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2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2학기

제목신 약 사2022-07-13 16:20
작성자 Level 10

신약사

 

 

 

신약개론 

 

 

 

히브리서와 공동 서신 / 신약 성서의 묵시 문학 

 

 

 

히브리서

 

1. 문학적 성격

 

히브리서는 출처와 정체가 애매한 책으로 편지와 같은 성격과 함께 신학적 논문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히브리서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알려져 왔으나 편지라기 보다는 편지의 형태를 본뜬 “신학적 논문” 혹은 “설교”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내용이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으며,선포와 교훈의 혼합적인 내용 구성은 이미 믿는 자들을 위한 권면,지도,위로의 목적으로 기록된 교훈적이고도 교육적인 설교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저자 문제

 

히브리서의 저자의 정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바울이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어휘나 문체,내용의 구조의 면에서 차이가 있으며 구약 성서의 인용 방법과 신학에서 많은 이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학자들이 공감하는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한 견해는 헬라 배경을 갖고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일 것이라는 의견이다.

 

3. 수신자 혹은 독자

 

히브리서에서의 경우 히브리라는 용어는 이방인들과 구별하여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 문서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생각되었었다. 그 증거로는 

 

ㄱ.유대적 사상. 특히 구약 제사 제도에 대한 지식이 전제된 그리고 구약 사상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서적 증명 방법 

 

ㄴ.많은 구약 성서의 인용

 

ㄷ. 구약에 대한 신약의 우월성과 예수가 모세나 대제사장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학적 논증 시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편지의 독자가 단순히 기독교인들,즉 헬라 사상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이라는 주장도 강력히 대두되었다.이 같은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히브리서에는 특별한 유대 기독교적 특징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언급된 구약 지식의 정도는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수준이며 히브리서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설교에 있었다는 점,그리고 영지주의적 이원론적인 사고가 제시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문서의 독자층은 유대인 기독교인이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익숙한 기독교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 히브리서의 주제

 

하나님을 절대 타자 혹은 초월 자로 파악했던 고대 세계에서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했었다. 히브리서의 주제도 이러하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중보자 혹은 중간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에게로 접근하려고 하는 그래서 완전(2:10,5:9,7:11 등)을 성취해보려고 애쓰는 당시 독자들을 향해 “오직 예수 만이 ” 그 길임을 증언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확신 가운데 거하게 하려고 했다.

 

5. 내용 개요

 

히브리서는 선포(케리그마)와 교훈(디다케)이 번갈아 나오는 독특한 설교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서론 없이 바로 본문이 시작된다.

 

 

 

선포: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구주이신 예수 (1:1 - 3:6)

 

교훈: (3:7 - 4:13) - 불순종의 본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끝까지 참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선포: 대제사장이신 예수 (4:14 - 5:10)

 

교훈 : (5:11 - 6:20)- 이러한 대제사장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초보적인 교리를 버리고 성숙한 경지로 나가야 한다.

 

선포: 다른 자들과의 비교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대제사장 예수 (7:1 - 10:18)

 

교훈: (10:19 -39) -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하여 휘장을 열어 새롭고도 산 길을 주었으므로 확고한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선포: 믿음의 선구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 (11:1 - 39)

 

교훈: (12:1 - 13:17) - 우리를 훈련시키는 아버지 하나님의 훈련을 끝까지 잘 견디어야 한다.

 

마지막 축도와 인사: (13 :18 - 25)

 

 

 

6. 기록 장소와 시기

 

본문 자체나 전승에 의해 확실하게 밝혀진 기록 장소는 없다. 기록시기는 약 주후 90년경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독자들의 박해 경험들에 대한 언급(10:32 - 34)이나 사상적 분위기가 바울 이후 시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로마의 클레멘트가 히브리서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서신

 

신약 성서의 서신들을 둘로 나눌 때 바울 서신(골로새서, 에베소서, 목회서신,히브리서 포함)과 공동서신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때 공동서신에는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요한 1.2.3서가 속한다. 이 편지들은 특정한 교회나 개인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라 교회 일반에 보내진 편지들이기 때문에 일반 서신들(The General Epistles)혹은 교회 서신들(The church Epistle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사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러한 성격을 가진 서신들은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만을 꼽아야 하지만 이들을 모두 공동 서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초대 공교회의 출현과 관련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the literature of Emergent Catholicism)

 

 

 

야고보서신

 

1. 문학적 성격

 

야고보서의 형태는 첫 구절을 제외시킨다면 편지의 성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수신자의 실제적 형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윤리적 권고를 목적으로 한 문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중요한 특징은 기독교적 복음의 선포가 없기 때문에 기독교적 설교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야고보서의 가치는 서신에 수집되어 있는 다양한 교훈의 말씀에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야고보서는 유대인의 지혜문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 저자 문제

 

전통적으로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 유대 기독교의 대표자였다는 위치 때문에 이 서신의 저자로 생각되었었다.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야고보서가 훌륭한 희랍어로 쓰여 있어 아람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대인의 저술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야고보의 모습과 야고보서가 내포하고 있는 야고보의 모습에 긴장이 있다는 점/2:14이하에 나오는 믿음과 행위의 논의가 바울의 시대와 상당한 거리를 느끼게 한다는 점/야고보서의 경전화 과정에서 특히 서방 교회의 반대등으로 경전으로 채택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점등으로 미루어보아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저작 시기는 저자의 문제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데 만약 주의 형제 야고보를 저자로 본다면 40 - 60년경이, 익명의 기독교인이 과거 교회 지도자였던 사람의 이름을 빌어 기록한 것이라면 1세기 말경이 될 것이다.

 

 

 

3. 수신자 문제

 

야고보서가 서두에 밝힌 수신대상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1:1)”이지만 기독교 시대 이전에 이스라엘의 지파 구별은 없어졌으므로 이 말은 “참된 이스라엘” 혹은 “영적 이스라엘” 로 생각되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4. 내용 개요

 

야고보서는 본래 단편적인 윤리적 교훈들을 수집해 놓은 문서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구조를 찾아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1 서론

 

1:2 - 18 시험을 당하거든 기뻐하라

 

1:19- 25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1:26- 27 참 신앙은 이웃 사랑과 자기 정결이다

 

2:1 - 13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2:14-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3:1 - 12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다

 

3:13- 18 땅의 지혜를 버리고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라

 

4:1 - 10 싸움과 분쟁을 피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평화를 추구하라

 

4:11- 12 서로 비방하지 말라

 

4:13- 17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5:1 - 6 부자들에 대한 경고

 

5:7 - 11 주의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5:12 맹세하지 말라

 

5:13- 18 기도의 능력

 

5:19- 20 그릇된 형제에 대한 관심

 

5. 실천의 종교

 

야고보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실천의 종교, 행함의 신앙을 강조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야고보는 이 서신의 중심부에 믿음과 행함에 대해 논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2:17)이라고 못박고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의 칭의 교리를 보충해주고 있다.이같은 야고보의 가르침은 마태의 교훈과 비슷하다.또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않는 것이 죄”라는 죄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내려 범법죄만이 아니라 태만죄까지도 강조하여 예수의 정신에 더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1. 문학적인 문제

 

베드로전서는 전형적인 편지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편지보다는 오히려 설교로 보고 있다.

