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강의실 2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학부 강의실 2학기

제목 교 회 론 운영자 2019-03-072022-07-13 17:05
작성자 Level 10

교회론 

 

I. 서론

1.문제의 제기

최근 한국의 교회는 양적인 면에서 경이적인 증가를 이룩했다.즉 개신교의 경우 1989년 조사 결과 교회수가 2만 9천 8백 20개,신도수가 1천31만 여명으로 총인구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서울 지역의 경우 교회가 다방보다도 더 많은 5천 6백 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종교사회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한 나라에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 10%가 되면 사회정치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한국에 그리스트교가 전래되어 들어온 이후 한국 그리스트교는 사회전반에 걸쳐서 많은 영향력을 끼

쳐온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사회적,윤리적 혹은 정치적으로 변혁을 가져올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그 까닭은 한국교회가 빠르게 성장하여 오면서도 자신의 신학적 정체가 무엇이며,이 역사 속에 존재해야 하는 목적을 묻는 교회 신학적 추구를 폭넓게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올바로 살지 못하고 빛과 소금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문화부, 89년 12월 31일 발행(한국의 종교).「시사저널」

2)은준관,“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서울:양서각,1988),p.11.

 

한편 교회가 속해 있는 세계는 고도의 기술문명이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는 다원화된 사회로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다.이같이 기술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새로운 세계를 ‘후기 산업사회’(post-industial society)라고 하고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본회퍼는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같은 새로운 세계를 가리켜 그는 ‘성인 된 세계‘혹은 ’성숙한 세계‘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면서 본회퍼는 “우리는 전혀 종교가 없는 시대를 향해 나가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전에 종교 없이 신에 대하여 말하겠으며 어떻게 세속적인 형식으로 신에 대하여 말하겠는가?"하고 질문했다. 이 와 같은 현대 세계의 변화는 한국 교회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즉 한국 교회는 이미 산업화 사회에 돌입하면서 파생된 ‘탈 기독교 시대’라는 새로운 역사 현실과 진통 앞에 서 있으며,교회는 더 이상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는 이러한 현대 변화와 위기 속에서 어떤 중요성을 가지며 어떤 기능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또 교회란 진정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이상과 같은 한국교회의 문제와 관련시켜서 본회퍼의 교회론을 살펴보고자 한다.왜냐하면 본회퍼는 금세기에서 현실적 교회에 관한 신학적 질문을 특히 절실하게 제기한 신학자였으며 그의 참된 관심은 교회의 갱신,교회로 하여금 참된 교회가 되게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그의 주요한 몇몇 저서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의 참된 본질 및 형태,교회와 사회와의 관계,교회의 참된 사명 등을 살펴 보고자 한다.그리고 이것을 분단된 민족의 통일,사회적 경제적 구조악의개선,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해방 등의 많은 과업을 앞에 놓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봄으로써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사명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1)「옥중서간」,고범서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0),PP.166-168

2)「교회」,이신건 역,(서울:한국신학연구소)

3)박봉랑,「기독교의 비종교화」,(서울:범문사,1975),p.551

 

2.연구의 과제와 범위

 

본회퍼를 연구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삶을 보통 세 시기로 나눈다.이것은 그의 신학과 삶을 특징적으로 잘 설명해 주기 위해서 구분한 것이다.그러므로 본회퍼의 교회론을 살펴보기 위한 본 논문의 전체적인 구조는 이러한 시대구분과 관련되어 진행될 것이다. II장에서는 그의 초기의 작품인 「성도의 교제」를 중심으로 참된 교회의 본질과 형태를 살펴 볼 것이다.III장에서는 「나를 따르라」와 「신도의 공동 생활」을 중심으로 세상과 구별된 제자 됨의 교회와 본회퍼가 주장한 신앙훈련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IV장에서는 그의 정치 투쟁 시기에 저술된 「윤리」와 「옥중 서간」으르 중심으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살펴보고,성숙한 세계에서의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다룰 것이다.마지막 결론인 V장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본회퍼의 교회론을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비추어 한국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1) 1927-1933(대학 시절),「성도의 교제」 저술

2) 1933-1940(고백교회 투쟁의 시대),「나를 따르라」와 「신도의 공동생활」 저술

3) 1940-1945(정치적 참여의 시대),「윤리」와 「옥중 서간」저술 (박봉랑,「기독교의 비종교화」 2.16)

 

II.참된 교회의 본질과 형태 -「성도의 교제」를 중심으로

 

1.교회이해를 위한 전제들

 

1)그리스도교의 인격 개념

「성도의 교제」의 중심사상은 교회론이다.여기서 본회퍼는 사회학적 방법으로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데 본회퍼는 교회론을 곧바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즉, 인격적인 관계가 사회의 기본 범주임을 전제하고, 인격 개념에서 「성도의 교제」를 출발한다.그에게 있어서 공동체일 때, 인격개념을 그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본회퍼가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인격개념의 핵심은 ‘나와 너의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인격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하는 물음은 어떻게 구체적인 ‘너’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직결되어 있다.그에 의하면 ‘나’에게 어떤 제약이 주어질 때, 타인의 심각한 요구를 받고 타인에게 책임을 져야 할 때 비로소 인격은 생겨나고 사회적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즉, 그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 순간에 인격은 책임적 인격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말을 걸어오는 그 순간에 인격은 하나의 결단에 맞닥뜨려진다.이 인격은 관념주의의 이성적 인격이나 인격화된 지성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의 살아 있는 인격이다.”

 

1)「성도의 교제」 (Sanctorum Communio,1930)는 본회퍼가 21세 되던 해에 베를린 대학 신학부에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하여 1927년에 통과된 것으로 1930년에 출판되었다.

