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1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1학기

제목 기독교교육학 운영자 2019-03-072022-06-20 18:51
작성자 Level 10

기독교교육학

 

교육목회 

 

* 목회의 성서적 의미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양의 한계성

성도의 구원에 대한 한계성과 같음~ 목장으로 갈 길을 찾지 못함. 다른 환경으로부터 자기보호 상실

태아 세상 >천국

생명 출생 죽음 >지옥

천국< >세상

하나님 >예수님 >12제자 >목사

 

* 협력적 차원

동역자목동 목사 목동(?).협력자들동역자

* 예수님의 관점

> 파송

목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

 

*목회적 차원

ㄱ. 염소같은 맥에서 교육적 차원으로 양을 인식

ㄴ. 말씀을 통하여 이를 극복

ㄷ. 협력하여서 이를 극복...목사 장로 집사

 

*시편 73편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심

27~28 주를 멀리하는 자 주를 떠난 자(음녀같이)를 가까이하는 사람 망한다. 망한 자 내게 오라

과거 현재>천국(성공) 궁극적 복 천국으로 들어감

세상 삶 >지옥(실패)

다양한 메뉴를 통하여 성도들을 은혜로 이끌어야 함 & 시대상황을 철저히 분석해 주어야 함

NOW로 현재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THEN 따라서 적용해야 함

새벽기도~말씀 금요일~ 기도회 일요일저녁~축제

삼일~성경공부

큰 그릇으로 항상 경건한 생활을 통하여 성령이 쓰시도록 해야 할 것.

 

* 교회

 

루터와 캘빈의 교회는 성도의 공동체

교회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성결의 삶이 이루어 지는 공동체

그러나 현재의 교회는 주객이 전도된 것. 예수님을 따라 성결의 삶을 살아야 성도 임.

<교회>

모든 성도는 결국 교회 안의 유기체적인 지체가 되어야 함

캘빈의 교회모델.....유기체.....에수님이 머리 &성도들이 그 지체

많은 교인들 중 몇 명만 데리고 목회해서는 않됨.

 

* 교회의 활동

하비콕스....말씀선포 , 봉사, 친교(코이노니아)

칼바르트....선교,봉사, 친교......사랑의 차원에서

성서적 측면..마 28:18~20....교회의 본질

1.가라 

2.제자를 삼으라 전도 선교

3.세례를 주라. 

4.가르치라 교육 목회( )...양떼를 돌보라....하나님께

5.지키게 하라 친교,봉사,가까이 있게 하는것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말함

 

 

*교육적 목회

 

목적 ~요한복음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사탄)...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

예수.........생명을 더 풍성히 주려고

 

* 방법..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목사로써 받도록 노력 해야 함

행 2:37 마음이 찔려...회개, 세례, 죄사함 성령의 역사함

행 4:1~4 5000명이 회개 그러나 지도자는 받아들이지 않음

행 7:54~58 스테판이 설교...모두 거부

받아 들이는 교회...........좋은 교회

일부만 받아 들이는 교회....변화 가능한 교회

전부 거부하는 교회.........희망이 없는 교회

 

* 올바른 목회

교회를 세우고 생존케하며 개개인의 영적인 타락과 부패에서 삶을 보존시키는 성화와 훈련의 교육

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불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도록

골 1:6 신앙 성장의 윤리

복음 ....이르매(가르침) ....듣고 ....깨달은 삶....실천.....열매

맺고(성숙)자라게

참여할수 있는 장을 마련 ..보람을 느끼게 해줌이 바람직하다.

 

*인간성 회복

하나님의 형상 회복 그리스도의 인격

1.선교 2.교육 3.봉사 4. 친교

과학.... 원리 객관성 있게 이론화

신앙.... 과학화 절대 안됨

 

*오늘의 목회 현장

농경시대(문화)..오늘의 다원화 (산업화)세대에 적용이 가능한가 ?

목회방법 ......설교(목회)생활에 영향

신앙을 근거한 과학

과학으로 해결 & 신앙으로 해결

신앙을 과학화...> 신학.... 신앙을 바탕 위에서 신학

but 과학화 인간소외 & 비인격화

목사.....> 성도의 인격화 필요......책임과 관심이 필요

 

* 롬 14:17~18...연단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라

 

* 신앙 공동체적 교육이론

학교식 교육목회에서 공동체적 교육목회가 되어야 함

목사가 교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교회학교의 학교식 접근이 교회 교육의 협소화 시킴

L.O.Richards a teology of Christians Education 1975

교육 신학의 실제 문창수 역

* 교회론적 접근 ....교회구조 (조직)

 

세상적 조직 ...개별적 구조적 계층적

교회적 조직....유기체적 연관 ...관계성의 중요성 인식 해야....따라서 사랑이 필요

**목회 하는 사람들이 먼저 심령천국 가정천국 교회 천국을 이뤄야 함

Fomal Curriculum 보다 Hidden curriculum 이 더 중요하다.

 

* 요한 복음 21:15~18

인위적인 목회를 지양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 자세가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목회를 해야 .....특히 어린 양들을 가르칠 때 꼭 필요한 자세이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해야한다.

기성교회에서는 필레오의 사랑으로도 충분한가.?

신실하고 진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교육의 신학적 기초 

 

현대적인 신학적인 측면에서의 기독교교육의 교황에 대한 고찰 

 

교육목회의 회복 

 

실천신학: 아주 오랫동안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니나 190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현대신학의 한 흐름을 잡고 있다. 그 논점과 신학방법과 영향을 살펴보고 기독교교육을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할 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자.

실천신학을 논의하는 사람들은 패러다임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토마스 쿤이 처음 사용했고, 그 후 여러 학자들이 신학내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제 신학은 실천신학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하였다. 신학의 논지가 성서의 내용이나 주제를 다룰 것이 아니라 기독교 praxis를 주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골자였다. 기존의 실천신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방법론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음), 와 실천신학연구사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저자가 인용하는 글이 Edward Farley를 많이 인용함.( Theologia : 이 책에서 제일 처음 문제제기: 

ⓛ지금의 실천신학이 성직자 패러다임으로 함몰되어 있다고 함. 

②전문기능인으로서의 패러다임에 함몰되어 있다고 함.)

 

합의형성과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 신학이라고 하면 학문적인 전문가에서만 신학이 논의되었다. 평신도나 일반적인 삶과는 다른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실천신학은 신학교내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고 현장에 있는 성직자의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설교학이나 예전론을 논의할 때 성직자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목회상담은 목회자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 모든 것이 목회자 중심이었다. 작가는 여기에 대한 문제가 제기하고 있다. 신학이 어떻게 지금까지 변화해 온 역사를 다루자. (첫 시간 강의의 맥)

Theologia라는 말은 신자들의 삶 자체를 Theory와 praxis를 하나로 엮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평신도가 고뇌할 때 그리스도가 나에게 누구인가라는 것은 단지 성직자의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만의 신학적 논의거리가 아니라 온 성도의 공통된 고민이었다. 신학이란 말은 철학과 비교해볼 때 철학자(철학을 삶으로 하는 사람)와 철학가(철학의 삶의 도구로 삼아 생계로, 전공으로 하는 사람.)를 말하는 것처럼 신학적 전문가들은 신학을 전공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믿는 모든 사람들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에서는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는 신학이 있었다. 이런 초창기의 신학(경향성으로 하던 신학이)이 중세의 대학이 생겨나면서 전문영역으로, 그리고 경건의 영역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현대에 와서는 바뀌게 되었다. 대학이 생기고 일반학문의 분류방법이 신학을 다루는 주제에 따라 전공영역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자연과학, 사회, 인문과학으로 나뉘어지는 과정에서 신학도 학문 백과사전적인 형태로, 즉 삶의 문제를 연구하던 신학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대학의 분류방법으로 인해 전공분야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서학, 교회사. 조직신학, 실천신학의 4가지의 4중적 형태로 나뉘게 되었으며 초대교회와는 다른 신학을 정착시키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실천신학이 축소화와 전문화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우리 신학의 가장 큰 문제는 직제 패러다임 가져다 주는 폐해로써 축소화, 전문화되었다. 성직자의 하는 일로 축소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의 실천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평신도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은 신학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신학교가 전문인 양성기관의 구조를 가지게 되었고 오늘의 신학은 전문가 양성기관의 교과서를 준비하는 분야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 현장과의 괴리를 연결시킬 수 없다. 

