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5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5학기

제목경건 생활과 영성 2022-07-13 16:54
작성자 Level 10

경건 생활과 영성

참된 경건생활은 목표 설정 중심이 아니라, 목적 설정 중심의 생활에서 가능하다. 목표는 언제나 측정 가능하고, 한정된 시간 안에 성취될 수 있으며, 성취된 경우에는 새로운 목표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목표 설정 중심의 생활은 어떤 목표를 위해 방법과 수단을 정당화하기 쉽다. 밥 쉥크, 생테크, 김성웅 역(한세, 1996), p.29.
또한 목표 달성을 위해 긴장하고 속박되기 쉽기 때문에 양심의 자유가 유린될 수도 있으며, 어떤 목표가 성취될 경우 그로 말미암아 자만에 빠지거나 허무를 느끼며,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피곤이 수반될 수 있다. 상게서, p.26.
따라서 목표 설정 중심의 생활은 우리의 경건의 능력을 함양하기 보다는 오히려 위선과 이기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
반면에, 목적은 측정할 수 없고, 평생토록 완전하게 달성될 수 없으며,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없다. 상게서, p.29.
다만 살아가면서 다듬고 재진술 될 수 있을 뿐이어서 목적 설정 중심의 생활은 방법과 수단이 그 목적에 부합해야 하고, 이로써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으므로 양심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을 키워준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경우, 그의 경건 생활은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을 확실하게 정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신령한 신앙적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만들어 사용한 요리문답(1538년)에서 우리의 으뜸되는 관심사는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으며 사모하고 의지하되,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고 진술되어 있는가 하면, John Calvin, Catechism(1538) trans. by F. L. Battles (Pittsburgh : The 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 1972), p.1.
그의 대표적 저서인 「기독교 강요」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인생의 목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by F. L. Battles (Philadelphia : The Westminster Press, 1973), Ⅰ.v.1.
칼빈은 이러한 인생의 목적을 위하여 은혜의 방편으로 하나님의 말씀 묵상과 기도를 언급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훈련을 강조하였다.

A. 경건을 위한 인생의 목적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제 1문답에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잘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칼빈의 기독교 강요(1권 2장)에도 이미 인생의 목적이 잘 기술되어 있다.

『경건한 사람은 … 유일하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한 대로 그를 아는 것으로 그 사람은 만족해 한다 … 그래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인생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고서 자신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겨 그만을 신뢰하기 때문에 범사에 그를 인정한다 …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주와 아버지로 인정하는 까닭에 범사에 그의 권위를 높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힘쓰며 그의 명령들을 순종하는 것을 합당하게 생각한다』 상게서, Ⅰ.ⅱ.2.


칼빈의 사상에 의하면, 인생의 존재 목적은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을 알므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고, 또한 그에게 영광을 돌리므로 영광스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데 있다. 칼빈이 이해하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객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맛보고 즐길 줄 아는 주체인 것이다. B. B. Warfield, The Works of B. B. Warfield. vol. Ⅵ : The Westminster Assembly and Its Work (Grand Rapids : Baker Book House, 1981), pp.382, 397.
그래서 칼빈은 그의 요리문답(1538)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유일하고 영원한 원천이요, 지혜, 의, 능력, 선과 긍휼이다. 모든 좋은 것이 예외없이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까닭에, 모든 찬양이 그에게 돌려져야 마땅하다” Calvin : Catechism, p.4.
만유의 통치자이신 만주의 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요 모든 좋은 것의 원천이심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가 경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본래 고전 라틴어의 경우 경건은 자녀가 부모를 경외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가리켜 사용되었다. 즉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적 사랑과 배려를 가리켜 경건이라 한 것이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도 경건이라는 단어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들 간의 관계를 가리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두고 사용되었다(행 3:12, 17:23, 딤전 2:2, 5:4, 6:5-6). 칼빈의 경우, 아마도 로마서 1장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는 말씀에서 참 경건이 무엇인가를 확인한 듯하다. Ford Lewis Battles, ed. The Piety of John Calvin (Grand Rapids : Baker Book House, 1978), pp.15-16.
그러기에 칼빈의 경건의 중심된 주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그에게 감사드리는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하거나 단지 머리로만 아는 사변적 지식이 아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성적 은총을 가슴으로 체험하여 아는 산신앙의 지식이다. 기독교 강요, Ⅰ.ⅴ.9. ; Ⅲ.ⅱ.14.
하나님을 아는 이같은 지식이 인간의 으뜸되는 목적인 것이다. 이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경외를 포함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순수하고 참된 열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경건한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며, 하나님에게 모든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좋은 것을 받은 경우 그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며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주와 아버지로 인식하기 때문에, 범사에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위엄을 존중하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마음을 기울이고, 감사하며 그의 계명들에 순종하는 것을 합당하게 여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또한 주님으로 경배하며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봉사한다. 이렇듯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건을 낳으며, 이로써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할 마음을 갖게 하고, 내세 소망을 갖게 해 주며, 인생을 참된 행복에로 인도한다.
칼빈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크게 결여했을 뿐 아니라 그릇된 형상숭배를 가르쳤다. 기독교 강요, Ⅰ.ⅺ.8.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을 아는데 두기보다는 공로를 쌓아 구원을 얻으려 하는 목표 설정 중심의 삶을 가르쳤다. 그래서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는 참된 경건도 없고, 양심의 자유도 없으며,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중세로마카톨릭교회와는 달리 칼빈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그리고 성령의 빛으로 파악하는바 자연에 계시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며 그를 즐거워하는데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을 설정함으로써 참된 경건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타락한 세상과 역사를 바로 잡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목적이 확고하게 세워진 인생은 칼빈이 보여 준 대로 경건의 능력이 있어서 세상을 변화시키며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린다.

