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료실

CYBER SCHOOL OF THEOLOGY

설교 자료실

제목 설교 논지에서 설교까지(1) 운영자 2019-03-092022-07-13 11:37
작성자 Level 10

설교 논지에서 설교까지(1)  




이제 논지에서 설교까지 작성해 보자. 창 22:6∼14를 가지고 두 개의 설교를 만들어 보았다. 하나는 예배에 집중하였고 또 하나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설교

사도바울이 늘 하신 말씀대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쳐졌으나 살아서 제단을 내려온 이삭에서부터 유래된다. 그는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그래서 산제물이 되었고 평생 산제사로 삶을 보냈다.

1단계
제목 : 산제물
논지 : 예배에서 자신이 산제물임을 확인한다.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3) 예수는 우리의 양이다.

2단계
제목 : 산제물
논지 : 예배에서 자신이 산제물임을 확인한다.
도입부분 :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죽는 심정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 모든 종교가 제물은 죽인다. 아벨도 죽음으로 제사.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원하신다. 그는 죽어야 한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목숨이다. 자신이다. 아들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은 이삭을 받고 양을 대신 죽인다. 이삭은 살아서 내려온다.
3) 예수는 우리의 양이다 : 양이 대신 죽음으로 이삭은 살았고 산제물이 되었다. 그는 평생을 통해서 산제사를 드린다. 예수를 양으로 대신 드렸다면 우리도 이삭이다. 산제물이다.

3단계

산제물

예배하면 생각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예배하러 가는 것이 곧 설교 들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늦게라도 와서 설교만 듣고 나면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설교가 감동적이면 예배를 한 느낌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예배에 참석한 것 같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오해이다.
예배는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신학교 다닐 때 너무나 반복되는 예배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기숙사에 그냥 앉아 있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영어 단어라도 더 외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선배 한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 \"예배하러 가지.\" 안가겠다고 하자, \"무슨 소리야 목사 되겠다는 사람이. 어서 가자고.\"
이 말은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그렇다. 예배는 목사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신자로서 가장 열심히 해야할 일이 아니었던가. 이스라엘인들은 예배를 목숨처럼 생각했다. 어떤 때는 적군이 안식일에 쳐들어 왔다. 적이 공격하는데도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고 몰살되기까지 예배는 계속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특별한 백성들이었다.

1) 제사는 죽음으로 시작된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배를 목숨 걸고 하였다. 박해시에 신자들은 경찰이 예배 장소를 알고 있으며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를 중단하지 않고 약속한 장소에 나타났다. 이제 이 예배는 세상에서 마지막 드리는 것이다. 그들은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예배는 참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의미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곧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반드시 생명이 끝나야 했다. 죄악된 인간의 모든 것은 거기서 그친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이들의 생명을 거두신다. 본래 주셨던 모든 것도 거기서 거두신다.
이 예배는 창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아들인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다. 양을 잡아서 그의 피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곧 그의 제사는 죽음과 연결되었다. 질투한 형 가인은 그를 들로 유혹해서 돌로 쳐서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피는 제물이 되어 소리쳤고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받아들여졌다.
이방의 종교에서도 예배는 가장 거룩한 것이었다. 언제나 무슨 일을 할 때 제사를 드렸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없었다. 가장 좋은 제물은 인간이었다. 아름다운 처녀나 총각이 드려졌다. 그들은 죽어야만 했다. 칼로 그들의 심장을 도려내어 신에게 드려졌다. 신은 그들의 피를 받고 만족해하면서 예배하는 이들에게 복을 내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듯 인간을 제물로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었다. 인간의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단지 인간의 상한 심령을 받기를 원하셨다. 인간이 죄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죄악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주어져야만 했다. 세상 신과 다른 점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엇을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죄악에 물들어 있을 뿐이다. 처녀고 선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었다. 근본적으로 저주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인간은 죽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치고 다시 만들어져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물을 죽이신다.