 

베드로전서는 두 부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1:3 - 4:11)에서는 세례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고 두번째 부분(4:12 - 5:11)에서는 박해의 위협 아래 있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권면이 나온다.첫 부분을 세례 의식과 관련된 설교로 볼 경우 뒷부분은 흔히 세례 예식에 참여했던 전체 회중에게 주는 설교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때에는 저자가 박해를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격려하면서 그들이 맨 처음 세례 받고 기독교인이 될 당시의 첫 결심과 감격을 되살려주기 위해 앞에 세례 예식 설교를 첨가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게 함으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핍박의 상황에 직면해서도 “영원한 영광”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2. 저자 문제

 

이 문서는 전통적으로 수제자 베드로의 기록으로 생각되었었다. 그러나 언어와 문체가 너무 훌륭하다는 점/ 구약 성서의 인용문이 70인 역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용어와 사상이 바울과 너무 흡사한 점/ 박해와 고난의 상황이 베드로 사후의 도미시안 황제 때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등을 볼 때 베드로를 저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그러나 5:12을 근거로 해서 저자 문제를 살펴본다면 유창한 희랍어 문체와 바울 사상의 흔적을 바울의 동행자였던 실루아노가 베드로전서의 기록과 내용에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기록 시기와 장소

 

베드로전서의 기록 시기는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또 서신에 반영되어 있는 핍박이 어느 때의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현재 보편적으로는 실루아노가 도미시안 황제 때,즉 주후 95년경에 베드로의 이름을 빌어 기록했으며 기록 장소는 로마였을 것이라는 학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4. 수신자

 

저자는 수신자를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기류하는 택함을 받은 사람들(1:1)”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 혹은 유대 기독교인이라고 제한할 필요는 없다.오히려 본문 중 1:14, 1:18, 2:10등으로 미루어보면 이방 기독교인들이 수신자였음을 알 수 있다.

 

 

 

5. 내용 개요

 

1:1 - 2 서두 인사

 

1:3 - 4:11 세례 예식 설교

 

1:3 - 12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새 삶을 기뻐하라

 

1:13-2:10 택함 받은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

 

2:11-3:12 기독교인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 대한 권면

 

3:13-4:11 고난의 축복에 대한 교훈

 

4:12 - 5:11 핍박 받는 성도들에 대한 충고

 

5:12 - 14 결론 : 작별 인사

 

 

 

 

 

유다서신

 

1.문학적 특징과 목적

 

유다서는 분명히 서신의 형태로 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개체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니며 개인적인 강조도 없으므로 교회 안에 나타난 이단자들을 공박하는 논쟁적인 훈계나 설교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유다서가 논쟁을 벌이고 있는 이단자들은 방종한 영지주의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부도덕에 빠진 불 경건한 자들이 교회 안에 나타나 그들의 왜곡된 교훈과 악한 행동으로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이단 교설을 뿌리는 거짓 교사들을 공격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 가운데서 견고해 서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2. 저자와 수신자 문제

 

서신의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도들의 시대를 멀리 뒤돌아보고 있는 점(17절)/ 훌륭한 희랍어로 기록되어 있는 점/ 야고보의 동생 유다의 시기보다 기록이 훨씬 후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점들은 그를 저자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많은 서신들과 유사하게 이 서신도 일세기 말경 익명의 저자가 “야고보의 동생 유다”의 이름을 빌어 교회 내의 문제에 대처하는 글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서신의 수신자는 교회 일반 혹은 기독교인 전체이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유대 기독교인을 주요한 대상으로 한 것 같이 보인다.

 

 

 

3. 기록 장소와 시기

 

사도들을 과거의 인물로 회상하는 것/ 신앙의 전통을 암시하는 것/ 영지주의의 징조에 대한 언급이 있는 점으로 보아 유다서는 초대교회의 역사중 후대 단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기록 장소에 대해서는 유대 기독교적 배경으로 미루어 보아 팔레스틴이나 시리아가 가장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4. 내용 개요

 

1 - 2 : 서두의 인사말

 

3 - 4 : 거짓교사와의 투쟁의 필요성 제시

 

5 - 7 : 죄와 벌에 대한 성서적 실례들

 

8 -16 :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정죄

 

17-23 : 신도들에게 요구되는 태도

 

24-25 : 마지막 찬송

 

 

 

베드로후서

 

1. 저자 문제

 

이 서신은 문두에 자신을 베드로로 밝히고 이 서신이 전서에 이은 두 번째 서신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문학적으로 유다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저자의 사상 세계와 수사학적 언어가 헬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 재림 지연의 문제가 크게 문제시되었던 교회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 바울 편지의 수집록과 다른 성경에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 경전화 과정에서 끝까지 많은 반대와 의심을 받아왔다는 점은 이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 후대의 베드로 추종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사도 베드로의 이름으로 이 서신을 기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유다서와의 관계

 

베드로후서는 사상, 문귀와 어휘, 글의 순서에서 상당히 유다서와 비슷하다.특히 벧후 2:1- 18과 유 4 - 13/ 벧후 3:1 -3과 유 17 - 18이 그렇다. 이런 유사점으로 보아 두 문서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한 것이 틀림없는데 베드로후서가 유다서에 의존했다는 것이 거의 틀림없으며 두 문서가 다루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기록 장소와 시기

 

사도 베드로가 저자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이 서신의 기록시기는 2세기 초나 중엽으로 추산되며 학자들 가운데서는 유다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거짓 교사들의 영지주의가 2세기에 기대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 주위 재림이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등에서 신약 27권 중 가장 나중에 기록된 문서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록 장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베드로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와의 연관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4. 내용 개요

 

1: 1 - 2 인사

 

1: 3 -21 성결에 대한 권고

 

1:3- 11 세상의 타락에 대한 강조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라는 권면

 

1:12-18 약속의 확실성

 

1:19-21 성서 예언에 대한 호소

 

2: 1 -22 거짓 교사에 대한 공격 (유 4-16절에 근거되었음)

 

2: 1- 3 거짓 예언자 출현의 예고

 

2: 4- 9 악한 자를 벌하고 의로운 자를 구하신 구약의 본보기

 

2:10-22 거짓 교사에 대한 묘사

 

3: 1 -16 재림의 지연

 

3: 1- 2 이전 교훈들에 대한 일깨움

 

3: 3- 4 재림 약속을 부인하는 자들

 

3: 5-10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대답

 

3:11-15 실제적인 결론

 

3:16-19 바울의 편지들에 대한 언급

 

3:17 -18 마지막 경고, 권면, 송영

 

 

 

요한서신들

 

1. 서신들간의 관계

 

이 서신들은 요한 복음과 요한계시록과 함께 같은 그룹 혹은 같은 ‘학파’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한일서는 전혀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신학적인 소책자 혹은 설교로 보는데 비해 요한 이서와 삼서는 분명히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분명한 서신으로 보인다. 또한 요한일서는 익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이서와 삼서는 구체적으로 장로의 편지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요한일서가 일정한 지역의 여러 교회들에 보내진 편지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비해 요한이서와 삼서는 한 지역의 개체 교회들에게 보내진 구체적인 교회와 대상을 가진 편지이다. 그리고 요한 일서가 요한 복음과 훨씬 더 유사하다.

