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4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4학기

제목찬 양 과 경 배 인 도 법 2022-07-13 16:34
작성자 Level 10

찬 양 과 경 배 인 도 법

찬양과 경배란 무엇인가?





올바른 찬양인도를 위해서는 찬양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한다.



1. 찬양이란



찬양 : 찬양이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방법은 노래나 기도뿐만 아니라 선포도 포함된다. 그것은 찬양 속에 \'자랑\'이라는 의미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의 어원이 되는 \'할랄\'에는 자랑하다, 뽐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미친체하다라는 의미까지도 포함되어있다. 즉 찬양은 얌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열광적으로 하는 것이다.



2. 경배란



원래는 예배와 같은 말이다. 성경 원어상으로는 예배와 경배가 모두 같은 말이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시 번역자들의 불일치로 일부 성경(요한복음, 사도행전등)에서만 예배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배라고 하면 회중예배를 의미하고 경배라고 할 때는 본래적인 의미의 경배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경배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찬양과 예배 모두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경배는 너무나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서있을 수 없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고 선포하는데 초점이 있고 경배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데 초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낮춤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표시,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찬양과 경배의 시간에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찬양과 경배라고 할 수 없다.



3. 찬양과 경배의 목적



어떤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온전히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시간에 자신의 고백이나, 간증, 또는 간구의 내용을 담은 복음성가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대부분이 요즘 나오는 복음성가들에 대해 무지함을 볼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미국 신학계의 주장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그들의 배경도 모른체...

미국에서도 가스펠 송은 예배시간에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의 복음송의 의미와 미국의 가스펠 송의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찬송가에 들지 않은 대중적인 기독교 음악 전체를 복음성가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미국은 가스펠 송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물론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기독교 음악 전체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팝송\'을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록이나 메탈 같은 것까지 포함하는 대중음악 전체를 가리키지만 \'팝\'이라는 음악 장르가 따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 좁은 의미에서 가스펠 송이라 할 때는 세상을 향한 노래, 즉 안 믿는 사람의 전도를 목적으로 한 노래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곡에서는 복음이 상당히 은유적으로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음악 또한 파격적이어서 안 믿는 자들도 크게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복음성가는 여기에 해당될 만한 곡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처럼 기독교인을 위한 복음성가는 \'가스펠 하모니\'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아직 이러한 분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찬양인도자는 예배시간에 적합한 곡과 적합치 못한 곡을 분별할 수 있어야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 믿으세요\'는 전도할 때 부를 노래지 예배용으로는 부적합하다. \'돈으로도 못 가요\'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 위한 곡이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므로 부적절하다. 심지여 찬송가에도 부적절한 곡이 있다.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성도를 향해 주의 일군이 되자는 내용과 우리나라가 하나님 안에서 발전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성경에 대한 무지로 \'계명성 동족에 밝아\'라는 표현까지 있다.(성경에서 계명성은 사단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찬양의 내용이 담기지 않은 곡들은 찬송가라도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찬양의 내용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부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찬양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찬송가 102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같은 곡에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과 세상 것을 버리겠다는 다짐이 있을 뿐 찬양하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예수 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고백, 예수를 위해 세상 모든 것을 버렸다는 이러한 고백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선곡시에 생각할 것은 이 곡이 찬양의 목적,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합당한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야한다.


찬 양 과 경 배 인 도 법(2)



찬 양 예 배 의 형 태





찬양예배의 형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 째는 말씀보다는 철저하게 찬양이 주가 되는 진정한 의미의 찬양예배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인 예배 형태에 찬양을 많이 넣은 형태이다. 편의상 앞으로 전자는 일반형, 후자는 절충형이라고 부르겠다.



1. 일반형 찬양예배



이 형태는 기존의 예배 형식을 완전히 탈피한 자유로운 예배형식으로 찬양 자체가 예배이자 찬양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형태이다. (말씀 선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경우 찬양은 예배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배이다. 이러한 예배의 경우는 일정한 틀이 없기에 형태를 분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나눈다면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찬양도 마치 소설이나 음악처럼 도입 - 전개 - 절정 - 결말의 형태를 띠는 데 ① 절정 뒤에 말씀을 선포하고 결말을 짖는 방법과 ② 절정 뒤에 말씀을 선포하고 다시 한번 절정을 거친 뒤 결말을 짓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③ 전개 뒤에 말씀을 선포하고 절정 - 결말로 가는 방법도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여기서 결말은 설교에 있어서 결론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뒤에 가사의 진행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두란노 경배와 찬양의 경우는 찬양 인도자와 말씀 선포자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어서 ①번의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다.

②번의 형태는 다드림 선교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데 다드림 선교단의 목요찬양 경우는 찬양 인도자와 말씀 선포자가 대부분의 경우 일치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가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다. 다드림 선교단은 이러한 자유로움으로 인해 ③번의 형태를 가끔 사용하기도 하며 ①번의 형태도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기 서술한 모든 형태를 벗어난 자유로운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위의 분류는 편의상의 분류일 뿐 인도자와 회중이 찬양예배에 익숙해지고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누리며 예배한다면 이러한 형태의 분류는 무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찬양인도에 익숙지 못한 인도자라면 이러한 형태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배워나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2. 절충형 찬양예배



두 번째 형태는 너무나 큰 변화에는 잘 적응치 못하는 기성 세대를 위한 일종의 절충형 찬양 예배라고 할 수 있는 데, 예배의 앞부분에 찬양을 몰아 넣거나 말씀 선포 뒤에 찬양을 몰아 넣는 방법이다. 이 형태는 찬양보다도 말씀이 주가 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찬양예배라고 보기 어려우나 보수적인 신앙인 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사람들 특히 40대 후반부터는 유교적인 사고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유교적 사고가 자유로운 형태의 찬양예배를 거부하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옳은 생각은 아니지만 인간의 연약함으로 생각하고, 바울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육식을 절제했듯이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양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형태는 목요 찬양이나 금요 찬양 같은 젊은 이들이 많이 참석하는 찬양예배 보다는 주일 저녁 찬양예배의 형태로 권장할 만하다.

이 형태는 사실상 두개의 별개의 예배가 될 위험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찬양을 앞에 몰아놓고 뒤에 말씀을 선포하는데 앞부분의 찬양과 뒷부분의 말씀에 연속성이 상실되기 쉽다. 사실 이 형태를 취하는 많은 교회들이 찬양과 말씀이 연결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말씀 선포자와 찬양인도자 간의 보다 긴밀한 협조가 요구된다.



