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5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5학기

제목예수님의 영성생활 2022-07-13 16:46
작성자 Level 10


인간은 본래 창조적인 능력이 있는 동물이 아니다. 모방을 통해 재창조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훌륭한 영성생활을 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 그 동안 앞서간 신앙의 선조들이 남겨준 방법들과 그의 교훈들을 생각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방법, 그 교훈들 역시 스스로의 독창적인 것들이 아니다. 영성생활의 출발자요, 독창자요, 근본적인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초역사적인 그리스도만 생각한다면 그 분을 우리의 모델로 삼는다는 그 자체가 주제넘는 일이다. 그러나 인식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숨쉬고 활동하는 이 역사적인 공간 안으로 참인간으로 오셨고, 참인간으로 사셨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이 겪어야 할 갖가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고대 신학자들간에는 그가 언제부터 그리스도였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란을 벌렸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어떤 분은 그가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그리스도로 태어났다. 또 어떤 분은 그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로 자각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그리스도로서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은 교리에 관한 논쟁점을 다루려는 글이 아니고 영성에 관한 글이기에 더 이상 그 이론에 더 깊이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그가 그리스도였든지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분은 분명히 역사 속에 참인간으로 존재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역사의 공간에 참인간으로 오신 것은 우리 인간이 처한 곤경과 질고와 연약함을 체휼하기 위함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겪어야 할 질고와 곤경 그리고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던 무력함과 연약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자라가는 과정의 모습이다. 자라는 데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때때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였기에 과정이 필요없이 일시에 성장했을 것이라고 오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부모님들을 순종하며 받들었으며 그러는 동안 그의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보이셨다(눅 2:5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자라가는 과정 속에서 그 분의 영성생활을 엿보게 된다. 그 분은 영성적으로 성숙해 갔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영성생활의 모습들을 고찰해 봄으로서 우리의 영성생활이 무엇인가를 설정할 수 있다.

이미 여러번 언급한 대로 기독교 영성생활란 하나님이 지어주신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의 생활을 말하며, 그 결과로서 이 현실적인으로 맺어진 총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성생활 역시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교제생활 가운데에서 그 결과로서 성부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과의 확실한 교제의 길은 기도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부탁하였다. 그 동안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의 말씀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생각도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예수님도 이 일을 실천하셨고, 한시도 쉼없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을 유지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좀 더 열심있는 기도생활을 권고하노라면 바뻐서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의 삶을 현대인의 삶에 비교해 보자. 예수님의 삶은 어떠하셨겠는가? 그 분의 삶은 누구못지 않게 분주 하셨다. 그에게 현대적인 의미의 직업명을 붙여준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설교가, 전도자, 의사, 교육가, 사회사업가, 상담가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쉼없이 사람들은 그를 필요로 했다. 그러한 분주한 삶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성생활을 쉬지 않으셨다는 것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은 자연을 관조하는 습관을 가지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익혀 갔다. 대자연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 곳곳에서 뛰고 있는 생명의 숨결, 생명의 신비등을 관조했다. 그는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경이로움을 가지셨고, 보일둥 말둥한 겨자씨로부터 새가 둥지를 틀고 보금자리를 꾸밀만큼 큰 나무로 자라가는 모습 속에서 어떤 비밀스런 신비로움을 맛보았다. 공중에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새들까지도 여상하게 보시지 않았다. 시중에 나가면 몇푼만 주면 몇마리라도 살 수 있는 그 보잘 것 없는 그 새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마음 깊히 관조했다. 예수님은 그 아름답고 신비한 관조 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예술가적인 감각을 뛰어 넘어, 저들을 저렇게 돌보고, 저렇게 아름답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 주인이 누구신가를 관상(contemplation)했다. 그러한 관상적인 삶은 곧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졌고, 그 깊으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성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한 낱 미물에 불과한 이런 것들을 저렇게 섬세하게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면, 하나님을 생각하는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얼마나 더 클까?라는 생각까지 미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생생한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사실 그것이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연에 대한 자연스런 관조를 통해서 하나나님과 끊임없는 마음의 교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감사와 찬양의 교제가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소한 경험이나 환경이나 물건들을 의미없이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들은 인간들의 생존을 위한 당연한 하나의 도구나 환경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예수님은 깊은 통찰력과 그 내면에 숨겨진 비밀스런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한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 한 닢(눅 15:8)을 바라보면서 그 여인의 애닯은 마음을 읽었다. 그 마음 속에서 곧바로 잃어버린 인생들을 찾는 성부 하나님의 추적하시는 사랑을 연상시킬 수 있었다. 말 아래 놓인 등불(4: 21)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셨다. 등불이란 모든 곳을 환하게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켜두는 것인데, 그것을 숨겨지도록 말아래 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저 어리석음이 바로 깨우침이 없는 무심한 인생들의 행위로구나라는 것을 갈파했다. 예수님은 이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한 성부 하나님의 사명을 새롭게 인식했을 것이다.

