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2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2학기

제목설교학2022-07-13 16:18
작성자 Level 10

설 교 학

 

1. 설교 전체를 한 문장으로 써보라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설교자의 특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혼과 전 인격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바랄 것인가! 설교자들은 감동적이고 영적인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며 항상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설교학 강의를 들으러 온 목사님들에게 필자가 언제나 요구하는 질문이 있다. 지난 주일에 하신 설교를 한 문장으로 말해 보십시오? 이 질문을 드리면 거의 모든 목사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물론 별안간 들은 질문에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주고 기다려도 준비가 안된 이는 그냥 우물우물하고 있을 뿐이다. 

 

기껏 말한다는 것이 이런 식이다. "'사랑에 관해서' 했습니다." "'전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외쳤습니다." ".....에 관해서"는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용도 그 주제에 맞추어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설교 전체는 확실한 통일성을 지닌다. 문장이 되진 않으면 내용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칼빈 쿨리지는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가 어떤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오자 부인이 물었다. "설교자가 무슨 설교를 합디까?" 그는 한 참 생각하다 말했다. "죄에 대해서 하는 것 같던데......" 부인이 다시 물었다. "죄에 대해 뭐라고 합디까?" 그는 더 오래 생각하다가 말했다. "설교자가 죄를 아주 싫어하는 것 같더라구."

 

설교가 한 문장으로 나오지 않는데 내용이 기억될 리 없다. "죄에 관해서" 말했다면 드는 이들도 "죄에 관해서" 말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설교자가 못 기억한 내용을 청중이 기억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설교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시루에 물이 다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자위할 것인가?

설교가 기억되지 않는다면 신앙의 성장도 있을 수 없다. 그냥 가슴 뭉클한 종교심만 일으키려고 설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영혼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심은 우리와 커뮤니케이션 하기 위함이다. 그 말씀이 가슴에 남아 있음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권능도 그러하다.

 

신학교 다닐 때 설교의 사표가 되시는 한 분이 계셨다. 지금은 타계하신 김이태 목사님이셨다. 그 분의 설교는 듣기도 좋았지만 그 내용이 오래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 분은 늘 우리에게 충고했다. "설교를 작성하기 전에 반드시 한 문장으로 써 놓으시오." 이 한 문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 아직 설교를 쓸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이 확실해지면 설교의 대지들을 여기 맞추어 작성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내용이 다 이 한 문장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예화를 하든, 인용을 하든, 성경 구절을 주든 여하간에 이 한 문장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기억시키기 위해서 전체의 내용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 한 문장을 논지라고 한다. 주체라던가, 아이디어라든가 하는 말은 논지의 이전 단계이다. 설교뿐 아니고 논문이나 글이나 강의나 반드시 논지가 있게 마련이다. 논지가 없는 설교나 글은 방향 없이 없어진다. 설교나 글은 논지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밝은 빛이시다." 이 한 문장을 쓰고 설교의 내용을 작성한다고 치자. 그러면 예수가 세상의 빛인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서 나온 요지들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예수는 세상의 빛

본문 : 요 1:1-10

논지 : 예수는 세상의 보내진 밝은 빛이다.

요지 : 1. 어둠의 빛 되신 예수

① 예수는 생명의 빛이다.

② 예수는 계시의 빛이다.

③ 예수는 자연의 빛이다.

2. 참 빛과 빛의 증거자

3. 세상의 빛

① 예수는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시다.

② 그는 복음으로 세상을 비추신다.

③ 그는 우리 심령에 빛을 주신다.

 

앞의 요지는 학생이 작성한 것이다. 이 정도만 되도 대단히 통일성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체 내용이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밝은 빛이다"는 논지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논지와 직접 연관이 되지 않는 내용은 도입부분이나 설교 도중에 잠깐 설명으로 첨부될 수는 있지만 뼈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글의 RMx 부분에 고친 예를 하나 더 실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논지와 요지가 통일성이 있다 해도 이 내용에 던져질 질문이 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예수가 세상의 빛이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물론 논지의 내용을 복음적으로 하는 것과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순서상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조금만 맛을 보자.

 

여기 내용은 논지를 제법 잘 증거하고 있다 해도 앞에서 말한 대로 그것을 삶에 적용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 문장을 조금 손질해 보자.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빛이기에 누구든지 영접한 사람은 빛을 소유하게 된다." 논지를 복음적으로 고침으로 이 문장은 신자들의 삶과 연결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체 요지도 다시 구성해 보자. 약간의 손질로 설교의 내용은 한 문장으로 연결되며 확실하게 부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설교의 논리 진행을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것이 제대로 안 된다면 설교 작성의 시작부터 헤매게 마련이요, 듣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제목 : 예수는 세상의 빛

논지 :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빛이기에 그를 영접한 사람은 그 빛을 소유한다. 

① 예수는 생명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

② 예수는 계시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계시를 얻는다.

③ 예수는 자연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세상을 비칠 수 있다.

 

2.설교의 변화가 와야 한다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설교자의 특권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혼과 전 인격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바랄 것인가! 설교자들은 감동적이고 영적인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며 항상 연구해야 할 것이다. 

 

설교학 강의를 들으러 온 목사님들에게 필자가 언제나 요구하는 질문이 있다. "지난 주일에 하신 설교를 한 문장으로 말해 보십시오?" 이 질문을 드리면 거의 모든 목사님께서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물론 별안간 들은 질문에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주고 기다려도 준비가 안된 이는 그냥 우물우물하고 있을 뿐이다. 

 

기껏 말한다는 것이 이런 식이다. "'사랑에 관해서' 했습니다." "'전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외쳤습니다." ".....에 관해서"는 문장이 아니다.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용도 그 주제에 맞추어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설교 전체는 확실한 통일성을 지닌다. 문장이 되진 않으면 내용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칼빈 쿨리지는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가 어떤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오자 부인이 물었다. "설교자가 무슨 설교를 합디까?" 그는 한 참 생각하다 말했다. "죄에 대해서 하는 것 같던데......" 부인이 다시 물었다. "죄에 대해 뭐라고 합디까?" 그는 더 오래 생각하다가 말했다. "설교자가 죄를 아주 싫어하는 것 같더라구."

 

설교가 한 문장으로 나오지 않는데 내용이 기억될 리 없다. "죄에 관해서" 말했다면 드는 이들도 "죄에 관해서" 말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설교자가 못 기억한 내용을 청중이 기억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설교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시루에 물이 다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자위할 것인가?

 

설교가 기억되지 않는다면 신앙의 성장도 있을 수 없다. 그냥 가슴 뭉클한 종교심만 일으키려고 설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영혼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심은 우리와 커뮤니케이션 하기 위함이다. 그 말씀이 가슴에 남아 있음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권능도 그러하다.

 

신학교 다닐 때 설교의 사표가 되시는 한 분이 계셨다. 지금은 타계하신 김이태 목사님이셨다. 그 분의 설교는 듣기도 좋았지만 그 내용이 오래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 분은 늘 우리에게 충고했다. "설교를 작성하기 전에 반드시 한 문장으로 써 놓으시오." 이 한 문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면 아직 설교를 쓸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이 확실해지면 설교의 대지들을 여기 맞추어 작성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내용이 다 이 한 문장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예화를 하든, 인용을 하든, 성경 구절을 주든 여하간에 이 한 문장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기억시키기 위해서 전체의 내용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 한 문장을 논지라고 한다. 주체라던가, 아이디어라든가 하는 말은 논지의 이전 단계이다. 설교뿐 아니고 논문이나 글이나 강의나 반드시 논지가 있게 마련이다. 논지가 없는 설교나 글은 방향 없이 없어진다. 설교나 글은 논지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밝은 빛이시다." 이 한 문장을 쓰고 설교의 내용을 작성한다고 치자. 그러면 예수가 세상의 빛인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서 나온 요지들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예수는 세상의 빛

본문 : 요 1:1-10

논지 : 예수는 세상의 보내진 밝은 빛이다.