주의 : 찬양과 말씀이 별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찬양이 말씀에 종속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일부 교회는 찬양을 예배할 분위기 돋구는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찬양은 그 자체가 예배이지 예배를 돕는 도구가 아니다. 분위기 돋구는 찬송은 이미 찬양이 아니다. 찬양과 말씀이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3. 인도자에 따른 분류



앞의 분류는 예배의 구조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인도자의 역할 분담에 따른 분류를 할 수도 있다.



첫 번째 형태는 찬양인도자, 예배 인도자, 말씀 선포자가 모두 다른 경우이다. 이 형태는 절충형 찬양예배에 적합한 방법이다. 예배 인도자가 예배의 시작을 선포하고 기도한 뒤 찬양인도자가 찬양을 인도한다. 그리고 찬양이 마무리되었을 때 다시 예배 인도자가 나와서 예배를 인도하고 순서가 되었을 때 말씀 선포자가 말씀을 선포한다. 이 경우 주의할 점은 찬양 인도자와 예배 인도자의 역할 분담이다. 서로의 협의에 따라 예배 시작부터 찬양이 마쳐질 때까지 예배시작의 선포와 중간중간의 기도까지도 모두 찬양 인도자가 인도할 수도 있다. 반대로 찬양만 찬양인도자가 인도하고 중간중간의 기도는 예배인도자가 인도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서로의 긴밀한 협조가 요구된다. 후자의 형태가 더 어려운데도 후자의 형태가 쓰이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예배인도자가 찬양도 인도해야 하지만 음악성이 부족한 경우이다. 이 경우 사실상의 찬양인도는 예배인도자이고 찬양인도자는 보조자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곡의 진행은 찬양인도자가 맡지만 중간중간의 짧은 메시지와 기도의 인도는 예배 인도자가 하게 된다. 이 경우는 선곡도 함께하는 것이 좋다. 또 찬양인도자의 영성이 부족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앞의 경우는 예배 인도자의 부족을 찬양인도자가 보충한다는 개념이지만 이 경우는 찬양인도자의 부족함을 예배 인도자가 보충해 주는 것이다. 이 두 경우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다. 그러나 선곡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따라서 분류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앞의 경우는 찬양인도자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예배 인도자가 선곡을 하고 찬양예배 전반을 계획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찬양인도자가 선곡을 하고 찬양의 전반적인 흐름을 계획하지만 자신의 영성의 부족을 예배인도자를 통해 도움 받는 것이다. 물론 영성이 부족하지 않아도 분담의 차원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또 보수적인 교회의 경우 찬양인도자가 어리다면 영성에 관계없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유교적인 사고의 연약함으로 인한 판단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번째의 형태는 찬양인도자와 예배인도자가 같고 말씀 선포자만 다른 경우이다. 이 형태는 일반형 찬양예배에서 많이 쓰인다. 절충형에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이 경우는 찬양인도자와 예배 인도자가 같으므로 역할 분담에 대해 주의할 점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찬양인도자는 선포될 말씀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그래서 말씀과 어울릴 수 있는 찬양인도를 해야한다.



세 번째 형태는 예배인도자와 말씀선포자가 같고 찬양인도자만 다른 경우이다. 이 형태는 사실상 모든 순서의 인도자가 말씀 선포자이지만 설교자의 음악성 부족으로 인해 찬양인도자를 세운 경우이다. 이 경우 선곡은 설교자가 주도하는 것이 좋다. 또 다른 경우도 있는 데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사람이 다 하기는 힘들기에 찬양인도자를 세울 수도 있다. 이 경우는 단순히 예배시간의 피로만 생각한 경우와 예배준비의 문제까지 생각한 경우가 있는 데 후자의 경우는 예배인도자의 인도방침에 따라 찬양인도자가 선곡을 하고 예배 인도자와 역할 분담을 한다.



네 번째 형태는 세 가지 모두를 한사람이 인도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예배의 전체 흐름은 매우 자연스러우나 예배가 한시간을 넘어설 경우 인도자의 육체적인 피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경우 보조 찬양인도자를 세우기도 한다. 보조 찬양인도자는 찬양의 도입부, 또는 전개부까지만 인도하고 임무를 전체 인도자에게 넘기게 된다.



























찬 양 과 경 배 인 도 법(3)

찬양과 경배 인도법





찬양예배는 예배전체가 한 곡의 찬송 같은 느낌을 주도록 해야만 한다. 따로 떨어진 한곡 한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배로 느껴지도록 곡의 연결과 말씀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1. 선 곡



찬양예배 전체가 한 곡의 찬송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선곡이 무척 중요하다. 이러한 진행을 위해 선곡시에 염두에 두어야할 사항들을 살펴보겠다.



가. 가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참된 찬양예배는 경배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찬양의 연결이 메시지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어떠한 것을 바라시는지 잘 분별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인도자, 또는 회중이 원하는 주제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주제를 먼저 정해야 한다. 이때 주의할 것은 말씀을 전할 사람과 먼저 한 마음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찬양의 주제는 승리, 기쁨 등인데 말씀이 회개여서는 곤란하다. 서로 기도하며 함께 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찬양은 설교가 아님을 잊어선 안된다. 찬양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극적으로는 말씀의 주제와 충돌을 피할 정도면 족하고 적극적인 경우도 말씀과 잘 어울리는 찬양이면 좋지만 그 메시지가 너무 강하게 나타나서도 곤란하다. 그리고 메시지는 전개 부분에서 넣는 것이 좋다. 절정은 순수한 찬양이 되는 것이 좋다.

주제를 정한 뒤에는 전체의 전개를 구상해 보아야 한다. 이때 잊지 말아야할 것은 예배의 형태이다. 그것은 예배의 형태에 따라서 전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찬양예배 진행의 기본 형태를 편의상 표현해 보면

도입 - 전개 - 절정 - 결말로 생각할 수 있다.

절충형은 도입 - 전개 - 절정으로 찬양은 일단락 되고 결말의 자리에 말씀이 들어가는 형태가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찬양으로 결말까지 간 뒤에 말씀을 선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입, 전개, 절정, 결말은 무엇인가?

