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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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청중의 입장에서 듣는 설교 운영자 2019-03-092022-07-13 11:42
작성자 Level 10

청중의 입장에서 듣는 설교


존 쾨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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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시카고에 소재한 무디 바이블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이다. John Koessler, \"A View From the Pew: Lessons About Preaching From the Other Side of the Pulpit,\" Preaching, July/August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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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간에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기침 소리, 아기가 보채는 소리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나는 차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까지 들린다. 또한 청중들은 지난주에 있었던 일들에 여전히 신경을 쓰거나, 아니면 주일 예배 후의 바쁜 스케줄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도 하다.
또한 바이올라 대학교의 커뮤니케이션 교수인 톰 내쉬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보통 사람은 1분에 120-150 단어를 말하는데, 이것은 책을 천천히 읽는 사람의 속도 보다 두 배나 느린 것이며, 책을 빨리 읽는 사람의 속도보다는 20배나 느린 것이라고 한다. \"즉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는 우리의 두뇌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의 95%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설교 시간에 청중들이 다른 데 정신을 팔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두뇌가 쉬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청중들이 앉은 자리가 이처럼 산만해지기 쉽다면,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청중의 주의를 끌어야만 한다. 청중이 계속해서 설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설교 내용이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설교 방식에 있어서도 청중의 응답을 유도할 수 있어야만 한다.

1. 선포할 진리를 분명히 말하라

오늘날의 청중은 텔레비전에 매우 익숙해 있다. 텔레비전의 연속극이나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시각적으로 분명한 이미지를 줄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15분 혹은 30분 이내에 단순한 줄거리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특히 광고 방송은 30초 동안에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군더더기 설명이나 해설은 끼일 여지가 없다. 윌리엄 윌리몬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텔레비전 방송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흥미 위주 문화는 \"해설이나 이해, 혹은 강해를 경멸한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청중들의 태도를 결정짓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문화적 경향에 따라 설교 역시 짧고 이야기식이며,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정서적이며, 설교의 요점을 하나의 명제로 분명히 제시하기보다는 명제 없는 설교를 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참된 의미의 성경적 설교는, 아무리 그 구조가 이야기식 설교라 할지라도, 그 핵심에 있어서는 분명하게 명제를 밝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4:2; 엡 1:13; 4: 21; 골 1:5; 살후 2:13; 딤전 2:4; 3:15; 4:3 등).
이런 점에서 설교의 첫 번째 단계는 설교의 핵심적인 명제를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청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가 무엇인가? 청중이 그 진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텔레비전이 오늘날 청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설교를 보다 \"들을 만 한 것\"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성경적 내용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설교의 메시지는 명제적 진리에 분명하게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진리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2. 그림을 분명히 그려야 한다

성경 본문만 읽고 그 본문과는 별로 상관도 없는 다른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거나, 아니면 설교 예화를 인용하면서 다른 사람이 이미 사용한 예화를 반복하는 것, 혹은 복음에 대한 진부한 상투적 표현을 되풀이하는 것 등은 일종의 \"언어 주술\"(word magic)을 부리는 것과 같다. 즉 신학적 진리들과 성경 구절들을 청중에게 읊어 댐으로써 그들의 응답을 유인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명제적 진리는 설교의 기초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설교가 \"주술\"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설교를 통한 청중의 변화가 주로 그 내용을 인식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그릇된 생각 때문이다. 즉 성경 말씀을 이해하면 사람들은 자기의 핵심적 가치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가 설교한 진리를 이해하고 수긍하면서도, 계속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며,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여전히 그 진리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문제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하는 인식(認識)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동기(動機)의 문제인 것이다.
시각적 언어와 은유(metaphor)는 이처럼 인식과 동기 사이의 간격을 메워 주는 교량 역할을 한다. 워렌 위어스비가 설명한 대로, 우리가 은유를 접하게 되면, 잊혀진 경험들과 감정들이 되살아남으로써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이제 알겠다!\"고 말하고, 우리의 가슴은 \"이제 느끼겠다!\"고 말한다. 바로 이 순간 우리의 상상력이 이 둘을 하나로 합하여,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은유는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데, 은유가 다양성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은유는 인간 이해의 핵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역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핵심적 가치관을 변화시키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야기들은 무엇보다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학에는 관심이 없어도 실제적인 삶의 이야기에는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 이야기의 문제, 상황, 주인공들의 감정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파고 들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거의 1/3 이 이야기 형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설교하시면서 항상 은유와 이야기들을 사용하셨다.
개인적인 체험담이나 이야기는 청중이 다른 데 정신을 팔지 않도록 만든다는 점에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3. 일반적 적용과 구체적 적용

은유, 이야기, 시각적 언어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설교 메시지의 핵심인 명제적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밝히는 데 봉사해야만 한다. 선포하고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고, 예화를 통해 설명한 후에는 그 진리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끌어내야만 한다.
예수님은 설교를 통해 생활에 적용하는 문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제자들에게 명제적 진리와 은유적 행동을 모두 포함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신 후에,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요 13: 17)고 약속하셨다. 설교의 궁극적 목표는 실천이다. 청중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해야 한다. 청중이 말씀에 응답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청중들 자신의 상황 속에서 그 응답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이 과제를 위해서 설교자는 강대상에 서기 이전에 청중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
말씀의 적용 문제에 관하여 나는 종종 두 개의 극단적 입장 사이에서 씨름한다. 나의 적용이 너무 일반적일 경우에는 청중들이 그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할 책임을 느끼지는 않게 된다. 나단이 다윗 왕에게 비유를 들어 설명했을 때까지는, 나단이 말한 죄에 대하여 다윗 왕이 분개하였지만 그것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단이 그 말씀을 적용시키는 단계로 나아가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자 비로소 다윗 왕은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삼하 12:1-14).
반면에 나의 적용이 너무 구체적일 경우에는, 청중들은 내가 예로 들은 구체적인 상황과 자신들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구체적 사례(case)를 통한 적용 방법으로 예수님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 즉 바리새파와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빠져나갔던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친숙한 진리들이 너무 구체화되어 버림으로써 그 친숙한 진리들의 배후에 있는 일반적 원칙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반면에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적용시키게 되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어, 그 본래의 정신은 사라지고 율법의 문자적 조항만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효과적인 말씀의 적용은 일반적인 동시에 구체적인 것이어야만 하며, 무엇보다도 청중의 현실 생활과 상관성이 있어야 한다.
히브리서 2장의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나는 교인 가운데 암으로 죽어 가고 있는 여인을 생각했다. 성육신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을 해방시키려고 한 것입니다\"(히 2: 15)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그 여인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상투적인 문장들을 여러 줄 써내려 갔다.
그 순간 내 속에서 \"그 여인이 이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만일 암으로 죽어 가고 있다면, 나의 이런 설교를 듣고 나는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그 다음 질문은 더욱 곤혹스러웠다. \"너는 그것을 믿고 있는가?\" 나는 그것을 신앙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내 개인적인 경험의 문제로는 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기독교인으로서도 종종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내 설교의 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투적인 말들 가지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교인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들은 내가 상투적인 말들을 통해 단지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나 자신의 공포를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 성경 본문을 가지고 정직하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암에 걸려 죽어 가고 있는 그 여인 곁에 앉아 얼마간 시간을 보내며, 죽음에 대한 나 자신의 공포를 직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환자가 되어야만 한다. 영혼의 의사가 되고자 하는 설교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