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5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5학기

제목어떻게 찬송 할것인가? 2022-07-13 16:48
작성자 Level 10
어떻게 찬송 할것인가?

 
지금까지의 강의가 여러분 머리속에서 잘 정리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찬송을 단
순히 신앙인의 정서를 위한 노래정도로 알고 있었던 분들에게는 아마 충격이 컸
으리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아무튼 찬송에 대한 인식이 매우 새로워 졌으리라 생
각합니다. 아울러 이제는 찬송하기가 약간 겁이 날거구요. 그리고 한 가지 의문
도 생겼을 것이라 생각되어지는데요? 바로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말입니다.
누구나 그 의문을 갖는 것이 영적 순리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의 의미를 새롭게
알았으니 이제는 찬송하는 방법이 궁금할 수 밖에요. 그래서 이번의 강의 주제는
여러분이 알고 싶어하는 찬송의 방법 즉, \"어떻게 찬송 할 것인가\"입니다.

1.전심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송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면서 그 기준을 일류 성
악가나 대중가요 가수들의 가창력에 두셨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찬송가를 폐기
처분해야 할 형편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가창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어는 수준
을 요구 하시지도 아니 하시고요.아울러 아름답게 불러야만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 잘아시는 하나님의 배려
(?)가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가창력 때문에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울러
남보다 가창력이 좀 더 뛰어나다고 해서 우쭐 댈 이유도 없고요. 왜냐하면 찬송
에 관한 하나님의 관심은 외형에 있지 않고 그 중심에 있으며 바로 그 열정의 농
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한국교회는 어떻게 찬송을 해 왔을가요?
겉모양은 그럴듯 한데 전심으로 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비록 지
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나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찬송하는지 장송곡을 부르
는지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운 교회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는 바로 잘못된 보수 신앙관 때문입
니다.
여러분 보수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 아니겠습니
까? 그런데 자칭 보수,보수를 강조하는 교회들에서 웬일인지 찬송하는 것 만큼은
비성서적으로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디 그뿐 인가요.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찬송을 찬송답게 하는 교회를 향해서
이단,삼단 운운까지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말입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인간들의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지
난 수백,수천년간 이 땅의 정신문화를 이끌어 온 이방종교(불교)와 유교 또한 근
대사에서 일제의 침략, 동족상잔의 비극을 통하여 이 땅의 뭇 심령들은 병들었었
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상한 심령들이 치료 되었으나 아직도 믿음이 없는 다
수의 심령들이,아니 믿음이 있는 심령들조차도 완전한 치유가 되지못하여 참된
찬양을 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깨어야 합
니다. 상한 심령이 치유받고 하나님께 향한 올바른 찬송을 드려야 할 때가 온 것
입니다. 몇가지 이유로 인하여 그 동안 수많은 교회의 찬송이 침체되어 왔고 그
것이 보수적인 신앙으로 미화 되기까지 했으나 결코 하나님앞에서 칭찬 받을 만
한 행위가 아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제는 속히 개선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친절한 찬송교사인 다윗은 이렇게 노래 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
를 돌리오리니\"(시 86:12)
전심의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모세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섬김에 관
한한 기본 강령이요, 찬송할 때의 절대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
여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마 22:37,38)
그럼 어떻게 해야 전심으로 찬송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
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 것을 항상 기억할 때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누가
복음 19장 37절에 보면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죄악
에서 건져내어 영생의 반열에 세워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항상 태양이 작열하듯
쏟아지는 축복을 바라보면 전심으로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에수님의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
여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찬송했던 것처럼 사실 체험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에게서
는 항상 감격적인 찬송이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누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줬기 때문이 아니라 반사적인 신앙행위로써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
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것은 결코 고난
도의 테크닉이 아닙니다.
구원의 열정, 그 감격을 보자는 것입니다.
기쁨의 고백을 듣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구원의 기쁨을 아무렇게나 표현하시겠습니까?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38:1)