도입은 찬양예배 시작부분으로서 순수한 찬양곡들을 부르는 것이 좋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성전에 올라갈 때는 찬양하며 올라갔다고 한다. 이 원리는 오늘날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은 고백이나 간증 같은 내용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곡들이 좋다. 그리고 찬양예배에 참석한 회중의 신앙수준이 전체적으로 매우 헌신된 분위기라면 모르되 처음에는 가사도 너무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헌신이나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 너무 강한 가사는 도입부에서는 피하는 것이 좋다. 도입부는 회중을 예배로 이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날 찬양의 주제가 드러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떤 인도자를 보면 도입부에서 새 찬양을 배우기도 하는 데 첫 곡은 피하는 것이 좋다. 앞에도 말했지만 처음은 순수한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도입부에서 어느 정도 찬양을 한 뒤 전개로 넘어가기 직전에 배우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 새 찬양을 배운다는 것은 찬양의 흐름을 끊을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예배 시작 전에 새 찬양을 배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입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야 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찬양을 몇 곡 부른 뒤에 회개를 촉구하는 찬양을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곡을 불러야 한다는 원칙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작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높이는 곡으로 시작하되 회중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찬양으로 인도해 들이는 것이 도입부의 역할이다.



전개는 상당히 자유롭다. 이미 도입부에서 부른 찬양들로 마음이 열려 있으므로 다소 부담스러운 곡을 불러도 좋고 가벼운 곡을 부를 수도 있다. 전개는 어떠한 곡이든 부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시편의 찬양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하나님을 높이는 말로 시작해서 간구, 탄원, 감사, 고백 등을 하고 나서 다시 하나님을 높이고 끝난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도록 해야하는 부분이 절정이라고 생각할 때 전개는 절정으로 이끌어 올리는 과정으로서의 역할만 잘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강한 메시지를 담고 싶다면 이 전개 부분에서 전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전개의 부분에서 그날 찬양의 메시지를 나타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교제의 찬양도 전개 부분에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전개 부분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예배에 적합치 않은 가사를 가진 곡들도 그날의 메시지에 도움이 된다면 한곡정도는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조금 다른 얘기지만 하덕규집사님의 \'쉼\'이라는 앨범은 좁은 의미의 가스펠 송이다. 그런데 이 앨범의 구성을 보면 한곡 한곡만 보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느끼기 힘드나 전체를 보면 그 앨범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어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찬양예배의 곡들 또한 한곡 한곡으로 이해되지 않고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곡의 내용이 무엇인가도 중요하지만 이 곡이 이 흐름에 적당한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단 가사가 역행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찬양 - 회개 - 간구 -고백 - 감사 - 찬양 - 경배 의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된다. 앞의 순서는 점점 깊은 단계의 찬양으로 나가는 것이다. 회개, 고백, 간구 등의 순서는 바뀔 수도 있으나 나머지의 순서가 바뀌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께 점점 더 깊은 찬양을 드려야지 깊은 찬양을 드린 뒤에 가벼운 찬양을 드린다는 것은 흐름에 맞지 않는다. 물론 중간에 한 두 가지를 뛰어 넘는 것은 상관없다. 그리고 완전히 경배의 단계에(이것은 전개가 아닌 절정에 속한다.) 들어간 뒤에는 다시 정리의 단계로 조금씩 가벼운 곡을 부를 수도 있다. (물론 인도자가 뛰어날 경우 한번의 찬양 예배에서 여러 차례의 절정에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의 찬양을 부른 뒤 감사의 찬양을 부르고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를 부르다가 다시 회개의 노래를 한다면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적당치 않음을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찬양인도자들이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예배를 인도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절정은 온전한 경배로 들어가는 것이다. 절정부의 앞부분은 순수한 찬양곡들이 좋으며 중간에 헌신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긴 곡을 부르고 완전한 경배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중간에 헌신을 촉구하는 노래도 철저히 하나님을 높이는 내용 속에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는 가사가 섞여 있는 곡을 쓰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높이는 내용은 별로 없고 헌신과 결단을 강조하는 내용만이 들어있다면 전개부에서 사용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절정에선 피하는 것이 좋다.(이것은 권장 사항일 뿐 반드시는 아니다. 목적은 우리 자신이 온전히 주님께 무릎꿇고 순종하게되는 경배에 있는 것이다.) 만일 회중의 대다수가 방언을 하고 교회 담임교역자의 지도 방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절정의 마지막에 방언찬양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회중 중에 연약한 자가 많거나 지도 교역자의 지도방침에 어긋난다면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좋다.



방언찬양 :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알고있는 찬송을 방언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회중예배에 있어서 방언찬양은 단순히 가사만 방언으로 바꾼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찬양의 절정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가득 찾을 때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가사 알지 못했던 곡조의 노래가 나온다. 회중들이 제각기 다른 말 다른 곡조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한데 어울려 아름답고 웅장한 코러스를 만들어 내는 데 이러한 찬양을 하는 모임들이 있다. 어떤 모임에선 에베소서 5장 19절에 나오는 신령한 노래는 방언 찬양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의 할 점은 방언 한다고 해서 방언찬양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필자는 한때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언찬양을 듣고는 생각이 달라져서 방언을 구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방언을 받은 뒤에도 한동안은 방언찬양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 이유를 깨달았는데, 그것은 필자가 방언찬양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찾었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말부분은 사실 없어도 되는 부분이다. 절정에서 온전한 경배를 했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나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흥분되고 기쁨이 충만한 마음을 세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가라앉히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절정 뒤에 말씀이 이어진다면 결말 부분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말씀 선포자가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충형의 경우는 결말이 필요 없다.(찬양을 말씀 뒤에 몰아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일반형의 경우에는 말씀 뒤에 다시 절정 - 결말로 이어지는 형태와 그냥 결말로 가는 형태가 있는 데 전자의 경우는 선포된 말씀에 근거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과 헌신의 경배가 이어진다. 그리고 결말을 맺는 것이다. 후자는 말씀선포가 마쳐질 때의 기도로 절정을 끝내고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리하는 것이다.



나. 음악



선곡에 있어서 음악적인 요소와 음악적인 연결도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도입부에서 시작은 너무 빠른 곡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모인 사람들이 모두들 아주 성령 충만하다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인위적인 성령 충만을 연출할 위험성이 있다. 즉 빠르고 즐거운 찬양은 자연스럽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져서 나와야 하는데, 아직 그러한 기쁨이 차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러한 빠른 곡이 회중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즐거운 찬양이 마음 문을 여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하나님으로 인한 즐거움이 아닌 신나는 노래로 인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수련회라든가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있는 성령 충만한 모임이라면 처음부터 빠른 곡을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대로 시작할 때 너무 느린 곡, 또는 무거운 분위기의 곡을 부르는 것도 좋지 않다. 자칫하면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서 지친 상태로 온 성도들을 더 지치게 할 수도 있다.