요지 : 1. 어둠의 빛 되신 예수

① 예수는 생명의 빛이다.

② 예수는 계시의 빛이다.

③ 예수는 자연의 빛이다.

2. 참 빛과 빛의 증거자

3. 세상의 빛

① 예수는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시다.

② 그는 복음으로 세상을 비추신다.

③ 그는 우리 심령에 빛을 주신다.

 

앞의 요지는 학생이 작성한 것이다. 이 정도만 되도 대단히 통일성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체 내용이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밝은 빛이다"는 논지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논지와 직접 연관이 되지 않는 내용은 도입부분이나 설교 도중에 잠깐 설명으로 첨부될 수는 있지만 뼈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글의 RMx 부분에 고친 예를 하나 더 실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논지와 요지가 통일성이 있다 해도 이 내용에 던져질 질문이 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예수가 세상의 빛이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물론 논지의 내용을 복음적으로 하는 것과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는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순서상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조금만 맛을 보자.

 

여기 내용은 논지를 제법 잘 증거하고 있다 해도 앞에서 말한 대로 그것을 삶에 적용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 문장을 조금 손질해 보자.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빛이기에 누구든지 영접한 사람은 빛을 소유하게 된다." 논지를 복음적으로 고침으로 이 문장은 신자들의 삶과 연결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체 요지도 다시 구성해 보자. 약간의 손질로 설교의 내용은 한 문장으로 연결되며 확실하게 부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설교의 논리 진행을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것이 제대로 안 된다면 설교 작성의 시작부터 헤매게 마련이요, 듣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제목 : 예수는 세상의 빛

논지 : 예수는 세상에 보내진 빛이기에 그를 영접한 사람은 그 빛을 소유한다. 

① 예수는 생명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생명을 얻는다.

② 예수는 계시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계시를 얻는다.

③ 예수는 자연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세상을 비칠 수 있다.

 

 

3. 설교 논지 훈련

 

더 나아가기 전에 논지 훈련을 좀 더 해보자. 논지는 논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글이건 어떤 설교이건 반드시 논지가 필요하다. 논지의 훈련을 위해서는 필자의 "논문 작성 이렇게 하라"(성광문화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의 훌륭한 논지를 만드는 것이 설교 작성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 논지를 증명하는 것이 설교의 전체 내용이다. 그러므로 논지와 증명은 밀접하게 연결이 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석탄은 날이 갈수록 덜 사용된다"는 논지를 세웠다고 하자. 그 논지를 증명하는 요지를 보자.

 

논지 : 석탄은 날이 갈수록 덜 사용된다.

① 가정에서 기름을 때는 집이 많아졌다.

② 기관차도 더 이상 석탄을 쓰지 않는다.

③ 공장에서도 석탄 때는 곳이 없어져 간다.

결론 : 고로 석탄은 날이 갈수록 덜 사용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논리의 진행 방법이다. 논지에 관한 이러한 증명을 설교에 적용해 보자. 예를 들어, "새벽 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논지를 증명해 보자. 여기 쓴 논지나 요지보다 더 좋고 다채로운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논지 : 새벽 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도움이다.

① 첫 시간에 하나님과 대화한다.

② 첫 시간에 말씀을 듣는다.

③ 첫 시간에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결론 : 고로 새벽 기도는 영적 생활에 큰 힘을 준다.

 

이런 식으로 논지를 쓰고 요지를 써 나간다면 절대로 설교가 옆으로 흐른다든지 통일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논지의 요소들을 먼저 살펴 보자. 논지는 그냥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하기는 하지만 논리 훈련이 안된 사람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논지가 좋으면 내용도 좋아진다.

 

예를 들어서 "남자는 여자보다 완력이 세다"는 논지가 있다고 치자. 이런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이야기를 시간을 허비해서 들을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좋은 논지가 아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고 한다면 앞의 논지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들으려는 사람이 생긴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논지는 진리 중에 진리이다. 하지만 예수를 수십 년 믿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들을 만한 말은 아니다. 너무 뻔한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무도 뻔한 설교가 얼마나 많은가! 전체를 대표하는 한 문장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러니 한 문장을 쓴 뒤에 물어보자. 뻔하지 않은가?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이 무엇인지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남들이 말하는 내용보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간다면 관심을 일으킬 수 있다. "예수가 나의 죄를 짊어진 것을 믿으면 죄로부터 오는 저주에서 구원받는다." "예수의 생명을 의지하면 영원히 산다." 즉 평범한 앞의 논지를 조금만 더 설명하면 된다.

 

첫째, 논지는 범위가 분명하고 명확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으면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논지가 애매하면 더욱 더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설교의 논지는 설교자의 마음을 꿰뚫는 선명한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논지는 그 스스로 퍼져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확장되거나 발전하거나 밝혀 나갈 내용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질문해 보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것이 꼭 말해야 할 내용인가? 그리고 진실인가? 이러한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이 나온다면 인 논지는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셋째, 설교 논지는 반드시 인간의 삶과 연관 되어져야 한다. 그 내용이 인간이 경험하는 심각한 문제들에 해답을 주는 것이다. 삶과 죽음, 용기와 두려움, 고통, 외로움, 약함, 병, 기쁨, 후회, 사랑, 희망 등등이다. 이 설교를 듣고 나서 어떤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 이 논지가 나의 삶과 무슨 상관 있는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논지가 복음의 한 면을 말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교훈으로 설교가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그러한 설교를 너무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볼 때 영혼이 변화하려면 반드시 복음이 들려졌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지 않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다. 악한 습관을 버리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적인 변화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부족하지만 다음 기회에 복음적인 논지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단지 논지는 반드시 복음의 한 면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자.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면 율법이거나 그냥 일반 도덕적인 논지일 것이다. 또 많은 경우에 그저 자기의 생각으로 그치는 경우도 많다.

 

한 마디로 논지의 요소를 요약해 보자. 논지를 쓴 다음에 질문을 던져 보라.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논지가 어떤 변화를 주고 어떤 힘을 준다면 한 마디로 훌륭한 논지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 논지가 신자의 삶에 아니 말하는 사람의 삶에 아무런 힘도 변화도 도움도 주지 못한다면 논지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아래의 예를 통해서 설교의 요지 만드는 법을 살펴 보라.

 

제목 : 다 이루었다

본문 : 요 19:28-30

논지 :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는 신자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한다.

① 구원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었다.

② 형벌의 지불을 다 이루었다.

③ 의와 능력의 수여가 다 이루었다.

④ 장래 문제 해결까지 다 이루었다.

 

제목 : 그리스도의 피

본문 : 롬 3:23-26

논지 : 그리스도가 쏟은 피는 구원의 확실한 증거이다.

① 내게 주어진 죄 용서의 표이다.

②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표이다.

③ 내게 주어진 생명의 표이다.

④ 내게 주어진 능력의 표이다.

 

제목 : 불멸의 지체

본문 : 요 15:5

논지 : 불멸의 지체는 그리스도와 한 몸 된 나와 교회이다.

① 그리스도가 돌보신다.

② 그리스도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다.

③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다.

④ 그리스도처럼 절대로 망하지 않고 불멸한다. 

 

 

4. 설교 제목과 논지

 

많은 경우에 보면 제목과 논지가 전혀 연관되지 않는 것을 많이 본다. 제목과 논지, 요지, 그리고 전체 내용은 서로가 잘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확실하게 마음에 남는 설교가 된다. 이번에는 제목과 논지가 서로 이어지게 하는 연습을 해 보자. 제목과 논지가 논리 있게 연관되지 않으면 기억하기가 어렵다.

