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2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2학기

제목부흥 운동에 대한 신학적 근거2022-07-13 16:19
작성자 Level 10

부흥 운동에 대한 신학적 근거 

 

 

 

제1절 부흥운동의 성서적 배경 

 

1.부흥 운동의 정의 

 

 

 

1.부흥 이란?. 

 

 

 

(합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겔 37:1-14) 

 

 

 

1). 어원 

 

①.원어; 히브리어(햐야)이다. 뜻은 살다, 소생하다, 부활하다, 생명을 주다(생명이 있게 한다), 육성하다, 소성시키다, 회복시키다, 구원하신다, 완전 하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 용환. 원어 분해성경. (도서출판 로고스. 1997.1) 13권 p.533} 

 

 

 

②. 영어(Revival; 리바이벌=라틴어 re(다시)+ vivere(산다)의 합성어로 다시 살아나다, 소생하다, 부활하다 란 뜻을 가지고 있다.(신앙생활을 하는 도중에서 침체되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무 활동적인 상태에서 다시 살아 나는 것을 뜻한다)

 

{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1995) p.6} 

 

 

 

③. 한문(부흥(復興) 다시 부, 일(일어날) 흥 또는 흥(흥이 날) 흥.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2). 부흥 운동이란? 

 

 

 

①.브래태니커 사전에서는 Revivalism(리바이버즘) 즉 부흥운동이란 기독교 교회 안의 신자들과 구도자들의 영적인 열심을 다시 일으키는 운동이라고 되어 있다.

 

{신 현균. 부흥신학의 이론과 실제. (도서출판. 우림. 1997) p19} 

 

 

 

②.옥스포드판 교회 사전에 의하면 ‘부흥운동이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며 대중의 신앙적 열심을 환기시키려는 운동인데 이는 계속적인 기도와 집중적인 설교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신 현균. 부흥 신학의 이론과 실제. (도서출판. 우림.1997) p19} 

 

 

 

이러므로 부흥운동이란 쇠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키고, 부족한 것을 더해 주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부흥운동은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선지자들을 통하여 새 영들을 구원하시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죄인들을 교회를 통하여 믿음을 얻게 하고,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 나게 하는 운동이 바로 부흥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문화사. 1995) p7} 

 

 

 

부흥운동의 근본 목적은 잠자던 영혼이 깨어나고 죽어가던 심령이 다시 살아나며, 때묻은 영혼이 깨끗함을 얻고, 약해진 영혼이 새 힘을 얻으며, 실망과 의심에 쌓인 영혼이 소망과 확신을 얻게 되며,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마귀의 자식이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운동이다

 

.{신학과 목회. 정진경 (서울:성광 문화사) p278.} 

 

{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반석문화사. 1995) p7}에서 인용. 

 

 

 

2. 구약 성서에서의 고찰 

 

가. 구약 시대에 부흥운동의 성격 

 

1).방법-구약시대는 선지자나 예언자를 통하여 직접 말씀하는 시대 

 

2).시기-종교적 타락(통치자나 일반 백성의 타락) 

 

3).목적-신앙이 타락한 통치자와 백성들을 철저히 회개시켜 침체된 신앙을 회복시켜 여호와께로 다시 돌이키게 하기 위함. 

 

4).대상-한 개인 보다는 전 국민적인 운동. 

 

 

 

나.미스바의 부흥운동(삼상 7:1-14)(BC.1055년) 

 

1).부흥운동의 중심인물-사무엘(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사사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신권과 정권을 소유한 인물.) 

 

2).부흥운동이 일어난 배경-이웃나라 불레셋의 침략으로부터 오는 불안감과 고통으로 인하여. 

 

 

 

*이런 고통이 오게 된 이유? 

 

①엘리제사장의 아들들(흡니와 비느하스)의 신앙의 타락으로 인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의 패배. (삼상 2:27-36) 

 

②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타락.(삼상 7:3-4) 

 

 

 

3)방법 

 

①미스바(망루:a watch tower.(감시탑) 창 31:49)로 모이라 

 

②금식과 회개 

 

③제물을 드림 

 

④간구의 기도 

 

 

 

4)결과 

 

①여호와의 응답을 받음.(큰 우뢰) 

 

②블레셋을 물리침.(문제가 해결됨) 

 

 

 

5)특징 

 

범국가적 부흥운동(National Revival Movement)이다. 

 

 

 

다. 갈멜 산의 부흥운동(왕상 18:19-40)(BC.850경) 

 

1).부흥운동의 중심 인물-엘리야(야훼는 하나님이시다)선지자. 길리앗에 우거하던 디셉사람. 북 왕국 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의 선지자. 

 

 

 

2). 부흥운동이 일어난 배경. 

 

①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왕후를 시돈왕 엣 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므로, 왕이 우상 숭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온 백성도 따라서 신앙이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②왕후인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는 여호와의 신앙에 대한 핍박이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었다. 

 

③북 왕국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국가적인 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온 백성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3). 방법 

 

①온 백성과 이방 신을 섬기는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모이게 함. 

 

②어느 신이 참신인가를 보이자 제안을 함. 

 

③무너진 단을 수축함. 

 

④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림.(왕상 18:36-38) 

 

 

 

4). 결과 

 

①하나님이 불로 응답하시므로 갈멜산에 모인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고,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모두 죽임.(왕상 18:40) 

 

②3년반의 가뭄으로 인한 심한 기근이 비가 내리므로 다시 풍요를 가져오게 함.(왕상 18:45) 

 

 

 

5). 특징 

 

인간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줌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 부흥운동이다. 범 국가적인 회개운동이다. 

 

 

 

라.니느웨의 부흥운동(요나 3:1-10)(BC.793-753년경) 

 

1).부흥운동의 중심인물-요나(아밋대의 아들. 왕하 14:27절에서도 나옴) 이름의 뜻은 비들기란 의미이다. BC.793-753년의 여로보암Ⅱ세 때의 사람. 

 

 

 

2). 부흥운동이 일어난 배경 

 

니느웨 성의 백성들이 악독해 졌으므로. (악독(히브리어; הꘝꙝ (라아)로 나쁜, 사악한, 부정, 도덕적인 악, 윤리적인 죄, 등의 의미를 지닌 말임. 마음이 흉하고 독살스러움.)-우상을 섬기고 전쟁의 포로들을 매우 혹독하게 다루는 죄악을 저질렀음. 

 

 

 

3). 방법 

 

이방의 나라 앗시리아의 큰 도시였던 니느웨성에 가서“니느웨성이 사십일이 지나면 무너지리라”(욘 3:4)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외치었다.(예언의 말씀선포를 하였다.) 

 

 

 

4). 결과 

 

니느웨성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금식하며 회개하고 니느웨의 왕도 함께 회개하고 사람은 물론 짐승들까지도 금식을 시키는 온 성이 대 회개운동이 일어나므로 니느웨성이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욘 3:4-10)) 

 

 

 

5).특징 

 

이 부흥운동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 가서 회개가 있은 후에 있었던, 대 회개운동으로 하나님은 악독한 이방인들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멸망에서 구원을 이루게 됨을 보여준 부흥운동이며, 또 하나님은 만국의 만민에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구약시대에서도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 부흥운동이다. 

 

 

 

마. 요시야의 부흥운동(왕하22:1-23:30)(BC. 640-609) 

 

1). 중심인물-유다16대왕 요시야이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그를 지시하심’ 이다. 므낫세의 손자요, 암몬 왕의 아들로 8세에 왕위에 오름.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의 이름이 예언 되었었다. 

 

(왕상 13:1-2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조부 므낫세와 부친 암몬은 악을 행한 왕이나 요시야는 선친 왕의 정책을 뒤집어 하나님을 뜻을 따른 왕이다. 

 

 

 

2). 부흥운동이 일어난 배경. 

 

성전 수리를 하다가 하나님의 전에서 율법 책이 발견되므로 서기관 사반이 읽는 율법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먼저 옷을 찢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여 선지자 홀다에게 물어 봄으로써 일어났다.(왕하22:8-20) 

 

 

 

3).방법(왕하 23:1-15) 

 

*부윤(히; רꙵ 샤르-우두머리,수령, 지배자,장으로 이조 시대는 정이품 외관 직) 

 

①예루살렘 성전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모이게 하였다. 

 

②율법 책(언약의 말씀)을 모인 사람들 앞에서 왕이 읽어 듣게 하였다. 

 

③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백성들과 언약을 세웠다. 

 

④성전을 청결케 하였다.(우상을 섬기던 기물을 제거하고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들을 폐하고 일월성신을 섬기던 자들을 폐하고,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가루로 빻아서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미동의 집을 험) 

 

⑤온 국토를 정결케 하였다.(산당 제거 밑 우상의 단과 우상 제거) 

 

⑥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을 지키었다. 

 

(왕하 23:21-23 왕이 뭇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 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 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왕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4).결과 

 

①요시야는 모든 율법을 가장 잘 지킨 사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 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②요시야는 유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눈으로 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 

 

(왕하 22:20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5).특징 

 

이 운동은 온전한 종교개혁 운동으로 신앙이 부패한 유다의 백성의 신앙을 각성시키고 회개시킨 말씀중심의 부흥운동이다. 

 

 

 

바. 에스라의 부흥운동(에스라 9:1-10:17)(BC 458년)(바벨론 포로후 귀국) 

 

1).중심인물-바사왕 아닥사스다왕 시절의 사람. 레위 자손 아론의 16대손 이며, 대제사장 스라야(바벨론 잠령시 대제사장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립나에서 죽임을 당함. 왕하25:18. 렘 52:24)의 아들로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신다’ 이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겸 제사장이었다. 

 

 

 

2). 부흥운동이 일어난 배경 

 

바벨론에서 먼저 귀국한 사람들 중에 제사장, 레위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금하라고 한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한 것을 에스라 선지자가 듣고 괴로워 하며, 겉옷과 속옷을 찢고 백성의 죄를 대신 회개하고 기도를 드리므로 시작되었다. 

 

 

 

3)방법 

 

①에스라 자신이 먼저 민족의 죄를 부끄러워하며 괴로워 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스 9:3-15) 

 

②에스라의 통곡하며 회개 기도를 듣고 많은 백성이 모여 함께 나아와 회개하게 되었다.(스 10:1) 

 

③금식하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하였다.(스 10:7) 

 

④이방 여인과 그 소생을 내어 보내기로 결정하였다.(스 10:11) 

 

⑤말씀을 선포하여 각성케 하였다.(느 8:1-18) 

 

⑥금식과 회개의 운동을 벌렸다.(느 9:1-) 

 

4).결과 

 

죄를 짓고도 죄를 느끼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여 악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돌이켜서 구원을 얻게 하였다. 

 

 

 

5). 특징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선포하고 가르치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말씀중심의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게 한 민족적인 부흥운동이다.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부흥운동을 결론을 내려 본다면? 

 

1).특별한 인물이 선정되어 주도 되었다. 

 

2).범 민족적인 부흥운동이었다. 

 

3).율법에 의한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 

 

3. 신약성서적인 고찰 

 

 

 

가. 복음서에 나타난 부흥운동 

 

 

 

1.세례요한의 등장 

 

*세례요한(여호와를 사랑하는 자)(A.D.27년경) 

 

①.구약에 예언된 인물이다.(사40:3-5) 

 

②.천사가 그의 출생을 예고하였다.(눅1:11-20) 

 

③.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이다.(눅1:15) (나실인 히; ריזנ (나지르-구별된 자) 

 

(민 6:2-7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 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그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④.제사장 샤가랴의 아들이다.(눅 1:5,6) 

 

⑤.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증거하였다. 

 

(요 1;29-36;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⑥.엘리야와 동일시 하였다. 

 

(말 4:5; 마 11:11-1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 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 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⑦.헤롯에 대한 부도덕을 책망하였다. 

 

(막 6:17-18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⑧.헤롯이 목 베어 죽임을 당하였다.(마 14:3-12; 막 6:1-28) 

 

 

 

1).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며 죄를 자복하며 세례를 받게 하였다. 세례요한의 운동은 이제까지 침체되어 있던 민중의 신앙을 일깨워주고, 진작 시켜준 일대 부흥운동이다. 

 

2).세례요한은 신약시대의 부흥운동의 예비자로써 길을 닦아 놓은 선구자이다. 

