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5학기

CYBER SCHOOL OF THEOLOGY

신대원 5학기

제목조상제사 어떻게 볼것인가? 2022-07-13 16:56
작성자 Level 10

조상제사 어떻게 볼것인가?

이정순


조상제사에 대한 신학적.목회적 이해

―한국교회의 예전적 영성을 위하여


이정순

(First Congregational Church of Waverley-Senuri 목사)



I. 들어가는 말


해마다 민족 고유의 명절이 돌아오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저마다 남모르는 고민을 한다. 그것은 종교를 초월해서 거의 모든 가정에서 행해지는 제사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 참여한다면 제사상 앞에 절을 할 것인가, 아니며 고개만 숙일 것인가 하는 따위의 고민이다. 교회마다 이른바 추도예문을 배포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제사를 대체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먼 느낌이다. 아직도 거의 모든 개신교회들은 조상제사는 이교도적인 예식이요, 우상에게 절하는 우상숭배이므로 당연히 금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실정이다. 선교 10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제사 문제는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이자, 교회 내에서는 우상숭배로 언급조차 꺼리는 금기사항으로 되어버렸다. 교회 내에서는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런 제사거부가 정당화되고, 고무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여전히 이방인처럼 머뭇거리며 조상에 대한 불효자들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상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적대감은 일찍이 선교사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교의 가장 중요한 의식인 조상제사가 선교사들의 눈에 용납할 수 없는 이교의식이자 우상숭배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조 말 부패한 왕조문화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유교에 대한 거부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때문에 선교 초기부터 제사를 중심으로 한 유교전통과 서양에서 들어온 보수적인 그리스도교는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잘못된 만남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한 선교보고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자들에게 최대의 장애물은 한국 유교전통의 제사의식이었다. 아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를 배반하고, 자신의 의무인 죽은 사람에 대한 효(filial reverence)를 그만두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구조 전체가 유교적 형태로 짜여있는 나라에서 이 보다 더 큰 죄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욕을 먹고 돌을 맞는다. 그리고 종종 가문에서 상속권을 박탈당했다. 법을 어긴 이방인의 부류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 . . . 여성들 역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매를 맞고, 때때로 살해되곤 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충성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1)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에 대한 거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얼마나 유교에 배타적이었는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즉시 유교의 모든 의식들을 거부해야 되고, 이것은 당연히 유교의 최고 규범인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춰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당시 보수적인 서구 선교사들의 한국문화전통과 종교 전통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1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제사에 대한 거부는 변함없이 계속되고있다. 과연 제사가 무엇이길래 아직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넘지 못할 산으로 남아 있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민족 고유의 명절 때만 되면 갈등을 겪고 가족들과의 불화를 겪어야 하는가?

비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자라 교회에서 보수적인 신앙을 배웠던 필자는 오랫동안 이 제사문제를 안고 살아왔다.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도 역시 이 문제를 고민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아왔다. 때문에 제사문제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한낱 낡아빠진 문제가 아니라, 깊이 있게 신학적으로 논의하여 정리해야할 문제라고 본다. 이것은 목회적 차원과 선교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한국 전통문화에 바르게 뿌리 내린 한국적 그리스도교를 건설할 때만 바른 목회와 바른 선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알게 모르게 전통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이 제사문제만은 유독 우상숭배로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리스도교 장례문화만 보더라도 그 틀은 여전히 유교식을 따르고 있는데도 말이다.2)

과연 제사란 무엇인가? 제사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런 물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물론 이 글에서는 유교적인 전통에서 비롯되어 현재 명절 때마다 행해지고 있는 조상제사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또한 단순히 제사의 문제만을 언급하지 않고, 그것을 그리스도교의 예배의식과 견주려고 한다. 참다운 평가나 만남은 창조적, 비판적 수용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제사의식이야말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예전적 영성(liturgical spirituality)을 형성하는 데 좋은 통찰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II. 조상제사에 대한 일반적 이해