 

한 마디로 제목은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가"이다. 논지는 이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제목과 논지는 바늘과 실처럼 연결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피"란 설교 제목이 있다 치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한 문장으로 쓰면 그것이 논지이다. 그래서 전체가 제목대로 통일된다.

 

제목은 언제나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제목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앞의 제목에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피"가 주는 유익을 설명할 것이다. 다른 이야기는 나올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논지도 여기 맞추어서 작성이 되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는 제목에 내포된 약속을 잘 이행할 것이다.

 

한편 제목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목은 어떤 질문을 일으키는가? "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인가?" 또는 "그리스도의 피의 유익이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해 보자. 그러면 분명한 논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목과 논지를 언제나 확실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목에서 곧 논지가 떠오르고 결국 전체 내용이 다 기억될 것이다. 대지들은 논지를 좀 더 자세히 진행시켜가며 말한 내용이다. 대지 작성법은 뒤로 미루기로 하자. 사실상 제목을 잡으면 설교 작성은 이미 반쯤 한 것이 된다. 그만큼 제목 선정도 어렵다. 무엇을 말할 지가 분명해야 한다. 

 

제목과 논지가 내용상 다르면 청중의 혼란은 커진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목을 잡고 나서 논지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자"는 식으로 해보자. 서로 연관이 잘 되는 것 같지만 바른 논리 진행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의지할 것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제목은 잘못 되었다.

 

이 논지에는 오히려 "의지할 것"이란 제목이 어울린다. 그러면 "의지할 것에 대해서" 말하겠다는 약속이 된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의지해야 할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자"는 식의 논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 복잡하다고 짜증내지 말고 훈련해 보자.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란 제목에는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표다"가 훨씬 연관되고 기억되는 논지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피"에 내포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항상 논리는 자연스런 진행을 따라야 한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절대로 기억이 되지 않는다. 내용도 잘 전개되지 않는다.

 

제목을 문장형으로 쓰는 분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미스바로 가자." 이런 식의 문장형 제목은 청중들의 흥미를 잃게 만든다. 이미 내용을 다 들은 셈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장형의 제목은 피해야 할 것이다.

 

제목은 여운을 많이 남기면서 호감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청중이 기대하면서 설교를 들을 것이다. 또한 설교를 듣고 나면 그 제목에 이해가 한 문장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확실하게 기억되는 설교가 될 것이다. 또한 설교 자체가 통일성이 있기 때문에 재미있게 들을 것이다. 조금만 연습을 하면 된다.

 

아래의 글이 어떻게 제목과 논지로 되는지 보라. 물론 여기서는 복음적인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논리적으로 제목과 논지를 잡는 훈련을 하는 것일 뿐이다. 완전히 똑같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한다는 것만 알면 된다. 

 

내용 : 좋은 설교는 설교자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 하고 경탄할 느낌을 준다.

제목 : 좋은 설교

논지 : 좋은 설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 준다.

 

내용 : 설교의 원천으로 성경을 무시하고 있기에 오늘의 강단은 그 권위를 잃고 있다.

제목 : 강단 권위 상실의 이유

논지 : 오늘날 강단의 권위 상실은 성경을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용 : 60년대 대중화된 점성술에 대해서 최근 미국정부는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점성술협회 회원 수가 지난 5년동안 4천명으로 갑절 증가했고 고대 바벨론에서와 같은 신비종교가 수도 워싱톤과 같은 곳에서 침투해서 활동하고 있다.

제목 : 오늘날 점성술의 영향

논지 : 오늘날 점성술의 영향은 신비 종교의 형태로 수도에까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내용 :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시 117)

제목 : 여호와 찬양의 이유

논지 : 여호와 찬양의 이유는 우리를 향한 그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다.

 

내용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제목 : 화평의 근거

논지 :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용 :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제목 : 믿음으로 얻는 의

논지 : 믿음으로 얻는 의는 일한 삯이 아니라 거저 주는 선물이다.

 

내용 : 좋은 이름은 큰 부보다 더 바랄만한 것이다.(잠 22:1)

제목 : 재물보다 좋은 것

논지 : 재물보다 좋은 것은 명성이다.

 

자 이제 제목과 논지 잡는 요령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을 것이다. 성경이나 글을 보면 항상 이렇게 제목과 논지를 잡는 훈련을 해보시라. 

 

 

5. 설교 논지에서 설교까지(1)

 

이제 논지에서 설교까지 작성해 보자. 창 22:6∼14를 가지고 두 개의 설교를 만들어 보았다. 하나는 예배에 집중하였고 또 하나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설교

 

사도바울이 늘 하신 말씀대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쳐 졌으나 살아서 제단을 내려온 이삭에서부터 유래된다. 그는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그래서 산 제물이 되었고 평생 산 제사로 삶을 보냈다.

 

1단계

제목 : 산 제물

논지 : 예배에서 자신이 산 제물임을 확인한다.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3) 예수는 우리의 양이다.

 

2단계

 

제목 : 산 제물

 

논지 : 예배에서 자신이 산 제물임을 확인한다.

도입부분 :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죽는 심정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 모든 종교가 제물은 죽인다. 아벨도 죽음으로 제사.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원하신다. 그는 죽어야 한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목숨이다. 자신이다. 아들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은 이삭을 받고 양을 대신 죽인다. 이삭은 살아서 내려온다.

 

3) 예수는 우리의 양이다 : 양이 대신 죽음으로 이삭은 살았고 산 제물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통해서 산 제사를 드린다. 예수를 양으로 대신 드렸다면 우리도 이삭이다. 산 제물이다.

 

3단계

 

산 제물

 

예배하면 생각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예배하러 가는 것이 곧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늦게라도 와서 설교만 듣고 나면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설교가 감동적이면 예배를 한 느낌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예배에 참석한 것 같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오해이다.

 

예배는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신학교 다닐 때 너무나 반복되는 예배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기숙사에 그냥 앉아 있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영어 단어라도 더 외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선배 한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 "예배하러 가지." 안 가겠다고 하자, "무슨 소리야 목사 되겠다는 사람이. 어서 가자고."

 

이 말은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그렇다. 예배는 목사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신자로서 가장 열심히 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이스라엘인들은 예배를 목숨처럼 생각했다. 어떤 때는 적군이 안식일에 쳐들어 왔다. 적이 공격하는데도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고 몰살되기까지 예배는 계속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특별한 백성들이었다.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배를 목숨 걸고 하였다. 박해 시에 신자들은 경찰이 예배 장소를 알고 있으며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를 중단하지 않고 약속한 장소에 나타났다. 이제 이 예배는 세상에서 마지막 드리는 것이다. 그들은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예배는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의미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곧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반드시 생명이 끝나야 했다. 죄악 된 인간의 모든 것은 거기서 그친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 하나님은 예배 하는 이들의 생명을 거두신다. 본래 주셨던 모든 것도 거기서 거두신다.

 

이 예배는 창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아들인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다. 양을 잡아서 그의 피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곧 그의 제사는 죽음과 연결되었다. 질투한 형 가인은 그를 들로 유혹해서 돌로 쳐서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피는 제물이 되어 소리쳤고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받아들여졌다.

