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5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5학기

제목현대신학사상의 큰 흐름 2022-07-13 16:54
작성자 Level 10

현대신학사상의 큰 흐름

나 용 화

하나님의 창조 이래로 인간은 항상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놓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서 살고 있는가? 왜 나는 고달픈가? (또는, 무엇이 문제인가?)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또는, 구세주는 누구인가?) 무엇이 중요한가? 그래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인간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서 인류는 많은 것을 묻고 대답하며 살아왔다.
18세기 말엽의 불란서 혁명(1789년)을 통하여 그 위세를 과시한 바 있는 계몽주의 사상에 뿌리를 박고 있는 현대신학은 성경의 신적 권위와 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거부하고 인간의 과학적 합리적 이성과 경험을 사용하는 합리주의적 자율주의 사상이다.
이 같은 자율주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유신론(theism)에서 벗어나 이신론(deism)을 거쳐 유물론적 자연주의(naturalism)로, 그리고는 마침내 무신론적 범재신론(panentheism)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와 관련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the very God-man)으로 믿는 정통적 기독론에서 벗어나 역사적 보통 사람 예수(a historical Jesus)를 주장하는 구자유주의로 나아갔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케리그마적 초월적 그리스도(the kerygmatic transcendental Christ)를 가르치는 신정통주의를 거쳐, 예수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a historic Jesus)로 보는 신자유주의 및 정치적 해방자(liberator)로 보는 정치신학으로 발전되었다. 그런가 하면, 인간과 관련해서는 인간을 죄인이면서 의인으로 보는 정통적 인간론에서 벗어나, 유한하고 불안한 실존으로 보는 실존주의적 인간론을 거쳐, 세상의 삶에서 소외당한 인간, 그리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가난하여 비인간화된 인간을 강조하는 정치신학적 인간론으로 발전되었다. 지금은 인간 자신을 아예 신적 존재로 알고 믿는 범재신론적 인간론이 득세하고 있다.
이와같이 현대신학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리스도 곧 구세주는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은 누구인가? 라는 큰 질문들을 중심으로 변화되어 온 것이다.

I. 신론 중심의 흐름

인간은 본질적으로 항상 의존하며 사는 의존적 존재여서, 어려서는 부모를, 장성하여서는 배우자를, 늙어서는 자녀를 의지하며 살아가듯이, 부귀와 명예와 권세가 다 갖추어져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모하며(시 42:1,2ꡒ내 영혼이 주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고 갈망하나이다ꡓ; 전 3:11,ꡒ하나님이 영원 곧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ꡓ) 찾아 만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그릇 해석하거나, 그 성경을 떠나서 찾다가 하나님을 왜곡시켰다.

1. 유신론 (theism)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역사상 기술한 정의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소요리 제4문답에 의하면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I (Grand Rapids: Eerdmans, 1973), p. 367: 참조, J. I. Packer, Knowing God, p. 16.
,ꡒ하나님은 영이신데, 그의 존재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ꡓ(God is a Spirit, infinite, eternal, and unchangeabe, in his being, wisdom, power, holiness, justice, goodness and truth)
이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 주체로서 무한 절대의 초월적(transcendental)존재이시되, 우리의 창조주 아버지로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내재적(immanent)존재이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격적인 영(a Spirit)이시기에 항상 살아계시되 그 보좌가 하늘에 있어(히 1:3; 8:1; 시 2:4; 11:4)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단 2:37, 44; 4:17). 이 하나님은 지극히 크시기에 우리가 엎드려 경배드리기에 합당하시다(시 95:3,6). 참고, J. I. Packer, Knowing God(Downers Grove: IVP, 1973), pp. 15, 73. 참고,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London: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9), p. 24.

성경적 유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어 천지를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직접 다스리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땅의 역사(history)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심판하시는 바 의미있는 사건들의 이야기(His story)인 것이다. 이렇듯, 유신론은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심을 믿으며,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이 직접 때를 따라 개입하여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유신론은 이 세계를 개방체계(open system)로 보고 있다. 참고, 제임스 사이어,「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김헌수 역(IVP, 1987), pp. 30-34.

이 유신론은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어서, 사도들과 교부들에 이어 초대교회와 중세교회 및 종교개혁자들은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을 신봉하고 있는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으로 이어져 왔다. 이 유신론이 하나님의 살아계심 특별히 초월적으로 뿐 아니라 내재적으로 계심과, 하늘과 땅에서 통치하고 일하시어 역사를 만들어 가고 계심을 믿고 주장하게 된 데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 이 유신론에 의하면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절대 무오한 규칙으로서 신적 권위가 있으며, 진리의 절대적 척도로 신봉하고 순종해야 한다.

2. 이신론 (deism)

카톨릭계 나라인 불란서와 개신교계 나라인 스웨덴과 독일간에 벌어진 30년 전쟁(1618-1648)으로 인하여 유럽 사회가 황폐되자, 그 전쟁의 원인이 된 기독교 교리 논쟁과 관련하여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정신이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과학자 갈릴레오(1564-1642)와 아이삭 뉴톤(1642-1727) 및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와 그의 신봉자 존 로크(1632-1704)등에 의하여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1616년 로마 교황청에 의하여 정죄되었으나 코페프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여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망원경을 발명하여 입증하였는가 하면, 떨어지는 물체의 속도를 측정하여 역학법칙을 발견해냄으로써 성경의 권위 대신 과학적 이성의 권위를 높였고, 하나님의 섭리 대신에 자연의 법칙과 활동을 중요시하였다.
갈릴레오의 뒤를 이어 뉴톤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지구를 포함한 우주가 거대하고도 질서정연한 기계와 같아서 어떤 자연의 법칙들을 따라서 스스로 움직인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갈릴레오와 뉴톤과 같은 과학자들은 세계를 개방체계로 보는 대신에 폐쇄체계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세계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하여 사실상 움직인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갈릴레오와 때를 같이하여 데카르트는 수학적 논증을 모든 지식 분야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는ꡒ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ꡓ(cogito, ergo sum)는 말을 통하여 이성의 제일 원리가 회의(doubt)이며, 회의하는 주체만이 사실상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경우,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대신 회의하고 생각하는 주체인 인간이 철학 뿐 아니라 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로써,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음성과 성경의 말씀대신 인간 이성의 소리와 판단이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초월성 대신 내재성이 강조되었다.
데카르트의 사상에 심취한 존 로크는 기독교 교회의 신조들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연 종교 곧 이신론(deism)을 주창하여,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이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는 하였으나,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그 자체의 법칙과 원리에 따라움직이고, 역사 또한 기계적으로 발생하였다.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가 배제되고, 하나님이 지금 살아서 역사와 세계 속에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사실도 부인되었다. 상게서, pp. 55-56.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유럽 대륙의 한편에서는 유신론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8년)가 만들어지고 청교도 운동(17세기 초반)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이에 못지 않게 이신론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 이신론은 이성과 자연과 자율(autonomy)과 조화를 중요원리로 삼았다. 우주의 근본 질서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이 진리의 결정자였다. 그래서 이신론자는ꡒ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ꡓ고 말했다. 이신론에 의하면, 우주는 내재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질서정연한 폐쇄체계(closed system)여서, 자연의 책에 나타나 있는 법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자율적인 인간이 진리와 행동의 결정권자가 되어 외부의 권위 곧 성경과 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거부하고,ꡒ너 자신의 이성을 활용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지라ꡓ는 계몽주의의 모토를 내세워 인간 스스로 자연의 보편적인 법을 발견하고 따를 것을 주창하였다. 상게서, pp. 59-60.
또한 우주가 전체적으로 조화 속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조화를 윤리적 원리의 모형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신론이 주창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연법의 고안자요 천지의 명목상의 창조자일 뿐, 역사의 주관자이거나 섭리자가 아니며, 단지 우주 가운데 내재하실 뿐이다. 그리고 성경은 신적 권위를 상실하고 자연법과 인간의 과학적 이성에 자리를 물려 주었다. 또한, 인간은 더 이상 죄인이 결코 아니고, 생각하는 주체요, 내적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며, 우주라고 하는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F. L. Cros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London: Oxford Univ. Press, 1958), p. 385, S. V.ꡒDeismꡓ; 참조, 상게서, p. 58.