조상제사는 오래된 풍습이다. 학자들은 고조선시대까지 그 기원을 잡는다. 많은 요소들이 한국의 제사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시대의 하늘 신 숭배의식, 샤머니즘(무속), 도교, 불교, 유교 등이 오늘날 한국인의 각 가정에서 행해지고 있는 제사 문화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하늘 신 숭배사상과 샤머니즘의 영향은 특히 중요하다. 첫째로, 고조선 시대에는 동맹, 영고, 무천, 서도 등과 같은 의식이 행해졌다. 이런 의식들 속에서 고대 한국인들은 매년 하늘 신에게 제사를 드린 후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를 치루곤 했다. 이런 의식들은 한국인들의 종교 영성을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3) 둘째로, 샤머니즘은 한국의 모든 종교에 가장 많이 영향을 요소이다. “샤머니즘은 그 신축성과 수용성으로 인해 , 불교, 도교, 유교, 그리스도교 등의 주요 종교 전통들 속에 성공적으로 통합되었다.”4)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샤머니즘은 개인과 사회의 무질서로 인해 야기된 갈등을 임시적으로나마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직도 제사 의식에서 나타난다. 즉 조상을 잘 모심으로 내가 잘되고 후손이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엄격히 볼 때, 제사가 체계화된 것은 고려시대에 와서다. 역사적으로 고려시대 성종 때 오인유가 종묘와 사직을 모심으로써 왕실에서 제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안향, 정몽주, 길재 등의 유학자들이 중국의 주자학을 수입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섰고, 이런 와중에 『주자가례』가 고려에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유학자 정몽주는 이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죽은 부모를 위해 삼년상을 지내고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 각 집에 사당을 짓는 것을 주요 풍습으로 확립시켰다.5) 이후부터 유교식 조상제사는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국가의례이자 민족적인 풍습으로 자리잡아 내려오게 되었다. 특히 조선왕조가 유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함으로써 제사는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고려시대에 들어온 이런 유교식 조상제사는 중국 고대 주왕조 시대까지 그 기원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고대 주왕조 사람들은 인간은 기(氣)와 형(形)이 합하여 생명으로 탄생하며, 기는 하늘의 신령한 기운의 정수로서 혼기(魂氣)라 부르고, 형은 땅의 신령한 기운의 정수로서 형백(形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인간의 생명은 혼기와 형백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고, 죽으면 혼기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죽으면 혼백이 떠나간다고 믿는 것이다. 6) 물론 이런 인간관은 후대 신유교에 들어와서는 더욱 복잡해진다. 태어난다는 것은 기운이 모이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기운이 흩어지는 것이라는 사생관이 확립되어, 사람이 죽으며 혼이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혼)이 죽은 후에 영원히 남는 것인지, 죽음과 더불어 진짜 완전히 소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단지 조상의 혼(영혼)은 일정 기간(보통 4대) 동안 사라지지 않으므로, 제사 때 향을 피워 공중에 떠다니는 혼이 내려오고 술을 땅에 뿌려 땅 속의 백이 올라와 혼백이 함께 제사 상에 임해 후손들과의 감응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7)

다시 말해, 조상제사는 바로 살아있는 후손이 조상들의 혼백과 특별한 의식을 통하여 만나는 조상의 은혜를 생각하고 갚는 의식이며, 후손들은 이 의식을 통하여 조상들과의 역사적인 연속성을 느낀다. 죽어서도 조상의 혼백은 후손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제사는 이런 독특한 인간이해에 기초하여 조상에 대한 효를 표현하는 의식인 것이다. 물론 조상제사를 이런 도덕주의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깊은 종교적인 예식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경재는 이렇게 설명한다.




“유교를 종교로서 지탱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종교의례인 조상제사란 바로 혈과 육을 떠나간 조상들의 혼백을 종교적 의식절차를 통해, 신성하게 성별된 속의 시공간 자리에 임재하게 하여, 일상성의 시간 속에서는 단절되고 불통된 조상들의 혼백들과 살아 있는 후손들과의 신비한 영적 교통을 경험하자는 종교의례라고 볼 수 있다. . . . . 죽은 자들의 영혼, 즉 혼백이 어떤 형태로든지 불멸한다는 믿음과, 속의 시간이 아닌 성스러운 종교적 시간 안에서 그 혼령들은 살아 있는 생명들과 영적 감응과 교통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없이는 제사가 성립되지 않는다.8)




이 점은 유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과도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제사가 유교의 가장 중요한 의식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을 하나의 종교적인 예식으로 간주하는가, 아니면 단순히 도덕적인 효의 표현으로 보는가의 문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에서도 큰 영향을 끼친다.