 

이방의 종교에서도 예배는 가장 거룩한 것이었다. 언제나 무슨 일을 할 때 제사를 드렸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없었다. 가장 좋은 제물은 인간이었다. 아름다운 처녀나 총각이 드려졌다. 그들은 죽어야만 했다. 칼로 그들의 심장을 도려내어 신 에게 드려졌다. 신은 그들의 피를 받고 만족해하면서 예배하는 이들에게 복을 내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듯 인간을 제물로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었다. 인간의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단지 인간의 상한 심령을 받기를 원하셨다. 인간이 죄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죄악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주어져야만 했다. 세상 신과 다른 점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엇을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죄악에 물들어 있을 뿐이다. 처녀고 선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었다. 근본적으로 저주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인간은 죽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치고 다시 만들어져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물을 죽이신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다. 아들을 낳을 수 없는 그에게 그것도 백살 이나 되었을 때 귀한 아들을 주신 것이다. 그 아들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조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그 아들도 죄악의 사람이었다. 그대로는 하나님이 사용할 수 없었다. 누구나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허물로 죽어야만 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듣는다. 이미 아브라함은 살만큼 다 살았다. 이제 그 아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생명도 그치는 것이었다. 하루 밤 사이에 아브라함은 완전히 죽음을 문턱에 둔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계속 하나님으로 경배해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고 세상으로 돌아가 버릴까?

 

여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줄 하나님이 모르셨던가? 아니면 아셨던가? 만약 몰랐다면 신이 아니다. 점쟁이만큼도 못한 신이다. 분명히 아셨다. 알면서 왜 그렇게 시험하는가? 고통을 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아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성장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목에 댔다. 이제 그들은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중단될 것이었다. 이제 아브라함은 무엇보다도 존귀한 하나님께 순종해서 가장 귀한 보물을 바친다. 축복보다 축복의 근원을 선택한 것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은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모든 것은 그쳤다. 죄악도 옛 사람도. 인간 누구나 가진 악하고 간교한 성품도 그쳤다. 병이 있었다면 병이 그쳤고 슬픈 문제나 고통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도 끝났다. 모든 인간적인 한계는 여기서 그치고 있었다. 이삭은 푸른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믿었다. 

 

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중지시켰다. "그만! 그것이면 족하다. 내 앞에서 자신을 바치는 그 마음이면 된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신에게 드릴 제물을 주셨다. 멋진 양 한 마리였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양의 목을 따고 피를 쏟으면서 자신들이 죽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양의 몸을 태우면서 자신들이 태워지고 없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의 제단에 올라갔다가 살아서 내려온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밖에 없다. 이들은 남은 여생을 산 제물로 살았다. 그들은 때때로 양을 잡아서 같은 의식을 반복해 예배했다. 이들은 모든 신자의 모습이다. 신자들은 이들과 경험을 함께 한다. 우리는 이삭처럼 죽으러 여기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옛 것이 다 함께 죽는 것이다.

 

3) 예수는 우리의 양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면서 함께 그를 죽이는 경험을 한다. 그는 우리 대신 제물이 되었다. 그는 완전한 제물이었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는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동일시된다.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저주도 함께 죽는다. 미움과 한과 근심과 걱정과 고통거리도.

 

그리스도 곧 우리 양의 죽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들은 그의 살아나심과 자신을 역시 동일시한다. 그리스도 우리를 대신해 제물 되신 이 그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 부활이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믿음으로 안다. 새 생명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안 느껴져도 그렇게 행동한다.

 

예배는 이러한 경험을 재현한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환상은 무서운 것이었다. 성전 안에는 거룩한 연기로 가득 차고 여호와의 옷자락은 그 안을 덮었다. 천사들의 찬송가는 성전 문지방을 흔들리게 하였다. 그 광경은 너무도 무서워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죽은 자처럼 되었다. 그 이후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일어났다.

 

이것은 단순히 죽고 사는 경험이 아니다. 이렇게 영원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산다. 죽어야만 다시 사는 것이다. 성품을 고치고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 죽어 모든 것은 그쳤다. 이제 전혀 새로운 삶을 받은 것이다. 차츰 강해지고 귀해지는 게 아니다. 이미 부자요 왕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제물로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서 나가는 것이다. 새 생명의 사람이다.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것은 거룩해진다. 하나님께 바쳐진 우리도 거룩해진다. 이 경험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예배 의식을 통해서 죽고 다시 산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우리를 죽이고 살린다. 기도도 찬송도 헌금도 사도신경도……

.

산 제물이라는 신앙 고백은 반복되어야 한다. 산 제물이 악하고 더러운 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 속이고 거짓말하겠는가? 그는 죄를 향해 죽고 축복을 향해 일어난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너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스스로를 설득하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득하라. 이삭의 경험이 곧 내 경험이다. 나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살아 내려온 존재이다. 나는 하나님께 드려진 산 제물이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내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도 제단에서 죽었다. 나의 죄와 병과 모든 악한 것들은 다 그쳤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다. 하나님의 축복 그 자체이다.

 

이제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오는데 우리는 마음과 몸을 정돈해야 한다. 시간을 지켜야 한다. 의복을 잘 고르고 엄숙한 마음을 가지라. 모든 예배 순서를 죽고 사는 문제로 대해야 한다. 예배는 신자들에게 가장 우선할 일이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예배를 기뻐하라.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훈련은 온 정성과 뜻을 다해 반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명령 하신다.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사 66:23) 우리는 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에 의해 죽고 다시 사는 훈련을 한다. 

 

 

6. 설교 논지에서 설교까지(2)

 

두 번째 설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받은 사랑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험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아들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가?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경험하게 된다.

 

1단계

제목 : 산 제물

논지 : 받은 사랑으로 살라.

1)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2)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확인된다.

3)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성장한다.

 

2단계

제목 : 산 제물

 

논지 : 받은 사랑으로 살라.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 아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에게만 있는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사랑이다. 

 

1)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 필레오, 에로스, 아가페 등 여러 말을 하지만 사랑은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2)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증명된다 :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은 거기 반응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 사랑이 자기 속에 있음이 증명된다. 이 결단을 통해 사랑은 자란다.

 

3)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성장한다 : 사랑은 드림으로 산다. 그것이 본질이다. 이삭은 드림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그 사랑으로 인해 산다. 그래서 산 제물이 된다.

 

3단계

 

산 제물

 

가정을 가장 가정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이 가정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랑, 이것은 어느 모임이나 가정처럼 만들고 천국처럼 만들어준다. 특별히 영적인 가정, 교회라면 이 사랑이 반드시 요구된다. 사랑이 없다면 교회는 교회의 일을 하지 못한다. 만약 가정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교회에서라도 찾아야 한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예방 의학 전문가 피터 한센 박사의 연구를 보도했다. 건강을 위해서는 건강 음식, 규칙적 운동, 나쁜 습관 버리기 등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은 "사랑"에다 주었다. 사랑은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웃 사랑은 도덕이 아니라 건강의 문제이다." 성경은 사랑을 그 이상의 영적인 건강과 번영으로 본다.

 

사랑을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오늘은 그 중에 한 요소만을 찾아 함께 느껴보려고 한다. 사랑은 표현된다. 빛이 감추일 수 있는가? 소금이 그 맛을 감출 수 있는가? 미움은 아무리 사랑으로 가장해도 그 빛깔이 나오기 마련이다. 사랑은 아무리 감추어도 나타난다. 눈빛이 분위기가 말을 한다. 행동으로 나타난다. 상대를 유익하게 하려 한다.

 

사랑은 무엇인가 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그리고 희생한다. 자기를 불태우는 촛불이 사랑의 속성을 말해준다. 자신은 사라지고 없더라도 사랑하는 대상이 조금이라도 밝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는 사랑의 힘을 주고 그 사랑을 행동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사랑의 힘과 행동,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주고 받아야 할 보물이다.

 

1)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아가페니 필레오니 단어로 사랑을 말하지 말라.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농도가 짙은 사랑이다. 2년 간 안암동의 10층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 어머니와 두 아들이 창틀에 매달렸다. 이미 복도와 집안까지 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아들들은 화분 놓는 곳에 섰다. 어머니는 그 밑에 매달렸다.