찬양예배에 있어서 곡의 음악적인 진행은 보통속도의 곡으로 시작해서 차츰 가볍고 밝은 곡으로 진행한 뒤 힘찬 곡으로 그리고 깊이 묵상할 수 있는 느린 곡으로 진행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악만을 생각한 이론이다. 가사와의 관계를 생각해야만 한다.

가사도 진행이 자연스러워야하고 음악의 진행도 자연스러워야한다. 찬양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한곡의 찬송 같은 느낌이 들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빨라지고 자연스럽게 느려지고..., 물론 극적인 전환(강조를 위해서 때론 필요하다)도 한 두번 정도는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을 갑자기 바꾸는 전환은 자주 있어선 곤란하다. 그리고 가능하면 음악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 좋다. 그래야 한곡 같은 느낌이 계속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음악이 계속이어 지면 인도자의 짧은 메시지나 기도시간도 찬양의 연속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찬양 한곡 한곡 끊어서 부르지 않고 계속 이어서 부르는 것이 더 은혜롭다.(이것은 경험적인 것일 뿐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끊이지 않고 찬양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코드 진행과 편곡에 있다. 예를 들어 C코드로 된 노래를 부르다가 노래가 끝나자마자 음악을 끊지 않고 바로 E코드로 된 곡을 불렀다고 하자. 노래가 이어졌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까? C코드에서 E코드로 바뀌는 순간 음의 높이 차이 때문에 분위기가 확 바뀌어 버린다. 이것은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코드의 진행이 어떻게 될 때 자연스러운가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한다.

C코드의 기본 진행은 C - F - G7이다. 그러므로 C코드의 곡에서 F코드 곡으로의 연결은 매우 자연스럽고 음잡기도 쉽다. 물론 G코드로의 연결도 괜챤지만 F코드로의 연결만큼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그리고 C코드와 Am코드는 장조와 단조의 차이지 기본적으로 같은 조표를 지니고 있다. 즉 음계의 위치가 같다.(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분은 피아노나 기타를 치는 분에게 물어보시길...) 그러므로 C코드에서 Am코드로의 전환도 매우 자연스럽다.





코드명
바 꿀 코 드

매 우 좋 음
약 간 어 색

C
F
Am
G
Dm
Cm

D
G
Bm
A
Em
Dm

E
A
C#m
B
F#m
Em

F
Bb
Dm
C
Gm
Fm

G
C
Em
D
Am
Gm

A
D
F#m
E
Bm
Am

B
E
G#m
A
C#m
Bm

Am
Dm
C
Em
F
A

Bm
Em
D
F#m
G
B

Cm
Fm
Eb
Gm
Ab
C

Dm
Gm
F
Am
Bb
D

Em
Am
G
Bm
C
E

Fm
Bbm
Ab
Cm
Db
F

Gm
Cm
Bb
Dm
Eb
G



[코드 변환표]



그리고 Am코드에서는 Dm코드와 Em코드가 자연스럽고(C에서 G로의 변화처럼 Am에서 Em로의 변화도 Dm로의 변화처럼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여기서 약간의 응용을 한다면 C코드에서 Dm코드로의 변화도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잘 모르는 분을 위해 각 코드에서 변환할 수 있는 코드를 적어보면 위의 [코드 변환표]와 같다.

여기서 C에서 Cm로 변환하는 것은 같은 으뜸음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앞에 곡의 마지막음과 뒤에 곡의 첫 음이 같다면 상당히 자연스러울 수 있다. 특히 기타 반주에선 더욱 그렇다. 하지만 피아노에서는 약간 부자연스럽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수 있으나 너무 복잡하므로 설명을 피한다. 이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코드진행 외에도 같은 곡을 반음 또는 한음을 올려서 변화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사와 곡조가 같은 상황에서 반음, 또는 한음을 올리면 그것은 같은 노래라는 느낌은 깨지 않으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방법은 한번의 찬양인도에서는 2번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



코드의 진행뿐만 아니라 곡의 빠르기도 곡 진행의 연결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곡의 속도 변화가 너무 심하다면 그것 역시 한곡이라는 느낌을 줄 수 없다. 점점 빠른 곡으로 점점 느린 곡으로 이동하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빠른 곡과 느린 곡 사이의 중간 곡을 배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는 데는 단조로된 빠른 곡이 매우 유용하다. 원래 단조는 느리고 가라앉은 분위기인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단조로된 빠른 곡도 많이 있다. (특히 이스라엘 민속 찬양들) 이러한 곡은 속도를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다. 온 땅이여 주를 찬양은(Em코드) 매우 빠른 곡이다. 하지만 이 곡을 느리게 불러 보라 색다른 느낌이 날 것이다. 그 나름대로 새로운 맛이 느껴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는 여호와,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주께 노래로 찬양하리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단조로 된 빠른 곡은 아니지만 빠르게 불러도 좋고 느리게 불러도 좋은 곡들이 있다. 이러한 곡을 많이 알아두면 매우 편리(?)하다. \'살아 계신 주\'같은 곡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 회중



선곡할 때 고려해야할 또 한가지는 회중이다. 아무리 좋은 찬양도 회중이 따라 부르기 너무 어렵거나 회중의 정서에 맡지 않으면 적당치 않다.

