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4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4학기

제목성경고고학 2022-07-13 16:36
작성자 Level 10

성경고고학

 

들어가는 말 

 

성경고고학은 지금으로부터 약150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세계의 역사에 대한 조사연구와 함께 최초의 문화들이 융성하였던 지역 즉, 나일강 유역과 유브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유역에 있는 가시적 폐허들이 답사되었고 수많은 도성, 무덤, 기념비, 성당, 궁전등 여러세기동안 흙과 모래 혹은 동굴 등에 감추어져있던 것들이 하나하나 발굴되기 시작했다. 이때 고대인들이 사용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잊혀졌던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판독되었고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언어들이 회복되어졌다. 이 위대한 발굴 및 표면 답사는 여러 나라에 속한 고고학자들의 경쟁 속에서 진행 되어왔다. 그 결과 고대문화 중에서 가장 눈부신 발견들이 이루어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헷, 시리아, 아라비아, 루비아 등과 성경과 관련되어진 가장 중요한 팔레스틴까지 진행되어 놀랄만한 발견들을 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귀중한 고고학적 발굴들 중에서 성경연구에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몇 개의 발굴과정과 발굴장소, 내용등 성경과의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몸 말

 

1.나그 하마디 문서

1945년 12월 어느 토인에 의해 발견된 고대 사본 집으로 나그 하마디라는 현대 도시 부근에서 발견되었기에 그 도시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본들은 그 지역 농부에 의해서 ‘하모라 돔’이란 마을 근처의 나그 하마디라는 도시로부터 북동으로 약 10㎞ 지점에 있는 게벨 엣 타리프(Gebel et-Tarif)라는 절벽 아랫면에 있는 수많은 동굴이나 무덤들 중의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그 표지들의 파피루스 판지에 있는 많은 언급들로 보아 그 당시 수도원 생활의 초기 중심지였던 케노보스키온(Chenoboskion) 주위 지역에서 발생된 것임을 암시해 주는데 아마 그 사본들은 중간 상인들에게 팔렸을 것이고 결국은 골동품상에 넘어갔을 것이다.

 

1) 출판의 역사

융사본 혹은 사본Ⅰ을 벨기에의 고고물 상인 아잇이 애굽에서 산것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어 1972년부터 1977까지 10권의 사본 출판이 이루어졌다. 또한 그것의 자매편 출판이 1978년에 이루어졌으며 1977년 둘째 계획이 완수되어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말한 “나그 하마디 문서(The Nag Hammadi Library)”인 것으로 52개의 소책자(Tractates)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의 수집에 대해선 후 400년경으로 보지만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그중 정통주의 수사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변증하는데 사용하려고 이단자들의 문서를 필기하여 수집한 것이라는 의견을 가장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문서의 내용은 “영지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전체를 볼 때 교리적 통일성이 전혀 없다. 또한 이문서는 여러 종교 사상과 비슷한 개념을 혼합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그 하마디 문서가 제기하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기독교 전통의 형성에 있어 영지주의의 역할에 관한 계속되어진 논쟁들을 야기시켰으며 「영지주의적 

 

문제」그 자체를 야기시켰다는 의미에서 볼 때 중요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2) 기독교적 기원과 비기독교적 기원

영지주의가 하나의 기독교적 이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적당한가 아니면 초기 기독교와 대면했을 때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비기독교적 종교로써 이해되는 것이 적당한가에 대해 논쟁이 되어 왔는데 이를 야기시킨 것이 바로 나그 하마디 문서이다. 이 수집 물이 기독교적 기원과 기독교적 요소를 지니지 않는 몇 개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축복 받은 유그노스토스, 아담 묵시서, 셈의 석의, 알로게네스서와 같은 그러한 소책자들이 중요한 것들이다.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사 받지 않은 영지주의적 구원자와 함께 완전히 발전된 영지주의적 신화를 제시하고 있다. 수집물중에 중요시되어진 축복 받은 유그노스토스 라는 작품은 비기독교적 영지주의에서 기독교적 영지주의에로의 이행이 입증될 만한 문서지만 명백한 기독교적 영향이 전혀 없다. 나그 하마디 문서가 영지주의의 비기독교적 기원을 단호하게 입증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고전적인 입장에 커다란 가능성을 더해 주고 있다.

3) 유대교적 자료들

영지주의 학자들이 문헌 안에 영지주의 기원 신화의 기초로 상당히 많은 양의 창세기 이야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많은 해석자들은 영지주의의 형성에 있어서 유대교 자체 역할을 강조하는 유대교의 전통의 요소들을 나그 하마디 기록들에서 특히 셋파 유형의 문서들에서 발견하였다. 하지만 모든 영지주의의 체계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반 우주적 이원론 자체는 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 추론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의 기원들이 가지는 혼합주의적인 과정 속에서 보면 나그 하마디 총서는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두드러진 유대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4) 영지주의와 신약성서

나그 하마디 총서가 종교사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헌은 영지주의 현상 자체의 본성과 다양성을 밝혀준 사실이다. 영지주의는 원래 그 기원에 있어서 비기독교 적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강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문제에 빛을 비추어 준다. 영지주의가 연대기적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 이전인지 아닌지는 나그 하마디 총서를 기초로 해서는 입증되지 않지만 영지주의는 적어도 초기 기독교와 동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개개의 나그 하마디 소책자들은 여러 개의 보다 특수한 방법으로 신약성서 연구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도마 복음서의 경우에서 보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5) 나그 하마디 문서의 중요성

① 경전의 형성: 주후 2세기는 정경역사에 획기적인 시대이다. 나그 하마디 사본들은 정경 형성의 한 과정의 무대를 나타내며, 또한 정경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즉 그 외경의 형성과정에 차이가 있으나 정경과 외경의 특수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② 사본 비평: 나그 하마디 사본들은 기본적인 헬라어 사본에서부터 분리되어 나올 때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특별히 도마와 빌립의 복음 안에서 그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그노스틱 학자들은 여러 사본들을 함께 사용한 것을 보여주며, 또 오늘날 사본 연구에 참고가 되는 귀중한 자료들이라는 것이다.

③ 비판적 문제들: 성경 비평에 여러 가지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이 있었으나 이 여

 

러 문제들이 이 사본들에서 해결된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대충 이 사본들에서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사본들 중에 나타난 것이 과장된 것과 허실이 있지만 사실도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어서 그 빛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④ 신약의 해석과 신학: 이 나그 하마디 사본들을 조심스럽게 연구해 보면 신약 저자들이 사용한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라는 그 사상은 일찍이 있었던 지식에 근거한 것이며, 또 그노스틱 사상은 본질적으로 비기독교인 철학을 나타내지만 그들은 기독교의 술어를 도용한 것임을 보여준다.