III. 효의 표현으로서의 제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사를 이해하는 시각은 다양하다. 먼저 제사를 종교적인 예식으로 간주하여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후손이 교통하는 신비한 의식으로 간주한다면, 그리스도교 쪽에서는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또 현재 한국사회 전반에서 명절 때마다, 또 죽은 자들의 기일 때마다 드려지는 제사가 과연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매우 불확실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유교도라고 자처하는 인구가 매우 적다.9)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많은 이들이 공식적인 유교의 테두리를 떠나서 민족적인 고유풍습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원래 정통 유교식 제사와 현재 한국 사회 가정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제사는 다분히 조상에 대한 효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제사를 이렇게 이해할 때 그리스도교와의 적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효는 무엇인가? 일찍이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근본을 세우고자 힘쓸 것이니,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길 것이다. 효와 형제애는 인간됨의 뿌리이다”(『논어』제2장). 인간이 인간되는 데 가장 중요한 근본이 효라는 것이다. 이 효가 바로 조상제사로 표현되는 것이다. 옥스퍼드종교사전에서는 효를 이렇게 정의한다.“동아시아인의 사회윤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어온 덕목인 효는 공자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상을 숭배하는 고대의식의 영향을 받았다.”10) 효란 한마디로 삶의 기원에 대해 감사하고, 부모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도덕적 행동은 살아있는 부모뿐 아니라 죽은 부모에까지 표현된다. 이것은 현재 개인의 실존은 과거 죽은 조상과 더 나아가 생명의 기원과의 연관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유교식 인간관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효는 바로 제사와 같은 의식을 통해서 죽은 조상들에게까지 계속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학자 노영찬은 이렇게 말한다.



“유교적 도덕 체계의 핵심인 효는 부모가 살아있을 때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죽은 후에도 표현된다. 따라서 조상제사는 죽은 조상에게 효를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의식이 되어왔다. 유교도들에게, 삶과 죽음은 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효란 인간의 도덕적 수양(함양)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이기 때문이다.”11)




이처럼, 유교전통은 인간존재를 분리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과거와 현재 속에 존재하는 인간 공동체의 써클로 본다. 과거의 조상이 없이, 인간은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조상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기억이 제사의식으로 형태화된 것이다. 이 것은 또한 유교식 삶의 방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요 유교경전 중 하나인 『중용』에서는 제사를 효의 극치로 규정한다.

“효성이 지극한 사람은 조상의 뜻을 잘 잇고 조상의 일을 잘 이어나가는 자를 말한다. . . . 자기 조상의 자리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음악을 연주하고, 조상이 높이시던 것을 공경하며, 조상이 아끼시던 자들을 사랑하며, 돌아가신 자들을 마치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있는 자들처럼 공양하는 일, 이것이 바로 효의 지극한 것이다”(중용 19장). 따라서 조상제사는 일반 종교에서와 같이 인간의 구원이나 복을 추구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인간의 기원과 그 조상에 대해 감사와 효를 표현하는 것이 그 주목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상제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죽은 조상들에 대한 효의 상징적인 표현들인 것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부모들에게 드리는 효의 표현과 동일하다.12) 이런 의미의 제사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학자 강위조는 제사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제사는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서 강력한 제도가 되어 버렸다. 제사는 한국인들이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소속감을 함양하는 거룩한 상징이었다. 제사와 가정이 없이 한국인들은 실존의 의미감을 잃어버린다. 제사의식을 거행함으로 한국인들은 효와 충의 가치를 보존하게 되었고, 결국 가정을 강화하고 한국사회의 구조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13)




IV. 제사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이해



1. 제사에 대한 성서적 이해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출애굽기의 십계명(출애 20:3-4)에 근거하여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거부한다. 이들은 성서적 신개념의 배타성과 유일성을 강조한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제사를 수용하는데 가장 장애물이다. 때문에 출애굽기 십계명 제 1계명과 2계명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의 사회학적 성서해석이 많은 도움을 준다.

