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5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5학기

제목이혼문제 교회는 어떻게 해야하나 2022-07-13 16:43
작성자 Level 10

[ 미국의 새 풍속도 이혼식 ]

적지 않은 하객들이 모인 교회나 호텔에서 목사나 신부를 모시고 두 남녀가 서로를 각 개인으로 존중할 것과 자녀에 관한 한 공동으로 협력할 것을 서약한다면 우리는 다 결혼식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 앞으로 경제에 관한 것은 각각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을 하고 반지를 서로 끼워주는 것이 아니라 되돌려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면 “이것이 도대체 무슨 예식인가?”라고 우리는 반문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요즘 미국의 새로운 풍속도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이혼식이다. 아직은 널리 성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혼식을 통해 미국의 부부들이 공식적인 헤어짐을 통고하는 것이다. 어떤 이혼식에서는 결혼식에 못지 않은 비용을 사용하기도 하며, 비디오와 사진을 찍기도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 아닐 수 없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이혼식이 곧 성행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될 만큼 한국 사회의 이혼문제 또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 이혼방지교육은 No More, 자녀보호교육은 OK ]
얼마 전 뉴스에 의하면 미국 워싱턴 주의 12개 카운티에서는 정부에서 실시하는 교육을 받는 부부들에 한해서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교육을 받아야 이혼을 법적으로 허락하는 것은 이혼 방지 차원의 교육이 아니라 자녀 보호 차원의 교육이다. 부모는 이왕 이혼을 하더라도 자녀들에게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대한으로 줄여주자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혼 방지 교육보다는 이혼 후 자녀 보호 교육을 실시해야만 하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 명중 한 명 꼴로 이혼을 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이런 교육의 필요성이 머지 않아 대두되지 말라는 법이 없음을 생각할 때 이혼의 문제는 가장 골치 아픈 사회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우리 모두의 문제인 이혼 ]
또한 이혼 문제에 한국 사회가 매우 개방적이 되었고 대범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 중의 하나는 일반 대중들이 즐겨보는 TV 드라마들이 너도나도 이혼 문제나 그것과 연관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방송된 ‘아줌마’나 ‘푸른 안개’는 직접적으로 이혼 문제를 다루었고, 이혼 찬성파와 반대파로 양분된 시청자들의 논쟁에 한국 사회가 떠들썩했던 것이 엊그제이다. TV 드라마만이 아니라 영화나 소설의 주제도 남녀의 순전하고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남녀의 불륜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야 소설도 잘 팔리고 영화나 드라마도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이혼이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우리 모두의 관심권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다양한 이혼의 이유들 ]
인간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혼의 사유도 이미 다양해졌고 또 계속적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그래서 상상도 못할 기상천외한 이혼의 사유들이 등장하고 있다. 미국 남가주의 오렌지카운티에 사는 한 부부는 잡종개의 소유권을 놓고 이혼을 하기도 했으며, LA에 사는 한 한인 부부는 맞벌이 부부보다 독신이 세금을 적게 낸다는 것 때문에 절세를 위하여 합의 이혼을 했다고도 한다. 그런 사유들은 유별나고 희귀한 이혼 사유일 것이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이혼 사유들은 다음과 같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와 성격차이가 이혼 사유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부간의 갈등을 포함한 시댁이나 처가집 식구들과의 불화가 그 다음 순서에 올라 있다. 또한 수면 밑에 있었던 성적(性的)차이의 사유도 이제는 막강한 기세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이혼 사유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며,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도 인터넷 채팅을 통한 외도와 원조 교제 등으로 그 유형이 다양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마약과 도박 중독 등으로 인한 이혼률도 급상승곡선을 그리며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 고부간의 갈등 ]
이러한 이혼의 사유들 중에 고부간의 갈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시어머니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사이에 낀 아들들의 문제이며, 결혼의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혼의 사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가정이 고부간의 갈등으로부터 예외가 아니라는 면에서 그 갈등의 뿌리는 단번에 찾아낼 수도, 뽑아버릴 수도 없는 실로 깊은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은 시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전통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모자 관계는 참으로 유별난 것이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남편과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에서 보상받지 못한 모든 것을 아들을 통해 받으려 해왔고 또 받아 왔다. 