⑤ 종교사: 연구가들은 이 사본으로 고대 지식 운동의 한 계통을 알 수 있다. 즉 그노스틱주의의 여러 분파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만데안주의(Mandeanism), 마니키인주의(Manicheism)와 헬머티주(Hermetism)등이며, 또 그들이 다른 여러 운동들과 관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중세기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그노스틱 사상들과 동일하고 그들과 연관되었음이 타당함을 볼 수 있다. 

 

2.에블라(Ebla) 원문

1) 텔마르딕과 에블라의 관계

1955년 한 농부가 시리아의 어느 모래바닥에서 현무암에 조각된 으르렁거리는 사자 형상 발굴과 동시에 제의(際儀)에 쓰인 잔을 발견했다. 이 잔은 행진하는 군병과 연회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고고학자 마티애는 이 제의 잔을 B.C 2000년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이 발견된 위치를 텔 마르딕(Tell Mardikh)이라는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에블라”가 곧 텔 마르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텔 마르딕 발굴이 시작(1964)된지 4년만에 주전 2000년대에 속한 현무암을 발견하였다. 이 현무암의 형태는 설형 문자를 기록한 옷을 입은 인간상인데 이 사람은 ‘이빗림’왕의 상으로써 에블라잇

의 왕이었다. 그러므로 ‘마르딕’과 ‘에블라’가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2) ‘이블라’ 이름이 ‘에블라’로 변형과정

처음에는 학자들이 설형문자 표IB를 “이브(ib)”라고 발음하였기에 “이블라”라고 불리어졌는데 1936년에 ‘웅낫’(Artbur Vngnad)이 ‘보가즈코이’에서 발견한 후리안 원문에 “에블라”가 “에-엡-라-아-파(e-eb-la-a-pa)\\\" 로 기록되어 ”에블라“로 칭해졌다. 

3) 에블라의 시작과 끝

이태리 고고학 팀이 마티애 교수 지도하에 큰 기대를 걸고 연구를 계속한 결과 에블라의 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어 청동기 시대, 즉 주전 약 3000년대의 이곳 에블라에 농촌이 일어나고 도시가 구성되었다가 주전 1600년경 문화가 쇠망해진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그리고 그들의 문화 쇠망은 헷족의 침략 때문이었다. 

4) 에블라 토판 연구에 대한 두 가지 견해

①첫 번째 견해는 에블라 토판을 연구하며 연대 측정을 했던 시카고 대학교수이고 설형문자 언어학자중 가장 우수한 학자인 ‘겔브’는 에블라어는 메소포타미아어(오늘날 중동어)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특히 악키드어와 아모리어처럼 비슷한 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에서 매우 떨어진 언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이 견해는 에블라문서 발견이 성서학 연구에 직접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②두 번째 견해에서‘페티나토’교수는 에블라어가 초기 가나안어이고 북방 셈어에 매

 

우 가까운 말이며 히브리어에 매우 가깝다고 주장한다. 미국 예수회 학자인 다훗은 로마 성경연구소 교수인데 그는 페티나토와 같은 견해에서 좀더 나아가 에블라어는 직접적으로 히브리어에 연결된 언어이고, 우가릿(Ugarit)어보다 히브리어에 더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5) 토판에서 볼수 있는 에블라 시대 배경

에블라 토판 발굴은 투툰카뭄의 무덤 발견(1922), 우가릿 발견(1929), 마리 문서 발견(1930), 쿰란 발견(1947)들 보다 더욱 중요한 발견이라고 볼 수 있다. 에블라 토판이 이미 문서상 알려진 도시 문명 중심지를 실제로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 상인들만 해도 삼만 여명이 모여서 장사했으며,농민,공무원,기술자들,학자들이 이 도시에서 고급 문화 생활을 하며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에블라 전체 인구는 삼십만 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며 이것은 고대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였다. 에블라가 가진 큰 창고는 548,500석이나 되는 보리 곡식을 보관했고, 이 곡식은 천 팔백 명에게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큰 양이다. 에블라는 매매 행위에 농작물 대신 금전을 사용한 첫 도시이다. 즉, 인류 역사상 에블라가 처음으로 금전을 작물대신 사용한 것이다.

6) 에블라 토판과 구약성경과의 관련성

에블라 토판과 구약 성경과의 관계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을 간단히 소개하면 그 이유는 성경 가운데 아담, 하와, 요나, 다윗등의 인명들이 에블라 토판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중에 특히 두 이름 아브라함과 에벨로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마티애 교수는 지금 에블라와 성경과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지만 에블라가 발견된 초기에는 “에브라임”, 즉 에블라의 황금시대 왕이 창세기 10장에 말한 아브라함의 조상(7대조)인 “에벨”과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페티나토 교수는 매우 명백하게 아브라함이 북방 시리아의 본토인이라고 했다. 한 에블라 토판이 우르(Ur)는 하란(Haran) 근처에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다섯 도시가 에블라 토판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후 이 견해를 조금 시정하여 세 도시인 소돔, 고모라, 소알(Zoar)을 확정할 수 있다고 했다. 예수회 신부인 다훗 교수는 페티나토 교수의 의견에 동의할 뿐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에블라 토판과 구약성경 관계가 밀접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도시들이 에블라와 주전 2500년경 매우 밀접한 경제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훗 교수는 지금 에블라를 발견하여 우리는 구약성경을 더욱 확실히 역사적 문서라고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7) 에블라 토판과 성경 언어와의 유사점(아담,하와,야발,노아)

①아담 : 에블라 토판에 에블라의 14명의 지방 통치자중 하나의 이름이 아-다-무(a-da-mu)로 나타났다. 

②이브 : 에블라 토판이 “아-와(a-wa)\\\"란 말을 표현한다. ”아-와“는 성경의 ”하와(hawah, Eve)\\\"와 같은 것이다. 

③야발 : 창세기 4장 20절에 말한 야발은 에블라 토판에 처음으로 고유명사인 “와-바-룸(a-ba-lum)\\\"이 나타났다. 에블라어는 첫 발음인 와우(waw)를 지니고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야(ya)“로 변한다.

④노아 : 에블라 토판에 이-나-후키(i-na-huki,안식의 섬)란 말이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 나-후(i-na-hu)가 “노아(noah, \\\"repose\\\")\\\"로 되고 히브리어는 ”노아“가 된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에블라 토판이 구약성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는 것을 충분히 증거 할 수 있다고본다. 