 

고가 사다리가 다가가자 어머니는 떨어졌다. 다행히 밑에 천막이 있어서 부상은 당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기자가 인터뷰한 것을 들었다. 화분 놓는 곳에 서면 쉽지만 자식들을 위해서 양보하고 밑으로 내려간다. 고가 사다리가 다가오자 자식들을 먼저 구하라고 손을 놓고 떨어진다. 말도 안 되는 이 행동이 왜 나오는가? 사랑이요 희생이다.

 

사랑은 자신을 유익하게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대상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소모품처럼 버리고 만다. 그 어머니는 허리와 다리를 다치고 평생을 고생하리라. 하지만 아픔이 일어날 때마다 더욱 자식들을 위해서 축복하고 감사하리라. 이것이 사랑이다. 자기의 손해와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희생한다.

 

상대를 향해 사랑이 없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교회나 목사가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본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이다. 해주어도 모른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하지 않고 있다. 사랑에 무슨 불평이 있으랴. 사랑 받음으로만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 주고 또 주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사랑을 가정에서 기대한다. 그리고 영적 가정인 교회에서 기대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 속에 사랑이 결핍되었던가! 우리 속의 사랑은 흔적뿐이다. 본래 우리에게는 그 힘이 있었다. 인격도 완전하였고 지혜도 충만하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교제하여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모두가 한계 속에서 힘들어한다.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건 조금이라도 받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애인을 찾고 가정을 찾으며 사람들 틈에 끼어서 한 통속이 되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비슷한 상황인데 어찌 사랑할 힘이 있겠는가. 북한 사람들처럼 아무 것도 없는데 어찌 남에게 베풀 수 있는가.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내게로 와서 받으라. 그러면 산다. 여러 천년 전에 아브라함도 그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은 결핍된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이미 늙은 그에게 아들을 주었다. 더 많은 것도 약속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에 쪼이면서 결핍은 치료된다. 처음에는 받는 사랑의 단계이다. 

 

사랑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삶은 퍼져 나간다. 풍족한 삶이 펼쳐진다. 재산은 많아진다. 빈손으로 고향을 떠난 그였다. 생활도 안정되고 늙은 몸이 아들도 낳았다. 이제 앞으로 모든 것이 더 좋아질 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 단계로 그를 올리시기를 원했다. 지금까지의 축복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주는 사랑의 단계로 나가야 했다. 

 

2)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증명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잡아 내게 제사를 지내라. 지금까지의 축복은 모두 취소되는가? 그는 살만큼 살았다. 차라리 그 자신이 죽고 말지 어떻게 자기 아들을 죽여 제사를 지내라는 것인가! 하루 밤사이에 아브라함은 죽음을 문턱에 둔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여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줄 하나님이 모르셨던가 아셨던가? 몰랐다면 전능의 신이 아니다. 점쟁이만큼도 못한 신이다. 분명히 아셨다. 그러면 알면서 왜 그렇게 시험하는가? 고통을 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아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성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모든 역경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이 확실한가? 그러면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시험을 통과하라. 절대로 그는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으신다. 힘든 과정은 다 필요한 것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일만 하면 된다. 바로 하라. 가장 제대로 하는 것은 의무보다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재물은 어디 있나요?" 아버지는 아프게 말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제단에 도달했다. 그러자 아들은 깨달았다. 자신이 바로 제물이었던 것이다. 이제 나이는 십여 세 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말없이 아들은 결박을 받았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의 목에 칼을 댄다. 이제 그들은 죽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단계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 자기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 의무나 계명은 여기까지 올 수 없다. 의무 때문에 어머니가 10층에서 떨어져 죽지 않는다.

 

이삭은 자기의 목숨과 구 만리 같은 자기의 여생을 바쳤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을 바쳤다. 그들은 바치면서 느끼게 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내 목숨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바치게 됨을 감사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생명을 드리면서 가장 고상한 신앙의 단계로 도약하는 것이다.

 

10층에서 손을 놓는 것은 무서운 용기이다. 사랑은 용감하다. 사랑은 알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을 보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말없이 그냥 드린다. 그러면서 아깝거나 억울하지 않다. 그냥 일어나는 사랑으로 인해서 감사할 뿐이다. 아무런 후회가 없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강하다. 영적 진리이다. 

 

3) 사랑은 희생과 드림으로 성장한다.

 

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중지시켰다. 그만! 그것이면 족하다. 자신을 바치는 그 마음이면 신적인 사랑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바칠 제물을 주셨다. 멋진 수양 한 마리였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양의 목을 따고 피를 쏟으며 양이 자신들 대신 죽음을 본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랑을 다시 더 큰사랑으로 반응하신다. 그들을 크게 하신다.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하나님 자신까지도 아들의 목숨을 제단에서 끊었다. 하지만 이삭만은 유일하게 살아 내려왔다. 살았지만 죽은 것이요, 죽었지만 산 사람이 되었다. 세상 사람으로서는 죽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살았다. 하나님께 바쳐졌기에 그들은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사랑의 존재가 되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가르치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다. 교회에 출석해 하늘의 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참 가족으로 인정받는다. 부분이 아니다. 얼마의 돈이나 시간이 아니다. 나 전체를 다 죽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렇게 그의 제단에서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랑의 존재가 된다. 

 

인간적인 욕심과 미움과 한계는 죽는다. 병도 가난도 문제도 자신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힘을 쓰지 못한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나게 된다. 자녀 낳기만 하면 어머니가 아니다. 사랑함으로 어머니가 된다. 자기의 전체를 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해 전체를 드림으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남은 여생을 살아있는 제물로 보냈다.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다. 때때로 양을 잡아서 같은 의식을 반복하며 사랑을 확인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드리지 못한다면 받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사랑은 반응한다. 하나님이 나오도록 주고 또 준다. 이것이 산 제물의 모습이다.

 

대만의 한 청년이 연모하는 처녀에게 2년간 매일 연애 편지를 썼다. 세계 기록이다. 처녀는 결혼했다. 우편 배달부와 글보다는 직접 접촉이 더 강한 것이다. 가정을 향해서도 그렇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렇다. 아무리 사랑해도 만나고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고 교제하는 것이다. 바치는 훈련이다.

 

많은 분들이 이 성전을 위해서 수고했다. 재산과 물품을 바쳤다. 매일 와 청소하였다.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바친 사람은 그 마음을 유지하라. 아까워 말고 더욱 헌신하라.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세상을 주시고 아들을 주시고 자신의 영을 주셨다. 사랑으로 화답하기만 하면 된다. 

 

그를 사랑해서 자신을 바치는 것이 바로 가족이 되는 증거이다. 나는 날마다 시간마다 외친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내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나이다. 외쳐보라. 그러면 나의 가슴이 터지게 넘치는 것을 경험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그는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 

 

 

7. 믿으라고만 하지 말고 믿을 내용을 주라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적당한 말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일이 나를 위함인 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가 오기 전과 후의 모든 성경 내용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신자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 덕분에 사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승천까지 모든 과정이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잘 알아서 대가를 누릴 수 있어야 구원받은 삶은 실제적인 경험으로 나타나게 된다. 설교자라면 이 분야에서 전문가이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복을 받아 가지겠다는 생각은 단지 종교심이다. 만약 기도이건 선행이건 그것을 함으로 그 수고로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대가이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열심히 하는 만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상 대개 설교자들이 이렇게 가르친다. 이것은 순수하게 율법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일단 신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더 열심히 더 열심히 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율법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잘못이 없다. 단지 인간이 율법의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따르기에 율법적인 믿음에 빠진다. 이 믿음대로 하면 온통 보상심리에 잡혀서 살게 된다. 기도했으니 봉사했으니 바쳤으니 주십시오. 그러자니 그리스도의 공로는 의미가 퇴색된다. 그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개신교 신앙원리의 가장 중요한 면에 들어간다. 성경 전체가 말씀하는 내용은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믿음"이란 구호가 명백해 지는 것이다. 복 받으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저 받으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 죄의 사함과 성화의 권능을 받는 일, 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와 능력을 경험하는 일, 그 모두가 다 그리스도가 해주셨다고 믿어야만 내 것으로 경험이 되기 시작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나머지는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모두 그리스도가 해주신 것이다.