한국의 어머니들에게 남편은 없어도 되는 존재이지만 아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이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던질 수 있는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신과 아들과의 관계는 그 친밀성에서 며느리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며 이루어 가는 면에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며느리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효와 장유유서라는 유교적이며 전통적인 가정관을 고수하며 살아온 기나긴 인생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어머니에게 아무도, 특히 며느리는 더욱 범할 수 없는 성역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철통같은 시어머니의 성벽을 안간힘을 다해 기어오르는 것이 한국 사회의 며느리들의 모습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더 처절한 모습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사실 시집온 며느리는 굉장한 문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반 세기 동안 몸에 익숙하게 살아온 친정 문화 대신에 조상 때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온 시집 문화에 새롭게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며느리는 시집 문화의 충격 속에서 당연히 자신을 보호하며,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하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 유일하게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남편을 확보하려고 시어머니와의 일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 순종으로 요약되는 효(孝)사상 ]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일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원리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남편을 가운데 둔 시어머니와의 일전이 실제상으로는 문제가 되는 이유가 바로 유교문화권에서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효(孝) 사상 때문이다. 전통적 한국 사회에서 시어머니를 포함한 부모에 대한 효는 순종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옳고 그름을 떠난 맹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벌이는 남편(아들) 쟁탈전의 걸림돌이 되는 효 사상은 다분히 강압적이며 독선적인 형태의 순종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을 말하고 있다(에베소서 6:1~2). 폴 스티븐스는 그의 저서인 「현대인을 위한 생활 영성」 제2부 가정 생활의 영성 제5장 경건한 부모에서 이 순종과 공경의 차이를 결혼 이전과 이후의 부모에 대한 책임과 태도의 차이로 구별짓고 있다. 즉 자녀가 부모의 권위 아래 있는 결혼 이전에는 순종의 책임이 있지만, 결혼 후에는 공경의 책임이 있으며 부모를 소중히 여기고 가치를 존중히 여기는 태도는 평생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 결혼 전후의 중간 단계인 떠남 ]
바로 여기에서 대두되는 것이 결혼 전과 결혼 후의 중간 단계이다. 이 결혼 전를 가르는 이 중간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인(成人)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기 이전에는 순종을 통하여 효를 행하는 것이지만,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공경을 통하여 효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 전에는 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이 모두 절대적이지만, 결혼 후에는 부모에 대한 공경은 절대적이지만 순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결혼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 의사로 순종 여부를 결정하는, 책임 있는 존재 즉 성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인간이 성인이 되는 것이 바로 결혼이다. 물론 육체적, 정신적으로는 이미 성인이 되었겠지만 완전한 독립적 인격체가 되는 것은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 사실을 성경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은 결혼을 “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인격적인 떠남, 인격적인 독립을 말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육체적인 독립도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적으로 독립했다고 할지라도 혈육의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부모 자식간의 관계의 끈은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육체적으로 떨어져 사는 것이 실제적인 독립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격적으로는 물론 실질적인 육체적인 독립도 떠남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K성도는 최근 결혼 15년을 청산하고 두 아이와 함께 사는 이혼녀이다. 이혼 직전까지 P성도는 장로요 권사이신 시부모를 모시고 산 며느리였다. 남편은 형제 중 장남으로 시부모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자란 40대 후반의 나이였다. 장남인 남편에 대한 시부모님 사랑과 기대는 손자들을 향한 그것을 능가했고, 부모에 대한 남편의 효성도 극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K성도는 그런 시부모님과 남편의 각별한 관계 사이에 끼어 경제적 권리나 자유를 한 번도 행사해 보지 못한 채 결혼생활 15년을 거의 종처럼 살아왔다. 사실 시부모님들을 모시고 살면 아이들도 돌보아 주시고 해서 좋은 점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친정 부모님으로부터 시집가면 맏며느리이니 시부모님들을 잘 모시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모든 어려움과 설움을 참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시부모님들은 남편이 장남이라는 것을 내세우시며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셨고, 소위 효자라는 소리를 듣는 남편은 무엇이든 아내와 상의하는 법이 없이 부모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들어주었다. 남편의 박봉으로 살아가야 하는 주부의 입장에서 어떨 때는 정말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요구하시는 시부모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집안 가계부 사정을 뻔히 아시면서 갑자기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한다던가 예고도 없이 친구분들을 집으로 초대하시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어렵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남편은 강압적으로 나왔고 그런 남편의 태도에 눌려지낼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 칠순 때에는 자녀들이 식당에서 생신 상을 차리겠다고 했는데도 꼭 집에서 상을 받으시겠다고 해서 칠순 상을 차린 후에 K성도는 앓아 눕기까지 했다. 그리고 남편과는 처음으로 크게 다투기까지 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칠순 후 두 분이 갑자기 묘지를 사놓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심으로 일어났다. 시부모님의 말을 들은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지 묘지를 사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패물까지 팔 것을 강요했다.