 

3).세례 요한은 자기 사명을 다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어 이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2.예수 그리스도(예수-여호와께서 구원하심. 그리스도-메시야) 

 

1).유대교의 잘못된 신앙을 견책하고 율법대로 생활할 것을 강조하셨다.(마 23:1-38) 

 

2).신약 교회가 세워져야 할 원리를 가르치셨다. 

 

3).예수 그리스도는 설교와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국가적 교회(The Old Testament National Church)를 신약의 교회(The of the New Testament)로 변형시키셨다. 

 

 

 

나. 오순절 및 그 이후의 부흥운동 

 

 

 

1.오순절 성령 강림 

 

1).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기도로 준비한 120문도에게 임하였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직접 받고,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직접 본 사람들이었다. 

 

(행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2).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첫 교회가 탄생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이다. 

 

3).초대 교회의 부흥운동은 오순절날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에 의하여 시작 되었다. 

 

4).이때 부흥운동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종교 부흥운동이었으며,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되는 위대한 부흥운동이었다. 엄청난 부흥을 일으킨 운동이었다. 

 

 

 

*(120명(행 1:15)-3천명(행 2:41)-날마다 더함(행 2:47)-남자의 수가 약 오천 명(행 4:4)-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행 5:14)-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행6:7)-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자라(행 21:20) 

 

2.성령 강림의 결과. 

 

1). 하나님의 임재 체험. 

 

2). 성령의 지배 아래 한 마음 한 뜻이 됨. 

 

3). 소유욕에서 벗어남.(사랑의 실천 행동) 

 

4). 언어 장벽까지 철폐됨.(방언을 말함) 

 

5). 전도 열 고조(복음의 확산) 

 

 

 

3.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특성 

 

1).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들의 모교회로 급성장하였다. 

 

2). 각기 각층의 사람들이 모였으나 유대적 교회를 탈피 하지 못했다. 

 

3). 공동체적인 교회였다. 

 

 

 

4. 초대 이방인을 향한 부흥운동 

 

1).안디옥 교회가 이방인들의 모교회로 외지 선교의 본부 역할을 하였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협동 목회를 하면서 이방인 선교의 위대한 목회 계획을 수립하였다.(행 13:1-3) 

 

2).선교 활동으로 인하여 주후 45-60년 사이에 각처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3). 조직적인 제자 훈련과 복음 전파를 통한 교회 설립이 부흥운동의 요소였다. 

 

 

 

5. 초대 교회의 부흥의 원인 

 

1).<근대 정신과 신>을 쓴 해밀턴은 초대 교회는 

 

①.무력에 의해 전파되지 않았으며, 

 

②.정치적 권력과 위신을 옹호 받지 않았으며, 

 

③.외식 주의에 의하지도 않고, 

 

④.인간 저급적인 성질에 호소하지도 아니하고, 

 

⑤.부도덕이 미덕으로 칭찬받지 않으면서 발전 했다고 하였다. 

 

 

 

2).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을 쓴 기본(Edward Gibon)은 그의 책 1권에서 부흥의 원인을 

 

①.교인의 열심 

 

②.영생의 소망 

 

③.기적 

 

④.교인들의 덕 

 

⑤.교회조직의 치밀이라고 하였다. 

 

 

 

3).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이후의 초대 교회에 부흥은 오직 하나,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 

 

 

 

1.초대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운동 

 

교회 성장의 첫 번째 시대는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에서 어거스틴까지(A.D. 약400년경)였다. (이 장식.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77, p183) 

 

교회의 부흥운동은 교회가 타락하였거나 어려웠을 때에 일어나 교회를 성장시켰다. 

 

교회사의 신앙운동의 신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교회의 부흥운동은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요, 타락과 갱신의 반복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2. 1993) 

 

교회 타락의 원인은 대체로 내부에서 일어났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2. 1993) 

 

 

 

가. 콘스탄틴 이전의 부흥운동 

 

초대 기독교는 심한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시켰다. 

 

기독교인들에 대환 박해는, 로마 황제 숭배의 거부가 주원인이었다. 기독교인들의 박해는 제 1세기 네로로부터 제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안이 착수한 박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313년에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313년에 밀란에서 전 제국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함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박해가 종지부를 찍었다. 

 

기독교의 박해는 교회의 신앙을 연단 시켰고, 생명력을 잃지 않고 부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4. 1993) 

 

 

 

그러나 이러한 박해 가운데 교회 안에서는 몬타누스(Montanus), 노바티안(Novation)등 분파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①.몬타누스(Montanus)-2세기 후반 청교도적인 개혁운동으로 일어난 몬타니즘으로 이들의 두 가지 기본사상은 ‘성령’과 ‘종말’이었다. 이들은 엄격한 금욕생활과 주의 오심을 대망하는 것이었다. 6세기까지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다. 후에 수도원 제도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김 우영, 기독교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p22. 1995) 

 

②.노바티안(Novation)-박해에 못 이겨 변절하였던 기독교인들에 대해 교회는 고민하게 되었다. 이때에 교회 정화를 표방하고 스스로를 청교도로 자청하며 배교자들의 재 세례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노바티안이다.(김 의환, op. cit, o. 94) 

 

 

 

*초대교회의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 

 

(1)네로(Nero)의 박해(54-68) 

 

주후 64년 로마 시에 대 화재 사건으로 시의 14구중 3구가 전소했고 7구가 반 이상 탄 사건이 있었다. 네로는 이 화제의 사건을 마지막 남은 자신을 지지하는 비천한 계급인 플렙스(Plebs)의 동정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이 방화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 씌웠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p49. 1989) 

 

박해의 방법은 맹견과 사자 밥이 되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며, 화형을 시켰다. 네로는 궁정에서 베푸는 연회석을 밝히는 인간 봉화로 기독교인들을 쓰기도 하였다.(베드로와 바울의 순교도 이때 인듯하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p49. 1989) 

 

 

 

(2)도미티아누스(Domintianus)의 박해(81-96년) 

 

도미티아누스는 81-96년 사이에 황제예배를 강요하였다.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주요 신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인들의 박해는 황제예배를 거부하므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때문에 모든 신이 노하였다고 하여 박해를 시작하였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p50. 1989) 

 

박해의 방법은 재산을 몰수하고, 맹수와 결투를 시켜서 찢겨서 죽게 하고, 당시 귀부인 빌립보의 루디아와 집정관 플레비우스 클레멘스는 사형을 시키고, 그의 처와 같이 저명인사를 로마에서 추방하였으며, 사도 요한을 밧모 섬에 유배하였다.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은 카타콤(catacombs; 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렸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p50. 1989) 

 

 

 

(3)트라야누스의 박해(Trajanus, 97-117)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정치적 음모를 꾀한다는 것과 로마의 일반 시민들과 기독교인들과의 사회생활의 부조화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황제 상에서 절을 강요하였고, 순응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죄인 취급을 하였고, 집회도 불허하였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인 그나티우스를 원형극장에서 맹수에게 던져 순교 당하게 하였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6. 1989) 

 

 

 

(4)하드리아누스의 박해(Hadrianus, 117-138)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미워함에 의한 박해였다. 기독교인이라고 고발당하는 자는 처벌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6. 1989) 

 

 

 

(5)마리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Marcus Aurelius, 161-180) 

 

가정교사의 가르침으로 알게 된 기독교인의 편견에서였다. 많은 기독교인을 살해하였다. 주후 177년에는 리용과 비엔에서 심한 박해가 일어났다. 

 

박해 방법으론 대중이 많이 모이는 유흥지에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고, 시장과 거리에서 심문하였고, 신앙을 포기하는 로마인은 용서를 하여 주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목 베어 죽였으며, 로마인이 아닌 사람은 짐승에게 던져버렸다. 심지어 감옥에서 죽은 시체는 개에게 던져 주고, 시체를 장사 지내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에 가냘프고 약한 노예 소녀 불란디나는 당시 폭도들의 입에서, ‘우리 시대에 그 어떤 여자도 이 만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고통 중에도 그 소녀는 신앙을 지켰고, 어느 관리의 손에 의해 도살되어 순교되었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7. 1989) 

 

 

 

(6)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rverus, 191-211)의 박해 

 

아프리카 출신의 군인으로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했으나 그의 아내 돔나(Domna)는 에메사(Emesa)의 태양신, 엘 가발(El Gabal)의 사원의 제사장의 딸로서 기독교와 대립되는 신앙과 예배를 형성하려고 이교(異敎)측에 노력하므로 교회에 대한 대책이 엄하게 된 것 같다. 

 

202년에 셉티미우스는 옛 방법으로 교회를 박해하기보다는 교회를 기사(飢死)케 하려는 의도를 가진 한 법령(法令)을 공포하였다. 그 법령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전도하여 개종자를 얻는 것을 금하는 입교 금지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전도 사업을 하던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카데이지의 세례교인들이 큰 핍박을 받았다. 

 

유스티누스(Justinus)의 빛나는 신앙의 계승자인 동시에 사도시대의 정신을 속사도시대로 계승해 온, 후 사도시대 교부들중의 제일인자였던 이레네우스(Ireraeus)가 순교를 당했으며, 오리게네스(Origenes)의 아버지 레오니다스(Leonidas)가 죄인으로 몰리어 옥에 갇혔다가 참수형을 당했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8. 1989) 

 

 

 

(7)막시미누스(Maximinus, 235-238)의 박해 

 

군인출신의 폭군인 막시미누스는 셉티누우스 황제의 교묘한 대책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례교인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없애려 위협하였으며, 이 정책은 나중에 기독교인들이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으며, 이는 정치적인 작태(作態)의 하나였다. 

 

막시미누스 황제 임기 동안에는 사형된 순교자는 없었으나, 유형을 보내고, 감옥에 투옥을 시키는 방법으로 박해를 했다. 

 

로마의 감독 힙폴리터스(Hippolytus)와 폰티아너스(Pontianus)는 사르디니아 금광에 유형을 받다가 노예로 죽임을 당했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8. 1989) 

 

 

 

(8)디키우스(Dicius, 249-251)의 박해 

 

옛날 전승, 과거의 국위 동경자들은 나라의 내우외환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하여 무서운 박해가 일어났다. 그 중 한사람이 디키우스 황제다. 

 

그는 로마가 옛 신들을 섬길 때는 부강했는데 기독교가 들어오자 나라가 쇠퇴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칙령을 내려(250) 조직적으로 전국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원칙, 무력으로 박해했기에 가장 혹독한 박해였다. 신자들을 죽여 순교자를 내는 것 보다, 악형, 감금, 공갈로 사신을 숭배케 함이었다. 

 

그러나 순교자들도 많이 나왔는데, 로마 감독 파비안(Fabian), 안디옥감독 바빌라스(Babylas)가 순교를 당하였고, 오리케네스(Origenes)는 중형을 받았으며,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도피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9. 1989) 

 

 

 

(9)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의 박해 

 

병과 흉년은 신이 노한 까닭이라 하여 257-8년에 걸쳐 대 박해를 강행, 신자의 집회를 엄금, 교회와 토지를 몰수, 감독, 목사, 집사들을 처형, 고위층 신자들을 유형, 가산을 몰수했다. 

 

이 박해에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갈다고에서, 씩수투스(Sixtus)Ⅱ 감독과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집사는 로마에서, 플락투오수스(Fructuosus)감독은 스페인에서 각각 순교를 했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9 1989) 

 

 

 

(10)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의 박해 

 

비천한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의 추대로 로마 황제가 되어 비상한 행정력의 소유자로 조직력의 강자였는데, 기독교인의 강력한 조직체에 자신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자, 부제 칼렐리우스(Galerius)의 참소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와 왕궁에서 일하는 교인을 내쫓고 303년2월에 3번의 칙령을 내려 예배당 파괴, 성경 압수, 교직자를 투옥, 악형으로 제사를 드리게 했다. 

 

304년에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제사드릴 것을 엄명한 제 4칙령을 내렸다, 

 

무서운 박해로 다카우스 때와 같이 순교자도 많이 나왔고, 배교자들도 많이 났으나, 기독교인들을 이해한 일반 민중들은 적대치 않았다. 이 당시 니고메디아 회당이 파괴되었고, 성 가다리우스는 옥중에서 순교했다

 

(손 두환. 기독교회사(1) 총신 대학 출판사. p99. 1989) 

 

 

 

그 외에 놋 화로에 산채로 넣어 굽는 방법, 끓는 납 물을 붓는 법, 눈을 빼거나 지체의 일부를 불구로 만드는 방법 등의 박해가 있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3. 1993) 

 

 

 

나. 콘스탄틴 이후의 부흥운동 

 

 

 

로마 제국의 호의에 힘입어 3세기 하반 평화기에는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단으로 인하여 시련을 겪고 논쟁을 하였다. 