 

3.사해 두루마리

1947년 사해근방에서 발견된 ‘에세네파’ 공동체의 문헌들로 이 두루마리 사본들과 또한 그것들과 함께 발견된 단편들은 성서와 유대교, 기독교의 초기 사건들을 담고 있는 사본들중 가장 중요한 발견 물이다. 

1) 사본들의 발견

1947년 2월 혹은 3월에 타아미레(Ta-amireh)족의 베두인 젊은이 마호멧 엣딥(Muhammad ed-Dib)이 사해의 서안 절벽에 뚫려 있는 동굴들 가운데 하나에 들어갔다.(여리고 남방 14㎞ 정도의 지점) 거기에서 그는 높이 약 75㎝, 너비 25㎝ 가량의 항아리들을 발견했다. 그 항아리 속에는 아마포로 쌓인 가격 두루마리들이 담겨 있었다. 현재는 그 두루마리 전부가 이스라엘 소유로 되어 있다.(8개) 이 두루마리들이 아주 오래된 것이고 가치가 많은 것들임을 인정받게 된 시기인 1948년 초에 아랍제국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그 동굴의 과학적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후 1949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까지 다시 동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요르단 고적탐사국 랑케스터 하딩과 성서학교(Ecole Biblique)의 드 보(R. de Vaux)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때에 수백 개의 성서문헌들과 외경 그리고 그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문헌 등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항아리 파편들의 양으로 보아 판단하건데 이 동굴은 약 200개 두루마리들로 이루어진 장서의 은닉 처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되어졌다. 이 장서들은 이미 오래 전에 발견되었던 것같다. 유세비우스는 오리게네스(A.D 185-254)가 여리고 근방에 있는 한 항아리에서 발견된 희랍어역 시편을 사용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대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자기 소유의 5개 두루마리를 미국으로 옮겼다.(1948) 그것들은 트레버와 브라운리의 도움을 받아 버로우즈에 의해 출판되었다. 제 1권(1950)은 여러 플레이트들과 두 개의 두루마리의 필사본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필사본 가운데 하나는 이사야서 전권을 담고 있으며 또 하나는 하박국 처음 장에 대한 주석(1QpHab)을 담고 있다. 제 2권(1951)은 「훈련교본」을 형성하고 있는 보다 작은 두루마리 두개(1QS)를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라멕의 한 묵시록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5개 두루마리들 가운데 마지막 것은 그 당시로는 손상시키지 않고 펼 수가 없었다. 1948년 9월 수케닉은 이 사본들을 수록한 자신의 첫 번째 책을 출판하였으며 이 책에 뒤이어 1950년에 제 2권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두권은 모두 수케닉이 소유하고 있는 두루마리 속에 잘 보존된 부분들 가운데 일부만 포함하고 있다. 수케닉의 사후 그의 아들 야딘은 1954년에 《Osar Hamegilloth Hagenusoth》(감추어져 온 두루마리 보물)라는 제목으로 그 두루마리들을 모두 출판하였다. 여기에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종말론적 전쟁을 묘사한 한 두루마리(1QM)와 또 다른 이사야서 두루마리와 감사 시편들의 편집본 가운데 네 부분이 담겨 있다. 아비가드(N. Avigad)와 함께 야딘은 소위 「라멕의 묵시록」이라는 문헌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히브리 대학교에서 해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창세기 몇 개 장들에 관한 미드라쉬임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제 1 동굴의 단편들은 1955년 바르텔레미와 밀리크에 의해 《Qumran Cave》라는 제명의 한 책에 게재 출

 

판되었다. 1951년 여름이 끝날 무렵 타아미레 부족들 가운데 몇 사람들이 이 유명한 동굴 남방 18㎞, 그리고 사해 서방 3.2㎞ 지점에 있는 와디 무랍바아트의 두 동굴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단편들을 제공하였다. 1952년 초 이들 동굴들의 탐사작업이 있었으며 이 동굴들 역시 시대는 다르지만 문헌 은닉처로 사용되었던 곳들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때에 거기에는 엄격한 마소라 양식의 성서사본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B.C 8세기의 소예언서들과 파피루스 팰림프세스트 하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명한 수도원 마르 사바의 북동쪽 4㎞ 지점에 있는 키르벳 미르드에서 발견된 다른 단편들은 후대에 속한 것들이다. 희랍어와 팔레스타인 아랍어로 쓰여진 성서문헌들은 A.D 4~8세기의 것들이다.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장소에서 나바테야인 파피루스와 유대교 파피루스, 그리고 소예언서들에 대한 희랍어 본문 단편들이 1952년 7월에 발견되었다. 와디 무랍바아트와 키르벳 미르드의 문서들은 쿰란 근방의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직접 관계가 없지만 쿰란지역에 있는 다른 동굴들에서 베두인족은 새로운 사본들을 발견했다. 1952년 3월에 있었던 발굴작업을 통하여 37개 동굴에서 항아리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것들 가운데 일부에도 역시 사본들이 담겨 있었다. 제 1 동굴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 2 동굴(2Q)에는 성서 단편들과 외경 단편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는 요벨서 일부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아람어 문서 하나가 있다. 그리고 제 1 동굴 북방 약 1.6㎞ 지점에 위치한 제 3 동굴(3Q)은 274개의 아람 어와 히브리어로 쓰여진 단편들 말고도 두개의 동판 두루마리를 담고 있었다. 키르벳 쿰란 서편 정반대 편에 위치해 있는 제 4 동굴(4Q)은 1952년 9월에 베두인족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동굴에서는 가장 많은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즉 에스더를 제외한 모든 성서문서들, 당시에 알려져 있는 것들과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을 포함한 많은 외경문서들, 이 종파의 주석, 전례본문, 그리고 그 외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둘 다 쿰란부근에 있는 제 5 동굴(5Q)과 제 6 동굴(6Q)에서도 제 7~10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보다 적은 양의 것들이 발견되었다. 후자의 동굴들은 키르벳 쿰란의 이회토로 된 양편 단구에서 1955년에 발견되었다. 이 모든 단편들은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박물관에 수집되어 있다. 이곳에서 그것들은 국제적인 학자단에 의해 말끔히 손질되고 정리되어 편찬되었다. 후일 제 3 동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제 11 동굴이 발견되었는데 이 안에는 상당히 완벽한 수 개의 두루마리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발견 물들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들로는 두 개의 동판 두루마리 이다. 원래 이것들은 3개 동판조각 리벳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들로 그 길이는 총 234㎝이다. 이 구리판은 굉장히 산회되어 풀어지지 않아 작은 조각으로 잘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업은 알레그로의 지도하에 맨체스터 공과대학에서 이루어졌다.(1956-57) 두개 두루마리는 모두 12개 난들로 이루어져 있다. 쿤(K.G.Kuhn)이 뒷면 양각에 두드러져 있는 글자들을 검사한 후 제시했던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 두루마리들은 보물들의 목록과 그 보물들이 감추어져 있는 장소들을 기록하고 있다. 

