가지고는 있으나 협동성이 부족하다는 많은 자기 반성을 하고 있다. 

 

 

 

II. 세계선교에 있어서 교회와 선교회의 관계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첫 선교사로 나갈 때, 그들은 교회의 전적인 기도와 격려를 받았으며, 이들은 소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선교 여행 도중에 디모데와 누가등을 만나 함께 여행하였는데, 이 선교단을 흔히 "바울의 선교단"(Paul's Missionary Band)이라고 부른다. 이후로 기독교 선교적 구조(Missionary Structure)의 두 종류의 기본적인 사역 구조(Ministry Structure)가 형성된 것이다. 이 두 구조가 각각의 특성을 살려서 서로 협력하며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참여하면 보다 효과적인 선교 사역이 가능할 것이다. 

 

 

 

1. 두 구조의 역사적 배경

 

초대 교회에는 기독교 회당(Christian Synagogue)이 복음 전파와 신앙교육의 중심이어서,바울은 이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사역하면서 메시아의 도래를 전파하였다. 이방인들은 여기서 복음을 들었고,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도 회당에 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회당에 속한 사람들은 다양한 부류였다. 이방인 가운데서 고넬료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구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 fearers)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믿되 율법이 정한 할례만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할례까지 받고 모든 율법을 준수할 것을 약속한 이른바 "개종자"(Proselyte)들이 있었다. 이들은 원래 혈통으로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나그네"(Strangers)이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인의 취급을 받으며 유대인이 누리는 모든 특권과 축복을 함께 받을 수 있는 부류이다. 그리고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들이 또한 구성원에 속한다. 바울은 경우에 따라서는 회당 이외의 다른 교제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즉 경제적인 면에서 독립하여 활동하기도 하고,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안디옥 교회의 지원을 받아 다른 성도들을 돕기도 하였다. 

 

 

 

2. 두 구조의 특징

 

 1) 선교회 구조

 

 (1) 선별적:정한 수속을 밟아야 입회되는 경우가 많다.

 

 (2) 기동성:과업 수행을 위한 행동성이 있다.

 

 (3) 구체적 과제 지향성:기관에 따라 고유한 목표가 있다(예,CCC)

 

 (4) 개혁적:기존 질서에 대한 변화를 시도한다.

 

 (5) 강력한 지도력: 대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중심이 된다.

 

 (6) 강한 헌신성:충성을 다하여 지도자의 인정을 받고자 한다.

 

 (7) 특수 계층 중심적:학생,직업 계층 등.

 

 (8) 비교적 비지속적:목표 달성 후 해체되는 것들도 있다.

 

 (9) 여러 선교단체

 

(10) Sodality, 또는 Mission Structure라고 부른다.

 

 2) 교회구조

 

 (1) 포괄적: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2) 일정한 지역에 위치하여 사역한다.

 

 (3) 다양한 사역지향성:전도,양육,제자화,선교,구제 등 다양하다.

 

 (4) 조직 발전적:기구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한다.

 

 (5) 융통적 지도력: 대표자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6) 약한 헌신성:등록한 회원이라도 비교적 용이하게 이용한다.

 

 (7) 다양한 계층 포함:유아부터 노년까지 모든 계층을 포함한다.

 

 (8) 지속적:지도자가 바뀌어도 교회는 지속된다.

 

 (9) 여러 지역 교회

 

(10) Modality 또는 Church Structure 라고도 부른다.

 

4. 교회와 선교회의 해묵은 갈등

 

교회와 선교회는 협의적으로 국내 교회에서,그리고 광의적으로 세계 선교라는 거대한 과업을 놓고 많은 갈등을 겪어 왔으며, 이러한 갈등의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지적해 본다. 

 

 

 

1) 주도권의 문제 

 

특수한 종류의 사역에 대하여 누가 주도권을 잡는가 하는 문제도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한때 선교회들은 성경 공부와 제자 훈련의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주도권을 잡고, 교회의 성경 공부를 이끌어 왔다. 또한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있어서도 기성 교회가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2) 지도력의 문제 

 

기성교회의 많은 분열과 파벌 현상은 지도력의 분산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한국교회를 대표할 인물이 빈곤까지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에 역사적 근거를 가진 교회들은 일사분란 한 지도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지속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3) 사역의 특성적인 측면 

 

한때 교회들은 지역 교회 조직의 유지와 존속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하여, 사실상 교회적인 발전은 등한시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선교회들은 제자 훈련이나 선교라는 과제를 놓고 집중적인 노력을 하여, 괄목할만한 발전을 가져왔다. 한국 교회의 경우, 다분히 감정적인 부흥회가 많아지면서,교인의 숫자는 점차 늘어갔지만, 무속적인 요소, 신비주의적 오류, 주관적 체험 중심의 신앙 강조 등은 신앙의 근거를 상당히 약화시키는 면이 있었고, 이에 따라 각종 사이비와 이단 종교가 횡행하게 된 것이다. 

 

 

 

4) 신학적인 문제 

 

교회는 소속 교단과 교파의 특정한 신학 노선을 따르며, 또한 학문으로써의 신학의 위치가 상당히 높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개 선교회의 경우를 보면, 쫓게 된다. 이런 갈등 때문에 교회는 선교회에 교인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한편 선교회는 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하거나 불신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5. 새로운 협력의 필요성과 방법

 

교회와 선교 기관은 세계 선교라는 긴급하고도 중요한 과업을 놓고 협력사역을 새롭게 시도해야 한다. 지금은 갈등으로 우리의 인력과 재력 및 시간을 허비할 시간이 없다. 제21세기라는 시대적 변화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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