 

아리우스(리비아 출신)가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을 부인하고, 제3의 존재(tertiumquid)로 생각하였다. 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는 피조물이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본질과 동등하지 않고 유사하며, 참신이 아니고, 같은 성품도 아니고, 동격도 아니며, 오직 은혜를 주어서 세계 창조의 중개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손 두환. 총신 출판사. 기독교회사(1).p175.1989) 

 

 

 

그리하여 알렉산더 감독은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와 그의 동조자들을 정리하였다.(320-321년)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4. 1993) 

 

 

 

325년 5월20일에 니케아 회의가 콘스탄티누스와 약 300명의 감독들이 모여서 열리고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었다.(참석자에 대하여 유세비우스는 250명. 아타나시우스는 318명이라고 함.) 

 

이 회의에 대세의 결정은 아타나시우스의 힘이었다. 이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인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교의가 확정되었다.

 

(손 두환. 총신 출판사. 기독교회사(1). p180. 1989) 

 

 

 

다. 어거스틴 회심과 부흥운동 

 

 

 

본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이다. 어머니 모니카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죽기 전에 개종한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 기독교 교리문답을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한때는 타락하여 혼전 여인과 동거하여 아들 아데오다투스(390년 사망)를 낳았었다. 

 

그리고 마니교에 빠져 10년 동안을 마니교의 구도자(auditor)로 지냈다. 

 

어거스틴은 주위에 있는 기독교의 지식인들이 소개해준 신 플라톤 주의자 들의 책을 읽고, 마니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돌이켜서 그리스도인이 된, 많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에 영향을 받게 되었고, 로마서(13:13,14)를 읽고 회심을 하여, 신앙에 절정에 이루게 되었다. 이때는 386년 늦여름이었다. 

 

다음해 387년 부활절에 밀라노의 암브로오즈(Ambrose)에게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어거스틴은 그 후에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에 있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감독)가 되었으며, 훌륭한 저술가였으며, 수도원공동체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에 어느 누구보다도 심오한 영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교회의 놀라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5. 1993) 

 

 

 

2. 중세 기독교사에 나타난 부흥운동 

 

중세는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590년경부터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1517년까지 약 1000년을 포함하고 있다. 중세는 교황 권이 극도에 달하여 세속의 권력을 압도했으나 신앙은 반대로 극도의 타락을 한 시기이다.

 

(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p25. 1995) 

 

 

 

가. 십자군 운동 

 

 

 

중세기에 가장 두드러진 부흥운동으로, 주후 1095-1464년에 끝난 4세기에 걸쳐 벌어진 부흥운동이다. 

 

서방 기독교의 국가들이 성지를 이방인의 손에서 탈환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벌어진 운동이다. 정치적인 동기에서 지배된 운동이었다. 

 

당시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과 순교정신으로 참여하였다. 

 

중세 교회의 교권주의와 냉각해버린 신앙의 탈출구를 이 운동에서 찾으려 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6. 1993) 

 

 

 

*십자가 운동의 연혁 

 

①. 제1차 십자군 소집은 1095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설교를 통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외쳤다. 그리고 십자군 소집이 선포되었다. 이때 동원된 십자군은 약 5000명이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②. 제2차 소집은 1147년에 예루살렘이 위협을 받게 되자 클레르보나의 베르나르가 소집했으나 다메섹에서 패함으로 종말되었다. 

 

③. 제3차 소집은 1187년 예루살렘이 이스람교의 살라딘에게 정복되자 십자군이 프리드리히 1세, 리처드 1세, 핍립 3세가 그 지도자였다. 이 전쟁은 3년간의 휴전으로 끝이 났다. 예루살렘을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하였다. 

 

④. 제4차 소집은 십자군들이 세운 국가들이 이스람교도들에게 위협을 당하자 인노켄틴우스 3세가 소집하였으나, 목적과는 달리 방향을 바꾸어 콘스탄티노풀을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을 수립하므로 성지를 회복하는 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또 1212년에는 소년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사 대사전(3). p373. 1994.) 

 

⑤. 제5차는 1219년에 이집트 카이로 원정 십자군이 일어났다. 

 

⑥. 제6차는 1228년에 교황에게 파문당한 친 이스람적인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끈 무혈 십자군이 일어나 예루살렘을 쟁취하였다. 

 

⑦. 제7차는 1248년에 루이9세가 이끈 십자군이 일어났었다. 

 

(송 영봉. 원색 세계 대 백과사전.(19) 한국 교육문화사. p202. 1994) 

 

 

 

나. 수도원 운동 

 

 

 

수도원 운동은 500-1550년 사이에 퇴보된 서부 유럽의 기독교에 개혁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일으킨 사람 에퀴데인(Aquitaini)은 공작인 평신도였으며, 클러니 수도원을 창건 하였다. 

 

또 하나의 수도원 운동은 프랑스 시토에 1098년 몰렘의 ‘로베르’가 설립한 시토(Citeaux)라고 불리는 공동체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이 공동체의 대표적인 인물은 버나드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깊은 명상을 소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사로 잡힌 사람이었다. (김 우영. 교회와 부흥회. 반석 문화사. p27. 1995) 

 

수도원 운동은 쇠퇴와 부흥을 거듭해 가면서, 프란시스 종단, 도미니크 종단, 어거스틴파 은자(隱者)들과 탁발 수도사들을 배출해 냈으며, 영적으로 침체된 교회와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충성도를 심화(深化)하고, 교회를 정화하여 부흥시킨 운동이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7. 1993) 

 

 

 

다.위클리프와 후스의 운동 

 

 

 

이 시대는 교회가 신앙 및 영적으로 타락하여 세속(世俗)한 시대였다. 

 

위클리프(John Wyclif)는 1328-1384년 사람으로 옥스퍼드 바리올 대학의 유능한 교수로 어거스틴에게 감화를 받았고, 그를 통하여 플라톤에게 영향을 받았다. 라틴어와 영어로 쓴 많은 글들로 급진적인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법칙이다’ 생각하여 많은 사람에게 성서를 주기 위하여 1382-1384년에 성서를 라틴어로부터 영어로 번역하였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성서가 교회의 유일한 법칙이다. 교회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중심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자들의 전 회중이 교회다. 그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황은 예정된 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수도교단들과 교황청의 반대를 일으켰으나, 침체되어 있는 신앙에 열기를 불러 일으켜 주고,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종교적인 부흥운동이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7. 1993) 

 

 

 

후스(John Huss)는 1373-1415년에 사람으로 보헤미아에 위클리프 주의를 널리 전파한 자이다. 후스는 프라그 대학에서 신학석사를 받았으며, 신부로 안수를 받았으며, 대학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총장이 되었다. 

 

후스의 사상은 위클리프처럼 교회는 예정된 자들로만 구성되며, 교회의 진정한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신약성서가 교회의 법칙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청빈이 그 생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교황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하였다. 

 

그는 부와 정치적 힘은 교회를 부패케 하였으므로 근본적(根本的)인 개혁(改革)을 요구하며, 가난과 사도시대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후대 종교 개혁가들의 주된 가르침이 되었다. 그는 교회 내(in)의 사람과 교회의(of) 사람을 구별하여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참된 교회원 일 수 없다고 가르쳤다. 

 

1415년 5월 4일에 콘스탄트 회의에서 정죄를 받아 그 해 7월 6일에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타락에 대한 항의와 성서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보헤미아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므로 부흥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38. 1993) 

 

 

 

3. 종교개혁시대의 부흥운동 

 

 

 

가. 루터의 부흥운동 

 

 

 

종교개혁 운동을 벌린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1517년 10월31일에 비텐베르크 대학에 게시판으로도 쓰이는 비텐베르크(Witten berg)교회 정문에, 교황의 속죄권의 그릇됨을 반박하는 내용과 신학적 토의를 하고자,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게시함으로 시작되었다. 그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62개 조항을 보면“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은혜의 복음이다”라고 하였다. 

 

루터는 독일의 동부 아이슬레벤에서 광부로 일하던 아버지의 7남매 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루터는 엄격한 부모에 의해 가톨릭신앙을 배우고, 마크데부르크와 아이제나오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고 1501년 에어푸르트(Erfurt 엘풀트)대학에 입학하여 1502년에 문학사를 받았고, 1505년에 문학 석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 공부를 위한 준비 중, 함께 여행을 하던 중 낙뢰를 맞아 죽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1505년 7월에 성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캄주의의 신학교육을 받고, 1507년에 신부(사제서품)로 안수를 받았다. 

 

1508년 비텐베르크(Witten berg)대학교로 옮겨 1509년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일반교양과목을 가르쳤고, 1512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 대학의 성경강좌(성서학)를 맡았다. (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사 대사전(3). p639. 1994.) 

 

 

 

루터는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놓고 번민하였다. 죄의식에 사로 잡혀서 자유 함을 얻으려고 맡은 직책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기도와 금식, 고행을 하였지만 영혼의 평화를 찾지 못하였고,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라는 말씀을 통하여 위안과 희망을 가졌고,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를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루터의 신학 사상은 바울의 신앙 사상을 따랐고,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옹호하였다. (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사 대사전(3). p639. 1994.) 

 

 

 

루터의 부흥운동은 2천년 기독교 역사상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신앙인 동시에 일종의 성경적 신앙의 부흥운동이었던 것이다.(신 현균. 부흥신학의 이론과 실제. 도서출판. 우림. p144. 1997) 

 

 

 

나. 종교개혁의 의의와 성격 

 

 

 

종교개혁 운동은 중세기에 많은 신앙 운동가들이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신학운동과 신앙운동을 은총만(sola gratia), 믿음만(sola fide}, 성서만(sola Scriptura), 이라는 구호를 가지고 성공시킨 일대 정신운동이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1. 1993) 

 

 

 

신학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를 당했던 복음을 해방시킨 운동이요. 신앙적으로는 율법주의에서 탈피한 이신득의 운동이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1. 1993) 

 

 

 

이 운동은 로마 카톨릭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타락한 종교 암흑시대에 종교의 부흥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재발견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의 세가지 원리 

 

①. 신학적으로는 잃었던 성서를 다시 발견하고, 덮어 있던 성서를 다시 열게 하였다. 성서만을 기독교인의 유일한 규범(規範)으로 삼고, 기독교회의 척도(尺度)로 삼았다. 

 

②. 하나님 은총에 대한 재 인식을 시켰다. 인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며, 결코 사람의 어떤 공로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시며, 그분만이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구세주이시다를 강조하였다. 

 

③.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즉 믿음으로만 하나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깨우쳐 준 운동이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2. 1993)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001. 우리의 주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 하라…”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땅 위에 믿는 자들의 전 생애는 계속적 참회라야 한다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 

 

002. 이 회개라는 말은 참회의 예전 곧 사제의 직에 의하여 집행되는 참회나 사죄에 대한 말로 이해될 수 없다. 

 

003. 참회는 내면적 참회가 외적으로 여러 가지 육욕을 죽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참회 할 수 없다. 

 

004. 형벌은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동안은 계속되는 것과 같이 내면적 참된 회개 역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005. 교황은 그 직권에 따라서나 교회의 칙령에 따라서 부과하는 징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다. 

 

006. 교황은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사해 졌다는 것을 선언하고 확증하는 것 이외에 아무 죄책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만일 억제 당한 일에서 사죄한다든지 그의 직책이 멸시 받는 경우에는 죄는 제거되지 않고 용서 받지도 못한다. 

 

007. 하나님은 철저히 겸손하게 되지 않은 사람의 죄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자기의 대행자인 사제에게는 굴복하신다. 

 

008. 고해와 참회를 하게하는 교회의 법규는 산 자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다. 

 

009. 그러므로 교황이 언제나 죽음과 외적 공경을 예외로 취급할 때면 성령께서 교황을 통하여 자비를 내리신다. 

 

010. 임종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장차 사면을 받을 연옥 때문에 교회가 제정한 참회를 보류하는 사제들이 몽매하고 사악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011.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는 참회와 사죄를 연옥의 징벌이란 것으로 변해버린 이 가라지는 감독들이 자는 동안에 심겨진 것이다. 

 

012. 전에는 일어난 죄의 사건에 대한 참회와 사죄라는 소위“교회법에 따른 징벌”은 진실한 회개가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사면 선언 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부과되는 것이다. 