2)본회퍼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인격 개념은 개인을 일반적인 것, 전체적인 것(사회, 국가)으로 해소시키고 모든 관념론적 인식은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인간의 인격이 만남과 결단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시간과 결부되어 있음을 나타내 준다. 또한 이 만남이 이루어 지는 구체적인 순간이란 인간이 자기의 윤리적 한계를 체험하게 되는 때, 존재론적으로나 윤리적 인격들간에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들이 체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개인은 타인, 구체적인 ‘너’를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회퍼는 ‘나와 너의 관계’가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매개될 때 비로서 성립된다고 주장한다.이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를 윤리적으로 책임적인 인격이 되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너’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 혹은 성령께서만 나의 구체적인 너로써 등장하며, 이 하느님 혹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네가 되고,여기에서 참 ‘내가’ 발생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 너는 신적인 너의 형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들 사이의 ‘나와 너’의 관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반사 시킨다고 할 구 있다.뿐만 아니라 본회퍼는 “그리스도교의 인격개념의 본질은 하느님이 단지 ‘너’로써 마주 오실 때가 아니라 ‘나’로써 인격 속으로 들어오실 때 비로서 깨달을 수 있게된다.”고 말하고 있다.이런 그리스도교의 인격개념, ‘나와 너의 관계’가 본회퍼가 말하고자 하는 교회 공동체의 기본 범주이다. 앞에서 살펴 분 것처럼 본회퍼는 그리스도교의 인격개념을 설명하면서 인격형성에서의 하느님과 절대적인 관계의 필요성,타인 즉 구체적인 ‘너’라는 인격의 사회성을 강조함으로써 거기에 따르는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리 역할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인적 정신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거부된다.(위의 책PP. 26-27)

3)위의 책, P.30

4)위의 책, P.32

5)위의 책, P.36

6)위의 책, P.37

7)박재순, “본회퍼의 교회이해”,「신학사상」,(1986년 겨울), P.766

 

2)본래의 공동체와 경험적 공동체

인격과 공동체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토대로 본회퍼는 교회공동체를 ‘본래의 상태, 아담의 타락, 그리스도의 대리행위’의 구원사적인 맥락에서 논한다.따라서 그의 교회론을 이해하려면 그가 제시한 본래의 상태에서의 공동체의 원형, 곧 목표로서의 교회공동체를 발전해야 할 것이다. 본래의 상태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직접적인 공동체였다.

 

(1)본래의 공동체

본회퍼는 본래의 공동체를 신학적인 면, 사회철학적인 면, 사회적인 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신학적 고찰은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제공하고, 사회철학적 고찰과 사회학적 고찰은 교회의 사회학적 문제에 대한 기준들을 제공하고 있다.

 

i)신학적 고찰

본회퍼가 신학적인 면에서 본 본래의 공동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참된 교제와 연관되어 있다.

본회퍼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된 내용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고 한다.그에 따르면,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로서의 본래의 인간은 하느님께 봉사하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공동체 안에 있는 것로 여겨야 한다. 이것은 본회퍼의 교회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즉 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공동체’가 존재론적 ‘나와 너의 관계’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그의 교회개념에서 분명해진다.하느님의 공동체에서 직접적이란 말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 안에서, 곧 지배와 봉사의 관계 안에서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복적의 절대적인 동일함을 의미한다.창세기 1장과 2장에서,즉 본래의 상태에서의 인간은 하느님과의 직접적 봉사의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로 생각되어야 한다. 이 공동체는 직접적이고 서로서로 사랑 위에 세워졌다.

 

8)위의 글, P.767

9)본회퍼는 사회철학과 사회학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있다. (Dietrich Bonhoeff, The communion of Saints(성도의 교제))

10)Dietrich Bonhoeffer, The communion of Saints, P.40

11)위의 책, P.40

12)위의 책, P.41

 

ii)사회적 고찰

이부분에서 본회퍼가 개인과 집단인격, 공동체의 상호 관계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명제의 의미에 집중한다. 이것은 여자의 창조,곧 사회적인 삶의 창조의 의미에 집중함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본회퍼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동체로 창조되었다는 것을”강조한다.이 밖에도 본회퍼는 인간의 사회성의 증거로 말 (speech)과 의지 (will)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정신성은 사회성,곧 나와 너의 기본적 관계와 섞여 있다고 말한다.또한 그는 “하느님은 개인 인간들의 역사를 원하지 않고,인간들의 공동체의 역사를 원하신다.하느님 앞에 서는 공동체와 개인은 같은 순간에 현재한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다. 이 기본 관계들 위에 종교적 공동체, 곧 교회의 개념이 있다”고 한다.

 

iii)사회적 고찰

본회퍼가 사회적 고찰에서 보는 본래의 사회적 형태는‘의지의 공동체’이다.그에 의하면 인간의 공동체는 모방,복종,배고픔과 성적 충동등 동물들의 공통적인 요소를 넘어서서 의지를 가진 자의식적 존재들의 공동체이다.충동만으로는 인간 사회를 올바르게 설명할 수 없다. 모방, 복종, 배고픔과 성적 충동 등을 인간은 동물과 공유한다. 그러나 인간 공동체는 동물들과는 다르다. 특별히 인간 공동체는 지각하는 인간정신이 작용하고 있을 때,즉 공동체가 의지의 합목적적

행동들 위해 기초되어 있을 때 현존한다. 인간 공동체가 의지의 행동들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지는 않지만,의지의 행동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갖는다. 그러면서 본회퍼는 의지의 공동체를 자의식적이고 목적 지향적이라 할 때, 그 공동체가 갖는 행동들의 특징은 “그것들이 인격 밖의 객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서로를 향해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본회퍼는 이렇게 의지의 공동체에 관하여 먼저 설명한 후 공동체의 유형을 말하는 데 여기에서는 퇴니스 (Tonnis)의 정의에 따라 서로

 

13)위의 책, P.44

14)위의 책, PP.46-47.

15)위의 책, P.48

16)위의 책, P.52

17)위의 책, P.53

18)위의 책, P.53

19)같은 곳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목적으로 의도되는 경우 (즉: 의미를 위한의지) 즉 친밀한 관계자로서의 ‘의미의 구조’를 ‘공동체’(Gemein-schaft)로, 함께 있는 것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의도되는 경우(:합리적인 목적의 의지) 즉 소원한 관계로서의 ‘목적의 구조’를 ‘사회’(Gesellschaft)로 부른다. 가족, 국가, 교회는 전자에 속하고 회사,클럽,분파 등은 후자의 예이다.그러나 본회퍼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공동체와 사회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으며, 사회와 공동체가 서로 섞여 있다고 본다.즉 공동체의 의지의 유대 없이 사회가 있을 수 없고, 사회적 의지의 유대 없이 공동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본성적으로 사회란 공동체를 통해서 기초되어 있기때문이다.