B. 경건을 위한 신령한 신앙적 방법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의 능력을 위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자연과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을 알아 자기를 부인하며, 또한 십자가를 지는 삶을 힘써 감당할 것을 가르쳤다. 이로써, 경건 생활이 효과적으로 훈련되었다. 칼빈은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기도로 훈련할 것을 강조하였다.

1.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칼빈에게 있어서 말씀에 의한 경건 훈련 방법으로는, 첫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전심으로 꾸준하게 묵상하는 것이요,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말씀으로 검토하는 것이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과 인도를 받아 사는 생활이다. 칼빈, 시편주석(시 19:7).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 맞지 아니할지라도, 그 가르침을 겸허하게 받아 단련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킬 때 하나님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Ⅱ.ⅰ.4.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그 말씀에 의하여 지도받고 고취되는 생활만이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경건하고 바른 신앙은 하나님이 말씀할 실 때마다 그를 경청하고 그의 거룩한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이나 주저없이 받아들인다. 칼빈, 히브리서 주석(히 11:7).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세가 먼저 중요한 바, 우선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하여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주장하게 해야 한다. 칼빈, 시편주석(시119: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지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되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되 꾸준하게 해야 된다. 상게서, (시 39:2).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깊이 그리고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말씀 묵상을 통해서만이 말씀이 영혼속에 새겨지거나, 깊이 자리잡게 되거나, 심령 깊은 곳에 저장되어 우리의 심령을 성화시킨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 묵상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를 특별히 강조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미래에 있을 부활을 묵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현재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자극이 되어 미래의 천국 생활을 묵상하고, 십자가를 사닥다리로 삼아 현재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부활의 영광을 갈망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Ⅱ.ⅹⅵ.17.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타락의 결과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미래생활을 묵상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사람들의 심령은 이 세상의 것들로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밑터진 항아리 같으나, 이 세상에서 만족을 헛되이 구하고, 세상 염려와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 때문에 천국생활을 열망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중생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미래의 영광의 부활을 갈망하므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
둘째 칼빈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할 것을 권한다. 칼빈, 갈라디어서주석 (갈 2:20).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게 될 때, 우리가 강하게 되어 역경과 시험들을 이겨내며, 핍박을 견디어 내고, 십자가를 묵상하게 되면 부활하여 하늘의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또한 자연히 묵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를 감사함으로 묵상해야 한다. 칼빈, 시편주석 (시 104:1).
칼빈에게 있어서, 하늘의 기업의 더 큰 영광을 사모하고 미래 생활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한 부분이다. 인간의 현재생활의 목적은 인간의 최종 목표가 될 천국의 더 좋은 생활을 묵상하게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자연에 나타난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더욱 깊게 가지며 천국 생활을 묵상하고, 자연 환경에 대하여 질서있는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되어 있다. 칼빈의 경우, 만물의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경건의 본질적 요소이자, 그리스도안에서의 기독교인의 새생활에서 절대 필요한 요소이다. 칼빈은 자연의 질서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본성적 경향과 자연계 내에서의 상호복종과 교통의 법을 발견하고서 그리스도인이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를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부성애를 감사할 뿐 아니라 상호복종과 섬김의 삶을 살 것을 권하였다. 로날드 월레스, 칼빈의 기독교 생활원리, 나용화 역(기독교 문서선교회, 1988). pp.184-186.

넷째, 하나님의 진노에 관해 묵상할 것을 칼빈은 권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의 진노를 충천케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일깨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면 우리의 생활을 규제할 수 있게 되고, 재갈처럼 그 경외감이 우리의 광폭한 정욕들을 억제시킬 수 있다. 칼빈, 시편주석 (시 36:1).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으로 우리 자신을 억제하는 일에는 죄의 결과들에 대해 엄숙하게 생각하는 것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믿음의 눈을 가지고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상게서 (시 119:127).