먼저 유대-그리스도교적 전통과 유교 전통에서 너무도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유교 전통에서는 유대-그리스도교적 유일신 사상이 발전된 적이 없다. 유대-그리스도교적 신(야훼, 테오스)을 유교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런 신과 반대되는 우상도 찾을 수 없다. 문제가 되는 십계명의 정신은 출애굽기 20장 2절의 십계명 전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느님이다.” 여기서 주(야훼) 하느님은 에집트에서 억압당하던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킨 위대한 해방자로 나타난다. 이런 컨텍스트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 것과,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들과 우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당시 고대 근동 국가들에서 억압의 신, 왕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던 신들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들은 거짓 신들이며, 우상들이다. 바로 이런 거짓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간을 억압하던 이런 거짓 신들과 끊임없이 싸웠다.14) 때문에 히브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세운 국가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었고, 그 뜻은 “야훼여 통치하소서”였다. 바로 이런 모노 야휘즘은 성서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전통으로 작용하고 있다.15) 출애굽기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런 맥락과는 달리 유교전통에서는 이런 독특한 신 개념이 없다. 비록 천(天), 상제(上帝), 태극(太極), 이(理)와 같은 절개적 초월적 개념이 등장하지만, 히브리들을 해방시키는 해방자 신은 유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유대-그리스도교적 전통의 신을 유교적인 전통의 신과 직접 비교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컨텍스트와 무관하게 한 구절만을 뽑아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진리를 왜곡하는 매우 위험한 짓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상에 대한 효가 깊고 진실되게 표현되는 곳이 바로 유교식 제사이다. 성서에도 효에 대한 강조는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아이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잘 듣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잠언1:8-9).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에베소서 6:1). 또한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공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하느님을 조상의 하느님으로 부르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미 야훼 하느님이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출 3:6). 이렇게 볼 때 효란 개념 역시 성서 전통에서도 무시되지 않고 있으며, 조상을 떠나서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를 효의 표현이라고 볼 때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2. 조상제사와 성도들의 교통(교제)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 보면 ‘성도들의 교통’(communion of saints, communio santorum)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이 구절은 원래 초대 교회에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이미 죽은 성도들과의 교제를 의미했다. 곧 제사처럼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교통함을 의미했다. 신학자 데이(Gardiner M. Day)는 이렇게 설명한다. “분명 이 조항(성도들의 교제)은 이전 항목, 곧 거룩한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 항목이 확대된 것이다. 곧 가시적 불가시적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 하나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 곧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교제를 의미한다.”16) 이 성도들의 교제는 초대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성도들의 교제는 하느님의 사랑이 구현되는 장소들 중의 하나였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약속은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이 성도들의 교제를 분열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믿게 했다.”17) 바로 이런 본래적인 의미가 종교개혁이후에 바뀌게 되었다. 곧 성도들의 교제는 기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 역사상 죽은 자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한 많은 예들이 있다. 3세기에 그리스도교 교회는 죽은 자들의 무덤 앞에서 성만찬을 행하곤 했다. 이것은 산자와 죽은자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떼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예식은 또한 순교자들을 위해서도 행해졌다. 드리스콜(Michael S. Driscoll)은 이렇게 말한다. “성만찬과 순교자 사이에 관계가 이루어졌다. 곧 피를 흘리기로 부름받은 자들울 위해 성만찬을 거행하거나, 아니면 성만찬에서 이미 순교를 당한 자들을 기억하곤 했다.”18) 게다가, 주일날 거행하는 성만찬에서도 죽은 성도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예전은 성인숭배(cult of saints)와 연관되어 광범위하게 발전되었다. “처음에 이것은 죽은 성도들을 찬양하고 모방하는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매장지 앞에서 축하와 기도의 모임을 포함하게 되었다. . . .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고대 세계에서 무덤은 인간과 신이 접촉하는 장소였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집을 나타냈다. . . . . 한 가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을 성인(성도)들이 들어가는 특권적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영웅과 마찬가지로, 성인들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매개자로서 기능하는 중재자로서 간주되었다.”19)