2)경험적 공동체

우리가 경험하는 공동체는 본래의 공동체가 아니고, 타락된 공동체이며,죄 아래 있는 이기주의의 공동체이다. 본회퍼는 여기서 타락과 그 결과에 대해서 신학적인 해명을 한다. 아담의 타락은 하느님과의 직접적 교제와 인간 사이의 직접적 교제를 파괴했다. 인간과 인간의 본래의 관계는 주는 것이었지만, 죄의 상태에서는 그것은 단순히 요구하는 것이다. 각 사람은 자발적인 고독 안에 존재하고,자기 자신의 삶을 산다. 각 사람은 이제는 자기 자신의 양심을 가진다. 양심은 그 본래의 상태에선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회퍼는 본다. 그 증거로 아담이 선악을 안 것은 오직 타락 이후임을 든다. 본회퍼는 죄를 개인적이며 동시에 초인간적인 것, 개인적 행동이며 동시에 인류의 행동으로 이해한다.그러면서 그는 죄의 보편성, 즉 죄의 주격은 개인이며 동시에 인류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과 개인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곧 본회퍼가 죄의 해석에서 도입한 ‘윤리적 총체’라는 개념이다.이것을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0)위의 책, P.57

21)위의 책, P.71

22)위의 책, P.71

23)위의 책, P.72

24)위의 책, P.83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께로의 그 부름은 ‘총체’(Gesamtheit)에게 주어진 것이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참회해야 한다. 죄를 범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백성이었다. 그래서 위로를 받아야만 하는 것도 백성이었다.(사 40:1)개인이 부름 받을 때 그가 자신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부름 받을 때에도 하느님의 의지가 역사를 형성함으로 드러난다... 개인에게 대하여 하느님의 뜻이 있는 것과 같이 백성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뜻이 있다.여기서 공동체는 참회하고 믿는다.그러나 공동체의 들음과 참회와 믿는 것은 다만 개인 안에서만 일어난다. 오직 그 때에만 그 부름을 들음이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개인들 안에서 듣고, 참회하고, 믿는 것은 개인들이 아니고 ‘총체’이다. 행동의 중심은 ‘총체’안에 있다. 본회퍼는 여기서 대리적 행동의 문제를 본다.‘총체’에게 말씀 했을 때 개인인 인간의 양심이 듣는다.각 인격은 다만 하나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 ‘총체’의 일원으로서나 동시에 개인으로서이다. 이러한 완전한 인격 위에서만 윤리적 공동체는 세워진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개인의 관계가 인류라는 집단 인격에도 적용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류는 모든 공동체로서의 그 삶에의 참여는 타자들과의 교제에서 사는 삶의 긍정에 의해서 확증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항상 집단적 인격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계속해서 “모든 인간이 아담인 한, 그것은 실제로 하나의 양심을 갖는다”고 주장하며 “집단적 인격으로서의 ‘아담’은 ‘교회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집단적 인격에 의해서만 대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본회퍼의 교회론의 이해를 위해서 그가 신학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사회철학과 사회학적으로 논한 몇 가지의 기본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이렇게 사회학적 개념들을 전제하여 놓고 그의 교회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25)위의 책, P.83

26)위의 책, P.84

27)위의 책, P.85

28)위의 책, PP. 84-85

 

 

2.“성도들의 교제”로서의 교회존재

 

인격 공동체의 의미를 살핀 본회퍼는 그것들을 근거로 하여 교회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데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본회퍼도 경험적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와 죄인들의 교제가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1)신약성서의 교회의 개념

본회퍼는 신약성서에서 두개의 다른 교회 개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의 교회이다. 그런데 본회퍼는 예루살렘 교회의 개념보다는 바울의 교회개념을 취한다.그가 말하고 있는 바울의 교회 개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교회를 나타낼 때 ‘에클레시아’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적 회중인 ‘에클레시아’는 국가적,민족적,정치적 한계를 넘어서는 바 보편적인 뜻을 갖는다.즉 하나의 백성이긴 하지만 이방인과 유대교를 넘어선 제 3의 인류를 의미한다.바울은 희랍인에게 이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바울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전 그리스도교인을 총칭한다(고전 10:32-15:9;갈 1:13)”. 계속해서 본회퍼가 신약성서에서 이해하고 있는 교회개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행위에 의해서 실존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새 인류가 창조되었다.그리스도는 제 2의 아담이요..... 교회가 생기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이 실현되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교회의 기초이시다.”

둘째로,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교회의 창조자인 동시에 통치자로서 관계하신다. 또한 여기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도 전적으로 통치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전 교회와 관계 하신다면 성령은 개인과 관계하신다”고 한다.

셋째로,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본회퍼는 바울이 몸의 이미지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하게 생각했다고 한다.(고전 12:12).즉 바울은 교회가 갈라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뉘었느뇨?’라고 하였던 것이다.(고전 1:13).그러나 성령이 동일의 원리라고 하여 교회의 객관적인 동일의 주장을 경계한다.교회의 유일한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넷째로,교회는 유기체이다.여기에서 본회퍼는 교회에서는 공동생활이 지배한다고 한다.즉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유기적 삶의 법에 일치하는 공동체적 삶이 지배적이다....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교회인데....하느님의 교회는 하느님의 계시적 실재로서 개인은 이 실재의 한 부분인데, 하느님에 의해 공동체 안에서 선택된 개인으로서 전체로서의 개념이다....바울의 유기체적 교회관은 우선 모두가 모든 지체들을 통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며, 나아가서 모두가 개인으로서 그 안에 살 수 있는 바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교회 개념에 대해서 본회퍼는 “결론적으로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교회의 사회학적 구조는 다수의 인격들을 말하며 모두가 함께 속하는(belonging)공동체요, 통일체이다. 이 공동체는 의지 공동체에 유비(類比)된다”라고 말한다.

