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4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4학기

제목한국교회사 2022-07-13 16:35
작성자 Level 10

한국교회사

 

 

 

간추린 한국교회사

 

 

 

 

 

제1편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한국 선교

 

경교: 431년 에베소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하여 이단으로 정죄 선교사를 양성, 인도, 아라비아, 중국, 타타리까지 전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 주후 635년 알로펜 일행이 당에 도착, 선교. 

 

9세기 중엽 도교신자인 무종의 종교탄압으로 자연히 소멸

 

루부룩 : 로마교황청에 보낸 편지에서 한국을 ‘까울레(Caule;고려)라고 기록.

 

로마 가톨릭의 중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코르비노 신부가 도착한 1294년 이후

 

1305년 황제의 후원으로 선교가 크게 성공하여 수세자가 6천명(1307년 중국교구가 창설)

 

원나라가 1368년에 멸망함으로 소멸.

 

세스페데스 : 예수회의 선교사가 일본에 도착(1541년 프란시스 사비에르)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세스페데스를 종군신부로 한국에 옴.

 

노예로 끌려간 한국인들에게 선교하여 2천여명의 기독교 신자들을 배출,순교자들도 21명

 

소현세자 :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예수회 신부 아담샬과 친분을 맺다가 귀환시 서적, 교리서를 가지고 신앙이 돈독한 환관, 궁녀와 함께 귀국, 70일만에 세상을 떠남.

 

유학자들의 서학 접촉 :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천주실의를 소개하게 됨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로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이벽, 이승훈 등이다. 이들은 강학회를 열어 교리를 연구하고 계율을 지켰다.

 

이승훈 : 정약용의 매제인 이승훈은 동지사이행에 딸려 중국에 가서 천주교 신부들과 교제하며 교리강습을 받고 영세를 받은 후 1784년에 돌아왔다. 이는 한국에 기독교가 시작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는 이로부터 100년 후인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 1785년(정조9년) 서울 명동의 김범우 집에서 모였다가 형리에게 발견되어 김범우는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중 고문의 휴유증으로 그 곳에서 순교하였다.

 

배교자들 : 사학에 대한 탄핵의 소리에 유생들의 규탄의 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이승훈은 1791년 배교하였고 1801년 신유교난시 배교한 상태에서 목숨을 잃었으나 순교자는 아니었다. 정약용도 1797년 배교했고 이벽도 배교후 33세로 급사했다.

 

신해교난 : 무군무부의 종교로 오인된 것은 진산사건이다. 윤지충은 1791년 모친의 사망에 사복을 입고 호곡은 하였지만 시신에 절하거나 위폐를 모시지 않았고 후에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공서파는 천주교에 동정적이었던 채제공의 세력을 꺾을 목적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제사 폐지문제를 트집잡아 결국 1791년 11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제사문제 : 예수회 마테오 리치는 제사를 단순한 정치적 의식으로 간주하여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기독교도 유교의 발전된 형태라고 선전하여 유교의 상제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는 보유론(補儒論)입장에서 선교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해 교황청은 조상 제사의 금지를 명했고 한국 천주교회는 1790년 윤유일이 신부파송을 청원하기 위해 북경에 돌아오면서 비롯되었다. 

 

신유교난 : 1795년 초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서울에 잠입했다. 정조는 천주교에 호의적인 시파를 등용하였으나 순조의 섭정이 된 정순황후는 서교를 박멸하려 함으로 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권철신,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이 순교했고 정약전, 정약용이 배교하였다. 주문모는 6년간 숨어 포교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되돌아가다가 자수하여 1801년 32세의 나이로 효수되었다.

 

황사영의 백서사건 : 천주교를 사학이요 무군무부의 종교로 확인해 준 사건

 

신유박해로 배론에 숨어있던 황사영과 황심이 조선 조정의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핍박을 북경의 주교에게 보고하여 이 박해를 면해 보고자 하는 심정에서 쓰여짐. 선교는 물리적인 힘을 동원한 제국주의적인 선교방법이 아닌 오직 복음적 방법이어야 함을 가르쳐 준 사건. 

 

조선교구의 설정: 1790년 조선의 천주교회가 알려졌고 1816년 정하상에 의해 추진되어 1827년에 교황 레오12세에게 편지가 전달되었고 1831년 9월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독자적인 교구로 확정되었다. 1836년 최초의 서양인 신부 모방이 입국

 

기해교난(1839): 친 천주교 세력이던 시파의 김조순이 죽고 풍양 조씨는 천주교의 박멸을 요구하여 1839년에 사학토치령이 반포되었고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었다. 특히 김순성 이라는 배교자의 밀교로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앙베르 주교까지 체포되었다. 이때 순교자가 54명, 옥사한 이들이 60여명, 배교한 자들이 50여명 된다.

 

정하상의 상재상서(최초의 호교문): 정하상이 우의정 이지연에게 천주교의 원리를 설명하며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한국인이 쓴 최초의 호교문이다.

 

병오교난(1846;김대건 신부의 순교) :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은 1845년 신부서품을 받고 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참수형 당했다.

 

병인교난: 철종때 천주교는 발전하여 1857년에 신도수가 1만3천에 이르렀고 서양선교사도 12명이나 되었다. 철종 승하후 대원군이 섭정하였는데 대원군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천주교 탄압(1866년부터 1873년)에 나섰다. 1866년, 프랑스의 신부 9명이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고 이에 프랑스의 로즈함대가 침입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1868년에 순교자수는 이천명을 넘었고 굶주림에 죽은 사람도 팔천명에 이르렀다.

 

남연군 도굴사건(1868) : 대원군 부친의 유골을 담보로 대원군과 협상하려고 오페르트는 묘를 도굴하였고 1871년 6월에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책임을 묻고자 로저스가 침입한 신미양요가 일어나 척화비가 세워지고 더욱 쇄국정책을 썼다.

 

제2편 선교사 이전의 개신교와의 접촉

 

칼 귀츨라프의 선교여행: 한국에 첫발을 디딘 성직자(1832년) 성경,의약품,주기도문 번역

 

알렉산더 윌리엄슨: 중국에서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한국의 천주교 박해상황을 접한 그는 토마스 목사를 도와 1865년에 한문성경을 가지고 셔먼호를 타게 했으나 화재로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성직자가 되었다. 

 

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 고려문에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와 교제하였고 3년후 매캔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의주청년들과 성경변역을 시작하여 1882년 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시작으로 1887년 신약 전체 번역이 완료되었다. 

 

권서, 매서인의 활동: 서상륜은 최초의 권서로 임명되어 전도함으로 최초의 예배를 드렸다. 1884년 로스는 6천권의 복음서를 무사히 반입하여 반포함으로서 많은 신자들이 생겨났다. 

 

이수정과 성경번역: 신사유람단 일행인 안종수의 친구인 이수정은 진전선박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은 전도하여 유학생들의 성경공부반을 형성하기도 했고 미국선교부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수정은 한문성경에 토를 달아 읽기와 이해를 쉽게 했고 1884년<신약성서 마가전>을 시작으로 한글성경을 번역하였다.

 

제3편 선교사들의 내한

 

가우처:미국의 사절단을 만난후 일본에 있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하여 한국을 조사한 후 선교할 것을 요청하였다. 매클레이의 방문후 스크랜톤, 메리 스크랜톤, 아펜젤러가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알렌의 입국(1884년 9월): 이승훈 세례후 100년이 지나 중국선교사로 있던 알렌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공사관의사로 있다가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응급조치하여 살림으로 서양의 뛰어난 의술을 알리게 되었고 알렌은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이는 개신교 선교 사역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득’이 되었다. 1885년 알렌은 광혜원 개설(세브란스의 전신)

 

제4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의료선교: 알렌에 의해 제중원이, 스크랜톤에 의해 시병원이, 여간호사 엘러즈는 신분의 차별없이 모든 부녀들을 맡아 보았으며 홀튼, 하워드에 의해 보구여관이 세워졌다. 성공회에 의해 낙동병원이 세워졌고 1908년에는 7명의 의사를 배출하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의료사역은 평양, 선천, 재령, 대구 등 각지로 확대되어 의료선교는 환자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위생교육과 예방접종에도 치중하여 사망률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교육사업: 의료사역보다 포괄적이고 직접 전도의 계기가 된 교육사업은 영어학교, 육영공원, 언더우드학당, 숭실대학등이 세워졌고 여성교육을 위해 메리스크랜톤이 이화학당을 세웠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1894년에 학생수가 104명에 이르렀다. 스크랜톤의 말대로“병원은 쟁기로 땅을 갈고, 교육은 씨를 뿌리기 위해 써레로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고 할 정도로 한국 초기의 의료와 교육사업은 적절했다 할 수 있다. 

 

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 노춘경은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통해 지식을 얻은 후 알렌의 집에서 몰래 가져 온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읽는 중 기독교를 접하였으며 1886년 언더우드에게 생명을 걸고 세례를 받았다.

 

최초의 교회(새문안교회) : 언더우드는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 1887년 9월 14명의 교인을 데리고 두 명의 장로를 세운 뒤 교회를 조직했다.

 

성경번역사업 :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성경이 이미 번역되어 있었으나 오류와 문제점이 있으므로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1887년에 <성서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철저한 심의과정을 두어 선교사들이 조사와 번역을 하고 다른 번역자들이 수정하고 의견을 개진한 후, 위원회에서 토의를 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표결을 하여 확정지었다. 1900년에 신약, 1910년에 구약이 완역되었고 1937년에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다.