3. 자연주의 (naturalism)

이신론은 유신론에서 무신론적 자연주의로 옮아가는데 있어서 다리 역할을 하였다. 유신론이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서 우주의 창조주요 섭리주로 믿고 경배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 규칙이요 진리의 척도로 신봉하는데 반하여, 이신론은 하나님을 창조주로는 명목상 인정하나 우주의 섭리주이심을 사실상 부인하고 하나님의 인격적 활동성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인하였다. 이 이신론을 징검다리로 삼아 진일보한 자연주의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다. 제임스 사이어, 상게서, p. 69.

볼테르(1694-1778)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일어난 불란서 혁명(1789-17
99)은 인간의 이성을 진리의 여왕으로 높이고, 기독교 진리의 권위를 타도하였으며,ꡒ하나님도 없고, 주님도 없다ꡓ(No God, No Master)는 모토를 혁명의 구호로 내세웠다. 이로써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과격한 사상이 크게 득세하였다. Abraham Kuyper, Calvinism(Grand Rapids: Eerdmans, 1961), p. 10; 참고, 스탠리 그랜츠 ․ 로저 올슨「20 세기 신학」신재구 역(IVP, 1997), p. 61.

이 같은 무신론적 자연주의는 또한 칸트(1724-1804)에 의하여 철학적으로 진술되었다. 칸트는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의 감각적 경험 속에 내재하고 있는 도덕적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으로 이해하였다. 그에게는 도덕율이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도덕적 정언 명령이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보편적인 것으로 삼은 것에 따라서 행동할 것을 가르쳤다. 그런 까닭에, 그의 경우는, 하나님과 성경 계시가 인간의 도덕율에 자리를 내어주고 배제된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한 하나님은 도덕적 삶을 보상하는 존재요, 인간 안에 있는 도덕적 명령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하는 일종의 도덕율 또는 보편적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순수 이성과 실천적 이성 외에는 어떠한 진리도 그에게는 없다. 즉, 성경의 신적 권위와 진리를 거부하였다.
칸트의 뒤를 이은 헤겔(1770-1831)과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자연주의적 신관을 더욱 발전시켰다. 나폴레옹의 낭만주의 시대에 살았던 헤겔은 하나님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자기를 계시하는 절대 정신(Geist), 즉 내재적 세계 정신으로 보았다. 그의 정반합적 변증법에 따라 불확정적 존재인 유(Sein)가 비존재인 무(Nights)의 단계를 거쳐서 생성(Werden)에 이르는 운동 곧 역사의 발전과정 또는 내재적 세계정신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관은 일종의 범재신론(panentheism)이다.
헤겔과 동시대 인물인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 절대 의존 감정의 대상(the referent of the 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종교적 감정 속에 내재하고 있는 신의식(sence of God) 또는 만유 안에 내재하고 있는 능력이 하나님이다. C. W. Christian, Friedrich Schleiermacher(Waco: Word Books, 1979), pp. 94-95; 참고, 목창균,「현대신 학논쟁」(두란노, 1995), p. 46.
그의 경우, 인간의 전형은 인간 자신이며, 성경은 인간의 종교적 절대 의존 감정을 보여주는 전거(reference)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과학적 세계만을 인정하고 초자연주의를 거부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리츨 (A. Rits
chl, 1822-1889)의 경우, 하나님은 윤리적 문화 속에 내재한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 대신 사랑을 강조하고, 예수를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인간으로 보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적 윤리적 사랑의 공동체 사회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리츨은 성경의 권위와 기독교 교리 및 초자연주의를 거부하고 사회복음을 내세웠던 것이다. The Oxford Dictioanary of the Christian Church, p. 1168, S. V.ꡒRitschl. Albrecht.ꡓ

이 자연주의는 진화론자인 다윈(1809-1882)과 유물론자인 마르크스(1818-1883)에 의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이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가 완전 부인되고, 물질(matter)이 역사적 원동력이었다. 그들은 아예 영적 실재를 일체 부인하였다.
이 같은 유물론적 자연주의가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득세하던 때에, 반자연주의(anti-naturalism)운동으로서 경건주의(pietism)가 일어났었으나, 자연주의의 큰 흐름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예컨대,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1628-1688),ꡒ나 같은 죄인 살리신ꡓ(Amaging grace)등 찬송으로 유명한 존 뉴톤(1725-1807), 완전한 성화를 강조하여 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러(1703-1791),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힘쓴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적 대부흥사요 철학자였던 요나단 에드워즈(1703-1758)등이 정통적 유신론에 서서 자연주의의 사상적 흐름을 막고져 했었다.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있는 복음선포를 통해서 영적 부흥을 일으켰던 경건주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역사속에서 사상적 큰 흐름을 이룬 자연주의는 기독교 유신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물질만이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이며, 이 우주는 폐쇄체계이고 인과율이 그 체계를 지배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까닭에, 자연주의는 초자연주의를 부인하고, 기적도 부정하며, 어떠한 정신세계도 기계적 작용으로 간주했다. 사람도 물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인간은 순수한 우연의 게임의 산물이요, 우연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제임스 사이어, 상게서, pp. 78, 86.
이 자연주의는 인간의 사후세계를 알지 못하고, 인간의 죽음과 함께 역사도 사라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자연의 역사만 계속할 뿐이다.