2. 그 이름에 합당하게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입버릇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해서\"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대견스
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를 위해서라는 이 성숙한 고백을
하기까지 나에게는 참으로 엄청난 내적인 갈등과 아픔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쉽게 고백하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
는 부럽기까지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입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 관료들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하는 것 만큼
도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지 않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일하는 모습만 보아서는
누구를 위해 하는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장된 표현, 말의 인
플레임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헌신하는 것을 뉘라서 감히 이러쿵 저러쿵 평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을 누구나 다 아
는 사실인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체들의 행실에 대해 우리가 서로
권면할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합당한 자세와 그 기준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 지어다\"(대상 16:28,29)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분명히 찬송을 비롯한 모든 섬김의 기준을 발견할 수
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합당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딱 알맞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권위에 꼭 맞는 찬송과 헌신을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T.V.를 통해서 대통령의 해외 나들이때에 행정부에서 주관하는 환송 및 환영 행
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습니다만 과거에는 대단했습니다.
심지어는 김포공항에서 부터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 차량 한 대도 세워놓
지 못하게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짓들이 과연 그 이름에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나 아무튼 권위 좋아하는 사람들의 촌극이 아
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에게 큰 도전과 무언의 메시지
를 남겨 주었습니다. 때로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권위일망정 그것을 세워주기 위
해 몸부림치는 신하들의 모습을 보며 명색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저의 불성실과 무책임한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매너도 없이 하나님을 만왕의 왕 운운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성도들에게는
찬송을 시켜놓고 설교 노트나 뒤적거리는 목사님들. 찬송중에 히히덕 거리며 지
난 주간에 어떻게 지냈느냐고 옆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철없는 어른들, 이 모두가
구약시대 같으면 아론의 두 아들들처럼 성소 입구에서 불을 받아 죽어야 마땅한
모습들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찬송의 내용을 보면 대단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독재자도 그 백성들
로부터 이런 찬송은 받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대의 존칭어, 최고의 수식어, 그런데 찬송하는 그 모습이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을 송축하는 모습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명자라고 부릅니다. 사실 목사나 선교사만
을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명자로 세우셨습니
다. 그렇다면 이 사명자라는 명칭의 의미는 과연 무슨 뜻일까요? 한문으로 사용
할 사(사)에 목숨명(명)을 썼는데 이는 곧 목숨을 걸고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육신의 생명을 소멸하면서 주의 일을 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먹고 살기 위
해서라면 기능을 팔면 되고 시간을 할애하면 되지만 주의 성업을 수종드는 이르
리 차원은 그렇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주의 일은 마치 여가를 즐기듯이 하고 있습니
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름앞에 사명자라는 수식어가 붙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3. 감사함으로