 

사경회 : 1890년 언더우드 집에서 성경공부반이 시작되었는데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이다. 지교회 지도자들을 일년에 두차례씩 모아 6주에서 한달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893년부터는 모든 교회가 사경회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 : 1905년 복음주의선교협의회에서 공과책을 제작하였고 1907년 소아회를 조직하고 아이들만 따로 모아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3년 4월에는 창경궁에서 모인 야외집회에 14,700명이 모였다. 1932년에는 주일학교가 1071개, 교사가 4천, 그리고 7만명의 학생들이 공부하였다.

 

선교부들의 내한 :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1889년에 데이비스와 메리를 파송했는데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순교한 첫 희생자가 되었다. 성공회는 1889년 찰스 코르프를 첫 주교로 임명하였다.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는 언더우드의 절대적인 공헌에 기인했다. 미국 남감리교회는 윤치호의 요청이 커서 리이드박사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3년 솔내에서 한국인과 동거동락하며 살다 순교한 매캔지의 솔내교회의 요청으로 계속되었다. 일링 딩 선교단에 의해 침례교회가 시작되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1885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을 맺으므로 선교가 시작되었고 아관파천으로 1903년 축성식을 가졌다. 

 

제5편 선교부의 선교정책과 한국교회의 성장

 

네비우스 선교정책 : 선교방법론에 탁월한 네비우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원칙으로 선교사는 폭넓은 순회선교를 통해 전도하며, 성경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모든 예배단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으로 건축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하며, 엄중한 훈련과 치리를 해야 한다. 적어도 지역을 분할하여 일한다. 보통 3자정책으로 부르는데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전(自傳)이다. 선교지 분할 정책은 예양협정으로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북을, 남장로교회는 전라도, 충청도를, 캐나다장로교회는 함경도지역을 담당하여 선교하기로 합의하였다.

 

초기 한국 교회 급성장의 원인 : 한국에는 강력한 국교가 없었고,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 국내외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국왕이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보였으며 서구와 서구의 종교에 반감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전도열이 뜨거웠고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일찍 확보하였다. 한국이 문자와 언어의 통일이 되어 있었고 교인들의 기도운동이 뜨거웠으며 한국교회는 사회개혁과 애국애족의 교회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초기 선교사 순교자들 : 데이비스, 헤론, 윌리엄 메켄지, 기포드, 조지 렉, 헨리 아펜젤러, 월터 존슨, 안나 밀러 부인, 번턴 부인, 윌리엄 헌트 부인, 피터스 부인, 사무엘 무어, 전킨, 게일목사 부인등/ 어린 생명들이 의료시설이나 의사 부족으로 이국 땅에서 죽어갔다.

 

제6편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수난 

 

서민들의 입교 : 조선의 40년간의 기독교의 통계표는 다른나라의 1백년의 선교보다 더 나은 성적을 보고한다. 천주교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전도인 반면, 개신교는 아래에서 위로의 형식을 취했다. 특히 학교와 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기관이었고 교회는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가르침으로써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서민들의 기독교 입문은 이기적 내지 감정적인 부분이 많았을 것이며 국가가 이제에 넘어가는 불안한 상황에서 생명과 재산의 안전과 안정을 구한 것으로도 보인다.

 

지식층의 입교 : 그 동기는 초기에 유학자들이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심에 접함으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기독교를 통해 국가의 자주독립을 쟁취해 보고자 하였다. 기독교를 통하여 이 땅의 민도를 높이고 부국강병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보다 국가의 안위와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수난 : 가족 중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 이름을 호적에서 삭제하였고 쫓아냈다. 1888년에 ‘어린이소동’이 있었고 1894년 평양감사 민병석이 신자를 체포 구타한는 사건이 있었다. 1899년 경무사 김경준이 1900년 12월1일을 기해 국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기독교인을 박멸하려고 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천주교에 의한 박해도 있었으나 분별력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제7편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회연합운동

 

대부흥운동(1907) : 1903년 감리교선교사들이 원산의 바닷가에서 기도회를 갖었고 강원도에서 선교에 실패한 하디의 통회자복이 불씨가 되었다. 그때에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체험함을 목도하며 부흥의 불길이 시작되었다. 1906년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일주간 기도회를 갖었고 이때 뉴욕의 존슨목사가 방문하여 인도와 웨일즈의 부흥을 전해 주었는데 장로인 길선주가 일어났다. 1907년 장대현에서 열린 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졌다. 1907부흥운동의 직접적원인은 선교사들의 자성하는 성경공부와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 

 

길선주 목사 :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관성교 등 종교편력이 다양했지만 아무것도 그의 영적 만족을 주지 못했다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본 후 김종섭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907년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여 20년간 목회였고 1935년 11월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강대상에서 졸도한 뒤 하늘나라로 갔다.

 

대부흥운동 결과 : 기독교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 축첩, 노비소유 등의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하였다. 신자들의 전도에 힘입은 교회의 부흥이어서 1906년 54,987명에서 1907년 73,844명으로 34% 증가했다.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어 새벽기도회, 통성기도,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에큐메니컬정신이 구현되어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간에 갈등이 해소되고 형제의식이 굳어졌다. 

 

백만명 구령운동 : 1909년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갬불, 리드 등 3인이 사경회와 기도회를 갖은데서 비롯되었다. 이 운동 기간에 가난한 교인들은 물질로 헌금할 수 없었기에 시간을 바치는 ‘날연보’를 하였다.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 한국에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으나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의 비협조적 태도로 실패했다. 또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연합에 대한 열의 부족이라고 했다. 1905년 개신교 복음주의선교 협의회가 구성되어 연합학교, 신문위 연합 발행, 선교지 분할 문제가 이루어졌다. 

 

예양협정 : 장로교와 감리교는 지역분할을 한 후 그 지역내의 교인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선교지 분할과 교인들의 교환은 한국교회사의 가장 빛나는 에큐메니컬 정신의발현이었다. 

 

성서공회 : 1889년 문서선교를 위해 ‘죠선성교서회’가 조직되어 연합찬송가 발행, 연합교회신문, 주일학교 공과 등을 한국어로 출판하였고 1910년에 신약성경이 완역, 구약도 1911년에 완성, 출판되었다. 

 

제8편 교회의 애국과 사회개혁활동 

 

을미사변(1895)과 선교사들 :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한국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때 선교사들은 국왕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국왕, 대신들,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애국충군의 종교로 이해하도록 인식되게 되었다. 

 

춘생문 사건 : 을미사변후 연금된 고종을 춘생문울 통해 고종을 출궐하려던 사건인데 변절자의 신고로 실패했다. 우연챦게 선교사들이 연루되었지만 국민들의 눈에는 국왕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비쳤음에 틀림없다. 을미사변이 나고 4개월 후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하였고 고종은 1년후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고종의 탄신 기념행사 : 1896년 9월 2일 국왕 탄신일에 기념예배를 드리고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럼으로 이런 기회를 통해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황해도 은율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교회의 사회개혁활동 : 복음 선포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사회적 구원의 틀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의료와 교육이다. YMCA는 1903년 10월 게일이 첫 회장으로, 윤치호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기술교육, 체육교육, 운동 소개, 국민보건과 경기력 향상에 공헌하였고 사회계몽운동을 펼쳤다. YWCA는 3.1운동이후 여자전문학교와 중학교에서 비롯되었다. 종교적, 교육적인 출판물의 간행이었고 음주의 해독에 관한 교육 및 금주운동, 공창반대운동을 했다. 엡윗청년회는 1897년 복음선교와 사회봉사의 목적에서 조직되었는데 1905년 애국운동에 나서자 정치참여라는 이유로 1906년 해산되었다가 1920년에 재결성되었다. 

 

신분제도 타파 : 사농공상의 신분계급을 타파를 위해 기독교가 공헌했는데 1894년 갑오경장 때 23개 조항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실질적인 면에서는 교회가 앞장서서 이들에 대한 전도를 강화했다. 

 

한글전용 : 1893년 선교원칙을 보면, 가능한 한 성경을 빨리 번역한다는 것과 모든 문서는 순수한 한글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기전까지는(서른살까지) 세례를 받지 못했고 교회는 민족교화의 차원에서 한글교육에 열성을 다하였다. 언더우드는 한어사전(1890)을 간행했고 한글 통일 철자법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결핵/ 나병 퇴치 : 한국은 결핵의 온상으로 250만 중 결핵감염자가 5할이었고 100만명이 앓고있었다. 1920년 세브란스 병원의사인 스타이츠가 처음 결핵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고 셔우드 홀 부인은 결핵퇴치운동을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판매하여 기홀병원을 세웠다. 남장로교회는 잔남 광주의 제중병원을 세워 결핵환자 전문병원으로 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나병퇴치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어윈, 빈턴, 스미스에 의해 시작되어 1909년 부산에 처음으로 나병환자 수용소가 세워졌다. 장로교 총회에서도 나병에 관심을 깆고 특별헌금을 하기로 결정하여 12회 총회에서 12월 첫주를 나병원 연보주일로 지켰고 14회 총회에서는 근멸회가 조직되었다. 나병환자를 위해 애쓴 한국인은 최흥종으로 선교사 포사이드의 헌신에 감격하여 나병환자를 위해 살았다. 그는 나병근절협의회를 만들고 나병환자 모금운동을 펼쳐 소록도에 나병원을 세웠다. 특히 일본 황실과 총독이 지원금을 보내준 것은 특기할 만 하다.

 

맹학교 : 로제타 홀이 1894년 앞 못 보는 소녀 하나를 데려다 가르쳤는데 이것이 맹학교의 효시이다. 1915년에는 4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였다. 점자, 뜨개질을 가르쳤고 남자맹학교는 마펫 목사의 부인 앨리즈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회의 항일활동 : 교회의 방법은 복음적인 방법, 즉 비폭력, 무저항의 방법으로 항일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기독교인들은 태극기를 올렸고 국가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1905년 을사늑약이후 민영환이 자결을 했고 홍태순, 정재홍이 자결하였다. 장인환, 전명훈은 스티븐슨을 격살했고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격살했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습격했다.