다섯째,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해야 한다. 강요된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우리안에 심어주고, 환난 중에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며, 악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선하심을 묵상하게 될 때, 큰 시험을 물리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미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Ⅰ.ⅱ.1 ; 요한복음주석 (요 5:14).
그리고 이로써 육체의 방탕함이 억제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택들을 사닥다리로 삼아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칼빈은 경건생활 훈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묵상에 끊임없는 자기 검토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자가 되는데 있다. 칼빈, 시편주석 (시 106:6).
즉 말로만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의 죄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엄격하고 무섭게 검토해야 한다. 이같은 자기 검토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하게 행하여져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죄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검토는 기독교 경건 생활에서 필요한 훈련이다. 이는 자기 검토를 통해서 모든 자만심이나 거만함 그리고 모든 자긍심이 철저하게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월레스, 상게서, p.285.
또한 이로써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일을 미리 방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훈련
효과적인 경건 생활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끊임없이 밤낮 묵상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질머지는데서 경건에 이른다.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죄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데 있다고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말씀 안에서 만나며 경배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무시하고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결코 있을 수 없고, 뿌리채 흔들리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할 때 자기를 주장하게 되며 이로써 교만하여지고 자기를 높이며 하나님과의 동등권을 주장하려 하고, 하나님께 일체 감사하지 아니하며 불순종하고 마침내 하나님을 배반한다. 칼빈, 창세기주석 (창 3:1이하)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게 되고 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지 아니할 때 인간은 자기를 주장하며 교만하고 불경건하여져 하나님을 거역한다. 중세 로마카톨릭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된 근본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멀리하여 떠남으로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데 있음을 칼빈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죄를 이기는 방법으로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묵상하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할 때 사람이 자기를 주장하며 교만하여지는 죄의 근본 성질에 비추어 예수의 제자도 곧 자기를 부인하여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칼빈은 그의 빌립보서(2:5-11) 주석에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첫째 아담과는 달리 그가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감히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광을 숨기며 자기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셨다고 해석하였다. 칼빈, 빌립보서주석 (빌 2:5-11).

그리고 칼빈은 공관복음을 주해하면서 예수의 시험(마 4:1-4, 눅 4:1-4)이 단순히 먹는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지 아니했다. 오히려 사탄이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돌을 떡으로 만들도록 시험한 것으로 보았다. 칼빈, 공간복음주석 (마 4:1-4, 눅 4:1-4).
예수님이 사탄의 이같은 시험을 받았을 때, 비록 먹을 양식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 말씀의 검과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시험을 물리친 것으로 칼빈은 해석하였다. 칼빈, 에베소서주석 (엡 6:10-20).
첫째 아담과는 달리 둘째 아담 예수는 자기를 결코 내세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에 의지하여 시험을 이기신 것으로 칼빈은 이해하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높일 때 자기를 내세우는 대신 부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죄를 이길 수 있음을 칼빈은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공관복음(마 16:20-28, 막 8:30-38, 눅 9:21-27)을 주해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도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으로 주장했다. 칼빈의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수치스런 죽음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그가 세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자기부인의 모범을 보이시고, 자기의 제자들로 하여금 본받게 하셨다. 즉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을 부인하며 자원하여 십자가를 짐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이기적 자기 사랑도 버리며 끝까지 경건을 훈련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칼빈, 공관복음주석 (마 16:20-28, 막 8:30-38, 눅 9:21-27).

이같은 제자도 곧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칼빈은 기독교 강요(3권 7장-10장)에서 상론하였다. 칼빈이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의무, 곧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말하며 묵상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살아도 그분을 위해서 그리고 죽어도 그분을 위해서 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를 다스리게 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Ⅲ.ⅶ.1.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첫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칼빈은 디도서 2:12에 언급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을 자기부인의 삼요소로 보았다. 여기서 근신함이란 검소와 정절과 절제 등 자기통제를 의미하며, 의로움이란 모든 공평의 의무 곧 이웃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의미하고, 경건함이란 참된 거룩으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의미한다. 상게서, Ⅲ.ⅶ.3.

이로 보건대, 칼빈은 자기부인을 세 가지 방면으로 이해하고 있다. 첫째, 일상생활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칼빈은 엄격한 금욕주의나 잘못된 방종을 경계하고, 하나님이 주신 세속적인 축복을 감사함으로 받아 삶의 필요와 즐거움을 위해 사용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내세를 묵상하는 가운데 현재생활에 집착하지 말고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 것을 강조했다. 예컨대 과음 과식하지 말고 사치스런 옷을 삼가며 지나친 오락을 금하라고 하였다. 상게서, Ⅲ.ⅹ.3,4.

둘째, 이웃에 대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잘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 교만을 제거하는 치료책은 자기 중심적 사랑을 뽑아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참된 온유를 체득하는 길은 진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뿐이다. 우리의 이웃 사랑은 사람들의 외모나 행위를 보지 아니하고 악한 심성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며 그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운 위엄과 영광을 볼 때 이웃의 허물이 감추어지고 이웃을 사랑으로 용납하게 되며 진실한 감정으로 섬기며 사귀게 된다. 상게서, Ⅲ.ⅶ.4,5,7.

셋째, 하나님께 대하여 겸비하여지는 것이다. 자기부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요, 하나님의 축복만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부성적 관용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역경을 참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고 가장 정연하고 공정하게 선악간에 우리를 다스리시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다. 상게서, Ⅲ.ⅶ.8,10.