 

 

 

013.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으로써 모든 허물에 대하여 치루어야 할 것을 만족시켰고 교회 법규에 대하여 이미 폐기 되었다. 

 

014. 죽은 사람의 불완전한 경건이나 불완전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큰 공포를 동반하는데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큰 공포가 있게 된다. 

 

015. 이 공포와 놀람 자체만으로도-다른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연옥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016. 지옥, 연옥, 또 천국은 각각 구별되기를 이미 절망한 상태와 절망에 빠져들어 가는 경우와 구원의 확실성이 각각 구별되는 것과 같다. 

 

017.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불안과 공포가 증가하고 동시에 그들의 사랑이 그들에게서 점점 자라고 더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018.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공로의 상태에나 사랑의 증가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성의 근거로나 성서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는 것 같다. 

 

019.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모두가 행복을 누리고 있고 그들의 축복을 확신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매우 확실한 것이라고 한다고 해도 증명할 수 없다. 

 

020. 그래서 교황은 “모든 징벌의 완전한 사면”이란 말로써 벌이 깨끗이 사면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부과하려 했던 징벌만을 사면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021.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부를 삼으로써 사람이 모든 징벌에서 해방 받고 행복해 진다고 말하는 면죄부 판매 권유자는 그릇되다. 

 

022. 사실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에 대해서 단 하나의 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징벌은 그들의 교회의 법규에 의하여 받아야 하는 것이다. 

 

023. 만일 징벌의 사면이 누구에게든지 주어질 수 있다면 그러한 사면은 소수밖에 없는 완전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 확실하다. 

 

024. 그래서 백성은 대부분은 모든 징벌에서 해방 받는다는 무차별적이고 찬란한 약속에 의하여 기만을 당한 것이다. 

 

025. 교황이 연옥에서도 일반적으로 장악했다는 것은, 같은 권세를 가진 모든 감독과 목사도 자기의 감독구와 교구 안에서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다. 

 

026. 교황은 그가 (연옥에 대하여 전혀 갖지 않은) 이 열쇠의 권세를 근거로 하여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대도의 방법으로 영들에게 용서를 사여한다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이다. 

 

027. 헌금 궤에 떨어진 돈이 쩌렁 소리를 내자마자 연옥에서 영혼들이 올라온다고 하는 사람들의 사람은 교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028. 헌금 궤 안에서 울려나자마자 이득과 탐욕이 자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교직자의 도움이나 대도가 성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다. 

 

029. 성 베리누스와 파스칼리스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사면을 받겠는지 더욱 확신할 수 없다. 

 

030. 아무도 자기의 회개가 진실된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가 죄의 완전한 사면을 받겠는지는 더욱 확신할 수 없다. 

 

031. 진실된 참회를 하는 사람도 드물고 진실된 마음으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 매우 드문 것이다. 

 

032. 그들이 산 면죄부 증서로써 행복을 확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교사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 것이다. 

 

033. 교황의 면죄부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데 의존하는 가장 높고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한다. 

 

034. 왜냐하면 면죄부로서 얻는 은총은 사람으로서 지워진 성례전적 속죄행위로 사하는 벌에만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035. 영혼을 연옥에서 구출한다거나 참회사를 마음대로 택할 수 있는 참회 증서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비 그리스도적인 것을 설교한다. 

 

036. 어떤 크리스천이든 자기의 죄에 대하여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히 면죄 받는다. 

 

037. 모든 참된 크리스천들은 산 자든지 죽은 자든지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의 선물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역 재산에 참예할 수 있다. 

 

0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사죄와 거기에 참예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교황의 사죄는 하나님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039. 면죄부의 관대한 선사와 동시에 참된 회개를 민중 앞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며 학식이 있는 신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040. 참된 회계는 징벌을 구하고 그것을 사랑하나 많은 면죄부를 갖는 것은 징벌에서 해방하고 사랑이 그것이 싫어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그렇게 할 기회를 준다. 

 

041. 교황의 사죄 권에 대해서 설교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그것을 사랑의 업적보다 중요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042. 면죄부에 의한 사죄는 자선사업과 비슷한 것으로 비교하는 것은 교황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3.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궁핍한자에게 꾸어주는 사람은 면죄부를 사는 것 보다 더 낳은 것을 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4.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의 행위로 성장하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면죄부로써 더 선명해지지 못하며 다만 징벌을 면할 뿐이다. 

 

045. 이웃이 괴로워 하는 것을 보고도 본체 만체하고 면죄부를 하는 사람들은 교황의 사죄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6. 그리스도인들이 넉넉한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면 자기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장할 의무를 지며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 

 

047. 면죄부를 사는 일은 자유로 할 것이며 결코 강제로 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8. 교황은 면죄부를 주는 데서 얻는 돈보다는 사랑의 열성이 깃든 기도를 더 원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49. 교황의 면죄부는 사람이 그것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을 잃는다면 그처럼 해로운 것은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050. 만일 교황이 면죄부 판매에 설교자들의 공갈행위를 안다면 그는 그의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더 원 할 것이다. 

 

051. 어떤 면죄부 판매설교자들 그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교황은 자기 돈으로 또는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라도 갚아줄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052.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행복해지리라 믿는 것은 헛된 신앙이다. 교황 자신이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을 하려 한대도 그렇다. 

 

053. 면죄부 설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선포되기를 금지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054. 만일 사람이 한 설교에서 사죄 권을 행사함에 복음말씀을 전하는 시간보다 더한 시간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055. 만일 사람이-매우 적은 가치를 가진-면죄부를 한 방울과 단순한 행렬과 축제로써 축하한다면 매우 값비싼 백 개의 방울과 백배의 행렬과 굉장한 축제로써 기리고 축제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교황의 견해이다. 

 

056. 교황이 면죄부를 나눠주는 것은 근본인 교회의“보화”(여분의 공적을 말함)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충분히 묘사할 수도 알려줄 수도 없다. 

 

057. 왜냐하면 그것이 현세적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보화를 쉽게 나누어주지 않고 도리어 모으기에만 힘쓴다는 것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058. 그 보화는 그리스도의 보화이지 성자들의 공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교황의 작업 없이도 언제나 역사하고 내적 인간을 위해서는 은총을 주며 외적 인간을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지옥을 주는 것이다. 

 

059. 성 로체스는 공동체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의 보배라고 불렀지만 그는 그 시대의 통용되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060. 우리는 이 보화란 것을 그리스도의 공로로써 교회의 산물로 준 교회의 열쇠의 권한이라고 근거 있게 또 심증 있게 말할 수 있다. 

 

061. 왜냐하면 형벌의 면죄와 교황이 관리하도록 된 조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교황의 권한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062. 그러나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대한 거룩한 복음이다. 

 

063. 이 보화는 자연적 상태로는 미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 된 자를 마지막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064. 그 반대로 면죄부의 근거인 보화는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환영을 받는다. 그것은 마지막 자를 첫째로 만들기 때문이다. 

 

065. 그래서 복음의 보화는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다. 

 

066. 그러나 면죄부의 보화는 오늘 날에는 사람의 부를 낚는 그물이다. 

 

067. 설교자가 큰 은총을 주기 위하여 외치며 파는 면죄부는 큰 이익과 향락을 갖다 주기 때문에 큰 은총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068. 그러나 그 같은 면죄부는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축복과 비교한다면 매우 적은 은총이다. 

 

069. 감독들과 교구 목사들은 교황의 사죄 권을 위임 받은 자들을 큰 경의를 가지고 맞아들이게 한 책임이 있다. 

 

070. 그러나 그들이 더 큰 책임을 지는 일은 이 위임 받은 자들이 교황이 맡긴 일 대신에 자기들의 꿈을 설교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 대해서 이다. 

 

071. 교황의 사죄 권을 반대하는 사람은 저주받고 추방당할 것이다. 

 

072. 그러나 면죄부 판매 설교자들의 변덕스럽고 파렴치한 말을 거슬러 걱정하고 슬퍼하는 축복을 받을 찌어다. 

 

073. 교황은 면죄부 판매에 손해를 입히고자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 분노나 추방으로 보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074. 교황은 면죄부라는 구실 안에서 거룩한 사랑과 진실성에 손실을 끼치기 위하여 책동하는 사람들에게 더 심하게 분노와 추방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볼 것이다. 

 

075. 교황의 면죄부에는 굉장한 힘이 있어서 어떤 사람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성모를 능욕했더라도 죄에서 해방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헛된 생각이다. 

 

076. 그와 반대로 우리는 교황의 면죄부는 가장 적은 죄도 없이 할 수 없으며 죄로써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077. 만일 성 베드로가 지금 교황이었더라도 큰 은총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와 교황을 모독하는 것이다. 

 

078. 그와 반대로 우리는 이 교황이나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부보다 더 큰 은총, 즉. 다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福音)과 성령의 능력과 병 고치는 은사들을 자유로이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079. 교황의 문장을 화려하게 찍은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능력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080. 이 같은 가르침이 민중 앞에서 말해지는 것을 보고 묵인하는 감독 교구 목사 신학자들은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081. 면죄부에 대한 그 같은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설교는 교황의 명예와 품위를 비방이 또는 순박한 삶을 끌 수 없는 예리한 질문에 대해서 수호하는 것은 아무리 학식 있는 사람일 찌라도 어렵게 만든다. 

 

082. 예를 들면 교황은 왜 모든 영들을 그의 가장 정당한 이유로서 가장 거룩한 사랑 때문에 또 심령들의 지극한 곤궁 때문에 연옥에서 해방시키지 않는가. 실제로 그는 베드로 성당을 세우는데 불쌍한 그리스도인의 돈으로써 하기 보다는 자기의 돈으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083.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은데 왜 아직 죽은 자의 장래식이나 해마다 하는 제사가 남아있으며 교황은 죽은 자들을 위해 바친 것을 돌려 주지도 않고 그 기부금을 취소하기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084. 또는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자 즉, 적대자 들에게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영혼으로 속해내기를 허락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영혼자체의 큰 곤경을 위해서 사랑으로부터 해방하여 내지 않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하나님과 교황에 대한 경건이 아니겠는가. 

 

085. 또는 참회에 관한 옛 조문이 오래 전에 사실 폐지되고 사용되지 않고 죽은 글이 되었는데 왜 아직 사죄 권과 관련되어 그것이 아직 효력이 있고 산 조문인 것처럼 돈으로써 구해낸다고 인정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086. 또는 오늘날 제일 부자보다 더 능력을 가진 교황이 지금 성 베드로 성당을 세우는데 불쌍한 그리스도인의 돈으로 하기 보다는 자기 돈으로 할 것이 아닌가. 

 

087. 또는 교황은 참회로써 완전한 용서를 받고 영적 재산에 참예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사해주고 나누어 주려고 하는가. 

 

088. 또는 교황은 용서와 은총에 대한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번 주는 대신에 백번 모든 믿는 자에게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 되겠는가 

 

089. 교황이 면죄부로써 돈보다 구원을 관심했다고 본다면 왜 그는 똑같은 효력을 가졌다 고 보이는 면죄부에 대한 옛 교서를 정지시겠는가 

 

090. 만일 평신도의 예리하고 사려 깊은 항의를 권력으로 억압하고 근거제시를 통하여 가라 앉히지 않는다면 교회의 교황은 원수에게 조소거리가 되고 그리스도인은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091. 만일 면죄부가 교황의 정신과 의견에 따라 설교로 권유한다면 이 모든 의문은 해답되었을 것이며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092. 평화가 없는데도“평화”,“평화”하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093. 그러나 십자가 없는 곳에“십자가”,“십자가”하고 그리스도 백성들에게 말하는 예언자만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094. 크리스천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095. 그래서 여기 평화가 있다고 하는 태평한 환상으로 보다는,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더 의지하게 하여야 한다. 

 

*참조 (http://my.netian.com/~cavin7/95개조.htm) 

 

 

 

4. 근대 교회의 부흥운동 

 

 

 

가. 독일의 경건 주의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근대 과학과 철학(哲學)은 기독교 신앙(信仰)에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런 시대에 가슴에 와 닿는 종교적 체험과 경건생활의 미덕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 경건주의(Pietism) 운동은 스콜라적 경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건설해 나가는데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다 세상에 대한 금욕적 자세가 부과되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3. 1993) 

 

 

 

*스콜라(schola)란 말은 라틴어의 학교란 뜻이다. 즉 4세기부터 서 유럽 기독교의 수도원과 성당에 마련된 부속학교에서 가르치던 학문을 스콜라 학(scho-lasticism)혹은 스콜라 철학(scholastic philosophy)라 한다.(강 영선. 교육출판공사. 세계철학 대전. p610. 1989) 

 

독일 경건주의 중심인물은 쉬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이다. 이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성서적 의학(exegesis)을 배웠고, 신앙훈련을 받아 내면적 깊이를 가꾸기 시작했다. 