 

신학적 성찰의 독특한 양식으로서의 실천신학: 

실천신학만이 교회실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본다.(축소화) 그것마저도 성직자의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문화된 신학의 분야로서의 실천신학의 등장을 6단계로 나누어 보고 있다. 

①사변적 신학으로부터 도덕적인 신앙의 분리: 로마 천주교 안에서 일어남. 개신교 역시 도덕생활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 대학내의 4중적 분류로서의 실천신학이 발전한 과정, 사변만 하다가 도덕적인 윤리적인 부분을 분리하면서 실천신학이 발원되게 되었다. 사변신학은 교의신학이 중심이었다. 교의신학만 연구되어 오다가 그 틀 안에서 나름대로의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사변신학에서의 분리였다. 

② 178p 실천신학에 대한 보다 풍부한 이해: 사변신학에서 도덕신학이 분리된 것은 1500년대이다. 1600중반에 활동한 보에티우스 라는 개혁교회신학자가 실천신학이 도덕과 양심만 다룬다고 하면서 도덕신학, 금욕신학( 경건의 실제) 교회정치로 확대하게 되었다. 1700초까지 폭넓은 이해가 발전되었다. 

③ 4가지 구분이 19세기에 아주 정착이 되었다. 4가지로 나눈 신학 속에서 실천신학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단일 학문으로 분리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지도력에 관한 실제적인 연구들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시도는 쉴라이에르 마하에 의해서 처음 시도되었다. 쉴라이에르 마허의 입장은 잘 이해하여야 한다. 그의 입장

대학에 신학이 왜 있는가? 의과대학은 왜 있는가? 의사를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신학이 대학교에 있는 것은 테크닉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4분야의 한가지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므로 3중으로 철학적, 역사적, 실천신학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하면서 실천신학에서 기술적인 문제로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4중적 분류가 그대로 있고 그의 개념이 4중적 개념 안으로 전이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실천신학은 전문가적인 기술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쉴라이에르 마허의 입장을 기술적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그래서 ④실천신학의 성직자화로 연결되어 진다. 실천신학의 성직자화가 거부되었다. 마허는 실천신학 안에서 목회자의 활동만을 다루지는 않았다. 실천신학에서는 비단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폭넓은 분야를 다뤄야 한다고 보았는데 신학교내에서는 실천신학과 목회신학이 동일한 것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실천신학이 또다시 기술적 패러다임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의 실천신학은 기독교 praxis의 기술적인 것을 다루지 않고 목회자들의 기능적인 것들만을 다루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어떻게 잘 수행할 것인가를 다루게 된 것이다. 

 

실천신학의 건설적인 제안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도를 제안

앞으로 실천신학이 나가야 할 방향은 성찰에서 시작되는데 실천신학이 다룰 것은 3가지이다. 

①실천적 도덕적 사고

②상황에 대한 해석

③구체적인 응답에 대한 교정

 

회중에 관한 논의가 많다. 막연한 교회의 개념보다는 회중을 사용한다. 기교에 있어서 최근에 회중의 구체적 모습을 탐구하려고 한다. 우리의 구체적 실천의 분야로서는 막연한 교회가 아니라 실제적 회중을 이해하여야 한다. 회중은 형태마다 다르다. 구성원과 역사적 상황, 지역적 특성이 다 다르다. 회중을 동일시하고 신학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회중 이해 없이는 실천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은사와 회중과 무관한 채 접근하는 것이 과연 실천신학으로서 옳은 것인가를 제기한다. 보편 타당한 신학이 우선이 아니라 회중이 우선이다. 

그리고 회중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회중의 주변기관과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실천현장을 중심으로 담화공동체 안에서 실천신학이 이루어져야 한다. 회중을 교육하고 실천적 사고로 이끌어내고, 회중이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이 Teaching Ministry의 목적이다. 오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Teaching Authority를 가지고 회중을 이끄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인들로 하여금 맹목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교인이 목회자 없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바가 없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결혼방식을 따라서 준비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사고하는 것을 할 능력이 없다 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키워주는 것이 바로 Teaching Ministry 인 것이다. 

 

실천 신학의 단계 

①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확인

②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에 대한 평가적 서술

③문제를 윤리, 도덕, 신학적으로 바로 분별할 신학적 기준.

④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한 과정을 아는 것

⑤구체적인 응답설정을 위한 준비.

 

앞으로 기독교 교육이 실천신학에 관하여 이루어나가야 할 방향들이다. 실천신학적인 성찰의 과정을 숙지시키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Teachable Spirit )라는 책을 중심으로 한 강의임. ( 8장의 한 부분임.)

 

요약과정리:

지금까지의 신학적 패러다임에서의 실천신학은

교회의 목회활동을 연구하고 다루는 것으로 , 교회활동이란 맥락에서 성직자의 활동으로 축소 이해되었다. 축소된 실천신학은 

①다른 신학분야(성서, 역사,교의, 조식, 응용)와 연역적 관계를 가짐.

②학문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기술로 이해되고 있음.

③실천신학이 성직자 개인의 praxis를 주로 다룸으로써 공동체의 praxis를 다룰 여력을 상실하였다.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신학부분에서 많은 대안이 나오고 있다. 그 중 시카고 대학에서의 Don Browning 이 말하길 실천신학은 하나님의 praxis를 실현하는 것을 모두 크리스챤 praxis인데 그 모든 것을 학문적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지금의 실천신학은 개인의 구체적인 기능을 준비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는 말하길“ 실천신학은 기독교 프락시스를 전통과 현재의 삶의 상관 관계 안에서 ......” 

 

실천신학

 

기독교 전통 삶의 경험( context) 일반사회과학의 도움.

기존의 신학. 기독교 프락시스

 

위의 도표를 상관관계방법론이라고 한다. 최근의 추구되는 신학의 방법이다. 

 

이런 흐름에 활동하는 학자들 

이런 실천 신학을 이해하면서 기독교교육을 다뤄야 한다고 주장.J. Fowler: 기교란 신앙공동체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신앙공동체의 프락시스에 대한 비판적 건설적 성찰이다. 이런 관념에서의 기교의 목적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현존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계 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사람을 형성하는 것이다. 즉 신앙공동체의 프락시스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것.

R. Osmen : 회중 안에서 그들의 프락시스의 성찰에 관해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이다. 

T.Groome :공유된 기독교 프락시스라고 부름.

 

기독교교육을 기독교 공동체의 프락시스를 다루는 것이라고 본다. 

특징: 

① 기교를 최근 논의되고 있는 실천신학으로 본다.

②기교의장을 회중으로 확대

③비판적 상관관계의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 어떤 교인을 만들 것인가가 원초적 고민이다. 위의 입장에서 교인이 능동적으로 프락시스에 참여하도록 스스로 고민하고 참여하는 교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교회에서와 삶의 현장에서 괴리가 생기는 이유는 이들의 관점으로는 실천신학적인 성찰의 능력이 없어서 이다. 오늘의 현대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삶 속에서의 닥치는 문제들을 전통과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해 나가느냐를 가르쳐야 한다. 