이로 보건대 칼빈에게 있어서 자기 부인의 기본적 요소는 우리 자신의 판단과 본성적 이성의 생각을 포기하고 이기적 사랑의 육체적 정욕을 죽이며, 본성적 충동을 제어하고, 이웃을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며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면적인 자기부인의 과정은 외형적인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환경적 고통과 환난과 질병 등을 체험함으로써 육체의 정욕을 죽이며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자기 부인을 위해 아주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우리의 본성적 기질을 다루기 힘든 야생마와 당나귀에 비교하면서, 상게서, Ⅲ.ⅷ.5 : 참조, 월레스, 상게서, p.101.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되 거친 야생마를 다루는 거친 기수처럼 행동하신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십자가 아래서 환난을 체험할 때 우리가 육체를 죽이며, 자만심과 이기적 사랑을 없애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지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상게서, Ⅲ.ⅷ.2,3,4,5,6,7,8.
첫째,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교만과 육체적 정욕을 꺾는 최상의 방책은 빈곤이나 질병이나 심한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둘째,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성을 체험하게 하며 우리에게 장래에 대한 소망을 준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맹목적 자기 사랑이나 자만심을 버리게 된다. 셋째, 십자가는 우리를 단련시켜 인내하며 순종할 수 있게 한다.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하는 학교를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한다. 이로써, 십자가는 우리의 경박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배우게 한다. 넷째,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무절제한 육체를 굴복시키고 제어하신다. 다섯째, 십자가는 일종의 사랑의 징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세상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다. 여섯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독특한 위로가 된다. 십자가의 고난을 감사와 고요한 마음을 가지고 달게 받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

3. 기도의 훈련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3권)에서 그리스도인이 회개하고 성화 될 뿐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모두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은혜의 방편 중에 하나가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 없이는 믿음이 튼튼하게 성장할 수 없고, 따라서 경건 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상게서, Ⅲ.ⅹⅹ.1.

칼빈은 그의 에베소서 주석(6:18)에서도 기도가 영적 싸움을 위한 참된 방편이요, 믿음과 소망의 으뜸가는 연습(exercise)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등)를 입고나서 싸움을 위해 기도로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공격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날선 칼처럼 공격용 무기 노릇을 하고 믿음이 최상의 방어용 무기 노릇을 하려면 기도가 없이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칼빈, 에베소서주석(엡 6:10-20).
이로 보건대 그리스도인의 경건훈련을 위해서는 말씀묵상과 기도가 필수적이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즐거움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기독교강요, Ⅲ.ⅹⅹ.3.
우선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거나 태만하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믿음이 사탄의 공격들을 잘 막아내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탄을 무찔러 승리할 수 있는 경건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고자 하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불일 듯 하기 위함이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묵상하며, 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되, 우리 자신의 무력함과 부족함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해야하고, 모든 자만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상게서, Ⅲ.ⅹⅹ.6-9.
그러기에 올바른 기도의 준비와 시작은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데 있는 것이다. 또한 참으로 겸손하게 기도하되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실한 소망을 품고서 용기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 상게서, Ⅲ.ⅹⅹ.11-14.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하려면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간절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상게서, Ⅲ.ⅹⅹ.50-51.

그런데 칼빈은 우리의 기도가 신앙의 순수한 표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고, 칼빈, 시편주석(시 27:8, 71:22).
칼빈에 의하면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문이 열린다. 하나님이 말씀 위에 기초하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담대하게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겸손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육체의 정욕들을 제어하여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게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의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월레스, 상게서, p.351.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틀이 형성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뜨겁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을 가지고 기도의 형식들을 우리의 입에 넣어 주신다. 칼빈, 요한복음주석(요 12:13).
즉 주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도 좋을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것과 우리가 구할 필요가 있는 것 등을 제시하고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많은 경우들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기도의 틀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제한되고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하여 시작되고 성령께서 기도의 틀을 만들어 주시는 까닭에, 우리의 기도는 그것의 방향과 세부적인 사항에서 바로 그 말씀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 시편주석(시 35:23).
그러므로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적 충동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억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한 것 이상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칼빈은 또한 그의 에베소서(6:18) 주해에서, “무시로”라는 말에 대하여 우리가 형통할 때 뿐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역경에 처할 때에도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별히, 우리는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께로 달려가 간구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성도를 위하여”와 관련해서, 칼빈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 때문에 한순간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으나, 우리의 형제들 때문에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칼빈, 에베소서주석(엡 6:18).
교회의 지체된 형제들을 살펴보면 고통 가운데 있는자가 언제나 있게 마련이므로, 우리는 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므로 형제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역경 중에서 기도하거나, 역경과 고통 중에 있는 여러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므로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를 능히 대적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엡 6:10,11).