4. 허무주의 (nihilism)

물질을 영원한 것으로 보고, 인간을 물질로 이해할 뿐 아니라, 사후세계나 영적 실재를 알지 못하며, 영원 대신에 현재만을 아는 이 자연주의는 성경의 전도서가 이미 가르쳐준대로 인간에게 참된 자유도, 가치도, 만족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에 빠지게 하여 허무주의를 낳고 말았다. 상게서, p. 86.

허무주의에 의하면, 진선미, 윤리, 지식, 영적 실재 등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우연이요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상게서, p. 89.
이 허무주의 때문에 인간은 가치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1788-1860)의 뒤를 이은 대표적 허무주의자는 니체(1844-1900)이다. 니체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 뿐아니라 자신의 지식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서 상게서, p. 99.
결국은 성적으로 타락하여 매독에 감염되고 정신적으로 미쳐 정신병원에서 10여년을 보내다가 삶을 마쳤다. 니체의 뒤를 이은 베게트(Samuel Beckett, 1906출생)는ꡒ고도를 기다리며ꡓ(Waiting for Godot)와ꡒ숨소리ꡓ(Breath)등 연극을 통하여 인간의 삶이란 지루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쓰레기 더미 속에서 들이 마시고 내쉬는 숨소리에 불과하다고 했고, 상게서, p 90.
베게트보다 1년 먼저 태어난 싸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도「구토」를 통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유 없이 태어나 연약함에 싸여 살다가 우연히 사라지며, 따라서 엄청나게 부조리한 이 존재를 보는 순간에 분노로 숨이 막힌다고 했다. 상게서, p. 114.

이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져, 가치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고서,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채로 숨을 쉬며 지루하게 살다가 아무 의미없이 우연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자신의 삶을 보며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자연주의에 뿌리를 둔 허무주의는 인간을 고독, 불안, 허무, 무의미, 절망, 지루함, 그리고 무가치한 삶에 빠지게 하였다.

5. 실존주의 (existentialism)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유 없이 태어나 연약함과 허무함과 지루함 속에서 살다가 우연히 사라진다고 보는 허무주의에 대하여 인간 자신의 의미를 찾아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한 것이 실존주의이다. 이 실존주의에는 무신론적인 것과 유신론적인 것 두 부류가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하이데거(1889-1976)와 사르트르(1905-1980) 및 까뮈(1913-1960)등에 의하여 발전된 것으로, 비록 유물론적 사상에 근거하여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주를 폐쇄체계로 이해하면서도, 인간이 물질에서 나왔으나 의식(즉, 생각)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의미를 추구하며 외부 물질 세계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는 등의 일을 하는 의식적 존재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우주 가운데서 의식과 자기 결정력이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자기 의식과 자기 결정력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싸르트르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에는 무(nothing)이지만 나중에야 어떤것(something)이 되어 자신을 스스로 의미있는 존재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Jean-Paul Satre,ꡒExistentialismꡓ, W. V. Spanos, ed. A Casebook on Existentialism (NY: Thomas Y. Crowell, 1966) p. 289에서 재인용.

무실론적 실존주의에 의하면, 진정한 실존의 삶을 사는 자는 우주의 부조리를 눈 앞에 항상 의식하면서도 그 부조리에 대항하여 의미를 창출한다. 하지만,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넘어 기껏해야 고독한 자아(ego)에 도달했을 뿐이요, 인간은 낯선 땅의 이방인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제임스 사이어, 상게서, pp. 121,130.

자연주의에 뿌리를 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와는 달리 교회의 죽은 정통주의(dead orthodoxy)라는 신학적 허무주의에 대하여 반동한 것이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무(nothing)인 인간이 어떤 것(something)으로서의 의미있는 인간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데 비하여,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죽은 그리스도인(dead christian)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born-again christian)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나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다같이 불안(anxiety)을 일간의 근본 문제로 보지만, 전자는 불안 때문에 절망에 빠지는데 반하여, 후자는 불안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Mircea Eliade, ed.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Vol.5 (NY: MacMillan, 1987), p. 224. S. V.ꡒExistentialismꡓby John Macguarrie; Elmer H. Duncan, Sören Kierkegaard(Waco: Word Books, 1979), p. 134.
그래서,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하나님의 초월성 대신에 인간 자신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이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유신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천지창조 및 개방체계로서의 우주 안에서 섭리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과 교통하심 등을 믿는다. 그러나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유신론과는 다르게 인간 자신의 존재와 우주 속에서 소외된 자기 발견, 그리고 자신의 자기 결정력 등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인간은 불안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스스로 결정하여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자아를 의탁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불안을 이겨낸다. 제임스 사이어, 상게서, p. 136.

이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신학적으로 칼 바르트(1886-1968), 에밀 브룬너(1889-1966)그리고 루돌프 불트만(1884-1976) 등에 의하여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나타났다. 1차 세계대전(1914-1918)과 2차 세계대전(1938-1945)으로 말미암아 낙관적인 세계관과 인간의 도덕성이 산산조각나고, 인간의 이성과 도덕의 권위가 추락함으로써 인간의 불안과 절망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 해답을 찾으려 하는 가운데 키엘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신전통주의 신학이다. 이 신정통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바르트는 성경의 역사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믿기만하면 된다고 주장했는가 하면(그래서, 자연신학을 거부하고 또한 창세기 1-3장의 역사를 옛 이야기로 보았다), 브루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에서의 초월성을 강조하였고(그래서, 아담의 타락과 원죄,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등을 신화로 보았다), 불트만은 초자연적 기적을 부인하고 성경의 역사성을 믿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우주를 폐쇄체계로 보는 자연주의를 용납하였다(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신뢰하지 아니했다).
이로써 유신론적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정통주의 신학은 정통적 유신론과는 거리가 있다.

6. 범재신론 (panentheism)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그것에 영향을 받은 신정통주의 신학이 정통적 유신론과 17세기와 18세기의 경건주의 및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근본주의적(또는, 보수적 복음주의) 칼빈주의 사상을 온전하게 이어 받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자연주의를 용납하였고 브루너와 바르트 등은 창세기의 아담의 타락과 원죄 및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 등을 신화 또는 옛 이야기 등으로 해석함으로써 참된 기독교 신앙을 이어 받지 못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와 같은 철학자가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을 만들어내어 범재신론(panentheism)을 주창하였다. 박형룡,「신학난제선평」(은성문화사, 1975), p. 315; Alon Gragg, Charles Hartshorne (Waco: Word Books, 1976), p. 91; 그랜츠 ․ 올슨,「20세기 신학」p. 217.