 

이는 신비적 경향이 짙었던 아른트(Johann Amdt 1555-1621)의 <진실한 기독교인>(참된 기독교에 대한 네 권의 책; four Books Concerning True Christianity 1606-1609)에서 영향을 받았고, 게르하르트(Paul Gerhardt)에게서도 감화를 받았으며, 텔링크(Willem Teelinck)와 푀트(Gisbert Voet)가 중심이 되어 있던 ‘화란의 경건 주의자(Dutch Pietist)’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영국의 청교도인 하나 베일리(Lewis Bayly)나 박스터(Richard Baxter)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쉬페너는 1666년에 교회의 목사가 되어 신령한 종교생활을 위한 소집단(小集團)을 만들고 그 그룹을 Collegia Pietist라 불렀다.  (Collegia-Pietistm-독일 경건주의) 

 

개신교의 부흥운동은 독일을 중심 하여 쉬페너가 일으켰던 경건운동에 그 기조를 가진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4. 1993) 

 

 

 

그는 경건한 요구(Pia desideria)를 발표하여 성직자들도 논쟁하는 설교가 아니라 참 삶의 경건성과 그 훈련을 형성시켜 줄 수 있는 방향의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그러한 의미의 신학 교육을 실시해야 된다고 갈파(喝破)하였다.

 

(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2. 1995) 

 

(*갈파(喝破)=그릇된 설을 무너뜨리고 진리를 밝혀 말함) 

 

 

 

나. 모라비안 교도의 부흥운동(Moravian Brethren) 

 

 

 

모라비안 교도들은 보헤미아의 후스교회의 사람들로 박해를 피해 모라비아에서 숨어 살던 무리들로, 1722년경부터 독일 작센 지방으로 피난을 오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경건주의의 각성을 불러일으킨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 중에 하나가 진첸도르프(Nicolaus Ludwing Von Zizendorf. 1700-1768) 백작의 지도 하에 결성된 모라비아형제단(Moravian Brethren)이다. 진첸돌프는 작센 고위관리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쉬페너’와 ‘프랑케’와 절친한 친구인 외조부가 키웠으며 할레학교(Paedagogium)에서 교육을 받았다(1710-1716).

 

(강 병도. 기독 지혜사.교회사 대사전(3). p255. 1994.)

 

 

 

1727년 8월을 모라비아 교회의 재생의 날로 본다. 

 

모라비아 교회는 ‘어디든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가겠노라’는 결의로 선교에 대한 사명감에 불탄 교회였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5. 1993) 

 

 

 

이 교회의 목적은 주로 전도였다. 숫자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존 웨슬리를 비롯한 세계의 많은 전도자들이 이들의 열심과 선교의 비젼에서 영감을 받아 헌신을 다짐하였다.

 

(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3. 1995) 

 

 

 

다. 웨슬리의 부흥운동(John Wesley, 1703-1791) 

 

 

 

영국은 17세기말부터 산업혁명의 결과로 자연신론(Deism)과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회는 종교에 무관심하고, 퇴폐한 도덕생활에 빠졌다. 그리고 기독교계는 합리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때 18세기의 영국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준비된 인물이 죤 웨슬리였다.

 

(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3. 1995) 

 

 

 

죤 웨슬리는 1703년 목사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19자녀 중에 15째의 소생으로 태어났으나, 믿음에 대한 기쁨이 없이, 영적 고민에 늘 쌓여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738년에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성경 연구와 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로마서 서문을 듣다가 마음이 뜨거운 체험을 하고, 1739년에 런던 패터레인 집회소에서 기도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을 체험하였다. 

 

당시 성공회는 의식을 위주였으며, 중상류 계급에만 관심을 가지고 대중과 노동자를 방치하였으므로, 웨슬리는 주로 공장지대와 빈민촌을 다니면서 심령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7. 1993) 

 

 

 

죤 웨슬리는 스코트랜드와 아이슬랜드에까지 성공회가 가르치지 못한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였으며, 연 평균 12,000킬로미터를 다니며 부흥운동을 펼쳤다. 1791년 그가 죽던 해 그를 따르는 교인 수는 영국이 71,668명이었고, 미국이 43,26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7. 1993) 

 

 

 

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다는 점은 루터와 같았으나 구원의 본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루터와 달리하였다. 그는 신자는 현세에서 죄를 멀리하여 청결한 생활에 들어가야 하며, 마음속에 사랑이 지배할 때 완전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예정론에 있어서는 반 칼빈주의적 입장을 처하였다. 

 

죤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얼어붙은 영국의 종교를 녹이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를 개혁시키고, 선교의 불을 일으키는 기폭제(起爆劑)가 되었다.

 

(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4. 1995) 

 

 

 

라.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 1720-1772) 

 

 

 

이 운동은 합리주의의 팽창, 문화적 혼란의 와중에 미국 뉴저지의 라리탄 계곡의 화란 개혁교회 서클에서 시작되어 50여년 동안 계속된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을 시작한 프렐링후이센(Theo-dore J. Frelinghuysen)은 회개와 새 생활을 강조하였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멸망 받을 것이라고 외쳤다. 이와 같은 경고를 받아들여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8. 1993) 

 

이 운동 중에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나타나 영혼을 일깨우는 설교를 통하여 회개를 불러 일으켰다.(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4. 1995) 

 

조나단 에드워드는 신의 주권성과 예정론을 골자로 한 칼빈주의 신학에 철저하여,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설교를 연속으로 하였다. 이 설교는 뉴잉글랜드에서 발달한 알미니안 주의에 대항한 것이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9. 1993) 

 

 

 

이 부흥운동은 첫째로 불신앙 사상을 물리쳤고, 둘째는 각 교회가 영적으로 소생케 하였고, 셋째로는 박애사업과 교육사업과 선교사업에 열이 일어나게 하였다.

 

(김 우영. 반석 문화사. 교회와 부흥회. p35. 1995) 

 

 

 

마. 제 2차 대 각성 운동 

 

 

 

이 운동은 18세기말부터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해서 강력히 일어났던 부흥운동으로 주로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9. 1993) 

 

 

 

이 운동은 교회 일치의 한 운동이었다. 그로 인하여 ‘장로회(Presbytational presbyterian church)' 교회가 세워졌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49. 1993) 

 

 

 

이 부흥운동에서 출중하게 서있는 사람이었던 장로교의 목사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1792-1875)는 신학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으로 부흥회를 새 방법으로 이끌었다. 그로 인하여 1857년-1858년에 전국적으로 매일 기도회, 평신도의 교회지도가 특수하였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0. 1993) 

 

 

 

이때에 신앙부흥은 매우 조용하고 점차적이었다. 그리고 많은 교회의 회원을 증가시켰다. 이 부흥운동의 뚜렷한 국면은 대학생들의 선교열이 고조(高調)된 일이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0. 1993) 

 

*고조(高調; 크게 감흥을 일으키는 일) 

 

 

 

바. 19세기말의 부흥운동 

 

 

 

19세기말의 두드러진 부흥운동은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에 의해 일어났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1. 1993) 

 

 

 

무디는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언어(言語)는 단순하였고, 그의 정신은 따뜻하고 성실(誠實)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을 이끌었다. 

 

무디는 성악가 생키와 함께 동역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무디는 외국선교에 부흥운동을 통하여 큰 공헌을 하였고, 외국 선교자원, 학생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선교를 위한 무디 성서학원 설립을 하였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선교 지향적인 특색을 지녔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2. 1993) 

 

 

 

또 19세기 영국의 다른 교회들은 침체에 빠질 때에, 감리교회에서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국내외선교에 잠을 깨웠으며, 주일 학교(Sunday School Work)와 성경 유포와 종교문학(Religious Literature)과 여러 가지 자선 사업에서도 눈을 뜬 것이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2. 1993) 

 

 

 

 

 

현대 부흥운동의 고찰 

 

 

 

1.부흥 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상황 

 

 

 

가. 신학사조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러 과학문명이 급속히 발전하여 이성의 힘이 팽배하게 되었다. 그때의 신학사조(思潮)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대체로 성서의 계시성을 부정하고, 칸트의 영향 아래서는 그의 회의론적 인식론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52. 1993.) 

 

 

 

* 사조(思潮 명사>한 시대의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 

 

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의 관념론의 권위자이다. 철학의 체계를 세운 사람이다. 튀빙겐(178-1793)에서 공부를 하였고, 예나와 베른 대학교를 포함하여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었다.(1818-1830). 

 

헤겔은 실제론(실체가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과 주관적 관념론(실체는 개인의 의식이라고 보는 견해)을 모두 배격하였다. 

 

헤겔은 모든 경험이 인식 자(the knower 알고 있다, 이해(체험)하고 있다, 인지하다, 분간(식별)하다,)와 인식대상(the known 알려진, 이미 알고 있는)의 통일성을 전제한다고 주장하였다. 

 

헤겔은 종교란 단순히 철학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상상력이 풍부하고, 생생한 방법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의 입장은 범신론과 아주 유사하였다.

 

(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대사전. 3권 p798. 1994.) 

 

 

 

②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의 철학자.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경건주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일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770년부터 대학교에서 논리학(論理學)(바른 사고의 형식 및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과 형이상학 (形而上學)(형이상의 존재를 연구하는 철학의 부문, 무형학(無形學))교수로 재직하였다. 

 

칸트의 연구 목적은 지식을 회득함에 있어서 이성이 작용하는 방식과 (칸트에 따르자면) 논리학과, 수학과, 물리학에서 지성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a priori) 지식이, 정당화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을 유지하고 도덕의 참된 본성을 설명하는 것도 그의 목적이었다. 하나님에 어떤 지식도 불가능하다는 간트의 견해는 프로테스탄티즘에 극단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신학은 인간학으로 바뀌었다. 슬라이막허의 낭만주의와 리출의 윤리적인 종교도 칸트의 견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강 병도. 기독 지혜사. 교회대사전. 3권 p299. 1994.) 

 

 

 

*자유주의: 합리주의적 바탕에서 기독교와 성서의 초월성을 부정하고, 인본주의적 바탕에서 신학을 형성함으로써 전통적 기독교 신학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 성서를 토막토막 해부하고 해쳐 감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 정신의 추상에서나 이룩되는 것이 아니면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서 찾아야 한다. 

 

*초월성의 배제: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철저하게 인문주의(humanism)의 틀속에 집어넣었으며, 과학주의는 인간의 과학정신과 배타되는 어떤 신학도 용납하지 못하는 인문주의(Humanism)에 사로잡혀 있었다. 

 

(1), 다윈의 진화론: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2), 성서의 창조론: 퇴각 되어야 한다. 

 

(3), 진화론: 성서해석의 원리로 일어나야 한다. 

 

이때의 신학적 분위기는 과학주의의 권위 아래 교회들은 창조론보다 진화론의 가설아래서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에서 부르짖었던 성경의 절대권위는 역사주의의 심판 앞에서 갈래갈래 찢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이해는 비교 종교학적이나 종교사학적 차원에서 종교중의 하나로서 연구되거나 종교 심리학적 분석으로 연구되거나 윤리종교로서 이해되는 철저한 인문주의의 여과를 통해서 문화 종교현상으로 이해되었다. 

 

 

 

③ 하르낙(Adolf Von Harack) 

 

1899-1900년에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한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 지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 신관, 세계 종교와 문화, 신앙과 이성, 하나님의 의와 지상의 권세, 정치와 종교 등의 연속성에 대항 신뢰, 사랑과 평화의 나라가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적 사회로서의 희망 등으로, 인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화해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④ 칼 바르트 

 

1918년 출간된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의해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신과 인간의 불연속성을 전제하는 계시 신학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 같은 입장에서 형성된 “신 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하고 계시 신학을 주장하였으며, 성서를 계시의 책으로 보기 보다는 계시에 대한 증언으로 해석하여, 계시의 객관성의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명하지 못함으로써, 복음주의 운동은 신 정통주의 운동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나, 신 복음주의 운동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미국 교회에 새로운 각성을 일으켜 교회 부흥과 복음전도, 해외 선교에 큰 자극이 되었다. 