 

경제적저항은 일본상품불매운동과 조세저항이었다. 도로, 시설을 위해 일제가 제공한 차관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금주, 금연, 탈환, 감선운동이 일어났고 1920년에는 조만식에 의해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 민족단결, 협동정신, 상부상조, 생활개선 등의 다양한 목적을 갖고 출범되었다. 

 

제10편 한국교회의 조직과 수난 

 

장로교회의 조직 : 1901년 마펫은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교육울 시작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1915년에는 등록학생수가 250명을 넘었다. 1907년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양전백, 서경조 등 7명이 첫 졸업했다.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창립노회를 개최하여 목사7명, 장로 53명, 교회988개, 세례교인 70,000명의 교회로 출발하였다. 1912년에 7노회로 총회가 창립되었는데 총회장은 언더우드, 부회장은 길선주 목사가 선출되어 한국장로교회는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총회 창립후 중국 산동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파송하였는데 크게 성공했다. 

 

감리교회의 조직 : 1908년 정동교회에서 한국연회가 창설되었고 남,북 감리교회는 각각의 조직을 운영하다가 1930년에 하나로 통합되었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 : 줄기찬 탄압과 박멸로 일관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기독교에 대해 유화적이었으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노골적으로 반기독교적 태도를 보여 1913년에는 모든 학생들이 국가적 축제일에 일본 천황의 사진에 절하도록 강요했다.

 

해서교육총회사건 : 장로교회 계통의 학교만도 1907년에 405개, 1908년 561개, 1909년에 719개로 늘었다. 1908년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해서교육총회가 조직되어 한 면에 한 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자고 다짐하였다. 안명근이 서간도에 학교를 세우려고 모금하러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었는데 일제는 해서교육총회의 회원을 모두 체포하였다.

 

105인사건 : 1907년 안창호가 결성한 신민회는 한국인들에 의한 학교들이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설립되었는데 일제는 105인사건을 ‘데라우치 총독모살사건’으로 규정했고 총독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기독교인들이 왜곡했다고 주장하여 목사 6명, 장로50명, 집사 80명을 포함하여 서북지방 지도자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다. 이 사건에서 선교사들과 미국 본국의 역할이 커서 일제의 음흉함을 세계에 폭로했다. 

 

기독교 학교의 탄압 : 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일본학생과 한국 학생들의 차별교육을 규정했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대학설립 인가를 청원했으나 거절되었다. 1919년까지 보통학교가 전국적으로 249개교에 불과하였다. 1915년 3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면서 성경교육을 정규시간에서 빼고 예배를 철폐하라는 규정은 학교의 존립과 관계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1910년에 2,080교가 1915년에는 1,154교로 다시 1923년에는 649개로 감소했다.

 

일본교회의 조선교회 간여 : 일본교회는 조선교회에 일본조합교회를 이식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앞장 선 와타세 츠네요시(渡瀨常吉)의 노력으로 1912년에 전국에 16개 교회가 일본 조합교회에 가입하였으며 총독부는 이 교회들에 보조금을 비밀리 지급하였다. 

 

교회내의 분쟁 : 전북 대리회 지역의 최중진 목사는 장로교회를 탈퇴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했다. 이유는 선교사에 대한 적개심인데 최중진은 사기죄로 체포되었다가 후에 일본 회중교회에 합류했다. 김장호는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을 부르짖고 나선 사람이다. 1918년 노회는 목사직을 박탈하였고 김장호는 노회를 탈퇴하여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하였다. 이만집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주동자로 활약하였는데 한 청년이 당회에 문제를 몇가지 건의한 것에 대해 출교와 책벌하자는 의견에 이목사와 선교사들이 대립하였다. 이 문제는 법정으로까지 비화하였고 이는 반선교사 정책을 쓰는 일제의 정책이 교묘히 작용하기도 했다. 

 

일제의 대한 정책 : 동화정책과 우민화정책,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고 퇴폐문화를 유입하여 공창,아편을 허락했고 교회를 조직적으로 억압하여 모든 일을 허가제도로 모든 교회활동을 철저히 제약했다. 

 

제11편 한국교회와 3.1독립운동 

 

3.1운동의 과정 : 신한청년단은 김규식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파견하였다.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구성하였고 2.8독립선언식을 동경YMCA에서 거행하였다. 국내에서는 기독교인 16인, 천도교측에서 15인, 불교 2인이 종로의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고 파고다에서는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행해졌다. 대개 기독교 학교가 있는 곳에서 그곳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퍼져 1920년 3월까지 사망자 7,645명, 부상자 45,562명, 체포자 49, 818명, 가옥소각 724채, 교회소각 59개소, 학교소각 3개교 등이었다. 

 

제12편 1920-30년대의 교회상황 

 

길선주목사의 사경회 : 민족 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길선주목사는 2년의 옥고를 치렀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요한계시록을 거의 외웠고 <말세학>이라는 계시록 강해집을 만들었다. 그의 종말사상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내세지향적으로 이끌고 간 것이 아니라 말세학에서 지상의 낙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독특한 신앙을 가졌다.

 

김익두목사의 이적집회 : 스왈른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고 성례를 받기전에 신약을 백번이나 읽었고 ‘기도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3회 졸업생인데 1926년 남대문교회에서 지식층청년들이 기독교신앙을 미신적으로 이끌어간다고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는 억압속에 있는 대중들에게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3.1운동 후에 용기를 불어 넣어 준 예언자였다. 부흥회수가 776회, 설교횟수가 2만 8천여회였다. 불행하게도 해방후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고 공산당 어용단체에 협력하고도 학살당하는 운명에 처하였다.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 : 개인의 영적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주님과의 합일, 이것이 그가 끌어낸 신앙의 결론이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열화 같은 반향을 일으켰다. 1931년 8월 황해노회는 이용도가 재령교회를 훼방하고 여신도와 서신을 거래하며, 불을 끄고 기도하고, 무교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금족령을 내렸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으나 세속화된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공격함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좁혔고 유명화에게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느모로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 그는 교회안에 분규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느꼈다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 간조우(內村鑑三)문하에서 공부하며 영향을 받았다. 1927년 귀국한 그는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과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기성교회의 교리, 주직, 예배의식을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갔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교회사적 사명을 강조하고 선교사들이 전해준 교파적 신앙을 거부하고 민족신앙을 주창하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 ‘2C’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는 Christ와 Chosun이었다. 

 

적극신앙단 : YMCA총무였던 신홍우는 민족주의적인 의식과 반선교사적인 경향을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반서북’, ‘반선교사’, ‘반보수’로 나타낸 운동이다. 

 

제12편 사회적변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공산주의 사상의 대두 : 레닌은 약소국가들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기에 뜻있는 지사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복음으로 들렸다.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였는데 기독교가 들어가 전도해야 할 대상을 공산주의가 침투하여 그 사상을 집어넣고 기독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연해주의 한인사회당, 바이칼호 근처의 이르크츠크 한인공산당지부, 아사원의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한인공산당도 여러 갈래인데,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상해파, 여운형의 이르크츠크파, 일본 유학생 중심의 엠엘파였다.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의 피해 : 한양청년연맹은 1925년 10월 주일하교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반대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성탄절을 ‘반기독교의 날’로 정하였다. 특히 동아기독교회의 윤학영, 김이주등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농어촌 문제 : 토지 소유권을 잃은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전문가인 러츠가 1920년에 내한하였고 숭실전문학교는 농과를 신설하였다. 특히 YMCA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0개의 농민지도소가 개설되고 ‘한국 농촌’이라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사회계몽운동 : 탄링의 강연회를 시작으로 절제회가 조직되어 금주, 단연,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다. 장로교선교사들은 공창폐지운동, 축첩과 잡기하는 폐습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국산품을 애용하고 이제 상품을 배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성경구락부는 1929년, 킨슬러에 의해 시작되었다.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야학을 시작하여 1938년 5천명으로 늘어났으나, 신사참배문제로 결국 폐쇄되었다. 한국전쟁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54년에는 7천명 이상이 공부를 하였다. 

 

신학적 갈등 : 한국의 신학적 갈등은 미국이나 일본에 유학한 해외파들에 의해 비롯되었고 지방색까지 겹쳤다. 표면화된 것은 송창근 목사의 사임이었고, 논란은 박형룡과 김재준이 대표적이다. 

 

제14편 일본 군국주의 통치하에서의 교회의 시련

 

황국식민화정책 : 신사참배,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 일본어상용등의 한민족말살정책을 통해 전 국민의 일치성과 한민족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일본화하려는 정책이다.

 

기독교학교에 대한 억압 : 일제는 신사참배는 종교적의식이 아니고 국민 한 사람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로 수행하는 종교성이 없는행위라고 역설하였다. 각급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 기독교학교를 굴복시키려 하였다. 결국, 숭의중, 숭의여중 교장인 매쿤과 스눅크는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1937년 이들 학교는 폐교신청을 하였다.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의 학교들은 모두 신사참배 절대 불가라는 입장을 가졌으므로 각급학교를 폐쇄하였다. 

 

교회교회지도자들의 굴복 : 로마 가톨릭은 1936년 종교행사가 아닌 애국적행사이므로 허용한다고 했고 이어 안식교, 성결교회,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회 까지모두 참배를 결의했다.