2) 사본들의 외형에서 밝혀진 기록연대

이 문서들 대부분의 언어는 고 히브리어이다. 단지 몇 개의 미쉬나식 히브리어 용어가 사용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제 4 동굴에서 발견된 네개의 단편들은 흔한 분사들이나 상관적인 불변화사 sh.와 같은 미쉬나 히브리어 문법의 요소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사본들은 학식 있는 서기관들에 의해 정교하게 필사되었으며 동물 가죽의 

 

겉표면을 사용하여 필기를 위해 가로 선을 그었으며 난외 공백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 세로줄을 그었다. 필체는 나쉬 파피루스(B.C 2세기) 필체와 아주 흡사하거나 예루살렘 근방 납골당의 비문들의 필체와 아주 흡사하다.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를 확정하기 위하여 올브라이트, 트레버, 비른바움, 수케닉 등은 고문서학적 증거들을 사용하였다. 이 증거들에 따르면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는 B.C 1~2세기이다. 항아리 조각들은 헬레니즘기 말엽에 속한다. 그 시기는 대강 위의 시대와 동일한 시대이다. 이 두루마리들의 아마포 외피에 대한 탄소 측정법에 의한 측정 결과로 볼 때 그 연대는 A.D 33년으로 수렴되는데 200년쯤의 오차를 인정할 때 B.C168년에서 A.D233년으로 추정된다. 

3) 키르벳 쿰란의 발굴작업

그러나 이 모든 관찰들이 이 두루마리의 정확한 연대규명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연대를 보다 정확히 결정할 수 있게 해 준것은 키르벳 쿰란의 발굴작업들이었다. 이런 발굴작업들을 통하여 이 종파의 중심지로 사용된 대규모의 요새화된 수도원의 폐허들이 파헤쳐졌다.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시기들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그 시기를 구분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성경 적으로) - 이 지역은 BC 8~7세기에는 대단히 큰 도성이었다. 노트는 이곳이 요시야왕 시대에 쓰여진 한 목록(BC 639-609)에서 언급된, 즉 여호수아 15:62에 기록된 「이르 하멜라」(염성)와 같은 곳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구약성서 사본들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필사본은 제 1 동굴에서 발굴된 2개의 아사야 두루마리이다. 17개 장에 54개 난들을 지닌 것으로서, 이 두루마리들 중 첫 번째 것은 길이가 7.2m, 폭이 25.9㎝이다. 이것은 모든 두루마리들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BC 2~1세기에 필사되었다. 이것보다 훨씬 오래된 것은 레위기 단편들로서 그것들은 다른 사해 두루마리들에서 때때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고 히브리어 필체와 동일한 필체로 쓰여져 있다. 그것들 다음으로 오래된 것은 사무엘서 단편들이다.(BC 3세기) 이 단편들의 분포도로 보아 이 종파가 가장 사랑했던 성서들은 신명기, 시편, 이사야, 창세기 등이었다. 이 단편들도 본문전승에 관한 아주 복잡한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형태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사본들 가운데 몇 개는 1QIsb와 마찬가지로 마소라 사본에 근접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반면 사무엘서의 단편들은 70인 역의 히브리어 원본문과 훨씬 근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사마리아어역과 혼합된 양식의 본문과 보다 일치된 사본들도 쿰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본문의 표준형태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눈데 띄며 AD 2세기 전반에 속하는 와디 무랍바아트 사본들은 모두가 마소라본문을 대표하며 이 시기에 이르러 마소라 형식의 발달이 종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동굴들에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는 외경및 위경 단편들도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는 역본들 -라틴어역, 희랍어역, 시리아역, 이디오피아역 등-로 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6Q의 단편들은 옛 카이로 회당에서 60년 전에 발견된 히브리어 전도서 본문과 부합된다. 그리고 이 동굴은 또한 히브리어 토비트서와 아람어 토비트서의 단편들도 제공하고 있다. 요벨서는 이 종파에 의해 수개의 필사본, 즉 에녹 Ⅰ,Ⅲ-Ⅴ의 부분들,레위의 유언, 다마스커스의 계약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외경문서들의 다른 단편들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다음과 같은 암시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 현재까지 그 어떤 특정 종교단체와 결부시킬 수 없는 외경 가운데 일부는 쿰란의 에세네파 문서로 돌려야 한다. 

㉡ 에녹서는 따로따로 사용되었던 문서들의 수집 본이다. 이 종파는 아마도 인자의 환상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유명한 제 2부를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 레위의 유언을 제외하고 열두 족장의 유언은 그 어느곳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후일 다른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 그곳에는 노아, 족장들, 모세 등과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많은 다른 외경문헌들이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 종파는 성서의 책들과 구절들에 관한 주석들도 만들어내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본문을 의역한 요벨서와 같은 미드라쉼이 있으며 그것들 말고도 이 종파에 독특한 주석의 유형인 페샤림이 있다. 이드라쉼 속에는 이사야,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등과 같은 예언서들의 본문이 구절구절 기록되어 있고 그에 따라 각 구절에는 「그 의미」(페사로)라는 설명문이 따라온다. 미드라쉼의 특출한 사례는 창세기 외경이며 페샤림의 것은 하박국 주석이다. 새로운 문학양식의「프로릴레기아」(florilegia)- 성서 본문 수집본-와 독특한 사상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본문들인 테스티모니아(testmonia) 속에 나타난다. 4Q는 출애굽기, 사무엘 하, 이사야, 아모스, 시편, 다니엘 등을 수집한 프로릴레기움 하나와 메시야 관련 본문들 (신5:28-29;18:18-19;민:24:15-17;신33:8-11)의 테스티모니움 하나를 제공하고 있다. 4Q에서 발견된 경구 함에는 랍비들이 지시한 것보다 더 많은 성서 구절들이 들어있다. 