과정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라기 보다는 진화의 배후에 있는 동력이요, 그래서 유한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바 과정 자체이며, 역사와 자연 만물 가운데 생성되어 나타난다. 박형룡, 상게서, pp. 312, 313.
이로써 성경이 가르치는 바 인격적 하나님 곧 살아계셔서 천지를 창조하고 역사와 세계를 다스리시는 유신론적 하나님은 자연주의적 물질의 진화 과정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이 과정 신학은 드 샤르뗑(Pierre Theilhard de Chardin, 1881-1955)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그에 의하면, 신은 진화의 오메가 포인트이며, 인간이 진화론적 발전과정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즉, 인간은 진화의 자의식이요 축이자 정상이다. 그리고 신은 진화의 최초의 동자(mover), 집합자, 그리고 통합자이다. Theilhard de Chardin, Man\'s Place in Nature, Trans. Rene Hague(NY: Harper and Row, 1956), p. 121.
이같은 드 샤르뎅의 사상을 한국의 서남동이 받아들여, 역사의 진전 자체가 하나님이요, 우주 자체가 하나님이며, 인간은 우주 곧 신의 자기 발전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서남동,「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 p. 171.

한편 하이데거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와 쉘링(Schelling)의 자연 철학의 영향을 받은 황승룡,ꡒ폴 틸리히의 그리스도론에 관한 연구ꡓ(장로회신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6), pp. 14-21.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범재신론적 신관을 발전시켜, 존재의 기반으로서 신은 우주의 만물 가운데 내재하고, 상게 논문, p. 101.
이 세계는 신 안에 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적 무신론인 사신신학의 원조가 되었다. 박아론,「현대신학은 어디로」(청암출판사, 1975), p. 127.
틸리히는 실존주의자들처럼 현대인의 병을 허무와 무의미로 진단하고서 허무와 불안과 절망 가운데 있는 현대인들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 주고자 신을 존재의 기반 또는 존재의 힘으로 규정함으로써 범재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이렇듯,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이 말해 주고 있는대로, 현대인의 사상적 흐름은 자연주의를 고수하게 되었고, 동양의 흰두교와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전형적인 범재신론인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이 20세기 후반부터 현대 사상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제임스 사이어, 상게서, p. 151.
결국, 자연주의의 이신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사상은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의 사상적 흐름을 따라 범재신론의 뉴에이지 운동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동양 흰두교의 뉴에이지운동이 196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현대 사상을 지배하게 된 까닭은 범재신론적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 현대인을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 데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베트남 전쟁 등 끊이지 않는 전쟁과 테러로 말미암아 과학 기술과 합리적 이성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고, 또한 다국적 기업의 횡포로 말미암아 국가간 또는 계층간 경제적 불균형이 심각해져 삶에 대한 의욕이 떨어졌으며, 기독교가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후견자로 간주된 데 있다. 상게서, p. 150.

바바 하리 다스의「성자가 된 청소부」(정신세계사, 1988)와 미국 수피즘협회가 엮은 사랑과 깨달음의 우화집으로 알려진「꼬마 성자」(정신세계사, 1989), 그리고 오쇼 라즈니쉬의「배꼽」(장원, 1991)등 책들과ꡒ사랑과 영혼ꡓ이라는 영화 및 수많은 음악을 통해서 우리나라에도 이미 널리 퍼져있는 뉴에이지 운동은 신이 인간의 내면과 자연 만물 안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초월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이나 요가 등을 통해서 자기를 개발하면 인간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는 새 시대(New age)가 열린다고 가르친다. 이 운동은 사실상 기독교의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를 옛 시대(Old age)로 규정함과 동시에 그 시대의 하나님이 인간을 죄의 질곡에 얽매어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고 보고서 하나님과 그의 옛 시대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 까닭에, 철저하게 반기독교적이요 성경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다.

II. 기독론 중심의 흐름

역사적으로 인류는 항상 메시아 곧 구세주를 기다리고 찾으며 살아왔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 구세주가 누구이신가를 물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약속하셨고, 때가 찼을 때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특별히 인류는 역사적으로 사랑하며 신봉하였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성경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연구하였으나,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맞물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상도 다양하게 바뀌어졌다.

1. 정통적 기독론

4-5세기 경 초대 교회에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본성에 대한 격렬한 논쟁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논쟁들로는 먼저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간에 있었다. 이들 간의 논쟁은 니케아회의(325년)에서 아다나시우스의 성경적 주장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the very God)으로 결의되었다. 두 번째 논쟁은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the very man)이심을 확인하였다. 세 번째 논쟁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것으로 에베소회의(431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한 위격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나누어질 수 없게 결합되어 있음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네 번째 논쟁은 유티커스의 주장에 대한 것으로 칼케돈회의(451년)에서 이전에 있었던 논쟁들까지를 염두해 두고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며, 혼동없이, 전환없이, 분할없이,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한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결의하였다.
이 칼케돈회의의 기독론이 중세 교회를 거쳐 종교개혁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년)과 청교도들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으로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를 통해 확고하게 신봉되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믿는 정통적 기독론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the very God and very man)으로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구주이시다.

2. 구 자유주의의 기독론

구자유주의의 기독론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영국의 이신론(deism)에 영향을 받은 라이마루스(H. S. Reimarus, 1694-1768)은 그의 저서「볼펜뷰텔 단편」(Wolfenbüttel Fragments) (Philadelphia: Fortress, 1970)에서 예수를 단순한 유대의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였다. 그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역사의 예수와 교회가 전한 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동일하지 않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졌다. 즉, 역사(history)와 교리(dogma)가 상이한 것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하였다.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만을 인정하고, 하나님으로서의 케리그마(또는, 교리)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다. F. H. Klooster, Quests for the Historical Jesus(Grand Rapids: Baker, 1977), pp. 18-20; 참조, 나용화,「현대신학 평가」(CLC, 1991), pp. 26-29.

19세기에 접어들어, 헤겔의 철학과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스트라우스(D. F. Strauss, 1808-1874)는 역사적 예수를 연구함에 있어서 복음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화적으로 채색하였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스트라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단순히 보통의 사람이었으나, 산타클로스처럼 하나의 관념이 역사화 되어 초자연적 종교적 그리스도로 왜곡된 것이다. 그가 얻은 결론은 예수의 역사적 생애가 초자연적 신화로 채색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참된 역사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상게서, pp. 21-23; 참조, 나용화, 상게서, pp. 29-32.

그리고, 파울루스(H. E. J. Paulus, 1761-1851)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합리적 종교(rational religion)의 영원한 진리들을 가르친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초자연적 이적들을 전혀 믿지 아니했다.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p. 1036; 목창균,「현대신학 논쟁」 p. 18.
그와 동시대의 사람인 슐라이어마허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및 재림등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아니했다.