마을 광장에서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어린이들과 또 애곡하는 모습

(마 11:17)을 보셨다. 피리를 부는 것은 즐거움의 표현이요, 애곡하는 것은 슬픔의 표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그러한 흥이나 슬픔의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피폐해진 그들의 마음을 보고 예수님은 가슴 아파 하셨다. 마음으로의 느낌은 곧 하나님에게로의 기도요 불쌍히 여기는 중보의 기도였다. 잘 못 기워진 옷(막 2:21)을 보고, 부대를 잘 못 선택해서 터져 버린 포도주의 부대(막 2:21)를 보고도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를 찾아내었다.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찬 관습적인 행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가슴 아파 하셨다. 그 가슴 아픈 일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이다. 일상적으로 들려지고 보여지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는 영성적인 진리요 하나님과의 교제의 순간이었다.

세번째, 그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더 깊은 대화로 들어가시곤 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일이나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등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고 할 때에 밤을 지새워 기도하시곤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미 큰 역사를 이루신 후에도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예를 들자면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막 1:32-34) 난 후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셨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베푸시고 난 후(마 14:23)에도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홀로 산에 오르시어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이 때는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추측컨대 이미 행한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물으셨을 것이며, 동시에 이 엄청난 사건을 치루신 후의 당신의 마음 자세를 살피시고 반추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겸손히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오르시면서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셨다. 돌아와야 할 품으로 돌아오지 않고 멸망하게 될 그 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통한의 눈물을 흘리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로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는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누가 복음에 보면 이 성을 보고 우시며 \"너는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19:41-42)\" 민족을 향한 뼈아픈 기도였다.

네번째,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예수님은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시기를 좋아하셨다. 특출한 예로는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신 사건이다. 광야로 나가 40주야를 금식하시며 기도하셨다. 그 기도는 가히 치열한 싸움이요 전쟁이었다. 모든 죄악된 인생들의 심령 속에 내재된 불타는 욕망을 몸소 체험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몸소 보여 주셨다. 지독히 끈적거리도록 붙어다니는 물질의 욕망, 권력의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등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력화 하는 영성생활이 바로 40주야의 금식기도였다. 그 때 성부 하나님은 부재중에 그곳에 임재하고 계셨다. 마침내 그 싸움은 승리로 끝났음을 마 4:11절은 말하고 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 드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내면의 싸움들을 하는 동안 언제든지 이미 주어진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셨다. 그 말씀은 내면의 싸움을 이기는 무기였으며 동시에 기도의 참소재였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광야를 찾고 한적한 곳을 찾으신 것은 바로 소란스런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한 작전이요 준비였다. 현대의 가장 위대한 영성가 중의 하나인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은 \"그대가 내적인 고요함을 획득하면 그것을 세상 어느 곳이라도 지니고 다니면서 아무데서나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이고도 외적인 고행이 없이는 내적인 금욕 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듯이, 외적인 고요함도 없는데 내적인 고요함을 논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참으로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당시의 현실 속에서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대처하고, 복음의 메세지를 확신있게 전하기 위해서 늘 내적인 고요함과 평화가 필요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아무리 과격한 논쟁 속에서도 의연하게 그 일들을 감당하셨다. 그것은 바로 한적한 기도의 훈련 속에서 얻은 항구적인 평화요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진실로 예수님은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시지 않으셨다. 모든 세상이 성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움이요 신비였다. 그 분의 성품과 흔적이 가득히 담긴 풍요로운 곳이 이 세상이다. 그런데 인생들이 그 내면에 숨겨진 신비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고 피조물만 오용하고 탐하기에 세상이 혼란케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평범한 세상 속에서 영성의 진리를 발견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하시고 교제하셨다. 그래서 그는 이 혼란한 세상 한 가운데에서도 성부 하나님을 아빠(abba)라고 부를 만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비결이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예수님의 영성생활 속에서 참으로 훌륭한 영성생활의 길이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진리는 가까이에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사실 과거의 많은 과학적인 진리가 바로 평범한 삶 속에서 발견되었다. 누구나 경험하고 대소롭지 않게 스쳐 지나가는 그러한 것들 속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도, 물의 부력의 법칙도, 증기기관차의 원리등도 누구나 경험하는 사소한 일들 가운데에서 발견되어진 진리였다. 뉴우튼이나 아르키미데스나 제임스 와츠 같은 사람들은 그 사소한 순간을 놓지지 숨겨진 진리를 포착해 냈다. 그것을 깨어있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깨어있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도처에 하나님이 남겨주신 발자취와 그 비밀을 느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영성생활을 다른 말로 깨달음의 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영성생활 대부분은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진 것이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다. 이미 경건한 이들은 그러한 방법들을 실천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빠뜨리기 쉬운 것은 우리가 성(聖)과 (俗)을 너무나 날카롭게 구분함으로서 가까운 곳에 있는 진리를 놓치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자연을 대하되 자연을 지으신 분의 눈으로 자연을 관조하고, 사람을 대하되 사람을 지으신 분의 마음으로 교제하고, 사건을 대하되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을 보려는 깨어있는 통찰력을 키울 때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온 만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을 곳곳에서 들이쉬게 된다. 그럼으로서 사도 바울이 권고한대로 누구나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살 수 있는 영성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