남편의 그 말에 그동안 쌓여왔던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폭발했고 K성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인격적인 모독을 남편과 시부모님에게 당했다. 그리고 그 밤에 K성도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버렸다. 그 후 아무런 소식이 없던 남편이 육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불쑥 찾아왔고 또다시 대판 싸움을 벌였다. 남편은 부모를 거역할 수 없으며, 만약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육 개월 후 남편으로부터 이혼서류가 날라 왔고 K성도는 고민 끝에 아무런 미련 없이 도장을 찍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K성도는 시부모님께 대한 순종에 남편에 대한 순종을 추가로 강요받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가중되었을 것이다. K성도의 경우는 남존여비 사상에 물들어 있는 남편의 가부장적인 태도와 자식(특히 장남)에게 너무 의존적인, 자식을 떠나지 못하는 부모의 태도가 맞물려 있는 경우이다.
남편은 아내를 가정을 세우는 동반자로서 인정하지 않았고 단지 집안 일을 하는 가정부 정도로 취급했으며, 부모와 아내 사이에서 언제나 부모를 선택함으로 그 자신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독립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 부모는 자식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세워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며느리에게 순종을 강요함으로 자신들이 자녀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나약함을 드러낸 것이다.
자녀가 부모를 의존하는 것은 성장의 단계이며 건강한 자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거꾸로 자녀를 나중에 자신이 의존할 대상으로 보고 양육하는 것과 끝까지 자녀에게 의존하는 것은 건강한 부모의 모습이 아니다. 자녀에게, 특히 아들이나 장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며느리와의 갈등을 초래하는 필연적인 요인이다.
K성도의 시부모님의 경우 장로와 권사의 직분을 가진 신앙인들로서 자식을 의존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존했어야 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식을 의존하는 나약한 부모와 나약한 신앙인들이 자식의 가정을 파괴하는 원인과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선택이 아니라 우선 순위의 문제 ]
‘부모냐, 아내냐?’의 문제는 한국 남성들의 오랫동안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갈등해온 사항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보다 관계의 우선 순위의 문제이다. 남편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관계는 부부의 관계이다. 부부관계보다 부모와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우선 순위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 말은 부모를 사랑치 말고, 돌보지 말고,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부모를 가장 사랑하면서 아내도 가장 사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두 가지 사랑은 차원이 다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남성들은 아내를 사랑하려면 부모를 사랑치 말아야 하고, 부모를 사랑하려면 아내는 사랑치 말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경은 사랑의 차원을 몇 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성과의 사랑이 있고, 친구와 가족간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황금률임을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가장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차원이 다른 것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을 사랑하려면 다른 한 쪽은 사랑치 말아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에서 한국의 모든 남편들과 가족의 구성원들은 벗어나야만 한다.