그리스도교 역사상 성인숭배와 그들이 행하는 중재역할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성인들의 중보를 부정했으며, 성인숭배를 교외에서 금지시켰다. 왜냐하면 성인들에 얽힌 온갖 종류의 전설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부패한 카톨릭을 향한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당시 상황에서 타당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삶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중요한 상징들과 예전들을 모두 없애버리는 역할도 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전은 가장 빈약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때문에 현재 많은 교회들이 사라진 전통과 상징의 복원과 비판적 수용에 관심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특히 성도들의 교제라는 사라진 전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전통을 통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좀더 긍정적으로 죽은 자들을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유교의 제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도들의 교제라는 전통은 믿음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성도들을 존경(veneration)20)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고, 현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 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도들의 교제’는 유교식 제사와 만나는 접촉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자 정진홍은 빈약한 개신교 예전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개신교 의례는 죽어 있는-산-사람의, 그리고 살아 있는-죽은-사람의 공동체를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그 세속화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살아 있는 이의 공동체가 죽은 이의 공동체와 어우러져 있지 못하면 그것은 참다운 인간의 공동체가 아니다. 조상숭배라든가 조상의 신격화라고 하는 뜻에서 장례와 제례가 설명되는 것은 신학의 편견이 빚어낸 불행한 독단이다. 장례와 제례는 공동체, 곧 인간의 삶의 표상을 다시 읽어 나가는 맥락에서 되살펴져야 할 중요한 관건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은 사람이 함께 하지 못하는 산 사람의 공동체는 생명의 존엄 자체마저도 상실한다. 신위를 모시고 제수를 진설하고, 청신하여 헌주하고 절하며 아뢰는 모든 재차는 우상숭배도, 신에의 배신도, 주술적인 기복도 아니다. 그 모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죽어-살아 있어-아직도 우리와 더불어 사는 분과의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이다.”21)




정진홍의 지적에 대한 답은 한국 개신교회가 조상제사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의 독특한 토양에 그리스도교 예전을 토착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아직도 한국문화는 유교적 제사의식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사회이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우상숭배로 몰아부쳐도 쉽게 사라질 수 없는 민족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언제까지 제사를 배척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측면, 곧 산자와 죽은자를 포함하는 아름다운 인간공동체를 구현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성도들의 교제’라는 전통은 양자의 만남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가 된다. 신학자 데이는 이렇게 지적한다. “성도들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과 사랑을 함께 나누게 되는 공동체, 과거, 현재, 미래에 속한 성도들의 불가시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에큐메니칼 공동체를 의미한다.”22) 1980년대 들어와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그리스도교의 사라진 전통들을 복원하여 발간한『세례, 성만찬, 목회』는 필자의 이런 주장을 잘 뒷받침해 준다. “주님과 연합하고, 모든 성도와 순교자들과 교통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날인된 언약으로 새로와진다.”23)

더 나아가 조상 제사는 성도들의 날처럼 중요한 의식으로 정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은 자들의 기일을 기념했다. 특히 순교자들의 기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순교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이루었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전통이 “성도(인)들의 날”(All Saints Day)로 자리잡게 되었고, 오늘날 서양의 많은 교회들에서는 개신교든 카톨릭이든 정교회든 이 성인의 날을 교회명절로 지킨다(미국의 경우 11월 1일이며, 교회에서는 11월 첫째 주 일요일에 지킨다). 이것은 너무도 성서적이고 당연하다. 잘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근본주의적 배타성을 자랑하는 한국교회에서도 이 전통을 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성서만을 신앙의 태도에서 벗어나 죽은 성도들로 이루어진 과거의 신앙 전통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죽은 성도들을 생각하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교 이전의 수많은 조상들도 자신의 과거요 뿌리로 생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3. 제사와 성만찬

제사는 효를 표현함으로써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제사를 죽은 자들을 신처럼 예배하는 의식이 아니라, 한 가족과 사회를 봉사하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규범으로 생각한다면, 제사는 그리스도교의 성만찬과 공통점을 가질 수 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만남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아가 평화와 화해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촉구하기 때문이다.