 

신 복음주의 운동은 1948년 오켕가 박사가 퇴조한 편협주의적 근본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에서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였다. 

 

신 복음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은 오캥가를 비롯해 칼 헨리, 에드워드 카아넬 등이며, 이들이 지향하는 바는 근본주의의 부정주의를 지향하고, 보수신학의 우수성을 학적 탐구와 변증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복음주의 신학의 학문적 연구와 전파, 근본주의의 윤리적 퇴조로부터 탈피하여 복음의 사회, 윤리적 가치에 적극성을 갖게 하였다. 

 

 

 

다, 현대 복음주의의 동향 

 

 

 

20세기 후반 자유주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적 전통을 이어가려는 복음주의는 아직도 교회의 주류 세력을 이루고 있다. 1957년 프린스턴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74%의 신교 목사들이 신학적 입장을 보수주의 또는 근본주의 신학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3)복음주의 신학자들 

 

①,Herman Dooyeweerd:이성적 사고에 대한 초월적 비판을 제기하여 본능적인 종교적 근거를 발굴해 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②,Conelius Van Til:칼 바르트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복음주의 신학을 변호하면서 16권의 저술을 통해 신 정통주의와는 구별되는 철저한 보수주의 전통적 기독교 옹호에 공헌하였다. 

 

③,Carl F. H. Henry:현대 제 신학의 배경과 논점을 비판하면서 계시 신학으로서의 성서적 기독교 신학을 주장하였다. 

 

 

 

4)최근 들어 주목할 만한 복음주의적 화합은 1966년 베를린 세계 전도 대회로부터 이야기 할 수 있다. 

 

2,부흥운동의 발전과정 

 

 

 

가,빌리 그래함을 중심한 대중전도 부흥운동 

 

 

 

현대의 서구 사회는 진리의 불신임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진리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전도대회가 열린 기간 중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기도운동이 일어났으며, 전도대회가 3주간의 계획이 연장되어 8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후로 세계의 지도적 전도 부흥사가 되었다. 

 

1950년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TV, 영화, 책, 잡지 등 그 밖의 여러 가지 전도사업을 통해 복음을 전하며, 그는 2차대전 후 전 세계의 5대양 6대주를 누비면서 10만 단위의 전도 집회를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은 기독교인은 두가지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ㄱ,인간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 

 

ㄴ,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기독교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 

 

 

 

*빌리 그레이엄(William Franklin Graham 1918- ) 

 

노스캘리포니아 주에서 태어나 밥존스대학교, 포로리다 성경학교, 일리노이 주휘튼대학을 나왔다. 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43년에 새로 설립된 기독교 청소년단의 초대 전도사가 되었다. 1948년 미니애폴리스시 노스웨스턴대학 학장으로 있는 동안에 로스 안젤스 전도대회를 열어 명성을 얻게 되었다. 

 

빌리 그레이엄 복음 전도협회를 세우고 미니에폴리스에 본부를 두었다. 1954년 런던 대 전도대회를 3개월 동안 열었다. 

 

1954년 이후로는 찬송인도자 배로우스, 가수 시어와 그리고 동역자 팀을 데리고, 세계 도처에서 전도대회를 열었으며, 개인의 신앙의 결단을 강조하였다. 

 

1950년에는 라디오 방송에 ‘결단의 시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갈등의 영혼들(Souls in Conflict), 1페니 짜리 동전 두 닢(Two A Penny), 그의 땅(His land) 같은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였고, 신문에 고정 칼럼도 썼으며,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를 공동 창간하였다. 1960년 월간지 디시젼을 창간하였고, 테례비젼을 통해 복음 전도를 극대화하였다. 

 

그의 저서 ‘하나님과의 화목’과 ‘불타는 세상’은 세계적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철저한 성경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로 매우 다양한 청중을 동시에 감동시키었다.

 

(강 병도. 기독 지혜사.교회사 대사전(3). p218. 1994.) 

 

 

 

3. 부흥운동으로 야기된 문제들 

 

 

 

부흥운동은 영적인 소생을 일으켜서 심령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 교회성장에 영향을 끼친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그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제2의 각성운동이 퍼질 무렵 미국의 회중교회는 발전과 극단의 두 길을 걸었다. 일부의 자유주의자들은 이 운동에 극렬히 반대하다가 아리우스의 그리스도론을 옹호하고 있던, 체닝(william Ellery Channing, 1780-1842)을 따라, 1815년 분립하여 유니테리언이란 이름으로 자립하였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했지만 동시에 칼빈의 예정론을 매섭게 공격하여 구원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품과 신앙에 따라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부흥의 영향으로 수백을 헤아리는 신학교가 세워졌다. 신학교의 설립은 어떤 면에서 많은 목회자를 배출하는 좋은 점도 있지만, 교회 분열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침례교신자였던 농부 월리암 밀러(1782-1849)는 다니엘서를 읽다가 주의 재림의 날을 1843년이라 계산해 내고 추종자들을 모아 1845년 재림파를 창설하였다. 밀러의 영향을 받은 제7일 안식일 교회는 1863년에 정식으로 발족했고, 이 종파의 생성(生成)을 시초로 여러 종파가 생겨났다. 

 

윌리암 밀러는 1816년 10월 12일, 그는 교회 집사의 요청으로 이사야 53장을 주제로 한 설교문을 낭독하던 중 참을 수 없는 강렬한 감동을 경험하고 교회에 입교하였다. 그 후 그는 조직적인 성경연구에 착수하였다. 2년간 성경연구 끝에 도달한 결론은, 예수님의 재림이 복 천년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으며, 다니엘서 8장의 2,300일 예언기간은 다니엘9장의 70주일과 마찬가지로 주전 457년에 시작하여 1843년경에 마친다는 것이었다. 

 

밀러는 55세부터 재림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재림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는 동안 사방에서 강연 요청이 왔다고 한다. 1833년 9월 (재림운동 시작한지 2년)에는 그가 사는 지역의 침례교회가 그와 상의도 없이 그를 목사로 선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834년 이후 밀러는 모든 시간을 재림 기별의 전파에 바쳤다. 1836년에는 재림에 대한 16개의 강연이 단행본으로 묶여 출판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증보되면서 재판되었다. 이리하여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밀러 주의자라 부른다. 

 

그후 1840 재림 운동을 전개했으며, 1840년 2월에는 재림 운동의 기간지인 "사인즈 오브 타임즈"를 발간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문서 운동은 4년 동안 밤중소리, 진리의 소리, 서부의 밤중 소리, 경고의 나팔, 엘리야의 소리, 등 수십여개 간행물을 유도하였다. 

 

1843년과 1844년에 절정을 맞았던 이 운동에는 700여명의 목사와 5만여명의 평신도가 가담하였는데, 교단별 분포를 보면 감리교가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나머지 여러 교파들이 섞여 있었다. 

 

 

 

모르몬(Mormon)교는 스미드(Joseph Smith 1805-1844)라는 사람이 모르몬경을 성서 보충용 신비의 계시서라 하여 1830년에 뉴욕의 페이에트 교회에서 출발했으며, 여기에서 문제되는 일은 일부다처제, 집단생활, 교인들에 대한 철저한 경제적, 사회적 감시 제도로 특수성이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 

 

 

 

제1절 초대 한국 교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 

 

 

 

1.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 

 

 

 

가. 시대적 개관 

 

 

 

기독교가 이 땅에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한 때는 조선 왕조가 외세에 못 이겨서 몰락(沒落) 과정에 있을 때였다. 

 

(1876년 강화수호조약이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1882년 6월에는 조영 수호 통상조약이 제물포에서 체결되었고, 같은 해 6월에 독일과도 수호조약을 맺었고, 1884년 6월에는 러시아와 1886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음으로 조선은 구미 제국에 널리 문호를 개방하였다.) 

 

문호의 개방으로 외세에 위기의식이 짙어지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론 근대적 제도, 서양의 기술을 섭취(攝取), 채용해야겠다는 개화신조가 더욱 고조 되었다. 

 

내부적으론 개화(開化)와 수구 두 세력이 대원군과 민비의 대립에 얽혀서 정계는 혼란을 빚어지게 되었다. 

 

경제적으론 국가의 재정적인 궁핍이 심하였다. 그로 인해 농민의 세금이 증가되므로 양반 관료에 대한 불평이 높았으며,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나. 종교적 상황 

 

 

 

한국의 역사를 통해 한 대 전성했던 선이나 불교나 유교의 정신적 차원이 고갈되고 그 형식과 명분만으로 무게 없는 반복만 되풀이 하던, 종교적 신앙과 정신생활의 전례 없는 진공기로 근대 한국은 종교적 생활에서 심한 허탈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때에 유교는 현실적인 윤리기강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종교적 국면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불교는 너무 신비주의에 흘러 한국인의 정신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한국은 새 종교에 대한 일종의 갈망이 현상적으로 널리 펴져있었다.

 

(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68. 1993) 

 

 

 

내외의 관찰자들에게 한국은 비종교적인 인상을 짙게 풍기었다. 1953년 하멜(Hendrik Hamel)은 한국은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이들은 종교에 관하여 전혀 논란하지 않는다”고 평한 일이 있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69. 1993) 

 

외형적인 종교의 부재와 함께 국내외 혼란이 곁들여 있었다.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과 1876년 2월 26일 강화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와 같은 구미 제국과 수호 조약을 맺음으로 은둔 국의 고립은 세계 무대 앞에 깨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황막한 새 정세의 전개에, 기댈 곳이 없는 서러움을 안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가 선교되기 직전의 근대 한국의 모습이었다.(이 만신. 청파. 교회성장과 부흥회. p70. 1993) 

 

 

 

2. 복음의 수용 

 

 

 

가. 선교사들의 선교이전 시대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카톨릭을 통해 들어와 있었다. 

 

1866년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B.A)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므로 한국 초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토마스는 북경에서 조선인 동지사(冬至使-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를 만나, 조선 내에 카톨릭의 수난을 알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 만주 주재원인 월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주선으로 1865년 9월 4일 중국 지프를 떠나 조선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카톨릭 교인과 접촉을 하여 우리말 지식을 습득하면서 성서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서울에 가서 전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했지만, 심한 폭풍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만주 피즈우에 표류하여 북경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 갈 것을 결심하고 1866년 한국이 필요하리라는 상품을 싣고, 통상 개시의 유무를 시탐하기 위하여 파견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널 서먼호를 타고 한국을 향하였다. 

 

이 상선이 대동강 입구에 들어서자 평안도 감사가 문정서를 보내어 온 까닭을 묻자 한국과 통상을 개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자 감사는 크게 놀라 거절을 하였다. 그러나 이 상선은 대동강을 따라 평양시까지 올라갔다가 때마침 내린 홍수와 바닷물의 만조로 사주(沙柱)를 넘어왔다가 물이 빠지자, 배가 모래와 진흙 속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국 병사의 포화에 배는 불타게 되었고, 토마스 목사도 다른 일행과 함께 살해 되었다.

 

(백 낙준 한국 개신교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P48) 

 

 

 

그러나 개척 선교사의 한 사람인 모페트(Samuel A. Moffett) 목사에 의하면 1893년 11월에 학습 교인 반을 조직 할 때에, 토마스 목사에게 중국어 신약 성서를 받은 사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초기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구도자(求道者)적인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나. 초기 선교사들의 내한 

 

 

 

실제로 한국 최초의 선교사는 북미 장로교의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라는 의사였다. 알렌은 갑신정변 우정국 사건 때에 개혁파에 칼에 맞은 보수파의 중추인 민 영익을 치료해 주므로 그 의술을 인정받아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고, 고종과 민비에 총애를 받게 되었고, 미국인에 대한 인상이 우호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미국 선교사의 전도에 밝은 전망을 보여 주게 되었다. 

 

1885년 4월 5일에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처 세 사람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 달 후인 5월 3일 감리교 월리암 스크랜턴(Wm B. Scranton)과 그의 모친 스크랜튼(Mrs. M. F. Scranton) 여사가 함께 입국 하였다. 

 

다. 선교의 윤허 과정 

 

 

 

1990년 이후 갑신정변,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을 한국 사회는 일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이때부터 개화기의 학술지나 언어지에서는 유교사상의 극복을 위한 철저한 유교 비판의 소리가 높아갔고, 기독교에 대하여는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유교나 불교를 신봉하는 개화파 인사들마저도 기독교야 말로 쇠약해 져가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고, 선교 단체들은 곧 개화의 힘이 될 것이라 공헌하게 되었다.