2)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다. 아들을 낳을 수 없는 그에게 그것도 백살이나 되었을 때 귀한 아들을 주신 것이다. 그 아들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조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그 아들도 죄악의 사람이었다. 그대로는 하나님이 사용할 수 없었다. 누구나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허물로 죽어야만 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잡아서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듣는다. 이미 아브라함은 살만큼 다 살았다. 이제 그 아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생명도 그치는 것이었다. 하루 밤 사이에 아브라함은 완전히 죽음을 문턱에 둔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계속 하나님으로 경배해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고 세상으로 돌아가 버릴까?
여기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줄 하나님이 모르셨던가? 아니면 아셨던가? 만약 몰랐다면 신이 아니다. 점쟁이만큼도 못한 신이다. 분명히 아셨다. 알면서 왜 그렇게 시험하는가? 고통을 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아들은 이 과정을 통과해야 성장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목에 댔다. 이제 그들은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중단될 것이었다. 이제 아브라함은 무엇보다도 존귀한 하나님께 순종해서 가장 귀한 보물을 바친다. 축복보다 축복의 근원을 선택한 것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은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의 모든 것은 그쳤다. 죄악도 옛 사람도. 인간 누구나 가진 악하고 간교한 성품도 그쳤다. 병이 있었다면 병이 그쳤고 슬픈 문제나 고통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도 끝났다. 모든 인간적인 한계는 여기서 그치고 있었다. 이삭은 푸른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믿었다.
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중지시켰다. \"그만! 그것이면 족하다. 내 앞에서 자신을 바치는 그 마음이면 된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신에게 드릴 제물을 주셨다. 멋진 양 한 마리였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양의 목을 따고 피를 쏟으면서 자신들이 죽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양의 몸을 태우면서 자신들이 태워지고 없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의 제단에 올라갔다가 살아서 내려온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밖에 없다. 이들은 남은 여생을 산제물로 살았다. 그들은 때때로 양을 잡아서 같은 의식을 반복해 예배했다. 이들은 모든 신자의 모습이다. 신자들은 이들과 경험을 함께 한다. 우리는 이삭처럼 죽으러 여기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옛 것이 다 함께 죽는 것이다.

3) 예수는 우리의 양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면서 함께 그를 죽이는 경험을 한다. 그는 우리 대신 제물이 되었다. 그는 완전한 제물이었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는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동일시된다.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저주도 함께 죽는다. 미움과 한과 근심과 걱정과 고통거리도.
그리스도 곧 우리 양의 죽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들은 그의 살아나심과 자신을 역시 동일시한다. 그리스도 우리를 대신해 제물 되신 이 그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 부활이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믿음으로 안다. 새 생명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안 느껴져도 그렇게 행동한다.
예배는 이러한 경험을 재현한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환상은 무서운 것이었다. 성전 안에는 거룩한 연기로 가득 차고 여호와의 옷자락은 그 안을 덮었다. 천사들의 찬송가는 성전 문지방을 흔들리게 하였다. 그 광경은 너무도 무서워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죽은 자처럼 되었다. 그 이후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일어났다.
이것은 단순히 죽고 사는 경험이 아니다. 이렇게 영원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산다. 죽어야만 다시 사는 것이다. 성품을 고치고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 죽어 모든 것은 그쳤다. 이제 전혀 새로운 삶을 받은 것이다. 차츰 강해지고 귀해지는 게 아니다. 이미 부자요 왕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제물로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서 나가는 것이다. 새 생명의 사람이다.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것은 거룩해진다. 하나님께 바쳐진 우리도 거룩해진다. 이 경험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예배 의식을 통해서 죽고 다시 산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우리를 죽이고 살린다. 기도도 찬송도 헌금도 사도신경도…….
산제물이라는 신앙 고백은 반복되어야 한다. 산제물이 악하고 더러운 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 속이고 거짓말하겠는가? 그는 죄를 향해 죽고 축복을 향해 일어난다.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너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스스로를 설득하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득하라. 이삭의 경험이 곧 내 경험이다. 나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살아 내려온 존재이다. 나는 하나님께 드려진 산제물이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내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도 제단에서 죽었다. 나의 죄와 병과 모든 악한 것들은 다 그쳤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다. 하나님의 축복 그 자체이다.
이제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오는데 우리는 마음과 몸을 정돈해야 한다. 시간을 지켜야 한다. 의복을 잘 고르고 엄숙한 마음을 가지라. 모든 예배 순서를 죽고 사는 문제로 대해야 한다. 예배는 신자들에게 가장 우선할 일이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예배를 기뻐하라.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훈련은 온 정성과 뜻을 다해 반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명령하신다.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사 66:23) 우리는 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에 의해 죽고 다시 사는 훈련을 한다.