C. 칼빈의 경건생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기초하고 의지할 뿐 아니라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기도하고,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신뢰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 칼빈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헌신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앞에서 ‘경건을 위한 신령한 신앙적 방법’을 기술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 언급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일상생활, 가정생활, 목회생활, 사회생활 그리고 경제생활 등과 관련하여 칼빈이 실제 경건한 생활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칼빈의 일상생활
파커(T. H. Parker)의 「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에 칼빈의 일상생활이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파커, 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 김지찬역, (생명의 말씀사, 1986). 칼빈의 일상생활에 관한 자료를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는 중요한 저서이다.
1509년 7월 10일 아버지 제라르(Gerard)에게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칼빈은 어려서 전염병의 위협을 받으며 자란 까닭에 몸이 허약하였고, 소년시절 형편없는 식사를 한 까닭에 항상 금식한 것과 마찬가지여서 더욱더 허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대 초반부터 엄격한 훈련과 규율 밑에서 힘든 공부를 하느라 몸이 아주 허약해졌다. 그는 몽떼규대학 시절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예배, 독서, 묵상과 기도 등 꽉 짜여진 틀 속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12살에 대학에 입학하여 다른 사람보다 4-5년 빠르게 16-17살 경 석사학위를 받을 만큼 열심히 공부하였다. 상게서, pp.25, 33-36, 39.

그래서 칼빈은 장성한 후에도 아주 지성적이고 성격이 단호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아주 철저하였다. 그의 좌우명 “즉각적으로 그리고 성실하게”(prompte et sincere)에도 그의 성격과 삶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그는 일에 중압감을 느끼면서도 밤낮 일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일을 위해서라면 지체할 수가 없었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자기 몫의 십자가를 졌 다. 그래서 그는 평상 음식조차 거르고, 하루 한끼로 만족하는가 하면 하루 종일 굶고서도 일하기를 멈추지 아니했다. 그는 잠을 매우 적게 잤다. 이로 인하여 항상 피로에 지쳐 있었으나, 새벽 5시경이면 일어나 책을 쓰는 작업을 항상 계속하였다. 상게서, pp.198, 209-211.

칼빈이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년)을 저술하던 때에는 사일열(四日熱)로 고생하고 폐병도 악화되었다. 심한 각혈을 하기까지 했다. 그는 결석과 치질 때문에도 고생했고, 신장염과 관절염으로 인해 불편은 아주 대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564년 몸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평상 업무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상게서, pp.292-294.
그는 몸져 누은지 3개월 만인 그해 5월 27일에 죽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획득해 놓으신 영생의 희망으로 부르시는 지금,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 찬양해야 하겠는가?”라고 설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이미 영원한 기업의 문턱을 넘어 영원한 희망 안으로 들어갔음을 깨닫게 하옵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들어가신 후에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셨음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John Calvin, Ezekiel Ⅱ, tr. Thomas Myers, (Grand Rapids, Eerdmans), p.345.

그는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좀 푹 쉬라고 말하면 자기의 빈둥거리는 모습을 주님께 보여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누워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기에 그는 일을 하지 아니했다는 핑계로 생활비 받기를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죽음을 맞기 2주일 전 낙망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일을 하려고 애썼으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맑은 정신을 유지한 채 운명하였다. 그는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그의 마지막 순간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나는 매우 힘들게 숨을 쉬고 있고 매 순간이 나의 마지막 호흡인양 생각하고 있소.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또 죽으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파커, 상게서, pp.296-302.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산제물로 드려 살았다. 그는 한 평생 고난이라는 학교에서 인내와 순종과 헌신과 감사를 배워 내세를 묵상하는 가운데 살았던 것이다.

2. 칼빈의 가정생활
칼빈은 1540년 3월 10일 두 자녀를 둔 미망인인 이델레트 드 뷔르(Idelet de Bure)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정숙하고 사려가 깊으며 검소하고 절약하며 인내성 있는 여자로서 칼빈의 건강을 보살피는데 아주 헌신적이었다. 상게서, p.154 ; R. 스토페르, 인간칼빈, 박건택 역(엠마오, 1989) pp.26, 30.
그들의 결혼생활은 처음 6주 동안 너무 행복하였으나, 그만 둘 다 몸이 병들어 허약해지고 말았다. 칼빈은 유명한 개혁자의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매우 초라한 집에서 살았으며, 그의 집과 가구들은 모두 의회의 것이었고, 1년 4회 지급되는 사례금 외에는 땅 한 평 살 돈이 없었다. 그가 사용하던 식탁이나 침대도 자기 것이 아니었다. 상게서, p.205.

칼빈의 결혼생활은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불행했다. 결혼한지 5년이나 되어 난산 끝에 겨우 얻은 아들은 금방 죽고 말았고, 그의 아내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549년 3월 29일에 죽고 말았다. 아들을 잃고 또 얼마 안되어 아내까지 잃은 칼빈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큰 슬픔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크게 슬퍼하고 상처와 고통을 가슴에 품고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결혼할 생각을 갖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먼저 간 아내와 재회할 날을 소망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스토페르, 상게서, pp.35-40.

칼빈은 비록 그의 결혼 생활이 짧았고, 자기가 낳은 아들도 일찍 잃어버림으로 해서 고통과 슬픔이 컸으며, 그래서 그 고통을 이겨내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만, 하늘의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였으며, 먼저 간 아내의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던 점에서 참으로 훌륭한 남편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칼빈은 유산을 조금 남겼는데, 그 유산 중에서 이복 누이 마리의 딸과 동생 앙트완느의 아들들과 딸들에게 나누어주고, 부인이 데려온 아들에게도 얼마를 남겨 줌으로써, 외삼촌으로서, 큰아버지로서, 그리고 양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어려운 여건 중에서도 자기의 혈족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파커, 상게서, p.296.