 

2. 요한 서신들과 요한 복음의 관계

 

요한일서가 어휘와 문체에 있어서 요한복음과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요한일서는 구약 인용문이 없고 “실현된 종말론”이 아닌 “미래적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으며 보혜사가 성령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빛」이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을 가리키며 예수 죽음의 속죄적 성격이 강조되며 거짓 교사들이 적그리스도로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유사점과 차이점은 요한일서와 같은 저자 혹은 같은 학파에 의한 일종의 요한복음 주석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또는 바울 서신과 목회서신과의 관계처럼 이해하는 방향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그러나 요한서신을 요한 복음보다 후대의 기록으로 보는 데는 문제가 있다) 또 다른 설명 방법은 저자를 다른 사람으로 설정하는 것인데 요한 이서와 삼서는 같은 저자의 기록으로 볼 수 밖에 없다.

 

 

 

3. 요한일서의 목적과 특징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교회 안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는데 있다. 이에 따른 보다 적극적인 목적은 거짓 교사들의 유혹으로부터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올바로 지도하는 것이었다.

 

 

 

1) 목회적 관심 : 저자는 그의 독자들을 위한 목회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일차적 관심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기독교 신앙과 생활 가운데 견고히 세우기 위함이다.

 

 

 

2) 논쟁적 관심 : 이 목적은 목회적 관심과 연관이 되어 있다. 즉 이 서신이 교회내의 특수하고도 긴박한 상황에 의해 씌여진 그 당시 상황을 위한 소책자라는 것이다.저자는 거짓 지도자들을 예수의 인격에 대한 신학적 오류를 범한 자,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에 대한 윤리적 오류를 범한 자, 형제의 사랑이 없는 사회적 오류를 범한 자로 비판하고 있다. 뒤집어 말한다면 저자는 이 세 가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척도라고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다.

 

 

 

4. 요한 이서의 목적과 특징

 

요한 이서도 요한 일서와 마찬가지로 거짓교사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저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도 거짓교사에 대해서는 사랑도 관용도 베풀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즉 요한이서는 사랑과 관용의 한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5. 요한 삼서의 목적과 특징

 

요한삼서는 개인에게 보낸 사신의 형태이며 거짓 교사가 아닌 교회 지도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요한 서신들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성격은 요한삼서는 교회가 아직 연합된 조직체로 존재하지 않고 개교회로서 각 지역 지도자들의 지도 아래 운영되고 있을 때의 교회 지도자들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이 서신에서는 양들의 영적 성장과 바른 신앙 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장로”의 목회적 충정을 볼 수 있다.

 

 

 

신약성서의 묵시문학

 

 

 

요한계시록

 

1. 문학적 성격

 

요한계시록은 복합적인 문학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즉 묵시 문학과 예언 문학, 그리고 서신형식을 가진 기록이다.

 

1) 묵시적 성격 :

 

묵시 문학은 박해 시대의 산물로 고난 중에 가지게 되는 꿈과 환상에 대한 기록을 묵시록이라고 한다.묵시 문학의 특징은 많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초월적인 세계를 그리고 현재에는 위험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예언 문학적 성격 :

 

요한 계시록은 독자들의 관심을 현재적이고 종말론적인 결론에로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기독론적 역사관에 의해 다른 묵시문학과는 구별되고 있다.저자는 자신의 의무를 옛날 선지자들의 임무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의 책을 예언이라고 자주 지칭하고 있는 점에서 예언자적 전통을 따른 기록이라고도 볼 수 있다.

 

3) 서신의 형태 :

 

요한계시록은 전형적인 기독교적 서신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서신의 특징인 어조의 직접성은 요한과 독자간의 의사전달정신을 잘 보여주고 잇다.

 

 

 

2. 저자 문제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네 군데에서 “요한”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로마 당국에 의해 유배된 인물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동안 요한계시록과 요한 복음은 용어와 사상 면에서 동일하다는 학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현재에는 두 문서 사이의 유사점보다는 언어와 종말론적인 사상의 차이점에 초점을 맞추어 나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세기 말경의 유대 기독교인이거나 사도 요한의 영향 가운데 있던 요한 학파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3. 요한 계시록과 세례 요한에 관한 전승

 

요한계시록과 세례 요한 전승에만 제시되는 독특한 신학적 주제들이 있다.

 

ㄱ.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한다.

 

ㄴ. 오실 이에 대한 사상이다.

 

ㄷ. 심판을 상징하는 불 세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ㄹ. 신랑 사상이 두드러진다.

 

이 밖에도 요한계시록 저자는 예배의식과 성전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아마도 예언자이면서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이같이 세례 요한과 계시록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계시록의 저자를 세례 요한 혹은 그의 제자로 보는 학자도 있다.

 

4. 기록 시기

 

요한 계시록의 기록 시기는 도미티안 황제 때의 박해 때로 추산한다.즉 90 - 96년경에 계시록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저자는 이 시기에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 교회들로 하여금 박해를 잘 견디도록 격려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끝내 악의 세력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시켜 줄 목적으로 이 글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5. 구조와 내용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해되고 있다.그 중에는 요한계시록이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 선언과 열 방에 대한 저주 선언을 포함하고 있는 구약 예언서들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이렇게 보면 계시록은 전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후반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계시록의 구조를 「7」 이라는 숫자를 중심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 숫자를 염두에 두고 나누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1 - 8 서론

 

*1: 9 -3:22 지상의 교회

 

1:9 -20 일곱 금 촛대 가운데 나타나신 인자 같은 이

 

2장 -3장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열정 잃은 에베소 교회(2:1 - 7)/ 박해 받는 서머나 교회(2:8 -11)/ 너그러운 버가모 교회(2:12-17)/ 타협하는 두아디라 교회(2:18-29)/ 죽은사데 교회(3:1 - 6)/ 선교하는 빌라델비아(3:7 -13)/ 교만한 라오디게아 교회(3:14-22)

 

*4: 1 - 8: 1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목적

 

4:1-5:14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

 

6:1-8:1 일곱 봉인

 

*8: 2 -11:18 환란을 당하는 교회

 

8:2 - 6 성도들의 기도

 

8:7-11:18 일곱 천사의 나팔

 

*11:19-15: 4 교회의 구원

 

11:19 성전 안의 언약 궤

 

12:1-15:4 일곱 표적들

 

*15: 5-16:21 고뇌 가운데 있는 세상

 

15:5-16:1 증거의 장막

 

16:2-21 일곱 대접

 

*17: 1-20: 3 세상의 심판

 

17:1-2 성소에서 나와 일곱 재앙을 쏟는 천사중의 하나

 

17:3-20:3 일곱 재앙의 전개

 

*20: 4-22:5 천년 시대의 교회

 

20:7-10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은 교회 /사탄의 제한적 권위와

 

패배

 

20:11-22:5 하나님의 일곱 가지 계획

 

*22: 6 - 21 결론

 

이렇게 요한계시록 전체를 7부분으로 나눌 경우 교차 대칭 구조를 볼 수 있게 된다.즉 1부 지상의 교회는 7부 천년 시대의 교회와 대칭되며, 제2부의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제 6부의 세상의 심판과 연결되고, 제 3부의 환란을 당하는 교회는 제 5부의 고뇌 가운데 있는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인 제 4부에서 교회의 구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요한 계시록의 메시지는 세상의 환란 가운데서 교회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최후 승리에 대한 메시지이며 신약 성서 27권중 마지막에서 요한 계시록은 신약성서의 해피엔딩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신약신학

 

 

 

I . 서론

 

1. 읽어야 할 부분

 

1) 래드의 성경신학, 서론(14-45쪽)

 