3. 신정통주의의 기독론

신정통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칼 바르트는 고린도후서 5장 16절,ꡒ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ꡓ는 말씀에 근거하고,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구 자유주의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부정하였다. F. H. Klooster, 상게서, p. 31; C. 반틸,「칼 바르트의 기독론 비판」(CLC, 1977), pp. 18, 34-35.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말씀(the incarnate Word, 또는 the Word made flesh)이시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계시(the actual and concrete self-manifestation of God)이시기에, 하나님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 David L. Mueller, Karl Barth(Waco: Word Books, 1977), p. 62.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한 형식(the only form of the Word of God)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경우,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역사적(historisch)존재에 지나지 않고, 초역사적(geschichtlich)인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예증에 지나지 않는다. 즉, 바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초역사적 또는 초월적 그리스도(transcendental Christ)인 것이다. Klooster, 상게서, p. 44.
이는 역사(history)가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아무런 근거도 제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 나용화, 상게서, pp. 37-38.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David L. Mueller, 상게서, p. 38.

바르트와 함께, 에밀 브룬너도 구자유주의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그에 의하면,ꡒ역사적 인물로서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는지 그 사실 자체마저도 확실하지 않다.ꡓ Emil Brunner, The Mediator, trans. Oliue Wyon(Philadelphia: Westminster, 1947), p. 186.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맏는 것은 기독교 종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진리, 하나님, 그리스도, 또는 사람에 대하여 어떠한 형식상(formal)의 교리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리와 하나님 및 그리스도 등은ꡒ인격적 만남ꡓ(personal encounter)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J. Edward Humphrey, Emil Brunner(Waco: Word Books, 1977), pp. 38-39.

그래서 브룬너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니님의 성육신하신 말씀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참된 존재의 기원을 갖는바 은혜의 인격적 말씀(the personal Word of Grace)이요, 이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초월적이시기 때문에 합리적인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상게서, p. 99, 100; E. Brunner, The Mediator, pp. 201-214, 232-248.
따라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예수는 초월적 그리스도(transcendental Christ)인 것이다.
불트만도 그의 저서「예수와 말씀」(Jesus and the Word)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했다. 그도 브룬너처럼 말하기를,ꡒ예수의 생애와 인물됨에 관하여는 우리가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나는 정말 생각한다. 왜냐하면 초대 기독교회의 자료들이 그의 생애나 인물됨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자료들 또한 단편적이고 흔히는 전설적인데다가, 예수에 관한 다른 자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Morris Ashcraft, Rudolf Bultmann(Waco: Word Books, 1978), p. 46.
그에 의하면, 믿음은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는 결코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바 현재의 실존적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상게서, p. 47.
그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연구를 통해 확인하고저 하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불트만도 브룬너처럼 요한보음 1장 14절에 근거하여 말씀이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말씀 자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선포되는 것으로서 사람과 함께 현존하는 하나님 자신(God himself present with man)이다. 따라서, 말씀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을 듣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그와의 만남이다. 그에 의하면, 말씀 선포는 그리스도 사건의 계속이요, 말씀은 종말론적 현재적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the eschatological, ever-present event of Christ). 요한복음 14장 6에서,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듯이, 그 자신과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 또는 오늘날 선포되는 메시지는 동일한 것이다. 상게서, p. 74, 75.
그러기에 신정통주의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케리그마적 그리스도(kerygmatic Christ)요 초월적 그리스도(transcendental Christ)이다.

4. 신자유주의의 기독론

구자유주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 역사를 강조한 나머지 교리와 케리그마를 희생시켰다고 한다면, 신정통주의의 케리그마적, 초월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선포된 말씀인 케리그마를 강조한 결과 역사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러나, 교리가 역사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역사가 교리를 배제할 수 없었던 것과도 같다.
이같은 연유로, 소위ꡒ구 말르버인들ꡓ(Old Marburgers)로 자칭한 불트만의 제자들 가운데 1953년에 케제만(Ernst Käsemann)이ꡒ역사적 예수의 문제점ꡓ이라는 강의를 통하여 신정통주의의 기독론을 정면으로 논박함과 동시에 구자유주의의 기독론과 차별을 두었다. 이로써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고, 특별히 1959년에 로빈슨(James M. Robinson)의「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A New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가 출간됨으로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가 구체화되었다. Klooster, 상게서, p. 56.
이 연구에 보른캄(Günter Bornkamm), 푹스(Ernst Fuchs), 에벨링(Gerhard Ebeling), 그리고 콘젤만(Hans Conzelmann)등이 참여하였다.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불트만 등 신전통주의자들이 예수의 실존과 죽음 등 역사적 사실을 케리그마에 필수적인 요소들로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예수 연구를 부정하는 논리적 모순에 반대하여 출발한 것이다. 나용화, 상게서, p. 61.

구자유주의자들이 복음서들을 객관적 역사적 문헌으로만 보고서 예수를 역사적 보통 사람으로 이해한 데 반하여, 신자유주의자들은 복음서들 가운데 케리그마와 역사가 함께 혼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예수를 역사적 케리그마적 그리스도(historico-kerygmatic Christ)로 이해하였다. Klooster, 상게서, p. 57.

그러나, 참으로 얄궂은 것은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불트만의 입장을 따라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 점이다. 이는 그들이 성경에 대하여 양식비평적연구(form-critical study)를 통하여 케리그마의 본질적 내용인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는 대신 부활 신앙(Easter Faith)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들의 예수 연구는 한계성을 갖게 되었다. 상게서, pp. 62-63.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역사 비평(historical criticism)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판넨버그(Wolfhart Pannenberg)가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도 초자연적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까닭에, 그는 예수의 빈 무덤의 역사적 사실은 인정하였으나, 육체의 부활의 실제와 성도들의 육체의 부활 등은 부인하였다. 그런 까닭에, 판넨버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역사의 예수에 지나지 않는다. 나용화, 상게서, pp. 79-85.
어떻게 보면 앞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소개하고저 한 예수와 크게 다른 것이 없다.

5. 정치신학의 기독론

구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신학이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웃과의 만남과 섬김의 사랑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훼퍼(Dietrich Bonhoeffer)가 즐겨 강조한바ꡐ이웃을 위한 사람ꡑ(the man for others)예수 본훼퍼(1906-1945)는 독일교회의 반 히틀러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신학자로「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년)와「신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 1939년) 등 유명한 저서들을 남겼으며, 특별히 사후에 출간된 그의「옥중서신」(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1967년)에 그의 신학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ꡐ종교성 없는 기독교ꡑ(Religionless Christianity),ꡐ성년이 된 인간ꡑ(man of age)등의 표현을 통해 교회와 성도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를ꡐ이웃을 위한 사람ꡑ으로 이해했다. (참고, 나용화, 상게서, pp. 136-142).
및 존 힉(John Hick)이 말한바ꡐ보편적 운명의 사람ꡑ또는ꡐ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람ꡑ예수(a historic Jesus) 영국장로교회의 종교철학자요 종교다윈주의자인 존 힉 (「종교철학개론」황필호역, 종로서적, 1980년)은 모든 종교를 문화의 산물로 보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힌두교의 카르쉬나, 불교의 싯달타, 회교의 알라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요 보편적 운명의 사람(the man of universal destiny)으로 이해하였다.(The Myth of God Incarnate, 1977년; 참고, 나용화, 상게서, pp. 90-104).
등과 같은 기독론과 더불어, 1960년대 이후 세계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WCC운동에 영향을 받아 정치신학(희망의 신학, 남미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등)이 득세하면서 훨씬 더 급진적인 기독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희망의 신학을 주창한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유럽사회가 현체제(the status quo)유지에만 관심이 있고, 소비지향적이어서 가진 자(the haves)가 가지지 못한 자(the have-nots)들을 차별하는가 하면, 신정통주의 신학이 너와 나의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세상 개혁으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한 것에 대응함에 있어서 막스주의사상에 영향을 받아 미래 지향적인 신학을 하게 되었다. 몰트만,ꡒ전도와 해방ꡓ「기독교사상」(1975년 4월호): 105.