기존의 우리의 목회패러다임이 목양 이라는 관점에서 (목사는 목자, 교인은 양)이해 해왔기 때문에 목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자기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 해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설교에서 목사가 다루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가서 한국교인이 타협하는 이유는 교회가 훈련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며 교회가 그들을 그렇게 교육할 능력이 없다. 인간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이들이 교회를 등지게 된다. 교회현장에서 이것이 그대로 실천도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다. 

 

회중 형성과 변형을 위한 교육목회 커리큘럼

 

교회 교육을 위한 커리큘럼( Curriculum )이 최근에 들어와서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내지 공과 공부 교재와 관련된 좁은 의미의 개념을 넘어서 좀 더 폭넓은 광의의 개념으로 향하고 있다. 광의의 개념의 커리큘럼이란 교회 학교를 포함한 교회 전체를 ‘하나의 교육하는 기관’으로 보면서 교회의 여러 목회적 기능들을 교육적인 관점에서 구조화하려는 것이다. 교육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의 창시자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계획된 인간 교육의 통로이다. 따라서 교회를 위한 커리큘럼이란 인간의 의도적인 계획에 앞서 하나님이 설계하신 이미 교육과정을 지닌 교회라는 교육 공동체 인식에서부터 개념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말이 지닌 강조점은 우리가 만일 교회 교육을 위한 커리큘럼을 논할 경우 우리의 관심의 중심은 교회 학교내의 교육 프로그램의 보완이나 교재의 재편성 작업, 혹은 학습자료의 보완 등의 지엽적인 문제보다 이제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교육의 본질적 요소임과 동시에 이미 교육과정을 지닌 교회의 교육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교육 구조는 대체적으로 주일학교 교육과 성인들을 위한 목회로 이분화 된 행정체제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 교육을 위한 커리큘럼 이해는 일반적으로 교회학교에만 국한시켜서 거기 관련된 교육자료 개발에만 교육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다. 커리큘럼에 대한 최근의 광의의 개념은 21 세기의 교육 목회를 지향하는 오늘의 목회자나 교육 지도자들에게 적절한 도전을 주고 있고 동시에 교육하는 교회의 기본 틀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커리큘럼에 대한 광의의 개념에 기초한 이 책의 저자 마리아 해리스 ( Maria Harris )는 학교 교육의 커리큘럼과 교육의 커리큘럼을 구분해서 교회교육을 위한 커리큘럼을 ‘교회 생활의 전과정’으로 정의하고, 신앙공동체에 속한 구성원 ( 회중 ) 전체의 삶의 특징 ( 형태 )들이 커리큘럼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본서의 내용들을 소개하면 제 1 부 ‘정황’ ( The content )에서는 교회이해의 기초 위에 커리큘럼을 개념화하고 있다. 즉, 교회는 목회적 소명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이요, 동시에 교육적 소명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를 위한 커리큘럼이란 교회생활의 전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정리하고 있다. 제 2 부 ‘ ( The calling )에서는 교회 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여러 형태를 교육적 관점에서 구조화해서 목회 기능별로 커리큘럼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즉, 공동체가 지닌 공유성에 기초한 코이노이아의 커리큘럼, 예전에 관련된 기도의 커리큘럼, 가르침의 사역과 관련된 디다케의 커리큘럼, 복음의 선포와 관련된 케리그마의 커리큘럼, 섬김에의 봉사와 관련된 디아코니아의 커리큘럼등이다. 제 3 부 ( The Planning )에서는 2 부에서 소개된 다섯 가지 형태의 커리큘럼이 자리하는 기능을 교육실천으로 옮기는 계획의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의도성을 지닌 창조적 행위요, 일종의 예술적 작업으로 이해하고 해리스는 커리큘럼 작성의 한 모델을 다섯 단계 ( 생각하기 - 씨름하기 – 형태 짓기- 나타내기 - 풀어주기 )의 과정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 해리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빚어내는 데 기여하는 예술적인 교육적 작업으로서의 커리큘럼을 창출하는 문제를 탐색하고 있다. 즉, 이 커리큘럼 작업이 거룩한 일이요, 종교적인 일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인격적인 과정 가운데서 순간순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가정을 가지고 시작하자는 것이다. 해리스는 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하게 하고 성취하게 하는 창조적인 힘의 원천으로서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신다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붙들려 있고 아울러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가 그것을 위하여 부름 받은 목표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하게 이 책은 교회에서 활동하는 교육자들과 교사들, 그리고 교육 지도자, 교육 목사, 주일하교 교장, 또는 커리큘럼 입안자와 같은 직위를 가지고 있는 커리큘럼 계획자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에서의 교육이 사실상 교회의 전체적인 생활을 형성하는 사역활동이라면 이 책은 역시 교회의 모든 사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그 교회 사역이 기도 공동체든, 섬김이나 봉사활동이든 상관없다. 사실상 우리는 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설교자와 교사, 교역자와 평신도, 전문가와 비전문가, 파트타임 사역자와 전임 사역자의 경계선을 넘어서 함께 모이도록 부름을 받았다. 아울러 우리들 서로간에 그리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과의 협력관계 속에서 우리는 창세기에서 시작된 것과 동일한 창조사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만일 우리가 함께 모이지 않는다면, 교육하는 교회 생활의 많은 특징들과 아울러 그것에 의해 또 그것 안에서 기독교인의 소명이 습득되는 여러 특징들은 교육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도 않고 말해지지도 않거니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부요함을 발굴하지도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진지하지만 그러나 설계를 위해 이해할 만한 이론적인 기초로서 따라서 할 일련의 절차들로서 그리고 교회를 위한 커리큘럼의 신선한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교육목회에로의 길 

 

THE ROAD TO EDUCATIONAL MINISTRY

- Richard Rehfeldt- 

 

이 글은 저자가 목회현장에서 경험한 교육경험을 반성 평가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는 5년반 동안 Waverly, Iowa에서 교구목회를 한 후 스콧틀랜드의 성 앤드류 대학에서 2년반 동안 실천신학을 연구했다. 공부하는 중 하절기에는 루터교회의 임시직 목사로서 목회하기도 했다. 이 때 그는 그의 지난 목회를 회상하며 교육목회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 등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나는 애초 우리와 같이 목회에 있어서 목회자의 모든 행동이 다 교육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리그마(Kerygma)와 디다케(Didache)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세례,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등과 같은 교역활동에 있어서 사제적인 기능들 모두 광범위한 의미에서 교육일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유아세례를 위한 부모교육, 견신례를 위한 고등학생들의 학습모임,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를 찾도록 토론그룹등을 형성하여 운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목회 활동들에 

포함되는 교수활동(teaching) 은 사람들로 하여금 창의적으로 사고하도록 고무시키는(enabling) 것이며 이런 것을 교육목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지배하고 있던 바 교육목회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을 아래와 같이 두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목사는 그의 전체 목회에 있어서 열정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과 

둘째, 목사는 모든 교수활동에 있어서 학습의 분위기를 재미있게 해야 한고 믿는 것이다. 열정은 목사가 그의 과제들을 수행함에 있어 말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목사의 열정은 그의 교수활동에 있어서 교인들의 열정을 끌어내게 한다고 믿는다. 열정은 사람들을 소심증에서 해방시켜 다양한 경험의 세계로 나오게 하고 활발한 리더쉽을 가지게 한다. 실제로 교사훈련을 받던 한 주일학교 교사가 내게 말하기를 나도 당신처럼 열정적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열정은 학습자로 하여금 재미를 가지고 배움에 임하게 하는 요소라고 믿는다. 내가 나의 전 목회를 통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사가 할 일이란 모든 학습상황에 있어 좋은 감정(good feelings), 친근감(friendness) 그리고 재미(joy)를 최대한으로 조성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사고는 점차 다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변화되어왔다.

