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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목설교는 어떻게 디자인 하는가? 운영자 2019-03-092022-07-13 11:40
작성자 Level 10

제목설교는 어떻게 디자인 하는가? 



설교, 디자인을 어떻게 할까(10)…인간정황에서 묻고 성서에서 해답


옛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곽안련 선교사갭신학지남」(1918~1940)과 그의 저서「설교학」등에서 제목설교에 관련된 글 발표에는 제목설교라고 했고, 오늘날에는 좀더 \"인간상황\"을 더 강조해서 \"상황설교\"라고 부르기도 한다(박근원 박사의 저서 「오늘의 설교론」에서는 이 양자를 다르게 본다.

강의자가 제목설교라 함은 인간상황에 근거해서 도출한 제목일진데 반드시 성서 본문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으려고 할 때, 제목설교와 상황설교를 거의(다른 면은 뒤에서 다루겠다.) 같은 의미로 쓰기로 한다. <뉴스앤조이>, 강의자의 \"다른 기사 보기\"의 2004. 12. 1. 자의 \"외로움과 홀로움\"이 그 예이며, 또한 \"제목설교는 어떻게 디자인 할까\"의 범예(範例)로 하겠다.

1. 제9강의에서 제목에 대한 것을 뒤로 미루자고 했는데 이왕 \"제목설교\"에 대한 논제라면 먼저 \"제목\"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하고 싶다. 이전 강의에서 제목은 문패와 간판과 같다고 한바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설교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성명\"과 같다. 사람에게서 성명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해주듯이, 설교에서 설교제목이 회중(會衆)에 회자 되어 평가를 받게 된다.

제목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명사형 2)문장형이 그것이다. 명사형은 \"사람을 보는 시각\", \"님이 떠난 빈자리와 같은 한국교회\", \"느보산의 모세\", \"우연한 화살\" 등이다. 명사 앞에 형용사나 형용적인 수식어가 있는 것이다. 문장형은 \"갈릴리에서 만나자\",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강요된 사랑은 사랑의 모독입니다\" 등으로 한 문장으로 주어(어떨 때는 함축되어 있지만 주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와 술어가 있는 명제적인 것을 말한다.

제목의 내용적인 면에서 분류를 한다면, 1)은유적 제목(설교내용을 압축해서 제시하는 것) \"목자와 양\" 같은 것이다. 2)상징적 제목(설교의 대상을 가리킨다) \"미디안 광야의 모세\" 3) 역설적 제목[역설(paradox)역설을 통해서 설교를 심화시키는 것) \"가난한 자의 행복\"(산상보훈의 8복이 다 역설적인 것이다.), 4)기원적 제목(소망과 염원을 제시하는 것)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5)형상적 제목(친근감 있는 소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들의 백합화\", \"숨겨진 진주\", \"옥합을 깨트리는 여인\", 6)조어적(造語的) 제목(단어와 단어를 결합하여 새의미를 만드는 조어법이다)- \"세미한 소리\", \"급하고 강한 성령의 바람\", \"성령의 바람부는 날의 은혜\" 등이다.

7)복합명사적 제목(단순하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하여 복합명사를 쓰는 것)-\"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목사님, 목사님, 당회장 목사님\", \"민들레, 민들레교회 이야기\", \"베드로여, 베드로여\",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복합적이면서 본문내용상 역설적 표현) 등이다. 한 설교자의 목회적 과정과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사를 압축시킨다는 의미에서 설교제목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대략 설교제목만 보아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설교제목을 어떤 것으로 할까를 생각할 때 이런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위 어감(語感)이다(설교 본론에서도 그렇지 마는). 어감이란 무엇인가. 언어의 생명력이다. 어감 없이는 모든 말이 개념으로 취급된다. 개념적인 것은 너무 딱딱하고 읽기도 골치 아프다. 다시 말해서 설교제목이나 본론의 말이 어감 없는 말은 언어의 시체와 같다.

어감은 언어생활에서 생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주로 \"설교마당\"에 올려지는 설교 대부분이 어감이 없이 맹송맹송한 감이 난다. 한 사상을 전달하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잘 전달하는 힘(능력·은혜)이 있어야 한다. 언어활동은 정서를 이입(移入)함으로써 표출자의 표현효과를 훨씬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강의자의 \"다른 기사 보기\" 참조)

강의자가 설교에 자주 적합한 시를 인용하는데 \"댓글\"로 다는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의 능력으로 하면 되지, 무슨 시(詩) 나부랭이냐고 말하는 것을 더러 보았다. 설교도 말씀의 전달로써 일종의 예술이다. 시를 모르고 어찌 인간상황을 논할 것이며 \"시편\"을 어찌 읽고 알 것인가!

\"시인은 단 한 줄의 시를 읊조리기 위해 많은 도시를 거닐어야 하고, 죽은 사람과 하루 밤을 지새워 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강의자의 고등학교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서 나온 글).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고뇌를 모르고서는 좋은 설교를 전달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시는 인생 고뇌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뇌를 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갗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감의 정체(正體, Identity)는 무엇인가. 대개 언어에는 의미 즉 \"뜻\"과 음성인 \"소리\" 두 방면이 있다. 발음은 형식이요, 의미는 말의 내용이다. 이 형식과 내용에 서로 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발음의 고저·강약·경어·비어·정감 어린 내용의 낱말 선택 여하 및 그 정황에 적중하는 의미 있는 낱말의 선택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 명사형의 설교제목이냐, 문장형의 설교제목이냐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 옛날에는 명사형의 제목이 많았다.