비록 개신교 전통에서는 대폭 축소되었지만, 성만찬은 그리스도교 예전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핵심을 차지했다. 성만찬의 기원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어 초대교회에서 발전된 것으로 본다(고린도전서 11:23-25 참조). “성만찬은 거룩한 음식으로서 가시적인 상징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거룩한 음식이다. . . .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은 교회 예전의 중심행위로서 계속된다.”24) 이렇게 성만찬은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중심적인 예전으로 행해졌다. 물론 그 의미는 다양하다. 『세례, 성만찬, 목회』 문서는 성만찬의 다섯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감사, 그리스도를 기억함, 성령의 임재를 기원함, 성도간의 사귐, 하느님 나라의 음식”25) 필자는 여기에서 성만찬의 네 번 째 요소인 성도간의 사귐(fellowship of the faithful)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은 성만찬의 사회적 의미로서, 성만찬을 나눔의 잔치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점은 제사와 공통점을 이룬다. 조상을 기리며 차린 음식을 제사 후 다 같이 나누기 때문이다. 집안 제사가 발달하기 전에는 마을 단위로 드리는 부락제에서도 이런 나눔의 잔치는 어김없이 열렸다. 바로 제사와 성만찬은 나누면서 함께 어우러지는 잔치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세례, 성만찬, 목회』문서는 성만찬이 갖는 나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만찬의 거행은 하느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간주된 자들 사이에서 화해와 나눔의 실천을 요구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 속에서 적절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계속 도전을 준다. . . . . 그리스도의 몸의 성례적 교통 속에 연대하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세계에 대해 책임을 다해 돌보아야 한다는 것 등이 예전에서 발견된다: 서로의 죄에 대한 용서, 평화의 표징, 모든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눔, 병자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을 위해 떡을 떼거나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기념하는 것 등.”26)




성만찬의 의미를 나눔의 정신으로 보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위의 문서도 예수의 운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가 군중 밖 죄인들에게로 나가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을 거행하면서 소외된 자들과 연대하고, 이런 모든 자들을 위해 삶을 바치고 희생했고 이제 성만찬에서 그 자신을 내 놓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징표가 되라고 부름을 받는다.” 27) 민중신학에서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한다.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철저히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과의 삶을 함께 나누는 운동이었고, 바로 이 운동을 계속 기리고 다짐하는 것이 성만찬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벌인 하느님 나라 운동, 곧 나눔과 섬김과 희생의 운동의 전통이 초대 교회에서 애찬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언제부터인가 성만찬 예전으로 축소 변형되어 행해졌고, 그나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거의 자취가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성만찬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기억하는 중요 의식으로 다시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만찬은 참된 인간 해방을 위한 동력을 상징하기까지 한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참된 인간의 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예수와 만난다. 아시아 신학자 발라수리아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만찬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총체적인 인간해방을 위해 예수가 자신을 바쳤다는 데 있다. 음식으로써 성만찬은 또한 이와 같은 대의에 참여하는 자들을 연합시키는 상징이었다.”28)

이렇게 성만찬을 나눔과 섬김과 희생과 인간해방의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제사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신학적으로도 제사 문제를 공동체적 나눔의 행사로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학자 박종천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서의 제사를 거부하고, 대신 효의 윤리적 표현으로 제사를 이해한다는 전제에서, 공동체 지향적인 그리스도교 윤리를 재형성하는 과제와 제사를 연관시킨다. 그리스도교 추도의식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를 형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추도예배가 있지만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 있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사는 여전히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포괄하는 공동체를 형성시켜, 살아 있는 자들의 나눔과 화해를 촉진시킨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 개신교회가 조상 제사를 중요한 의식으로서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안한다. 곧 한 상에 음식을 차리고, 함께 절을 하고, 음식을 나누는 것을 수용함으로써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29) 매우 타당한 제안이라고 생각된다.