 

1.강의하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From Lecturing to Listening)나는 신학교 신입생 시절에 학교에서 배운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흥분을 느꼈고 내가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교회에서 27명의 세례 받는 교인들을 가르치는 일에 참여했다. 나는 나의 강의 방법으로 교인들을 5,60분 동안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대단한 기쁨과 긍지를 느꼈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강의를 하는 동안 많은 유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 등 교회에서의 나의 교육활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문제와 이슈 그리고 주제들에 대해서 자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서히 나는 교육목회에 있어서 목사의 주된 기능은 듣는 것이며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듣도록 고무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상처와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가 무엇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내가 이끄는 그룹과 나의 가르침 사이의 간격이 점점 밀착하게 되었다. 그러자 한 사

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 설교와 그 토론은 바로 나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점차로 강의하는 것으로부터 듣는 것으로 전향하게 되었고 목사로서의 나의 역할은 학습분위기를 인간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독교교육은 인간중심(person-centered) 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습자의 정신 뿐만아니라 전인이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경험들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부터 나는 교육목회에 있어서 수용과 개방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서로 조우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 중심이 아니라 서로 대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루우엘 하우(Reuel Howe)의 대화의 기적(The Miracle of Dialoge)이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그것은 내가 목회에 있어 대화적인 자세를 가지도록 도와주었다. 마침내 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감정과 어떤 주제들에게 대한 그들의 개념(Ideas)을 스스로 평가해보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학생들이 그들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도록 도우려 하는 것이다. 

나의 학생들은 그들의 진지하고 생동감 있는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주간 또는 여러 달 동안 교실에서 또는 그들의 집에서 그리고 때로는 주말의 토론회 등을 통해서 서로 배우려고 애썼다. 그 결과 서로 신뢰하게 되었고 그들은 점점 더 쉽게 그들의 감정 깊은 곳에서 부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율학습방법(listening method)은 강의식의 접근법보다는 다소 느슨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들 스스로 문제들과 씨름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 전체가 학습의 장이 되게 할 수 있다. Paul Tillich는 말한 바와 같이 오직 복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을 물음으로써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2.일방적 강의에서 인격화하는 것으로의 변화(From Propound to Personalizing)

이전에 목사로서의 나의 할 일은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많은 것들을 교인들에게 주입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자율학습법으로 전향해가면서 나는 예수의 복음을 인격화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강단과 강의안을 치워버리고 내 학생들과 원탁에 둘러 앉아서 또는 그들의 거실에서 또는 야외의 모닥불 둘레에서 또는 성가대에서 팝콘을 먹고 콜라를 마시면서 인격 대 인격으로써 상호작용하는 대화와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특별한 교육상황에 있어서 목사의 역할이란 말과 제스쳐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배우고 우리의 매일의 삶에다가 우리 신앙의 진리들을 적용하기 위해서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소극적인 참석에서 참여에로(From Attending to Participating)

목회 초기에 나는 예배와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교인 수에 집착해있었다. 그러나 자율학습법을 택한 후에 나는 점점 더 교인들이 교육에 있어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애초에 나는 교인들이 그들의 지도자인 나와만 상호작용을 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서로 배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Paul Tillich는 말하기를 적극적인 참여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의사소통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나는 그룹을 소그룹으로 나누어 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도우고 있다. 그룹을 소그룹화하면 사람들은 더 적극성을 가지고 서로에 대해서 알려고 하게 된다. 여기서 목회자가 할 일은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리더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깊은 의미연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창조적으로 그리고 희생적으로 참여하면서 그들의 삶의 경험을 기독교적인 용어로써 해석하도록 촉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가르치고 인도할 뿐 아니라 예배 속에 평신도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성공회에서 예배시간에 평신도들이 참여시키는 것에 대해서 연구해보았다. 나 역시 그들을 성경봉독과 설교하는 일과 예배를 인도하는 일 등에 참여시켰다. 

 

4.기억하게 하는 것에서 사고하게 하는 것으로 (From Remembering to Thinking)

나는 교육목회에 있어서 목사가 할 일이란 교인들로 하여금 많은 사실들과 행동의 규범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사고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할 수 있는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교인들의 마음이란 채워져야 할 창고가 아니라 사용되어져야 할 도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또한 나는 교인들의 사고를 촉발시켜줄 기회들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성인 그룹들과 함께 기독교 윤리의 이론을 연구할 뿐 아니라 낙태,사면,그리고 혼혈결혼 등의 문제를 가지고 서너시간 씩 씨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방법은 기억학습법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서 얻어낸 그들의 견해는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욱 더 의미깊은 것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5.소극적인 수용의 자세에서 적극적인 행동으로 (From Absorbing to Acting)

목사는 교인들을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행동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것은 내 개인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교육목회분야에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은 교인들이 사건과 경험들을 기억하게 하고 사고하게 하고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경험들과 감정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어떤 평신도는 가끔 예배가 끝난 후 내게 와서 반복해서 듣는 설교지만 좋은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그 설교의 말씀처럼 행하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그는 토론 후에나 사고를 촉발하는 영화를 본 후에 내게 와서는 나는 우리가 그 영화에서 보고 그것에 대해 토의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은 너무 완벽하게 그 상황에 맞도록 셋트화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것으로 그의 태도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 

그 평신도가 회의주의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에게 실제적인 문제에 관한 도전을 받게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교인들은 청중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어 변화된 태도와 행동으로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 교인들의 행동의 변화는 재촉할 수 없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문제해결 그룹들을 형성하고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당면한 주제들을 주고 씨름하게 하는 동안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6.행동을 주도하는 것에서 행동의 촉발자로 (From Doing to Enabling)

목사는 자기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로 하여금 교역에 구체적으로 참여하게끔 촉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목사가 팔을 걷어 부치고 설치면 그의 교인들의 비젼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목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의 교역에 참여하도록 고무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시내로 외출을 나가는 동안 봉사의 일을 평신도에게 맡기곤 하는데 그 때 그는 그 일을 썩 잘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경우에도 그 평신도는 성경봉독 등의 일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와 같이 나의 자리를 성도들에게 내어주었다. 내가 인도하던 성경공부그룹에서도 평신도들은 내가 없는 동안 나의 직무를 맡아 썩 잘 수행하는 것을 보았다. 

주일학교를 이와 같이 활성화하기 위해서 나는 Open Space Program을 실시해보았다. 이것은 칸막이가 없는 넓은 공간에서 여러 조의 문제해결 그룹을 테이블 별로 나누어 앉히고 각 조별로 자유롭게 문제 해결을 위한 토의를 자유롭게 진행한 후에 각 조의 대표가 나와서 자신들의 토의 결과를 이야기 형식으로 또는 드라마로 또는 신문기사처럼 또는 시로써 발표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열정적으로 고조시킴으로 즐거움을 조성할 수 있고 적극적인 참여와 리더쉽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 또 지도자는 전체 학습의 장과 다양한 타입의 프로그램 진행방법

을 관찰할 수도 있다. 

 

결 론

 

1)목사는 위와 같은 교육목회를 할 때 목사의 가르침의 내용들은 교인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 있고 목사는 교인들에게 더 깊은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목사가 위와 같은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재능과 창의성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목사의 역할은 평신도 지도자와 학생들의 재능과 잠재적인 지도력이 계발되는 방향으로 그들의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2)목사는 행동의 주체자가 아니라 촉발자가 되어야 하고 리더쉽을 기꺼이 나누어야 한다. 