사역자로서 갖춰야 할 조건이 많이 있으되 그 첫째 덕목으로 감사함을 손 꼽을
수 있습니다. 흔히 찬양 사역은 재능이 뛰어나면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재능 있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이 땅위에서 받으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재능을 팔려고 하지 그냥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재능이 그 사람의 생활 방편임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날의 헌신까지도 수입원의 하나로 여긴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례비를 흥정하면서 다니는
사역자들도 있다는 소리가 자꾸 들립니다. 나중에 무슨 상을 받으려고 그러는지
참으로 걱정됩니다.
그런가 하면 주의 일은 열심만 있으면 누구나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도 있습니다.(저 역시도 1년 전만 해도 열심만 있으면 복이 된다고 생각하고 행
동했었습니다)그러나 감사함이 전제되지 않은 열심은 대개 자기의 의를 세우기에
급급합니다. 다시 말해서 일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뭔가를 하
고 있고 또 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열심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십상입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
게 부담을 주고 대부분 리더에게 오히려 근심을 끼쳐 드리게 됩니다. 역시 어는
교회나 전도 잘하고 헌신 잘하는 사람은 재능이나 열심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그
마음 속에 감사의 샘물이 넘쳐나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르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했
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는 헌신은 이처럼 하나님도 기뻐하시거니와 옆에서 지켜보
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 좋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또 다른 타입은 타인의 요구등에 의해 자의가 아닌 타의 또는 의무감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대개 연습등에도 자주 불참하게 되고 찬송사역을
하는데 있어서도 억지로 하기 때문에 기교적인 면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그 심령
속에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아니기에 거짓된 아니 가식된 찬양으
로 인해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사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것만도 가마한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찬송 전도부
장관으로 세워주셨으니 영광스러운 그 부르심 앞에 몸둘바를 몰라 그야말로 황공
무지로소이다 라는 매일 매일의 감격이 곧 헌신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 항상 뜨거
운 구령의 불을 밝힐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비단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라도 감사해
야할 조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이든지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 데려다 놔도 분명히 불평할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까?
바로 불평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던 그 세대가 모두 다 광야에서 묻
힐 때까지 그들을 그 속에 머물게 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의 백
성들인 우리가 오늘 그분께 나갈 때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
습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
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 마지 못해 헌신하는 이 시대의 사명자 우리 모
두를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
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박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라고 했습니다.
제발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내 재능이나 내 의지 때문이라고 뽐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고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셨으니 나는 단
지 쓰임 받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닌가 말입니다.
사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은 인간들임에 틀림이 없
습니다. 남들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외치며 일요일만 되면 산과 바다로 줄
행랑을 치는데 비록 시원찮게 보이는 신앙생활이지만 그래도 믿는답시고 봄이라
고 해서 벗꽃놀이를 한번 갈 수가 있었습니까? 유채꽃 놀이를 마음껏 갈 수가 있
었습니까?
저는 비록 세상 즐거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 할 지라도 그렇다고 더 이상
일락만을 좇아 살 수 만은 없는 처지이고 보면 차라리 주의 성업이라도 자원함으
로, 감사하므로 해서 예수 믿는 즐거움, 사역하는 즐거움이나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보자고 스스로 위로 겸 다짐을 해보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
는 감사라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고 진정한 감사
적어도 선지자 하박국의 고백만큼은 되는 감사를 해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
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히 사람들은 무엇을 했거나 지금 현재 무엇을 하고 있
다는 사실만을 크게 강조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어떻
게 해 왔고 또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시 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찬송을 쉬지 않고 불러 왔습니다. 헌금 역시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로 많이들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열심도 세계 어
느 나라 성도들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전심으로 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한번 돌아보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이름에 합당하게 해왔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양심의 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을 것 입니다.
찬송하는 삶의 비결

찬송하는 삶의 비결

주일날 주의 전에서 여러분의 찬송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저의 욕
심 같아서는 여러분의 삶이 언제 어디서나 이와 동일했으면 좋겠습니다. 더하지
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그렇지만 오늘 날 여러분의 실제 생활은 과연 어떻습니
까. 마치 주일날 성가대원들이 교회에 와서는 가운을 입듯 찬송의 옷을 입고 다
시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에는 그들이 가운을 벗고 자기의 옷으로 갈아
입듯이 여러분도 다시금 찬송의 옷을 벗어놓고 굳이 세상 근심의 옷으로 갈아입
고 나가지는 않았습니까? 때문에 성전에서는 찬송을, 성전 밖에서는 절망의 탄식
을...저의 경우에는 현재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주후1993년 12월)에 있어서는
앞에 기술한 것과는 반대로 성전 내에서는 조용히, 그러나 성전 밖에서는 오히려
뜨거운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는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게 주신 고난을 통해 저를 더 성숙시켜 주시고
그 동안 잘못 드려진 찬송을 이제는 옳게 드릴 수 있도록 깨우쳐 주셨기에 더더
욱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렇습니
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
라.\"(사 61:3)
그런데도 오늘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희락이 없고 찬송이 없으니 어쩌면 좋다
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계속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의 노래
만 불러야 할까요? 혹 어떤 분은 이런 생각을 할 지도 모릅니다.
\"환란의 풍파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찬송만 하고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무척 그럴듯한 항변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
의 뜻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 18)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눈에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 경이로운 찬송의
삶을 정말 멋지게 살고가신 믿음의 선진들의 행적이 기독교 2000년 역사안에는
수많은 페이지로 장식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울러 오늘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역경에 처해 있으나 이세상에서 가장 부
유하고 명예를 누리는 사람보다 더 풍성한 감사와 찬송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도.