3. 칼빈의 목회생활
1536년 4월 기독교강요 초판이 출간된 후 피난길에 오른 칼빈은 7월에 제네바를 방문하였고, 파렐의 강한 권유를 받아 10월에 제네바에서 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목사직을 맡아 27년간 목회를 하였다.
칼빈은 예배를 중요시하였다. 그는 예배에서 설교와 성찬과 기도와 찬송을 강조했다. 그는 목사의 첫 번째 직무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훈계하고 권면하고 책망하는 일” 곧 설교를 꼽았다. 그는 설교할 때, 회중이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바로 그 말씀을 듣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주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했다. 상게서, pp.184-185.
그는 주일 오후에는 시편을 강해하는 경우가 많았고, 주중에는 구약을 강해하고, 주일 오전 예배에는 신약을 강해하는 것이 관례였다. 상게서, p.187.

평상시 주일 오전 예배 순서를 살펴보면,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을지어다”는 개회선언이 맨 먼저 있고, 이어서 죄를 고백하고, 시편에 곡을 붙인 찬송(metrical psalm)을 불렀으며, 설교말씀을 밝히 깨우쳐 주실 것을 기도하고 나서 성경을 읽고 설교하였다. 그 다음 헌금순서를 갖고, 중보기도와 ‘풀이 된 주기도문’(Paraphrase of Lord\'s Prayer)으로 긴 기도를 하고, 그리고 아론의 축복기도로 마쳤다. F. L. Battles, ed., The Piety of John Calvin, (Grand Rapids : Baker Book House, 1978), p.118.
그의 예배순서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죄의 고백에 있어서 목사가 선도하여 온 성도가 간절한 마음으로 죄를 깊이있게 고백하고 죄 용서를 구하는 일과, 중보기도와 풀이된 주기도가 아주 길다는 것이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높이며 우리의 허물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긍휼을 간절하게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자주 호칭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겨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 하나님을 주님으로 경외하며 그에게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상게서, pp.119-124.

그의 예배 순서 중 또 하나의 특징은 시편을 즐겨 찬송한 점이다. 칼빈은 성령 자신이 시편을 써서 노래하게 하신 까닭에, 시편을 노래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가 곡을 붙여 노래한 시편으로는 25편, 36편, 46편, 113편, 138편 등이 있다. 상게서, pp.144-165에 악보가 실려있다.
그가 부른 찬송마다 죄고백,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묵상하고, 도움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심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어서 칼빈의 경건을 엿볼 수 있다.
칼빈은 예배를 중요시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순종하고 성결된 삶을 날마다 사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술 취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술집 대신 일종의 클럽을 개업케 하고 식사하거나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기도하게 하고, 가게 안에 프랑스어 성경을 비치케하며, 욕설과 춤을 금하였다. 또한, 고대 영웅들의 업적을 기리는 연극을 금지시켰고, 불경스럽고 의미없는 세례명을 지어주는 것을 금하고, 귀로 듣기에 거북한 이름도 삼가하게 하고, 신의 이름이나 십자가 등 종교적인 용어도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파커, 상게서, pp.202-204.
이와같이 칼빈은 아주 일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성별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교회를 사랑했다. 교회가 성도들의 사귐과 섬김의 마당이요 성도들의 어머니요 학교인 까닭에 칼빈은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서 교회를 믿고 사랑했다. 상게서, p.263 ; 기독교강요, Ⅳ.ⅰ.3,4.
그래서 칼빈은 1536년 4월 제네바에서 첫 개혁운동을 시작하였으나 “제네바의 교회조직과 그 예배에 관한 조문”을 놓고 제네바 시민들이 서명을 거부하고 이에 제네바의 200인 의회가 칼빈과 파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개혁운동을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서 2년도 못되어 쫓겨났을 땐, 상게서, pp.139-144.
칼빈이 제네바의 시의회로부터 받은 상처는 엄창나게 컸으나, 칼빈은 그의 개혁운동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너무 성급하게 서둘렀던 것을 반성하고, 제네바 시의회가 3년만에 칼빈을 다시 초청하자 1541년 9월에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는 시의회를 생각하면 제네바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아니했지만, 교회를 위해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믿었기에 그는 망설임없이 제네바로 돌아왔었고, 3년 전에 중단했던 일들을 그대로 계속하였다. 스토페로, 상게서, pp.78-80.