 

장로교회의 굴복 :친일파 김일선 목사는 평북노회장이 되면서 신사참배를 결정했고 9월 총회까지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굴복했다. 1938년 총회에서 일제는 반대하던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김선두목사등을 투옥시키고 경찰의 위협속에 회장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었으니 감옥에 가기 두려워 신앙의절개를 꺾고 우상앞에 절하는 애처로운 장로교회의 변절이 시작된 것이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 신사참배에 거부한 신앙인들이 2천명에 이르고 감옥애서 순교한 분들이 50여명 되었으며, 폐교된 교회만도 200여곳이 되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이사장 방위량, 교장 나부열 등 선교사들의 강경한 입장에 따라 폐교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주기철 목사 : 신사참배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그는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서 중생의 체험을 한 후 신학을 했다. 1938년 2월 신사참배를 반대하므로 검거당하였고 그는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일사각오로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였다. 그후 노회 명부에서 제명처분 되었고 산정현교회는 폐쇄되었다. 옥중에서 온갖 고문을받으며 5년 수개월을 보낸 주목사는 1944년 4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박관준장로 :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진정서를 작성하였고 13차례나 총독을 만나려고 했으나 실패한 후 안이숙을 대동하고 일본에서 정부 인사를만나 설득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자 일본 제국의회에 유인물을 살포하여 체포된 후 옥중에서 순교의 관을 썼다. 

 

제15편 교회의 마지막 변절

 

교회의 친일행각 : 1939년 종교단체법을 만들어 각 도시에 한 교회만 허용하고 신책 설치, 국미의례 및 수탈과 부역을 강요하였다. 감리교는 1940년 10월 일본정신의 함양, 일본적 복음을 결의하였다. 1942년 교회수가 750개 감소했고 교인수도 76,747명이 줄었다. 9월에는 전국장로교회가 국방헌금을 모은 돈으로 비행기1대, 병기 2정을 사서 헌납하기도 했다. 일제는 찬송가에 제재를 가했고 사도신경도 금지시켰고 예배5분전에는 천황의 사진에 요배를 하고 출정장병을 위한 기원, 황국식민서사를 한 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일제는 결국 기독교회 파괴 공작을 노골화하여 작은 교단들을 해체시켰다.(성결교, 안식교, 성공회등)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주권사상, 재림설, 반정론 및 평화사상, 극제적 제휴둥의 이유로 군소교단을 해체시켰다. 

 

혁신교단 : 전쟁 수행을 원활히 하기위해 장, 감이 통합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혁신교단이다. 또한 일본은 1941년 30여개에 이르는 교파를 통합하여 하나의 교회로 합동을 이루었다. 교회병합에 의해 없어진 예배당과 건물로 인해 생긴 돈은 모두 국방헌금로 전환되었다.

 

제16 해방후의 한국교회

 

1946. 9.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설립(박윤선, 한상동 목사)

 

한상동 목사 경남노회 탈퇴

 

1947. 4.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

 

1948. 2. 박형률 고려신학교장 사임

 

1951. 한국신학대학 문교부로부터 대학인가

 

총회신학교 개교,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의 합법성 부인

 

고려신학교파 소위 고려파 장로회 분리

 

1953 조선신학교파 기독교장로회 분립

 

1954 통일교 조직

 

1955 감리교에 전밀라 목사 안수로 한국 최초의 여목사 탄생

 

1955 전도관 창설(박태선)

 

1959. 9. 장로교 통합, 합동 양파로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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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중요인물, 사건, 단어

 

 

 

1)권철신 

 

유학자, 천주교 순교자, 교명 암브로스. 이승훈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 1777년 

 

천진암 등지에서 강학회를 열면서 사학 교리 연구. 1801년 신유박해때 정약용, 

 

이가환, 이승훈등과 함께 피체 사형됨.

 

 

 

2)길선주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개종. 김익두와 함께 재림주와 저나라의 소망을 강

 

조하여 3.1운동이후 그리스도인들을 불안과 좌절에서 종교적으로 해소 시키려함. 

 

1927년"말세론" 저술.

 

 

 

3)김 린 

 

옥중에서 이승만에 의해 교회 최초의 지식인 계급, 상류층의 교인이 됨.

 

유신회 일원으로 YMCA를 총독부의 사주로 늑탈하려던 1913년의 음모 붕괴. 

 

 

 

4)김대건 

 

조선인 최초로 신부 서품을 받음. 1846년 9월15일 새남터에서 순교. 그의 순교로 근대조선과 서양제국과의 접촉 표면화, 그 결과에 의해 쇄국배외.

 

 

 

5)김범우 

 

초기 천주교인, 세례명 도마. 이벽의 권면으로 입교, 가족과 친지 전도. 1785

 

년 명례방 자택에서 종교 집회중 체포, 홀로 단양으로 유배, 순교.

 

 

 

6)김익두 

 

27세인 1900년 교인됨. 1901년 재령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

 

10년 평양신학교 제3회 졸업생. 신유 이적 집회, 신사참배 솔선. 공산당에 의해 기독교연맹에 억지로 가입. 6.25동란때 순교.

 

 

 

7)김인서 

 

1932년 1월 신앙생활. [신학지남]에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를 기고. [신앙생활] 발간. (3.1운동후 신자들의 신앙적 인격과 지식을 향상시키는 목적) 신앙의 3대 강령은 복음, 역화, 인화를 체험 증거하기 위해 발간. 조선의 부활과 새 생명을 부르짖는 [신생명]의 필자(특징: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었으며 교파를 초월)

 

 

 

15)박희도 

 

3.1운동 거사 계획과 별도로 기독 학생 중심의 전민족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중 역시 기독 청년 운동의 지도자였던 YMCA간사 박희도는 학생 지도자들과 민족 대표들이 합작하여 공동 행동 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16)변성옥 

 

1925년-26년 감리교 협성 신학교 "종교교육" 교수 역임. 1924년 조선 예수교 연합공의회의 선정 찬송가 위원회 위원. 1931년 새찬송가 개정, 7인별위원으로 뽑힘. 1930년 발행된 "종교교육"지의 필진으로 수고. (기독교교육의 토착화를 목적)

 

 

 

17)변홍규 

 

1932년 4월 남녀협성신학교가 합동하여 실립된 "감리교 신학교"의 교장. 1940년 4월 신사참배 및 창씨 개명. 일본 학정등을 성토하는 격문이 살포 되었다는 이유로 학생들과 함께 연행되었고 국가봉공의 한 기관이 될 목적으로 설립된 "기독신문"에 "기독교사"를 연재했다.

 

 

 

18)서경조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인중 한명으로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대한민국 예수교 장로회(독노회)가 조직되었고, 독노회에서 목사장립을 할 때 목사가 되었다. 새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시무하였다.(1910 언더우드와 동시목사로서) 

 

 

 

19)서상윤 

 

서상윤은 만주에 있던 선교사 존 로스와 함께 누가복음을 1882년에 한국말로 번역하였고, 만주와 국내에서 권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고향 황해도 솔내에 1884년 한국인 손으로 지은 최초의 교회당을 설립했다. 1887년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20)서재필 

 

독립협회 창설자 중 한 사람. 1896년 11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를 설립함으로서 한국에서의 청년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21)소현세자 

 

병자호란으로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1644년 당시 북경 주교이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 선교사와 접촉을 갖게 되어, 최초로 서양과학과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28)유길준 

 

갑신정변으로 미국유학을 중단. 1885년 12월에 귀국. 반대파에 연금 되었다가 서양문물 소개하는 서유견문이란 책을 냄. 1895년 김홍집 내각의 개화정책 입안자로 음력폐지. 종두법시행 등 내정 개혁을 주도. 일제의 한국침략을 극구 반대.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함. 

 

 

 

30)유억겸 

 

1927년 감리교의 신흥우, 정춘수, 장로교의 함태영, 전필순 등과 적극신앙단을 창설, 기독교 청년회 회장을 역임. 국제 선교협의회 회원. 중앙 YMCA 회계로 활약하는 등 기독교 사회단체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함. 

 

 

 

31)유형기 

 

미 유학후 귀국 조선 감리교 교육국 간사로 취임. 다양한 종교교육사업 전개. 

 

1934년 어빙돈 단권 성서주석 출판. 흥사단 회원으로 활동. 해방후 조선 인쇄 주식회사 관리. 감신대 9대 교장 역임. 피난민 구제 사업과 교회 복구사업에 전력투구 4백여교회 재건. 

 

 

 

32)윤지충 

 

김범우 집에서 <천주실의> 교리서를 읽고 감명받음. 3년후 정약전의 가르침에 따라 세례받음. 1789 북경에서 견진성사 받고 귀국. 천주교 박해시 고발 33세로 전주에서 참수당함. 천주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중 한사람. 

 

 

 

33)윤치호 

 

상해 유학시 미남 감리교회에서 경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남 감리교인이 됨. 미국 유학후 남부지역 순회 강연을 통하여 한국을 소개하는 한편,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데 기폭제 역활을 감당. 캔들러 및 알렌에게 한국 선교를 착수토록 간청. 을미사변후 선교기지 개성에 마련. 

 

 

 

35)이승훈 

 

1783년 북경에서 세례받음.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서 1784년 3월에 귀국. 

 

선교는 서울근교에서 5년동안에 신도수를 4천정도로 불림. 그러나 이벽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역사의 효시를 이루었지만 배교를 하고 세상을 떠남. 

 

 

 

36)이승훈:1864-1930. 장로교 장로. 독립운동가. 33인중에 1인.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자수성가하여 갑부가 되었고 1899년 정주 용동에서 사숙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을 하였고, 1907년에 안창호에 감화받아 교육,민족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강명의숙, 오산을 설립하였으며, 1910년에 기독교에 입문하여 기독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교육을 시도하였다. 평양신학교에 수학은 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하였다.