 

29)위의 책, PP.84-85

30)위의 책, P.86와 PP.146-148.본회퍼와 마찬가지로 한스 큉도 교회는 죄인들과 의인들의 공동체이며,죄인 공동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도들의 공동체로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홍근 역, 「교회란 무엇인가?」, 분도출판사,1991, PP.107-109)

31)Dietrich Bonfoeffer, the Communion of Saints, P.98.

32)위의 책, P.98

33)위의 책, P.99

34)위의 책, P.101

35)위의 책, PP.101-102

36)위의 책, P.102

2)그리스도와 교회

본회퍼에게 있어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교회’이다.교회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웠다는 것이다.첫 아담이 갈라 놓았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하느님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인간과 친교를 회복하고 인간 사이의 친교도 회복하신 것이다.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 인류,새 공동체이다.따라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교회의 존재의 근거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비로소 교회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본회퍼는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기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을 본다.그리고 본회퍼는 여기에서 아담의 행동과 그리스도의 행동을 비교한다.아담은 자기 중심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했지만, 그리스도는 옛 인류의 새 인류로의 변화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하나의 대리 행동을 하였다는 것이다.이것을 본회퍼는 진정한 대리 행동의 본질이라고 선언하며,그리고 이 대리 행동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님이 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언제 세워졌는가?본회퍼는 “예수가 그의(땅에서의)생애 가운데 하느님의 교회를 새로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라고 말한다.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의 요구로서 율법을 죽음에 이르기 까지 순종함으로 완전해져야 했기 때문이다.예수 생전에 계시된 사랑의 교제는 예수의 죽음으로 해서, 그것을 세우신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하여 다시 한번 깨져야 했다.율법의 역할은 예수를 십자가로 인도했고,예수는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와 고독을 이 십자가에서 겪었다. 그가 체포될 때 예수와 교제하던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부활에서 이해될 수 있다.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으로 계시되었고.....역사의 한계는 제거되었으며.....아담의 인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본회퍼는 경험적 교회가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경험적 교회로서의 교회는 오직 성령에 의하여 창조될 수 있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교회가 창조되긴 했으나 이 교회는 경험적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실재하지만 아직 현실에 나타나지는 않았다.교회가 역사 속에 현실적으로 기초된 날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 이었다.

이런 전개에 따라 본회퍼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안한다.첫째 관계는,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 되었다는 것이다.그리스도 안에선 시간성이 지양되어 있다.둘째로, 교회는 시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초석으로 하여 세워져야 한다. 이 두 관계는 그리스도가 교회와 수직적인 관계와 동시에 수평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이 같은 진술은 신약성서로부터 이미 알려진 지 오랜 진리, 곧 하느님의 나라의 임재와 도래에 관한 것으로 교회와 하느님의 나

라는 서로 동일화 될 수 없다. 교회가 하느님의 나라와 동일화 될 수 없는 것은 의인이면서 죄인인 그리스도인이 본질적으로 완전해졌으나 실제로는 완전해진 것이 아닌 것과 같다.하느님의 나라는 순전히 종말적인 개념이다.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쪽에서 볼 때에는 마 순간 교

회 안에 현존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소망의 대상이다. 반면에 교회는 지금 여기서 신앙의 대상이다.” 또한 본회퍼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립되는 교회의 세가지 기본적인 사회학적 양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개인들을 고립시키고 양심을 갖게 한다.

둘째,십자가의 교회는 부활의 빛에 비추어 그리스도 안에서 창의되고 성 화된다.

셋째, 새 인간의 초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본회퍼는 교회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한 새 인류의 현실적인 공동체로 본다.교회는 그리스도와 분리해서는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교회론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는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오히려 교회이다”라고 말한다.

 

37)위의 책, P.106

38)위의 책, P.98-99

39)위의 책, P.106-107

40)위의 책, P.109

41)위의 책, PP.109-110

42)위의 책, PP.110-111

43)위의 책, P.111

44)위의 책, P.112

45)위의 책, P.112

46)위의 책, P.114

47)위의 책, P.115

 

3)성령과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먼저 논의한 이후에 본회퍼는 성령을 통한 진정한 교회의 현실화에 대해 논의 한다. 하느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그의 공동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성령으로 계시하신다.성령은 인간 개개인들을 교회안으로 인도하시고 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가능케 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적 실현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다. 교회는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도 성령을 필요로 한다. 교회를 완성한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고 그 결과 인간을 현실화된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합 시키신다. 교회가 생기는 것은 단순히 개인들이 모여서 되는 일이 아니다. 교회는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있기 이전에는 그 어떤 개인들도 성령에 의하여 감화 받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완성된 교회 안에 있으며 동시에 현실화된 교회 안에 있다. 그리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이다. 이처럼 개인에게 임한 말씀 안에서 완성된 성도의 교제와 시간 속에서 발전하고 있는 성도의 교제는 동시에 현존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성령은 말씀 안에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성령은 그리스도만을 내용으로 갖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성령의 활동을 세 가지로 말한다. 이 성령은 교회에 삼중적 방법으로 행동하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확립된 세 가지 기본적인 사회학적 관계와 연결된다. 다수의 개별적인 정신들, 정신의 교제, 그리고 정신의 통일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성령을 통하여 시간 속에서 실현되는 교회의 모습을 논하고 있는데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정신의 개별성

“교회의 성령은 각 인격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하고 이들 각 인격을 고독에로 인도한다. 각 개인은 자기의 창의와 성화를 고독한 가운데서 믿고 경험하여, 각자는 고독한 가운데서 기도해야 하고, 이 고독한 가운데서 영원한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다.”

 

(2)정신의 교제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과의 사랑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으키며, 이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사귐을 일으킨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인간 안으로 들어 오신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인간 마음속에 주심으로 신앙과 사랑이 창조된다. 사랑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 주권을 받아들이게 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한다.”