3) 고고학적 증거

쿰란의 위치와 아인 페쉬카에 있는 농업용 부속건물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가 드 보에 의해 그의 1959년 쉬바이흐 강의에서 충분히 논의되었으며, 1961년에 불어로 출판되었고, 1973년 개정 영역으로 재 출판되었다. 쿰란 정착의 연대기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많은 발견 물들 가운데 상세한 연대가 적혀 있는 주화들은 이 건물들에 사람들이 살았던 시기가 언제인가를 밝혀주는 가치 있는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했던 상황은 11개의 셀류코스왕조의 주화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이것들 가운데 3개는 안티오쿠스 7세의 통치기간 중의 연 3년동안에 주조된 것임이 정확하게 밝혀질 수 있다. 요안네스 히르카누스 1세의 통치와 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통치에 관한 사실들은 각각 한 개의 주화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143개의 주화들은 알렉산더 얀나이우스에 의해 주조된 것들이며, 하나는 알렉산드라 살로메와 히르카누스 2세에 의해, 5개가 히르카누스 2세에 의해, 4개가 안티고누스 마따디아에 의해, 그리고 10개가 헤롯대왕에 의해 주조된 것들이다. 아켈라오의 분봉통치기는 6개 주화에 의해 입증되고 있으며 로말의 프라이펙투스들의 통치와 프로쿠라토르들의 통치는 91개의 주화에 의해 그리고 아그립바 1세의 통치는 78개 주화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94개 주화들은 제1차 유대전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들 대다수는 이 폭동의 제2차년에 주조된 것들이며, 소수가 제3차년에 주조된 것들이며, 제4차년에 주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몇 개의 주화들은 쿰란 건물들이 로마 군사기지로 전용되었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또 다른 것들은 시몬벤 코크바의 지휘하에 일어난 제2차 유대전쟁에 참여한 유대 혁명가들에 의해 이 건물들의 유적들이 재 점유되었던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고전학적 증거는 분명히 쿰란지역이 BC 2세기 후반에 정

 

착지로 사용되어 그후 계속 점유되어 AD 66-70년의 전쟁시까지-혹은 보다 더 가능성이 있는 시기로는 AD 68년까지-전혀 외부의 침입없이 존재하여 왔을 것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고고학을 통하여 이처럼 확고하게 입증된 상황에 따른다면 이 쿰란지역의 옛 주민들이 남긴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연대기 틀이 확정될 수 있다. 11개 쿰란 동굴들은 에스더를 제외한 히브리어 성서전권에 해당하는 두루마리들과 단편들을 제공하여 왔다. 그것들은 최고(最古)의 마소라 사본들보다 10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유대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를 기록한 사해문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들이 하나의 전승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수개의 개정된 전승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몇 개의 사본은 후대의 마소라 학파들이 「전수받은 본문」으로 입증되고 있으며 다른 것들은 성서의 희랍어 역들의 기초가 되는 히브리어 성서를 반영해 주는 최초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쿰란문서들은 성서본문의 전승을 담당한 분야에서도 복수 성이 통일성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던 점을 밝혀 주고 있다.

 

4.쿰란 공동체

1947년 최초의 사해 두루마리 뭉치가 발견된 뒤로 20세기에 들어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고대 팔레스타인의 한 유대인 종교 집단이다. (사해의 북쪽과 서쪽 해변 멀리 떨어져 있는) 쿰란 부근의 동굴들에서 히브리어 사본들이 거듭 발굴되면서 학자들은 그 집단이 에세네파로 불리는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함으로써(이를테면 에세네파 문서들의 작성 연대를 역사적인 필기체들을 바탕으로 결정함으로써) 이 황량한 공동체의 역사를 상당히 정확하게 재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에세네파는 BC 2세기에 요나단 마카베오가, 그리고 뒤이어 시몬 마카베오가 종교적 권위만이 아니라 속권까지 행사하는 대제사장직을 찬탈했을 때 다른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이탈했다. 시몬은 찬탈에 반대하는 에세네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에세네파는 그들의 지도자인 정의의 교사와 함께 광야로 달아났다. 이들 에세네파의 사람들은 BC 2세기 중엽 쿰란에 수도원 공동체를 수립했는데, 그 시기는 아마 시몬의 치세중(BC 143-135)이었겠지만 요한 히르카누스 치세시보다 늦지는 않을 것이다. 헤롯대왕의 치세 중에 잠시 중단된 뒤 이 공동체는 쿰란에서의 생활로 되돌아가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의 군단에 의해 그 중심지가 파괴될 때까지 이르렀다. 유다지방의 다른 에세네파 공동체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생활을 한 쿰란공동체의 약 4천명 가량의 구성원들은 예루살렘의 악한 제사장들이 타도되고 궁극적으로 자기들의 공동체가 진정한 제사장 계급이며 진정한 이스라엘로 세움을 받으리라는 묵시론 적인 환상에 의지했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성서의 연구와 육체노동과 예배와 기도에 전적으로 바쳤다. 식사는 보통 메시야의 잔치를 예언적으로 기념하는 방식으로 했다. 그들이 행한 세례는 회개와 「하나님의 선민」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했다.

 

5.에세네파

1) 시대적 배경(에세네파는 주전 2세기 중엽에서 주후 68년까지)

에세네파는 하시덤파들 사이에서 기원된 것으로 추측된다. 마카베오 혁명의 성공과 국가 주권의 회복에 따라 혁명의 주체 가문들과 파벌들이 생겨 국가의 국사 문제로 권

 

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혁명이후 권력 다툼 속에서 3개의 주요 신정 당파가 출현하는데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의 출현이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세네파는 아리스도불로 1세의 통치시대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에서 활동했다고 묘사한다. 즉, 에세네파는 헤롯가와 하스모네와의 정치적 대립과 헤롯의 죽음으로 다시 쿰란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헤롯 사후에 성전 정화 선동 문제로 마켈라오에 의해 다시 쿰란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으며 결국 에세네파는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와 로마와의 오랜 투쟁에서 살아남은 다른 유대인 집단들 속에 융합되어 버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에세네파의 기원설

① 팔레스타인 기원설 : 하스모니아 왕조가 생기고 152년에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되었다. 결국 대제사장직을 외부에서 사독이 아닌 사람이 차지하게 되고 사회는 점차 헬라 풍속과 문화를 취하는 지경이 되자 “의의 교사”가 일어나 “경건한 이들”을 데리고 유대인을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조직한 것으로 본다.

② 바벨론 기원설 : 바벨론에서 강한 믿음의 소유자인 유대인중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종교 부흥 시도가 좌절되자 그들끼리 독립사회 결성을 가결한 후 쿰란으로 후퇴하여 완전히 일반 유대 사회와 격리된 곳에 쿰란 공동체를 건설했다. 