2) 레온 모리스의 신약신학, 서론(9-25쪽)

 

3) 황창기의 성경신학은 무엇인가? 성경신학의 본질(35-54쪽:보스의 성경신학 서론)

 

 

 

신약신학 과목을 시작함에 있어 신약신학이 어떤 학문이며 무엇을 다루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신학이란 무엇을 어떻게 다루는 학문인가를 규명하는 먼저 신학에 대한 정의를 바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신약신학은 신학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신학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아주 다른 신약신학이 존재하기(주장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정의 아래 행해지는 신학이라 할지라도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인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으로 상반된 정의가 내려짐을 본다. 그것은 신학의 주체가 누구이냐는 점이다. 인간이 신학의 주체가 된다고 전제할 때는 

 

(a) 신학이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여 왔으며 또한 생각하는가를 연구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학의 주체가 된다고 전제할 때는 

 

(b)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인간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얼핏 생각하면 신학에 대한 정의 (a)가 정의 (b)보다 더 정확한 정의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공통적인 정의가 보여주는 대로 신학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전제하며 신학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인간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대로 하는 것이 신학 연구에 대한 바른 자세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연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사물이 아니시고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이시다. 이에 대하여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인격적인 대상들을 과학적으로 다룰 때는 그 대상들은 피동적이고 우리가 능동적이다. 즉 우리가 그것들을 다루고 검사하고,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에 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럴 경우는 그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열어 보여 주시는 한에 있어서만 우리는 그분을 알 수

 

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최상의 개념 이상으로 무한히 높으신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내면적이고 감추어진 마음은 그의 편에서 자의적으로 열어 보이실 때만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의 비밀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시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을 얻을 수 있다"(성경신학, 이승구역, 19-20쪽).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신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에서 상관없이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여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하여 탐구되어지는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 자신에게만 국한되었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Vos는 피조물의 창조는 '신외지식(extra-divine knowledge) 산출의 첫 단계'라고 말한다(20쪽).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졌다. 이 비정상적인 것을 교정하려면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자신

 

을 계시해 줄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게 해주신 만큼, 계시해 주신 만큼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될 수 없다. 이 점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다음으로는 성경신학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성경신학이란 말은 17세기부터 사용되었다(W. Jacab, 1629). 이렇게 늦게 사용되어 진 이유는 초대 교회 이후 중세 이전에는 성경 내용을 교회의 교의(dogma)와 일치시켰고 중세에는 교회 전통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의 원리가 제창 되었다. 이때까지 성경신학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 원리에 의한 성경신학은 성경의 가르침과 성경 자체가 말하는 신학을 의미하였다. 성경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성경신학은 초대 정통신교의 전통적 교리체계를 입증하는 증거본문들(proof-texts)을 제시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주창한 sola scriptura 내용 중에는 후대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할 요소가 내포되었다. 그는 성경과 그리스도를 구분시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만이 참 성경이라고 하였고 또한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였다. 그 결과로 성경의 통일성에 의문을 던지게 하였고 성경 속에 성경(the canon within canon)이란 문제를 대두시키는 기초를 제공하였다(G.Hasel, NT Theology, p.15).

 

 

 

성경신학의 다음 단계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이다. 이들의 주장은 "죽은 정통교리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면서 정통교리 체계를 반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성경신학은 계몽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교의에 반하여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J.P. Gabler 가 1787년에 Altdorf대학 취임연설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최초로 분명히 밝힘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성경신학은 조직신학과 독립된 것으로 엄밀하게 역사적이어야 하며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종교개념들의 기원을 조사하면서 성경기자들이 종교적인 제 문제들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Ladd, 신약신학, 이창우역, 16쪽). 이런 주장은 인간 자율주의 즉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라는 주장과 함께 성경도 인간 이성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으로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는 경향을 말하여 준다.

 

 

 

성경도 인간 이성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점과 동시에 성경신학은 역사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을 역사적 비평적 방법(historical critical method)으로 연구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이 말은 성경은 순전히 역사적인 문서들로서 성경저자들의 생각을 기록한 것으로 다른 역사문서들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신학을 조직신학에 대응하여 이스라엘 종교와 초대교회 시대의 인간 역사를 다루는 학문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성경신학을 이렇게 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위에 논한 신학에 대한 정의 (a)와 상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성경신학은 인간의 종교적인 생각을 다루는 인간학이요 역사학이며 따라서 종교사학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신학을 이렇게 정의하며 탐구하는 자들 사이에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성경이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성경저자들의 생각이나 신앙을 기록한 문서이기 때문에 성경신학을 역사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신학의 무용론까지 대두된다.

 

 

 

E. Troeltsch(1865-1923)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에 대하여 일반적인 세 가지 원리를 주장하였다. 첫째로 비평의 원리이다. 모든 역사적 서술에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서술자의 주관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 기록이 당시의 현장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발전에 의한 재 서술이기 때문에 비평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기록도 절대적인 진리로서 존재할 수 없다. 둘째로 유추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경험과 결코 다를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경험은 과거 경험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경험되지 않는 성경의 이적은 거짓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되어야 한다. 셋째로 상관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유추의 원리와 비슷한 원리로 역사상에 일어나는 모

 

든 사건은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인과관계가 없으나 사실적인 것으로 기록된 사건들은 기록할 당시의 사람들(공동체)의 신앙을 기록한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 역사상에 일어나지 않은 신화의 기록으로 취급하여야 한다.

 

 

 

성경신학의 이러한 새로운 연구방법은 자연적으로 성경은 성경저자 들의 생각이나 신앙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기록이라고 믿는 자들로부터 강렬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믿는 자들이다. 이들의 대답은 위와 같은 원리들은 성경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성경은 역사를 초월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들어와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록한 구속사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초월하신 하나님은 인간 속에 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갇히고 제한 받을 수 있겠는가? 고 되묻는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하나님은 분명히 초월하신 분이지만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 속에 들어 오셔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중에 몇 사람을 간단히 소개하고(이 부분은 Hasel의 NT Theology pp.111-132쪽 참조). 마지막으로 G. Vos의 견해를 좀더 상세히 소개하겠다.

 

 

 

(1) O. Cullmann의 구원사적 접근은 1946년 출판한 Christ and Time에 나타나 있고 그의 견해는 그후 1965년에 출판된 Salvation in History에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의 주장은 역사의 중심(the center of time or the mid-point of time)은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구원역사와 세상역사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구원역사는 세속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며 이런 의미에서 구원역사도 세속역사에 속한다. 그러므로 세속역사에 속한 사건들일지라도 구속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석되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Cullmann에게서 문제가 되는 점은 과거의 구속사건들에 대한 해석들은 새로운 사건들에 비추어서 그 해석들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corrections of the interpretations of the past events are undertaken in the

 

light of the new events).

 

 

 

(2) G.E. Ladd의 견해는 1974년에 출판된 NT Theology에 나타나 있다. 그는 성경신학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먼저 죄를 전제하고 시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달리 말한다면 성경역사는 일반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방법에 의하여 재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반 역사를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지만 반면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는 일반역사를 초월하심을 말하고 있다. 그 좋은 예로서 예수의 부활을 말한다. 과학적 역사적 비판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일 수 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건에 의하여 연유되지도 않았고(상관 원리) 또한 어떤 비슷한 사건도 역사상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유추의 원리). 그가 Cullmann과 다른 점은 한마디로 과거 구속사건에 대한 수정적인 재해석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그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기독교 선포의 본질은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위의 사실들의 열거'(the recital of God's acts in history)이다. 그에게 있어 성경신학을 수행함에 있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성경은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보다 서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해석적인 면은 성경신학에서 보다는 조직신학에서 할 의무라고 규정한다.