 

위와 같이 성령의 활동으로서 정신의 교제에 대해 설명을 한 본회퍼는 계속해서 성도들의 교제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여기에서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교회의 회원 각 사람이 ‘더불어 있음’(Miteinander)이요, 다른 하나는 회원들이 서로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 곧 대리적 행동의 원리이다. ‘더불어 있음’에서 죄인의 단독적 존재와 윤리적 고독(홀로 책임지려는)이 극복된다. 나 혼자 고난 당하고 나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 공동체가 나와 함께 고난 당하고 함께 죽는다. 이 ‘더불어 있음’에서 나와 타인(너)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 진다. 또한 성도들의 교제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으로 본회퍼는 세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타인을 위한 희생적이고 활동적인 사랑, 둘째 중보의 기도, 셋째 하느님의 이름으로 서로 사죄를 베푸는 일 등이다. 이것들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실현된다.

첫째, 타인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에는 자신의 권리에 대한 포기도 포기도 포함된다. 타인(이웃)을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친교까지도 포기될 수 도 있다. 타인을 대신해서 저주받고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떨어져 나갈 태세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는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게 되고 역설적으로 하느님과의 깊은 결속 안에 있게 된다. 

둘째, 중보의 기도는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의 사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의 일반적 기초는 ‘교회는 하나의 삶을 이끌어 산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개인은 이 하나의 삶에 참여할 때만 하느님과의 교제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타자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할 때 전 교회는 그와 같이 기도하게 된다.

셋째, 서로 사죄를 베푸는 일 이것은 한 개인이 그의 제사장직의 특권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줄 수 있다는 교회의 기적이다.죄의 공동체에 의하여 깨어졌던 기본적인 도덕적 관계들이 성령에 의해 갱신된다.각자는 타자를 적극적인 사랑 속에서 완전한 대리적 행동을 통해 죄의 용서와 존재를 유지한다.

위와 같은 타인을 위한 중보의 기도나 서로 사죄를 베푸는 일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 이 대리적 죽음의 현실적 구조인 교회 공동체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3)교회의 정신적 통일체

“한 몸, 하나의 성령, 한 주, 한 신앙, 하나의 세례, 한 하느님과 한 아버지....(엡 4:4 이하, 고전 12:13, 롬 12:5).”“은사가 많으나 하나의 성령, 직책이 여럿이나 한 주님, 많은 능력이 있으나 한 하느님....(고전 12:4)”은 정신의 통일성을 뜻한다.그리고 갈라디아서 3:28에서 처럼 “인종을 넘어선, 남.녀 관계를 넘어선, 주종관계를 넘어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성이 교회 공동체의 정신적 통일성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인간의 정신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의 통일 위에 기초하고 있다.또한 교회의 통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축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세가지 활동으로서의 정신의 개별성, 정신의 교제, 정신의 통일성은 교회 내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48)위의 책, P.104

49)위의 책, P.115

50)앞의 책, P.116

51)위의 책, P.117

52)위의 책, PP.118-119.

한편 그리스도교의 사랑에 대해 본회퍼는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의 한다.(앞의 책, PP.99-123) 

 

i)기독교적 사랑은 하나의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다.

ii)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만 가능하다.

iii)의지의 행위로서의 사랑은 목적 지향적이다. 

iv)그리스도적 사랑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다. v)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제한이 없음을 안다.

 

53)위의 책, P.127

54)위의 책, P.128

55)위의 책, P.130

56)위의 책, P.131

57)위의 책, P.132

58)본회퍼는 인류를 가리켜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하며,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표현하다.

59)앞의 책, PP.135-136

60)위의 책, P.136

61)위의 책, P.137-138

 

3.교회의 경험적 형태

 

본회퍼가 교회의 경험적 형태에서 논하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경험적 교회는 우연하고 불완전한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이다.성도의 교제, 즉 교회 안에는 계속해서 죄인들의 교제가 남아 있다. 본회퍼는 경험적 교회를 루터교의 개념에 따라서 철저하게 죄인들의 공동체로서 이해한다. 따라서 경험적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에 의

해서만 하느님의 교회로 인정된다. 현재 거룩하게 됨은 다만 마지막 것들의 예표일 뿐이다.여기서 우리는 신앙으로 걷는다.여기서 우리는 단지 우리의 죄를 볼 뿐이고, 우리의 성결은 신앙 안에서 믿을 뿐이다.이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우연하고 불완전한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둘째로, 경험적 교회의 형태는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교회든 개개의 지역교회든 간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사실에 의해 세워진다. 본회퍼는 경험적 교회로서 이 모이는 교회를 강조한다.모여서 예배하는 교회, 모여서 설교를 듣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교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창조된 교회는 늘 다시 모여 하느님 말씀을 듣는 설교 공동체이다.설교 공동체이므로 반드시 모임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회퍼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란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본회퍼에 의하면 교회 밖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없다.성서도 교회 밖에서는 인간의 말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성서와 설교의 말씀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본회퍼의 주장에서 우리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교회개념이 거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경험적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세워졌으나 다른 공동체와 마찬가지의 경험적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다른 공동체가 그렇듯이 이익사회로 까지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이 이익사회란 개개인의 의지 위에 세워졌고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 이익사회에 들어가려

면 계약과 기타 형식적인 절차를 밟는다. 교회는 이와 같은 이익사회 즉 어떤 기관, 어떤 연합단체 등으로 전락할 수 있다. 본회퍼는 이처럼 교회를 어떤 기관이나 어떤 연합단체 정도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본회퍼는 이익사회보다 인격공동체를 높이 평가하면서 교회가 이러한 인격공동체로 변화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이 인격공동체 역시 윤리적 집단인격으로서 죄책을 느끼지만, 계시에 근거한 교회공동체와는 질적 차이가 있다.그러면서 본회퍼는 교회공동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하느님의 교회는 성령에 의해 기초되었고 그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즉 ‘교회로서 실존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다.”또한 본회퍼는 이 교회가 갖는 생의 원리는 사랑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사랑이 인격 상호 간의 사회적 태도, 곧 이기적 태도를 극복한다.인간들을 다스리는 신적인 사랑의 주권의지는 인격들의 나라를 건설한다. 사랑이 이 나라의 목적이요, 이 사랑만이 이 나라를 지배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의 인격공동체요, 사랑의 인격공동체로서 고유한 인격공동체이다. 그러나 이 교회 안에는 이익 공동체,인격공동체 등과 같은 사회적 기본 형태들이 함유되어 있으나 이것이 극복되어 있다. 