3) 종말론적인 생활

에세네파는 자신들이 새 계약의 백성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오순절날 계약 갱신을 위해 축제를 매년 가졌다. 종말론적인 유대 공동체는 약 4천명 가량 되었고 그들 대다수는 유대 마을과 도시 각처에 흩어져 살았다. 필로의 기록에 의한 그들의 생활 원리는 “하나님의 덕과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 에세네파의 생활 방식의 지도원리 였다”고 한다.

① 경건 : 사해 두루마리에 일출 시각이 공동체를 위한 특별 기도의 시간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기도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으로 간청했다는 것은 그의 나라가 오기를 매일 간구했다”는 것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은 식사를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생명을 풍성히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를 행했다.

② 경전의 연구 : 그들은 시간들을 경전 연구에 바쳤다. 즉 그들에게서 일어난 과거의 사건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경전을 연구한 것이다.

③ 결혼 : 에세네파가 결혼을 회피하는 이유는 “그들의 금욕적인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위협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들은 금욕생활을 일종의 종말론적인 거룩한 전쟁으로 여기고 살았다.

④ 가입 : 에세네파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지망자에게 1년 동안 그들에게 생활규칙 교육을 시키며, 2년 동안 더 그의 성품은 시험 받게 되며 그렇게 자격이 인정된 후에야 공동체 일원으로 입단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경건한 생활을 할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의롭게 행동할 것등의 여러 가지의 서약을 한다.

⑤ 종교규범 : 요세푸스의 기록처럼 “중죄의 혐의를 받게 되면 공동체로부터 추방과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 그들은 사건을 재판할 때 참석인원이 백명 미만일 때는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다음으로 그들이 경외하는 것은 그들의 율법 수여자들의 이름이다. 

 

 

 

나오는 말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고고학적 발굴들은 성경에서 언급된 역사적 사건들의 정확성을 나타내 보이는 증거자료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구약 성경의 본문이 저자들의 손에서 나온 이래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왔지만 오늘날까지도 본질적으로 바뀌거나 수정된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 중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35)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임을 알 수 있다. 최근 몇십년 동안에 있었던 괄목 할만한 고고학적 발견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밝히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고대의 모든 자료들이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광야에 숨겨져 있다가 최근에 와서 발견되어진 것은 분명한 하나의 목적이 있음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와 현대 신학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신학계나 교회들이 위기와 혼돈가운데 있음이 사실이다. 이러한 불신의 시대에 고대 성경사본들이 발굴됨으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 하신 말씀으로 오류가 없음을 증거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약성경에 이사야 선지자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 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성경에 무오성을 믿는 칼빈주의 신학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알고 깨달아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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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고고학의 최근 동향 

 

 

고세진 (이스라엘 예루살렘 대학 교수/근동 고고학)

 

성경 고고학의 세계에는 매일 흥미진진한 발견과 연구가 진행되어 성경의 신비를 깨닫게 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얼마 전에는 텔 단에서 다윗 왕조를 언급한 비석이 발견되었고, 쿰란에서는 글이 쓰여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지난 몇 주 동안에 하솔에서는 쐐기 문자가 쓰여진 토판들이 발견되었고 텔 미크네에서는 텔 미크네가 블레셋 사람들의 도시인 에크론이라는 비석(기원전 7세기)이 발견되었다.

 

요즈음에는 고고학 연구 결과에서 나온 자료들을 인용 또는 분석하지 아니하면 성경 또는 성경과 관련된 어떤 학문들을 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성경 본문의 석의나 심지어 설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성경 고고학이 매력적인 학문인 것이 틀림이 없는데, 그 학문 자체는 위기와 진통을 겪으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그 학문의 최근 동향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훑어보기로 한다. 지면이 부족하여 자세한 설명이나 각주를 달지 못하였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성경 고고학 용어 문제

 

서양 학자들은 성경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고고학 연구 결과를 성경 고고학(Biblical Archaeology), 성경의 땅의 고고학(Archaeology of the Land of the Bible), 또는 성지(聖地) 고고학(Archaeology of the Holy Land), 이스라엘 고고학(Archaeology of Eretz Israel), 팔레스타인 고고학(Archaeology of Palestine) 따위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일컫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가 생기면서 이런 이름들이 혼선을 빚고 있다. 따라서 성경과 관련한 고고학이라면, 성경 고고학과 성지의 고고학, 또는 성경의 땅의 고고학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엄연하게 두 개의 정치적인 공동체(國家)들로 갈라져 있는 지금 이스라엘 고고학이라는 말이나 팔레스타인 고고학이라는 이름은 이 두 나라들의 일반 고고학으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독립 국가가 생기기 전에는 성지를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유대인들도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즉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이 지역명이었고 인종적이며 정치적인 구획선을 긋는 말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성지가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었으며 그럴 경우에는 같은 범위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팔레스타인은 이 지역에 사는 아랍 사람들의 땅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고 또 그들이 1993년부터 건설하고 있는 나라의 이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제는 성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분할되어 있고 이러한 정치적이며 영토적인 분계선 때문에 결국 이 세 낱말들은 동의어가 아니라 성지=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새로운 등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을 고고학과 관련하여 연구한다면, 이 학문의 이름을 성경 고고학 또는 성지 고고학으로 고정(固定)하는 것이 좋겠다.

 

둘째로는 성지의 범위, 또는 성지라는 낱말의 정의가 문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성지(聖地)라고 하면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있는 범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을 성지라고 한다면 그 범위는 훨씬 넓게 잡아야 한다. 즉, 이집트, 요르단, 터어키, 그리스, 그리고 심지어 이탈리아의 일부도 성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고고학, 또는 팔레스타인 고고학이라는 이름을 성경 고고학과 같은 뜻으로 쓴다는 것은, 그렇게 써 온 것이 사실이지만, 무리(無理)한 일이며 결코 성경 전체나 성지 전체를 대변하는 학문의 대명사라고 할 수는 없겠다. 지금 요르단에서는 요르단도 성지라고 광고를 하고 있는데 이것을 장사속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말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경 고고학이라고 하는 용어가 타당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 고고학의 범위

 

지금까지 성경 고고학이라고 하면 주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과 관련된 지역들의 고고학 자료들을 그 사건들과 이어서 해석하는 학문적인 작업이었다. 신약성경 고고학을 학문으로 정립하여 가르치는 곳이 적으며 대개 희랍 고전학이나 서양 문화사의 일부로 섞어 놓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신약성경 고고학이 도외시된 이유 중의 하나는 처음에 성경 고고학을 시작하여 학문적인 기틀을 닦아 놓은 학자들이 구약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 고고학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이스라엘 학자들이 신약 성경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것은 무척 잘못된 일이며 성경 고고학을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구약성경에 비하여 신약성경의 성경적 무게가 덜 나가는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다. 최근에는 기독교인 고고학자들이 신약성경과 관련된 지역의 고고학도 성경 고고학의 일부로 확립하고 있으며 교재도 간행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 고고학을 두 학기에 걸쳐 가르치면서 첫 학기에는 구약성경 고고학으로, 두 번째 학기에는 신약성경 고고학으로 연결하여 가르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전문화된 성경 고고학 