신학자 송촨셍(宋泉盛) 역시 조상제사를 죽은 자들에 대한 예배가 아님을 지적하면서, 성만찬적 요소가 담긴 긍정적인 요소로 이해할 것을 촉구한다. 특히 그는 각종 종교 신앙과 행사가 가족 유대를 근간으로 삼아 이루어지고 있는 아시아에서는 조상제사가 성만찬의 가족적, 친교적 성격을 복원시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상제사에서 . . . . 죽은 이의 끊어지지 않는 현존이 가족의 유대를 보존하는 데는 물론 사후 생명에 대한 믿음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발견한다. 조상제사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주님의 식탁에 앉는 크리스챤들이 나누어 가질 만한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다. 빵과 포도주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어 받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현존을 체험한다. 그런데 이 체험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와 그리스도 안에 누리는 우리의 생명에만 생각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속하는 가족의 중심이심을, 이승을 떠나 다른 생명으로 건너간 이들과 장차 우리 뒤를 이을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가족의 중심이심을 체득하게 된다. 이러한 성사적 생명 체험의 한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우리는 우리 가족의 모든 성원들과 더불어 참다운 친교, 십자가와 부활의 기초 위에 세워진 친교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주님의 성찬은 참으로 가족 만찬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친교가 되어야 한다.”30)



V. 나가는 말―한국교회의 예전적 영성을 위하여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여러 종교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해 온 다종교 사회였다. 어느 종교도 외래 종교로서 순수한 형태를 간직하며 홀로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토양 속에서 온갖 종교들이 뿌리를 내렸다. 그리스도교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보수적인 형태의 그리스도교는 아직도 서구의 그리스도교를 표준으로 삼고 다른 종교의 영향을 거부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땅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순수한 종교는 없다. 모든 종교가 서로의 영향 속에서 자신을 형성해 나갈 뿐이다.

필자가 미국인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미국식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한국적 그리스도교와 다른지 절감하곤 한다. 보수적인 미국 선교사들에 시작된 한국 교회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은 현재의 미국교회와 너무도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미국 사회에는 조상제사 풍습이 없다. 또 절을 하면서 예를 표하는 의식도 없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당연히 제사는 논쟁거리가 될 수가 없다. 때문에 십계명에서 금지하는 우상에 대한 이해도 다르다. 팔레스타인 땅이나 한국과도 다른 또 다른 문제들이 우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 이곳에서는 교회 절기 중 하나로 성인들을 기리는 예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얼마든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도 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교리적인 이유보다는 주로 목회적인 배려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조상제사문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과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계속 제기되는 문제이다. 특히 유교식제사 풍습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의 문화적 전통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 제사 의식을 창조적이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수용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교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전통의식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예전이 더욱 풍부해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제사를 부모와 조상을 생각하고 드리는 효의 표현으로 볼 때 수용하는 데 문제가 없으리라고 본다. 우리는 조상의 근원을 바로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바로 그 조상의 하느님이 그리스도교적 전통으로 보다 분명히 나타난 보편적인 하느님인 것이다.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기도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제사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시키는 포괄적인 인간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리스도교의 사라진 전통인 ‘성도들의 교통’을 복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죽은 성도(성인)들에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과거의 연옥설과 같은 교리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단지 살아 있는 자들이 드리는 효의 표현이요, 염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기억함은 살아 있는 자들의 실존을 확인케하고 타인들과의 나눔을 통한 공동체를 형성케 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죽은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죽음의 의미를 생각게 하는 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성만찬이 갖는 나눔의 의미를 생각할 때 제사를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만 일년에 몇 번씩만 드리는 성만찬에서 끝나지 않고, 조상들을 기리는 제사 때마다 이런 나눔의 의미를 계속 되새기게 됨으로써, 제사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제사는 그리스도교의 예전적 영성(liturgical spirituality)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자 강위조의 제안대로, 제사는 신앙과 삶이 분리되고, 교회와 가정이 분리된 채 오직 교회에만 초점을 두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영성을 갱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제사가 집안에서 드리는 성만찬(Eucharist at home)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 성만찬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가정울 강화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공동 예배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 가정 성만찬은 풍요로운 가정생활을 통해 새로워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부름이다.”31)