3)목사는 그의 교역에 대한 평신도의 평가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4)목사는 교육목회의 결과로 그가 배운 점에 대해서는 교인들에게 솔직하게 감사를 표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목사 역시 기도의 필요를 느끼는 죄인으로서 교인들과 함께 순례하는 삶을 사는 자임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5)목사는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과 선포 사이에서 창조적인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당면한 문제들에 치중하다가 보면 교인들을 주이신 예수의 가르치심 앞에 직면하게 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6)목사는 교육목회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이 항상 변화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변화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이 그의 전 목회과정 속에 항상 동행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교육목회에서 그의 안내자로 현존하시며 목사는 여전히 목회의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I know I haven)는 것을 깨닫는 믿음이다. 

 

소그룹활동과 교회목회 1

 

. 서 론

 

A. 연구의 의의와 목적

1884년 알랜과 언더우드가 한국에 개신교의 문을 연 이래 한국의 개신교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큼 부흥을 거듭하여 왔다. 1900년에 18,081명이었는데, 100년만에 1,000만을 돌파했다.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 그들이 연구할 모델로 주목하고 있을 지경이다. 그러나 수적인 성장의 모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바람직한 교회로서의 모델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부흥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내부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부정적인 요소가 많다. 교단 간의 분열과 반목, 각 교단내의 불협화음과 교권주의, 각 교회의 경색되고 일방적인 의사결정, 또는 교회 원로들과 지도자간의 반목과 불신, 교회의 거대화로 인한 인간관계의 공동화 현상과 교인들의 일요일 신자화, 그리고 교회 일각의 신비주의적 열광과 교육 부재로 인한 이단에 대한 무방비 상태 등 많은 문제와 과제가 표출되고 있다.

 

또한, 한국에 기독교인이 1,000만을 넘는다고 자부들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빛이 사회를 비추지 못하고, 기독교의 소금이 사회의 부패를 치료하기는커녕 방지하는데도 너무나 무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 교회가 성장하는 데만 주력하여 수적인 동원은 이룩했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오

는 결과이다.

 

교회 안에는 세상 앞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가식적인 교회인 99%의 평신도가 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생활현장에서 자기의 삶을 통해서 구현할 수 있어야 교회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을텐데 방치되어 있다. 또한 교회는 이들이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다. 이 몸은 유기체로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이 회의 지체들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림으로 유기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았다. 결국 교회가 갱신되려면 교회의 지체들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효과적이면서도 교회의 본질에 적합하게 교인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게 할 수 있는가? 소그룹은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을 수용할 수 있는 기초구조로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소그룹은 교회로 하여금 가장 신속하게 교회의 본래

적 기능을 회복하는데 최선의 구조이며, 교회 운영에 있어서도 소그룹이 본단위로서 교회의 모든 사역의 근간이 될 때, 교회의 본래적 기능이 회복될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소그룹이 교회에 없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구역, 남여전도회, 위원회 등의 소그룹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조직체계는 있다. 하지만, 단지 기능적으로 대그룹을 축소해 놓은 정도에서 머물고 말았고, 소그룹으로 발휘될 수 있는 자유성이나, 역동성, 개체 간의 활발한 상호관계가 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형태만이 아닌 기능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소그룹의 특성이 충분히 채용되는 소그룹 운동이 필요하다. 이렇게 될 , 소그룹은 교회를 갱신시키는 도구이면서, 갱신된 모습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교회 갱신운동은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열의를 가지고 시작되었고, 기독교 운동의 진수를 찾아내려는 목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갱신운동자들이 취했던 형태는 소그룹으로 부터 시작된 기도와 교제와 훈련이었다. 이 연구는 왜 소그룹이 교회갱신을 위해 적합한 구조인지를 밝혀 보려는 작은 노력이다.

 

B. 연구의 방법과 진행과정

 

본 연구는 교회갱신이라는 목적을 지향하면서 과연 교회갱신을 이룩할 수 있는 도구가 무엇이겠느냐 하는 전제를 근간으로 그 도구를 여러 문헌에서 추적하여 밝혀 보려는 시도이다.

 

서론에 이어 2장에서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어원에 근거하여 정의와 본질을 신약교회에 나타난 교회의 유형을 통해 살펴보고, 한편으로 교회의 갱신의 의미와 방향을 교회의 본질에 비추어 제시하고자 한다.

이어서, 이러한 교회의 본질에 맞는 갱신의 도구로서의 소그룹의 특성을 소개하려고 한다.

 

3장에서는 소그룹이 교회에 적용될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더불어 성서적인 근거를 제시할 것이며, 4장에서는 소그룹의 활동에 대한 것을 발전단계, 구성요소, 운영방법, 지도력에 대한 것들을 중심으로 연구해 나갈 것이다.

 

5장은 소그룹의 어떤 성격이 교회갱신에 유용할 것인가를 조직적인 면에서 , 교육적인 차원에서, 공동체 의식이란 측면에서, 그리고 구체적 선교를 위한 출발점이란 측면에서 연구해 보고자 한다.

 

교회와 갱신

 

A. 교회의 어원적 고찰

 

요즈음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폭넓게 거론되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세속화되어진 모습, 그리고 역사와 더불어 구조적으로 갱신된 전통적 교회를 원초적 교회의 형태로 복귀시키려는 운동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갱신을 논하기에 앞서 성서적인 교회관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서 형성되어진 기독 공동체에 대한 명칭으로 신약시대부터 사용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불가분리의 관계성을 고려할 때 , 신약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약의 용어를 살펴봄이 바람직하다.

 

교회라는 낱말에 해당되는 구약성서의 용어에는 카할(qahal) 과 에다(edah)가 있다. 전자의 어근은 '부른다'라는 어근을 가지고 있고, 후자는 '지명하다', '택한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용어가 처음부터 공동체를 부르기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구약시대 전반에 걸쳐 유대

인들을 독특히 종교적 공동체로 부르기 위해 어떤 특별한 용어를 사용할 것은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이란 명칭 자체는 종교적 명칭으로서 주로 언약한 백성을 의미했으며, 결코 국민 또는 민족적 그룹을 의미하지 않았다. 생활경험 이후 국가가 파멸되고 또 많은 유대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게 되면서 부터 히브리용어인 '카할'이 종교적인 의미를 얻게되었고, 특별히 예배를 드리거나 율법을 듣기 위해 모인 유대인의 성회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즉 '카할'은 단순히 유대인이나 유대사회와는 구별되게 계약에 충실한 백성들의 모임을 나타내는 말로 정착된다. 이러한 '카할'의 언어적 특성은 자연히 '남는자' 사상으로 우리의 관심을 이끈다. 왜냐하면 '남는자'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배반과 타락에 물들지 않은 경건한 소수의 하나님의 백

성들이기 때문이다.

 

남은자에 대한 구약성서의 언급은 주로 예언자의 글에 언급되어 있으며 (사1:9, 7:9, 6:7, 14:32 ; 습3:12-15, 학1:12-14, 슥8:6, 스9:8, 14-15,느1:2-3 ), 중간기 유대교 묵시문학에 까지 계속되었다. 남은 자에 대한 사상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서 피할 길을 얻은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사명을 가진 공동체로서 보호되어 남겨져 하나님이 그들을 중심으로 의로운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 여러가지의 역경을 무릎쓰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남는 자로 생각하게 되었고, 교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카할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담아 '에클레시아'란 말로 번역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공동체는 결국 의식적으로 그들 자신을 히브리적 유산과 관련시키면서도 유대적 예배 공동체들과 구분하여 '에크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유대적 예배 공동체는 '에다'란 말을 제한시켜 유대인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와 건물을 의미하도록 하여 '시나고그'로 사용하였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건물과 장소를 포함한 교회보다 경건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거룩한 장소 보다는 거룩한 사람이란 사상이 나올 수 있게 되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B. 교회의 본질

 

앞에서 교회로 번역된 용어에서 교회의 모임에 대한 성격이 강조되었던 것을 살펴 보았다. 이 장에서는 ' 에클레시아 '가 지닌 교회의 본질적인 면을 성서적 측면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 '에클레시아'란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공식문서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번째 편지(살전1:1)에서 이다.