특히 주의 해야할 점은 젊은이들은 별문제가 안되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빠른 곡을 따라 부르기에 숨이 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당김음이 많이 사용된 곡은 잘 따라 부르지 못한다. 인도자는 이러한 점들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또 보수적인 교회의 경우 어른들은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부르는데 대해 거부감을 가진 경우도 많이 있다. 혹 거부감은 없을 지라도 복음성가는 거룩한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이러할 때는 억지로 복음성가를 부르려고 하기보다는 찬송가를 잘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찬송가에서도 힘찬고 무척 신나는 리듬을 가진 곡들이 많이 있다. 거기에 복음성가를 섞는 데 처음에는 빠른 곡, 신나는 곡은 넣지 않고 거룩하고 은혜롭게 여길만한 곡들 위주로 한다. 이런 식의 찬양 예배가 계속되면 날이 갈수록 교인들의 반응이 조금씩 바뀌어갈 것이다. 그러면 조금씩 원하는 복음성가를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2. 악기와 음향시설



너무나 많은 찬양모임이나 교회에서 악기나 음향시설을 잘못 사용해서 찬양예배가 은혜롭지 못한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것은 대부분의 찬양인도자들이 음향에 대해 무지하거나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악기의 역할 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찬양을 인도하는 반주팀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연주회, 또는 공연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음악 공연이라면 각각의 악기가 화음을 이루되 분명하게 들려야 한다. 하지만 찬양예배는 그렇지 않다. 각각의 악기가 분명히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찬양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수준 높은 연주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가 연주하는 악기소리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될 수 있도록 연주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연주해야 한다. 하지만 연주회가 아님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연주회나 어떠한 공연에 있어서는 그 음악 소리가 장내를 압도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연장의 얘기지 예배시의 얘기는 아니다. 예배시에는 회중의 찬양소리와 같거나 약간 큰 정도면 족하다. 굳이 백분율로 나타내라면 악기소리가 35%, 회중의 찬양소리가 35%, 인도자를 비롯한 찬양리더들의 목소리가 30%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단 인도자가 찬양도중 하는 말이 분명히 들릴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이렇게 마이크를 조절하면 인도자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노래소리까지 커지는 데 그 소리는 회중을 압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도자는 노래를 부를 때는 마이크와 거리를 조금 두고 말을 할 때는 마이크를 가까이 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악기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드럼이다. 드럼이라는 악기는 소리가 클 수밖에 없는 데 아주 노련한 드럼 연주자가 아니라면 차라리 빼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은혜를 망치던가, 아니면 드럼 소리로 인해 사람의 기분이 들뜨기 쉽다. 물론 하나님으로 인해 들뜬다면 좋겠지만 아닐 수가 있다. 드럼에 있어서 또하나 고려해야할 점은 공간의 크기와 회중의 숫자이다. 공간이 좁다면 다른 악기와 회중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드럼은 빼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장소가 아무리 넓더라도 회중이 적게 모인다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음향을 조절하는 사람도 이점을 기억해야 하는데 보통 음향은 공간의 크기에 중점을 두게 마련이다. 하지만 찬양예배의 특성상 공간은 넓은데 사람이 적다면 그 소리를 약간은 희생할 필요가 있다.

드럼 다음으로 주의 해야할 것은 전자악기들이다. 모든 악기 연주자들은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를 분명하게 듣기를 원한다. 하지만 찬양예배시에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큰 것이다. 악기 연주에 있어서도 교회라는 특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전자 기타의 소리는 들릴 듯 말듯한 정도면 족하다. 그리고 키보드는 화려한 애드립보다는 바탕에 깔아주는 음악을 하는 편이 좋다. 대신에 피아노가 화려한 연주를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보수적인 사람들도 큰 거부감을 갖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베이스 기타는 보통 연주회 때처럼 분명하게 들릴 정도로 하는 것이 좋다. 장소나 회중의 문제로 드럼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베이스 기타와 탬버린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핀 것은 많은 악기가 있는 경우이고 작은 교회의 경우 피아노만 있거나 피아노와 통기타만 있는 경우도 심심지 않게 있다. 심지어 통기타만 가지고 찬양을 인도해야할 경우도 있다. 피아노의 경우는 달라질 것이 없겠지만 통기타의 경우는 이러한 경우 아름다운 연주뿐만 아니라 노래부르기 쉬운 연주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통기타만 있는 경우라면 화려한 연주보다는 회중이 따라 부르기 쉽도록 알기 쉬운 반주를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악기가 준비되지 못한 교회도 조그마한 악기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데, 그것은 탬버린의 적절한 사용이다. 탬버린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데 잘 연주하기만 한다면 놀라운 효과를 낼 수 있는 악기이다. 그러나 탬버린 연주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3. 워쉽 댄스(Worship Dance) 또는 율동



여기에서는 주의사항 몇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워쉽댄스 혹은 율동은 잘 활용할 경우 보다 즐겁게 하나님을 높이고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이 자칫하면 단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경쾌한 동작일 경우 그 동작 자체를 즐기게 되기 쉽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의 경우 서로 손을 마주치는 장면에서 장난으로 흐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찬양인지, 우리가 즐기는 것인지 분간이 안된다.(물론 찬양 속에는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자신도 그 속에서 즐거워하는 축제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도자는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인지 인간적인 놀이에 지나지 않는지를 분별할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기도 많이 해야겠죠?) 그래서 주안에서의 즐거움이라면 계속 되도록 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중지시켜야 한다. 이때 중지시키는 것도 주의해야 하는데, 그냥 찬양을 끊고 회중에게 이에 대한 주의를 주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것은 이러한 주의를 받아들일 성숙성이 회중에게 있을 경우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로 인해 분위기( ? -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달리 표현을 못 찾겠군요...)가 가라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인도자라면 이러한 때에 율동 없는 찬양으로 곡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워쉽 댄스에 있어서 두번째 문제는 익숙지 못한 동작으로 인한 찬양방해 이다. 한참 찬양에 몰입해야할 시간에 동작이 신경 쓰인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다라서 인도자는 율동을 배우는 시간을 따로 가질 필요가 있다. 이미 익숙하게 된 곡들만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세번째 문제점은 율동을 잘 하는 사람의 경우 자신의 동작을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유혹이 생기기 쉽다. 율동을 잘하진 못해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이같은 현상을 보이기가 매우 쉽다. 이러한 이유에서 찬양의 절정에서는 율동 있는 곡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그 모임 성원 모두가 잘 숙지하고 있는 곡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네번째 문제는 이미 알려진 워쉽댄스가 자유로운 표현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표현으로 춤을 추도록 요구하실 때도 있고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는데 이미 짜여진 동작들은 그러한 자유로운 워쉽댄스(아마 이것이 진정한 워쉽댄스일 것이다.)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도자는 이러한 사실을 회중에게 잘 이해시킬 필요가 있으며 때로는 알려진 동작이 없는 곡을 택해 자유롭게 표현해 보도록 유도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찬 양 과 경 배 인 도 법(4)

인 도 자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의 작곡자인 밥 피츠가 서울 올림픽때 한국에서 찬양예배를 인도한 일이 있다. 그때 한 찬양사역자가 도대체 어떻게 준비하기에 그렇게 잘 인도할 수 있느냐고 묻자 밥 피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배 준비요? 예배준비는 하지 않습니다. 제 삶이 예배인 걸요!\"