몰트만의 경우, 신학의 목적은 현재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to revolutionize and transform the present)이요, 미래에의 개방과 현실에 대한 투쟁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희망은 세상의 구조악에 대하여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것이며, 민중의 투쟁 속에 있다. 몰트만,ꡒ민중의 투쟁속에 있는 희망ꡓ「기독교사상」(1975년 4월호): 135.

따라서, 몰트만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ꡐ세상의 희망ꡑ(참고, 골1:27,ꡐ영광의 희망ꡑ)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악순환적 현실과 고난의 고통에 대하여 저항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몰트만,「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김균진 역(한국신학연구소, 1983), pp. 10-11.
생의 결단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역사 한가운데로 뛰어들므로 부활하셨다고 그는 주장했다. 몰트만,「희망의 신학」전경연, 박봉랑 역(대한기독교서회, 1982), pp. 243, 248.
따라서, 몰트만의 예수는 민중의 해방자요, 세상의 악에 대한 혁명자요, 민중의 한 사람(a minjung)이다. 몰트만,ꡒ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ꡓ「기독교사상」: 129, 134.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남미의 해방신학은 강대국들의 자본주의의 착취로 말미암아 가난의 굴레에 종속되어 비인간화된 가난한 자들을 특히 경제적으로 가난에서 해방시켜 인간적이고 형제애가 있는 세상(a human and brotherly society)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 pp. 112.
그러기에, 해방신학의 예수 그리스도는 계급투쟁의 선봉장이요, 가난한 자들의 해방자(liberator)요 사회 개혁의 혁명가(a social revolutionist)이다. Gustavo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NY: Orbis, Books, 1973), pp. 274-276.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남미의 해방신학 뿐 아니라 일본의 막스주의적 정치신학(아라이 사사구, 다가와 겐조 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한국의 민중신학은 정치적으로 억눌린 민중과 예수를 동일시한다. 그래서, 민중신학의 경우, 예수가 민중(the minjung)이요, 민중이 예수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중인 동학혁명의 최제우와 전봉준, 의적 임꺽정과 홍길동, 분실 자살한 노동자 전태일 등이 바로 예수인 것이다. NCC 신학연구위원회 편,「민중과 한국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82), pp. 275, 295.
생산적 노동의 주체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이 우주의 운명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메시아인 것이다. 서남동,「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 pp. 402-405.


III. 인간론 중심의 흐름

생존하시는 하나님, 위대하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항상 갈급하여 찾아 만나기를 소원하는 인간,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기를 소원하는 인간은 인간 자신을 아는 지식이 창조주와 구속주를 아는 지식과 상호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칼빈,「기독교 강요」(I. i. 1).
즉,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과 인간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론과 인간론은 맞물려 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섬기느냐에 따라서 인간을 어떤 존재로 아느냐가 결정된 것이다.

1. 정통적 인간론

칼빈이 그의「기독교 강요」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밝은 지성과 올바른 마음과 건강한 몸 곧 참 지식과 순전한 의와 거룩의 존재이다(엡 4:24, 골 3:10). 칼빈,「기독교 강요」I. xv. 3, 4.
타락하기 이전 본래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들이 탁월했던 까닭에 인간의 이성, 오성, 분별력과 판단 등이 세속적 삶을 지도하는데 충분하였을 뿐 아니라, 이같이 순결한 상태에서는 자유의지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충만하게 즐거워하는 가운데 복된 영생에 이를 능력이 있었다. 칼빈,「기독교 강요」I. xv. 8.
또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연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자연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마음과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육체적 노동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단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하고 영적 선을 행하기에는 무능력한 죄인이 되었다. 칼빈,「기독교 강요」II. i. 4-6.
죄가 최초의 사람 아담을 노예로 만든 그 시간으로부터 죄의 지배권은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까지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칼빈,「기독교 강요」II. ii. 1.
이로써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상실하였다. 칼빈,「기독교 강요」II. iii. 5.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할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께 의롭다 청함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되어 바른 관계가 회복됨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임과 동시에 의인이다. 칼빈,「기독교 강요」III. xi. 2-4.


2. 자유주의의 인간론

자유주의 신학의 사실상의 시작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에 의하면, 창세기 1-3장의 말씀은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의 의미(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 in relation to God)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본래의 의(man\'s original righteousness)의 교리와 관련하여 인간이 본래 선하여 하나님과 신의식(God-consciousness)에 대하여 본래 적대적인 것이 인간에게는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C. W. Christian, Friedrich Schleiermacher, pp. 112-113.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잠재적으로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바 죄는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에서 생겨난 것으로 죄의식(consciousness of sin)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바 소외의식(sense of alienation)이며, 육체가 영을 지배하는 것, 즉 육체적 자아 의식이 신의식의 잠재적 능력을 제압한 상태이다. 상게서, p. 114.
따라서, 그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 역사적 타락을 믿지 않고, 영혼과 육체의 보편적 갈등으로 죄를 이해하였다. 또한, 그는 죄가 영혼과 관련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범하여지는 것으로 보며, 사회가 인간을 죄악되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이 또한 사회를 죄악되게 한다고 주장했다. 상게서, p. 115.

급진적 진화론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Teilhard de Chardein, 1881-1955)은 약 100만년전에 진화의 과정 속에서 순간적으로 인간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동물은 단지 인지할 뿐이나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을 아는 즉 사유하는 존재(an animal konws but man knows that he konws)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인간에게서 이제 사고(thought)의 영역이 시작된 것이다. Doran McCarty, Teilhard de Chardin, pp. 69-70.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자유를 활용하여 우주적 진화의 과정에서 협력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상게서, p. 102.
그에 의하면, 죄와 악은 단순히 진화의 부산물(by-product of evolution)에 지나지 않는다. 진화의 과정에는 한번의 성공이 있으면 그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실패가 있기 마련인바, 죄와 악은 바로 그러한 실패의 부산물일 뿐이다. 상게서, p. 135.