 

성경 고고학을 창시한 분들은 대부분 구약성경학자들이었다. 그런 전통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성격 고고학을 구약학자들이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은 국제적으로 학문적인 신용(信用)을 얻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성경 고고학은 하나의 종합 학문으로 자리를 굳혔고 성경 고고학자가 되려면 많은 세월과 자금을 투자해야만 가능한 일이 되었다. 성경 고고학을 하려면 성경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근동 고대어를 터득하고, 이 학문을 논의하는 데에 사용되는 현대어들도 배워야 하며, 고대 근동의 사회, 경제, 군사, 서민 문화, 국제 관계, 그리고 심지어는 동식물 따위에 대한 것도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성경 고고학의 기본 토대는 성경 역사 지리학(Historical Geography of the Land of the Bible)인데 이 학문은 근동에서 일어난 고대 사건들을 그 현장들에 일일이 연결하여 연구하는 작업이다. 그런 연후에 과학적인 연대 측정이나 자료 분석 정리와 현장 발굴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이제 고고학에는 비전문가인 성경학자가 성경 고고학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마치 심리학자가 윤리학을 가르치는 것처럼 어딘가 관련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손댈 수 없는 영역을 침범하는 일인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성경 고고학 연구 동향을 보면 비전문가가 성경 고고학을 가르치는 일이 급속히 줄고 있는데, 반대로 성경 고고학자가 성경 과목들이나 성경 역사, 성경 언어들을 가르치는 일이 늘고 있다.

 

 

 

성경 고고학 방법론의 위기

 

성경 고고학이 전문화되면서 일부 학자들은 성경(신구약) 학자들이 성경 고고학을 하거나 가르칠 수 없을 정도로 고고학 방법론과 실천론이 고도로 전문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반면에 근동 고고학과 성경을 연관 짓는 것 자체가 학문적인 방법론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하여 성경 고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이미 죽었다고 사망 진단서를 발부한 학자들도 있다. 그런 학자들 중에는 성경 고고학이라는 말을 버리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고고학(Archaeology of Syro-Palestine)이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성경 고고학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근동 고고학을 하는 학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말은 성경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독립된 학문으로서 서 있을 수 없고 오직 양쪽에서 대화를 하는 동안에만 뭔가를 이룰 수 있는 통로라는 말이다. 이것은 양전기와 음전기가 전구 속에서 만나서 빛을 내는 동안만 전구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전구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와 통한다. 이런 말을 하는 학자들은 고고학을 지극히 고도로 발달된 기술(첨단 장비나 컴퓨터)에 의지하려는 경향에 물들고 있고 유물을 발굴하고 자료를 분석 분류하여 연대를 측정하는 일로 근동 고고학자의 일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자료의 문화적 배경이나 역사적 가치 따위는 인류학자(anthropologist)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성경학자들이 성경 본문을 파악하거나 조명하기 위하여 독자적으로 고고학 자료를 해석하는 일을 아마추어의 심심풀이 정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 고고학을 죽었다고는 하지 않고 가사(假死) 상태로 몰고 가는 실정이다. 필자의 분석으로는 위에 열거한 주장들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성경에 무식한 근동 고고학자들이거나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하여 우호적이 아니거나, 아니면 극도의 과학주의적 고고학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성경 고고학의 생사 문제를 놓고 설전이 치열하지만 많은 근동 고고학자들은 여전히 성경 고고학을 하고 있고 또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도대체 성경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 더운 중동에 가서 발굴을 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물론 현장에 가서 발굴은 하지 못하더라도 전통적으로 성경 고고학을 중시하는 성경학자들은 고고학 자료를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비록 근동 고고학 자체가 고도로 전문화된 학문으로 발전되어 있어서 성경학자가 성경 고고학자로 자처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고고학 자체가 붕괴된 것은 결코 아니며, 우리는 근동 고고학이 제공하는 자료 중에서 성경의 본문들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하여 활용하여 성경 연구에 더욱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인 근동 고고학들이나 많은 미국인 근동 고고학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학자 필립 킹(Philip King)은 근동 고고학 자료를 성경의 각권 연구에 도입하여 아모스서, 호세아서, 미가서, 예레미야를 성경 고고학적으로 주석한 책들을 근래에 출판하였다. 또한 빌 디버를 비롯한 어떤 학자들은 고고학 자료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의 종교를 연구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렇게 성경 고고학을 이용한 성경 각권 연구나 주제별 연구가 앞으로 점점 성행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분석으로는 이러한 논쟁이나 혼란들은 어떤 학문이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진통일 뿐이며 이런 과정은 성경 고고학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 역할을 가다듬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성경 고고학의 종합적 경향성

 

이렇게 성경 고고학에 대한 설전(舌戰)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중에도 성경 고고학은 종합적인 연구들을 포함하는 학문으로 성장하고 있다. 성경 고고학을 더 풍요롭게 하는 방법론으로 대두된 것들 중에서 두 가지만 설명하자면 이렇다. 첫째는 지역 연구(Regional research)이고 둘째는 종합적인 연구(Integrative research)이다.

 

지역 연구라는 것은 어떤 도시를 발굴하거나 고고학 적으로 조사할 때 그 도시만이 아니라 그 도시의 주변에 있던 고대 도시들이나 마을들을 고고학적으로 함께 묶어서 연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세겜을 연구한다고 하자. 그전에는 이렇게 하였다. 우선 세겜과 관련된 성경 본문들은 무엇인가를 파악한다. 그리고 세겜의 지정학적 의미를 알아본다. 세겜에 남아 있는 건축물들(성벽, 궁전, 신전 따위)의 특징, 세겜의 토기들 따위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겜 뿐만이 아니라 세겜 주변에 존재하였던 다른 마을들,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심산이나 에발산 같은 곳에도 고고학적 유적이 있는가를 조사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유물들을 서로 관련시켜 연구하면서 세겜과 그 주변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고고학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다. 이러한 지역 연구는 연구 대상이 되는 지역의 지표 조사(地表調査)를 한 후에 발굴할 곳과 지표 조사 데이터로 만족할 곳을 결정한 후에 시작하게 된다. 또는 한 도시나 마을을 발굴하면서 동시에 그 주변의 지표를 조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연구의 대표적인 예가 몇 가지 있다. 텔아비브 대학교의 이스라엘 핑클슈타인(Israel Finkelstein) 교수는 에브라임 산악 지방의 지표 조사와 발굴을 병행한 지역 연구를 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 이주 상황을 고고학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루돌프 코헨(Rudolf Cohen) 교수는 네게브에서 지역 연구를 하면서 출애굽을 한 사람들의 생활이 이러 이러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데이터를 산출할 수 있게 되었다.