찬양 예배에 있어서 앞에 기술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터득한 사람이 있을 지라도 그가 예배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의 공연은 실력, 그리고 연습량에 비례한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일은 그 사람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찬양인도자의 노래실력, 말씀, 능력, 등을 따라 역사 하시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따라 역사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앞에서 비본질적인 것만 잔뜩 나열한 것은 이러한 문제가 무시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찬양하는 삶, 찬양의 의미, 찬양의 능력, 찬양의 필요성, 등에 대해 다룬 책이나 글들은 많이 보았지만 실재 인도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다룬 글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찬양인도자라면 \'멀린 캐로더스\'목사님의 책들을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특히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와 \'지옥생활에서 천국생활로\'는 꼭 읽어보기 바란다. 찬양하는 삶에 대해 이보다 더 잘나와 있는 책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찬양이 어떤 것이고 찬양의 능력이 어떠한지, 찬양을 통한 영적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찬양인도자라면 마땅히 이러한 부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테리 로 목사님의 \'찬양과 경배의 능력\'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을 구할 수 없다면 테리 로 목사님의 \'믿음을 더하게 하는 찬양\'을 읽어보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찬양 사역을 해오신 테리 로 목사님만큼 현실감 있고 실제적인 얘기를 담은 책은 드물다.

끝으로 인도자들에게 주의할 점 몇 가지를 얘기하고 싶다. 선곡에 있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곡 위주의 선곡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물론 자신이 기뻐할 수 있는 곡이어야 자신이 찬양에 몰입할 수 있겠지만 자신보다는 회중을 생각하는 선곡이 되어야 한다. 나는 89년에 청년부 수련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면서 당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곡을 단 한번도 안 불렀다. 그 곡은 \'예수님의 사랑 알까요\' 였는데 그 곡을 한번도 안 불렀던 이유는 고음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보통때 같으면 가끔 그러한 곡을 불러도 별 무리가 되지 않지만 수련회 때는 모두들 목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더구나 몹시 피곤하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그 곡은 적당치 않은 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련회가 끝난 후, 강평회에서 찬양인도자가 너무 자기 좋아하는 곡 중심으로 인도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회중을 먼저 생각하는 선곡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선곡시에 여분의 곡도 조금 준비할 필요가 있다. 처음 찬양인도를 시작할 무렵 나는 성령의 인도에 무척 둔감해 앞에 서서야 조금씩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곡을 두배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익숙해진 지금은 기도하고 곡을 정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대로 인도하게 되어 여분의 곡은 거의 준비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준비한 것과 전혀 다른 곡들을 요구하실 때가 있는데, 그러한 대부분의 곡들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기에 따로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별 무리 없이, 아니 오히려 성령님이 인도하신 것이기에 더 은혜롭게 인도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령을 앞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령을 소멸하는 것도 잘 못이지만 성령을 앞서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 특히 찬양인도자는 이러한 잘못을 범하기가 매우 쉽다. 찬양을 열심히 하다보면 즐겁다 그 즐거움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악을 즐기며 마음대로 나가던가, 혹은... 이것이 더 위험한 경우인데, 분위기를 조작해보고 싶은 충동,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고 정결한 마음과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기를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찬양인도자는 말로 인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말보다는 삶이 인도의 힘이 된다. 그리고 예배 현장에서도 자신이 예배를 드리지 않고 회중만 생각하기 쉬운데 이점에 유의하여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 또 찬양예배는 찬양이 예배의 중심이기에 인도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간혹 인도자가 찬양을 위해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보는데 찬양은 은혜 받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초점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높이는 말, 가사를 불러주는 경우, 그리고 기도제목을 주기 위한 최소한의 말만을 해야 한다. 특히 기도를 할 경우 인도자가 너무 세세하게 이러 이러한 것을 기도합시다.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미 찬양을 통해서도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것은 사족이 될 뿐이다. 더구나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되면 그 말로 인해 찬양의 흐름이 끊어질 수도 있다. 찬양예배에 있어서는 기도시간 조차도 찬양의 연속인 것이다. 따라서 헌신을 촉구하는 기도도 최소한의 말만을 하는 것이 좋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도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찬양하는 도중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의 보잘것없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이러한 기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찬양이 있어야 하겠지만 아무리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고 해도 인도자의 인도대로 따라야만 한다고 느껴지는 분위기라면 자연스러운 기도가 되기는 힘들다. 이러한 점에서도 인도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인도자는 앞에서 찬양을 이끌어 나갈 뿐 그 순간 기도하든 찬양하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야한다. 따라서 인도자는 찬양예배의 선곡을 비롯한 전반적인 것을 매우 세밀히 계획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일단 예배가 시작되면 최소한의 역할만을 해야한다. 그것이 성령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는 비결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인도자뿐만 아니라 온갖 악기의 반주자와 싱어들도 모두 예배위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보수적인 교회의 경우 그렇게 인정해주지 않을 지라도 분명히 예배위원이다. 보다 겸손한 자세로 연주해야한다. 그리고 그 모든 찬양인도팀이 연주할 때마다 기도로 시작함을 잊지 말아야한다. 이것은 연습대도 마찬가지이고 예배 때는 앞에 서기전에 합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평소의 삶에 있어서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서로 서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편33편1절


























찬양팀 구성과 운영 원리
(예수전도단 예배와 찬양 학교 2학기 7주차 강의)

박 정관 (현 충신 교회 목사, 다드림선교단장)


1. 팀 구성 지침
크게 나누어 찬양인도팀과 연주팀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주최측에서 요구하는 어떤 조건을 내걸고 공모하는 방법과 기존 구성원을 보충하는 모집, 그리고 자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있다. 또 한가지는 팀과 대상자와의 교제를 거치면서 영입되는 방법이다.