 

누구나 믿음 믿음 하지만 정작 무엇을 믿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무조건 될 줄 믿습니다."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외치는데 여기에는 보장이 없다. 제 맘대로 믿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믿을 내용이 따른다. 설교자는 믿을 내용을 주어야 한다. 믿음은 지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 주신 일들에 관한 지식"에서 출발한다.(기독교강요 3.2.6) 그 지식이 없이는 믿을 내용도 없다. 그 지식을 많이 알고 믿는다면 엄청난 능력이 수반된다.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들을 안다면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행위를 따로 떼어놓고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주위에서 믿음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 열심히 교회 나오고 봉사 잘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믿음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니 행위가 좋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행동하라는 말을 강조하게 된다. "열심히 하십시오. 봉사 잘하십시오. 기도 많이 하십시오. 성령 충만 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고 그저 하라는 설교만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인용해도 율법적인 설교이다.

 

행위만을 보고서는 절대로 믿음을 판단할 수 없다.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한다면 간디나 공자 같은 분들은 구원을 받았어야 한다.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이해가 아니다. 인간의 눈에 행위가 아무리 완전해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받지 않으신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나타나는 차원 높은 윤리를 자신의 힘으로는 행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선행을 원해도 힘이 없다고 탄식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인데 아무리 선행하라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본성부터 수준 이하이다. 이성을 향해서 간음을 안하고 살인을 안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성을 참으로 자매처럼 형제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내 원수를 향해 순수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가? 이 수준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럴 수 있었다. 

 

인간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죄성 이다. 모두 악하기에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기에 괴로운 것이다. 세상에 올바로 되어 복 받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포한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그런 상황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선행을 통해서 자기 힘으로 구원이나 복을 받겠는가!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복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 수준의 의를 행해 주었으니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을 모셔 들여서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공로가 다 내 것이 되고 그의 능력이 다 내 힘이 된다는 기가 막힌 소식이 아닌가!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믿으라고 하지만 말고 믿을 내용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 믿음이 곧 행동으로 나타난다. 누가 멋진 의복을 두고 누더기를 입을 것인가? 누가 아름다운 음식을 두고 쓰레기통을 뒤지겠는가? 믿을 내용을 주자. 그러면 믿는다. 그것도 없이 믿으라고 외치는 것도 율법적인 설교이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말하라. "주께서 내 속에 계심을 믿으십시오."그 분의 능력이 내 능력임을 믿으십시오.그 분이 항상 돌보시는 것을 믿으십시오."내 몸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요 내가 작은 그리스도임을 믿으십시오."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니 내 속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재미있게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설교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복음의 내용이 자리 잡아서 생각이 바뀌게 하라.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자꾸 복음적인 말씀을 받으면 예수나 바울처럼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려면 설교자부터 의식구조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설교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설득시키라. 그러면 확신이 선다. 그리고 복음의 경험이 일어난다. 그 경험을 예화로 말하게 된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확신이다. 복음적 확신의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하늘의 재산이다. 

 

8. 복음을 설교하라

 

"복음을 설교하라" 말하기는 쉽다. 누구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천은 쉬운 게 아니다. 설교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예배시간에 신자들이 재미있게 듣고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듣고 중생해서 그 내용대로 살게 만드는 엄청난 책임을 가진다.

 

그렇게만 한다면 삶의 모든 분야는 변화를 볼 것이다.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힘이 없게 보일지 모른다. 율법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훨씬 쉽고 강력할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복음의 능력은 근본을 변화시킨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랑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힘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인간은 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가 사해지고 그로 인한 모든 저주가 그쳤음과,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과 능력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이 둘은 날마다 시간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이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삶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의식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분명히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하나님 자녀의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작은 예수의 삶이 된다.

 

복음의 요소

 

복음의 요소를 한 번 더 살펴 보자. 이미 여러 번 앞에서 말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말한다. 그 내용이 곧 복음이다. 그것을 들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된다. 그러면 그 내용이 모두 자기 것이 된다.

 

설교자는 그 내용을 늘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 속에서 사용하고 적용해 보아야 한다. 구원받은 뒤에 성화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사랑도 희생도 당당한 삶도 아름다운 삶도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을 때 나온다.

 

칼빈은 구원을 세 요소로 나누었다. 택하심과 사죄, 그리고 회개이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 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고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를 통해 성령으로 중생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선택되었음을 믿음으로 구원은 반석 위에 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택함 받았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힘있게 부르짖는다. 유대인은 외형적인 선민의식 하나로 수천 년 동안 민족적 동일성을 유지했다. 선택의 교리는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더욱 큰 힘을 공급한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죄 속에 그냥 두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래서 그의 보혈로 구속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죄를 얻게 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로 인해 심판과 저주를 면할 수 없게 되었었는데!

 

선택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 신자라 하더라도 회개와 중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에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처럼 무서운 일이 어디 있는가!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심판을 면하는 일이요 세상에서도 죄의식을 극복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신자들도 자칫 세상일만 크게 보고 하나님께 관련된 이 구원의 일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그의 음성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입혀 실제로 그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죄를 사해주심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녀 삼으심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둘은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로 삼으심은 더 높은 차원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기 위해 예수의 보혈로 죄를 속해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수치를 덮고 저주를 제거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다시 낳아주셔서 본성을 바꾸신다. 옛사람이 죽고 회개한 새사람이 다시 나서 하나님이 주신 새 삶의 능력을 조금씩 맛보며 자라가게 하신다.

 

복음은 이 일을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시고 우리 속에서 일어나도록 돕고 계심을 알려준다. 신자의 삶은 자기 힘으로 살 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택함은 물론, 속죄함도 그렇다. 하나님이 다 행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신자로서의 권능의 삶은 어떤가?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도우신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복된 소식의 내용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 소식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돌이킬 수밖에 없다. 너무도 비참한 자신에게 너무도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듣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재미있게 만든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의무이다.

 

이 엄청난 구원사업의 핵심을 설교자가 맡은 것이다.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바른 교회의 특성으로 설파했다. 그리고 권징 곧 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목사의 직책은 이 일의 중심에 서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온 교회는 목사의 이 일을 도와야 한다.

 

말씀 사역은 복음의 이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힘으로 이행하게 만든다. 그저 예배에서 설교 잘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말씀 사역은 교회의 전체 방향, 신자의 훈련을 포함한다. 교회 생활 전체를 복음의 힘으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적인 말씀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복음적 논지 훈련

 

설교를 작성하다 보면 하나님의 복음보다는 다른 것들을 논지로 삼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도 복된 소식을 기준으로 삼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회개, 개혁, 선교, 사회 정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신자라면 정치, 경제, 사회 등 삶의 제 분야가 다 하나님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논지를 보자.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자."어려울 때일수록 힘을 내자."가난한 이웃을 돕자."기도해서 능력을 받자.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자.얼마든지 복음과는 거리가 먼 논지를 볼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한 말을 해도 예수가 해 주신 일을 힘입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여기 몇 개의 학생들의 논지를 살펴 보자.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예수 믿고 건강하게 살자."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이 정도라도 논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대단히 훌륭한 편이다. 앞에 것들보다 복음에 많이 접근한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논지이다. 예수의 이름도 들어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내용이 삶에 적용되려면 그 사이에 들어갈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다. 그것이 없이 그냥 막연히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 도와주시니 된다는 식으로 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하나님이나 예수 대신 부처님이나 조상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 "부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 이신 부처님을 믿고 건강하게 살자.부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부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절에서 이 설교를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기독교의 설교인가?