 

 

 

(3) G. Goppelt의 견해는 그의 사후(1973)에 그의 제자 J. Roloff에 의하여 출판된 Theology of the NT(1975, 1976)에 나타나 있다. 구원사에 대한 그의 견해는 약속과 성취의 범위 내에 국한되고 있다. 그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배제시키면서까지 구속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신약신학의 목표는 신약 각 권이나 신약 여러 권으로부터 예수의 사역 혹은 초대교회의 선포 내용에 대한 정돈되고 연관된 pictures을 끄집어 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사역은 신약의 재구성이나 서술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신약과 오늘의 사람들 사이에 서로간에 비판적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데까지 넓히는데 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역사적 비평적 방식을 배제시키지 않으면서도 구속사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에 양편에서 그의 신약신학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고 있음을 본다.

 

 

 

(4) Geerhardus Vos(1862-1949)는 1893년 가을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새로 설치된 성경신학 과목의 첫 교수로 취임할 때 한 '학문으로서 그리고 신학과목으로서 성경신학의 개념'(The idea dof Biblical Theology as a Science and as a Theological Discipline)이란 강의로부터 개혁주의 성경신학 발전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주의 성경신학에 대한 그의 공헌은 구프린스톤신학교에서 1932년 은퇴하기까지 성경신학을 강의함과 동시에 수많은 논문들을 통해서 뿐 만 아니라 그의 소천 직전(1949)에 그의 아들 Jdhannes G. Vos에 의하여 편집되어 출판된 Biblical Theology : Old and New Testaments(1948)을 통하여 더욱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는 분명히 '개혁주의 신학의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의 성경신학 1장에 나오는 '서론 : 성경

 

신학의 본질과 방법'(Introduction : The Nature and Method of Biblical Theology)은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탐구하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읽어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Vos는 "성경신학은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발전과정을 다루는 주경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하며 성경신학에 있어 주요한 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1. 계시의 주요성격

 

 

 

첫째로,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행위 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 이유는 계시가 구속이라고 불려지는 하나님의 다른 행위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는 구속에 대한 해석이다. 따라서 구속이 점진적으로 전개되듯이 계시도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두 과정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객관

 

적이고 중심적이면서도 또한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다. 구속이 객관적이요 중심적이라 할 때는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 밖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성육신과 속죄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등을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구속이 주관적이요 개인적이라 할 때는 인간 밖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인간주체 속으로 파고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지칭한다. 이것은 중생,칭의, 회개, 성화와 영화 등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사업을 역사진행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통하여 이루시고 그 구속을 개인에게 적용시킬 때도 역사 진행과정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Robertson's spiral).

 

 

 

둘째로, 역사 안에서의 계시의 실제적 구현이다. 계시의 과정은 역사와 공존할 뿐 아니라 역사 속에 실현된다. 성경속의 역사적 사건들 자체가 계시적 의의를 가진다. 계시는 행위 계시와

 

말씀 계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둘은 서로 병행하고 있다. 계시의 일반적인 순서는 먼저 말씀 계시가 나오고 다음에 그 말씀 계시를 확증시키는 행위(사건)계시가 나오고 그 행위(사건)를 해석하는 말씀계시가 따른다. 구약은 예언적이고 예비적인 말을, 복음서들은 계시 사건을 그리

 

고 서신서들은 계시 사건에 대한 최종적 해석의 기록이다.

 

 

 

셋째로, 계시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역사 진행과정의 유기적 성격이다. 모든 증가는 점진적이다. 그러나 모든 점진이 유기적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다. 유기적 점진성이란 씨 형태로부터 성장하여 나무에 이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질적인 측면에서 씨는 나무보다 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종자와 나무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시의 유기적 진행과정은 구속의 진행과정에 의하여 지배된다. 이 말의 뜻은 구속의 진행과정이 느려지거나 어느 시점에 침묵하게 되면 계시도 그와 발을 맞추어 느려지거나 침묵한다는 것이다. 이러기에 계시의 획기적(epochal) 성격이 있음을 본다. 그 뿐 아니라 유기적 점진을 인정할 때 다양성의 증가를 인정할 수 있다. 진리는 단순하다. 그러나 획일적으로 표현되기 보다는 복합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격을 통하여 진리를 표현하시기 때문이다.

 

 

 

넷째로, 성경신학의 실제적 적응성이다. 하나님의 자아계시는 지적인 지식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다. 물론 경건한 성도가 지적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아는 것=영생)은 헬라적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히브리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지식에 대한 헬라적 의미는 어떤 사물의 실재를 마음에 반영

 

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은 삶의 내면적 경험과 실제적으로 부합되어 있는 어떤 실재를 가진다는 말이다. 예를들면 성경에서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는 그의 계시를 한 민족의 역사적인 삶의 환경 속에서 일어나도록 하셨다.

 

 

 

2. 성경신학의 주요 원칙들

 

 

 

첫째로, 성경의 정확무오성의 인식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격적이며 의식을 가진 분이라면 그분의 자아 계시의 어떤 형태에서도 자신의 본성이나 목적에 대하여 잘못이 없이 나타내실 것이 분명하다.

 

 

 

둘째로, 계시의 기본사역의 객관성을 인정해야 한다. 계시는 인간의 주관적 산물도 아니다. 그렇다고 받아쓰기(dictation)식의 산물도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계시는 밖으로부터(ab extra) 옴을 의미한다. 물론 성경에 주관적 계시라고 부를 수 있는 책들이 있다(잠언, 시편 등). 그러나 그것들은 성령의 내면적 사역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주관적 계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경우라도 절대적인 신적 계시라고 불러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기를 허락하신 경우 어떤 형태로 주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인간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마땅히 할 일은 그의 말씀을 완전한 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로,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인식이다.성경신학을 할 때는 그 주제를 하나님의 계시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신약이 구약의 영감을 말할 때 언제나 가장 절대적이고 포괄하는 언어를 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감에 관한 성경자체의 의식을 생각하면 완전영감을 믿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영감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달리 말한다면 어떤 부분은 영감이 되고 다른 부분은 영감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 계시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들을 포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가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신임되지 않을 때는 그 계시 자체의 신임성은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 성경신학을 하는 자는 성경이 영감 되어진 문서인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보증되어짐을 인식하여야 한다.