 

 

 

37)이가환: 1742-1801.천주교인.순교자.실학자.

 

1784년 3월 이승훈이 수십종의 교리서 십자가상 성화 묵주 들을 가져와 이벽에게 넘겨주니 이벽이 교리서 들을 읽고 감탄하여 중인계급에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이가환은 이벽을 찾아가 3일간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굴복하였으나, 자신은 정식교인이 되는 것을 꺼렸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권유하였다. 

 

1792년 신해사옥 이후에는 박해자로 변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관직에서 밀려나자 입교하였으며, 그는 1801년(순조 1년) 2월 24일 향년 60세로 순교하였다.

 

 

 

38)이기선: 장로교 목사.신사참배 반대.27세에 입교.33세인 1911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으며, 1937년 상단교회에서 매일 성경 한장씩 강해하였으며, 그때 목회자가 되기로 17명이 작정하였는데 그 중에 한 분이 김창인목사이다. 1949년 5월에 독노회를 조직하였으며, 혁신복구파(고려파와 일맥상통함)로서 활동하였다.

 

 

 

45)이수정:1842-1886.초기 기독교인.성서번역가

 

1882년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1882년 9월 도일하여 그해 성탄절,츠다벤의 안내로 예배에 참석하였고, 1883년 재일 장로교 선교사 녹스의 입회하에 토오쿄오 노월정교회에서 야스가와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5월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하여 한국어로 특별기도순서를 맡았다.

 

이어 이수정은 요14장으로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고, 1884년에 순한글성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히]를 번역하였다. 그밖에도 한국 개신교의 선교실시를앞당기도록 한 노력이다. 1883년에 외국선교잡지에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실었고, 개화당의 주요인물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들려 보냈다. 그는 1886년 귀국 즉시 애국충정이 오해된 가운데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6)이용도:1901-1933.감리교 목사.독립운동가.부흥사. 시변리 교회 전도부인으로 있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 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924년 한영서원 재학중에 3 1운동에 가담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는 등 4차례에 걸쳐 3년여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런 당시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 왓슨선교사는 그를 협성신학교에 추천하여 입학하였고, 1928년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에 기도 중 환상을 본 이후로 부흥사로 활동을 하였으며, 1930년 연합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1931년 순회부흥사로 활동하였다. 그의 부흥회는 회개,

 

기도,사랑이었다. 그는 지병으로 33세가 되던 1933년 10월 2일 원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47)이응찬:장로교의 초기신자. 성서번역인.로스역 성서번역에 참가하였다. 매킨타이어의 조선어 교사. 1875년 백홍준,이성하,김진기등과 우장에서 매킨다이어에게 세례받음.

 

 

 

48)임기반 

 

초기 안식교인. 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가 이민동포들을 계명하며 감리교회 전도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신민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1904년 귀국선상에서 송홍조를 만나 안식교인으로 개심하여 전도사업에 헌신.

 

 

 

49)전덕기 1875.12.8-1914.3.23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1892년 미 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톤과의 인연으로 기독교에 입교, 세례를 받고 1907년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음. 상동교회에 부임,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 그의 목회는 남대문 시장의 천민과 상인들을 위한 희생적 목회로 널리 알려졌다. 상동청년 학원을 설립하고 항일 민족운동을 추진했으며 일제의 조작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3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57)주기철 

 

장로교 목사. 순교자. 호는 소양. 김익두목사의 설교에 감명받아 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25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 

 

35년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최고에 이르던 시기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 부임. 신사참배 반대로 검속. 38년 총회직전에 두번째 검속. 39년 농우회 사건으로 옥고. 40.7월 옥중 순교. 

 

 

 

58)주문모 (야고보)

 

중국인 신부. 순교자.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신부로 중국 소주에서 태어나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설립한 신학교에 입학 중국인으로는 첫 졸업생. 이후 북경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794년 입국하여 조선에서 최초로 성사를 집전하였다. 정약종, 강완숙, 황사영 등과 함께 교회를 세웠으며, 명도회를 창설 천주교리서 집필 및 번역활동에 힘썼다. 그러다 신부의 체포령이 내리자 6년동안 숨어 전교 하다가 신유박해가 일어나 중국으로 피신 

 

가던 중 마음을 돌이켜 다시 서울로 와서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59)주시경 

 

한글학자. 민족운동가. 호는 한힌샘. 배재학당에서 수학했으며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 하였다. 뒤에 [협성회]를 만들고 [독립신문] 편집에 동참했으며 [국문동식회]를 창설하여 한글보급에 힘썼다. 1907년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었고, 상동청년 학원에 국어 강습소를 열어 우리말을 통한 애국계몽에 진력했다. 그의 종교는 상동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로 기독교로 추측되나 민족종교에 심취한 대종교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 급병으로 별세했다.

 

 

 

60)채정민 1872-1953. 장로교 목사. 

 

최초의 개신교 세례교인중 한사람인 이성하, 최일형의전도로 믿기시작 그후 마을에 열심히 전도하였는데 이것이 설매동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1900년부터 조사가되었고 1907년 대 부흥운동때 회개에 앞장섰으며 스스로 부흥집회를 인도하여 부흥운동의 확산의 계기를 가져 왔다. 3.1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 났을때 분명히 반대입장을 표명함으로 두차례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국기에대한 경례를 반대하여 철회하게 하였다. 김관근 목사와 함께 구식 철자법으로 된 성서의 문체를 현대식으로 고칠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오늘의성서 문체를 확립하게 하였다. 

 

 

 

61)채필근(1885-1973) 평남 출생.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길선주 목사의 사경회 참석후 적극적으로 신앙 생활하였다.

 

7년간 용산리 교회에 설교를 맡아 봉직 하였으며, 10년동안 함북 만주지역을 맡아 교회를 순회하며 돌보았고 20여곳에 교회를 세웠다. 1918년 11회로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일본 유학에 올랐으며 유학시절 한국 YMCA 이사장을 역임 하기도 하였다. 귀국후 숭실전문학교, 장대현교회 등에서 봉직 하였다. 평양 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원> 설립 운동을 벌여 1939년 승동교회에서 최초의 한국인 설립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40년 평양신학교의 재건으로 초청을받아 그곳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1943년 종래의 장로교 총회가 일제의 종교 정책에 순응 <일본기독교조선 장로교단>으로 재조직될때 그는 초대 통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6.25후 부산신학교 교장으로 6년간 봉직하였다. 그는 종교 , 철학, 역사, 심리학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입장은 중도적 입장이었다. 

 

 

 

62)최관흠 1877-? 장로교 목사, 시베리아선교사, 평북 정주 출생.

 

그는 정주 염방교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1909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받음. 노회로부터 시베리아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어려움속에서 선교하던중 소환명령을 거절하고 1913년 러시아 정교회로 전향하고 말았다. 그는 면출되었으나 후에 다시 장로교 목사로 복직되었다. 

 

 

 

63)최봉석 1869-1944. 장로교 목사. 전도인. 순교자. 별명 최권능. 평양출생

 

1913년 6회로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평북노회에서 만주지방 전도목사로 파송받아 28처 교회를 설립하였다. 1923년 남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귀국하여 산정현교회 전도목사가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전도하였다.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공개적으로 반대하였으며 이로인하여 경찰로부터 피신해 있다 1939년에 체포되었다. 그는 감방에서 취조를 당할때도 " 예수 천당"을 외첬고 죄수들에게 전도하였다. 40일금식을 감옥에서 행하였으며 그로인하여 쓰러져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결국 회복하지못하고 별세하였다. 그가 세운 교회는 70여곳에 이른다. 

 

 

 

70)Adam Schall. 1591-1666예수회 중국선교사. 한자명 탕약망 (탕약망)

 

병자호란으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친분을 맺게되었다. 순치제의 배려로 소현세자가 귀국할때 샬은 그에게 천문, 산학, 성교에 관한 서적과, 여지구, 천주상등 서양물품들을 선물로주었다. 

 

 

 

72)C.C.Dallet 

 

저명한 예수회 사학자로서 <조선성교회사>를 저술했다. 이것을 류홍렬 교수나 백낙준 박사는 <한국천주교회사>로 불렀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의 초기를 쓴 그는 불란서 천주교 사학자이다. 그는 한국의 종교는 조상숭배라는 형태밖에는 없었다고 말한다.

 

 

 

73)J.McIntyre 

 

존 로스목사의 동료로서 그와 함께 누가복음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이응찬이 그에게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 개신교 사람이 되었다. 존 로스목사와 처남 매부 지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만주 선교사. 1882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도움으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예수셩교 요안다 복음젼셔>를 3천부 발행

 

 

 

76)F.A.McKenzie 

 

한국인은 예배처소가 하나도 없다고 보고.(The Tragede of Korea 서술) - 구한국과 기울어가는 역사 서술.'한국의 비극' "런던 데일리 메일"지의 종군기자. 특파원으로 두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일본의 침략정책을 취재. 그의 활동은 두절된 외국과 한국민과 한국교회의 협력에 주요 역할.

 

 

 

78)Feron 

 

청에 가있던 프랑스 선교사로서 75번 참조.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강원도 만산과 경상도 서북부 지역에서 활동.

 

 

 

80)G.J.Machen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서 보수신학의 영수. 박형룡 박사가 많은 영향을 받음. 

 

미국 장로교 목사. 신학자. 프린스턴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세력하에 들어가자 사임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 나중에 북장로회에서도 파면.

 

 

 

82)H.G.Appenzeller 

 

미감리회 목사. 한국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1886 감리교 교리서 한글로 번역출간. 배재학당 설립. 언더우드와 함께 지방 전도여행도 하게 되었다.