 

(심 일섭 “한말 사상과 기독교에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신학 사상) 제28집 (서울 신학 연구소 1980) p.171 

 

 

 

그러나 고종은 종교의 전파는 허락치 않았고, 기독교는 금교 되고 있었다. 

 

그 후 조선 정부는 1898년 6월 10일에 스왈론 선교사에게 호조 (護照;외국인에게 내주던 여행권)를 발행함으로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 젤러 목사가 입국한지 13년 만에 선교의 윤허가 내려 졌다. 이로 인하여 선교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3. 초기 선교 정책과 대 부흥 운동 

 

 

 

가. 초기 선교 정책 

 

 

 

1). 장로교 정책 

 

미국의 감리교와 장로교를 비롯해서 캐나다, 호주, 영국 그리고 간접으로 일본을 통하여 새 선교지 한국에 여러 계층의 선교사들이 몰려들고 아울러 한국 교회 내에 간헐적인 수난도 있고 하여, 뚜렷한 선교 방법의 설정을 서두르고 피차 경쟁하는 잘못을 피하는 방법을 구하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 수난에 대용할 선교사들의 입장을 밝히는 정책 설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국 주재 선교사들의 초청에 의해 1890년 존 네비우스 박사(Dr. John Nevius)가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그들은 네비우스 박사의 저서≪선교 사업의 방법≫(Methods of Mission Work)에 제시된 원리에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7명의 젊은 장로교 선교사들을 데리고 두 주일 동안 체류하게 된 그의 한국 방문은 선교정책에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선교사들의 하나하나의 복음 전도와 광범위한 순회 전도 

 

(2) 자립 선교 

 

(3) 자립 정치 

 

(4) 자립 보급 

 

(5) 체계적인 성서 연구와 모든 활동에 거의 성서의 중심 성을 관철하다. 

 

(6) 성서의 교훈에 따라서 엄격한 생활훈련과 처리를 한다. 

 

(7) 다른 교회나 기관과 협력 및 일치의 노력을 계속하며, 최소한도 다른 기관과는 지역을 피차 뜻에 맞게 분할하여 전도한다. 

 

(8) 지역과 프로그램 분활 이후에는 피차 절대 간섭은 하지 않는다. 

 

(9) 그러나 경제나 그 이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넓게 피차 돕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대개 요약된 그 원칙이다. 강력한 자립성과 광범위한 순회선교, 성서에 대한 압도적인 강조가 그 기초였다. 그러나 또 한가지 이 원칙의 핵심에서 차세적 생활과 의무에서의 둔퇴(遁退)가 종교의 본분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통상의 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 모습이라고 설파하는 정신도 깔려있었다. 

 

 

 

2). 감리교의 선교정책 

 

감리교는 장로교의 경우처럼 도식화된 문서상의 일정한 정책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에 그 윤곽을 더듬어 살펴볼 수밖에 없다. 감리교는 탐색, 순회전도를 원칙으로 했다. 이것은 실제로는 장로교와 별 차이가 없는 정책이었으나 이러한 방법이 옛적 감리교 전도사들과 부흥사들의 순회전도와 꼭 같았기 때문에 감리교의 생리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감리교는 교육분야의 있어서 장로교의 경우보다 훨씬 차원 깊은 집착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온 지 꼭 넉 달만에 두 사람의 학생을 가지고 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장로교가 젊은이들을 교육해서 후에 각각 출신 교회로 보내어 힘있는 전도자적 크리스천을 양성 힘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반해서, 감리교는 교육 일반에 주력함으로써, 그것으로 복음전도의 한 수단으로 삼는 폭넓은 방법을 원용하고 있었다. 두 교회는 이 교육 정책에 있어서 후에 그 간격을 더 넓혀갔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에의 치중은 복음사업의 부진을 자초할 수박에 없었다. 

 

 

 

나. 교회의 폭발적 증가와 부흥운동 

 

 

 

1895년과 1896년에는 교회의 세례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선교사들도 역시 이 놀라운 성장의 대해서 알고 격려를 받고 있었다. 서울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의 실정은 변해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무관심하던 백성들은 이제 각성의 징조를 나타내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895년에 평양으로부터의 연례보고에 의하면 “평양에서의 활동은 이제 개척 전도의 단계를 지나서 확고한 기반을 닦기 위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교회는 발전하고 팽창하기 시작하였으며, 평양과 그 변두리 지방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으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는 계속해서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의 주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세례교인과 초 신자들이 모두 열렬한 복음전도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전도활동을 하고 우리 선교사들은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주어야 했다.” 이처럼 초창기에 벌써 교회는 선교사들보다 앞장을 섰는데, 선교사들은 초인간적인 노력으로 세례 지원자들을 가르치며 신앙이 약한 자들을 훈련시킴으로써 “후원”의 책임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1900년 한 해 동안에 세례교인 수는 3할 이상이나 증가되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수효로 교회에 몰려들었으므로 선교본부의 연례 보고가 “이 사람들이 너무 빨리 증가되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반문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재빠른 성장은 아무런 영적 근거도 없이 수효만 많이 모아놓은 것이었던가? 여러 가지 증거는 그것이 영적 근거 위에 확고하게 기초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당시의 선교사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헌신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많은 수효를 모아놓는 데만 유혹을 받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신자들”(adherevt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은 주한 장로교 선교사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 In Korea)의 정의에 의하면 세례교인,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 학습 과정의 구도자, 정기적인 출석자,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옛 생활로부터 떠나 기독교의 감화 밑에 있는 또는 그 밖의 사람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세례교인들”(Communicants)이라는 말은 교회의 기둥이 되는 세례 받은 성인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급속도로 성장하는 교회에는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과의 비율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어느 한 해 동안에 교회 공동체는 크게 늘어났는데 세례교인 수는 조금밖에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양적으로만 크게 늘어나고 새로운 신자들의 훈련은 빈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100퍼센트 완전한 교인으로 만들 수 있는 교회는 없지만, 초기의 주한 선교사들은 훈련시키는 소임을 훌륭하게 감당하였던 것이다. 

 

1898년에는 교회 공동체와 세례교인과의 비율이 36 : 1이었다. 1907년부터 1942년까지의 평균 비율은 2.6 : 1이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의 세례 인이 매주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비기독교적 종교 행사를 걷어치운,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신자로 인정될 만큼 충분히 훈련을 받지 않은 다른 2.6 사람에 해당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초기 선교시대는 앞으로 올 놀라운 영적인 대 부흥을 위한 태동의 시기였다. 

 

앞서 말한 놀라운 성장이 영적 근거 위에 기초해 있었다는 더욱더 신빙할 만한 증거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한국 교회로부터 “1907년의 대 부흥”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이 대 부흥은 전혀 영적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서술되어왔다. 

 

 

 

부흥강사 

 

 

 

1. 부흥강사의 자질 

 

 

 

1). 소명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부흥사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의 사명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소명감이 뚜렷하지 못하면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지 못하고, 인간의 비위를 맞추거나 타협하기 쉽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① 이사야 선지자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② 예레미야 선지자 

 

(렘 1:4-1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 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③ 에스겔선지자 

 

(겔 1:3 갈대아땅 그발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 2:1-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2). 성령의 강한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한다. 

 

부흥사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강한 은혜에 체험을 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인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은혜 체험이 없이는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이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그렇답니다. 그렀습니다의 차이?) 

 

베드로 사도의 강한 메시지가 수천 명(3000)의 청중을 회개시킬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충만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행 2:38-4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3). 부흥사로써의 달란트가 있어야 한다. 

 

부흥사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휘어 잡을 수 있는 힘과 분위기를 영적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량 웅변력 호소력 순발력 상담할 수 있는 재질이 있어야 한다.(베드로 사도) 

 

4). 성경 말씀에 능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부흥사의 무기는 하나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적절하게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해답은 성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많은 성경의 연구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니골라 집사-니골라 당)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5). 신학적인 지식을 지녀야 한다. 

 

부흥사는 단기간에 많은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신학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잘못된 메시지를 전하면, 그 교회에 큰 무리를 가져다 주고 성도들을 병들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확실한 체계를 갖춰야 한다. (전도관 박 태선 장로-타락함.) 

 

6). 물질에 대하여 초월해야 한다. 

 

부흥사가 사례비에 치우쳐서 많이 주는 교회는 가고 적게 주는 교회는 가지 않거나, 어떤 부흥사는 부흥회 기간에 나오는 헌금을 나누는 조건을 부흥회를 인도한다고 한다. 삯을 위하여 부흥회를 인도하는 사람은 부흥사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삯을 위하여 일을 하면 그것이 삯꾼이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는 날 책망이나 징벌이 있을 것이다. 부흥사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병들은 영혼을 치료하고 식은 신앙에 불을 붙이는 것이 임무이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하여 초월해야 한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7).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가져야 한다. 

 

부흥사는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지녀야 한다. 잘못 생각하면 억세고 과격한 사람이 부흥사의 적격에 맞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가 맺게 되는 것이고 자연히 온유와 겸손이 따르게 된다. 영적인 흐름은 강단에서 군중으로 흐르는 것이다. 

 

(갈 5:22-2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도 요한의 변화-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 부흥사가 되면 집회하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인기를 차지하게 되고 명성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교만해 질 수도 있다. 부흥회에서 일어나는 역사가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교만해지면 자신이 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서 겸손과 온유함을 유지해야 한다. 

 

8). 진실해야 한다. 

 

부흥사는 며칠간의 단 기간만을 성도들과 마주하며 많은 메시지를 전하므로 잘못하면 효과를 더 보려고 과장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사람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려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언행이 일치하는 삶이 되려고 기도해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이다. 그러므로 진실함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거짓이다. 아간-수 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가롯 유다(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사울과 다윗의 차이를 생각하여 보자) 

 

9). 열심이 있어야 한다. 

 

부흥사가 집회를 인도할 때나 기도를 할 때나 말씀을 연구할 때나 공부할 때나 언제든지 열심히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영혼을 사랑함에 뜨거운 정열과 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가서 보식을 하러 다닌 다던가 관광을 다니는 사람은, 부흥사로써의 열정을 의심해 볼만하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 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0).이성에 대하여 깨끗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부흥사는 대부분 혼자 집회를 다닌다. 그러므로 이성 관계에 매우 조심을 하여야 한다. 특히 남자 부흥사는 여성 성도와 많이 대하게 되므로 더욱 깨끗하여야 한다. 이성관계가 지저분한 사람은 부흥사의 자격이 없다. 

 

(고전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요셉의 훌륭한 신앙; 창 39:8-10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cl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 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2.부흥사의 자세 

 

1).부흥회를 인도하기 전에 철저히 준비하여야 한다. 

 

부흥사는 부흥회의 부탁을 받으면 기도와 말씀으로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가 없으면 효과도 없는 것이다. 단 시일에 많은 역사를 일으키고 신앙의 부흥을 일으키려면 많은 기도 준비와 말씀 준비가 있어야 한다. 3년 6개월간 준비한 엘리야의 기도가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불이 내리게 하고 닫힌 하늘을 열고 비를 내리게 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3년6개월간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한번 설교할 때 3000명이 회개를 하고 주님께 돌아오게 한 것이다. 강한 힘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베드로 사도의 설교 문을 연구해 보자)(행 2:14-41) 

 

2).부흥회의 시간을 정한대로 지켜야 한다. 

 

부흥사는 부흥회의 인도 중에 시작하는 시간과 끝나는 시간을 정해진 시간을 지키려고 해야 한다. 부흥 사 혼자 은혜에 취하여 군중들은 생각지도 않고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오히려 성도들의 받았던 은혜도 떨어지게 한다. 어떤 분은 한 소리를 또 하면서 자신만 가지고 있는 비밀인 것처럼 반복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지루해하면 성도들을 향하여 은혜가 없어서 그런다고 되레 호통을 치는 사람이 있다.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적당한 시간에 핵심적인 설교를 할 수 있고, 많은 은혜를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딤후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근신(謹愼)-언행을 삼가고 조심함.) 

 

3). 자기 자랑을 삼가야 한다. 

 

부흥사는 본인이 시무 하는 교회를 자랑하거나 자기 자랑을 삼가야 한다. 부흥회를 하는 교회의 담임 목사보다 더 인기를 얻으려고 한다면 큰 잘못이다. 부흥사는 그 교회의 목회를 돕고 내적으로나 외적인 부흥을 위해서 파송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낮추고 부흥회를 인도하는 교회의 목회자나 성도들의 힘을 북돋아 주고 잘못된 부분은 고치고 새롭게 하는 부흥사가 되어야 한다. 