 

 

 

3. 성경신학의 방법론

 

 

 

성경신학의 방법은 주로 역사적 점진성의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계시 과정의 구분은 몇 시기로 구분된다. 왜냐하면 계시가 역사진행 과정 속에서 언약들을 체결하여 나가면서 이루어 가는 구속사업과 불가분리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역사적 점진성은 하나님의 약속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기성이 있음을 말한다. 이 말은 어느 시점에서 그 이전(과거)을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이후(미래)를 내다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4. 성경신학 연구의 실제적 유용성

 

 

 

성경신학은 특별 계시에 관한 유기적 성장을 보여준다.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는 자는 성경을 가르칠 때 잎과 가지가 역할만 다를 뿐이지 그 근본은 같은 것처럼 본문이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은 계시가 처음에는 불완전한 경향을 갖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하여 완전한 것으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대로 씨와 나무는 양적인 면에서는 다를지라도 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씨는 불완전하고 나무는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씨 속에는 나무가 될 모든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또 가르칠 때 진리에 대하여 새로운 생명력과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다. 성경의 계시 역사에 친숙해짐으로 성경 속의 사건의 구속사적 의의를 바로 볼 수 있고 성경의 사건 속에 나 자신이 입체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5. 성경신학과 신학의 다른 분야와의 관계

 

 

 

오늘날 신학이라 하면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과 주경신학으로 크게 구분한다. 성경신학은 주경신학에 속하며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나뉜다. 주경신학에는 이외에도 성경본문 석의, 강해와 성경 해석학 그리고 신구약 서론 등이 포함된다. 조직신학은 성경을 완성된 작품으로 보고 여러 중요한 교리들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조직적으로 재정리하는 학문이다. 성경신학이 구속역사를 밟아가는 선이라고 하면 조직신학은 원이라 하겠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조직신학은 성경을 아는 자들의 철학적 사고를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역사신학은 과거 기독교인들의 교회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다.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하여 깨달은 진리를 어떻게 삶에 적용되었는가를 규명하는 학문이다. 실천신학은 성경의 해석을 현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다루는 학문이다. 선교신학은 성경해석 적용범위를 넓혀서 나로부터 이웃을 넘어 만민에게 어떻게 적용시켰으며 적용시킬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모든 분야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서 삶에 적용했는가와 적용할 것인가가 결부되어 있다. 성경을 바로 이해해야 신학과 삶이 바를 수 있다.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는 성경이다.

 

 

 

6. 성경신학과 역사

 

 

 

성경신학과 역사의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이미 강조하였다.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의 역사적 배경과 용어와 범위와 사고의 형식 안에서 설명하는 과제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지닌 명료한 내용이다고 Ladd는 말한다(신약신학, 33-4쪽). 지금까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역사의 관점은 두 가지 면에서 경시되어왔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 선상에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보다는 개인이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을 얻게 되느냐에 관심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통교회들이 오래 동안 가져왔던 견해이다.

 

 

 

둘째로는 성경을 통하여 그 당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없다는 생각과 그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재구성하기에는 재료가 불충분하다는 것과 성경이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고 신앙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은 오늘날의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특히 불트만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활동하신다는 의미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활동하시는 분으로 말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Jesus Christ and Mytholgy, 1958,p.78). 따라서 그에게는 구속사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역사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은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보편적인 역사경험을 초월적인 방법으로 개인적인 인간 실존에게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성경신학과 역사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는 자들의 대답은 무엇인가? 아니 성경이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활동하시는 분으로 말한다. 그뿐 아니라 이 역사적 사건을 계시적 사건으로 사용하시기도 하신다. 이미 언급한대로 이와 같은 경우 그 사건은 구속과 연관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성경의 역사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사관이다. 이것은 예언과 성취의 성격을 갖고 있다. 대별하여 말한다면 구약은 예언의 역사요 신약은 성취의 역사이다. 물론 구약 속에는 성취부분이 없다는 말도 아니요 신약 속에는 예언부분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김성수 교수님의 강의 "성경신학에서 본 성경의 중심 사상" 중의 성경의 역사성 부분 참조).

 

 

 

그런데 이 부분에서 강조하여야 할 점은 미래의 사건(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구약의 사건)들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일반 역사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이다. 성경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약속과 예언되어진 것이 성취를 향하여 점진되어 나가는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 역사는 시작 전에 계획이 있었고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성취를 위한 준비가 있었으며(구약), 준비가 완료된 후에 성취시키는 역사가 있었고(복음서), 성취 후에 그 성취의 결과를 적용시키는 역사가 있다(행전-계시록). 약속과 예언이 어느 한 시점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약속과 예언이 필요 없다. 성경신학에서 역사를 강조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7. 성경신학에서의 신약의 위치

 

 

 

성경신학적(구속역사적) 입장에서 신약과 구약의 차이는 첫째로 구약은 천년 이상 걸려 기록되었다면 신약은 30년 즉 한 세대 안에 기록되었고 한 세기 내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신약은 구약보다 계시의 점진성에 대한 관심이 적고 계시 점진의 마지막 부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약에는 계시의 점진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신약도 세례 요한의 사역을 기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교회의 설립과 성령의 사역을 통한 사도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에 복음이 전해짐과,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내다보는 점진성이 있다. 신약은 비록 구약을 통하여 약속되고 예언되었던 것들의 성취를 다루고 있기는 하나 바울이 엡 3:10에서 말한 대로 전 시대(구약시대)에는 감추어졌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그것이 만방에 알려지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의 구현이다. 신약신학은 계시 역사의 완성으로서 그리스도 사건과 오순절 이후 그에 대한 다양한 증거와 그의 몸 된 교회와 그의 재림에 관심을 기울인다.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에도 비 역사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특별히 신약의 권고 부분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권고 부분들도 구속역사를 전제하고 있다. 구원역사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부분도 성령의 내면적 사역을 통하여 쓰여졌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8. 신약의 구분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하여 약속과 예언이 성취된 것을 근거로 한 구분이다. 만일 하나님께 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에 근거하여 성경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먼저는 구약을 한 부분으로 하고 다음은 복음서 마지막은 사도행전에서 계시록까지로 나눌 수 있다. 그렇게 나누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엡 1:3-14까지를 근거로 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을 중심 하여 구분한 것이다. 구약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시려는 계획을 하시고 그 일을 준비하는 과정의 기록이라 하겠다. 복음서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과 십자자 사건을 통하여 완성하심(요

 

19:30)과 승천하심에 대한 기록이다. 사도행전에서 계시록까지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구원을 성령을 보내시고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완성되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살 미래에 대한 것까지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신약 자체를 나눈다면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복음서이다. 복음서는 우선 간단히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한 세례 요한의 예비사역이 기록 되었다. 나머지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로서 그의 생애, 사역(가르침과 이적), 죽음, 부활과 승천에 대한 것을 전하는 복된 소식이다. 둘째로 사도행전이다. 본서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그 하나는 사도행전 1:8에 약속하신 대로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권능을 받아 복음을 유대에서 땅끝까지 전파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어 주고 있다. 셋째는 서신부이다.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 해석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서신서는 특정한 환경에 처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서신이거나 그들의 물음에 대한 해답적 서신이다. 그렇다면 이 서신부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비록 특별한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이지만 영원한 진리에 근거하여 오고 오는 세대의 성도들을 위하여서도 기록하였음을 상기할 때 오늘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내일의 성도들을 위한 서신인 것이 분명함을 믿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계시록이다. 기독교인의 생애는 소망의 생애이다. 한편 자유를 누리지만 완전히 실현된 자유는 아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소망이 흔들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소망을 든든히 붙잡고 살아가도록 계시록은 미래의 소망과 영광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판에 대한 내용이 많을지라도 그것은 믿는 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심판주가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세주로서의 심판을 말 할 뿐이다.

 

 

 

9. 신약신학이란 무엇인가?