 

 

 

85)H.N.Allen 

 

구한말 주한 외교관. 선교사. 의료인. 처음엔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상해에서 활동했으나 1884.9월에 한국에 옴. 선교사의 신분을 감추고 공사관에 소속된 의사로 활동. 고종의 신임을 얻고 시의가 됨. 1885년 광혜원 설립.

 

 

 

86)J.G.Goucher 

 

미국 감리교 목사. 교육자. 1883년 민영익을 비롯 한국 최초의 방문사절단을 가차안에서 만남. 한국 선교의 필요성 인식. 그의 활동으로 아펜젤러 내외, 스크렌톤 내외, 그의 모친 등 5명을 한국의 선교사로 보내게 됨. 1907년 한국방문. 감리교 협성 신학의 설립의 기초를 닦기도 함.

 

 

 

87)J.Gale 

 

캐나다에서 출생한 선교사. 교육가. YMCA로 부터 선교사 임명. 1890년 성서공회 전임번역 위원으로서 성경번역. 북장로교에 소속되면서 마펫과 함께 순회전도. 황성기독교 청소년 창립위원.

 

 

 

88)J.R.Mott 

 

미국 감리교 평신도 지도자. YMCA운동의 지도자 에큐메니칼 운동. 그로인해 W.C.C도 탄생. 1907년을 비롯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기독학생 운동을 비롯한 실질적인 기독교 운동을 고무.

 

 

 

89)K.A.F.Gutzlaff 

 

독일인 선교사. 중국학 학자. 중국개척선교사 모리스에게 감화를 받고 중국 선교 결심. 1832년 7월 린제이와 함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인 로오드 앙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한국에 도착. 성경과 전도문서와 의약품을 나누어 주고, 감자종자를 주며 심는법과 저장법을 가르쳐 줌. 서생 양이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 한반도를 방문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최초의 한글성서번역자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90)M.C.Fenwick 

 

그는 침례교 목사로서 터론토 대학의 Y.M.C.A 의 파송을 받아 1889년 12월 8일에 인천을 통하여 입국하였다.펜위크 목사는 여러지역에서 열렬하게 전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는 본토인이 하는 것이 훨씬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토착화를 부르짖은 선교사다.

 

 

 

93)O.R.Avison 

 

애비슨은 의사로서 제중원에 개설된 의학부가 1899년에 정식으로 의학교가 되자 초대교장이 되었다.그는 민비의 시해 이후에 고종의 신변 주위를 왕래하면서 식사를 검색하여 함독의 유무를 살폈고,언더우드등과 함께 고종의 벗이 되어 고종으로 하여금 고독과 공포에서 안정을 하도록 도와 주었다.

 

 

 

96)P.P.Maubant 

 

나 신부(P.P. Maubant)는 1836년1월 10일에 정하상,조신철등 5명의 교인을 만나서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다.그는 1836년 1월 25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유방제 신부의 집에 짐을 풀었다.그는 3년 6개월동안 선교하였고,또한 외방 전교회의 기본 방침에 따라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여 소년들을 몰색하고 이들를 교육하였다.

 

 

 

97)R.A.Hardie 

 

하디는 캐나다인으로서 남 감리교 선교부에서 일하였다.그는 강원도 북쪽에서 몇해 동안 애써도 결실을 얻지 못하다가,1903년 원산에서 있었던 선교사들의 기도와 성서연구에 참석하여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하였다.그는 대 부흥운동에 시발점에 있었던 사람이다.그는 사경회에 임하면서 정치적 교회적 상황을 부흥운동을 통하여 벗어나려 하였다.

 

 

 

98)R.J.Thomas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받고 중국에 선교사로 왔다.그 후 이 선교사는 북경에서 조선내에서의 카톨릭 수난을 알게 되고 조선에 들어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그는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와 1866년 병인 교난이 충천하던 때에 평양의 대동강에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한국 병사에게 성서를 주면서 아깝게 세상을 떠난 우리나라의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였다.

 

 

 

99)R.W.Schufeldt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변에서 소실되자, 주청 미국 대리 공사 월리엄스는 청국정부에 조사를 의뢰하였고,회답을 들은 후 1866년 12월에 군함 워츄세트호를 황해 연안에 파송하였는데 이 군함의 함장이 슈펠트다.또한 그는 1822년 5월 22일에 제물포 산양의 천막에서 조선의 김홍집, 신 헌 사이에 한미수호조약을 맺었다.

 

 

 

101)W.H.Taft 

 

태프트는 한국 교회의 반일 애국의 용단과 행동이 을사 보호 조약 체결을 전후해서 구체화되어,보호조약의 음모가 진행되던 1905년 6월에 하와이 동포들이 목사 윤병구를 대표로 선출해서 보내었을 때,미국 육군 장관으로 소개장을 써준 인물이다.

 

 

 

102)H.J.Davis

 

 

 

103)105인 사건 

 

105인 사건은 안명근의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황해도 일대에 교계인사와 지식층이 160명이 검속 되었는데,이 중 고문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과 병사한 사람을 제하고 123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에 기독교인이 105명이었다.이들은 1915년 까지 다 풀려나왔으나,이 사건은 일본과 한국이 최초로 그 정신적인 면에서 대결한 싸움이였다.

 

 

 

106)경교 

 

네스토리우스가 파문을 당하고,그와 그 일파는 페르샤에서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여,동방선교의 꿈을 심었고,여기서 훈련을 받은 학생들이 인도나 중국으로 복음의 소식을 전하였다.이때 기독교가 중국에서는 경교로 불리었다.(635년)이 경교가 신라와 접촉했을 가능성을 몇 가지사건으로 살펴볼 수 있다. 

 

 

 

107)광혜원 

 

1884년 12월 4일에 있었던 갑신정변,즉 우정국 사건으로 민 영익이 칼에 맞았다. 

 

민 영익의 부상을 알렌이 치료하였고,알렌은 이 일에 기초가 되어 1885년 4월 10일에 광혜원의 설립허가를 받았고, 4월 23일에는 제중원으로 개칭하였으며,1894년에는 왕립 병원체제에서 그 경영권이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 되었다.

 

 

 

108)교회 재건안 

 

출옥성도들이 해방 직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모여서 한국 교회 재건에 관해 합심기도 후 1945.9.20에 발표한 원칙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통회자복할 것.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하게 할 것.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등이다.

 

 

 

109)그리스도신문 

 

건양 2년(1897) 4.1 언더우드가 편집하여 창간하였으나 그의 개인 경영이라 해서 선교부의 인정이 없어 1901년에 폐간 되었다. 종합적인 편집과 편집기술이 특징이며, 다채로운 기사를 실었다. 1905년에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신문으로 발전하였다. 길선주가 이 신문을 통하여 믿음을 얻었고 한국 정부의 구독으로 상당히 발전하였다. 

 

 

 

111)기독교도 연맹 

 

46.11.28에 조직된 북한 노동당 어용 외곽기구로써 왕년의 부흥사 김익두 목사와 산동성 선교사로 갔던 박상순 목사를 감언, 공갈로 가맹시킨 다음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악이용하며, 교회의 이름으로 남한을 공격하고, 김일성을 절대지지하며,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결의문을 발표케 함. 상부구조만 있고 하부조직이나 성원교회가 하나도 없는 괴뢰 조직으로 정치적 목적의 단체.

 

 

 

113)대한 그리스도인 회보

 

1896년 2월에 주간신문 '조선그리스도회보'로 창간되었다. 1897.12.8에 '대한그리스도인회보'로 재개 되었다. 편집자는 아펜젤러. 신문의 내용에는 새로운 지식의 계몽, 교회소식, 농사개량 등 과학소개, 주일학교 공과, 해외소식, 국내소식 등이 기재되어 있어 기독교 전도는 물론 서양의 새지식, 새소식을 전하여 주는 기관이 됨.

 

 

 

114)독노회 

 

1907.9.17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노회'가 조직. 네 장로교(미남,북, 호주, 캐나다) 선교회와 그곳 총회의 인준으로 설립되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을 목사로 장립.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실현하기 위하여 만국 장로교 연합공의회에 대하여 조직을 통지하고 그 명부에 기입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

 

 

 

118)백만인 구령운동 

 

1909.9 남감리회 연회에서 시작. 20만 교인으로 대강 산술되는 교회로서는 대담한 표어였다. 선교사들은 1907년대의 국체의 위난이 교회성장의 동인이었다는 점에 너무 오래 기대고 합병전후의 '절망감, 그 실패의 비굴감, 자치국 상실의 좌절감'이 다시한번 이 비율 높은 교회 성장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쉽게 믿었다. 그래서 월버 챠프만, 찰스 알렉산더 같은 당대의 부훙사들이 원정 출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기가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상 최초의 잘 계획된 복음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본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 선교의 동기는 꼭같은 요인으로 두번, 세번 성공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겨줌.

 

 

 

119)복음교회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최태용이 한국적 기독교와 영적 기독교를 주창하여 35.12.22에 서울에서 교단 창립을 선언함. 신앙고백과 표어를 채택하고 '복음교회'라 했다. 그리스도의 순육과 영의 기독교를 표방하며 일종의 초교파적인 공동체를 목표했다. 