 

절에서 이 설교를 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수양과 덕과 노력에 의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자신의 힘으로 하는 데에는 부처나 예수나 아무 차이가 없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힘으로 복을 누리려면 절대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완성하신 일들을 선물로 받아야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안식, 치료, 능력 등은 반드시 예수가 이미 행하셨음을 알고 믿음으로 얻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복된 소식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그 내용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면 정말로 믿음의 사람이 된다. 그것으로 앞의 논지를 손질해 보자.

 

"평안 자체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 계심을 아는 자는 항상 안식한다."예수께서 채찍을 맞아 병을 담당했으니 병의 억압에서 자유롭다."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그의 능력도 받은 자다."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도 누리자. 여기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우리의 할 일이 나타난다. 믿고 일어나는 것이다.

 

얼핏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힘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계속 그렇게 듣게 된다면 점점 주의 힘으로 살고 자기 자랑은 줄어 들어갈 것이다. 앞의 학생들의 논지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여 그리스도가 해주신 일을 누리게 만들자는 것이다. 

 

 

9. 설교할 때 비언어적 요소를 활용하라

 

많은 설교자들은 주로 내용에만 집중한다. 특히 한국 설교자들은 음성이나 표정, 제스츄어 등에 대해 거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청중의 감정과 잘 맞아지지 않으면 전달은 반드시 실패한다. 비언어적 요소가 설교의 이해를 열 배 이상 강화시켜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설교하는 이라면 누구나 청중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 설교자들을 연구해 보았을 것이다. 대체로 그 소감이 무엇인가? 명성에 비해 내용이 너무 없다고 말한다. 복음적이지도 않고 뭐하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교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의 비언어적인 요소를 보게 된다. 비언어라 하면 말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표정이나 음성, 손발의 움직임, 당시 상황, 분위기 심지어는 중단하고 있을 동안의 고요함 등이다. 대설교가들은 누구나 다 이 분야에 굉장한 실력자들이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로 감동적인 설교자가 될 수 없다. 

 

1. 비언어적 전달법의 우월성

 

자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해 보라. 원고를 기가 막히게 감동적으로 잘 준비한다. 강대상에 올라가서는 청중을 보지 말고, 아무런 동작도 하지 말고, 감정도 가능하면 자제한다. 그리고는 원고만 정확하게 또박또박 읽는다. 여기서 최대로 신경을 쓸 것은 내용의 전달이다. 물론 내용은 재미있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살펴본 사람의 말이다. "옆과 이야기하는 사람, 몸을 뒤척이는 사람, 두리번거리는 사람, 화장실에 갔다 오는 사람, 주보를 뒤적이는 사람, 핸드백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거의가 청취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제대로 청취가 되지 않았다.

 

연구한 사람들의 결론은 이것이다. 설교하는 사람의 비언어적 요소가 줄어들수록 청중의 비언어적 요소는 늘어난다.무슨 뜻인가? 그냥 말로만 설교하면 듣는 사람들은 흥미를 잃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모두 딴 짓을 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설교란 언어적인 방법으로만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 분명해진다. 

 

버드휘스템은 인간을 "다감각적 존재(multisensorial being)로 보았다. 인간은 언어에 의해서만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중이 다 감각적임을 느끼고 있는 설교자는 그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분위기를 만들 것이다. 사람들을 끄는 설교자는 이것이 몸에 배있다.

 

버드휘스템이 한 연구에 의하면 보통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말을 통해서는 35%이하 밖에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다. 나머지 65%는 비언어적인 형태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언어전달의 거의 두 배 정도나 된다. 일대 일 대화가 아닌 여러 사람을 상대로 할 때는 비언어적인 요소가 힘을 더 쓰게 된다.

 

한 사람이 보통 하루에 말하는 시간은 합쳐봐야 10분에서 11분 정도라고 한다. 한 문장 말하는데 2초반 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언어 외에도 외모, 복장, 몸짓, 음성, 돌연한 행동과 그 결과 등에 의사소통을 더 의존하고 있다. 즉 감각, 무의식, 직관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언어보다는 비언어적 요소들을 사람들은 더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들뜬 음성과 불안한 얼굴로 여러분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확실하게 돌보십니다 한다면 어떨까? 분명히 말한 내용은 진리이지만 사람들은 말한 사람의 음성과 표정을 믿어 버린다. 

 

심리학자 알버트 메라비안 (Albert Mehrabian)은 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의 의사소통의 효과를 공식으로 만들었다. 전체 커뮤니케이션의 7퍼센트만이 연사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38퍼센트는 음성, 55퍼센트는 표정에 의해서 된다. 그러니 아무리 해도 말만으로는 십분의 일의 효과도 내지 못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설교자는 비언어적인 요소를 개발시켜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청중의 감정이 열리도록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이 열리게 만들면 무슨 말이든 경청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감정이 열렸을 때 설교자는 결단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안 그러면 속이는 자다.

 

똑같은 음악회라도 애인과 함께 들으면 환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인사치레로 갔다면 빨리 끝나기만 기다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교도 설교자의 전체를 재미있게 받아들여 듣는다면 내용보다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물론 존경과 기대 그리고 분위기까지 가미된다면 내용이 좀 약해도 감동은 클 것이다.

비언어적 요소를 활용하라

 

2.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언어의 요소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비언어적인 요소들은 음성, 몸동작, 물건, 분위기 등이다. 설교자는 설교하는 동안 이것들을 사용한다. 천재적인 설교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비언어적인 요소를 잘 조합해서 감동을 이끌어 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요소들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항상 연구한다.

 

음성은 언어적인 요소이면서 동시에 비언어적인 요소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좋은 음성으로 듣는 것과 듣기 괴로운 음성으로 듣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준다. 본래 타고난 음성이 그런걸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스스로 조금만 훈련을 하면 훨씬 아름다운 음성으로 말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쉬고 상한 소리에, 소위 뱀 장수 소리에, 더 감동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 목소리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목소리보다는 부드럽고 청아한 음성을 더 좋아한다. 아무리 들어도 피곤하지 않고 음악소리처럼 들리는 목소리는 청취하는데 큰 기쁨을 주기도 한다.

 

음성을 좀 더 분류한다면, 음질(音質), 음색(音色), 어조(語調), 음절(音節)로 나눌 수 있다. 음질은 음성의 높낮이, 굵기, 기름짐, 크기, 리듬 등을 포함한다. 음색은 웃음, 울음, 하품, 흉내 내는 소리 같은 요소들이다.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해 음색이라고 해 보았다. 어조란 단어나 문장이 말해지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지옥이란 단어는 무겁게 조용히 말하는 게 좋다. 

 

마지막으로 음절은 말을 하는 동안 리듬을 주는 요소들이다. 예를 들자면 어"에-같은 것, 그리고 잠시 침묵하고 있는 것 등 말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것들을 의미한다. 특별히 침묵은 대단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용법을 잘 훈련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는 한 문단이 끝나면 잠시 머물러 감동을 더해준다.

 

인간의 목소리는 수 만 가지의 묘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 사람들은 단어의 의미보다는 단어가 전달되는 방법, 즉 분위기로 뜻을 이해한다. 처녀가 아니에요 하고 한 마디 할 때 과연 아니란 말인가? 그건 순전히 그때 상황에 따라서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마련이다. 설교자의 단어도 청중은 분위기로 듣는다.

