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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으라고만 하지말고 믿을 내용을 주라 운영자 2019-03-092022-07-13 11:38
작성자 Level 10

믿으라고만 하지말고 믿을 내용을 주라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적당한 말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일이 나를 위함인 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가 오기 전과 후의 모든 성경 내용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신자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 덕분에 사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승천까지 모든 과정이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잘 알아서 대가를 누릴 수 있어야 구원받은 삶은 실제적인 경험으로 나타나게 된다. 설교자라면 이 분야에서 전문가이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복을 받아 가지겠다는 생각은 단지 종교심이다. 만약 기도이건 선행이건 그것을 함으로 그 수고로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대가이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열심히 하는 만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상 대개 설교자들이 이렇게 가르친다. 이것은 순수하게 율법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일단 신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더 열심히 더 열심히 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율법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잘못이 없다. 단지 인간이 율법의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따르기에 율법적인 믿음에 빠진다. 이 믿음대로 하면 온통 보상심리에 잡혀서 살게 된다. 기도했으니 봉사했으니 바쳤으니 주십시오. 그러자니 그리스도의 공로는 의미가 퇴색된다. 그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개신교 신앙원리의 가장 중요한 면에 들어간다. 성경 전체가 말씀하는 내용은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믿음\"이란 구호가 명백해 지는 것이다. 복 받으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저 받으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 죄의 사함과 성화의 권능을 받는 일, 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와 능력을 경험하는 일, 그 모두가 다 그리스도가 해주셨다고 믿어야만 내 것으로 경험이 되기 시작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나머지는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모두 그리스도가 해주신 것이다.
누구나 믿음 믿음 하지만 정작 무엇을 믿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무조건 될 줄 믿습니다.\"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외치는데 여기에는 보장이 없다. 제 맘대로 믿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믿을 내용이 따른다. 설교자는 믿을 내용을 주어야 한다. 믿음은 지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 주신 일들에 관한 지식\"에서 출발한다.(기독교강요 3.2.6) 그 지식이 없이는 믿을 내용도 없다. 그 지식을 많이 알고 믿는다면 엄청난 능력이 수반된다.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들을 안다면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행위를 따로 떼어놓고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주위에서 믿음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 열심히 교회 나오고 봉사 잘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믿음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니 행위가 좋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행동하라는 말을 강조하게 된다. \"열심히 하십시오. 봉사 잘하십시오. 기도 많이 하십시오. 성령 충만 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고 그저 하라는 설교만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인용해도 율법적인 설교이다.
행위만을 보고서는 절대로 믿음을 판단할 수 없다.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한다면 간디나 공자 같은 분들은 구원을 받았어야 한다.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이해가 아니다. 인간의 눈에 행위가 아무리 완전해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받지 않으신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나타나는 차원 높은 윤리를 자신의 힘으로는 행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선행을 원해도 힘이 없다고 탄식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인데 아무리 선행하라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본성부터 수준 이하이다. 이성을 향해서 간음을 안하고 살인을 안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성을 참으로 자매처럼 형제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내 원수를 향해 순수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가? 이 수준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럴 수 있었다.
인간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죄성이다. 모두 악하기에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기에 괴로운 것이다. 세상에 올바로 되어 복받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포한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 상황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선행을 통해서 자기 힘으로 구원이나 복을 받겠는가!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복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 수준의 의를 행해 주었으니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을 모셔들여서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공로가 다 내 것이 되고 그의 능력이 다 내 힘이 된다는 기가막힌 소식이 아닌가!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믿으라고 하지만 말고 믿을 내용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 믿음이 곧 행동으로 나타난다. 누가 멋진 의복을 두고 누더기를 입을 것인가? 누가 아름다운 음식을 두고 쓰레기통을 뒤지겠는가? 믿을 내용을 주자. 그러면 믿는다. 그것도 없이 믿으라고 외치는 것도 율법적인 설교이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말하라. \"주께서 내 속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 분의 능력이 내 능력임을 믿으십시오.\" \"그 분이 항상 돌보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내 몸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요 내가 작은 그리스도임을 믿으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니 내 속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재미있게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설교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복음의 내용이 자리 잡아서 생각이 바뀌게 하라.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자꾸 복음적인 말씀을 받으면 예수나 바울처럼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려면 설교자부터 의식구조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설교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설득시키라. 그러면 확신이 선다. 그리고 복음의 경험이 일어난다. 그 경험을 예화로 말하게 된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확신이다. 복음적 확신의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하늘의 재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