 

 

 

123)성교촬요 

 

 

 

124)성서조선

 

1927년 7월 창간된 기독교 계간잡지. 조선성서연구회 중심인물(김교신, 함석헌등)의 노력으로 발행되던 무교회주의 계열의 신앙잡지이다. 후에는 김교신 개인잡지 형태로 발행되다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1942년 3월 폐간 되었다.(158호로) 

 

 

 

125)솔내 

 

1873년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와 함께 사상륜등과 함께 만주에서 성서번역작업을 한다. 이 서상륜은 이들에게서 복음을 전해듣고 권서인이 되어서 열정적인 전도에 들어간다. 그는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솔내(송천-구미포)에 가서 가족과 함께 복음을 전파해서 한국 최초로 한국인의 손으로 교회당을 세웠다. 솔내는 우리 교회 역사상 발상지이다. 이 교회는 그 지방 사람들에 의해서 설립 운영 되었으며, 거의 몇해 안되어 마을의 거의 모든 성인이 교인이 되었다.

 

 

 

126) 시파/벽파

 

신유교난(1801)시 조선조의 붕당이 사도세자 문제로 시파와 벽파로 나뉨.시파-대부분 남인의 시서파로 사도세자에 동정한 파벌.정순왕후는 서교를 탄압하였다.

 

 

 

130) 안악사건

 

신민회와 교회세력을 망라한 민족운동의 거점이던 이 지역의 교세를 발본색원하고자 꾸민 일대 참극.조선총독부는 황해도 지방의 민족주의사상과 신문화운동을 말살하려는 음모가 성공하자 평안도 중심으로 기독교 탄압.

 

 

 

131) 예수교신보

 

1897.4.1.언더우드간행.그리스도신문 - 1905장감연합신문 - 1907예수교신보 - 

 

1915기독신보.편집목표-만물이치인식,책번역,학당설립,연설,신문반포.

 

 

 

132) 육영학원

 

1888.언더우드가 학당설립을 정부에 청원 "귀국의 유망청년들을 가르침으로 커다란 이득을 이 나라에 끼치고자 한다"그러나 정부는 설립을 불허.

 

 

 

133) 이북 5도 연합회

 

1945.11.14.평양에서 평안도,함경도,황해도 지방의 노회대표들이 회집.잠정적 총회대행기관을 설립.            1.잠정적 총회대행 2.교단규칙 존속 3.전국교회의 과거죄를 자복 교역자는 2달간 근신 4.신학교경영 5.독립기념전도

 

137) 자강회

 

기독교 청년회와 연합하여 친일 일진회 신문사파괴. 애국독립운동기관.

 

 

 

138) 장감연합협의회

 

장,감의 에큐메니칼 운동.1918.5조직. 목적-1.기독교내의 양교회 일치정신과 친목도모 2.양교회의 협력 그러나 두교회의 신경,예배모범,치리권은 불간섭.장로교-만주,감리교-시베리아 3.양교회교역협력,상호지식교환,사업조직확장.

 

 

 

139) 장로교 신학교육원칙

 

1896.남장로교의 W.D.Reynolds가 규정. 대의-1.목사는 영적경험을 소유한 영적인간 이어야 한다 2.성서말씀을 핵심적으로 가르쳐서 기독교회 중심의 역사와 진리를 철저히 교수 3.목사의 교육정도는 한국교인의 지적 수준에 상응하는 정도 결국 한국교회 신학의 빈곤성을 초래. 

 

 

 

140)재건파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파. 해방후 이들은 한국교회와 일제의 강요에 굴복했던 교회지도자들에게 철저한 회개와 숙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지나친 독선적 자세와 교권을 쥐고 있던 제도권 교회지도자들의 반발로 숙정작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들간의 노선갈등으로 합치된 재건운동의 전개는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141)적극 신앙단 

 

1932년 당시 YMCA 총무였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초교파 신앙운동단체. 이들은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계시, 하나님 주심주의, 평등, 자유, 봉사 등의 적극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YMCA 조직을 이용하여 신앙운동을 전개했으나 한국교계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민족주의적 색체로 인해 일본의 심한 견제 속에서 와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적극적 갱신과 선구적인 방향성등이 평가 될만 하다.

 

 

 

147)조선기독교 연합회 

 

145)조선 신궁 

 

149)조선물산장려회 

 

151)조선전시보국회 

 

152)조선책략 

 

153)창문사 

 

157)춘생문 사건 

 

158)출옥성도 -- 재건파 

 

 

 

159)토사교문 

 

토사주문(토사주문)과 토사교문(토사교문). 신유교난(1801)을 거친 후 중국에 보낸 천주교 박해에 대한 설득과 이해를 청하는 주문 및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반포한 교문. 당시 대제학 이만수가 지은 것으로 주문은 혹시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희생자들 중에 있을 것을 두려해서 청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변명하는 내용이고, 교문은 천주교 박해의 경위와 이유를 설명하고 처벌내용과 앞으로의 전교를 금할것을 엄명하고 있다. 

 

 

 

160)파리외방전교회 

 

1658년 7월에 파리에 창설된 천주교 선교단체. 이들은 수도 서원을 하지 않은 재속 사제들을 포교지에서 3년간의 수사기간을 거친 후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에는 1825년 한국천주교회가 신부파송을 교황께 요청하자 교황청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이를 의뢰, 지금까지 170여명을 한국에 파견하였으며, 김대건 신부를 사제서품케 했으며, 기해교난때는 순교자들도 있었다. 현재는 서대문구 충정로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165)혁신교단 

 

감리교에서 일어난 일종의 군소교단 운동으로 신약성서를 기초로 하여 교의를 선포하고 구약성서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일체 없애기 위해 구약성서를 새로운 해석교본에 의해 해석, 가르쳐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감리교 내부의 반발로 결국 해체됨.

 

 

 

166)협성신학교 

 

1907년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조선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감리교 신학교이다.

 

 

 

167)협성회

 

이승만과 서재필을 중심으로 1896년 11월 배재학당에서 세워진 한국 최초의 청년운동단체이다. 

 

 

 

168)황국협회

 

독립협회 주도의 개혁운동에 반대하기 위하여 수구, 보수세력이 조직한 단체로서 독립협회 주도의 개혁운동에 저항하여 사회 불안을 조성하였다. 결국 두 단체 모두 1898년에 해체됨으로 독립협회 주도의 개혁운동은 중단되었다. 

 

 

 

170)황민 공동회

 

 

 

172)Commity Arrangement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에서 남긴 업적으로 선교 지역의 분할 정책을 뜻한다. 이것은 선교단체가 여럿이기 때문에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없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연합적으로 분할한 프로그램이다.

 

 

 

175)Korea Mission Field 

 

1905년 언더우드 부인이 주간으로 발간한 것인데 여기에 한국선교와 교회성장에 관해 자세한 보고와 자료가 풍부하게 들어있는 광범위한 편집체계로서 교회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1942년 폐간 되었다. 

 

 

 

176)Korea Review 

 

1901년 창간된 잡지로서 한국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선교사들의 논단이었다.

 

 

 

 

 

8)김인준 

 

1926년 구약 번역 작업의 개역위원. 공인역(개역)성서 번역 위원. 1936년 1월 21일 부터 1938년 7월 19일까지 계속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보"의 집필인. 

 

1923년 "조선 야소교", "장로교 신학교우회보" 편집인.

 

평양신학교 교장 역임. 1947년 소련군에 잡혀 순교.

 

 

 

9)김창식

 

1901년 북감리교회 집사 목사로 장립. 입교 예식과 결혼식 거행권을 부여받음. 

 

1894년 청일전쟁 직전에 평양교회 박해로 수난, 선교사들의 힘으로 어명으로 석방.

 

 

 

10)남국억 

 

상동감리교회 청년회의 "성동 청년학원"에서 영문학 가르침. 독립협회 주도. 

 

교회의 지향은 겨레와의 운명적 공감이라 생각.

 

 

 

11)남궁혁 

 

1926년 발족한 신약 개혁자 회의 개역위원으로 1930년 남장로교의 크레인과 함께 참여. 공인역(개역)성서 위원. 1911년 "주일학교위원회"의 13인 실행위원중 한명. "신학지남"의 편집인으로 신학발전에 기여. "종교교육"의 필진. "반도지광"의 편집인. 1934년 장로회 23회 총회에서 신약전서를 신철자화 할것을 청원 가결. 6.25전란때 납치 됨.

 

 

 

12)민영익

 

미주에 파견된 "특명전권공사". 감리교의 한국 상륙에 공헌함. 가우처목사를 만나 선교동기 부여. 1882년 8월 김옥균과 함께 일본 국정 사찰. 갑신정변시 알렌의 의술로 회복. 기독교와 왕실을 가깝게 함. 1884년 9월 육영공원(근대교육 실시기관)을 고종께 건의하여 발족.

 

 

 

13)박관준 

 

장로. 독립운동가. 의료인. 순교자.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후, 1905년 기독교에 입신하여 의학을 공부, 개천군에 십자의원이라는 병원과 군우리교회를 설립해 의료선교를 폈다. 일제의 신사참배등 탄압이 가중되자, 그 정책적 부당성을 국내외 관계자들에게 지적, 굳건한 소신과 적극적인 방법으로 항일운동과 반침운동을 벌였다. 1939년 일본 제국국회의 의사당에 밀입하여 의회 진정서를 뿌린 사건으로 41년에 투옥 금식기도로 병을 얻어 평양 기독병원에서 별세했다.

 

 

 

14)박인덕 

 

여성 독립운동가. 교육가. 이화학당을 졸업후 모교에서 강의,3.1운동에 가담해 옥고 치른 후 대한애국부인회, 적십자회 총지부 임원으로 지하 운동 계속했다. 

 

그후 콜롬비아대학원을 졸업하여 미국내에서 200여회의 강연을 가지면서 한국을 알렸다. "인덕 실업학교" 창설.