그런데 찬양인도팀이건 연주팀이건간에 어떤 \'기능\'으로 그 사역을 하려고 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단지 기능인으로서만 다루고 대한다면 분명 실패하고 만다. 우리는 노래(연주)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좋은 화음을 들려주고 좋은 테크닉을 보여줘서 그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찬양인도팀이나 연주 팀이나 모두 \'예배자\'이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예배자보다는 다른 것을 희생해서라도 기능인을 우선해서 영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럴 때는 그만한 대가가 치러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그 팀으로서 자질을 갖추기 위한 우선 순위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성령님께서 인도하심으로 팀에 영입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전에 충분한 훈련들도 필요한 것이다. 최근 어떤 팀에서 모집하는 방법들을 보았는데 오디션을 통해 우선 그 사람의 신앙 경력과 음성적인 자질을 확인하고 팀이 하나됨을 위한 단기간, 장기간으로 훈련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이 깨뜨려지는 작업과 함께 \'거듭남\'에 대한 확인이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꼭 필요한 것이라 본다. 우리가 왜 이 사역을 해야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의 중요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사역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기나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사람\'이다. 하나님 안에서 예배하며 다듬어진 훈련된 그러한 것들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단순한 기능적인 요소로 악기나 기재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모든 것에 임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은 \'왜 내가 내 자신을 쳐서 주께 복종시키느냐 하면이 모든 것을 다한 다음에 내가 버림받지 않게 되기 위해서다\'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먼저 찬양인도자들이 예배를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 안에 열매를 맺는다. 어떤 팀은 가는 곳곳마다 안에서 열매가 맺히지 못하고, 예배하지 않으므로 버림받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결과가 지금에도 일어나고 있다. 인도자의 위치란 참으로 두려운 자리이다. 연주팀의 경우 보통 교회사역이나 초청을 받게 되는데 만일 그곳에 서서 예배하지 않으면 자기가 예배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또 어떤 때에는자신의 순서만 끝나면 바로 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이것도 위험한 것이다. 그러한 가람은 단지 일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찬양인도자로 섰기 때문에 앉아 있는 사람과 다른 차원에서 한다고 생각해선 절대 안될 것이다.

결국 예배는 \'관계\' 문제이다. 또한 \'관점\'과 \'가치\'문제이다. 우리가 누구를 예배하는가, 왜 우리가 예배하는가, 또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왜 예배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예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顁문에 그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고, \'가치\'라고 한다면 그 분에게 드려야 할 예배의 어떤 가치, 그 분이 우리와의 사귐이다. 그와 같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런 모습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도록 서로간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제를 통해서 사람들을 영입하는 중요성이 바로 여기 있다.


2. 인원구성적인 면
항상 우리는 현재 갖추어진 외형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그 모임이 이루기까지의 헌신한 소수의 기도와 그 배경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먼저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우리 모임의 중요성으로 보아 지금 현재 갖출 수 있는 여건은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머릿속으로 그려 놓고 시작하지 말고, 일단 내 주위를 둘러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안에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서둘러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고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면, 주님이 훈련시키시고 준비시켜 놓으신 사람이 소수라할지라도 그 몇 명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임이 점차 성장하면 역할 분담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찬양인도자와 예배인도자가 구분될 수 있고, 음악적인 파트 담당자도 따로 세워질 수도 있다. 물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도 있겠지만 나누어 분담할 수 있겠다.

그리고 찬양모임에서 가장 비중을 두고 있는 시간들을 살펴보자.

여러시간들 중에 우리가 빠뜨리기 쉬운 부분들은 \'말씀양육\'이다. 골3:16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것이 바로 \'말씀\'이다. 엡 5:18.19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말씀에서 우리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하며, 그렇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고 말씀위에 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온전한 찬양사역자가 되려면 더욱 그래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으로 양육받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열매 맺을 일에 대한 조건들을 위해 주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열매 맺을 일에 대한 조건들을 위해 기울여야할 시간과 드려야할 노력들은 생각지 않고 일로써 사역, 즉 가시적으로 활동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일로서 사역, 즉 가시적으로 활동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다 보면 우리안에 맺혀야할 열매가 못 맺히고, 또 그 사역이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시간이 말해준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시간을 요구하고 우리의 믿음의 삶도 시간이 필요하다. 절대로 성급하게 우리의 계획과 생각으로 어떤 사역을 일으키고 진행시키려 하지 말라. 그리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조그만 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그것위에 기름부으셔서 유기적으로 성숙하여서 열매맺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 뻥튀기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3. 사역의 방해가 되는 것들
전문적인 기술이나 음악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스스로가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관심이 그 테크닉에 있다면 분위기를 예배하고 감정을 예배하고 어떤 화음을 만드는 것을 예배하는데 매이기 쉽기 때문이다. 음악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도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너무 많은 기기설치는 절제하고 최소한 필요한 것만 갖추고 가능한 한시간 이상 먼저 하나님 앞에 팀과 집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먼저 찾으라. 찬양인도자라면 평소에 약속한 코드들을 평소 개인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운영을 위한 연습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거리낌이 없이 온전히 나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이 설정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팀들이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지고 성장할 때 그 팀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많은 무릎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헌금을 위한 기도요청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기도부탁인 것이다.


4. 찬양 인도자들간의 불화
기기 설치에서의 조그마한 불평들이 그 팀안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자, 자주 빠지는 자들에 대한 문제들이 괴롭히기도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역자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교제\'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이해가 아니라 지체로서 하나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고슴도치는 서로간의 가시의 찔림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이기기 위해 계속 하나를 이루려는 노력들을 거듭한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걸러지지 않은 가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서로를 찌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찔림을 통한 연합으로 하나됨의 훈련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찔림을 당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다가갈 때 찔릴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하나님 앞에서 치유가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상황에 따른 융통성으로 용납하고 포용하는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어서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5. 스타일
예수님과 사마리아인과의 대화에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는 전제를 말씀하신다. 문제가 예루살렘이냐, 사마리아냐가아니다. 비본질이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사실 논쟁의 쟁점은 \'여호와를 예배하였느냐\', \'우상을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누구를 예배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관점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하는 대상이 \'아버지\'라면 우리는 어떤 스타일로도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6. 모임의 구체적인 Vision
그 사역이 계속되려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이 Vision에 대해 묻고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이유와 우리의 쓰임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먼저 확인하라. 예배모임은 왜 있어야 하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고 이 예배의 목표는 무엇인가,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만 목표는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아무일도 우리 안에 일어나지 않는다하여도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 한 번도 안하고 침묵하고 그냥 기다리기만 한다 하더라도 주께선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받으셨다는 사실 한가지만이라도 믿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그 예배는 성공한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예배와 찬양학교를 마쳤다고 저절로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연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찬양의 생활


오대원(David E. Ross)
(한국 예수전도단 설립자, 현 미국 안디옥 커넥션 대표)


시 22: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 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 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 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22:1-5 말씀을 통해 찬양생활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대도시에 있을수록 찬양생활이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도시는 사단의 공격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뉴욕에서 한국 대학생들의 찬양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미국의 전지역에서 찬양의 물결이 일어나기 위해서 한국이 담당할 일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이유는 대도시에서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선교전략이 대도시 중심이었듯이 선교전략으로 대도시가 매우 중요하다. 선교의 목표는 찬양과 경배이다. 우리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고 어린양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 먼저 한 것은 미리암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찬양이 넘치게 된다.