넷째로, 본회퍼는 교회의 경험적 형태들에 관해서 위와 같이 논한 후에 마지막으로 교회의 본질적 문제를 다룬다. 그는 신앙에 의해서만 교회가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공동체라는 것이

이해된다고 한다. 교회란 인간의 경험으로서가 아닌 이보다 앞서 있는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공동체이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본회퍼는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본회퍼의 초기 작품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에 나타난 교회론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계시의 구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고 구조는 이후에 나오는 저서들에게도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그

의 주장 몇 가지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타난 그의 중심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 뒤에 나오는 그의 책들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가 주의 깊게 보고자 하는 그의 사상들은 그리스도적 인격개념, 그리스도의 대리 행동 등의 개념과 그가 교회론의 출발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었다는 점 등이다.

 

62)위의 책, P.146

63)위의 책, P.155-156

64)위의 책, P.161

65)위의 책, P.161

66)위의 책, P.175

67)위의 책, PP.179-180

68)위의 책, P.183

69)이형기,”교회와 사회”(서울: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1987), P.101

70)Dietrich Bonhoeffer, The Communion Saints, P.195

 

III. 제자 공동체로서의 교회

 

1.역사적 상황과 신학적 동기

 

본회퍼의 초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의 교제”, “행동과 존재”등의 작품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Nachfolge)는 나치즘을 경험한 이후 무엇보다도 고백교회의 반 히틀러 투쟁의 시기에 저술되었다. 이미 1935년 경에 본회퍼는 히틀러에 의해 발이 묶인 채 비 합법적인 핀켄발데(Finkenwa-lde)신학교에서 목사후보생들을 가르치며 이들의 기숙사에서 성도의 공동생활을 실천에 옮겼던 바 이 시기의 열매로서 나타난 것이 바로 “나를 따르라”(1937)와 “신도의 공동생활”(1939)이다. 이 “나를 따르라”와 “성도의 공동생활”은 본회퍼의 삶의 제 2시대 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그의 삶의 자리는 대학 강의실이 아니라 교회였고, 나치스의 지배 아래, 그리고 고백교회의 저항 운동에 가담하여 행동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이러한 환경에서 본회퍼가 이 두 책을 쓰려고 했던 신학적 동기를 간단하게 나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역사적 상황

제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민족적인 수치와 좌절 속에 있었던 독일국민은 독일의 인종, 혈통, 국토를 찬양하며 민족의 미래를 약속한 히틀러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1933년 2월 1일에 헌법에 보장된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정치범을 수용소에 집어넣을 수 있는 긴급포고령을,3월 21일에는 유언비어를 금하는 법령을, 3월 24일에는 정부에 입법권을 주고 히틀러 자신을 초 헌법적 존재로 만든 권능 조례를 공포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7일에는 유태인의 피를 받은 사람이나 유태인과 결혼한 사람은 일체 국가의 공직을 가질 수 없게 한 ‘아리안 입법’이 선포되었다. 이와 같이 일련의 조항들은 히틀러 정권에 충성을 바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본회

퍼와 같이)에게는 치명적인 제안들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 진전에 대한 당시 독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1932년 프러시아 연합교회의 11월 선거에서 이미 3분의 1의 자리를 얻었던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1933년 7월 23일의 선거에서 70%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9월 5일에 히틀러의 친구이며 교회 담당관 고문관인 군목 루드비히 뮬러(Ludwig Muller)가 뷔텐베르그에서 열린 전국회의에서 국가의 감독으로 피택되었다. 그 후 프러시아 총회는 ‘아리안 입법조항’을 교회에서 받아들여 유대인의 피를 받은 사람이나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은 일체 교회 안에서 공직을 가질 수 없게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를린 대학의 신학부는 이 일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취하지 못했으며, 특히 본회퍼의 스승이기도 한 제베르크(Seeberg)는 “우리는 건전한 양심으로 희랍 또는 라틴 형태의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독일적’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뮬러의 어용 그리스도교는 극단의 추태를 드러내기도 했다.저들의 주장은 나치즘 그대로였던 것이다. 즉 (1)히틀러의 신격화로써 소위 영도자에 대한 신학적 근거수립 

(2)게르만주의에 의 한 유대인 배척과 동시에 성서의 비 유대화의 프로그램으로 구약배격, 예수를 아리안인 이라는 주장

(3)교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주장

(4)계시의 개념을 역사과정 특히 1933년 이후의 독일 정치사와 직결시키는 등 그 횡포는 극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시 대부분의 독일 교회와 신학자들 그리고 그리스인은 이들의 횡포에 대해서 침묵했거나 외면했다. 이것은 결국 동조 내지는 타협을 의미 했던 것이다.

 

1)이형기, “교회와 사회”, (서울: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7), P.183

2)박봉랑, “기독교의 비종교화”, (서울:범문사, 1975), P.18

3)위의 책, P.303

4)위의 책, PP.46-47

5)위의 책, P.46

6)당시의 개신교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i) 독일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그룹

ii) 고백교회적 그룹

iii) 중립적 입장을 고수했던 그룹.(박종화, “전통적 두 왕국론과 고백 교회운동” “신학사상”, 1986년 겨울, PP.743-744)

7)안병무, “자유를 추구한 교회들”:나치스와 발멘 선언, “기독교 사상”, 1971년 3월호, P.67

8)박봉랑, “기독교의 비종교화”, PP.47-48

9)안병무, “자유를 추구한 교회들”, P.67

 