드 샤르뎅과 함께 진화론자요 특히 범재신론을 주장한 하트숀(Charles Hartshorne, 1897년 출생)은 인간의 영혼 또는 자아의 불멸을 믿지 아니하고, 인간이란 매순간마다 새롭게 진화화는 새로운 자아(a new self)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생은 수십만의 자아로 구성되어 잇는(My life consists of hundreds of thousands of selves) Alan Gragg, Charles Hartshorne(Waco: Word Books, 1976), pp. 55-56.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트숀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가 구별되지만 상호 불가분리하게 결합되어 있는 영육통일체(psychosomatic unity)로 이해하고 있다. 상게서, p. 60; 그에 의하면, 세포가 고통을 받으면 내가 고통을 받게 되며, 내가 고통을 느끼면 세포들 또한 고통한다. 즉, 몸의 세포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정신적 삶(psychical life)이 있는 것이다 (상게서, p.62).
이같은 그의 견해는 20세기 성경 신학의 지배적인 전인적 인간론(the holistic view of man)과 일맥 상통하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건실하게 보이지만, 하트숀은 육체적 요소인 세포들이 영혼에 비하여 자유가 없어서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상게서, p. 64.
또한 그는 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범재신론의 당연한 논리적 결과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존재해야 하는바 하나님은 절대 주권에 의해 통치하지 않고 진화의 과정에 있으므로 인간 또한 순간마다 자유롭게 진화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게서, pp. 94, 112.
또한 그의 인간론은 심미적(aesthetic)이어서 하나님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간이 즐길 줄 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같이 자유주의자들은 창세기 1-3장의 창조와 타락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 인간은 기껏해야 죄의식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도 진화의 부산물일 뿐이요, 본래는 진화의 과정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자아로 발전하며, 그런 까닭에 인간은 본래 선한 영육 통일체요 결코 죄인이 아닌 것이다.

3. 신정통주의의 인간론

인간을 진화론적으로 이해하는 자유주의에 대하여 칼 바르트는 참 역사(Geschichte)인 그리스도 예수가 참 인간(real man)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참 사람을 발견하고 싶거든 죄인인 사람 대신에ꡒ하나님을 위한 사람ꡓ(the Man for God)인 예수를 보라고 했다. Mueller, Karl Barth, p. 114.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the infinite qualitative difference)가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 초월자이신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유한하고 땅위에 있는 존재이다. 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tran. E. C. Hoskyns(London: Oxford, 1933), p. 10; 참고, Heinz Zahrnt, The Historical Jesus, trans. J. S. Bowden(NY: Harper & Row, 1963), p. 68.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이 필요하고, 모든 인간은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이미 선택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누리는 영생인 것이다. 그랜츠 ․ 올슨,「20세기 신학」p. 114.

이 점에서, 모든 인간들은 예수의 이웃이며, 친구이자 형제이기에, 모두가 존엄하다. 바르트에게는 아담의 원죄나 인간의 죄악성 등은 의미가 없다. 그는 역사적 타락의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했다. 김영한,「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p. 53-54.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공동체적 존재(a communal being)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도 공동체적 존재요, 따라서, 하나님이 남자를 위하여 여자를 창조하신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너와 나의 만남의 관계 속에서 이웃을 위하여 이웃과 더불어 살 때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Mueller, Karl Barth, p. 119.
그런 까닭에, 인간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화복되고, 이웃을 위한 사람인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위하고 또 이웃과 더불어 살므로 절망을 극복하며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브룬너도 바르트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실제적 인격적 교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유를 누린다고 보았다. 김영한, 상게서, p. 89.
이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순종하는 대신에, 자기가 속해 있는 주인이신 하나님을 반역하고 스스로 주인되려는 욕구에 사로잡히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죄라고 했다. Humphrey, Emil Brunner, pp. 68-69.
브룬너도 바르트와 함께 아담의 원죄나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김영한, 상게서, pp. 91-92.

그는 또한 처음부터 인간이 연대적 통일체(a unity in solidarity)로 창조된 까닭에 이웃과의 책임적 관계 속에 있는 존재로 인간을 이해했다. Humphrey, 상게서, p. 70.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새 계명(요 13:34; 요일 3:23)대로 사랑으로 이웃과의 만남과 사귐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에서 갖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라 하였다. 상게서, pp. 87-88.

불트만의 경우는 인간을 자연적 인간과 새로운 인간, 즉 죄(곧, 불신앙)가운데 있는 인간과 신앙으로 해방된 인간으로 이해했다. 자연적 인간은 과거속에서 자기 중심적인 안정성만을 추구하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내세우는 데 반하여, 새로운 인간은 삶의 기초를 이 세상에 두는 대신에 미래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며 하나님에게 헌신을 결단하여 산다. 김영한, 상게서. pp. 141-142; 그랜츠 ․ 올슨,「20세기 신학」p.146.


4. 세속화 신학의 인간론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연대적 통일체요, 이웃을 위한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한 것과 맥을 같이하여 본훼퍼는 종교성 없는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와 성년이 된 인간(man of age)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우리의 환경과 사회가 우리에게 허용하는 방편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의 힘으로 어른스럽게 상황에 대처하고, 또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여 이웃을 위한 존재로 우리가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NY: McMillan, 1967), pp. 178ff.

이같은 본훼퍼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수용하여 발전시킨 것이 소위 세속화 신학(secular theology)이다.「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를 써서 유명한 로빈슨(John A. T. Robinson)은 범재신론(panentheism)을 수용하고, John A. T. Robinson, Exploration into God(Standford: Stanford Univ., 1967), pp. 15-16.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임을 주장한 일이 결코 없다고 단언하면서,ꡐ사랑으로 완전히 뭉쳐진 자ꡑ곧ꡐ이웃을 위한 사람ꡑ(the man for others)이라 하였다. John A. T. Robinson, Honest to God(Philadelphia: Westminster, 1963), pp. 73, 76.
이 같은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들의 모범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로빈슨의 경우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스스로 소외 당하기 쉬운 오늘의 상황에서 문제들에 참여하고 붙들고 씨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상게서, pp. 64-83, 97, 102.

「세속도시」(The Secular City)로 유명한 콕스(Harvey G. Cox)는 과학기술의 중심인 도시가 세속화의 대행자로서, 현대도시가 이제는 종교적 관심이 사실상 전혀 없으며, 과학기술인(technopolitan man)에게는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Harvey G. Cox, The Secular City(NY: MacMillan, 1965), pp. 2, 258.