 

본래 이 말은 성서적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내용을 내포한 교회로 사용되기 전에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사용 되어졌던 용어를 바울이 전용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군주를 선택하고, 정치적인 결정을 추인하거나 사법적 차원의 탄원을 듣기 위해 모인 시민전체의 회합을 지칭할 때, '에클레시아'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유래를 거쳐 이 용어는 '집회의 의미'로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신약교회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낱말로 자리잡게 되었다.

 

1.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란 은유적 표현으로 교회의 본질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 안에(살전1:1), 그리스도와 함께(롬6:1-11), 그리스도와 연합하는(갈3:27), 그리스도의 지체(고전6:15) 등등의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용어와 표현이 의미하는 교회의 본질은 주로 교회의 통일성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린도 전서 12:27에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많은 지체들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지체는 하나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

일한 획일적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은사를 통한 조화로운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다양한 은사가 전체의 몸과 조화를 이루어 상호봉사를 함으로 일체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지체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에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지, '몸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머리인 그리스도가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생명과 의지를 부여하며, 하나의 유기체로서 모든 지체를 연합시킨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란 개념을 더 확대하여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보이는 형태로 나타났다

고 보아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존재론적으로 연결시키는 도식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구성된 지체를 그리스도의 신적인 몸과 동일시하는 관점으로 교회를 절대시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것은 교회의 중심이 지체가 아닌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어야 하며, 지체는 머리에게서 생명력을 부여받아 다양한 은사를 통하여 봉사하는 구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성서의 기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사건을 구약시대에 야훼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성취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 백성, 곧 독특한 임무와 주체성을 가진 새 공동체가 되었고, 예수도 추종자들은 새 이스라엘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의도적으로 열두

제자를 택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고, 모세의 언약과 율법을 토대로 새 계명을 주었다.

 

이러한 의도는 예수 부활 사건과 펜테크스트 사건을 기점으로 낡은 율법시대는 지나고, 복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 주었다. 이들은 새 시대에 적합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새 공동체가 곧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믿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면 누구든지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이스라엘, 곧 새 이스라엘이다.

 

새 이스라엘은 외면적 유대인이 아닌 내면적 유대인으로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따라서 할례는 육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가 된다.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 곧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교회가 새로운 계약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콘첼만은 초대교회와 관련하여 교회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존재로 인식하는 동시에 세상 안의 존재로 이해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부탁하신 말씀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거룩한 자들, 선택된 자들,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어 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 바로 신앙에 의하여 결정되며,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때에 진정으로 새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서 성전을 구별하여 거룩성을 부여하였다. 더구나 지성소는 제사장들도 철저하게 예전을 갖춰야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으로 구별되어 거룩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 가려졌고, 자신의 몸을 성전과 동일시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단번에 드려짐으로 더 이상 다른 희생 제물도 필요없게 되었고, 따라서 더 이상 희생을 드릴 거룩한 장소도, 거룩한 제사장도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성전은 신자들의 공동체로 그 의미를 건네 주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2장 21-22절에서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바로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지어졌던 것이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인들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은 더 이상 건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 '성령의 전'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 벌콥은 그 의미를 교회가 거룩하여 그 무엇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근거가 제공된다.

 

이러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로마 천주 교회는 거룩성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두며, 현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넘겨준 신적 권위를 받아 지상에 완전한 신적 사회인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미하는 성례전을 집행하므로 교회 자체가 거룩한 기관이 되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부여받은 신자들은 성화되고 신화된다고 하여 교회가 거룩성을 위임받은 것으로 주장한다 또한, 동방교회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사상에서 거룩성의 근거를 빌려온다.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며, 따라서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완성되고, 예전을 통해서 신도가 신과 하나가 되어 신적 존재가 된다 고 하여,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존재론적으로 연결시켜 교회의 권위를 절대시하려 한다.

 

하지만 교회의 거룩성이 과연 어떤 유형적 기구, 제도, 조직이나, 또는 교회가 신성하고 구성원이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요, 합리화이다. 성서는 교회가 성스러운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하지 않는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며, 교회가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 속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또한 신자가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성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교회는 결코 개개인의 신자가 아닌 구체화되어 있는 살아있는 전체 공동체의 유기적인 통합이 거룩한 성전인 것이다.

 

4. 교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구약성서에서는 신약성서가 뜻하는 교제에 해당하는 개념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신을 지극히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신과 대화하거나 교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독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제는 수직적이면서도

수평적인 교제를 의미한다. 수평적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상대로 가지는 수직적인 교제가 전제된다는 측면에서 구약적 회합,회중의 의미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된다.

 

코이노니아를 제공하는 기본적인 내용은 수직적 차원으로 성령의 사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코이노니아는 연결하여 상합하여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움으로 성령 안에서 주신 개인적 은사를 이 땅 위에 나타내는 몸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사를 나누어 가질 뿐 아니

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죽고, 부활하고, 영광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또한 그의 것을 우리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성령의 교제를 다섯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깊은 교통의 경험이며, 초자연적인 상호교제의 체험으로서 성령이 주시는 신자들의 사귐이며, 둘째로 성령의 교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셋째는 초대교회의 영적인 환경과 분위기로서의 사귐이며, 넷째는 하늘에서의 영원한 교제를 맛본다는 지상적 모형으로, 다섯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동일성과 사귐, 그리고 상호 교통과 흡사한 형태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안에서 장차 누릴 사랑의 교제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체험하며, 그의 능력으로 부여받은 은사를 함께 연합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5. 증거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그 자체가 교회의 존재와 활동이 지향하는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땅의 모든 족속과 만물을 지향한다. 본래 제자들은 처음부터 교회를 형성할 생각은 없었다. 유대인으로서 '쉬나고그'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로부터 분부받은 모든 족속에게 가서 예수의 증인되라는 명령이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하게 되었고, 이 공동체는 결국 확장되어 증거하는 공동체로서 자신의 목적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수단으로서 쓰임 받는 것이다. 교회의 내적 기능은 오직 교회에서 부여된 임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교회는 이 기능을 제자를 삼아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더 나아가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새로운 표현인 그리스도의 몸의 산 세포가 되어 재생산을 통해 교회를 공적이며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도록 하는 계속적인 순환을 지탱하는 것이다. 고로 교회의 내적 기능과 외적 기능은 불가분리의 관계이지만 교회의 지향점은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입이 열려 있다.

 

C. 교회의 갱신

 

1. 교회 갱신의 개념

 

갱신이란 말의 어원은 '일신', '부활', '재생'의 뜻이었으며 일반적으로는 '다시 새로워진다'는 변화가 그 의미이다. 이 말과 유사한 언어로는 개혁이란 용어가 있는데, '다시 모양을 갖춘다', 다시 새롭게 뜯어 고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갱신이란 말이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구조와 제도를 그리고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 버리는 혁명과 혼돈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해둘 것은 교회 갱신은 이 모든 체제를 뒤집어 엎는 혁명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새롭게 하여 본래적인 교회, 성서에서 보여주고 제시하는 교회다운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인 것이다.