 

 

 

신약신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서도 신학의 정의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신학이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해 왔으며 또한 생각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자들은 신약신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신학은 첫째로 주후 1세기 기독교의 시작과 관련된 역사적 문서들을 다루는 학문이다라고 정의한다. 둘째로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삶과 신앙의 주요한 근거가 되는 문서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신학은 주후 1세기 신약의 저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었느냐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신학은 신약 저자들의 신앙을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술하는 것이다. 셋째로 성경신학의 주요 관심사는 신약저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믿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저자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위의 정의에 의하면 신약신학은 역사적인 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신약신학의 주요 관심사가 역사적 연구일 경우 이미 언급한대로 20세기 사람들이 주후 1세기의 기독교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재료도 부족할 뿐 아니라 그 재료들도 역사적인 기록이라기 보다는 저자들이 당시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한 기록들이며 저자들의 기록의 상이점들이 상당하므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대두된다. 이런 주장들과 함께 신약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신학계에서 들려지고 있다.

 

 

 

다음으로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인간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자들은 신약신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저자들에게 그들의 살았던 상황하에 주어진 것이므로 그때에 "그것이 의미하였던 바"(what it meant)와 지금 "그것이 의미하는 바"(what it means)를 연구하는 학문임을 인정한다. 이 일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살았던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살았던 상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적,문화적, 종교적 장벽이 너무나 두텁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고려되는 점은 이 모든 것들을 연구하여 일반적인 상황을 바로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시의 저자들이 처한 특별상황까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의 정의 하에서는 "그것이 의미하였던 바"만을 강조하지만 후자, 즉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정의 하에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역시 중요하게 강조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견해 하에서는 성경은 단순한 초대 교회의 역사나 저자들의 신학적인 사상들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신약은 1세기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라고 확신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서 과거(예: 구약) 에서 "의미하였던 바"를 그 당시 현재(예: 신약)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기술하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한대로 신약신학은 구약을 통하여 약속과 예언된 것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고(구원) 또한 그 성취 된 것이 어떻게 성령님께서 사도와 제자들을 통하여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시고 교회를 세워 나가시며 확장, 성장시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II. 세례 요한

 

 

 

읽어야 할 부분 : 래드의 세례 요한(46-60쪽)

 

 

 

신약신학을 다루는 책들은 대개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은 생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사역에 비하여 그의 사역은 미미하다고 생각할 라 그의 사역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이

 

다. 그러나 언약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예수를 소개하는 하는 사자요, 그의 백성을 예비시키는 준비의 사자(즉 광야에서 천국이 가까이 옴을 전파하며 회개를 촉구하며 길을 예비하는 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고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참조 말 3:1). 그러므로 구속사적 관점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그의 출생과 광야에서의 삶과 그의 천국에 대한 전파와 세례 베품과 예수님에 대한 증거, 그리고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1. 출생

 

 

 

(1) 약속의 아이

 

세례 요한은 천사 가브리엘에 의하여 그의 출생이 예고된 약속의 아이였다(눅 1:13). 그의 출생과 함께 주어진 약속은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였다(눅 1:15-16).

 

 

 

이 약속의 중요성은 첫째로 이 약속은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있다(말 4:6). 이 사실은 마태가 그의 사역,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전파의 사역(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이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함에 더욱 두드러진다(마 3:3; 참조 사40:3). 말라기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예언은 약속의 메시아의 오심 즉 메시아 왕국 시대의 임함 직전에 길을 예비하는 사자의 출생(말 3:1)과 그의 사역(사 40장)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약속은 메시아 왕국 시대의 임함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말하여 준다. 

 

 

 

둘째로 약속의 내용이다. 약속의 내용 자체도 메시아 왕국과 관계되어짐을 말한다.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것을 말한다. 세례 요한의 출생 당시 유대인들은 선지자 말라기 이후부터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메시아가 오면 성령으로 다스리며 성령의 사역이 다시 재개될 것을 내다보았다(솔로몬의 시편). 성령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은 곧 새시대의 시작으로 그들은 간주하였다. 그러기에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언약 공동체라 하면서 그 증거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진리의 성령이 그들 중에 거하심을 내세운다. 그들의 문서를 보면 종말론적 메시아왕국이 그들의 공동체 내에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에 이미 세워졌음을 암시하는 부분도 있다.

 

 

 

(2) 출생과 새 예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선지자 말라기 이후 수세기 동안 예언이 그들 중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언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때 그것을 그들은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딸의 소리(바트 콜)"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래드가 지적한 대로 유대인들 사이에는 살아있는 예언의 소리 대신에 율법을 강조하는 서기관과 묵시주의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래드는 쿰란 공동체 역시 새 예언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새 의미를 발견하여 그것을 지키는 율법주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요한의 출생과 더불어 되어진 예언들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는 세례 요한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관련된 새 예언자로 소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세례 요한의 출생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스가랴까지 예언을 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분명히 세례 요한의 출생은 새시대의 시작과 깊은 관련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세례 요한과 광야의 전파사역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천국이 가까움을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마 3:1-5; 막 1:4-6; 눅 3:3절 이하). 또한 그의 음식이 메뚜기와 석청이었다는 점이 그가 광야생활을 오래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마 3:4; 막 3:6). 세례 요한의 광야생활과 그곳에서 회개를 촉구하며 죄를 자복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푼 의의는 무엇일까? 그 의의를 고찰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살면서 사역한 광야의 부근에는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며 공동생활 하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이 살던 공동체

 

가 바로 쿰란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가 사해 근처 유대광야에 그 공동체를 세우게 된 배경은 구약 이사야 40:3과 아모스 5:26-27에 근거한다(참조 슥 9:1). 사40:3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이다. 쿰란 공동체는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아가 왕의 고속도로(king's highway

 

: 요단강 건너편 지금 요르단 산악도로)를 통하여 오신다고 생각하여 광야에서 기다리며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들은 암 5:26-27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로 옮겨졌다고 생각하였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났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그뿐 아니라 자기들의 공동체에 하나님의 성령 곧 진리의 영이 거하시므로 자기들의 공동체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공동체는 새 언약 공동체로서 종말론적 메시아 시대가 그들의 공동체와 더불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소리가 바로 사 40:3-40의 인용(마 3:3;막 1:3; 눅 3:3)인 점을 위의 배경과 관련하여 살펴 볼 때, 그의 사역은 분명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는 새 시대와 관련되어 생각되었음이 분명하다. 세례 요한과 쿰란 공동체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에 대하여 한동안 학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은 이해할 만하다. 이사야 예언의 인용과 회개를 촉구하며 준비의 세례를 베푼 사실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을 강력히 뒷받침 한다.