근래에 와서는 문장형 제목도 즐겨 사용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문장형이 너무 길거나, 비속(卑俗)하거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것은 좋지 않다. 일종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어감(情感)이 있는 제목은 울림(감동)이 그 만큼 클 수도 있기에, 그때 정황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세계명작 소설·시·수필·수상집을 많이 읽으라고 권장하고 싶다. 제목에서 어떤 분은 제목부터 정하고 제목설교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을 완성 후에(설교목표를 분명히 가진 채) 제목을 쓰는 사람도 있다.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면 제목을 정하고 글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고 제목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면, 보류하고 글을 다 쓴 후에 깊이 생각하고 제목을 붙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제목설교하면 \"곽안련\" 선교사를 생각한다. 강의자가 신학교 다닐 때는 곽안련 선교사가 지은「설교학」책을 가지고 배웠다. 그 후 도미유학에서(1970~1980년대) 설교학 분야를 공부하면서 곽 선교사의 공로도 크다고 생각하면서, 문제점을 비교하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예를 들면 1)성서 본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오해할 수 있다는 것 2)본문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방향으로 자기 설교 목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오류가 가능하다는 것 3)성서 구절을 적당히 택해 놓고, 설교 내용은 전연 다른 것을 구사(驅使)하고 있다는 것 4)결국 본문과는 전연 관계없는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설교를 자주 읽게 된다.

그래서 강의자는 곽안련 선교사의 제목설교의 단점과 박근원 박사(한국신학대학 교수)의 인간상황에서 도출된 문제나 사회적 잇슈 등에서 질문된 것을 성서에서 해답을 얻는 것이 ‘상황설교’라는 개념을 인정한다. 그러나 1)어찌하다 보면 지나치게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근접한 메시지가 기울어질 수 있는 경향성을 우려함이다.

2)인간상황에서 자아낸 것이 아니더라도 성서에서 인간상황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인간의 타락·범죄·욕심·교만 등의 \"문제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3)제목설교란 반드시 인간상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성서 본문에서 제목을 도출할 수 있는 여유도 있기에 강의자는 이런 위의 사유로 \"제목설교\"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4)강의자가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하셨던 은사, 이상근 박사님 에서 실천신학을 전도사, 강도사 및 교육목사 때에 직접적으로도(개인적) 배운 바도 있다.(약15년).

당시 한국교회의 \"대설교강의\"로 명성이 드높을 때였으니 간접으로도 사사(師事)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설교 스타일이 언제나 본문설교가 많았으나(주경학자이시니) 이 어른의 설교 중에는 제목설교도 언제나 성서 본문에서 도출된 것을 가지고, 다른 성서말씀을 인용하면서, 또한 인간상황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그 영향 탓인지, 강의자는 지금도 ‘제목설교’를 고집하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2. 자, 그러면 인간상황에 대한 강의자의 착상(2004. 12. 1.)은 만추(晩秋)때였다. 소솔한 가을바람이 불고, 포도(鋪道) 위에 낙엽이 우수수 질 때면 인간들은 우수(melancholy)에 빠지기 일쑤다. 실존적인 고독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동지가 있다고 해도 나의 병, 나만이 갖는 고민·고독·죽음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이럴 때, 강의자는 인간의 상황인 고독에 대해서 질문이 생겼다. 고독을 극복할 수는 없을 까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외로움이었고, 철학자요 신학자인 폴 틸릭히(Paul Tillich)의 \"solitude\"(홀로움)의 발상이 나왔다. 외로움이라면 대칭어로 \"홀로\"(막 6:46~47)에다가 \"움\"자를 붙이면 명사화되니, 그래서 \"외로움과 홀로움\"이란 제목을 생각해냈다. 이런 인간의 실존적인 만추의 계절에 이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성서의 해답을 구하게 됐다.

3.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을 두루 묵상하고 성서와 참고서적을 찾아보았다. 첫째로 본문인 마가복은 1장 12~13에 예수님께서 공생애로 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써 성령께서 광야에서 홀로 고투하게 하셨다. 40주야 투쟁이었다. 그것은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키 위한 혈혈단신 필수적인 혈투였던 것이다. 이 외로움과 투쟁하여 홀로움으로 승리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께서 그 첫 번째의 \"탭\"을 끊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 실존으로 홀로움으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신을 가지고, 한편의 시를 음미할 때,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을 듣을 때, 중요한 사상(성서 말씀, 신학사상 묵상, 기타 사상)을 명상할 때,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자기 일에 전념할 때, 지금도 연구실에서 주야로 인류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결혼도 잊고 홀로 연구에 몰두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홀로움으로 외로움을 벗어던진 자들인 것이다.

4. 이제 위의 인간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은 것을 가지고 차례대로 기술(記述)하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이런 골격을 가지고 어떻게 본론을 논리적으로(귀납법이냐, 연역법이냐, 이후에 다루겠음) 사건 순서적으로, 낱말 선택(국어사전을 항상 옆에 두고 찾아보는 습관 필요)과 의미 있는 문학적 표현 구사(교훈, 의미)와 예화로 잠시 쉬면서 비유로 그 의미를 더 구체화하면서 기술하면 되는 것이다.

5. 목표는 성서에서(예수님께서) 어떻게 외로움을 홀로움으로 승리하셨는가를 회중에게 꼭 보여주고 우리도 홀로움으로 승리하자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흔히 보면, 논조가 이렇게 나가다가 잠시 중요한 낱말이나 의미 있는 성서 구절을 보고(제목과 관계 없는 것) 자기도 모르게 잘 나가다가도 그만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 점을 항상 설교 디자인자는 예의(銳意) 주시(注視)해야 한다.


양 견 박사/ 대구 山下목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