 

 

 

22)송창근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교를 졸업. 1931년 덴버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받고, 평양 산정현교회 시무. 37년 10월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름. 특히 보다 진보적인 신학사조의 소개에 있어 큰 역할을 감당했다. 해방후 조선신학교장에 취임 바울교회 개척 시무. 납북되어 사변중인 51년 7월 별세하신 것으로 전해짐.

 

 

 

23)신석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인. 순교자. 1908년 기독교에 입교. 민족운동과 전도활동에 나섰다. 1917년 목사안수를 받고 서울 수표교회 담임목사로 재임 중 3.1운동을 맞아 2년반동안 옥고를 치름. 또한 일제 말기 신사참배 반대 입장으로 곤경에 처했고, 1946년 3.1절 기념방송사건으로 구금. 48년 9월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사건]으로 다시 검속. 6.25때 총살됨.

 

 

 

24)신흥우 

 

1901년 부터 독일어 학교에서 어학공부를 하면서 토요일 오후마다 토론회를 열어 개화사상과 독립의식의 선양에 참여하다 190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1911년 배재학당 학감에 취임, 이듬해 최초의 한국인 학당장이 되었다. 18년 [배재학보]를 창간, YMCA에서 농촌운동에 힘씀. 27년 장.감 양교파의 주요 교계 지도자를 규합하여 기독교회의 적극적인 대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48년 영자신문 창간.

 

 

 

25)양전백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일인. 최초의 장로교목사 7인중 일인. 1892년 김관근의 전도로 서울 도사경회에 참석하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구성신시교회를 창설하고 1894년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받음. 96년 휘트 모어 의료사가 되었고 선천선교부의 개설과 함께 서천읍교회를 시작했다. 1907년 최초의 7인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1909년 선천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뤘다. 또한 3.1운동 당시 시위를 주도 3년동안 옥고를 치루고 선천에서의 목회와 학교 사업, 저술활동에 전념하던 중 별세.

 

26)양주삼 

 

감리교 목사. 한학을 수학한 수 1898년경 기독교에 접하고 그 이듬해 입교를 결심. 파커에게 세례를 받음. 1930년 한국에 각기 선교하던 미국,남북감리회가 합동하여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조직하는데 주역이 되었고, 그 초대 총리사가 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만주지방선교 관리자로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해방후 초대 대한 적십자사 총재에 취임 6.25 사변중 납북됨.

 

27)오기선 

 

1908년 노블선교사에 의해 함종교회 전도사로 정식 파송됨. 1911 협성신학교 1회 졸업 안수. YMCA운동에 적극 가담. 일본에서 유학생을 위한 교회개혁. 귀국후 3.1운동 만세 준비에 참여. 특히 천도교와 연합운동이 영향력을 발휘.

 

 

 

29)유명화 

 

1927년경 원산의 감리교회 소속으로 자기에게 예수가 친림했다고 말함.

 

 

 

34)이 벽 

 

조선교회 창설의 공로자. 이승훈을 북경에 가서 수세케 함. 중인계급 상대로 전교에 힘씀.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에게 전교. 1785년 김범우 집에서 안수 받지 아니한 채 신부의 소임 이행. 그러나 후에 모진박해로 배교를 하고 죽음.

 

 

 

39)이기풍:1865-1942.장로교 목사.순교자.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 1회 신학생이 되었다. 청일전쟁으로 원산에 갔다가 이곳에서 신도들을 박해하다가 전군보에게 전도를 받고 회개하여 1894년 스왈른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1903년 마펫의 권고를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한국의 최초의 목사안수를 받게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선교사로 제주도로 가도록 임명되었으며, 1908년에 상륙하게되었으며, 성내교회를 비롯하여 여러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회장, 1921년 제 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936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고문으로 건강이 약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고 1942년 6월 20일 우학리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40)이능화:1869-1943.구한말 초기의 국학자로 한국문화와 사상을 연구함. 구한말 관료이자 장로교 장로가 된 이원긍의 장남(독립협회에 활동을 하다가 투옥, 방거의 입옥, 전도로 기독교도가 됨). 

 

그러나 이능화는 불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불교도였으나 선친의 종사한 기독교역사를 정리하여 부군을 추모하는 정성으로 삼았다. 1928년 저술된 [조선기독교급외교사]는 한국근대화에 있어 정신적의미로 기독교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는 1912년 사립 능인보통학교 교장이 되고, 1914년 불교진흥회 간사에 피선,불교진흥회 월보 불교계 조선불교총보 등을 발간, 불교포교 내지 민족문화 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41)이동휘:1873-1935.기독교인 독립운동가.교육자,민족지도자.

 

1907년 7월 한일 협약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당시까지 참령으로 강화진위대를 이끌었으며, 1909년 3월 군대 동지들과 의병조직을 모의하다 실패하여 백령도에 유배되었다가 선교사 벙커에 의해 풀려나게 되었고, 그즈음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민회 창립맴버로,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도 하였으며, 1911년에는 기독교 105인 사건에 연류되기도 하였다. 그는 1912년 3월 캐나다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간도국민회가 조직됨과 때를 같이하여 장로교 교역자 중심의 구국전도회를 조직, 민족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운동이후 브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였으며, 1934년 12월 하바로브스크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온 날 밤 기숙사에서 공산당의 흉탄에 맞아 가료 중 사망했다.

 

 

 

42)이만집:1875-1944. 1900년경 아담스 선교사가 경주에서 전도할 때 그의 전도로 입교했고, 그후 대교 계성학교의 한문교사로 초빙되면서 남성정교회의 교인으로 출석하였고, 1909년 7월 15일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2년 부터 브루엘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인근지역을 순회 전도하였고, 이해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 하였다. 191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 남성정교회로 부임하였으며, 어드만 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이끌어 갔으며, 1919년3 1운동때는 대구만세시위의 주동자로 활약하였다.

 

그후 이만집 목사는 선교사들과의 갈등을 빚어 1923년 이른바 [자치선언]을 단행하여 경북노회와 남성정교회는 자치파와 노회파로 분열되었다. 그후 조선예수교 봉산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몸이 쇠약해지자 금강산에 입산하였고, 목회자들을 위해 수양관을 지어 생활하다가 1944년 6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43)이상재:1850-1927.기독교인.독립운동가.육영사업가.정치인.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1897년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의를 진행하였다.그는 1902년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가 1903년 옥중에서 선교사들이 차입해 준 기독교 서적과 성서를 읽다가 심경의 변화를 입어 54세에 결신, 입교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의 여파로 석방되어 연동교회에 입적하였고 황성기독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1905년부터 YMCA운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청년운동에 몰입하였다.

 

1910년 제 1회 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학생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승만을 미국에서 불러들여 학생부 간사로 임명하였다. 그해에 기독교회의 백만명 구령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를 구국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1914년 10개의 Y를 규합하여 자주 운영에 성공하였고, 1921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1922년 세계학생기독청년연맹의 세계 대회가 중국 북경에서 열릴 때 한국 대표단을 인솔하고 그 대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7년 신간회의 회장에 추대 되었으나 그 때 와병중이었는데 회복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44)이수광:1563-1628.조선조 문신.실학자. 병조판서 이희집의 아들로서 여러국가 봉직을 하였으며, 그와 천주교와의 관계는 임진왜란 전후무렵 수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릿치의 [천주실의][중우론]및 중국인 유변 심인기의 속이담 6권을 들여옴으로써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학을 도입하였으며, 1614년 지봉유설을간행, 우리나라에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하여 실학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

 

었고 순천의 충추서원에 제향되었다.

 

 

 

50)정경옥 

 

감리교 목사. 외국 유학후 최초 감리대 교수. 미국 유학중 자기신앙고백을 발표. "The Korean Creed"(후에 감리교 장경) 이것이 미국감리교회에 만장일치로 채택 되어 예배시간에 고백됨. 소위 한국 최초 자유주의 신학자. [신학세계]에서 주간을 맡으며 50여편의 논문을 발표. 32년에는 한국최초로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을 소개. 34년에 한국인 최초의 조직신학서인 <기독교의 원리>를 저술. 

 

이후 만주에서 사평가신학교교장을 역임후 41년 귀국 요양중 친미파로 지목되어 구속. 전남 광주에서 목회하다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함.

 

 

 

51)정약용 

 

23세때 이벽을 만나 천주교를 접함. 형과 함께 입교.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주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라는 것으로 수난도 많았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18년간 <전라도 강진> 유배생활때 그의 실학사상이 집대성되고 귀양에서 풀린 후 배교를 뉘우치고 향리로 낙향 임종시까지 신앙생활과 연구활동에 몰입. 

 

 

 

52)정약종 

 

이승훈의 전교로 형과 함께 입교. 교리연구와 전교에 힘써 황사영을 입교. 조선의 가성직제도 창안, 시행. 천주교 교리를 연구해 전교하는 비밀단체인 명도회를 조직. 1795년 주문모신부를 도와 전도에 힘쓰다가 신유박해때 사형. 저서:주교요리.선교전서.

 

 

 

53)정인과 

 

장로교 목사. 민족주의 운동가. 흥사단의 회원으로서 교회안의 교권정치에 깊이 관련을 맺고 장로교회의 거대한 교권을 행사하여, 그 대세의 서북장로교 교세를 배경으로 보수주의 친선교사의 신학을 믿고 에큐메니칼 장,감의 교회와 대결 그 결과 남북의 장로교 분열위기와 한국교회에큐메니칼 운동전체의 향후 성격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54)정춘수 1874.2.11-1951

 

감리교 목사. 1903년 원산 남산 동교회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의 감화를 받고 결신했다. 39년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을 형성했으며 어용 기독교회로의 타락을 도모했다. 해방이후 천주교회로 개종해 [나는 왜 천주교인이 되었나]라는 주제로 대외적 기고를 했으나 변명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