 

몸동작은 눈과 입을 포함한 얼굴 표정에서 시작해서 손, 머리, 몸 등을 포함한다. 인간의 몸은 여러 가지를 표현할 수 있다. 느낌이나 생각 등을 아주 강렬하게 나타내는 도구이다. 판토마임은 말 한 마디도 없이 동작으로만 강한 메세지를 전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몸동작을 강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앞에 말한 메라비안의 공식을 다시 생각해 보자. 무엇을 말하면서 표정은 다르게 나타나면 어떨까? 청중은 절대로 말을 믿지 않고 표정을 믿는다. 만약 강단에 올라가는 사람이 힘없이 또는 억지로 올라간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자신이 없는 또는 약한 표정으로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누가 그의 말을 믿겠는가!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기가 말하려는 내용을 참으로 신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얼굴에 그것이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마음을 얼굴에 표현하지 않는 게 생활화되어 있다. 하지만 생활이 나아짐에 따라서 조금씩 표정도 다양 해져가고 있다. 설교자는 온 몸으로 말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신체언어 (영어로 바디 랭귀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설교중의 몸짓은 내용에 어울려야 한다. 안 그러면 설교자의 말보다는 제스츄어의 인상만이 기억에 남게 된다.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땅을 가르치고 마귀를 설명하면서 하늘을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라. 정 반대의 이해를 사람들은 받게 된다.

 

동작 않고 잠시 머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동작이다. 앞에 말한 대로 한 대지를 말하고 다음 대지로 갈 때, 또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말했거나 말하려고 할 때, 유능한 설교자들은 잠시 침묵한다. 이 시간 동안 동작도 중단되어야 한다. 손을 들었거나 눈을 크게 떴거나 그 상태에서 몇 초 동안 멎어 있어야 한다.

 

눈맞춤(eye-contact)은 의사 소통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자기의 눈을 상대방에게 주지 않는다면 상대방 역시 눈을 주지 않는다. 사람의 눈길은 마주 보는 사람들을 동료의식으로 연결하는 힘이 있다. 연구에 의하면 눈길을 받을 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눈길을 못 받을 때는 반대의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설교자가 청중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설교한다면 금새 청취력이 높아졌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눈이 가서 머물면서 말을 해야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은 눈맞춤이 아니다. 청중은 설교자가 자기를 보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에게 말하는지를 느낀다. 만약 설교자가 원고나 천장만 본다면 그만큼 직접적인 느낌이 준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순수한 그러나 열정적인 눈으로 청중을 보면서 말해야 한다. 미안한 눈, 불안한 눈, 수줍은 눈은 눈맞춤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증오와 악의 눈도 마찬가지이다. 눈이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눈을 맞춘다면 그 열정이 전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모와 치장도 청취의 중요한 요소이다.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인상은 강력한 영향을 준다. 덧붙여 체격, 복장 등도 그러하다. 표정의 중요성은 이미 말했다. 뚱뚱한 설교자가 절제의 삶을 말한다면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르고 약한 설교자가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을 설파한다면 별 감동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기의 외모도 열심히 관리해야 한다.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에게 설교하면서 최신 유행의 양복과 머리 스타일로 나선다면 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잘 사는 사람들 앞에 가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선 다면 그들은 어디 화성이나 달동네에서 온 이상한 인물로 생각이 들 수 있다.

 

가운을 입고 하는 것과 양복을 입는 것도 각각의 장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설교자는 한복을 입기도 하고 심지어 잠바를 걸치고 대 예배 설교하는 분도 있다. 치장과 외모에 덧붙여 화장품의 사용 등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확정된 틀보다는 청중의 분위기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환경 역시 중요한 비언어매체이다. 시간과 공간, 건물의 특징도 신경을 써야 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교회당 내부의 인상, 장식, 청중들의 모습, 좌석배치 등도 영향을 준다. 건물이 성당처럼 높으면 경건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는 좀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다.

 

설교 도중에 시끄러운 일이 생긴다면 청취가 방해를 받는다. 늦게 온 사람이 문을 삐걱댄다든지 맨 앞자리로 두리번거리면서 간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이들이 운다든지 장난을 쳐도 그렇다. 밖에서 소리가 들려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잘 만들어진다면 청취는 크게 향상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부흥회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촘촘히 앉힌다. 넓은 장소에 드문드문 떨어져 앉으면 열기가 잘 오르지 않게 된다. 무릎이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모여 앉아야 청중은 감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찬송이나 통성기도 등도 분위기 형성에 막대한 영향이 있다. 부흥사 들은 설교 전이나 설교 중에 분위기에 항상 신경을 쓴다.

 

어떤 교회에서는 전문적인 복음 송 찬양인도 자와 밴드를 사용해서 분위기를 집중시키기도 한다. 너무 인위적이라고 비난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마음이 깨지지 않는 정도에서 한다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 동시에 점잖게 예배하던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감동받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비 언어적 요소를 활용하라

 

3. 온전한 의사소통을 위한 비언어적 요소의 사용과 개발

 

설교도 커뮤니케이션이므로 언어적인 방법과 비언어적인 방법이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둘이 합쳐서 한 가지의 목표를 향해 일한다. 그렇게 될 때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스스로가 둘이 서로 협조해서 최대한의 효과가 일어나도록 연구해야 한다.

 

비언어적 방법이 언어만을 통한 의사소통보다 여러 배 강력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는 언어적인 방법이 기본이다. 비언어적 방법이 아무리 강해도 언어적 방법의 보조로 사용되어야 한다. 말씀을 통한 복음의 내용이 설교에서는 가장 중요함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비언어적 요소가 설교의 내용과 모순되는 경우가 있다. 처음 설교를 하는 사람이 창백하고 굳은 얼굴로 심지어는 손을 덜덜 떨면서 말한다. 저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음성까지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청중이 그의 말을 믿을까? 그렇지 않다. 모순될 때는 비언어적 요소를 믿는다.

 

그렇다고 비언어적 요소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제스츄어를 쓰지 않아도 얼굴표정이나 음성이 이미 비언어적 요소를 발산하고 있다. 아무 것도 안 해도 상황이나 분위기가 역시 비언어적 요소이다. 비언어적 요소는 절대로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말씀을 잘 증거해야 한다.

 

비언어적 요소는 설교의 내용을 반복하거나 강조해 준다. 음성으로 들은 내용에 첨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신자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하면서 강하게 아래를 가르킨다면 의미의 반복이다. 신자들의 뜨뜨미지근한 신앙을 책망하는 동안 얼굴과 몸동작을 무섭게 한다면 강조하는 것이다.

 

동시에 비언어적 요소는 대치와 보충도 해 준다. 어떤 부분은 말을 안하고 표정이나 행동으로 대신할 수 있다. 안 됩니다 라는 말 대신 고개를 흔드는 것이 더 강한 전달이 될 수 있다. 쑥스러운 내용을 말할 때 머뭇거리거나 머리를 긁거나 더듬거리면 자기의 입장을 보충해주는 결과를 준다. 필요한 때가 있다.

 

비언어적인 요소는 설교자뿐 아니라 청중에게도 적용된다. 잘 듣고 있는지 감동을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두리번거린다. 몸을 뒤튼다. 다른 곳을 멍청하니 보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빨려 들듯이 집중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모두 이것을 바라지 않는가? 자세히 살피라. 비언어적 요소를 읽으라. 

 

비언어적 방법은 설교자 스스로가 개발해 나가야 한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보면서 설교해 보라. 청중의 입장에서 살펴 보라. 인상에서부터 치장과 태도를 살펴 보라. 표정을 만들어 보고 몸동작을 해 보라. 그것들이 자신과 어울리는가? 그것들이 자연스러운가? 그것들이 설교를 강화시켜 주는가? 

 

가수나 배우들은 비언어적 요소를 개발하려고 엄청난 시간을 투자한다. 그래서 저절로 분위기가 맞아떨어지게 만든다. 설교자들은 가수나 배우 이상의 연기를 해야 한다. 이 말은 속과 겉이 다르게 위선하라는 게 아니다. 자기가 표현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