1.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한 삶의 순위를 정해 주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먼
저 할 일과 나중 할 일 즉 불변하는 생활의 최 우선 순위에 대해 너무나 간단 명
료하게 선을 그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의 생활 순위는 어
떻습니까? 대개는 그 순위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글
을 쓰고 있는 저 자신도 제 삶의 우선 순위가 잘못되어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
다. 그래서 더욱 노력하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직장이 먼저요, 학업이 먼저며 가정이 먼저인 것을 자신들 스스로가 분명히 입
증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삶의 형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직까지 세속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결과입니다. 아직도 내 것, 우리
의 것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곧 주인의 행세를 하는 자요, 청지기적인 삶이 무엇
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자에 불과 합니다.
그렇다면 청지기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
것은 바로 매 순간마다 주인의 뜻을 잘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 주인의 뜻이 무엇입니까?
\"너는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내게 묻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는 말씀이 아
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은 모두 다 주인 행세에 바쁘기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할 일과 나주에 할 일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
다. 각 사람에게 있어서 먼저 잘 되어야 할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
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 삼서 1:2)(이 구절을 예배 시작 때마다 노래로 부르는 교회,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삥교회를 볼 때 과연 영혼을 중요시 하는 교회가 성장하는
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가 항상 최우선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에 우리의 영혼 문제만
바로되면 나머지 범사는 그야말로 만사 형통임을 저는 분명히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아래서나 찬송의 삶을 살아가는 참 비결은 먼
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

사람은 누구나 일생동안 행복하게 살기만을 소원합니다.
단 한번의 슬픔이나 아픔도 없이..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이상일뿐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때
로는 자신이 고의로 저지른 죄의 대가로 부끄러운 환란을 당하기도 하고 순간의
판단 착오로 큰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죄와는 담을 쌓고 정말 의롭게
만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분들에게도 뜻하지 않게 환란의 먹구름이 자주 덮이
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이런 것들이 성도들의 찬송의 샘을 마르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리고
찬송이 사라진 그 입에서는 곧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불신의 의문이 꼬리를 물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계신다는 말인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가셨단
말인가?\"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 어떤 환란 앞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찬
송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바로 욥이 그런 사람입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
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
니이다.\"(욥 1:21)
이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찬송의 모델입니다.
기쁠 때야 누구는 노래 못합니까. 예배하러 와서야 누구는 찬송 못하겠는가 그
말입니다.
요즘 전국적으로 찬양집회가 확산되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거기에 모인 청소
년들이 땀과 눈물에 온 몸이 적셔질 정도로 열심히 찬송하는 것을 보고 어떤 분
들은 어른들이 갖지 못한 믿음을 어린 학생들이 가졌노라고 극찬하지만 그 가운
데 일부는 분위기 때문에 소리지르고, 분위기 때문에 울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
야 합니다. (저 또한 신앙 초기에 그랬었기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분위기에 따라 찬송을 하지 않습니다. 감상에 젖
어 찬송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온전한 찬송은 현실적 상황을 초월하고 정서를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매
를 맞고 착고에 채워진 채 보여준 행동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시밭길 같은 인생 여정에서 욥이나 바울과 같이
항상 찬란한 찬송의 꽃을 피우며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 어떤 상황 아래서
도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약속된 말씀만 굳게 붙잡으면 아무리 거센 환란의 바람
일지라도 우리의 입에서 찬송의 불을 끌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뜨거운 참회의 눈물이 아니요 헌신과 결단의 눈물이 아닌
무가치한 감상주의자들의 눈물이 강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흥회를 비롯해 각종 신앙모임에서 혼자 회개하고 혼자 은혜 받는 것처럼 호
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대부분 문밖을 나서기가 무섭게 불신앙인들과 똑같이 행동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생활 속에 무슨 찬송을 기대할 수가 있
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말하기를
\"사랑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한 일서
4:18)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의 교감을 의미합니다.
설령 내 눈 앞에 날마다 하나님의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사랑의
교감이 게속되는한 내 마음속에는 결코 두려움이 뚫고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입
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찬송하며 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심 많은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 했습니다.
오늘 환란 가운데 놓인 여러분의 눈에 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위로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 하지 말라는 말입니
다.
왜냐구요?
여러분의 눈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여러분의 귀에 그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임마누엘의 주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엘리사의 사
환 게하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군대가 그의 종 엘리사를 언제나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데 그 증거가 무
엇이냐구요? 바로 식언치 않으시는 그 말씀입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그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하며 무었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어야 하는가 말
입니다.
일상 생활에서의 변함 없는 찬송의 비결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 비로
소 가능해집니다.