과학기술의 도시인들은 아무의 간섭도, 그리고 아무런 도덕적 규범에 의한 제약도 없이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이 보장되도록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렇듯 세속화의 관심은 세속도시 속의 인간과 그의 삶이다. 이로써 인간의 자율성과 자율적인 인간을 강조하였다. 즉, 세속도시의 인간이 하나님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살아 도시인들이 당하는 소외를 극복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상게서, p. 154.
이로 보건대, 세속화 신학의 인간은 도시 생활에서 소외를 극복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인이다.

5. 정치신학의 인간론

현대과학기술의 업적과 현대 세속도시의 자율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이상화시킨 세속화 신학은 도시 사회의 구조악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로써, 1960년대 유럽에 깊이 침투한 막스주의 앞에서 쇠퇴하고, 막스주의적 시각과 방법을 사용한 희망의 신학과 남미의 해방신학 등 정치신학이 세속화 신학의 뒤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본훼퍼가 강조한바ꡐ이웃을 위한 사람ꡑ(man for others)과ꡐ성년이 된 인간ꡑ(man of age)사상은 계속 유지되었다.
몰트만(Jürgen Moltman)의 희망의 신학에 의하면,ꡒ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는 종말론이며, 희망이며, 앞을 바라다 보며, 앞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재를 혁신하고 변혁하는 것이다. 종말론은 모든 기독교적 선포의 특징이다.ꡓ 몰트만,「희망의 신학」전경연, 박봉랑 역(대한기독교서회, 1982), p. 14.
이렇듯, 희망의 신학은 사회 구조의 변혁을 교회의 첫째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도시 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인 악을 내포하고 있어서, 인간이 소외와 고통 속에서 비인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제2차 대전 후 전쟁 포로에서 풀려나 돌아온 청년 몰트만은 전후의 통일이 자본주의적 빈부의 계급사회와 소비지향적 사회를 재건하고 있는 것과, 독일의 교회가 자본주의 지배계층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힘쓰는 것을 보면서, 외형적 번영 뒤에 가리워진 내면적 환멸과 비인화의 소외와 고통에 대하여 생각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소외와 고통의 문제를 앞선 신학자들이 존재론적 성격으로 보아 온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같은 까닭에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폭력과 불의에 고통을 당해야만 하고, 생활 자원이 없고 생활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여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죽음에 내몰려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소외와 고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몰트만,ꡒ전도와 해방ꡓ,「기독교 사상」(1975년 4월): 111.

몰트만의 희망은 자본주의적 악의 사악성에 대한 하나님의 반항이요, 현실의 고난에 대한 항거요, 투쟁이다. 그래서 그의 희망은 죄없이 희생당한 가난한 자들의 투쟁 속에 있다. 이것이 곧 미래에 대한 개방이기도 하다. 몰트만,ꡒ민중의 투쟁속에 있는 희망ꡓ, 상게서: 135.
가난한 자들이 겪는 현실의 고난은 가진 자들에 의한 경제적인 착취,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한 정치적인 억압, 그리고 상류층 사람들에 의한 문화적 소외로 말미암는다고 그는 보았다. 몰트만,ꡒ전도와 해방ꡓ, 상게서: 105.
그래서, 몰트만은 자유를 향한 절규가 인간과 자연의 보편적인 인간과 자연의 보편적인 공통된 희망이기에,ꡐ투쟁이 시대의 명령ꡑ이라고 주장했다. 상게서: 103.
그의 희망의 신학의 목표는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사회화를 통한 민주적 사회주의 실현이다. 몰트만,ꡒ오늘의 정치신학을 말한다ꡓ, 상게서: 100.

몰트만의 이같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해가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에 좀더 구체적으로 반영되어있다. 해방신학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희생당한 남미의 가난한자들에게서, 그리고 민중신학은 군사독재정권과 그 정권의 배후에 있는 미국 정부에 의해 희생당한 한국의 가난한 근로자들에게서 비인간화의 고통을 보고 있다. 그들의 경우 사람됨은 경제 정의의 실현과 정치의 민주화를 위한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의 투쟁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신학의 인간은 죄 없이 희생을 강요당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이다.

결론

정통적인 유신론(theism)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요 사람으로 믿는 기독론, 그리고 인간을 죄인이자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된 의인으로 보는 인간론 등과는 다르게, 계몽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 신학 사상은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첫째, 현대신학 사상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온전하게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 즉, 성경의 무오성(inerrancy)과 무위성(infallibility)을 믿지 않으며, 특별히 아담의 원죄에 대한 창세기 1-3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과 재림을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고, 신화(myth) 또는 옛 이야기(saga)로 보며,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둘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하게 믿지 아니한 까닭에, 현대신학사상은 초자연주의를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섭리 사역등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이로써, 하나님을 성령과 진리로 온전하게 온 몸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예배드리지 않는다. 교회에서 예배가 그 중요성과 가치를 잃게 되었다.
셋째, 아담의 원죄 교리가 부정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인됨과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은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및 구원 사역의 구속론적 의미가 윤리적 차원에서 해석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은혜와 대속적 공로(merit of substitutionary atonement)를 모르며, 종교적 불경건의 죄 대신 사회적 불의만을 강조한다.
넷째, 현대신학사상은 하나님이 초월적이시기에 하늘에서 통치하실 뿐 아니라, 내재적이시어서 이 땅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 까닭에, 결국은 우상숭배를 초래하였다. 다시 말해서, 범재신론(panentheism)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또한, 우상 숭배가 탐욕의 뿌리요, 이로 말미암아 모든 악이 열매 맺는다는 성경(롬 1:18-22)의 가르침을 간과하였다. 현대 신학 사상은 죄의 실체인 마귀도 모르고, 사회의 구조적 악만을 보고서 투쟁하는 바, 이는 곧 의사가 질병의 근본 원인인 병균이나 암세포를 알지 못한채 수술만을 능사로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이로써, 의사가 병을 더 악화시키듯이, 현대신학사상은 오늘의 세상의 고통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상숭배와 사회의 구조악이 직접적으로 인과 관계에 있음을 자주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예컨대, 출애굽기 23:10-13, 여호수아서 24:14, 20, 사사기 2:6-15, 역대하 7:14, 19-22, 그리고 이사야서 1:4-5, 17, 21-23; 2:5-9; 3:15-26; 5:8-12 등이다.
다섯째, 현대신학사상은 성경도, 하나님도,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에, 세상도, 인간 자신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 이제는 범재신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하나님과 그리스도 및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한껏 높여 인간 안에 있는 신성과 기(氣)를 개발하면 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하여, 하나님 대신 인간 자신을 믿으라고 한다. 이로써,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 대신 인간 자신으로 바뀌어 있다.
여섯째, 현대신학사상은 사실상 성경도, 하나님도, 그리스도 예수도 믿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투쟁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얻고자 하며, 민주적 사회주의를 천국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신학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인류의 육체의 부활 및 마지막 날에 있을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전혀 알지 못한다. 오직 현실에 대한 투쟁 속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