칼빈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알고 교회연합운동과 성도들간의 물질적 상호교통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그는 파렐의 동의를 얻어 즈빙글리파와의 화합을 목적으로 쥬리히의 불링거(Henri Bullinger)와 1540년에 협상을 시작하여 9년간의 노력 끝에 스위스 개신교의 교리적 통일을 결실하였다. 그후 칼빈은 루터파와의 화합을 이루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는 루터파 목사들을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열린 대화와 우아한 태도로 대하여 아주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상게서, pp.80-83 ; 참고, F. Wendel, Calvin, tr. Philip Mairet (London : Collins, 1963), p.104.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그 당시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파커, 상게서, p.263.
폭력은 어떠한 모양이라도 싫어한 까닭에 성당을 빼앗는 행위나 형상들을 불태우고 십자가를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일 등을 삼가도록 경고하였다. 그는 무슨 일에나 절제와 겸손으로 행하기를 원했다. 스토페르, 상게서, pp.83-85.

한편 종교개혁자 칼빈은 겸손하고 헌신된 목자였다. 그는 교회를 새롭게 조직하고 개혁하며 연합운동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서도, 성도들간에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일에도 헌신적이었다. 그래서 성도들 간에 재물을 나누는 일을 강조하였고, 누가 병들면 달려가 위로하고 간병인을 사서 간호케 하고, 죽으면 장례비를 부담하기도 했으며, 가난한 자를 입원시키기도 했다. 거처가 없는 자에게는 잠잘 방을, 일자리가 없는 자에게는 직업을, 결혼 적령기의 젊은이에게는 적당한 배필을 소개하기도 할만큼 칼빈은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목자였다. 상게서, pp.87-89.


4. 칼빈의 사회생활
칼빈의 경건은 그의 가정생활과 목회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잘 나타났다. 가정에서의 칼빈을 보면 아내를 향하여 가슴이 따뜻하고 사랑이 넘친 남편이고, 형제들과 친척들을 향해서도 비록 그들이 말썽을 부릴지라도 끝까지 보살피는 좋은 가장이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칼빈을 보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는가 하면, 교회를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성도들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보살피는 헌신적인 목자였다.
그러나 그는 가정과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항상 열린 마음으로 신실하게 살았다. 그는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을 싫어했고,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섬김을 받게 하며, 편애하는 일을 용납하지 아니했다. 파커, 상게서, pp.199, 202.
그래서 칼빈은 어린 시절부터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지냈다. 어린시절의 친구들로는 로렁 드 노르망디와 마투렝 꼬르디에, 청년 시절의 친구들로는 베자, 볼마르, 콮, 그리고 청장년 시절의 친구들로는 파렐, 비레, 멜랑히톤, 불링거 등이 있었다. 그에게 이처럼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랑이 많고 마음이 열려 있으며 진실하고 솔직하며,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친구들에게서 용서받기를 좋아했다. 상게서, pp.208, 297, 299.

칼빈은 정이 많은 사람인지라, 동료의 죽음을 당하면 깊은 슬픔에 빠지곤 하였다. 어거스틴 수도원의 수도사로 종교개혁에 가담하여 제네바에서 복음의 설교가로 칼빈과 함께 동역하다가 제네바 의회에게 추방을 당해 다른 곳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죽은 엘리 코로(Elie Coraud)의 죽음을 인하여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상게서, pp.51-54.

칼빈은 특별히 파렐과 비레와 아주 절친하였다. 칼빈을 적대하는 자들은 그들을 가리켜 ‘삼발이’(trepied)라고 할 정도였다. 이 세 사람은 출신지가 다르고 연령도 다르며 사역지도 달랐지만(칼빈이 피카다리 출신으로서 30대 초반에 제네바에서 일할 때 도피네 출신의 파렐은 50대로서 뇌샤텔에서, 그리고 보(Vaud) 출신의 비레는 20대 후반의 사역자로서 로잔에서 각기 일했다), 서로 가끔 만나고 서신으로 왕래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하나임을 알고 사생활까지 의논하며 지냈다. 상게서, pp.51-54.
그래서 파렐이 69세의 나이에 젊은 처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하자 종교개혁의 대의에 먹칠 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어 극구 반대하였으나, 파렐의 결혼이 그들의 우정을 금가게 하지는 못했다. 칼빈은 죽음이 임박하자 파렐에게 “내가 죽고난 후에도 당신이 남아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진대, 우리의 우정과 연합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십시요”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상게서, pp.56-58.
이 편지를 받은 파렐은 급하게 칼빈을 찾아와 위로하였고, 칼빈은 며칠 후 죽었다.
칼빈은 또한 비레가 1546년 부인을 잃었을 때 그를 제네바로 초청하여 위로하였고, 그가 재혼하여 자녀들을 얻게 되자 굉장히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를 또 초청하여 한 주간 함께 시골로 여행하면서 휴식을 얻도록 하는 일도 배려할 정도였다. 상게서, pp.59-60.
이렇듯 친구와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하늘나라에 가서까지도 그들의 우정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할 정도로 친구를 향하여 마음이 따스하고 열려있는 사람이었다.

5. 칼빈의 경제생활
칼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내세를 소망하여 땅에 속한 재물을 전혀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재물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사용할 것을 가르쳤다. 칼빈에게 있어서, 재물은 하나님이 자신의 섭리를 베푸시는데 사용한 도구이고, 돈은 이 도구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따라서 돈은 인간의 생존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대표적 도구이다. 다시 말해서 돈은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생존케 하고 삶을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이다. 앙드레 비엘레, 칼빈의 경제윤리, 홍치모 역(성광문화사, 1991), pp.55-56.