2)신학적 동기 

이러한 상황에서 본회퍼는 강단과 서재의 신학자이기를 거부하고 책임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투쟁의 전면에 나섰다.이때 그에게 비친 신앙이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사람이 그 신앙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하는 모험의 문제였다. 신앙은 그것이 복음적으로 아무리 옳다고 해도, 만일 그것이 행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추상적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추상적 신앙’, 교리적으로 알고 있으나 순종이 없는 신앙, 말하자면 행함이 없는 신앙을 본회퍼는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무서운 적으로 보았고,이 적이 자신이 속해 있는 독일 국가 교회의 현실인 것으로 보았다. 이것을 그는 ‘값싼 은혜’가고 표현하였다. 그들의 신앙은 책망을 받지 않을 지 모르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세상에서 증거하는 제자들은 아니다. 그들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지 모른다.그러나 본회퍼는 그들이 오늘의 구원의 중재자들인가 하고 의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를 따르라”에서 한 것은 ‘순종을 추상으로 만드는 것’, ‘형식적 신앙’, 값을 치르지 않는 ‘값싼 은혜’에 대한 비판이었다. 본회퍼는 루터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값싼 은혜로 떨어졌고, 나치스의 숨은 악의 공격 앞에서 값싼 은혜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독일 국가 교회에 대해서 놀랐다. 그래서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독일 국가교회에 대하여 항거하고 값싼 은혜를 공격하고, 행동의 직접성, 귀중한 은혜, 순종 속에 있는 신앙,신앙의 삶의 문제를 강조해 나갔다.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 이었다. 이와 같이 그의 주장은 그가 당시에 직면하고 있던 국가교회를 둘러싼 문제의 심각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교회의 책임적인 증언이 절실히 요청되던 1933년 이후의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교리의 형식 속에서 자신을 속이고 있던 독일 국가교회의 자기 비판에서 나왔던 것이다.

 

10)박봉랑, “기독교의 비종교화”, P.303

11)본회퍼의 “나를 따르라”, 허혁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9, PP.24-26

12)박봉랑, “기독교의 비종교화”, P.304

13)본회퍼, “나를 따르라”, P.26

14)박봉랑, “기독교의 비종교화”, P.304

 

 

2. 제자 됨과 신도의 공동생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교회,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교회, 원수사랑, 절대순결을 세상에 보여야 하는 교회 이런 교회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교회를 위해서 본회퍼는 엄격한 영적 훈련을 강조했고 핀켄발데 신학교 안에 형제의 집을 세워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공동생활을 통해서 엄격한 영적 훈련을 실시했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같이 살고 같이 기도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했다. 이러한 핀켄발데에서의 삶을 토대로 하여 “신도의 공동생활”이 집필되었던 것이다. “신도의 공동생활”은 제자 됨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이미 경건한 금식 행위와 엄한 절제 훈련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했고 제자의 생활은 엄격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육체는 엄격한 규율로 날마다 훈련을 받아 거세되어야 하며 기도에 의한 그날 그날의 훈련과 말씀의 끊임없는 연구, 절제와 규율에 의한 여러가지 육체적 훈련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세상에서 떠난 교회는 내부에서 교회 기율의 훈련을 쌓아야 하며 기율은 전 교회를 통솔한다고 했다. 이처럼 제자 됨은 ‘신도의 공동생활’을 통한 훈련에서 길러진다. 그러면 본회퍼가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제시하고 있는 훈련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도하는 생활이다. 본회퍼는 우리가 남과 가까와지는 데 가장 빠른 길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시편으로 하는 기도에 강한 의미를 부여했다.또한 기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꺾이지 않고 꾸준히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자기의 것을 만들고, 자기의 마음에 인을 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어떻게

반대하든 간에 제자가 하느님의 말씀 아래서 함께 살려고 하면 그들은 함께 자기의 말로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그 지체들이 서로서로 위해서 기도 하는 것으로 사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무너져 버린다고 했다. 

둘째, 날마다 성서를 명상하는 생활이다.명상의 시간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성서의 본문이 우리 자신들에게 아주 개인적으로 무엇을 말하느냐는 것을 묻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 해석이나 설교 준비에 관련된 성서 연구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에게 들려올 하느님의 말씀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본회퍼의 삶에 있어서 성서는 항상 그의 사고와 삶의 지표였다.

셋째, 찬양하는 생활이다. 본회퍼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모으고 훈련을 거쳐서 즐겁게 찬양을 부르게 되면, 그것이 공동생활에 많은 유익을 준다고 한다. 함께 찬양할 때 울려 나오는 것은 교회의 소리이다. 내가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찬양하는 것이다. 나는 교회의 일원으로 동참할 따름이다.

넷째, 섬김으로 사는 생활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제자는 섬김으로 사는 사람이다.섬김은 혀에 굴레를 씌우는 것이며,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며, 남의 말에 말없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헌신적으로 남을 돕는 것이며,서로의 짐을 져주는 것이며, 말씀으로 섬기는 것이다.진정으로 제자의 영적인 권위는 듣는 섬김, 돕는 섬김, 남의 짐을 지는 섬김, 그리고 선교하는 섬김이 이루어지는 데 있을 뿐이다.

다섯째, 사귐 속에서 사는 생활이다. 제자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것을 말한다. 제자의 사귐은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서로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온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어 용납된 것이다. 그래서 서로서로 영원히 예수에게 속해 있는 것이며 사귀면서 사는 우리는 언젠가는 그와의 영원한 사귐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성찬의 사귐까지 이르러야 한다.거룩한 성찬의 사귐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다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주의 식탁에서 몸과 피로 하나가 되듯, 영원히 그들은 나누이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이다.이로써 사귐은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다.말씀 아래서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례전으로 완성된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신도의 공동생활”에 나타난 ‘신앙훈련’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런 훈련은 독일 국가교회와 대립하여 있던 제자 공동체로서의 교회에서 필요했던 것이다.그런데 본회퍼에게 있어서 신앙훈련은 단순히 이 때만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옥중서간”에서도 보여지고 있는데 결국 이러한 신앙훈련은 ‘무종교의 세계’, ‘성숙된 세계’에서의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이 본회퍼의 주장인 것이다.