 

 

 

3. 세례 요한의 세례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도록 하나님 나라 백성을 준비시키는 측면에서 그의 사역을 고찰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가 세례를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 나라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의 사역은 무엇인가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두 번째 측면은 예수님의 사역을 고찰할 때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물세례라고도 부르며 회개의 세례라고도 부른다. 물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물로서 세례를 베풀기 때문이다.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세례 요한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쿰란 공동체에 들어오는 자는 물로 세례를 받아야 했다. 율법에도 물로 씻어 깨끗케 하는 결례도 있다(레 11장; 민 19장).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에 받는 개종자들의 세례도 있다. 래드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율법의 의식적 정결 법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분명히 다른 세례와 다른 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쿰란 공동체와 율법에서 말하는 결례는 그 의식이 여러 번 계속적으로 되풀이 된다. 이 점만으로 단 한번의 세례인 요한의 세례와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개종자들의 세례도 요한의 세례처럼 단 한번이나 요한의 세례는 유대인에게 베풀어진 반면에 개종자들은 이방인에게 베푼 점이 또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과 더불어 세례 요한에게 있어 누가 유대인이냐는 물음은 던질 만 하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유대인만이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교만스럽게 자랑함을 알고 마 3:8,9절에서"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 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셨다. 세례 요한의 세례와 더불어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단 말인가? 이방인은

 

개종의 세례를 받으므로 유대인과 동등 됨을 받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질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되어질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부른데 대한 의의는 이 표현은 앞으로 예수님에 의하여 베

 

풀어질 성령과 불의 세례와 대조되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여 죄를 자복하는 자에게 베풀었기 때문이다. 마 3:11에서는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준다고 하였다. 막 1:4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하였다. 이 표현들이 보여주는 의미는 요한의 세례는 첫째로, 회개의 표시로서 받는 세례라는 것이다. 둘째는, 세례의 결과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결과로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다. 눅 24:47에서도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을 말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물세례요 회개의 세례라는 두 표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의 세례는 준비의 세례라는 점이다. 준비의 세례라는 말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달리 말한다면 무엇을 위한 준비라는 말인가?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의미에서 준비의 세례라고 말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달리 말한다면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예언에 대한 전통적인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있다.

 

 

 

세례 요한의 예언에 대한 한 해석은 예수님이 정결케 하는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순전히 은혜로 성령 부어주심을 말하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로마교회가 이 해석을 따른다. 이 해석의 약점은 심판을 상징하는 불의 의미가 빠져 있음을 본다. 둘째 해석은 세례 요한의 예언은 두 가지 세례를 말한다는 것이다. 곧 의로운 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악한 자는 불(심판)로 세례 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이것은 오리겐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해석의 약점은 세례 요한의 예언은 두 가지 해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례라는 점이 지적되면서 대두하게 되었다. 위의 두 해석을 주장하는 자들은 세례 요한의 예언이 오순절 날에 성취된 것을 해석의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한다. 달리 말한다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분명한데 그들이 받은 세례 또한 분명히 심판의 세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 줄 것이라는 세례 요한은 두 가지 세례가 아니라 하나의 세례라는 견해는 세례 요한의 예언의 문맥과 성령과 불이 구약에서 의미하는 바에 의하여 주장된다. 마 3:11절과 17절의 헬라어 성경은 다음과 같다 :; 이 본문에서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는 가 보여주는 대로 요한의 세례나 예수님의 세례가 동일한 자들에게 베풀어진다는 점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세례는 자신의 준비의 세례를 완성시키고 성취시키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요한의 세례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세례를 피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는 이 보여주는 대로 성령과 불의 세례는 하나의 세례라는 점이다(James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p. 11).

 

 

 

문맥을 통하여 성령과 불의 세례가 하나의 세례로서 두 가지 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주장하면서 구약에서 성령과 불이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성령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으로서 정화하는 사역과 심판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말한다.사 4:4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정화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성령은 분명히 축복의 사역을 하고 있음도 말한다(사32:15-17, 44:3). 반면에 사 11:4절과 15절에서는 동일한 영이 멸망시키는 사역을 하심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와 그를 대적하는 세력을 그의 영으로 멸망시킬 것을 말씀하심이다(참조 사 29:10). 하나님의 성령은 항상 축복의 사역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멸하는 사역도 하심을 본다. 하나님의 영의 멸하는 사역은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 5장 1-11절의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참조 살후2:8).

 

 

 

구약에서 불의 사역 역시 심판의 요소와 정화의 요소가 있음을 본다. 불에 심판의 요소가 있음은 분명하다(사 31:9; 암 7:4; 말 4:1). 그러나 불은 악한 자의 심판을 상징할 뿐 아니라 의로운 자의 정화(심판이나 멸망은 아님)를 상징하기도 한다(사 1:25; 슥 13:9; 말3:2-3). 말라기 3:2-3의 불은 정화의 불임이 분명하다. 특별히 관심이집중되는 것은 말 3:1에서 길을 예비하는 사자로서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과 언약의 사자로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말한 뒤에 언약의 사자의 사역을 불로 정화시키는 사역으로 소개한 점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알리는 엘리야의 사역으로 인식한 줄로 생각된다(말 4:5). 그날에 예수님의 성령과 불의 세례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아닌 축복과 정화의 성령과 불(구원)로서 임할 것을 고대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며 세례를 베푼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물 자체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강이나 홍수는 재난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음을 본다(시 42:7, 69:2,15; 사 43:2). 반면에 물이나 강은 또한 정화와 축복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함을 받았다(왕하 5:14).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 물로서 깨끗함을 받을 것을 내다 보았다(겔36:25-27). 그는 또한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이 축복의 물임을 말하였다(겔 47:3). 고전10:1-3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세례라고 하면서 물세례 자체를 심판과 구원을 동시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세례 요한의 죽음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한 대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 성경의 기록에 관한 한 역사의 중심에서 사라져 감을 볼 수 있다. 그는 죽음의 직전에서도 간접적으로 예수는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였음을 증거하였다. 그는 또한 악한 왕 헤롯에게 목베여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 메시아는 악한자를 심판하는 자로서 또한 그의 연약한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자로서 오셔야 할 분이심을 실증하였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 부분이나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증거한 본문들을 살펴야 할 것이나 예수님의 사역을 고찰할 때 살피거나 생략하겠다(참조 M.LLoane, John the Baptist as Witness and Martyr).

 

 

 

IV.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1. 마태복음 1장의 성경신학적 의의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구약이 주로 약속과 예언의 책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예언과 약속의 성취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인 점을 생각한다면 성경은 두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라 하겠다. 마태복음의 특성이 구약의 직접 인용과 암시가 100회 이상 사용된 점을 볼 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기 위하여 쓰여진 마태복음은 예수그리스도가 구약의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신 이스라엘의 메시아며 약속된 왕국을 세우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기록된 마태복음은 한 권의 책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내용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준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의 첫 구절인 마 1:1이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점에서 잘 드러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그의 족보를 소개함으로 시작되었다. 마태는 왜 족보로부터 마태복음을 시작하고 있는가? 족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이 선택되어 지칭된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아브라함에게까지만 거슬러 올라간 것은 그가 그 이상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족보가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볼 때 그러하다(눅 3:23-38). 그러므로 마태가 그렇게 한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 1:1은 아담으로 시작된다. 이것이 우리 성경에서는 계보 또는 족보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온 것으로 구약에서 인류역사를 크게 구분 짓는 분기점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다. 족보는 가장 압축된 형태의 역사로서 어떤 역사의 줄기를 시사해 주고 그 역사의 근

 

원(혈통의 근원)을 제시해 준다. 족보를 언급하는 이유는 역사가 전환점을 맞아 새시대로 변혁되어 가려 할 때 그 역사의 근원과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역사와의 연속성을 시사하기 위하여 제시되어진다. 그러므로 마 1:1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새 시대는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를 통하여 하신 약속과 예언의 성취의 시대인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분명하다. 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약을 통하여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요(창 3:15), 만민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도록 약속 되어진 아브라함의 자손이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의 족보를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창 12:1-4, 22:18; 갈 3:16).

 

 

 

(a) 예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까지만 거슬러 올라간 이유는 무엇인가? 달리 말한다면 그 의의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신 배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로 더불어 새 시대를 시작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창 1-11장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인간의 배은망덕으로 인한 인간의 삼대 실패를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의 결혼과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려는 계획(천국탈환 사업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이루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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