여기서 필자가 예전적 영성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개신교식의 빈약한 예전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개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지나치게 신비화되고 마술화되어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앙에서 거리가 멀어진 예전과 상징들을 없애버리고 오직 말씀 위주의 단순한 예배로 축소시켜 버린 것이 당시의 상황에서는 타당했다. 하지만 이제 시대와 상황이 다른 현대 사회에 사는 인간들은 일방적인 말씀 선포가 주를 이루는 예배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청각적인 요소 외에도 시각적인 요소, 상징적인 요소가 가미된 예전에 더 잘 반응하며 신비를 체험한다. 이 점이 바로 말씀 중심적 듣기위주의 영성이 아니라 총체적인 예전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개발하는 예전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다. 물론 이런 예전적 영성은 개신교라는 독특한 전통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교적 제사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죽은 조상들에 대한 의식으로 성도간의 교제라는 전통이 살아나고, 함께 나눔이라는 성만찬의 의미가 보다 생생하게 체험되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예전적인 영성이 비로소 발전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제사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제사가 여전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사 의례에 포함되어 있는 봉건적인 계급의식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는 않은지, 실제 유교도들은 조상신을 종교적으로 숭배하고 있다고 할 때 조상신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들이 남아 있다. 이점은 계속해서 연구해야 할 필자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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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muel Hugh Moffet, The Christians of Korea (New York: Friendship Press, 1962), 40.



2) 염을 한다거나, 입관, 하관, 발인, 매장, 삼우제, 사십구제, 백일제 등이 이름만 바뀌어 그리스도교에서 그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는가?



3) 유동식, “Culture and Theology in Korea: The P\\\'ung-Ryu Theology\\\" in East Asia Journal of Theology, 3:2/1985, 30.



4) Young-chan Ro, \\\"Ancester Worship: From the Perspective of Korean Tradition\\\" in AncestorWorship, ed. Jung-Young Lee (New York: The Edwin Mellen Press, 1988), 11.



5) 현상윤, 『조선유학사』(서울: 민중서관, 1974), 25.



6)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천안:한국신학연구소, 1994), 164-165.



7) 금장태,『한국유교의 이해』(서울: 민족문화사,1989), 48.



8) 김경재, 앞의 책, 166.



9) 1995년 인구센서스에서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대답한 사람은 남한의 전체인구 44,551,000명의 0.43%인 193,000명에 불과했다. 이것은 공식종교로서의 유교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잘 말해준다. 인구센서스 자료는 http://203.240.190.33/statistics/5/s004.html에서 얻을 수 있다.



10) John Bowker, ed., The Oxford Dictionary of World Religio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445.



11) Young-chan Ro, 앞의 논문, 12-13.



12) 최기복, “카톨릭 신앙과 제사의 의미,” 『그리스도교와 관혼상제』박근원편,(서울: 전망사, 1984), 83.



13) Wi-jo kang, \\\"Ancestor Worship: From the Perspective of Family Life\\\" in Ancestor Worship ed.Jung-young Lee(New Edwin Mellen Press, 1988), 74.



14) 호세 세브리노 끄로아또, 『엑소더스-해방의 해석학』이정순 옮김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5),



15)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천안: 한국신학이야기, 1990), 50.



16) Gardiner M. Day, The Apostle\\\'s Creed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3), 134.



17) George W. Stroup, \\\"Death, Resurrection, and the Communion of the Saints\\\", Reformed Liturgy and Music, XX/4, Fall, 1986, 192.



18) Peter E. Fink ed., The New Dictionary of Sacramental Worship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0), 109.



19) Peter E. Fink ed., The New Dictionary of Sacramental Worship, 110.



20) 성도들 또는 성인들은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신앙적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카톨릭이나 정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복잡한 성인숭배와 이에 얽힌 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21) 박근원 편, 『그리스도교와 관혼상제』, 74-75.



22) Gardiner M. Day, The Apostles\\\' Creed, 140.



23) World Council of Churches,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2), 12.



24)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10.



25) 앞의 책, 10.



26) 위의 책, 14.



27) 앞의 책, 15.



28) Tissa Balasuriya, The Eucharist and Human Liberation (New York: Orbis Books, 1979), 16.



29) 박종천, 『기어가시는 하느님』(서울: 도서출판 감신, 1995), 521-523.



30) 송촨셍,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성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1987), 211-212.



31) 강위조, “제사: 가정의 관점에서” Ancestor Worship,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