 

종합적인 연구라는 것은 상상이 가능한 모든 질문들을 다 망라하여 주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느헤미야 시대의 성경 고고학을 연구한다고 가정하고 예를 들어보자. 느헤미야 시대의 인종 분포, 경제 상태, 국제 관계, 유다지방을 둘러싼 부족들의 관계 따위를 고고학적 자료를 동원하여 파악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어떤 가축을 길렀으며, 어떤 옷을 입었으며, 어떤 노래를 불렀겠는가도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이러한 종합적인 질문을 해결하려면 자연히 성경학과 고고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즉 식물의 찌꺼기나 짐승의 뼈, 또는 불에 타고 남은 새 따위는 적절한 연구소나 대학교의 실험실에 보내서 분석하게 된다.

 

이렇게 지역 연구와 종합 연구를 거칠 때에만 어떤 시대의 그 지역 상황이 객관적으로 포괄적으로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성경 본문을 한정되고 극히 부분적인 고고학 자료에 연결 지을 때에 생길 수 있는 오해나 부정확성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을 추진하려면 재래식 방법보다 더 많은 인력과 장비 그리고 자금이 필요하게 된다.

 

 

 

외국인 성경 고고학자들의 활동 위기

 

19세기나 20세기 중반까지 근동의 여러 나라와 아프리카의 일부(즉 이집트)에서 고고학 활동을 한 사람들은 이 지역의 사람들이 아니라 외국인들이었는데 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사람들이었다. 원주민들은 이러한 외국인들의 고고학 발굴이나 지표 조사의 보조 역할을 하고 노임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발굴된 유물들은 발굴을 주도한 나라로 쉽게 반출할 수 있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들의 박물관들에 소장되어 있는 동양 유물들 중에서 대부분은 이렇게 하여 낯설고 물설은 서양에 주소를 정하게 된 것들이다.

 

이렇게 서양 학술 기관에서 파송된 서양 학자들은 일년에 2개월이나 3개월 동안 자기가 선택한 나라에 거주하면서 발굴을 하고 유물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이들은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며 싼 노임을 주면서 현지인들을 고용하여 발굴하는 데에 일꾼으로 쓰거나 다른 노동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 가지로 외국인 고고학자들이 근동이나 이집트에서 독자적으로 고고학 활동을 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첫째로는 현지인들이 고고학에 대거 참여하고 있으며 현지의 대학들이나 학술 기관들 그리고 정부의 고고학부들이 고고학 현장들을 장악하고 일년 내내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년에 2개월 정도 왔다 가는 외국인 고고학자들이 도저히 고고학의 선봉에 서서 자리를 지탱하기가 어려운 실정에 있다. 

 

둘째로는 근동 각 나라의 정부가 고고학 발굴에 관한 법률을 자세하게 제정해 놓고 외국인들의 활동을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 고고학자들이 근동 각 나라에서 활동하기에 불편한 일이 많다. 또한 발굴된 유물들은 그 나라에 귀속되며 해외로 반출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발굴에 대한 의욕이 저조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세 번째로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여러 가지 연구 방법이 동원되면서 인력, 장비, 실험 비용, 그리고 창고 관리비 등이 많이 들게 된다. 그러므로 예전보다 몇 배가 넘는 돈을 써야 하게 되었다. 또한 출판을 하지 아니하면 발굴 허가를 갱신하여 주지 않는 나라도 있으므로 계속하여 출판을 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외국인들이 성경 고고학 발굴 현장을 주도하는 일이 점점 위축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미국인 성경 고고학자 빌 디버(William Dever)는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여러 해 전에 내다보고 있었으며, 외국인들은 현지인들이 하는 고고학 발굴에 참여하는 정도로 그치거나 동반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줄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현장에서 하는 전초적인 성경 고고학을 할 수 없는 학자들은 남들이 발굴하여 분석하여 놓은 보고서를 자기 나라, 자기 집에 앉아서 읽고 이용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책상 머리맡에서 하는 고고학(armchair archaeology)은 최신 정보를 사용할 수 없는 약점을 안고 있다. 그 이유는 발굴에서 출판까지는 수년, 늦으면 몇십 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고고학 발굴과 출판

 

고고학자들은 발굴에는 열을 올리지만 출판에는 느린 경우가 많다. 발굴자는 매스컴을 타고 강의를 하면서 유명하여지지만 출판을 미루는 경우가 허다하고 발굴 유물 수백 상자를 어느 창고에 둔 채로 죽는 경우도 허다하다. 발굴은 했지만 아직까지 보고서가 출판되지 아니한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도단에서 발굴된 수백 상자의 유물들이 미국 휘튼 대학 창고와 예루살렘 세인트 죠지 대학의 창고에 쌓여 있다. 발굴 후 50년이 지나도록 출판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세인트 죠지 대학은 필자가 살고 있는 집에서 불과 백여 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아니하므로, 필자는 도단에서 발굴된 유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 없이 듣고 있다.

 

이제 학자들은 오래 전에 발굴되어 창고에 쌓여 있는 유물들을 재 발굴하여 출판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근래에 실로, 텔 바타시(성경의 딤나), 쿰란(사해사본 발굴지) 등지의 발굴 보고서가 나왔다.

 

그런가 하면, 지금처럼 고고학 관계 여러 기술들이 발달되지 아니하였던 때에 발굴하면서 생긴 오류나 발굴 보고서에 실려 있는 잘못들을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 장비를 사용하여 교정하는 작업에 종사하는 고고학자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제 근동 각 나라의 고고학부에서는 출판을 하지 아니하는 학자에게는 발굴 면허를 내어주지 않거나 갱신하여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발굴 비용과 출판 비용을 미리 준비하여야 하는 것이 현실이 되고 있다.

 

 

 

맺는 말

 

성경 고고학은 성경 본문의 문화적 배경이나 당시의 정황을 밝혀 주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학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최근 동향은 성경 고고학을 더 과학적이고 유용한 위치로 끌어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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