 

(고전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4). 복 받게 해준다고 헌금을 강요하여서는 안 된다. 

 

부흥사가 헌금을 강요하면 안 된다. 부흥사의 목적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식은 신앙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헌금만 많이 나오게 하면 능력 있는 부흥사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특히 부흥사가 별미니 특미니 하면서 축복을 받게 해준다고 하면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사기를 치는 것이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 바른 헌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 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5). 이성의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은 절대로 하여서는 안 된다. 

 

부흥사는 단시간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됨으로 인기가 있고 능력 있는 목회자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상담을 많이 하려고 한다. 특히 여자 성도들이 많이 접근한다. 그러므로 이성의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을 하여야 한다. 한 예로 상담을 받을 때 담임 목사님을 옆에 계시게 한다든지 그럴 형편이 안될 때는 두 사람이상 동석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오해가 없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이성 문제를 일으켜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만, 특히 부흥사가 집회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면 큰 시험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궁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6). 특정한 성도를 치켜세우거나 책망을 하여서도 안 된다.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보면 특별히 봉사를 잘하거나 강사를 대접 잘하거나 귀한 달란트를 가진 자를 볼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만 자꾸 칭찬을 하면 다른 사람이 마음을 닫을 수가 있고, 또 그 본인들이 교만하여 신앙에 병이 들 수가 있다. 그리고 잘못하는 사람을 보고 직접 대놓고 여러 사람 앞에서 책망을 하면은 그 사람의 인격도 침해하는 일이고, 잘못하면 신앙을 타락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인간이 보는 눈과 감정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여서는 안 된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7).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부흥사는 일단 집회의 강사로 초빙을 받으면 그 기간은 그 교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본인의 취향이나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고 적당히 시간만 채우려 한다면 그것은 사명을 회피하는 나태함을 범하는 일이다. 어떤 교회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최선을 다하여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것이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딛 2:9-10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8).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부흥회의 장소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감정에 치우치면 안 된다. 쉽게 흥분하거나 분노를 내거나 하면 거룩 성이 상실된다. 항상 말에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종이라는 사명감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신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네 감정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9). 책임의식을 가져야한다. 

 

부흥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부흥회를 인도하며 부흥회가 끝난 후에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노력을 해야한다. 이러한 마음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면 자연히 책임의식이 생길 것이다. 만약에 부흥회가 끝난 후에 나쁜 결과를 가져오면 부흥회를 한 교회에는 막대한 지장이 올 것이고, 성도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교회의 목회자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런 예가 많이 있다. 부흥회를 잘못하여 오히려 문제가 생기고 그로 인하여 전도길이 막히고 교회가 갈라지는 경우까지 있다. 이렇게 되면 책임은 부흥사에게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책망을 들을 것은 물론이고, 목회자들의 사이에도 나쁜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항상 책임의식을 가지고 말 한마디라도 조심하며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여야 한다. 

 

(골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0).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부흥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부흥사라고 우쭐하여 대접받기를 좋아한다면 주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검소한 숙소와 식사도 간단한 것으로 하는 것이 좋다. 먹고 마시는 일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물질을 소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럴 형편이 된다면 절약하여 복음 사업에 쓰던지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데 쓴다면 더욱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부흥회 때는 강사를 푸짐하게 대접하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있는데, 이것은 고쳐야 할 점이다. 우리에 구세주인 주님은 시장 하셔서 무화과나무에 가서 열매를 구하기까지 하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부흥사 스스로가 자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담임 목사와 상의하여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11). 청빈하여야한다. 

 

부흥사는 집회가 끝난 후에 깨끗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만 한다. 집회하는 교회에 맘에 있는 물건이나 성도에 좋은 물건을 보고 욕심을 내어 자기 집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 탐심은 죄가 되는 것이다. 

 

 

 

(삼상 12: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3. 부흥사의 역할 

 

1.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옛날 선지자들의 근본 신념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하고 바르게 믿게 하여 타락한 신앙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오늘날 부흥사도 이런 근본 정신을 가지고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 우사 사람들에게 의와 정의를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죄악을 미워하시며 악행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신다. 그래서 약하고 억울한 자의 편에 서셔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사회의 정의를 세우셨던 것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떤 핍박과 고난과 위험도 감수하고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도 그리하였다. 그러므로 부흥강사도 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과 같이 세움을 받았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외쳐야 하며 사회의 개혁과 정의를 세우기 위한 말씀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불의와 타협을 하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2. 사회에 희망과 위로를 주어야 한다. 

 

오늘날 사회는 과학 문명의 발달로 사람이 생활하기는 편하여 졌지만 정신적인 불안은 더욱 심화되는 사회이다. 전쟁의 불안과 공포, 폭력, 도덕과 윤리관의 타락으로 인하여 심리적인 불안에 떨고 있는 사회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하지만 해결되기보다는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사회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여 절망과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부흥사의 임무 중에 하나이다. 구원의 복음은 절망 가운데 소망을 주는 것이며, 타락한 세상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3.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 

 

부흥사는 부흥회를 인도하는 교회의 영적, 수적성장을 가져오게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성도의 신앙을 온전케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흥사가 무엇보다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올바른 부흥회를 인도하여 교회의 성장을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성장을 가져오는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①. 살아 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증거 하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신 분이심을 증거 하여야 하며,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며 공의로우시며, 죄와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심판자 이심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죄인을 부르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 해야 한다. 

 

교회가 부흥이 되려면 하나님에 대한 신관이 바르게 서야 한다. 이것을 부흥사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인 것이다. 

 

②.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게 하여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많고 교인은 많은데도 사회는 부패하고 교회 역시 부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참된 회개를 하는 신자가 적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회개를 외치는 교역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교역자 자신이 회개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명직 목사의 설교) 

 

 

 

회개는 성도가 되는 첫 관문이며 동시에 신앙 생활의 기초인 것이다. 그리고 은혜 받을 그릇의 준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첫 복음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외치셨다. 성도가 부흥회를 통하여 참회를 하고 사죄의 기쁨을 얻게 하는 것은 부흥사의 사명 중에 하나이다. 회개가 일어나는 부흥회는 성공적인 부흥회이다. 

 

③. 구원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회개한 성도는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성도를 구원에 확신을 가지게 하고 영생과 천국에 소망을 가지도록 말씀을 전해야 한다. 구원에 확신을 가지면 참 기쁨이 넘치게 되고, 감사가 나오고,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것이다. 성도가 이렇게 되게 하는 것이 부흥사의 사명이다. 

 

④. 성령 충만을 받도록 하여야 한다. 

 

로마서 8장6-8절의 말씀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섬기려는 것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9-11절의 말씀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꼭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또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도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을 받으면 자연히 신앙에 열심이 생기고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중생을 체험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 충만을 받도록 할 사명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욱 기도하고 자신을 성결케 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초대 교회에 놀라운 부흥과 기적의 역사는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와 제자들에 의해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직분 자들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집사로 세웠던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 시대에도 성령 충만한 교회가 성장하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피니; Charles Finney) 

 

ㄱ.거짓된 생활을 하므로 

 

ㄴ.숨겨 놓은 죄가 있으므로 

 

ㄷ.경박한 생활로 인하여(가볍고 얇은 생활) 

 

ㄹ.주신 성령을 근심케 하므로 

 

ㅁ.직무를 태만하게 하므로 

 

ㅂ.성령의 필요성을 인식치 아니하므로(사모하지 않기 때문에) 

 

 

 

⑤.봉사의 일을 하도록 성도를 가르쳐야 한다. 

 

온전한 성도는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봉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성도가 교회에는 많고 또 봉사를 게을리 하는 성도가 있다. 이러한 성도에게 봉사의 중요성과 봉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부흥사의 사명이다. 봉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표현이다. 몸과 시간을 바쳐서 봉사하고, 물질로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감사 생활을 유지케 하며, 구제 및 전도에 몸과 마음을 드리도록 가르치는 것이 부흥사의 사명이다. 

 

 

 

*올바른 부흥회를 인도하면 

 

첫째로, 교회가 갱신(更新;다시 새로워지거나 새롭게 함)된다. 부흥사는 선지자적 사명을 가지고 담임 목사가 할 수 없었던 잘못된 부분을 수술하고 치료하므로 교회가 새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부흥회를 통하여 신앙의 훈련을 하므로 힘있는 교회가 된다. 

 

셋째로, 부흥회를 통하여 전도에 열이 생겨서 저변을 확대하게 된다. 

 

이렇게 되므로 자연히 교회는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운동은 곧 교회의 성장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4. 부흥회의 설교 

 

설교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설교의 근본정신은 성서이다. 설교는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부흥회의 설교는 부흥회를 부흥회가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그러므로 부흥회에 있어서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1). 일반 목회 설교와 부흥 설교의 차이 

 

부흥회의 설교는 일반 목회의 설교와 다르다. 일반 목회에서 설교는 서서히 내리는 이슬비에 비유한다면 부흥회의 설교는 단기간 내에 많은 양에 비를 내리는 소낙비에 비유할 수 있다. 

 

①일반 목회의 설교는 차분하고 규격 적이지만 부흥회 설교는 강력하고 호소력 있어야 한다. 

 

②일반 목회 설교는 시간이 제약되었지만 부흥회 설교는 시간에 비교적 자유롭다. 

 

③일반 목회 설교는 대부분 원고에 의한 설교지만 부흥회 설교는 자유롭게 대화 설교 등을 할 수 있다. 

 

④일반 목회 설교는 지성과 의지에 호소하지만 부흥회 설교는 정서와 영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짙다. 

 

⑤일반 목회 설교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설교하지만 부흥회의 설교는 단기적인 효과를 노려야 한다. 

 

 

 

2). 부흥회의 설교 

 

①.저녁예배 설교 

 

전도와 소망 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설교를 주로 하며 성도의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와 교회의 부흥에 비결에 대한 설교를 한다.(본인은 첫 시간에 심령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회개의 찬송과 설교를 주로 한다. 

 

②. 낮 예배 설교 

 

대부분 성경 공부를 중심으로 한다.(교회론, 성령론, 종말론) (본인은 성막론을 가지고 교회론을 많이 한다) 

 

③. 새벽예배 설교 

 

어느 주제를 정해 놓고 집중적인 설교를 한다.(예: 신 현균 목사; 성령의 은혜체험에 대하여, 회개에 대하여 집중 설교)(본인은 어떤 주제를 정해 놓고 설교 예: 사랑, 믿음, 회개,) 

 

3).교회의 규모와 부흥회 설교 

 

①.농어촌 교회 

 

삶에 실제적인 면을 강조하여야 하여야 한다. 

 

②. 중소 도시 교회 

 

지식적이고 논리적인 설교를 많이 하여야 한다. 

 

③ 대형교회 

 

대중을 사로잡는 대형 설교(그렇다고 대충 대충하여서는 안 된다. 세심하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신 현균 목사저. 우림. 부흥신학과 이론과 실제. 1997.2. 70p) 

 

 

 

4). 부흥회 설교 시 유의할 점. 

 

① 본문에 충실하여야 한다. 

 

설교를 하다가 예화나 감정에 빠져서 본문의 의도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②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설교를 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과장 할 수가 있다. 경험담, 간증을 할 때도 과장을 하여서는 안 된다. 특히 강사는 자기 자랑을 삼가야 한다. 오히려 사도 바울처럼 낮추려고 하여야 한다. 

 

③절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회중을 골고루 바라보는 여유와 거부감이 없는 행동을 하여야 한다. 특히 알아듣기 쉬운 언어와 회중의 인격을 존중하는 언어를 써야 한다. 그리고 예화는 피부로 느끼는 예화를 채택하는 것이 좋다. 

 

④논쟁이 될 소지가 있는 문제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며, 복음이 성도들의 마음에 전달되어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균형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즉 한쪽의 주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성도들의 신앙이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다. 

 

⑤자신의 설교가 성도들에게 어떤 효과를 주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자주 점검하여 효과적인 설교를 하여야 한다. 

 

설교를 듣고 성도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또 설교에 대한 반대 의견이 없는지 자주 점검하여 고칠 것은 고쳐서 더욱 효과적인 부흥회 설교를 하여야 한다.

 

(신 현균 목사저. 우림. 부흥신학과 이론과 실제. 1997.2. 7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