3. 상 주심을 바라볼 때

만일 이 세상의 모든 일에 상 주심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한 순간에 활기가 사라질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상주심때문에 살고 상주심때문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
르심의 상이(빌 3:14)없다면 그 누가 신명나게 주의 성업을 수종들겠습니까?
육신적으로 볼 때 기독교인들에게는 피곤한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세상 사람
들과 똑같이 일은 하면서도 쉬는 시간은 그들의 절반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저녁시간 포함),수요예배, 금요철야, 새벽기도,부흥회,수련회,구역예배 각
부서 임원기도회까지 모두 참석하다보면 공휴일을 비롯해 월차까지도 자신을 위
해 할애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누적된 피로와 단조로운 생활
패턴으로 인하여 수많은 성도들의 얼굴에서 기쁨을 찾아볼 수가 없고 아울러 그
생활에서 찬송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음은 여간 안타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은 순전히 어떤 의무감이나 일
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그릇된 강박관념에 사로잡
혀 있기 때문인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생활속에서 무슨 활력을
기대하며 찬송의 삶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때문에 본인도 자신의 삶이 답답
하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도 답답하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리는 처방이 \"일(예배, 사역)을 줄이자\"라는 사역의 포기 선언
으로 귀결되어 버립니다. 찬송이 없는 삶의 이유를 과분한 주의 사역 때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속에서 자꾸만 찬송이 시들어 가는 이유가 과다한 헌신, 과다
한 사역 때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천만예요.
상주심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다 같은 것인데 일만 좋아할 육신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 좋은
음식 먹고 싶고, 더 아름다운 옷 입고 싶고, 더 편히 쉬고 싶은 것은 어느 육체
에나 기본적으로 내장된 욕망의 요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육신을 학대 하듯이 주의 일에만
매진 하면서도 그토록 찬란한 찬송의 꽃을 날마다 피울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히 11:26)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상주심을 바라보는 것, 그것만이 진정한 기쁨으로 주의 일을 감당
하며 무너져 내리는 육신의 아픔속에서도 찬송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상 주심을 바라봄.
그것은 바로 찬송의 기본 자세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 생활속에
찬송이 없는 성도들은 상을 외면하며 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상을 바라기는
하되 그 바라봄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부르심을 받은자(성도)라
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의의 면류관은 바라보지도
않고 오직 이 세상에서 주는 상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어찌 그 심령에서 찬송
이 나오겠습니까.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일을 하든지 꼭 지켜야 할 3대 원칙이 있습니
다.
그것은 바로 \"시작은 주님의 이름으로, 명분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목적은 상주심을 바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의 자세는 과연 어떻습니까. 어린 초신자는 말할 것도 없
고 교계의 원로들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명분은 좋은데 목적이 잘못된 경우가 너
무나 비일비재합니다.
적어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을지 계산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부르심의 상
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을 주님은 보고 계시며 여러분
의 성적표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것분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에서만 상을 베푸시지 않
고 이 땅위에서도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는 주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상급의 약속입니다. 우리
다함께 그 상급의 전제조건과 그로 인한 결과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살펴 봅시
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
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3| 12)

우리는 그 동안 사도들, 순교자들은 우리와 차원이 전혀 다른 삶들일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요, 똑같
은 감정을 지닌 인격체였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첫째 그들의 삶에 있어서 불변하는 1순위는 항상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었
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신실함을 믿었습니다. 그곳이 사
자 우리안이든 돌멩이에 맞아 죽든 임마누엘의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세상의 상급이나 위로를 결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상주심만을 바라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한 믿음의 거인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
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6)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비결을 우리 각자의 삶에 바로 적용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찬송의 삶이요 승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