 

15)박재순, “본회퍼의 교회이해”, P.782

16)”나를 따르라”, PP.156-158

17)위의 책, P.278-279

18)문익환 역, “신도의 공동생활”(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1),

P.44,45,63,81,112

19)위의 책, PP.107-108

20)위의 책, P.75,79

21)위의 책, P.120,124,127,130,132,136

22)위의 책, P.22,25,27,163

23)고범서 역, “옥중서간”,(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0)

 

IV.성숙한 세계 속에서 남들을 위한 교회

*”윤리”와 “옥중서간” 중심으로-

 

베트게(Bethge)에 의해 편집 출판된 “윤리”와 “옥중서간”은 본회퍼의 후기 저작에 속한다. 본회퍼의 마지막 시대에 속하는 이 후기는 정치적 행동에 직접 참여하여 잡히고 수난 당하고 죽은 시대이다. 그러데 후기의 이 두 책을 본회퍼의 초기 저작과 비교해 볼 때 초기 저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세상의 이해와 신학적 또는 신앙적 자세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의 “윤리”에 나타난 교회는 무엇이며, 교회와 세상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하는 문제와 “옥중서간”에서 말하고 있는 ‘성숙한 세계’, ‘무 종교의 세계’ 에서의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고자 한다.

 

1.세상 안의 세상을 위한 교회

 

1)세상 안에 있는 교회 -세상과 적극적인 관계로서-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교회의 비범성을 강조하면서 세상과 구별 되어지는 교회를 강조하였으나, 그가 정치 투쟁으로 뛰어 들어 활동하면

서부터는 교회와 세상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세상으로부터의 떠남, 구별됨을 강조하는 것을 지양하고 교회를 다시 세상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는 다만 교회의 主만이 아니라 또한 세상의 主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 본회퍼는 어떤 근거로서 교회와 세상의 통일을 말하고 있는가? 본회퍼의 신학에 있어서 모든 제목은 그 깊은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에 나타난 하느님의 행동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본회퍼에게 있어서의 교회와 세상의 통일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실은 이 세계의 현실 속에 들어 왔다. 하느님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현실의 문제가 동시에 그 답을 얻는 장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드러났다.....이제부터는 예수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또한 그는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현실 개념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의 사고방식이었던 두 개의 영역 에 관한 이론을 거부한다. 본회퍼는 두 개의 영역에 관한 사고방식은 성서의 사고방식에도 종교 개혁의 사고방식

에도 전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두 개의 영역(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하나로 통일되는 그리스도의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기독교적인 것은 세상적인 것에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에, 성스러운 것은 속된 것에, 계시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에만 존재한다” 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악마의 세계와 그리스도의 세계의 이분법이 금해졌다. 악마에 속하는 영역과 그리스도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움직일 수 없는 경계선을 정하는 것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전 세계를 화해시킨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세계는 그리스도와 악마에 의해서 분활 점유된 것이 아니며,그것은 세계가 인정하든지 말든지 전체로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와 세상은 별개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회퍼에게 있어서 교회란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와 화해 시키고, 또 하느님이 그의 아들을 주실만큼 세상을 사랑하신 일이 증거되어야 하는 장소로서 세상과 같은 영역 안에 있는 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교회와 세상이 한 영역 안에 있다고 해서 양자를 완전히 일치시키지는 않고 있다. “나를 따르라”에서 본 것처럼 교회는 여전히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사실상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그 예배와 교회 질서와 교제의 생활을 통하여 규정되는 일정한 공간을 점거한다. 반면에 세상 그 자체는 타락하여 자신의 근원인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로 향해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저항하고,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모든 적 그리스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아래 있는 것이다. 반면 교회는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과의 화해를 말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반항하고 있는 세상에 사랑의 현실을 알리는 장소로서 세상과 구별된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서 본회퍼가 교회와 세상의 적극적인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한 현실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결코 교회의 고유한 존재이유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세상을 위한 교회

방금 위에서 본대로 본회퍼의 “윤리”에 나타난 교회는 세상과 같은 영역 안에 있는 교회이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의 현실 속에 있는 교회는 무엇이며, 어떤 사명을 갖는가? 또한 이러한 현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갖는가? 다음은 이런 것들에 관한 고찰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과 세상과의 화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증거하는 곳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로 향해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저항하고,그것을 부정하는 세상에 대해 하느님과의 화해를 말하고 세상이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반항하고 있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현실을 명백히 표시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과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무엇(종교단체)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교하는 교회가 된다. 교회에 주어져 있는 위임은 선교의 위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교회 회중과 세계의 주님이며 구세주로 증거하고 그와의 사귐에 들어오도록 부름으로써 그 계명을 선포한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위임을 수행하는 데 봉사함으로써 세계를 위한 교회가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교회는 이중적으로 세상을 위해 있다. 첫째, 교회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화해를 세상에 증언하는 도구이다.

둘째, 교회는 그 화해의 현실인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장소로서 세상의 목적이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에 대해 이중의 대리관계(책임)속에 있다.

 

1)”윤리”는 1940년에서 1943년 까지, 즉 그의 정치 투쟁 시기에 여러 곳에서 썼었던 윤리학에 관련된 단편들로서, 1949년 베트게(Bethge)에 의하여 편집 출판된 책이다.

2)”옥중서간”은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1943년 4월 5일 비밀 경찰에 의해 체포된 이래 1945년 2월 까지 옥중에서 쓰여진 서신들의 모음집으로서, 1951년 베티게에 의해 편집 출판된 책이다.

3)박봉랑, “기독교의 비종교화”, P.347

4)손규태 역, “기독교 윤리”,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2), PP.166-167

5)한 편은 신적인, 초자연적인, 기독교적인 영역이고, 다른 한편은 세상적인 속된, 자연적인, 비기독교적인 영역이라는 개념(윤리, P.168)

6)위의 책, P.169

7)위의 책, P.170

8)위의 책, P.175

9)같은 곳

10)위의 책, P.173

11)같은 곳

12)위의 책, P.175-176

13)위의 책, PP.173-174

14)위의 책, P.174 

15)위의 책, P.174

16)위의 책, P. P.253

17)위의 책, P.256

18)위의 책, P.259

19)위의 책,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