P성도는 현재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사는 이혼녀이다. 그녀는 대학시절에 홀어머니를 둔 남편과 만나 3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아 기르며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았다. 연애 시절 그렇게 남자답고 든든하기만 했던 남편이 결혼을 몇 달 앞둔 무렵부터 소위 “마마보이”의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약간 미심쩍기는 했지만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결혼을 한 그날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차남이었기에 분가해 살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부부싸움만 했다하면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달려갔고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었다. 교회도 결혼 후부터 발을 딱 끊었는데 결혼 전에 들엇던 말과는 달리 그 집안은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다. 남편은 경제적 능력이 없었고 직장도 하루가 멀다하고 그만 둘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에게 손을 벌려야만 살 수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연년생으로 태어났고, 셋째 아이도 삼 년 터울로 태어났다.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 없는 몇 년을 보내는 사이에도 남편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시어머니는 물론 온 시댁 식구들이 남편의 무기력과 가정형편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며 폭언을 서슴치 않았고 결국에는 폭행까지 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P성도는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실행에 옮겨 지금은 세 자녀와 함께 그 악몽에서 헤어나 그런 대로 평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P성도의 경우에는 그 남편이 육체적인 독립보다도 정신적이며 인격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한 경우에 속한다. 어릴 때부터 과잉보호적으로 아들을 양육해온 시어머니는 아들을 인격적인 독립체로 양육시키지 못한 책임이 있다. 또한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 있는 독립적 인격체로서 서지 못하고 부모와 가족에게 의존하는 미성숙함의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 사실 P성도의 경우 경제적 어려움은 이겨낼 수 있는 문제였던 반면 관계적 어려움은 정말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한 가정의 문제를 구성원인 남편과 아내가 풀어 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이 간섭을 해왔고, 그렇게 해서 해결되기는 커녕 모든 누명과 책임을 자신이 뒤집어쓰는 결과만을 떠안았던 것이다. 언제나 P성도는 혼자였으며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었고 남편은 자신의 가족들과 한 패가 되어 아내를 공격하는 입장이었다.
실로 P성도의 10년간의 결혼생활은 끊이지 않는 시댁 패거리들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P성도는 패배자의 처지였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점점 평가 절하하게 되었고 생존의 의미마저 잃게 된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적대 관계를 쉽게 형성한다. 과잉보호적 부모 밑에서 성장한 유약한 남편의 경우에 그 적대 관계는 더욱 심각하다. 소위 “마마보이” 혹은 “파파보이”라고 불리는 성인 아이의 배후에는 언제나 과잉보호형의 부모가 있는 것이고 그 영향은 성인이 된 아들의 가정 생활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양산되는 성인 아이 ]
또한 성인 아이는 언제나 역기능적 가정에서 만들어진다. 역기능적 가정의 특성은 부모가 정신적, 인격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감정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고, 가족 간에 인격적인 존중이 결여되어 있고, 지극히 폐쇄적인 것도 역기능적 가정의 특징이다. 이러한 역기능적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제한된 감정 표현 능력 때문에 대부분 분노로 감정을 표현하며, 자신이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남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못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장한 사람은 결혼 후 자신의 아내마저도 경계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순탄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갈등에 대처하는 일반적인 남편들의 유형은 네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회피형 남편인데, 이런 남편들은 갈등을 회피하여 그 상황에서 도망해버리고 마는 남편들이다. (2) 분노형 남편인데, 이런 남편들은 아내나 어머니에게 또는 아내와 어머니 모두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분노를 토해내는 남편들이다. (3) 비위형 남편인데, 아내와 어머니를 오가며 다 비위를 맞춤으로 위기를 넘기는 남편들이다. (4) 해결형 남편인데, 이런 남편들은 중간 역할을 잘 해서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남편들이다. 한국의 남편들은 대부분 (1)번과 (2)번의 유형들이 많다. (3)번 유형의 남편들은 그리 많지 않고 (4)번 유형의 남편들은 더더욱 많지 않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유형은 (4)번 유형의 남편들이다. 그런 해결형 남편이 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아내의 입장을 다 이해하는 동시에 양쪽의 입장을 다 세워주는 지혜를 발휘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남편, 아내 그리고 시어머니가 함께 노력하고 변화해야만 고부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팽팽한 삼각의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삼위일체의 구도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열쇠는 남편의 손에 있다. 바로 남편이 해결의 주도권을 잡아야 할 것이며, 그런 남편이 해결형 남편인 것이다. 지금도 고부간 갈등의 끊임없는 싸움에 지친 시어머니들과 아내들은 해결형 남편들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결형 남편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격적 관계를 이루어 나가면서 가능해지며 해결을 위한 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남편이 책임의식을 갖고 해결을 주도함과 동시에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엉켜있는 적대 관계의 끈을 한올씩 풀어가야 한다.