 

갱신이란 말은 개인적으로는 중생을 생각하게 되고, 중생을 기초로 하는 영적인 힘의 회복을 상기시킨다. 즉, 한 개인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새로운 존재가 되어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 가므로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으로 교회적 시각으로 보면 갱신된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따라서 갱신된 사람에서부터 교회 갱신은 시작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사람을 갱신시킬 수 있는 체제와 구조를 도모하는 것이 갱신 운동의 구체화라고 볼 수 있겠다.

 

교회 갱신이 개인적 회심에만 집중이 되면 갱신 운동이 지속될 수가 없다. 반면에 갱신을 위한 구조적 개혁 체제의 변화에만 주목할 경우에는 소리만 크지 실제적으로는 갱신과는 거리가 먼 과격한 구호로만 끝날 공산이 크다. 이런 점에서 갱신은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어야 하며

성서 속에서 그 모델을 발견하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신약 성서가 보여 준 교회는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공동체에 속하고 계속적으로 확산되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장에서 살펴본 교회의 본질에 비추어 교회 갱신을 모색해가야 할 것이다.

 

2. 교회 본질에 기초한 갱신

 

교회 갱신의 기본 형태는 성서의 원칙으로 돌아 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 신앙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화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교회로부터 물리치고 없애버려야 하며 성서에서 이탈한 것은 성경에 있는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교회 갱신 운동은 먼저 자기 시대의 교회가 성서에서 이탈되어 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갱신의 욕구가 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교회의 상황을 성서에서 말하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갱신되어야 할 당위성을 밝혀야 한다.

 

앞에서 고찰했던 것처럼 첫째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새 이스라엘이다. 옛 이스라엘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다. 옛 이스라엘은 계약 백성으로서 계약에 충실치 못하였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아니하였는데 반해 새

이스라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였다.

 

새로운 이스라엘에 참예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계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의 모습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비교해 보자. 죄인이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 감격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교회 구성원 중에 거듭난 신자가 10% 내외라 하는데, 이래서야 교회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라고 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세속적이며 명목상의 신자가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더 이상 구속의 희열이 두드러지게 체험되지 않는 상태라면 교회의 갱신은 필연적이다.뿐만 아니라 세상 속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하면, 본질적으로 교회는 갱신되야 한다.

 

둘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이 각기 성령을 통하여 받은 은사를 다양성 있게 발휘하며 한편, 전체의 교회의 몸과 일체감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교회가 극히 소수의 교역자나 몇몇 신자들만이 자기의 역할을 할 뿐, 대다수의 평신도가 교회의 객체가 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생명력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 모두는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있다.

 

이 소명을 위해 성령은 각자에게 적절한 은사를 주어 몸의 지체로 기능을 다하게 하시지만 평신도들 대부분이 교회 조직상의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통상적인 봉사활동을 하는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는 그들혼자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원하다. 교회 갱신은 바로 이들을 깨워 그

리스도의 참 지체로서 활동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교회는 또한 그 안에 성령이 임재해 계시기에 하나님의 성전이다. 여기서 성전의 개념은 건물이나 장소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거룩한 공동체로서 성전인 것이다. 이런 교회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현재의 교회는 날로 건물 확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모임과 건물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건물 자체에 거룩성을 부여할 수 없다. 건물 중심의 교회는 활동성이 없고 융통성이 없이 경직되어 있으며, 친교가 부족하고 또한 자만심과 계급의식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굳이 거룩성을 건물에 부여하려 하기 보다는 기능적으로 이해함을 통해 생동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건물이란 수단이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지, 맹목적으로 숭배한다면 그것은 건물 우상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보라 얼마나 많은 교회가 건물에 치중함으로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있는가? 이제 교회 건물도 교회의 사명을 저해하지 않는 정도에서 건축되어야 할 것이며, 그 건물 구조도 기능적으로 설계를 함으로 교회의 본질을 세우며, 그 사명을 지지해 주는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신약 교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본질은 교제 공동체이다. 이 교제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로 하늘나라에서 맛볼 교제의 모형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이 친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단지 비인격적인 기구처럼 보일 뿐이다. 일주일

에 몇 번씩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리지만, 교제를 나누고 사랑의 입맞춤을 할 수 없는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앞을 향해 도열된 의자에 앉아 예배 참석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할 뿐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뜨거운 교제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사랑'이란 개념이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사랑'에 대해 아무리 주장하고 외쳐도, 그것을 듣는 성도가 어쩔 수 없는 비인격적인 구조에 얽매여 있는 한, 대그룹 모임 속에서 방관자가 되어 있는 한, '갱신’은 불가능하다. 반드시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갱신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목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될 때, 교회의 갱신은 온전한 갱신이 될 것이다. 교회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소금이란 기능이 뿌려지고 녹아지는 것처럼 교회는 모였으면 반드시 흩어져 증인이 되야 하는 것이다. 뭉쳐진 소금,녹기를 거부하는 소금, 맛을 내지 않는 소금기둥은 아무 쓸모없어 밟힌다.

 

오늘날 신자들은 혹 뿌려지기를 두려워 하거나 몇 푼의 선교금을 집어주는 정도에서 뿌려졌다고 자부하고 있진 않는가? 이름은 여전도회, 남전도회인데, 그들의 모임이 전도와 전혀 상관없는 사업만을 계획한다든지, 탁상공론만 하고 있진 않는가? 그래서 다시 사명감 없이 세속의 일원으로 돌아가 전도는 고사하고, 세속의 물결에 빠져 세상에 파송 되어진 교회로서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다면 교회는 증거 공동체로서의 철저한 반성과 더불어 갱신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3. 갱신의 도구로서의 소그룹

 

이제까지 교회의 언어적 정의와 교회의 본질에 근거한 교회 갱신의 필연성을 역설해 왔다. 그럼 그러한 갱신을 가능하게 해 주는 구조가 갱신의 의의를 지지해 줘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갱신에 적합한 구조는 무엇이냐? 소그룹이 그와 같은 교회의 본질을 찾는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본다.

 

교회를 바르게 운영해 보려는 많은 사역자들이 소그룹이란 환경을 통하여 제자를 만드는 평신도 개발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와 같은 현실교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가장 정확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소그룹이라는 형식을 빼놓고는 우리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그만큼 신속하게 교회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각박함과 권태로움을 극복하고 순수한 교제를 회복하는 길은 기독교적인 소그룹을 만드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소그룹이 어떻게 역할을 하는가? 먼저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새 하나님의 백성이다. 옛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에 있어 반드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결코 일시적이어서는 안된다. 한결같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변화와 성숙을 사도 바울은 소위 '세워지는 것' , 즉 인격적인 상호작용인 코이노니아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서로를 돌아봄' 즉 상호 격려를 통해 신앙의 진보와 관련시키고 있다.

 

이런 친근하고 개인적인 상호작용은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 한번씩 만나는 모임을 통해서는 실행되기가 어렵다. 작고 아늑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소그룹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도 그렇다. 교회 구성원 전체가 자신의 은사를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는 구조 역시 소그룹이 적합하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소그룹은 공동체를 이룩하고 영적 은사를 일깨워 주며 이들의 구성원을 훈련시킬 수 있는 상관성을 제공하여 준다. 그러한 소그룹들의 결과로서 교회라는 큰 공동체가 조화되고, 그렇게 함으로서 평신도는 교회에서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고, 사역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어떠한가?신자의 공동체로서의 성전, 신령한 집을 세우는데 있어서 그 기초와 벽돌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집으로 지어지지 못하고 주일마다 한번씩 벽돌더미가 되어지는 교회를 신령한 집으로 만들 수 있는 체계가 무얼까?

바로 소그룹을 통해서 벽돌더미는 신령한 집으로 지어질 수 있다. 단지 건물은 이 소그룹이 모여 교제하고, 성경공부하고, 예배하며, 선교의 시발점이 되며, 양육지가 되야 할 것이다. 이런 방향에서 건물은 고려 되어야한다.