경제와 관련하여 칼빈의 사회적 개인주의 사상을 먼저 고려해 둘 필요가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연합시키는 형제애적인 사귐과 섬김을 통해서 인간의 개인 생활이 꽃피도록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 부(富)의 재분배와 검소하고 근면한 삶을 강조하는가 하면 노동에 대한 대가로서의 임금의 적정한 지불을 주장했다. 상게서, p.50.

칼빈에 의하면 부의 재분배의 동기는 사랑이다. 사랑은 부유한 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로 사심없는 선물이 전달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부유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기의 재산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눌 책임이 있으며, 이로써 부의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부자는 가난한 자를 섬기는 자이다. 한편 가난한 자는 부자의 믿음과 사랑이 사심없이 실천될 수 있도록 좋은 이웃이 되어야한다. 부자의 것을 도둑질하거나 함부로 탐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상게서, pp.58-61.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도구인 돈이 하나님의 선물로서 거룩하게 구별되고 이웃을 위해 선하게 사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이 돈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돈은 주인의 자리에 앉게 되면 폭군이 되고, 종의 자리에 서게 되면 많은 유익을 끼친다. 그래서 칼빈은 돈이 주인되어 폭군노릇하지 못하도록 사치와 과소비, 탐욕, 독점 등 사회악을 타파하고, 돈이 종이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성령과 진리로 섬길 수 있도록 독특한 형태의 금욕주의를 창안하였다. 이 금욕주의는 성화와 구원의 결과이고, 결코 전제 조건이 아니다. 칼빈은 돈과 관련해서도 자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되어야 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상게서, p.66.
즉 자기의 소유물을 이웃에게 사랑으로 나눔으로써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이로써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져간다고 했다. 상게서, p.69.
이를 위해 칼빈은 집사제도를 세웠고, 구빈원을 설립하여 병든자와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했다. 거듭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부의 재분배를 통한 형제 사랑이 이루어져 우리의 성화된 모습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상품의 매점매석이나 독과점을 타파하고 사치와 낭비를 지양하며 매우 검소하게 살아야하는 것이다. 칼빈과 그의 동역자들은 궁핍에 가까운 거의 최저의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게서, pp.70-71.
칼빈은 경제 생활에서도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가난과 궁핍이라고 하는 십자가를 달게지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또한 생각하며 감사와 만족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칼빈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을 죄악으로 간주하여 강하게 비난했다. 노동착취는 동료들의 피땀을 빨아먹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상게서, p.82 ; 프레드 그래함, 건설적인 혁명가 칼빈, 김영배 역(생명의 말씀사, 1993), pp.120-121.
그래서 1539년 리용에서 인쇄공들의 파업이 일어나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정부당국이 임금 상한제(ceiling salaries)를 강요하였고, 1559년 제네바에서도 노동자 임금 상한제와 유사한 법을 만들고 노조 결성을 차단하여 노동력과 임금을 착취하는 일이 있게되자 칼빈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칼빈은 임금이 계약에 의하여 정당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게서, pp.90-92.
칼빈은 폭력적인 파업은 불법이라고 하면서도 비폭력적 저항과 파업을 반대하지 아니했다. 그는 여러차례 정부당국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위해 봉급 인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상게서, pp.88-89.
칼빈은 이처럼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데 헌신적이었던 것이다.

D. 결론
칼빈은 종교 개혁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크게 일하였는데, 그가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경건의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건의 신학자로 널리 알려질 만큼 경건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의 기독교 강요는 신학강요가 아니라 경건강요라고 불리우며, 그는 이론 체계적 신학자일뿐 아니라 경건한 삶의 사람이었다. 그의 신앙은 경건의 능력이 있는 말씀 묵상을 통한 기도와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달게 지는 생활에서 단련된 것이었다.
칼빈의 생애는 교회 역사에 잘 나타나 있는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그 말씀의 권위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것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아니했다. 그가 성경의 권위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와 투쟁한 것도 성경을 사랑한 까닭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였던 까닭에, 파렐의 권유를 받아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말년에는 폐결핵, 치질, 관절염, 그리고 4일마다 발병하는 고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강요 최종판을 집필하고 성경을 강해하는 일을 위해 그의 몸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런가하면 교회를 개혁하여 조직하고 훈련하며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일에도 목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칼빈은 스스로 경건의 능력을 체험한 까닭에 그의 기독교강요와 주해에서 확실하게 체계적으로 경건생활의 훈련을 잘 가르쳐 놓았다.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말씀 묵상과 기도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칼빈은 일상생활, 가정생활, 목회생활, 사회생활, 경제생활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스스로 좋은 모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체계적인 가르침을 남겨 놓은 것이다. 이처럼 칼빈의 생활 전반에 나타나 있는 그의 경건이 바로 그의 영성이요, 경건을 위한 그의 신령한 신앙적 방법은 영성 계발을 위한 훈련인 것이다. 요셉 리차드, 「칼빈의 영성」(기독교문화사, 1997), p.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