[ 교회를 향한 도전 ]
이렇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갈등 해결의 노력과 함께 교회적인 차원에서의 노력도 필요하다. 이혼 사유의 다양화는 이혼에 대한 목회의 다양화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고부간의 갈등 해소를 위한 다방면의 목회를 교회는 고민해야만 한다. 그렇게 성도들 가정과 성도 개개인의 문제가 교회와 목회자들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싸안고 고민해야 할 본질적인 문제이지 외적인 성장이나 부흥은 비본질적인 문제이다.

2000년도를 시작하기 전 미국의 CNN방송은 기독교를 향해 이렇게 도전했다. “이제 기독교는 제 2의 종교 개혁이라는 새천년의 도전 앞에 서 있다. 지난 천년 동안 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영향력과 지도력은 계속 쇠퇴해 왔다. 삶의 질 향상과 개선이라는 면에서도 과학과 의학이 끼친 수단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다. 끊임없이 기독교에 도전해 오는 안락사, 자살, 낙태, 이혼, 인간 복제 등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의 영향력과 지도력의 회복은 새 천년의 가장 중요한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새 천년 교회의 도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는 도전일 것이다. 가정은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이며 근본이다. 창세기에서 이미 하나님은 가정의 중요성을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혼례를 거행하심으로 말씀해 주셨다. 어떤 것이든 마찬가지이지만 근본이 흔들리면 다 무너지고 만다. 한국 사회의 이혼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는 정상적으로 결혼한 부부의 숫자보다 결혼하지 않은 부부와 이혼 남녀 그리고 미혼 부모의 숫자가 훨씬 높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전에는 한국 사회에서 비판을 받았던 가정 문제, 특히 이혼의 문제가 이제는 점점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추세로 가고 있다. 가정의 가치는 더욱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교회를 향한 도전이 있다. 세상의 풍조와 추세에 역행하여 결혼과 가정의 의미와 가치를 높이고 회복하는 몫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이다.

이미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교회들이 앞다투어 가정 목회를 하고 있다. 신혼교실, 부부교실, 부모교실, 자녀 교실 등의 개최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얼마전 미국 LA에 소재한 한 교회에서는 10년, 20년 결혼 생활을 한 부부들에게 몇 주 코스의 성경공부를 한 후 교회 앞에서 결혼 생활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언약식’을 가졌다고 한다. 좋은 아이디어이고 필요한 목회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다양한 가정 목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며 모든 교회들이 협력하여 더 많은 가정 목회의 결실들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많은 형태의 교실들이 있지만 고부간 갈등 해결을 위한 프로그램들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부자(姑婦子)교실도 필요하고, 더 나아가 손자들까지 참여하는 고부자손(姑婦子孫) 교실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60년대에 최고치를 기록했던 미국의 이혼율은 1980년대 후반부터 줄어들고 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이혼율이 줄어든 것은 결혼하지 않고 사는 부부가 많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미국인들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부쩍 전통적인 가정의 가치를 다시 찾기 시작했고, 전통적 가정을 재발견하자는 운동은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다. 어떤 미국의 자유 기고가는 “이혼바람은 Me Generation(나만 생각하는 세대)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사회현상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진정한 나를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찾는다면 이혼 바람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를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에 이혼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잠재력을 소유한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추락과 쇠퇴만을 거듭해온, 한국 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영향력과 지도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망가지고 끊어져버린 가족들 간의 관계의 끈들을 이어주고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시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교회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더 많은 시간과 물질과 열정을 가정의 문제에 투자하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맡겨진 사명을 잘 수행함으로 서두에 언급한 이혼식이나 이혼자녀보호 교육이 한국 땅에는 절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막는 파수꾼의 역할을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것이다. 송 인 호·명지대 영문과와 미국 인터내셔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하고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안디옥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