 

또한 교회가 교제하는 공동체로서 갱신되는데 있어서는 더더욱 소그룹의 구조를 채택해야 할 것이다. 성령과 인격적인 교제를 체험하고 신자 상호간에 성령의 교통하심 속에 진정한 나눔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구조는 소그룹일 수 밖에 없다.일종의 무리가 되어있는 대그룹의 모임 속에서는 '온전하게 매는 띠' 가 형성될 수 없다. 강단 앞에 무더기로 앉아서 쳐다만 보는 대그룹적 모임 만으로는 지체들 간의 협력과 돌봄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친교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갱신되려면 성령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충분히 비형식적이며, 친근한 구조가 되어야 한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성령의 친교라는 사상은 교회가 

(1)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어야할 장소를 마련하고, 

(2)상호 의사소통이 활발히 진행되며,

(3)비형식적 분위기가 성령의 자유를 허용해야 하고, 

(4)직접적인 성경연구가 주축이 되어야 하는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표준들의 장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소그룹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증거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적절한 구조로서 소그룹의 타당성을 살펴보자. 오늘날 교회에서 붐이 일고 있는 것이 선교운동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도를 선교로 대체해 버리려는 저의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운동의 조류에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도에 대한 설교는 대단히 매력이 없는 주제로 취급 받지만, 선교는 그래도 인기가 있있다.

 

여기에는 주님의 대명령을 경제력으로 떼우겠다는 물질주의 속성도 작용하고, 한편은 주님의 대명령을 지원하는 자리에서 머물겠다는 선교에 대한 소극적 자세까지도 합세한 행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주님의 대명령은 분명히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끝까지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때, 우리의 예루살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구조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가정 소그룹 모임인 것이다.

 

가정은 세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세상이 교회를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정 소그룹 모임의 일원들이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봉사하는 일에 총동원될 수 있고,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 사랑을 나누는 생동감이 넘치는 삶으로 이끌어 준다.

 

이 전략 요충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어디를 공략하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얻는 길은 거대한 조직체가 아니라, 수많은 가정 소그룹이 계속 생겨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그룹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새 백성의 모임으로 변화시키고 유지시키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은사가 발휘되고 채용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신령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우며, 또한 성령의 진정한 교제를 가능케 하며, 그리고 참으로 증거하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뒷받침해 주는데 유익하다.

 

III .소그룹의 근거

 

A. 소그룹의 이론적 고찰

 

1. 소그룹의 정의

 

그룹에 대해서 구성원의 수효와 관련시켜서 '일차집단', '이차집단'으로 나뉜다. '일차집단'은 모든 구성원이 다른 사람과 일대일 면접적 관계를 가질 정도로 작은 집단으로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원시적 사회에서 그 원형을 찾는다. '이차집단'은 대그룹으로 개체성이 무시되고 집단성이 강조되는 형태이다. 우리의 관심이 소그룹에 있으므로 소그룹에 대한 학자들의 정의를 살펴보자.

 

(1)R.F.펠츠: 하나 혹은 일련의 대면적 접촉의 교섭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2)슈워드. 밀즈: 어떤 목적 때문에 접촉하게 되었거나 그 접촉에 의의를 느낀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되어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단위

(3)쉐인: 서로 교섭하며, 서로를 심리적으로 의의하고, 자기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있는 몇 사람

(4)죠오지. C 호프만: 적어도 두 사람의 인간이 얼굴을 맞대고 접촉하며, 각자가 상대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행위하고 있는 모임.

 

한편 데이비드 죤스와 프랭크 죤스는 소그룹의 정의를  서로 작용하고, 상호 의존하며, 소속감이 있고, 공동 관심사를 나누고, 각자에게 규정된 역할행동에 참여하고, 상호 영향력을 행사하며, 또 보상을 기대하고, 목적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는 둘 이상의 개인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종합해 보면 소그룹은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여, 대면접촉이 가능한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상호관계가 밀접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소그룹의 특징은 대그룹 일색의 조직과 운영방식을 보완하여 교회 갱신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2. 소그룹의 구성

 

소그룹을 구성하는데 있어서는 소그룹의 성격과 적합해야 함이 전제가 된다. 소그룹의 구성은 따뜻하고, 친밀하고, 그리고 피차 인격적인 유대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게 하기에 적당해야 된다.

 

소그룹의 인원이 몇명이 적당한가는 학자마다 2- 8명, 또는 15명을 기준으로 하여 소그룹과 대그룹으로 나누기도 하며,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 12명이하가 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인원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그룹의 인원은 그 그룹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진행방식에 따라 다양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원이 많으면 구성원 전체의 충분한 참여가 불가능해 짐으로 소그룹의 장점을 잃게 된다. 어떤 그룹은 4-5명의 적은 인원으로 모이지만 소그룹의 기능을 전혀 갖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모임은 조금 인원이 많게 보이지만 가족같은 모임이 될 수 있다. 결국 소그룹의 구성원은 몇 명으로 해야 한다는 정확한 답은 없고, 그룹의 성질과 집단의 기능과 목적 등 여러가지 요인들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3. 소그룹의 형태

 

오늘날 소그룹은 여러 분야에서 거기에 적합한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어지고 있다.그 형태는 그 그룹의 크기나 형성에 따라서 또는, 그룹의 기준이나 목표에 따라서 그리고, 그룹의 과제와 환경, 응집력, 효율성, 상호작용의 과정에 따라서 달라지며, 각 그룹들은 이들의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포함하기도 한다.

 

그룹을 대상에 따라 구별하면, 전에 서로 면식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초면자 그룹, 함께 일상생활을 하며 공동의 일을 수행하는 STEP그룹, 여러 소그룹이 모여 강연이나 주제발표를 위해 모이는 WORKSHOP 그룹, 가족그룹, 부부그룹 등이 있다.

칼 로저스는 그룹을 강조점과 특성에 따라 세분하였다.

 

(1)훈련그룹( T- group) : 최초에는 인간관계 기법을 강조했으나 현재는 많이 다양해 졌다.

(2)만남의 그룹 (Encounter group): 경험의 과정을 통해서, 개인의 심리적 성장, 개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및 대인 관계의 발전과 개선을 촉진할 것을 강조한다.

(3)감수성 훈련그룹 (Sensitivity traning group)

(4)과제그룹 (Task-oriented group ) : 대인관계를 음미해 나가는 가운데 그룹의 과제에다 촛점을 맞춘다. 기업체에서 활용한다.

(5)감각 각성 그룹 (Sensory awareness group) : 운동이나 자발적 댄스 등을 통해 신체의 각성과 표현을 강조한다.

 

(6)창조성 위크샵 (Creativity workshops) : 개인의 자발성과 표현의 자유를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

(7)조직개발그룹 (Organizational development group) : 1차 목적이 리더기법이 성장에 있다.

(8)팀 형성 그룹 (Team builing group) : 기밀한 연대,효과적인 작업팀의 형성을 목적한다.

(9)Gestalt 그룹: 숙련된 치료자가 진단과 치료의 관점으로 한번에 한 사람씩 촛점을 맞추어 나가는 방법

(10)Synanon조직: 마약 중독자 치료법으로 몹시 공격적이다.

 

Robert Arthur Dow는 교회의소그룹을 접촉그룹, 사회그룹, 흥미그룹 동료의식 그룹, 만남의 그룹, 치료그룹, 성경연구 그룹 등으로 나누어 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한 시야를 제공하였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그룹의 형태를 교회는 잘 조합, 채용하여서 교회가 갱신되어야 할 분야에 적합한 다양한 형태의 소그룹을 개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