역대하5장에서 보듯이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였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임하여 하나님께 찬양했다. 즉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찬송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예수님게서 탄생하셨을 때도 천사들이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라고 찬양하였다. 성령께서 임하신 오순절날에도 모인 무리가 하나님께 찬양하였고, 계시록에서는 마지막날에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모여 찬송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속에서 찬송을 적용하고 교회 생활에서 찬양하는 것을 나누기 원한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17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능하신 자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춤추고 노래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기를, 찬송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놀랍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찬송, 찬양하는 것이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이사야43:21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시편148편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 노인, 청년, 아이 모두가 다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신다. 시편 150:6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두가지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 살면서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시편 22:3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나이다\"의 히브리적 뜻이 2가지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란 찬송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며 주님이 성전인 우리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안에 계시며 찬송 속에서 역사하시는데 상한 자를 치유하시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가서 살게 하신다. 우리가 찬송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의 보좌앞에 들어가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찬송이다. 예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심이 우리의 찬송이며 또한 찬송의 내용이다.

둘째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나이다.

이 말씀은 주님이 찬송 속에 오셔서 왕위에 올라가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찬송할 때는 주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주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어 나를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며 나를 통치하시는 오직 한 분이신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찬양할 때는 나의 상황속에 주님이 들어오셔서 나의 상황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고백하는데 이러한 고백은 매우 강력한 고백이다. 나는 무기력하나 주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하는 것은 하남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특히 노래할 때는 가장 높은 차원의 신뢰이다.


시편 22:3-4 말씀에서 우리의 열조가 \"주님만 의지합니다.\"라고 한 것이 믿음이요 신뢰이다. 찬양은 믿음의 바탕이 된다. 믿음이 부족할 때 찬송속에 들어가면 그 믿음이 더 큰 믿음이 된다. 믿음은 순종과 신뢰이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송하면서 \"주님은 나의 왕이 되십니다. 주님만 의지합니다.\" 하는 것은 믿음의 큰 출발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영적인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시22:1의 말씀과 같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시 68: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 놀지어다

시편68:4 말씀에서 광야생활 즉 영적인 광야에 들어갈 때는 하나님께서 타고 오실 수 있는 큰 대로를 수축하라고 하셨는데 그 대로가 바로 찬송이다. 하나님께서 찬송의 대로를 타고 우리의 광야 속에 오셔서 역사하신다. 새롭게 하시며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찬송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찬송이 생활되어야 한다. 찬양 중에 살면서 어떤 일을 당할 때에라도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과 더욱 더 깊고 가까우며 친밀한 관계가 된다.


모든 노래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이다. 찬양, 경배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근본적인 원칙이다.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것이다. 각 사람안에 있는 감사와 찬양,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목적이며 방법은 없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하나님께 노래하기를 원하시며 또한 듣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시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1 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 또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듣기를 즐거워 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찬송 속에 거하신다. \"온 세상은 나의 것이요 온 세상은 또한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나의 것이라\" 말씀하시며 찬송 속에서 힘을 얻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이 역사를 행하시기 전이나 또는 후에는 찬양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성가대는 모든 교인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것이다. 성가대가 찬양할 때 모든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며 그분을 사모하는 것이다. 성가대만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이 찬송하는 것이다. 주님께만 찬송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찬양팀이 있는 것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같이 찬양하도록 돕는 것이다. 찬양할 때 춤을 추며 기뻐하며 기뻐외치며 주님의 보좌로 나아가면서 주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또한 아무 소리없이 잠잠히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앞에 서 있는 것도 아름다운 예배이다. 찬양이 있을 때 말씀이 나오며 그 말씀은 생명에 이르는 말씀이 된다. 말씀이 나올 때 또한 찬송이 있다. 찬양과 말씀이 같이 있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주님께 찬양을 드린 후에는 기다리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다린다. 찬양을 인도할 때 중요한 것은 성령께 민감한 마음인데 성령님께서 직접 인도하실 때 이 때 성령께 대한 민감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찬양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 찬양인도자의 목적이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역사하시며 친히 나타내시고 변화시킨다.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사람의 생활 중심이 되어 주신다. 내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홀로 나의 주인이 되실 때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시어 또한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된다. 내 자신이 낮추어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신다. 이것이 찬양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 온전함을 입어서 주님을 닮아가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찬양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는데 몸도 치유하시고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 속사람의 마음속도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신다.

찬양은 다른 사람을 높이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 속에 살 때 주님의 능력의 역사, 치유의 역사,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 우리로 하여금 변화된 생활을 살게 된다. 그리고 찬양생활을 할 때 사단의 능력이 제거된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시 81:14 그리하면 내가 속히 저희원수를 제어하며 내 손을 돌려 저희 대적을 치리니


시편 81:14에서는 찬송하면 모든 원수의 능력이 제거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전도할 때도 찬양하면서 전도해야 한다. 찬양할 때 영적전쟁이 이미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찬송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사단의 능력을 모두 제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양을 방해하는 2가지의 요소가 있다.

첫째는 물질주의이다.

둘째는 이기주의적인 생활이다. 이러한 것을 제거시키고 주님께 찬송하면서 아버지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성령안에서 찬송이 나오기 때문이다. 날마다 성령충만을 받아 찬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8-39에서 성령께서 임하셔야 찬송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는 예수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를 사랑하고 처음 사랑이 회복되어 모든 죄를 회개하는 마음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우리속에 있는 모든 것을 깨뜨리고 우리의 마음에 통회하는 마음, 상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찬양이 나오고 주님께서는 이러한 찬양을 기대하고 계신다. 이것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이러한 찬양은 값비싼 것이며 지불해야할 대가가 큰 것이다. 오직 주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박국3장을 보면 고난 속에 있어도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날마다 환란가운데 있을 때 노래를 부르며 주님께 찬양하며 기도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